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중얼거리는 사람 / 정병근

by 丹野 2023. 8. 27.

중얼거리는 사람

 

   정병근

 

 

부유음(浮游音) 한 소절이 종일 뇌리에 붙어 다닌다

그것은 끓고 있는 죽 같고 뚜껑 없는 냄비 같다

 

다 퍼낸 바닥에 고이는 물처럼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가 툭 튀어나온다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다음을 기약하는 말끝에 속말이 따라붙는다

 

쳐다보는 표정 뒤로 눈이 숨는다

너의 말을 내놔라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어요

몸 안에 말이 있다고 눈을 껌벅이며

울먹이던 사람을 보았다

 

가지가 몽땅 잘린 나무둥치의 옆구리를 뚫고

툭 튀어나오는 꽃처럼

목구멍을 기어 나오는 선충들처럼

잘린 곳에 실가지가 무수히 뻗어 나온다

 

다 게우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말의 뒤통수에 미운 말이 들끓는다

 

곡을 끝낸 상주는 한 번씩

음, 음, 하고 자신의 목청을 확인한다

말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죽은 몸에서 나온 벌레들이

사방으로 빠르게 흩어지며 사라진다

그 많던 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이 고이기 시작한다

 

 

 

 

비의 끝

 

정병근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아는 사람

 

내가 꿈에서처럼

 

걱정 없이 행복할 때

 

당신은 잠시 소꿉을 접고

 

안 보이는 곳에 가서

 

홀로 울고 돌아오네

 

 

 

 

 

 

나는 해롭다

 

정병근

 

길 모서리 공터에

버려진 것들이 모여 있다

담배 곽 꽁초 호스 뭉치 목장갑 한 짝

드링크 병 마른 강아지풀 섶

 

죄는 누가 짓나

죄는 누가 주나

 

비닐봉지를 들고 가는 뒷모습을

오래 보는 것은 눈에 해롭다

 

밤에 휘파람을 불며 발톱을 깎고

북쪽에 머리를 두는 것은 해롭다

발을 포개고 TV를 본다 해롭다

 

내게 복은 누가 주나

나는 다리를 턴다 신발을 접어 신고

방금 나무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뒤통수에 깍지를 낀다

 

해로운 사랑은 끝없이

머리를 맞대고 단것을 먹는다

우리의 죄는 누가 사해주나

 

나무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내일을 다짐하는 나는 해롭다

잠 없는 밤을 헤매는 나는 해롭다

 

 

 

너라서

 

정병근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어서

나는 얼마나 벅찬지

모를수록 너는 내 눈에 낯설고

그 설레는 미지

너는 더없이 순정하고 달콤한 오해

 

나날이 기뻐서 기약하는 말은

야속한 이별의 내막이 될 테니까

대답을 조심해야지 백 번의 마음으로

어제와 오늘을 순순히 고백한다

 

목을 젖히며 웃는 너를 볼 때

계시처럼 무엇을 알고 있는 내가 두려워

아무 일 아닌 듯 안경에 티나 닦으면서

그것은 먼 일일 테니까

 

너와 있는 날은 기쁘고 서러워서

나는 한순간에 다 살고 돌아온 마음으로

너를 자꾸만 모르려고 애쓴다

 

총명한 눈의 표정으로 너는

내게 말을 던지고 말을 채근하고

다른 곳을 쳐다보며 나는

네가 너라서 얼마나 좋은지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 2023. 3

--------------------

정병근 / 1962년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 2001년 《현대시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눈과 도끼』 『중얼거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