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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겹벚나무를 베다 / 김명기

by 丹野 2023. 9. 16.


겹벚나무를 베다

김명기

아버지가 산자락 개울가에 집을 짓고
삽자루 같은 묘목을 심은 겹벚나무
허벅지보다 더 굵게 자라는 동안
봄 한철 분홍 솜뭉치처럼 피는 꽃이 보기 좋았다

이십 년 넘는 동안 나무는 다부지게 자랐지만
그런 몸을 불리느라 굵어진 가지가
바람 심한 날이면 지붕을 두드리거나
창문을 긁어댔다 꽃이 좋았던 나무는
날이 갈수록 근심과 함께 커갔다

꽃 지고 물이 올라 이파리가 손바닥만 한
나무를 쳐다보다가 지붕 위로 자란
단단한 나무 중동을 베어내기로 했다
사다리에 올라 톱날을 밀어 넣자 마디를
벌리며 살아내느라 옹골진 삶이
톱날을 쉽게 받지 않았다

꺾이지 않으려 톱날을 물고 버티는 나무를
힘주어 잘라내며 톱날 같던 불온과 불운을 견디던
시절을 생각했다 나무나 사람이나 절정의 순간을
무너뜨리기란 쉽지 않았다

베어낸 나무를 토막 내기 위해
그늘에 며칠 말렸다 진이 빠진 나무는
서서히 눈목이 마르고 잎이 시들었다
그제야 나무는 가만히 톱날을 받았다
한 생이 진다는 것은 악착같이 버티고 견디다
순해지는 일 어느 순간 나도 생의 마지막 톱날을
순순히 받는 날이 올 것이다

-시산맥 2023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