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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르네 샤르의 생애 및 작품세계

by 丹野 2012. 1. 6.

 

 

 

르네 샤르의 생애 및 작품세계



■ 르네 샤르René Char 1907 ~ 1988]의 연보年譜

1907년 6월 14일 남불 프로방스 지방의 작은 마을인 릴 쉬르 소르그에서 집안의 막내로 르네 샤르 탄생.
1918년 1월 15일 55세의 나이로 아버지 에밀 샤르 별세. 샤르가 11살 되는 해에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 후 시를 통해 되살아난다.
1927년 님므에 있는 부대에서 포병으로 1년 반의 병역을 시작. 이 기간에 잡지의 출판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1928년 15세에서 19세까지 써놓은 시들을 모아 시집 <마음의 종소리>를 엮음.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 대부분은 시인 자신에 의해 파기된다. 그러나 그중 몇 편은 남아 1946년에 <초기의 충적토>로 출판된다.
1929년 릴 쉬르 소르그에서 앙드레 카야트와 함께 잡지 <자오선>을 출판. 3호 밖에 발간되지 않은 이 잡지에 르네 샤르의 시 몇 편이 실린다.
1929년 8월 님므에서 시집 <병기창>을 출간. 이 시집 한 권을 당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해 있던 폴 엘뤼야르에게 보내면서 르네 샤르는 그와 각별한 우정을 맺는다. 11월 말에 파리로 올라간 샤르는 브르통, 아라공, 크르벨을 만나고 초현실주의 혁명호의 제작에 참여한다.
1930년 4월 님므에서 <비밀들의 무덤> 편찬. 이 시기에 샤르는 독서를 통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헤라클레이토스를 알게 되고, 또한 연금술사들과 로트레아몽, 랭보를 만난다. 엘뤼야르, 브르통과 함께 쓴 시들을 모은 <천천히 공사 중>을 출판. 7월에 아라공, 브르통, 샤르, 엘뤼야르가 모여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를 작성.
1931년 7월 시집 <정의의 행동 소멸하다>를 초현실주의 출판사에서 출간.
1932년 파리에서 조르제트 골드스타인과 결혼.
1934년 7월에 <주인 없는 망치> 출판. 이후 샤르는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점차 멀어진다.
1935년 낙향. 샤르는 아버지가 경영했던 석고갱 주식회사의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초현실주의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실린 사적인 편지가 르네 샤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뱅자맹 페레에 의해 공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36년 4월에서 6월까지 패혈증으로 아비뇽의 병원에 입원. 알프스 남부의 작은 마을 세레스트에서 회복기를 보낸다. 12월 말 <첫 풍차>를 출판.
1937년 5월 샤르는 보클뤼즈 석고갱 주식회사의 사업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7월 크리스티앙 제르보가 이끄는 잡지 <예술 수첩>에 몇 편의 시를 게재. 스페인 전쟁으로 인해 희생을 당한 어린이들을 애도하며 <등교 길을 위한 작은 시집>을 12월에 출판.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공. 5월 <바깥의 밤은 지배당하고> 출판.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 샤르는 님므의 포병부대에 소집되어 알사스 지방에 배치된다.
1940년 독일의 파리 침공. 프랑스 군대의 해체로 릴 쉬르 소르그에 귀향한 샤르는 곧 비시 정권의 경찰에 쫓겨 세레스트에 은둔한다.
1942년 알렉상드르라는 가명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
1943년 드골이 알제리에 창설한 공수특전대의 바스잘 지역대장으로 임명된다.
1944년 심한 부상에서 회복된 후 알제의 북아프리카 연합사령부로 전속된다. 8월 말 파리 해방.
1945년 2월 <유일하게 머물러 있는 것들> 출판.
1946년 전쟁 기간 동안 써두었던 짧은 글들을 모아 <힙노스 단장>을 출판.
1947년 시집 <분시噴詩> 출판.
1948년 시집 <분노와 신비> 출판.
1949년 희곡 <클레르>출판. 조르제트와 이혼.
1950년 시집 <아침에 오는 것들> 출판.
1951년 7월 어머니 별세.
1952년 11월 오랜 친구인 엘뤼야르 사망.
1953년 이탈리아 작곡가인 몬테베르디의 작품을 시로 바꾸어 <레테라 아모로자>를 갈리마르에서 출판.
1954년 <뱀의 건강을 위하여> 출판.
1955년 <바닥과 정상의 탐구> 출판. 피에르 불레즈가 샤르의 주인 없는 망치에 실린 세 편의 시로 작곡. 하이데거와 만남.
1962년 <말의 열도> 출판.
1964년 <보편적 현존> 출판.
1965년 <시원회로始源回歸> 출판.
1972년 시화집 <부적의 밤> 출판.
1977년 <발랑드란느>의 노래 출판.
1983년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야드 총서로 <르네 샤르 전집> 출판.
1985년 <화가 반 고호의 이웃들> 출판
1987년 10월 마리 클로드 드 생센느와 결혼.
1988년 2월 심장마비로 사망. 5월 <어느 혐의자에 대한 찬가> 출판.




■ 르네 샤르René Char 1907 ~ 1988의 생애


랭보와 로트레아몽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자로 출발하였다. 1929년《병기창兵器廠》을 출판했다.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A. 브르통과 P. 엘뤼아르의 공저共著로 《일을 지연시키다1930》를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시집에 《아르틴1930》《자루 없는 망치1934》가 있다.

1934년까지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르네 샤르는 형이상학적이며 자신의 스타일로 시를 썼기 때문에 난해하다. 대체로 다작이었으며 후기시後期詩는 주로 산문시를 썼다 독일군 점령 당시 레지스탕의 사단장으로 대부대를 지휘했다. 1945년 이후 20여 권의 시집을 냈다.

C. 로트레아몽과 J. 랭보를 좋아하였으며 그리스의 철인 헤라클레이토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대독對獨 저항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때의 체험은 산문시 《이프노스의 수첩1946》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다른 여러 작품과 함께 시집 《분노와 신비1948》에 수록되었다.

《잠이 든 신의 글1946》은 저항기의 귀중한 시적詩的 유산이 되었다. 전후에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응축되고 간결한 시구로 이루어진 경질적硬質的인 작품을 만들어 M. 미쇼와 J. 프레메르와 나란히 프랑스 현대시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전후戰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생활했다. 생명감과 인간신뢰가 넘치는 독자적인 우주적 세계를 창조하였다.

시집으로 《부서진 시》《일찍 일어나는 사람들1948》《내벽內壁과 초원1952》《연문戀文1953》《기점과 정점을 찾아서1955》《공통의 현존現存1964》《화가 반 고호의 이웃들1985》등이 있다




■ 주요작품



* 지름길 / 르네 샤르

그가 잘 다져놓은 언덕은 억수처럼 그의 등속으로 비탈져 간다. 가난한 말들이 그에게 인사한다. 풀밭 노새들도 그를 반겨 맞는다. 수레 자국의 장미 빛 얼굴은 그를 향하여 자기 거울 물결을 두 번 굴린다. 심술스러움도 잠들어 있다. 그는 전에 몽상했던 그대로 존재한다.



* 어떤 여인들은 / 르네 샤르

어떤 여인들은 파도와 같다. 그녀들의 젊음을 모두 바쳐 솟구쳐 올라 도저히 되돌아올 수 없는 높이의 바위를 뛰어넘고 만다. 이후 그렇게 생긴 물웅덩이는 거기 그렇게 포로처럼 괴어 있을 것이다. 서서히 물웅덩이의 생존의 흔적으로 남게 될, 물 속에 포함된 결정체가 섬광을 반짝이며 아름답게 포로처럼 괴어 있을 것이다.

어떤 여인들인가, 굵은 소금 등에 쳐 바르고 일생일대의 솟구침을 준비하는 그녀들은? 고통은 그녀들의 입이 닫히지 않도록 마른 나뭇가지로 버텨 주고, 외로움 잘 타는 그녀들 비닐 끈으로 함께 엮어 주었다. 그녀들의 등에서 간간이 떨어지는 소금 알갱이가 그녀들 가슴에서 나왔다면, 그녀들이 매달린 쇠기둥 녹슨 대못도 그녀들 자궁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여인들인가, 몸부림 쳐도 떨어지지 않는 그 날의 파도 비늘 몇 장으로 꽂아 두고, 희멀건 동공瞳孔으로 흐린 하늘을 셈베이 과자처럼 말아 올린 그녀들은



* 졸음의 신의 수기抄 / 르네 샤르
- 아르베르 까뮈에게

5. 우리는 아무에게도 종속하지 않으나, 단 하나의 예외는, 우리에게는 미지의,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저 등화燈火의 빛의 점이다. 그것은 용기와 침묵을 깨운 채로 놓아둔다.

44. 빛이여, 눈雪이 눈을 기다리고 있다. 단순하고 순수한 일을 위해,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46. 행위는 처녀이다, 비록 되풀이 되더러도.

48. 두렵진 않다. 현기증이 날뿐. 적과 나의 거리를 좁혀야한다. 적과 수평으로 대결하는 거다.

62. 우리가 이어 받은 건, 아무 약속도 내세우지 않는다.

73. 오늘 밤 한 마리의 귀뚜라미가 울고 있는 풀 밑 땅을 믿는다면, 출생 전 삶은 아주
기분 좋은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114. 나는 동의의 시 같은 거 쓰지 않을 것이다.


* 2차 대전 중 저항운동 시절의 시작으로 주목을 끌었다.『졸음의 신의 수기1946』에서 인용. 'Hypnos'졸음의 신이란 저항운동에서 쓴 시인의 암호명. 전후엔 고향 보클뤼에서 시골의 벗들과 어울려 살며 주로 헤라클레이토스 풍의 잠언 또는 영상적 시작을 했다.



* 화가 반 고호의 이웃들 / 르네 샤르

내가 반 고호의 이웃으로 끼여들기까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실 말하자면 쌩 르모아의 몇몇 사람들은 그가 맺고 끊는 데가 희미하고 정신이 이상한 화가라고 하였다 그는 밤을 새워 돌아다니고 별똥별이 떨어지는 삼나무 숲에 들어가 버린다던가 또는 거추장스러운 이젤에다 화구와 마구 묶은 캔버스들을 들고 프로방스 지방 특유의 바람을 휘몰아 끝까지 헤매었다 이러한 형세로 위험지구 몽마쥴 폐허 쪽을 파고들었다 아르르와 레보 지방은 말할 것도 없이 르노 강 쪽으로 걸친 시골풍경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방황의 현장이었다 동시에 두 눈과 적갈색 머리털 외국인 화가의 작업장이기도 했다 그 것이 사실적으로 그러하였던 것을
사살은 얼마 뒤에 가서야 그에 대한 이야기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아르르의 빈민굴 단골손님은 그라낭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곳, 다시 말해서 신축중인 쌩 뽈드 모졸 요양원에 수용키로 되어있는 합법적인 사람이다 그 설계로 보아서 처음부터 산중에 짓기로 되어 있었다 이미 그것을 안 반 고호가 캠퍼스에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그려 놓았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면 나는 안다 그가 그때 우리를 위해 어떻게 힘들여 그렸는지를 그는 떠도는 이야기와 달리 참말로 시간과 공간의 힘을 빌리지 않았던가
매미의 복부에 비유되는, 이 지방이 한 사람의 손과 손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반 고호는 어떤 불가마에서 또는 천국에서 나타났을까 그 무슨 고통으로 해서 이 조약돌, 불꽃과 늪지대를 그리고 이 좁은 길, 농가들이며 보리밭이며 포도밭이며 또 강물을 그렸을까
구도가 그처럼 훌륭한 것이, 오랜 뒤의 일이지만 내 인생이 또한 여러 불행의 창살 사이에 오그라져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 내가 알아차렸을까 내 나름의 반 고호가 그의 진실과 새로운 꽃을 생동케 한 눈길 깊이와 그 무엇과 나의 가누지 못해 흘러내리는 눈雪으로 멍든 두 눈을 바꾸었으면 했다 그러나 내가 귀여워 해온 개도 내 목소리를 다시 듣지 않으려고 어디론가 가버렸으니 이 땅에선 사람의 다음 운명에 대하서 이렇다 말할 수 없는 법이다.




■ 참고자료



*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 / surrealisme


초현실주의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고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탐구하여 기성 미학과 도덕에 관계없이 표현의 혁신을 꾀한 문학과 예술 운동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前衛的) 문예운동이다. 1917년 시인 G. 아폴리네르가 그의 부조리극 《티레지아의 유방》을 초현실주의극(超現實主義劇)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924년 이 운동을 주도한 A.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명칭이 보편화되었다. 합리성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반(反)예술운동인 다다이즘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부정적 또는 파괴적 태도는 거부하고 적극적 표현과 창조적 태도, 내적 생활충동의 표현을 강조하였다. 과거 유럽 정치과 문화를 이끌어온 합리주의에 내재된 폭력과 억압이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역과 상상력의 해방을 제창하였다. 기괴한 주제나 꿈, 환영(幻影), 무의식의 시각 등을 이용하여 낯익은 사물들을 비논리적 관계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현실의 관습적 이해가 가진 피상성(皮相性)을 폭로하려 하였다. 이런 이념 아래 초현실주의가 일으킨 기법상의 혁신은 현대 미술, 시, 소설, 연극, 영화 등 여러 분야에 폭넓은 영향을 주었다.

문학에서 초현실주의는 C. 로트레아몽의 시편에 나타난 환상적 이미지를 비롯하여 C. 보들레르 J.N.A. 랭보 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20년 브르통과 P. 수포가 함께 출간한 시집 《자기장(磁氣場)》이다. 이 작품에서 그들은 반각성(半覺醒) 상태에서 의식의 통제 없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기록하는 <자동기록(自動記錄)>의 방법을 실험, 초현실주의 이론의 한 기초를 제시하였다. 1922년 브르통을 비롯한 L. 아라공, P. 엘뤼아르, 수포, R. 데스노스, B. 페레, R. 크르베르 등 여러 젊은 문인들이 모여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24년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제1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초현실주의 연구센터가 설치되고 기관지 《초현실주의 혁명(1924~1929)》이 발간되는 등 초현실주의 운동은 그 뒤 수년간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구두(口頭), 기술(記述), 그 밖의 가능한 방법으로 사고(思考)의 진실한 과정을 표현하려는 마음의 순수한 자동작용(自動作用)>이라 정의된다. 즉 이성과 논리로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가능한 한 참되게 표현한다. 이 잠재된 세계와 일상의 합리적 세계를 결합시켜 절대적이고 통일적인 현실 곧 <초현실>을 창출해내는 것이 이 운동의 목표였다. 여기서 <초현실>이란 현실을 초월한 피안(彼岸)이나 반(反)현실이 아니라, 현실 부정이 매개가 되어 발견되는 보다 고차원적 현실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초현실주의는 단순한 문학상의 운동이 아닌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일적 전망을 추구한 일원론적 사상이었다. 이와 같은 세계관과 인생관의 실현을 위하여 초현실주의는 상상력의 복권(復權), 꿈과 광기(狂氣)와 초자연 현상의 재검토, <자동기록>에 의한 언어의 해방 등에 주력하였다. 여기서 비합리적 인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은 것은 S.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초현실주의 운동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중요한 성과를 얻은 시기는 1930년대 초까지이다. 이때의 주요 작품으로는 아라공의 《파리의 시골뜨기(1926)》 《문체론(1928)》, 엘뤼아르의 《고뇌의 수도(1926)》, 브르통의 《나자(Nadja, 1928)》 등이 있다.

초현실주의는 처음부터 인생의 변혁과 함께 세계의 변혁을 운동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당시 변혁의 실질 세력이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정한 입장 정리가 불가피하였다. 따라서 1929년 브르통은 정치적 또는 도덕적 문제를 주로 논의한 《초현실주의 제2선언》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唯物史觀)과 초현실주의 이론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강령과 조직운동에 반대하고 정신의 절대적 자유와 내면 세계의 우위성을 명확히 하였다. 이 선언 발표 뒤 현실 정치에 참여한 수포, 데스노스, A. 아르토 등이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된다.

1930년 공산당에 가입한 아라공이 브르통과 결별하였다. 1936년 에스파냐내전이 일어나자 엘뤼아르가 참여시인으로 입장을 전환하는 등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기관지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1929~1933)》가 새로 발간된다. 엘뤼아르의 가장 초현실주의적 시집 《민중의 장미(1934)》, 브르통의 산문작품 《통저기(通底器, 1932)》 《광적인 사랑(1937)》이 나오는 등 일정한 성과는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브르통과 다른 주요 인물이 미국으로 망명함으로써 운동의 중심은 잠시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졌다.

운동의 소멸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제3선언》이 발표되었다.그리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영향이 운동의 재창조보다는 비평이나 마술(魔術), 비교(秘敎), 신화(神話)와 같은 방면으로 옮겨갔다. 1947년 브르통이 파리로 돌아온 뒤 새로운 세대로 운동의 영향이 이어져 오늘날까지 초현실주의의 이념과 방법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술에서 시문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조형예술 분야의 초현실주의 운동도 원래 다다이즘과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곧 그로부터 분리가 강조되었다. 이 분야에서 프로이트 외에 20세기 초 미술사조의 하나인 입체주의의 영향이 역시 중요하다. 입체주의는 전통적 사실주의 회화를 부정하고 공간과 형태면에서 순수한 이념화를 꾀하는 등 혁신을 일으켰다. 이것이 초현실주의 예술에 이어져 상상적 공간, 비현실적 공간을 중시하는 공간의식을 형성시켰다.

그러나 이 초현실주의 개념이 반드시 사실주의나 추상미술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술적으로 사실성과 추상성도 그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 비현실 세계를 겨냥한 공간의식은 당연히 새로운 기법을 필요로 하였다.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등과 같이 우연한 형태의 무늬를 통하여 내면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수법이나, 사물을 원래의 익숙한 장소로부터 전혀 뜻밖의 장소로 옮겨 돌발성과 충격을 일으키는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의 수법 등이 있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 발표 다음해인 1925년 파리에서 이러한 미학(美學)과 기법으로 창작된 작품들을 전시한 최초의 초현실주의전(展)이 열려 운동을 본격화시켰다. 참가자는 M. 에른스트를 중심으로 G. 데 키리코, A. 마송, J. 미로, J. 아르프, M. 레이 등이 있었다. 그룹에 가입하지 않은 P. R. 피카소, R. 클레, P. 루아 등도 출품하였다. 그 뒤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에 걸쳐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 Y. 탕기, S. 달리, A. 자코메티 등이 참여한 가운데 우수한 작품이 많이 창작되었다.

특히 달리는 꿈이나 편집광적(偏執狂的) 환각 등을 회화화(繪畵化)한 <편집광적 비판분석방법>을 개발하여 초현실주의 미술의 제2세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미술가를 하나의 조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동일한 미학적 이념이나 방법보다는 이들이 제각기 꿈이나 내면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고유한 자아 탐구 수단을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부는 의식의 규제를 벗어난 무의식의 자발적인 현시(顯示)를 추구하였다. 다른 일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인적 환상의 탐구 기점(起點)으로서 초현실주의를 이용하였다.

대체로 분류하면, 한편에서 생물형태를 띤 모호하고 암시적인 이미지들을 주로 묘사하였다. 또 감상자가 돌발적 이미지들로 무의식적 연상(聯想)과 창조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도록 하는 작품 경향을 추구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완벽하게 정의가 내려지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미지들을 원래의 정상적 맥락에서 이탈시켰다. 이 역설적이고 충격적인 구도로 재결합시킴으로써 감상자가 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정서에 공감하게끔 만드는 작품 경향을 추구하였다. 앞의 부류는 아르프를 비롯한 에른스트, 마송, 미로 등의 화가가 있었다. 이들을 특히 유기적 초현실주의, 상징적 초현실주의라고 하였다.

뒤의 부류는 R. 마그리트를 비롯한 달리, 루아, P. 델보 등의 화가가 있다. 1930년대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은 국제적으로 확대되는 동시에 정치적 이유로 내부적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 뒤 제2차세계대전 중에 브르통에 이어 달리, 에른스트, 탕기 등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의 활동이 미국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7년에 파리에서 국제 초현실주의전이 열려 달리, 마송 등의 탈퇴자를 제외한 이전의 참가자들이 다시 모였으나 과거의 성과를 재현하지는 못하였다.

한국은 1930년대 《오감도(烏瞰圖, 1934)》를 쓴 이상(李箱)과 《삼사문학(三四文學, 1934~1935)》 동인인 이시우(李時雨) 신백수(申白秀) 등이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썼다. 반드시 초현실주의에 해당하는지에 견해가 엇갈리며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초현실주의적인 창작은 부산에서 활동하던 조향(趙鄕)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 참고 논문 목록


1.「르네 샤르, 역설의 시학」, 박사학위 논문, 서울대학교, 1995
2.「르네 샤르 시의 의미공간」, 『불어불문학연구』, 31집, 1995
3.「르네 샤르와 라스코」, 『불어불문학연구』, 37집, 1998
4.「세계화 시대의 인문학」, 『진정한 세계화의 모색-불어권의 경우』, 서울대출판부, 2000
5.「시와 기원 : 광기의 언저리」, 『불어불문학연구』, 44집, 2000
6.「시, 아포리즘, 자동기술」,『한국프랑스학논집』, 34집, 2001




■ 참고자료



* 르네 샤르 또는 크리스토 - 포로스 / 김성택



1. 크리스토 - 포로스의 시 세계를 열면서


르네 샤르의 시가 간결하다면 또한 폭발적인 응축력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의 시가 때때로 잠언적이다. 또한 고요한 사색의 깊이가 스며 있다. 그의 삶 역시 격정과 신비, 분노와 사색, 저항과 관찰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복합적인 경향들이 한 곳에 모여들게 하는 의미론적 일관성은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열쇠는 전설 속의 인물인 성聖 크리스토프가 혹시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聖 크리스토프의 원래 말인 크리스토 - 포로스Christo-phoros는 "예수를 품은 자"라는 뜻이다. 어린 예수를 어깨 위에 태우고 바다를 건넜던 거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설 속의 거인은 바다의 얕은 곳에서 순례자들과 여행자들을 어깨에 올려 태우고 건네주던 일을 하였다. 여행자들의 수호자이며 카톨릭 전통 속의 헤르메스이다.

성聖 크리스토프는 고유명사이다. 크리스토 - 포로스는 명사화된 형용사이다. 특정 종교의 색채를 지워 일반화하자면 "신성을 품고 있는"이란 형용사이다. 행위가 작용하는 하나의 모티브이다. 그래서 크리스토 -포로스는 바로크 예술 속에서 세 가지 모습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하나는 물론 성聖 크리스토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를 '잉태한 그리고 품은' 성녀 마리아이다. 그리고 마지막 예는 예수를 '매달은 그리고 품은' 십자가이다.

이 모티브는 르네 샤르의 시를 통해 재창조된다. 격정적인 형상과 경이로운 신비의 만남이 있는 곳에 이 모티브는 항상 잠재되어 있다. 강인한 육체와 명료한 정신의 만남이기도 하다. 또한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볼 수 없는 꿈의 만남이기도 하다. 이 만남은 존재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한다. 시인은 이렇게 불가능함을 겨눈다.



2. 저항의 구름


" ( ...... )
저항의 구름
동굴의 구름
최면술 훈련사."

- 탕아의 횃불의 일부

1930년 2월 14일 파리 - 미디지誌 일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초현실주의자들 술집을 공격하다." 사건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술집 '말도로르'의 주인에게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요구한데에서 시작되었다. 접대부들이 나오는 술집에 '말도로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추앙하던 로트레아몽의 대표작 '말도로르의 노래'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로트레아몽 백작의 손님들이다." 이런 앙드레 브르통의 외침소리와 동시에 초현실주의자들은 완력을 사용하여 술집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와중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선봉에 섰던 한 젊은 시인이 칼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간단한 일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의 젊은 혈기와 그 순수함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때 선봉에 섰다가 부상을 입은 젊은 작가가 르네 샤르였다.

위와 같은 일화에서 언뜻 비치듯이 르네 샤르는 전 생애를 걸쳐 행동하는 시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프랑스가 독일 나치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비非점령지역이었던 남 알프스 지역의 비밀부대에서 알렉상드르라는 가명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다. 1966년에 프로방스 어느 고원의 핵미사일기지 건설 반대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르네 샤르에게 이런 현실참여 활동은 자신이 시인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단순히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의무도 아니었다. 샤르에게 위와 같은 저항은 차라리 존재론적인 이유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더 나아가 그 저항에 의해 삶을 새롭게 열어 가고 또 그 폭을 넓혀갈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곧 저항은 존재를 변모시키는 한 방법이었다.

"세계를 바꾸자고 마르크스가 말했다. 삶을 바꾸자고 랭보는 말했다. 우리에게 이 두 개의 지령은 하나이다." (간략한 초현실주의 사전)

앙드레 브르통의 이런 선언과 마찬가지로 르네 샤르에게 참여와 저항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삶이든 세계의 모습이든 이들을 바꾸는 것은 크게 다를 것 없는 삶이며 실천하는 문제인 것이다. 현실사회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우리는 변화하고 또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면서 세계는 서서히 그 지평을 선회시킨다.

"우리는 우리를 억제하는 것에 대하여 또 우리를 강제로 이끌어 가는 것에 대하여 거의 격노에 가깝게 열린 항거를 하면서 자라난다." "나는 항거한다. 그러므로 내 삶의 가지치기를 한다." "자라나기 위해선 요동쳐야 한다." 시인의 생애 전체를 통해 반복하면서 표명되는 이런 생각은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밝혀준다. 시인은 주어진 상황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또 그 제약과 강요 속에서 그러한 실존적 상황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숙시키고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특히 레지스탕스 활동기活動期에 르네 샤르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렇듯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나는 이런 연금술사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라고 시인은 덧붙이고 있다. 연금술사들의 진정한 꿈은 물질적인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된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금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었던가.



3. 현존 속의 신비


"서둘러라
친절, 항거, 경이로움의 네 몫을
서둘러 전하거라
사실 넌 뒤늦게 삶 속으로 들어왔구나
표현할 길 없는 삶 속으로"

- 공통의 현존의 일부

존재의 변모를 가져다주는 것은 개인적인 체험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현재 속에 내재하는 신비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했을 때부터 개인과 개인이 또 개인과 전체가 서로 공통된 부분을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이런 르네 샤르는 개인의 삶 속에 잠재되어 있는 "표현할 길 없는 삶", 무의식, 그 집단적인 것 또는 인류 전체의 것에 주목한다. 그것이야말로 시인에게 "공통의 삶", "공통의 현존"인 것이다. 그리고 그 현존에 아직 우리의 의식이 포착하지 못한 신비가 무한하게 안으로 열려 있다.

"미지의 것 없이 자아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라는 대답을 겸한 질문은 우리의 삶이 미지의 신비를 만나면서 부단히 변모해야 한다. 그렇게 자아를 완성시켜 나가지 않으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미지의 신비를 만난다는 것은 앙드레 브르통에게 객관적 우연에 의하여 "경이로움"을 만나는 것이었다. 브르통은 "경이로운 것은 항상 아름답다. 어떤 경이로움도 아름답고, 오로지 경이로운 것이 아름답다"라고 주장한다. 르네 샤르는 그런 미학을 약간 수정한다. 샤르에겐 경이로운 신비를 만나 변화하는 것이 아름답다. 아니 변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신비이다. 그것은 변화의 시작을 알려주는 "새벽"과 같이 오는 "새로운 것"이다. 이것이 "아침에 오는 것들"이며 또한 미래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시가 발레리의 지성에 대한 탐구와 초현실주의의 감성의 깊이에 대한 탐구로 갈라섰다. 르네 샤르는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있는 시인이다. 르네 샤르는 자동기술법에 의존하여 무의식의 자료 수집에 열중하던 초현실주의의 실험실과 최고의 지성을 연마하던 발레리의 연구실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성적 초현실성과 초현실적 지성을 삶 속에서 구하고자 노력한다. 새로운 내용의 탐구와 순수한 언어의 제련 작업은 각각 나름대로의 한계에 부딪혀 환원과 수사에 그친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때 르네 샤르는 이 둘의 종합을 통해 그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찾아낸다.

지성에 새로운 영역과 열정이 주어지고 감성적 모험에 간결하고 함축적인 언어가 주어진다. 르네 샤르는 이런 지성적 초현실성과 초현실적 지성을 찾는 작업은 결국 다음과 같은 시인의 의무사항이 이행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시인의 내부에서 광인과 물리학자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야 한다." 물리학자와 같은 정확한 측정 및 제어 능력이 우리 내면의 광적인 욕망과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할 때 침묵하면서 그리고 지혜롭고, 자제하면서 그리고 폭발적인 항거를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복합적인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물질 속에서 순수한 어떤 것을 추출하기 위해서 우선 뜨거운 열이 필요하다. 그래서 르네 샤르는 시인의 자질을 "불길에 휩싸인 충적토를 나르는 자"의 자질이라 묘사한다. 이 비유적인 표현은 "감정 - 물질"이란 시어에 이르러 의미가 더 분명해 진다. 시인의 광기와 같은 "불길에 휩싸인 충적토"에 물리학자의 정확성이 개입될 때 "감정 - 물질"이란 시가 일순간 완성된다. 이 시, 시정, 시어를 '공통의 현존'이라 할 만한 충적토로부터 추출하기 위하여 시인은 감성의 불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물리학적 능력은 르네 샤르가 유년시절에 마을에서 보아왔던 대장장이의 능력이기도 하다. 연금술사의 조상이기도 한 대장장이의 꿈은 불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궁극적인 완성은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대장장이의 작업에 마침이 없다.

그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일을 마친다. 마지막으로 어둑한 강 허리에 팔을 담근다. 그는 결국 수초의 얼어붙은 저음을 잡아낼 수 있을는지.

물질 속에 숨어 있는 신비의 정수를 추출하는 자가 감성의 불을 다루는 '대장장이 - 시인'이다. 이 때 추출된 신비의 정수를 품고 있는 시는 비록 동어 반복적 표현이더라도 그대로 써보면 바로 '신성을 품은' 크리스토 - 포로스다. 그런데 자아라는 내면에서 '완벽한 - 신성한' 작품을 다듬는 시인도 역시 미래의 크리스토 - 포로스다. 일시적으로 크리스토 - 포로스들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크리스토 - 포로스가 되고자 하는 이중, 삼중으로 그 의미가 강화된 크리스토 - 포로스다.



4. 바다를 건네주는 크리스토 - 포로스



"어깨 위에 명증성明證性을 얹어 나르는 사람
소금창고 속에 파도의 추억을 간직하다."

-커다란 오렌지 나무의 신탁의 일부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은 당연히 그의 시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 자체의 것일 수 있고 주변의 삶과의 만남에서 생겨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체험이란 개인적인 문제에 머무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 대한 인식과 시적 모티브 역시 개인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 표출될 수 없다. 그래서 "진실은 개인적인 것"이다. 또 시인의 시들은 "개인적인 모험이자 방탕한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것이고,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일상의 것을 넘어서기에 과도한 모험, 탕자의 모험이기도 하다.

진실에 이르기 위해서 일상의 꿀만 모아 오는 시인이어서 안 된다. 르네 샤르의 표현대로 "지평의 꿀벌"이어야 한다. 일상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서, 지평선 너머로 가지 않고서 "진실"에 이를 수 없다. 샤르에게 진실이란 결국 세상과 자아를 변모시킬 수 있는 새로운 것, 경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통된 것이다. 이런 진실에 다가가려는 모험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는 위험이 항상 뒤따른다. 아니 적어도 과거의 모습으로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바로 이 위험한 모험에서 온다. 아니 그 위험한 존재론적 변모에서 온다.

어떤 여인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다. 그네들은 젊음을 모두 바쳐 솟구쳐 올라 도저히 되돌아 올 수 없는 높이의 바위를 뛰어넘고 만다. 이후 그렇게 생긴 물웅덩이는 거기 그렇게 포로처럼 괴어 있을 것이다. 서서히 물웅덩이의 생존 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물 속에 포함된 소금 결정체가 섬광을 반짝이며 아름답게 포로처럼 괴어 있을 것이다.

되돌아 올 수 없는 높이로 솟구쳐 오르는 삶의 모험 끝에 남는 소금 결정체는 아름다움의 원인이며 또 결과이다. 바닷물 웅덩이를 아름답게 반짝이게 하는 것도 또 웅덩이의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될 것도 소금이다. 르네 샤르에게 이 소금 결정체 역시 시다. 그리고 이 소금은 이전의 파도의 솟구침과 같은 격정을 추억처럼 간직하고 있다. 또는 드넓은 공간에서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살았던 그리고 일렁거렸던 파도의 추억 또한 갖고 있을 것이다.

"어깨 위에 명증성明證性을 얹어 나르는 사람", 곧 시인 크리스토 - 포로스는 파도의 추억들로 가득한 소금창고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곳에 많은 삶들의 존재론적 모험이 가득하다. 그래서 르네 샤르는 시인을 "생명의 무한히 많은 얼굴들을 간직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하지 않던가. 이 '생명의 얼굴들'은 "영원의 문턱"을 넘어서려는 자유로운 삶, 해방된 삶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이 비약의 문턱을 넘어가려는 '생명의 얼굴들'에서 르네 샤르는 삶의 '절대적 투명성'을 본다. 달리 말하면 '명증성明證性'을 본다. '명증성明證性'은 진실을 찾아 순례하는 '투명한 자들'의 저 욕망이 지닌 순수함이다.

소금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과거의 생의 비약에 대한 추억이기 때문은 아니다. 소금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품고 있는 명증明證한 욕망 때문이다. 그런데 르네 샤르에게 그 명증성明證性의 소금은 차갑게 식어 단단하게 굳은 결정체로 그 변화를 멈춰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물 속에 용해되어 바다의 파도로 일렁거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파도의 움직임을 그 속에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런 소금과 같이 그의 시는 "욕망으로 머물러 있는 욕망"의 결정체이다.

"욕망으로 머물러 있는 욕망"이란 결국 '욕망하는 욕망慾望', 즉 현재진행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욕망慾望을 뜻한다. 과거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화되고 있는 욕망이다. 따라서 시는 명증明證한 욕망의 일회적인 실현에 대한 추억으로만 화석화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독자들의 순수한 욕망을 나르는 크리스토 - 포로스가 되어야 한다. 생의 비약을 꿈꾸는 순수한 독자들을 건장한 어깨 위에 올려 태우고 성큼성큼 심연을 건어 저편 해안으로 데려다 줄 시, 그것이 바로 르네 샤르의 시가 갖고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욕망하는 욕망慾望'의 실현은 그래서 시 쓰기의 행위가 쓰기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 읽기의 차원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르네 샤르의 시 쓰기가 왜 '언어의 연금술'로 설명되지 않고 '욕망의 연금술'로 설명되어야 하는지를 이제 알 수 있다. 그에게 언어로 완성된 시는 일종의 '추억'이고 '자취'이고 '파편'이다. 독자의 욕망을 촉발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런 쓸모 없는 활자의 잿더미에 불과하다. '욕망의 연금술'은 따라서 언어로 완성된 시를 '철학석哲學石으로 삼고자 한다. 연금술에서 '철학석哲學石'은 소금, 수은, 유황, 인일 수도 있고 또 금일 수도 있다. 연금술의 전통 속에서 말하는 진정한 금이 속세의 물질적 금이 아니라 영혼의 금이다. 이때의 금은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내는 '철학석哲學石'이 될 수 있다. 결국 '철학석哲學石'은 '금을 만들어내는 금金'이다. 즉 또 다른 완성을 촉발하는 하나의 완성품이다. 사실 최종적인 완성이란 일종의 '불가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불가능'을 마치 하나의 '철학석哲學石'인양 지평선 너머의 저 무한함, 저 '불가능'에 이르려는 욕망을 인도하는 방법적 '초롱불'로 이용한다.

"불가능, 우린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지만 초롱불로는 이용한다."

한편의 시 쓰기를 볼 때 궁극적인 시의 완성은 독자의 몫으로 넘어간다. '불가능'을 향해 가던 시인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독자 역시 불가능을 향하여 떠나는 순례자가 된다. 때때로 신비의 지평에 면한 바다를 건네주는 크리스토 - 포로스를 만나면 그 명증明證한 욕망慾望을 '품은 - 일시적으로 실현하는' 독자 역시 또 다른 크리스토 - 포로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5. 하나의 파편 또는 끝맺음


르네 샤르의 삶과 시는 서로 분리된 세계가 아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나 시 쓰기에 있어서나 순수한 욕망의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그 속에 행위작용을 포함하고 있다. 시 하나 하나는 파편 부스러기이다. 그러나 그 파편의 반짝거림은 행동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시들은 각각 단편성短篇性을 지닌다. 그러나 시의 의미층위에서 발생하는 행위작용은 그 단편성短篇性을 잇는 일관성을 시들에게 부여한다. 그 시들 각각은 사실상 바다 속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말의 열도"이다. 섬과 섬을 잇는 독서가 필요하다.




■ 참고논문



* 르네 샤르, 마을의 시학 / 이찬규(성균관대)


I. 들어가는 말

21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무시 못할 풍문이 들렸다. 프로방스 지방에 곧 개발 ‘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 프로방스는 틀림없이 유럽의 캘리포니아가 될 것이라는 풍문이다. 이러한 풍문은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그와 똑같은 이유로 또 다른 사람들을 시름에 잠기게 하고 있다. 붉은 빛 기와 아래 도마뱀들이 천연덕스럽게 기어 나오는 프로방스의 풍화된 벽돌집은 고층 아파트로 바뀔 것이다. 마을들은 소문대로라면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측면들에 대한 논의는 이곳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현대적인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간직되어 온 것들을 완벽하게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이다. 프로방스 지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붐’은 그곳에서 마을이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프로방스 지방의 일-쉬르-라 소르그 라는 작은 마을 출신의 20세기 시인 르네 샤르의 작품세계를 읽어본다. 그의 시를 통해서 특히 가까운 미래에 프로방스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마을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르네 샤르, 마을의 시학> 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글은 세 가지 주제로 나누었다. 첫 번째 샤르와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고향에 대한 논의이다. 두 번째 프로방스 마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페탕끄’라는 스포츠에 샤르의 작품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가늠하여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을과 자연 사이에서 샤르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마술적 상상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Ⅱ - 1. 마을의 시간

하나의 다운타운이 불가피한 어떤 이유로 철거되면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다운타운을 건설하여 보다 더 안락한 생활 방식을 지향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의 마을이 붕괴되면 또 다시 그곳에서 이전과 같은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또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가령 수몰지구 옆에 건설된 새마을에 이전의 주민들이 살지 못하고 뿔뿔이 다른 곳으로 흩어져 나가게 된다. 정책적인 공론으로 이해 할 수 없는 한 마을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 프랑스 시단에서 특히 난해하고 또한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시를 썼던 샤르의 작품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와 다른 한 면을 본다. 곧 그가 살아왔던 구체적인 마을에 대한 진솔한 애정을 나타내고 있는 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세계 제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던 샤르는 프로방스의 보쥬 산맥에서 매복하여 독일군을 겨누고 있던 긴박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한 산문시의 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그 마을은 어떻게 서든지 피해를 입지 않아야 했기에 나는 (사격)신호를 내리지 않았다. 한 마을이란 무엇인가. 다른 마을과 같은 한 마을인가. 아마 그(레지스탕스 동료)는, 이 최후의 순간에,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샤르에게 있어서 그가 지키기로 결심한 프로방스의 고향 마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상의 기쁨을 건네주고 있다.

오 유순해진 땅이여
오 나의 기쁨이 익어 가는 가지여
하얀 하늘의 얼굴.
거기에, 비추어지는 것은, 바로 너다,
나의 추락, 나의 사랑,

그리고 고향 마을이 전해주는 지상의 기쁨은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보드와 산맥의 굽어보는 시선 밑
프로방스에서 겨울이 스스로 즐거워한다.
장작더미는 눈을 녹였고
급류의 물은 뜨겁게 흘러갔다.

고향 마을은 결코 새로이 만들어지거나 복원되어 질 수 없는 시공간의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들을 간직한다. 샤르는 그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초기 일원으로 파리에 입성한 샤르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시작활동이 왕성했던 젊은 나이에 그의 고향, 프로방스로 돌아온다. 문학의 활동 영역이 수도로 집중되어 있었던 상황을 뒤로하고 귀향한다는 것은 한 작가에게 있어서 의미심장한 결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샤르가 주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초현실주의 운동이 <귀향>이라든지 <고향>이라는 단어들에 얼마나 많은 배타감排他感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고려하여 본다. 그러나 그의 현실적 귀향은 샤르 작품세계의 질적 전환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사실 고향의 강 언덕에 도착하는 것도 이미 흔해 빠진 일은 아니다>라고 토로하였던 현대적 시간 속에서, 시인 샤르는 도리어 프로방스의 풍경들과 생물들 그리고 그곳에서 아우러지는 인간의 삶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한껏 호흡하게 한다. 그래서 샤르의 첫 번째 알파벳은 A라는 문자적 기호가 아니라 마을 어귀에 서 있던 한 그루의 꽃나무로부터 시작한다.

꽃이 핀 산사나무는 나의 첫 번째 알파벳이었다.

샤르가 그의 귀향을 현실 속에서 또는 작품 속에서 그토록 빨리 서둘렀던 이유를 우리는 곧바로 인식하게 된다. 한 시인의 세계 앞에서 감동할 때 텍스트 중심주의 접근 방식과 작가 중심주의 접근 방식의 장단점 사이에서 망설이는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샤르의 시가 한번 더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샤르의 고향, 프로방스를 프로방스로 있게 해 주는 첫째 조건은 <8할>이 햇빛이었다. 그것을 프로방스에서 살갗으로, 눈으로 그리고 냄새로 감득感得할 수 있다. 샤르의 시속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 <강>은 왜 언제나 <태양>의 이미지들과 섞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시속에서 아이는 번번이 <태양의 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지, 그리고 또 하나, <명징성은 태양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상처이다> 라는 치열한 정신의 대결에 이르기까지 프로방스의 햇빛은 샤르 적인 은유의 세계에 대한 하나의 실제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프랑스 문단에서 태양에 매혹된 작가를 떠올려 볼 때, 앞에서 일별하여 본 시인 샤르와 더불어 우리는 A. 까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저서 『태양의 후예들』의 한 부분을 샤르의 글로 할애하고 있다는 것은 까뮈가 샤르를 바로 태양과 연관되어진 대표적인 작가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A. 까뮈가 스스로 가장 아끼는 책이라고 증언한『반항인』의 결론을 샤르의 시 한구절로 끝맺고 있다는 것은 그들 두 작가사이에서 이어졌던 우정뿐이 아니다. 그토록 태양을 사랑했던 까뮈가 문학적 행로의 동지를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런데 두 남南프랑스의 작가들이 공통으로 간직하고 있는 태양 숭배 속에서 우리는 미세한 차별성을 발견하여 볼 수 있다. 까뮈의 유명한 <정오의 사상>이 상징하여 주고 있다. 이 작가의 태양들은 한낮의 태양과 태양의 빛을 맹렬하게 작파 (斫破)하는 바다 사이에서 지속되는 실존의 사유를 대변한다. 반면에 샤르의 태양들은 그의 귀향 이후 한 농촌의 마을의 삶이 시작되는 새벽의 술렁거림을 동반하고 있는 태양이다. 또는 노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쪽에서 만날 수 있는 태양으로 더 한층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전쟁기간에 쓰여진 시들을 주로 모은 『분노와 신비』이후 그의 두 번째 시집 『신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제목 스스로가 농촌 마을의 삶과 유리될 수 없는 미명의 새싹 같은 햇빛을 암시하고 있다. 샤르는 시집 속에서 석양의 태양과 함께 번져 오르는 씨알의 <미소>가 노동으로 투박해진 농부의 손과 교류하는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농부
- 누구도 그가 정말 죽으리라고 믿지 않아
그가 추수가 끝난 일몰에 곡식 더미들을 바라 볼 때에
손안에서 낟알의 쓸림이 그에게 미소할 때에.

한낮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마을은 풍경이 된다. 프로방스의 화가 P. 세잔느가 그림을 그릴 때 침묵과 햇빛을 그려나갔다. 프로방스 마을의 한낮은 그림 속의 풍경처럼 침묵과 햇빛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신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을 위한 술렁거리는 마을은 더 이상 아니다. 들에서 이루어진 긴 노동이 농부들을 죽음 같은 잠으로 몰아 넣을 때, 그리고 그 죽음 같은 잠을 깨쳐버리고 일어나 눈을 다시 뜨는 새벽의 순간은 샤르에게 있어서 태양뿐만 아니라 자연의 온갖 생명력들이 마을을 찾아 깃들여오는 순간이다. 그의 시속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주제가 지속의 시간이 아니라 순간의 시간으로 매번 치달아가고 있는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죽음 같은 휴식에서 생명력의 운동으로 반전하는 순간의 인식 속에 천착하고 있다고 추측하여 볼 수 있다. 다음에 인용되는 샤르의 짧은 글귀는 자연과 인간의 생명력이 부재 하는 지속적인 시간에 대한 거부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옛적에 사람들은 지속하는 시간의 여러 조각들을 위하여 이름들을 건네주었으니. 이것은 하루였고, 저것은 한달, 이 텅 빈 성당은 일년. 허나 죽음이 가장 격렬하고 삶이 가장 명확하여 지는 순간으로 다가서는 여기, 우리.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듯이, 또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듯이, 만일 프로방스가 유럽의 캘리포니아가 된다고 할 때 사라지는 것은 프로방스의 풍경보다도 차라리 프로방스의 마을이 보듬고 있는 새벽과 노동을 끝마치고 난 일몰의 순간들이다. 관광지로 개발된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 질 것이라는 것을 P. 메일의 『프로방스에서의 일년』이라는 책 속에서 나오는 한 대목이 시사하여 주고 있다. 퍽 긴 대목이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아침 일곱 시면 일어난다. 그들은 10시, 11시까지 잠자리에 누워 있기 일쑤였고, 어떤 땐 오전 수영 시간에 딱 맞춰 아침 식사를 끝내기도 했다. 우리가 일할 동안 그들은 일광욕을 했다. 오후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나면 그들은 저녁 무렵엔 생생해져서 사교에 고속 기어를 넣기 시작했고, 그 때쯤이면 우리는 샐러드를 먹다 말고 졸기 시작한다. 선천적으로 친절한 성질에다 사람들이 음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꼴은 눈뜨고 못 보는 내 아내는 몇 시간씩 부엌에서 보내야 했고, 우리 둘은 밤늦은 시간까지 설거지를 해야 했다. 일요일엔 또 달랐다. 우리 집에 와 머무는 사람들 모두 일요일 장을 한 번 둘러보고 싶어해서 그 날은 일찌감치 출발을 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딱 한번 우리와 손님들의 기상, 취침 시간이 들어맞는 셈이다. 일 쉬르 라 소르그의 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한 이십 분 차를 몰고 가노라면 흐릿한 눈으로 평소답지 않게 조용하게 뒷좌석에 앉아 있던 그들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같은 책 다른 페이지에서 P. 메일은 저녁 무렵 프로방스의 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부부 관광객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풍자적으로 옮겨 적고 있다 :

“석양이 어쩜 저렇게 장관일까요.” 여자가 말했다.'
“맞아.” 남편이 대답했다.
“저렇게 작은 마을치고는 대단하군.”

프로방스의 햇빛을 즐기러 관광객들이 몰려오게 되면 프로방스는 지금보다 더 윤택한 물질적 삶을 영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방스에서 태어나고 또한 그 곳으로 귀향해서 삶을 마감했던 시인 샤르가 <알비옹>이라는 작은 마을 앞에서 읊었던 한 구절은 우리에게 한 농촌의 마을이 담고 있는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여 주고 있다 :

우리에게 있어서 이 장소는 우리들의 빵 보다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장소는 다른 것으로 대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Ⅱ - 2. 프로방스가 사랑한 스포츠

일터에서 돌아 온 농부는 산굽이로 찾아드는 석양을 바라보다 아내에게 문득 말을 건넨다. “바람 좀 잠시 쐬고 오지, 바람을 쐬다, 불어로 <Prendre l`air> 라는 표현은 집 주위를 둘러 싼 가까운 풍경들 사이를 거닐다 들어오겠다는 산보, 불어로 <promenade>라는 단어의 의미와 먼저 연결되어 진다. 그러나 프로방스의 한 농가에서 남자가 석양 무렵 이 말을 하였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 홀로 산이나 강 주위를 개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Prendre l'air>라는 표현은 프로방스 지방에서 특히 만남, 즉 불어의 <Rencontre> 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우리가 바람을 쐬러 나간 이 농부의 뒤를 밟아 본다면 폴(Paul)도 베르나르(Bernard)도 그리고 베르나르의 아버지도, 베르나르를 찾아 온 이웃 마을의 피에르도 같이 만나게 해 주는 <페탕끄>라는 스포츠가 프랑스 남부의 마을 그 어디서나 열리고 있다는 것을 목격 할 수 있을 것이다.

<페탕끄>는 손에 꽉 쥐어지는 제법 무거운 쇠공들을 굴리거나 던져서 임의로 정해진 목적지에 얼마나 가까이 붙여 나가느냐가 이 스포츠의 경기 방식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연습과 실력이 필요 없기에 아버지를 따라 나선 소녀와 마을의 노인들도 이 경기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모두가 특별한 조건 없이 참가 할 수 있는 <페탕끄>는 그 외에도 다른 스포츠 경기들과는 또 다른 몇 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흙이 있어야 이 경기를 할 수 있다. 볼링이나 농구등 대부분의 구기종목이 흙이 없는 공간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페탕끄는 경기가 이루어지는 땅에 있는 흙의 성질과 기복을 잘 간파하여 흙에서 쇠공이 미끄러지는 한도와 접착력을 고려해 보는 것이 이 경기 운용의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수적인 조건은 샤르 시의 독일어 번역 작가 P. 한드케가 샤르가 프로방스에 대해서 쓴 시들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번역자가 바로 그곳에 머물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고 했던 일화를 떠올려 주게도 한다.

두 번째 특징은 임의로 정해진 목적점目的點에 가능한 한 쇠공을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 승무를 내는 것이다. 일정한 목적점目的點이 정해져 있어 그 곳으로 골을 넣어 확실하게 목적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구기종목인 축구, 아이스하키, 골프 등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임의로 목적지를 정해주는 작은 구슬 <코쇼네>로부터 어느 쇠공이 더 가까이 위치해 있느냐에 대해서 번번이 마을 사람들은 즐겁게 혹은 지독하게 다투게 된다. 결국 그 누구의 말도 결정적일 수 가 없게 된다. 마치 샤르의 난해한 시 「소르그 강」을 설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견해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결정적인 설명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애매한 시적 상황을 재현하여 주는 듯 하다.

세 번째 페탕끄는 흙이 있는 곳이라면 장소에 구애 없이 그 어디서고 시작할 수 있다. 여름 오후 다른 마을로 이르는 길을 따라 쇠구슬을 굴리다 보면, 풍경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경기가 중단되기도 한다. 더러는 달려가던 아이들이 쇠구슬을 건드려서 경기가 중단되기도 한다. 우연하게 풍경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는 <페탕끄>는 샤르가 초현실주의의 활동 때부터 줄곧 천착하여 온 <우연한 만남>이라는 주제를 상기시켜 준다. 그 외에 우리는 샤르의 작품세계 속에서 이러한 페탕끄의 고유한 특징들을 비유하여 볼 수 있는 몇 가지 또 다른 근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프로방스의 시인 샤르에게 있어서 귀향이란 단순하게 고향에 도착하는 것을 일컫지는 않는다.

샤르 적인 귀향이란 도착이란 의미를 넘어서 고향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게 되고 그 귀향의 의미는 계속 갱신되어진다. 그래서 한번 고향을 떠났던 자에게 있어서 귀향이란 페탕끄의 쇠구슬처럼 고향으로 끊임없이 가까이 다가가나 결코 처음 떠나왔던 자리로 다다를 수 없는 안타까움과 그 안타까움만이 동반할 수 있는 전적인 희망의 과정 속에서 고향 마을의 의미가 되살아나고 있다.《신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에 들어 있는 한편의 시 「살아 있거라」가 보여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타향이 강요하였던 신산스러운 삶들을 뒤로하고 여생을 마감하는 일반화된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고향이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생명력의 정수리로 육박하여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샤르가 그의 젊은 문학 시절에 고향으로 돌아 갈 결심을 하였을까. 시 「살아 있거라」의 첫 구절은 시인의 고향이 여생을 마감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에 반(反)하는 장소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이 고장은 다만 영혼의 한 맹세이기에, 무덤을 거부하는 곳이다.

「무덤을 거부하는 곳」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속에서 조건 없는 은총의 장소로 이어지고 있다.

나의 고장에서, 인간은 감사하는구나.

고향에 익숙하여 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고향이 베풀 수 있는 만남의 여러 형태들에게 조건 없는 <감사>로 대응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페탕끄>라는 경기가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 만남의 공간을 열어 주듯이 시인은 그 만남의 공간과 시간에 귀를 기울인다. 시인 자신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오솔길들>을 사물들 사이에서 혹은 인간들 사이에서 열어주는 자이다. 그래서 샤르는 <입노즈의 장>의 한 장 전체를 전쟁당시 마을을 지키려고 싸워나갔던 구체적인 마을 사람들과의 소박한 만남의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다. 샤르에게 있어서 이 소박한 만남들의 지킴이야말로 한 마을의 근원적인 존재이유이며 또한 한 개인의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나는 포르칼리뀌에라는 마을에 들려서 바르두엥 집에서 식사를 하고, 인쇄공인 마리우스 그리고 피귀에르와 악수를 나눈다. 이 용감한 사람들로 만들어진 바위는 우정의 성채이다. 맑은 정신에 족쇄를 채우고 신의를 약화시키는 모든 것들은 이곳에서 추방될 것이니. 우리들은 진실로 근원 앞에서 혼례를 올렸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길 위에서 시작된 <페탕끄>는 경기를 하던 한 마을의 사람들을 어느덧 또 다른 마을로 이르게 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준다. 가로놓인 강과 포도밭을 지나 저녁의 푸르스름한 굴뚝 연기와 막 켜지기 시작한 불빛들을 신호처럼 보내고 있는 마을에 이른다는 것은 도시에서 느끼기 어려운 만남의 서정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샤르는 섬들처럼 떨어져 있는 마을과 마을 사이에 열려있는 모든 만남의 <보이지 않는 오솔길들>을「바로니 마을에서 춤을」이라는 시편에서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글 쓰기로 축성(祝聖) 하고 있다. 시를 인용하기 전에 참고적으로 언급하자면 <바로니>는 프로방스 북부에 위치해 있는 고장의 이름을 일컫는다 :

올리브가지 빛 치마를 걸쳐 입은
그 연인
말했었지 :
저의 너무나도 깜직한 정숙함을 믿으시라고요.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골짜기
불타오르는 언덕의 구비
혼례의 오솔길들
모두 그 고장으로 밀려들어 왔지
사랑의 제어할 수 없는 고뇌가 강의 폐부로 스며드는 그 곳으로

인용된 시속에서 <올리브가지 빛 옷을 입은 / 그 애인>이라는 표현은 샤르 적인 여인상이 프로방스 적인 자연의 요소들과 겹쳐지고 있는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겹쳐짐의 표현은 샤르의 시속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끝없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샤르의 많은 텍스트 속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 이미지 속에 나타난 프로방스 적인 요소들>이라는 또 다른 주제로 샤르의 시를 연구하여 볼 수 있다. 인용문은 이런 여지를 한 예로 일깨워 주고 있다. 이 「바로니에서의 춤을」이라는 시편을 쓴다. 이후 시인의 설명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만남이라는 우리의 주제를 다시 한번 프로방스적인 삶의 이미지를 통해서 음미할 수 있도록 한다.

우베즈라는 골짜기에 있는 이 큰 마을(bourg)은 상인들에게 그 곳의 광장들을, 그리고 보리수꽃의 연례 전시회에, 혹은 축제일 동안에, 비어있는 작은 길들을 장터로 내 주고 있다. 소규모의 무도회가 하류 쪽의 몰란이라는 부락에서 시작되는데, 그 후 청년들과 처녀들은 그 밤을 뷔스라는 부락에서 끝을 내곤 한다.

20세기 프랑스 시인들 중 샤르 만큼 고향마을의 지명들을 작품의 제목으로, 혹은 작품 속에서 언급한 시인도 드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도책에 표시되어 지기 전에 고향마을의 지명들은 시인에게 하나의 시적 울림으로 끝없이 시인의 정신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마을의 단순한 지명 속에서 시인은 그 마을에서 일어난,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의 만남들, 계절이 이어지면서 다시금 새로워지는 대지와 식물들의 밤과 낮을 불러오고 있다. 이 부름에 의하여 마을의 지명은 하나의 끝없는 울림을 허락하게 하는 시간과 공간의 지도책 속에서 다시 기입되어 지고 있다. 샤르가 간직하고 있던 오래된 사진첩에서 우리는 <페탕끄> 경기를 구경하고 있는 샤르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를 발견 할 수가 있다. 샤르의 고향에 머물면서 <페탕끄> 경기를 사랑하게 됐던 하이데거가 샤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시인이 간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지도책에 대한 철학자의 따뜻한 시선을 느껴 볼 수 있다 :

지명들의 단순한 열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허나 장소들에 고유한 그것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존재들과 존재들의 노동과 몸짓들을 그 주위로 불러모으며 존재들의 시와 사유를 불러모읍니다 - 고유한 장소는 그러한 것들을 드러내게되고 또한 독특한 빛깔을 부여하게 됩니다.

프로방스에 거주하면서 프로방스 마을들의 지명들을 기꺼이 그의 시어들로 차용하였던 샤르는 분명히 프로방스 적인 시인이었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방스를 방문하였던 사람들에게 또는 아직 그 곳을 미지의 어떤 고장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간과 시간의 울림 속에서 지명들을 기입하여 나갔다. 샤르는 동시에 프로방스라는 한 지역을 넘어서는 서정의 보편성을 보여 주었던 시인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이 짤막한 주제의 끝맺음을 위하여 프로방스 고향지명들인 <즈네스티에르>, <발랑드란느>를 떠올리며 샤르가 쓴 산문시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

생생한 겨울날들의 미명 속에서, 그대 다시 추워진다고 느껴질 적에, 즈네스티에르, 발랑드란느, 아이들이었던 우리를 맞이하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리도 빨갛게 달아오르던 난로처럼, 그 지명들은 우리들 굳어간 가슴의 우물 밖으로 의미의 벌꿀 무리들을 불러내니.


II - 3. 마술이란 사물 속에 흩어져 있는 정신이다.

끝으로 우리는 샤르 작품 속에 나타난 식물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 샤르의 식물세계가 어떠한 시적 변전으로 인해서 프로방스에서 만날 수 있는 마을의 영상과 연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 주안점이다. 많은 샤르 연구가들은 시인이 고향 마을에 거주하며 썼던 작품들 속에서 환기되는 식물세계의 식물도감 적인 다양함을 샤르 작품의 한 특징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자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해바라기, 라방드, 보리수나무, 올리브, 아망드나무 등은 샤르가 전형적인 프로방스 지방의 시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하여 주고 있다. 프로방스 지방이 그의 시적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근간이 되고 있다는 연구가들의 합치된 의견은 사실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어떤 작가도 그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와 동떨어진 언어군을 계속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친근한 고향에서 발견하게 되는 모든 일상적인 존재들에게 어떻게 그 일상성에 숨어있는 새로운 만남 들을 언어를 통하여 제시하느냐가 독자가 발견하여야 할 시인의 상상력 적인 몫이다. 독자는 샤르 적인 식물세계가 불꽃을 환기시키는 언어들과 접목되는 현상 속에서 샤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독특한 상상체계를 발견할 수가 있다. 낮이 어둠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몰의 순간에 식물들은 일제히 하나의 램프처럼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시 「세 자매」에 나오는 두 구절 속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

네 어깨 위에 있는 이 아이는
너의 행운이며 또한 너의 무거운 짐이다.
대지 거기서 난초는 타오른다.

(...)

벌어지는 어깨는 맹렬하고
화산은 소리 없이 나타난다
대지 거기서 올리브나무는 반짝인다
모든 것은 스치듯 사라져간다.

일몰의 순간에 하나의 마을을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허락하게 하는 것은 불을 밝히는 행위이다. 샤르 적인 상상력은 식물 속에서 바로 이 불을 밝히는 행위를 재현하고 있다. 불을 밝힌 식물들은 창문마다 램프를 밝힌 마을과 함께 시적인 밤을 맞이하고 있다. 식물 속에서 불타오르는 램프의 상상력은 샤르의 선조 들이 살았었고, 이제 그가 또한 거주하고 있는 프로방스의 마을이 맞이하고 있는 일몰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의 선조 들의 이름을 일컫는 「쟈끄마르와 쥴리아」라는 시속에서 계속되어지는 회상의 단장들 중 하나에서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 <옛날, 대지의 길들이 석양빛과 겹쳐지는 때에, 풀들은 부드럽게 줄기들을 올리고 빛을 밝히고 있었다.> 샤르의 독자는 식물에게 점화되는 불의 이미지가 도시에서 전기불을 밝히는 기계적인 행위와 전혀 다른 차원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G. 바슐라르는 이러한 차이의 생생한 의미를 『초의 불꽃』제 6장 램프의 빛에서 일깨워 주고 있다 : <전등은,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 있는 램프의 몽상을 우리들에게 주는 일은 아무래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통제를 받는 빛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들의 유일한 역할이라는 것은 다만 스위치를 켜는 일뿐이다. 우리들은 기계적인 동작의 기계적인 주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정당한 긍지를 가지고 점화한다는 동사의 주어가 되기 위한 그 행위를 이제는 도와줄 수 가 없게 된 것이다. (...) 램프가 보다 인간적이었던 시대에는 보다 많은 드라마를 가지고 있었다.

낡은 램프에 불을 켜려고 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실수를 하지 않을까, 무엇인가 박자가 서투르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늘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밤의 심지는 어제의 심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쩌다 보면 주위의 사물에 알맞은 정성스런 우정을 기울이는데 있어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글은 앞에서 인용된 샤르의 시구가 또 하나의 숨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제시하는 한 단서가 된다. 독자는 식물과 램프가 융합되는 마술적 상상력과 함께 샤르가 얼마나 도시적인 삶을 거부하는 마을의 참된 의미를 그의 시 세계 속에서 보존하고자 하였는지를 생각하여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시인은 자연과 교류하는 인간의 불빛을 발견한다. 그 발견은 짤막한 문구 속에서 압축되어 나타나고 있다 :

너의 램프 불빛은 장미이구나, 바람은 불타오른다. 저녁의 문턱은 깊어만 가는데.

샤르가 좀 더 나중에 쓴 시 「밤의 언덕 길」에서, 시인은 하나의 꽃에게 서술하는 동사들이 전적으로 불을 환기시켜주고 있는 동사들을 건네주고 있다 :

내가 다시 따뜻하게 하는 꽃, 그 꽃잎들을 나는 배가시킨다. 그리고 그 화관을 어둡게 한다.

밤이 찾아온 언덕에서 시인이 문득 마주친 꽃 한 송이는 마을의 거주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화로의 이미지와 연계되고 있는 듯하다. 밤의 추위 속에서 인간은 불을 쬐면서 불꽃이 또 다른 불꽃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점차 사위어 가는 불꽃 또한 인간은 그의 운명처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삶이 융합하는 마술적 불의 상상력은 산과 들판사이에서 저녁나절 불을 밝히고 있는 마을의 삶으로 독자들을 친밀하게 다가가게 한다. 그런데 불을 밝힌 마을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떠도는 자들을 위해서도 존재하고 있음을 샤르의 시는 보여주고 있다 :

새벽 두 시 삼십 분, 자정의 (분침같이) 비가 내리고,
사람들, 추운 덤불들은, 그들을 에워싼 진흙 속에서
지친 눈빛으로 초롱의 발자국을 좇는다
창유리의 초롱은 잊어버린 달이고 불꽃인데.

- 샤르의 개인 수첩에서 인용

샤르의 이상적인 마을은 바깥에서 떠도는 자들을 마을에 거주하는 자들이 친밀하게 맞이하는 만남의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인간적인 삶의 바깥에 위치하여 있는 식물세계가 끊임없이 인간적인 삶의 가장 기본적인 램프의 이미지와 연계되고 있는 샤르의 시적 상상력은 이미 마을의 이 같은 친화적 공간을 설정하여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신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에 들어 있는 한편의 긴 대화체 시에는 샤르가 <해와 달의 방랑자들>이라고 명명한 무리들이 등장한다. 그 무리들은 여름밤에게 말을 걸며, 프로방스 지방에서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바위산들이 그들의 입을 통하여 노래하기도 하며, 올리브 나무들과 밀밭에서 솟아오르는 까마귀 떼들이 그들의 형제가 된다. 이 시는 바로 방랑자들과 마을에 거주하는 자들의 대화로 연들이 이어지면서 마을의 친화적 공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샤르가 이탤릭체로 강조한 이 시의 첫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

투명한 사람들 혹은 해와 달의 방랑자들은 우리들 시절, 사람들이 쉽게 그들을 볼 수 있었던 숲과 마을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사라져 갔다. 그들의 바랑을 놓았다가 다시 취하는 시간동안에, 상냥하고 섬세한, 그들은 마을의 거주자와 시로 대화하였다. 거주자는, 감동된 상상력은, 그들에게 빵을, 술을, 소금과 날 양파를 주었었다 ; 비 내리면 밀짚 우의를 주었었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이 방랑자들이 <시로 대화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본다. 샤르는 중세 시대부터 마을들을 편력하던 남南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인 트루바두르 (Tourbadour)를 염두하고 이 시편을 썼음을 가정하여 볼 수도 있다. 방랑자들이 마을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샤르의 진술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과 자연사이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유지되어 져야 할 친화적 공간을 부여 해 줄 수 있는 마을들이 이미 우리들 시대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III. 맺음말

「신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이 눈을 뜨는 마을의 첫 시간, 그리고 일을 끝마치고 저녁을 기다리는 휴식의 시간과 밤이 깃 든 마을의 단계적인 시간의 여정에 맞추어 르네 샤르 시에 나타난 마을의 의미를 조망하여 보았다. 마을에서 맞이하는 일출의 태양과 프로방스 지방의 전형적인 스포츠인 <페탕끄>, 그리고 프로방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식물들에 접목되는 램프의 상상력은 현대적 도시 생활과의 편차를 보존하고 있다. 1988년에 사망한 샤르는 그 편차를 시라는 형태로 우리들에게 남겨놓고 있다.

<프랑스 문화예술학회>가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학문적 논의의 궁극적 종점이 실생활에서의 실천에 있다면, 유럽 통합 이후 프로방스 지방의 무차별한 관광 지역화의 가능성에 대해서 우리는 구체적인 우려의 목소리를 또한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프로방스 지방은 한 나라에 소속되어 있기 전에 이 땅에 지금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존하여야 할 고유한 문화들을 계속 잉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직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알비옹>이라는 프로방스의 한 산야가 무차별하게 개발되는데 대하여 농성으로 항의하였던 시인 르네 샤르의 글귀를 다시 한번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장소는 우리들의 빵 보다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장소는 다른 것으로 대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Ⅳ. 참고 문헌


1. 르네 샤르의 저술
René Char, Oeuvres complètes, Paris : Gallimard, 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83, Rééd. 1990

2. 르네 샤르에 관한 저술
P. Guerre, René Char, Paris : Seghers, 1971
P. Handke, 「Nager dans la Sorgue」, in Europe, n° 705-706, 1988,
G. Mounin, Avez-vous lu Char?, Paris : Gallimard, 1947
P. Née, 「Le poète et la politique」, in Magazine littéraire, n° 32, Février 1996,

3. 기타 저술
G. 바슐라르, 『초의 불꽃』, 민희식 역, 서울 : 삼성출판사, 1979
P. 메일, 『프로방스에서의 일년』, 송은경 역, 서울 : 진선출판사, 1996
M. 하이데거. 『시와 철학』, 소광희 역, 서울 : 박영사, 1975





■ 참고논문



* 프랑스 현대시의 새로운 현실 추구 / 장계현(문학박사)
- 르네 샤르의 미美를 중심으로


바슐라르는 시란 사물에 생명의 등불을 켜는 일이며 그 존재에 운명을 부여하는 일이라 했다. 이런 면에서 샤르의 시만큼 이 영원한 시의 정의에 가까운 자는 없으리라. 남南프랑스의 들판을 걸어 가 본 적이 있는가. 열과 어둠이 혼재된 지역과 우리를 이 지상에서 이미 다른 생으로 비상시키는 이 상상의 행복한 공간과 바로 이 공간의 실체와 살들을 말이다. "맹목적인 꽃"들과 "미풍"과 "잔가지 널려 떨어진 성벽" 그리고 아름다운 늦여름 오후의 "어둠" 은 르네 샤르의 시詩안에 그대로 정수가 되어 박혀 있음을 보게 된다. 결국 샤르 시의 행복은 그를 기른 남南프랑스에서 퍼 올려 진 것이었다. 그러나 샤르의 시를 읽었을 때 남南프랑스의 열과 어둠의 공간보다 깊은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을 만난다면 그것은 왜 일까. 감동의 숨을 억제해야 하고 눈물을 가득 고이게 하고 말없는 미소를 가득한 채 말이다. 이는 열과 어둠의 행복은 다름 아닌 지극한 고행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시의 정의로서 보게 되기 때문인 것일까. 곧 지극한 고행으로 남南프랑스의 열과 어둠은 한 차원 더 깊은 신비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됨을 보게 되기 때문인가. 그러나 그의 신비는 결코 몽환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지상의 현실 위에서 길어 온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근원에 도달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 절대 공간 속에서 무어라 할 수 없는 행복한 존재의 확장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시에서 자주 만나는 자오선의 나라, 미궁의 나라, 죽음의 정원이 새로운 생의 정원으로 바뀌는 나라, 맹목적인 꽃들이 신비의 명상을 하는 나라, 고대의 선인장이 흩날리는 나라이다. 이러한 나의 감수성을 극대로 환희 하게 한 공간들은 나로 하여금 그의 시를 미美(일반적으로 인식되는 형태의 미가 아니라 영혼을 움직이는 힘으로서의 미)라 부르게 하였다. 사실 시인은 나의 이러한 감동의 폭발지대의 미美라는 용어를 두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프랑스 현대시의 위상을 지금까지 한국에 그 소개가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프랑스의 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되는 관점들을 중심으로 잠시 살펴봐야 한다. 프랑스의 현대시는 더 이상 문학의 영역이 아니다.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은 이미 주지되어 온 바이다. 독자가 현대 프랑스 시를 읽을 때 일상의 현실에서는 무척 낯선, 곧 현실에서 그 지시 대상을 만나 보기가 힘든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적 환경의 다름이며 다른 공간에 대한 몰이해는 아니다. 실은 현대 프랑스 시인들은 더 이상 낯익은 세계 곧 일상을 재현하는 작업과는 결별을 시도하고 있음에 대한 비非인식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실에서 그 등가물等價物을 찾을 수 없는 낯선 세계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시각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다. 이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의 현실에 더 가깝고, 현재의 삶보다 미래의 삶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의 프랑스 현대시에 대한 비非이해는 바로 이러한 시적 현실, 시적 입장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차단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실의 등가물等價物을 발견하고자 한 우리의 노력은 당연히 허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현대시는 이미 인식의 영웅적인 몸짓을 여는 모험의 영역으로 이해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시도에 의해 확장되는 영역은『현대시와 지평선의 구조』의 저자인 미셀 꼴로에 의하면 "지평선"이라 명명되기도 한다. 기존과는 전적으로 다름 혹은 새로움의 추구, 바로 이것이 현대 예술, 현대시의 그 첫 번째 존재 이유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현대시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악의 꽃』의 보들레르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보들레르는 현대성의 시조인가.

첫째, 그는 기존의 선, 즉 그때까지 주로 신의 잣대로 보아온 선만이 유일한 선이 될 수는 없다고 강력히 드러낸 점이다. 이는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신적 의지에 대항하는 인간 인식의 독자성을 세우는 첫 이정표가 되게 한다.

둘째, 이러한 신에 대한 대항은 무엇보다 신만이 가진 영원의 시간성을 유한성의 인간으로서도 획득코자 함으로써 시간적 반항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유한만이 존재하는 지상에서, 무한 또는 영원을 획득하려 함으로써 그는 신에 맞서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순간 속에 영원을 세우는 일, 곧 영원한 현재를 획득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는 바로 현대 예술의 그 첫 번째 창조 동기가 되고 있다. 고로 현대 예술은 유한 속에서 무한을, 시간성 속에서 비非시간성을 획득에의 욕망으로 정의될 수 있고, 이러한 지향되는 시간은 멈춘 시간 또는 시간 밖의 시간, 비-시간 나아가 초월된 시간으로 명명되어지고 있다.

셋째, 보들레르가 열어낸 상징의 개념은 현실 그대로의 세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보기의 시도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있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 온 이전의 예술적 작업과 결정적인 단절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일상 너머의 현실은 부차적인 현실이 아니다. 낯익은 일상의 현실보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현실이며 더 근원적인 현실의 지향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다른 현실의 추구가 바로 이 시인으로부터 처음으로 시도되어 그 이후 현대 예술의 기본 방향이 된다. 이러한 관점들이 보들레르를 프랑스 현대시 지평의 시작점에 자리 매김 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기존 현실과 다르게 보기라는 현대시의 거대한 모험의 장을 연다. 이후 프랑스의 숱한 작가들은 저마다 기존과 다른 현실 또는 일상의 현실과 다른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지평선을 확장시켜 왔다. 아폴리네르는 회화에서의 입체파와 사상적 궤를 같이하여 공감각 즉 여러 현실을 동시에 보기 또는 시각의 공시성을 보여주는 실험시를 시도했다. 브르똥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는 서구 문명이 억압해 온 무의식, 비非이성, 꿈 위에서 인식의 가능성을 연다. 이로부터 또 다른 현실(초현실Surr el이라고 불려지는) 보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구조주의 계열의 언어 실험의 작가들은 시어는 그 자신 너머의 어떤 현실을 지향하지 않고 잇다. 오로지 언어 그 자신을 지시한다. 언어의 자동성을 통해서 텍스트 외부의 세계와 무관하다.

오로지 텍스트 내부의 세계에서 언어의 구조적 관계가 보여주는 현실이다. 즉 언어 유희의 현실을 통해 기존과 다른 새로운 현실 보기를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전자의 기표(언어의 외면성) 계열의 작가들과 달리 기의 계열의 작가들은 미셀 꼴로가 말한 지평선을 우리 내면의 세계이다. 존재의 본질적인 세계를 통해 확장시키려 하였던 작가들로서 르네 샤르, 이브 본느프와, 셍 존 페르스, 필립 쟈꼬테, 쥘 쉬뻬르비엘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현대시인들이 지향하는 창조의 세계는 다양한 현실로 나타났다. 기존과 다른 현실, 곧 기존과 결별을 시도한 새로운 현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기존과 끊임없는 다름의 추구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기존 혹은 일상 현실의 존재 방식보다 더 진정한 더 본질적인 현실에서의 살기, 그러한 존재 방식을 간절히 바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다름의 지평선을 치열하게 확장시키는 모험의 세계에서 창조의 목표를 단지 기존과의 다름에 두지 않는 곧 진실에 연루된 다름이며 더 진정한 현실에 도달되는 길로서 다름을 추구하는 작가를 만나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시인 르네 샤르이다. 현대 예술의 추구를 낯섦 또는 이상함으로 정의(이는 특히 오니므스 의 저서『예술의 낯섦』에서 잘 언급되는데) 한다. 샤르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 보여주듯 "합법적인 이상함"을 추구하고자 한다.

당신의 뼈 속에서 새로운 신비가 운다.
당신의 합법적인 이상함을 전개시켜라

이는 지금은 아닐지라도 장차 합법성을 획득할 이상함 즉 새로움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보여주듯 지금은 부재 하는 현실일지라도 장차 '존재'가 될(새로운 생이 될) 그런 현실을 지향한다.

우리는 희망 속에서 잠들 것이고, 그의 부재 속에서
잠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희망이 가볍게 부재라
명명하고 일체 속에서 화덕을 차지하게 될
존재를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우리를 붙잡는 것은 다름으로부터 오는 경이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을 흔드는 현재의 생을 다시 정의하고 싶은 경이가 아니었던가. 이 현실 밖의 세계(그의 시에서 만나는 남南프랑스의 친숙한 세계도 실은 그 일상의 공간을 넘어 다른 공간을 지향하고 있기에)가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구체적 대상을 알기도 전에 그토록 감동시키고 매료시키는가. 그런데 그의 시에서 이러한 경이와 만나는 순간의 새로운 현실은 대부분의 경우 '한 점'의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위에서 우리는 샤르의 새로운 현실을 미라 규정해 보았다. 이때 미美라는 새로운 현실이 '한 점'의 이미지와 연관이 있지 않나 가정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美라고 명명될 한 점의 다양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 시적 공간을 이제부터 만나보고 이 순간의 경이를 확인해 본다. 우리가 앞으로 만나게 될 '한 점'의 공간은 그의 시적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매 번의 그의 새로운 시학이 추구하는 다른 현실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 현실들은 각자 독립된 현실이 아니다. 이전의 현실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는 현실이다. 더 나아가 이는 이전의 현실이 전환되어 나타난 현실로 이전의 것보다 더 한층 깊어진 현실이 되고 있다. 계속 전환되는 이 현실들은 그의 시적 창조의 연대기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다섯 형태 아래서 나타나는 지금껏 만난 적 없는 새로운 현실로서의 '한 점'(다섯 형태의 미로 명명될)의 공간들을 조명해 보려 한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까지 한 점의 현실은 샤르의 세 시학 곧 샤르의 시 빛깔을 이끌어낸 세 주된 물질이자 시 창조의 동인이 된 죽음, 불, 어둠의 시학이 추구하는 현실로 나타난다. 시의 여정 상 마지막 단계의 두 점의 현실은 앞의 세 시학 이후 샤르의 시 세계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두 경이의 세계로 나타난다. 이때 경이는 '생' Vie 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전자가 응축된 경이의 세계와 최종적인 '미美'로 명명되는 폭발된 경이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 별첨


* 프랑스문학

Ⅰ. 개관

프랑스어와 전신인 로망어로 쓰여진 문학작품.

프랑스어의 전신인 로망어로 쓰여 전해지는 문학작품다운 첫 문헌 《알렉시스 성자전(聖者傳)》 등이 11세기의 것인 만큼 이 무렵을 프랑스문학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라틴어로 쓰인 문헌들이 그 이전부터 있었고, 그것이 방대한 문학의 보고임은 사실이나 교회학자들의 세계 속에 갇혀 있어 민중과는 담을 쌓아왔다는 특이성 때문에 한 국민의 문학에서는 제외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문학은 프랑스의 국토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에 국한되는 것도 하나의 상식이다.

프랑스문학의 특징은 그들의 국민성에서 비롯된다. 투철한 대화 정신이 우선 어느 국민보다도 돋보인다. 이치를 따지기 좋아해 담론과 비판을 즐기는 기질이다. 앙드레 지드가 지적했듯이 논리를 진리보다 사랑하는 성향은 데카르트 적인 사고의 합리성과 문체의 명석함을 낳아 형식과 조화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고전주의 문학을 싹트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세기에 걸쳐 고루 활발한 문학이론 논쟁을 통해 다양한 비평문학을 꽃피게 했다. 언제나 프랑스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내는 기수 노릇을 도맡아왔다. 대화의 정신은 한편으로 서로 어긋나는 요소들을 절충 또는 조절하는 구실도 한다. 수다스러워 경박한 것으로 흐르기 쉽고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가 지나쳐 우스꽝스러운 유행에 들뜨거나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으로 치닫는다. 거의 모든 국민이 카톨릭 신자로 어느 나라보다 보수적인 면도 있어 그 문학은 매우 복잡 다양하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나 독일의 괴테 같은 특출한 대표자가 없는 대신, 전체의 수준이 골고루 높아 작품들의 질과 양이 어느 세기에나 고르다. 지배나 통제에 의한 획일이 아니라 절제와 조화에 의한 개성의 다양성을 견지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를테면 모순이나 갈등의 해결에 있어 대화를 통한 절도와 균형을 존중하는 가장 현실주의적인 문학이다. 현실주의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조건에 충실하다는 뜻에서 인간적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인간성에 대한 굳건한 신뢰는 르네상스 이후의 문학에서 두드러진 바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특히 17세기에 하나의 주류를 이루어 모랄리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문학자들을 속출시켰다.

라 로슈 푸코의 경우에서처럼 인간본성의 약함이나 약함의 고발에 치우쳤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철저했다. 그런 모랄리스트들의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는 다른 모든 문학분야에도 배어들어 프랑스문학이 전반적으로 모랄리스트 문학으로 통칭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의 실존주의 문학이나 구조주의 문학에서 뚜렷한 것을 볼 수 있다. 곧 천사도 악마도 아닌 인류의 한계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인간다운 방편이 문학이라는 자각에서 문학이 바로 문명이라고 할 정도로 문학을 존중했다. 이런 국민기질이 프랑스문학의 풍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이와 같은 보편화 현상은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오늘날에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는 각급 학교에서의 꾸준하고도 빈틈없는 문학교육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Ⅱ. 중세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사회를 지탱해준 것은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도였다. 그 만큼 하느님과 군주에 대한 충성, 곧 신앙과 명예라는 두 가지 원리가 성자전과 무훈시(武勳詩)의 2대 장르를 낳게 된다. 10~11세기의 《레제 성자전》 《알렉시스 성자전》(1040?)은 성직자들이 민중교화를 위해 지은 종교문학이다. 11세기 말엽에서 13세기에 걸쳐 북프랑스의 음유시인(트루베르)들이 온 유럽에 퍼뜨린 《롤랑의 노래》(12세기 초)를 비롯한 숱한 무훈시들(80여 편이 현존)은 군주에 대한 기사들의 충성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이교도와의 싸움이나 영주간 투쟁이 주제인 무훈시는 트루베르의 손에서 종글뢰르(중세의 유럽의 직업적인 이야기꾼)에게 넘어가 길거리나 장터 등에서 민중을 상대로 읊어졌다. 십자군과 더불어 길러진 기사도 중심의 귀족생활을 소재로 삼은 픽션, 곧 기사도 로망은 식자층에 애독되었다. 기사들의 이상이 하느님과 군주에 대한 충성에서 여성숭배로 변질되는 이 운문연애설화들은 그 기원에 따라 고대설화 계통(작자 미상인 《알렉산더 대왕 로망》 등)과 브르타뉴의 켈트 전설계통(트루베르인 토마와 베룰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리 드 프랑스의 단시들, 크레티앙드트루아의 《원탁기사 이야기》 등)의 두 갈래로 분류된다. 한편으로 가공적인 상상이 판치는 이들 로망보다 현실생활에 집착함으로써 13세기의 소박한 인간미와 세태를 섬세하게 그려낸 《오카생과 니콜레트》 등 100편 가량의 모험 로망도 이 장르에 속한다. 로망어로 쓴 설화라는 뜻의 로망이 소설로 발전해나간 데 반해 역사적 사실에 뿌리박은 서사시로부터는 역사문학이 파생된다.

역사문학의 기원은 십자군 같은 솔직하고 현실적 대사건을 서술한 서사시와 성자전의 두 갈래이다. 빌라르두앵의 《콘스탄티노플 정복》(1207?)은 전자에서 주앵빌의 《루이 성왕전》(1309)은 후자에서 파생된 것이다. 사건 서술과 개인 묘사의 두 흐름은 그 이후로 역사문학의 두 주류를 이루게 된다. 무훈시, 기사도 로망, 역사문학이 봉건귀족의 감정이나 동경에 호응하는 귀족문학이다. 이와 대조적인 문학, 곧 보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서민정신을 나타낸 문학이 12세기 후반이래 싹터왔다. 《여우 이야기》와 《파블리오》가 그것이다. 27편 10만 여 행의 운문설화로 전하는 《여우 이야기》는 편마다 작자가 다르나 공통된 주인공은 늘 여우로 동물세계를 통해 인간사회를 풍자 비판하고 있다. 《파블리오》는 일상생활을 소재로 웃기기 위해 만들어진 운문 콩트들로 150편 가량이 전해진다. 부도덕한 농담과 세련된 취미가 공존하던 당시의 정신풍토를 엿보게 하는 이 장르는 《여우 이야기》와 더불어 서민문학이라기보다 현실주의 문학으로서 대화를 통한 절도의 존중이라는 프랑스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미 나타내고 있다. 《파블리오》 작자의 한 사람인 종글뢰르 출신의 뤼트뵈프는 서정과 풍자를 조화시켜 개인적인 감동을 노래한 프랑스 최초의 위대한 시인이다.

한편, 학교나 수도원에서 라틴어로 교리를 체계화하고 지식의 총목록을 작성하는 대 작업을 추진하다가 그 보급을 위해 12세기 이래 프랑스어를 대용해오던 성직자들이 알레고리(寓意)에 의한 해설을 애용하게 되자 알레고리 취미는 일반사회에도 널리 퍼졌고, 이러한 경향이 집약되어 13세기에는 《장미설화》를 낳게 된다. 기욤 드 로리스의 작품(1230)은 궁정연애의 하나의 도식을 이루었다. 장 드 묑의 작품(1277)은 합리주의 정신으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피력하고 있어 대조적이다. 14~15세기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이다. 1337년에 시작된 100년 전쟁과 1348년의 페스트 창궐 등으로 빚어진 혼란과 황폐 속에서 봉건귀족과 교회가 타락을 거듭함에 따라 중세사회는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문학에서 신앙과 명예와 연애의 이상화가 물러나자 영감 대신 부자연스러운 기교가 판치기 시작한다. 시가(詩歌)가 수사학(修辭學)으로 불리게까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르주아라는 제3계급의 등장, 잔 다르크로 상징되는 농민의 자각, 이들의 보호자로서의 왕권의 강화 등 건설적인 면도 없지 않다. 이러한 해체와 재건을 반영하는 과도기 문학은 프루아사르(1337~1405?)와 코민(1447?~1511)에 의한 역사문학의 발전, 극문학의 개화, 산문설화의 등장, 천재 시인 비용의 서정시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프루아사르는 현지답사와 자료수집을 통해 100년 전쟁을 생생하게 재현시킨 《연대기》 4권으로, P. 코민은 100년 전쟁 이후의 프랑스를 가장 잘 이해시킬 수 있는 《회상록》으로 프랑스 문학사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역사문학을 이루어놓았다.

극문학은 15세기 후반에야 꽃피게 되지만 12~13세기에 이미 싹트기 시작했고, 그 기원은 종교극과 세속극의 두 갈래이다. 12세기 후반의 《아담 성극(聖劇)》과 12세기 말엽에 음유시인 장 보델의 《니콜라스 성자극》에서 비롯된 종교극은 14세기에 많이 연출된 '성모 이적극'과 15세기에 옥외광장에서 엄청난 규모로 상연된 '성사극'의 두 장르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예술로 승화되지 못해 참다운 연극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종글뢰르의 낭송이나 광대의 재주에서 파생된 세속극은 아당 드라 알의 2편의 희극 《로뱅과 마리옹》 《녹음》(1275?)에 의해 비로소 민중연극으로 정착된다. 15세기 후반 작자 미상의 《파틀랭 선생》(1464?)이라는 프랑스 극문학의 첫 걸작을 낳았다. 또한 이 익살극[笑劇]의 희극적 요소는 17세기의 몰리에르에 의해 국민희극으로 집대성되었다. 무훈시나 기사도 로망과는 판이하게 현실적인 관찰과 풍자적인 박력을 갖춘 산문설화들이 15세기에 나타나 프랑스 근대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결혼의 15가지 기쁨》(1400 : 작자 미상), 앙트완 드 라살의 《소년 장드 생트레》(59?), 《파리의 장 이야기》(95?:작자 미상) 등이 그것이다. 중세의 서정시는 먼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 기사들의 사랑을 읊은 기사도 시가와 부르주아적 서정시가 병행되어왔다. 14세기에 들어서자 기사도 시가를 갱신해 보려는 마쇼(1300~77)와 제자 데샹(1346~1406?), 피장(1364~1430)과 샤를 도를레앙(1394~1465) 등 수사파들의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지난날의 꿈과 영감을 되살려낼 수는 없어 아나크로니즘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다만 《감옥의 서(書)》라는 시집을 낸 도를레앙은 인습에 묶여온 시가 속에 놀랍게도 진실한 애정을 담은 우아하고 완벽한 표현에 의해 가장 예술적인 궁정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최고의 시가는 프랑스와 비용의 시집 《소유언(小遺言)》(1456)과 《대 유언》(62)에서 발견된다. 불행한 세기를 산 인간의 넋을 온몸의 전율로써 표현한다. 그 영원히 새로운 영감과 정신으로 비용은 근대를 여는 첫 시인이 되었다.


Ⅲ. 16세기

1494년에서 30년 동안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들어온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힘입어 비롯된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고대 어문학의 연구, 곧 휴머니즘과 종교개혁이 뒤섞인 격류를 이루며 16세기를 휩쓸게 된다. 30년대 초반까지로 볼 수 있는 르네상스 초기는 고대문화의 열렬한 모방기로서 클레망 마로와 프랑수아 라블레가 이 시기를 대표한다. 새로운 사조에 호의적이던 프랑수아 1세나 나바르 왕비의 비호를 받는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긴 마로는 시인으로서의 섬세하고 명쾌한 정신과 그 시의 사교적 성격에 의해 17세기의 지성 우위 문화를 만족시키게 되었다. 선량한 거인 왕조의 이야기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5권:1532~64)로 이 혼돈기의 사상 혁신운동을 비로소 문학에 구현시킨 라블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굳건한 신앙과 그러한 사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강렬한 리얼리즘에 의해 프랑스 문학 최초의 본격적 소설가가 되었다.

3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말까지 르네상스 개화기로 구분된다. 인생에 대한 무제한의 사랑과 도덕적 규범을 갖고자 하는 욕구는 양립될 수 없어 종교개혁이 문예부흥에서 차차 분리된다. 장 칼뱅(1509~64)이 여기에 등장하는 한편, 휴머니즘은 프랑스 고유의 비평정신과 결합되어 하나의 독특한 학문을 이루면서 합리적 진리를 추구해나갔다. 종교적인 사색과 과학적인 연구라는 두 갈래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사라져갈 위기에 처한 순수예술의 개념을 구해내기 위해 롱사르를 비롯한 7인의 시파(詩派), 즉 '플레야드'의 박학하고도 귀족적인 노력이 기울여졌다. 시집 《오드》(5권:1550~56)와 《사랑》(3권:52~78) 등에서 사랑과 죽음과 자연을 정열적으로 노래한 롱사르는 종교투쟁을 초월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기호를 지탱한 영예를 지닌다. 플레야드파는 프랑스문학의 첫 비평서라고 할 《프랑스어의 옹호와 선양》(49)을 뒤 벨레(25~60)의 이름으로 공표, 프랑스어와 시의 획기적인 혁신을 이룩하였다. 시를 개혁한 휴머니즘은 연극에서 고대극을 본뜬 새로운 극의 창조를 주장하였다. 비극 《클레오파트라》(52)와 희극 《외젠》(52)의 E.조델이 그 선구자이며, 《레제스프리》(79) 등 9편의 희극을 남긴 P. 라리베이는 몰리에르를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60년에서 98년까지의 근 40년 동안의 내란(종교전쟁)은 문학에도 혁명을 강요하여 현실과 직접 관련된 몇몇 문학 장르를 발전시켰다. 몽뤼크의 《회상록》(92), 신교도인 도비녜의 《비가(悲歌)》, 온건파 부르주아 6인의 의견서인 《메니포스의 풍자》(94) 등이 그것이다. 8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몽테뉴가 《수상록(隨想錄)》(3권:1580~88)을 내놓아 이 피비린내 나던 시기를 르네상스 성숙기로서 마무리지었다. 너그러움과 중용에 바탕을 둔 인간중심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이 모랄리스트 문학의 첫 집대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호라는 과거지향 요소와 진리에 대한 욕구라는 미래지향 요소를 결합하여 실천될 수 있는 프랑스문학 고유의 영역을 마련함으로써 아름다운 진리와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슬로건의 고전주의 예술의 기틀이 되었다.


Ⅳ. 17세기

개인주의와 무정부상태의 16세기가 끝나고 평화와 질서를 되찾으려는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자, 자각한 가톨릭이 신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합리주의가 신앙과의 공존에 동의하게 되며 절대왕권의 확립과 함께 중앙집권이 강화된다. 문학에서 정리와 순화의 작업에 박차가 가해져 마침내 이성적인 절도와 균형으로 형식의 완비를 이룩하는 고전주의시대가 닥쳐와 루이 14세의 친정기간(親政期間)인 1661년에서 4반세기 동안이 그 고비를 이루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60여 년은 고전주의 형성기로, 그 이후의 세기말은 18세기의 전환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르네상스 이래 갖가지 기원(起源)의 말들과 어법(語法)을 끌어들여 잡동사니가 된 프랑스어가 순화되어야만 했다. 시에서는 철저한 기교파 시인 말레르브가, 산문에서는 《서간집》 27권을 남긴 발자크가 언어개혁에 앞장서 간결 명석한 고전적 문체를 마련함으로써 고전파 걸작들을 낳는 길을 터 주었다.

한편, 리슐리외에 의해 34년에 창설된 아카데미와 살롱 중심의 사교계도 언어순화에 큰 구실을 하였다. 특히 랑부예 후작부인(1588~1665)이 1608년에 연 살롱을 비롯해 도처에서 열린 살롱들은 말씨와 예절과 취미를 세련시켜 우아와 중용과 양식을 존중하는 사교정신을 길러내고 조화와 질서를 으뜸으로 삼는 고전주의 정신의 온상이 되었다. 기사도 로망이나 장미 로망을 잇는 방대한 연애모험 소설들(오노레 뒤르페의 《아스트레》, 스퀴데리의 《그랑 시뤼스》 등)이나 발자크, 부아튀르의 서간문학은 이러한 살롱을 무대로 유행한 사교문학이다. 한편, 이와 같은 귀족문학의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에스파냐의 악한소설(惡漢小說)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뷔를레스크(는 민중의 풍자정신의 산물로서 파블리오나 라블레를 계승하는 사실적 문학이다. 그러나 고전주의 형성기를 마무리지은 것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과 코르네유의 비극들이다. 이성과 논리를 으뜸으로 삼는 시대의 특성을 고루 지님으로써 고전주의 문학의 온갖 특질을 독자적으로 개척한 데카르트는 그 명석한 문체와 깊은 모랄리스트적 통찰에 의해 문학으로서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그의 사상에 살을 붙여 운명과 싸워 이기는 의지의 비극을 창조한 코르네유는 3일치법칙 적용으로 긴축되고 실감나는 무대구성과 논리적이고도 웅변적인 대사의 문체에 의해 고전비극의 터전을 닦았다. 36년에 상연된 《르 시드》의 대성공은 극문학 중심으로 형성되는 고전주의문학 전반의 성공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61년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확립과 더불어 고전주의는 개화기, 이른바 '빛나는 시대'를 맞게 된다. 근대적 이성과 고대예술이 손잡으면서 인간성 탐구를 위한 형식 완비의 문학이 무르익어 파스칼, 몰리에르, 라신, 라퐁텐, 부알로 등의 수많은 걸작들이 프랑스 문학사를 눈부시게 장식한다. 이성의 전성시대에 신앙 없는 이성의 무력함을 증명하려 한 파스칼이 《팡세》에서 보여주는 것은 놀라운 심리적 변증법이다. 그리스도교 변증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떠나서 인간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이 모랄리스트적인 성실성과 '타오르는 기하학'이라 불리는 힘차고도 논리적인 문체에 의해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의 불안한 처지를 가장 깊숙이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파스칼을 실존주의문학의 선구자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다. 한편, 살롱 중심의 사교계는 힘을 점차 잃어가면서 몇몇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잠언집(箴言集)》(65)의 라로슈푸코와 《회상록》(71~75)의 레스는 정계에서 얻지 못한 영예를 문학에서 얻었다. 랑부예 살롱 출신인 세비네 부인은 딸에게 쓴 《편지》로, 라파예트 부인은 코르네유의 비극을 방불케 하는 심리분석소설 《클레브 공작부인》(78)으로 고전주의의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고전주의의 정상은 아무래도 몰리에르의 희극과 라신의 비극이다. 몰리에르는 오랜 극단생활을 통한 절실한 인간 관찰을 바탕 삼아 소극(farce) 같은 중세희극의 온갖 요소를 집대성, 근대 국민희극을 완성시켰다. 《타르튀프》 《염세가》 《구두쇠》 《여학자》 등 성격희극의 걸작들을 남겼다. 라신의 《앙드로마크》는 《르 시드》의 성공에서 31년이 지난 67년에 비로소 상연된 고전극이며 새 세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라신은 이어서 《페드르》(77) 등 9편의 걸작 비극을 남긴다. 코르네유의 의지의 영웅 대신 운명에 짓눌리고 정열에 사로잡히는 인간을 그려내어 고전비극의 전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그의 문체는 완벽한 12음절 시로서 프랑스 운문의 으뜸으로 일컬어질 만큼 내용과 리듬의 조화가 극치를 이룬다. 고전주의 이상의 더없이 순수한 표현이었다. 라신의 운문과 더불어 프랑스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암송시키고 있는 우화시(寓話詩) 233편을 남긴 《우화집》의 라 퐁텐은 이 시대의 이채로운 존재이다. 다채로운 테마, 간결한 동물 묘사, 모랄리스트 적인 인간 이해의 깊이 등도 놀랍다. 테마에 따라 시구(詩句)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무기교의 기교는 라신의 그것과 비겨질 정도이다. 한편, 적확한 판단과 표현, 억제된 감동, 웅대한 상상력 등으로 높은 문학의 경지에 다다른 《설교집》 《추도연설집》을 낸 보쉬에나, 《시학》 등의 저술로 고전주의 미학을 확립시켜 이 시대 대작가들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부알로도 특기할 만한 존재이다.

87~97년 사이에 활발하게 벌어진 신구논쟁은 문단을 고대 파와 근대 파로 양분시켰다. 그러나 고대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기보다 이성과 합리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근대 파가 승리함으로써 고전주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고전주의적 이상의 분해와 18세기 합리주의의 새싹이 공존하는 이 전환기의 움직임은 라브뤼예르, 페늘롱, 퐁트넬의 작품 속에 갖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라브뤼예르의 《성격론(性格論)》(88)은 현실 관찰의 기록으로서 사회의 본질적인 병폐에 대한 모랄리스트적인 고발이다. 저명인사들을 평하는 그 신랄한 어조는 보마르셰의 출현을 예고라도 하는 듯 다분히 18세기적이다. 보쉬예의 수제자인 페늘롱 신부는 왕세자를 위한 교육소설 《텔레마크의 모험》(99)에서 장차 왕이 될 자기 제자를 통해 프랑스에 시행하고 싶은 정치개혁을 암시하면서 루이 14세의 시정을 풍자 비평하였다. 부알로의 《시학》에 버금가는 비평문학으로 꼽히는 《아카데미에의 편지》(1716)에서 유연하고도 건전한 상식에 입각한 신구논쟁에 중재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라브뤼예르나 페늘롱은 그 생각이나 문체에서는 18세기와 맺어질 새로운 면을 보였다. 고대문학에 대한 깊은 지식과 애착이라는 점에서는 17세기적이어서 신구 논쟁에서는 고대파인 부알로나 라신의 동조자였다. 개선문의 비명을 라틴어로 하느냐, 프랑스어로 하느냐는 문제에서 논쟁이 비롯된다. 이 논쟁은 1687년 1월 샤를 페로가 국왕의 병세회복을 축하하는 시 《루이 대왕의 세기》를 아카데미 회원 앞에서 낭독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고대인에 대한 근대인의 우월성을 선언한 이 시에 대해 부알로는 아카데미의 수치라 하였다. 페로는 다시 자기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고대인과 근대인 비교》를 발표한다. 인간 정신의 법칙은 진보라는 확신 아래 학문은 물론 문학에서 근대인이 인간정신의 원숙기에 있음을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아카데미 회원들과 궁정 여성들이 이에 가담했다. 특히 퐁트넬은 《고대인과 근대인에 관한 여담》(1688)을 발표한다. 자연은 언제나 같고 그 힘과 작용도 한결같은 것인 만큼 오늘날에도 옛날 못지 않게 뛰어난 사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각 시대는 그 발견을 다음 시대에 끼쳐주는 것인 만큼 근대인은 고대인의 사상에다 자기가 형성한 것까지 덧붙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파스칼이나 몰리에르, 라신이 나온 이상 17세기가 고대의 어느 세기와 맞설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마침내 부알로가 페로와 화해하자 논쟁은 끝났다. 그러나 진보라는 데카르트 적인 관념을 문학에 적용시킴으로써 18세기 철학에의 길을 터준 신구논쟁은 하나의 정신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절대적인 권위로서 군림해온 종교나 군주정체에 대해서 자유로운 검토를 가해 보자는 생각은 몽테뉴 이래의 전통이다. 그러나 이 '자유사상'이 이성 만능의 17세기에는 정작 루이 14세의 강력한 통제 밑에서 맥을 추지 못하다가 1680년 이후 왕권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다시 고개를 쳐들게 된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퐁트넬과 베일이 자유사상의 투사로 등장하였다. 퐁트넬의 《신탁의 역사》(1687)가 그리스도 교에 대한 과학정신의 첫 공격이라면 베일의 《역사적 비판적 사전》(1697)은 사상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옹호한 첫 비판서로서, 투철한 회의사상과 비판정신을 통해 18세기 계몽사상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Ⅴ. 18세기

구제도가 허물어지고 대혁명이 일어나는 18세기는 계몽주의시대로 불린다. 철학정신 발전의 전반기와 철학정신 승리의 후반기로 양분될 수 있다. 고전예술의 시와 웅변이 물러가고 정치, 사회, 도덕, 종교 등 현실문제의 검토를 통해 땅 위의 인간 행복이 추구되는 18세기는 문학자도 철학자로 불릴 만큼 철학의 세기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계시에 바탕을 둔 전통적 신앙을 인식의 원리로 삼던 전통에서 벗어나 이성과 경험을 인식의 원리로 삼게 된다. 그래서 과학의 권위가 종교의 권위를 물려받게 된다. 온갖 편견을 버리고 실증적 사실에 입각해 새로운 인간조건의 확립을 꾀한다. 그들은 제도의 혁명에 앞서 정신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반기의 철학적 투쟁에 몽테스키외와 볼테르가 투사로서 싸웠다. 후반기에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와 루소가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뚜렷한 진보와 변화를 노리는 의욕에 그 표현형식이 금방 뒤따르지는 못하여 고전주의적 취미는 구태의연하게 전반기를 지배하게 된다.

몰리에르와 라신이 정착시킨 국민극은 이 시기에 여러 계층에 가장 인기 높은 문학 장르로서 데스투슈(1680~1754), 피롱(1689~1773), 르냐르(1655~1706), 당쿠르(1661~1725) 등의 희극이나 라모트(1672~1731), 크레비용(1674~1762) 등의 비극이 많이 상연되었다. 마리보만이 뛰어난 독창성과 재능으로 후세까지 길이 기억되었다. 《사랑과 우연의 희롱》(1730) 《거짓 고백》(37) 등의 성공작으로 마리보는 라신의 연애심리비극과 맞설 만한 연애심리희극을 창시했다. 인간심리의 뉘앙스를 표현하기에 알맞은 그의 유려한 문체와 교묘한 언어구사의 경향은 뒤에 '마리보다지'라 불리게 되었다.

고전주의가 거의 개척하지 못한 장르인 소설이 이 시기에 발전을 보아 근세 신흥문학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문필로 생계를 꾸려 첫 직업작가가 된 르사주(1668~1747)는 《절름발이 악마》(1707)와 《질블라스》(1715~35)에서 신랄한 풍자를 곁들인 당대의 풍습과 각 계층의 인간형을 묘사하는 데 성공하여 후세 사실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마리보는 소설 《마리안의 생애》(31~41)와 《벼락출세한 농부》(35)에서도 정확한 심리분석과 사실적인 세태묘사에 성공하고 있다. 정열에 희생되는 라신의 비극을 마치 소설화한 것 같은 《마농레스코》(31)로 크게 성공한 프레보는 이미 인간의 본능 존중을 내세운 낭만주의 소설의 선구자이다. 《회상록》(34~53)의 저자인 생 시몽은 루이 14세를 거침없이 비판할 정도의 자유사상과 뛰어난 심리적 인물묘사로 이 시대의 특이한 예외적 존재였다. 《잠언집(箴言集)》(46)의 보브나르그 후작은 17세기 사상가들과 반대로 인간의 선한 본성과 고귀한 정열을 믿는 낙천주의자로서 루소의 선구자가 된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사상의 뼈대를 만든 것은 부르주아 혁명을 먼저 이룬 영국에서 배운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이다. 법관이면서 자연과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이기도 한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타고난 계몽주의자이다. 먼저 《페르시아인의 편지》(21)에서 당시 유행하던 이국취미를 이용, 프랑스의 정치 사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법의 정신》(48)에서 정체(政體)의 비교연구와 권력분화의 이론을 통해서 정치를 필연적인 관계들의 인식을 토대로 하는 학문으로 정립시켰다. 거의 18세기를 지배한 볼테르는 시, 극, 소설, 역사, 철학 등 모든 부문에 걸친 문학활동을 했다. 그 사회활동이나 유럽적인 명성과 더불어 이 세기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지만 문학적인 평가에서 고전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볼테르는 구제도에 대한 폭탄과 같은 《영국 서간(철학서간)》(34)을 비롯해 《철학사전》(64), 철학소설 《자디그》(47)와 《캉디드》(59), 역사문학 《루이 14세의 세기(世紀)》(56) 등에서 명쾌한 산문으로 사회의 온갖 악폐와 용감히 싸운다. 그는 역시 열렬한 개혁주의자임에 틀림없다.

후반기는 《백과전서》(51~72)의 간행과 더불어 시작된다. 디드로를 비롯한 조쿠르, 달랑베르 등이 당국의 탄압과 맞서가며 20년 동안 끈질기게 추진시킨다. 이 사업은 과학 철학 및 기술의 계통적인 보급을 통해 반종교 반전제정신을 고취 결집함으로써 대혁명의 한 원동력이 되었다. 디드로는 또한 많은 철학논문과 소설 예술평론을 발표하여 오늘날의 공리주의나 물질주의를 예고하였다. 비극과 희극의 구별의 철폐를 처음으로 극작에서 시도한 공적도 크다. 《박물지(博物誌)》(49~89) 편찬에 평생을 바치다시피 한 뷔퐁은 과학의 정열을 예술의 정열과 결부시켜 자연과학을 문학에 끌어들인 특이한 존재이다. '문체는 바로 사람이다'라는 명언을 담은 《문체론(文體論)》(53)은 그의 아카데미 회원 취임연설이다. 《곤충기》(1870~89)의 파브르와 더불어 프랑스문학의 다양함을 말해주고 있다.

장자크 루소는 계몽사상의 모든 요소를 한 몸에 지니면서 이 시대를 마무리짓고 다음 시대를 예고한다. 착하게 태어난 인간이 사회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신념에서 출발해 인간본성(nature), 즉 자연을 되찾기 위한 사회와 인간의 개조를 부르짖은 루소는 《사회계약론》(1762) 《에밀》(62) 《고백록》(65~70) 등의 명저를 통해 정치, 교육, 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이고도 범세계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혁명을 통한 민권사상의 보급, 자유교육,개성교육. 자연교육 등 교육원리와 방법의 혁신, 자연, 개성, 감성 존중의 낭만주의 문학의 태동 등은 다 그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다. '현대에 이르는 모든 길목에 루소가 서 있다'는 귀스타브 랑송의 지적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철학이 지배하던 18세기는 그 말엽을 장식하는 몇몇 문학 장르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루소의 제자인 베르나르댕드 생 피에르는 이그조틱한 소설 《폴과 비르지니》(87)에서 자연 속의 인간 행복을 찬양했다.

라클로는 호색적인 소설 《위험한 관계》(82)에서 당대 귀족 사교계의 복잡한 연애관계에 예리한 심리해부를 가해 패덕(悖德)의 작가라는 악평을 받았으나 20세기에 와서는 스탕달을 예고한 심리소설가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세비야의 이발사》(75)와 《피가로의 결혼》을 보마르셰는 재치와 반항심이 넘치는 하인이라는 새로운 타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그 경묘 쾌활한 희극 밑바닥에 강렬한 사회비판을 깔아 앙시앵 레짐의 몰락을 암시하였다. 앙드레 셰니에는 산문이 풍미하던 18세기 유일의 두드러진 시인으로서 '새 사상 위에 옛 시구(詩句)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그리스 시의 모든 양식을 프랑스어로 옮겨놓으려고 시도한 마지막 고전파 시인이며 낭만주의 시의 선구자이다.

Ⅵ. 19세기

19세기는 전기 낭만주의 ,낭만주의(1820~50),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50~90)문학 등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프랑스혁명(1789~99)과 나폴레옹의 제1제정(1804~15)은 아카데미나 살롱의 폐쇄, 작가들의 국외 망명으로 문단의 와해를 가져왔다. 지적 선량(知的選良)에 국한되었던 독자층이 서민 대중으로 확대되고 신문과 웅변이 새시대의 총아로 등장하였다. 이른바 이민문학(移民文學)을 통해 들어온 독일과 영국의 문학이 프랑스 낭만주의의 원동력이 되어 스탈 부인과 샤토브리앙을 그 선구자로 만들었다. 문학을 역사적, 지리적 조건들과의 상호관계에서 보고자 한 스탈 부인은 그 《문학론》(1800)과 《독일론》(10)에서 이질적인 독일문학으로부터의 수혈(輸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고전주의 법칙의 절대성을 배격, 창조적인 개성과 감수성을 존중함으로써 낭만주의 이론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정수(精髓)》(1802)를 통해 그리스도 교를 예술적 관점에서 재평가한 샤토브리앙은 이론가라기보다는 예술가로서 생동감 넘치는 새로운 서정적 산문을 이룩했다. 그 속에 에피소드로 삽입된 소설 《이탈라》와 《르네》는 아메리카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비련의 이야기로 고독 우울 방랑 대자연 이국취미 등 낭만주의 문학의 온갖 요소를 이미 갖추고 있다.

한편, 작자 자신의 고뇌를 응시하는 서간체 소설 《오베르망》(1804)의 작자 세낭쿠르와 근대 심리소설의 아버지라고 할 《아돌프》(16)의 작자 뱅자맹 콩스탕도 전기 낭만주의의 기수이다. 그러나 고전주의 및 그 아류에 대한 불만은 무엇보다 그 리리시즘의 메마름에 있었던 만큼 이의 극복을 위해서는 시의 혁신이 앞서야 했다.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준 라마르틴의 시집 《시적 명상(詩的瞑想)》이 나온 20년을 낭만주의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심정 토로의 시인 라마르틴에 이어 비관 체념 극기의 철학을 담은 시로 인간 고뇌의 장엄함을 노래한 비니, 그 다양한 시 활동이 거의 19세기 전체를 덮고 있는 위고, '순전한 흐느낌인 불멸의 아름다운 노래'라고 읊은 타고난 서정시인 뮈세 등 이른바 4대 시인이 낭만주의 시를 확립시켰다.

한편, 고전파와의 싸움이 가장 심했던 것은 그들의 거점인 연극에서였다. 위고는 이 문학투쟁에서도 젊은 시인들을 이끌며 앞장섰다. 희곡 《크롬웰》(27)의 서문에서 새로운 문학의 이념을 제시하고 온갖 규칙 및 희극과 비극의 구별을 폐기한 드라마를 제창한다. 이어 그 본보기로서 《에르니니》(1830)를 내놓았다. 그는 45일간의 공연기간 동안 온 파리를 법석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싸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음으로써 낭만파 총수의 자리를 굳혔다. 낭만주의 극은 그 후에 위고의 극작 활동과 비니의 《채터튼》(35) 등에 의해 틀이 잡혀갔다. 고전극의 갖은 속박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은 오히려 그러한 이론투쟁에서 벗어나 있던 타고난 낭만주의자 뮈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의 《마리안의 변덕》(33)이나 《로렌자치오》(34) 등은 시정(詩情)과 심리묘사, 웅변과 재치, 환상과 절도가 조화를 이룬 낭만파 희곡의 정수이다.

소설에서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31)이나 《레 미제라블》(62) 같은 문제작을 남겼다. 또 대중 사이에서 크게 성공한 뒤마의 역사소설 등도 있다. 소설의 19세기를 활짝 열어제친 것은 아무래도 발자크와 스탕달이다. 발자크 자신이 나중에 《인간희극》(29~48)이라는 표제로 소설 95편 묶었다. 황금만능과 출세주의가 판치던 왕정복고시대의 부르주아 사회의 생생한 일대 파노라마였다. 환상과 현실이 뒤얽힌 이 기념비적 작품군은 낭만주의 소설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후세에 사실적 소설로서 평가받게 된다. 낭만파 작가들에게 공통된 서정도 감상도 없는 스탕달은 냉철한 분석정신과 치밀한 심리묘사, 법전(法典)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 군더더기 없는 비정(非情)의 문체 등에 의해 낭만주의시대의 특이한 리얼리스트엿다. 자신이 예언한 대로 80년대에 가서나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현대에 와서 더욱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보인 조르주 상드도 농민생활을 소재로 한 전원소설들에서 사실적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전형적인 단편작가이자 고고학자인 메리메도 현실도피적인 소재나 이국취미 등 낭만적 요소를 지녔었다. 그 표현은 간결 적확하고 몰개성적인 사실적 수법으로 일관되어 있다. 소설이 19세기에 비로소 문학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시민계급의 현실에 대한 강한 관심에 가장 걸맞은 장르라는 점과 교육의 보급에 따른 독자층의 확대 등 요인도 있엇다. 그러나 살롱 대신 문학의 온상으로 성장한 저널리즘의 공도 크다. 특히 1828년에 창간된 《두 세계:Revue des deux mondes》를 비롯한 잡지들은 숱한 걸작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소설에서의 발자크에 비길 만한 공을 비평문학에서 세운 생트 뵈브는 이러한 저널리즘을 타고 나타난 첫 사실주의적 비평가이다.

57년에 나온 《보바리 부인》은 사실주의의 본격적인 등장을 뜻한다. 플로베르는 《살람보》(63) 같은 낭만적인 소설도 썼다. 《부바르와 페퀴셰》(81)에서 더욱 사실주의에 철저했다. 공쿠르 형제의 《제르미니 라세르퇴》(65)나 졸라의 《테레즈 라캥》(67)이 연이어 나옴으로써 사실주의는 틀이 잡혀갔다. 타고난 시인 기질 때문에 정감과 유머가 넘치는 작품을 쓴 도데 같은 사람도 있어 사실주의도 다양하였다. 현실의 충실한 재현에 만족하지 못한 졸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실험과학(특히 생물학)의 방법을 문학에 적용하는 자연의 문학이론을 그의 《실험소설론》(80)을 통해 발표했다.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 《루공마카르 총서》(71~93)이다. '제2제정하(第二帝政下)의 한 집안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20편의 소설은 발자크의 《인간희극》을 본뜬 한 시대의 사회묘사이다. 그러나 5대에 걸친 유전적 결함들의 생물학적 연구를 시도하고 있는 점이 새롭다. 플로베르의 제자인 모파상은 300여 편의 단편소설로 예술의 가장 완벽한 경지에 이르러 자연주의문학의 완성자로 일컬어진다. 문학적 진실과 과학적 진실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어서 예술이 인생의 사진을 보여주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피에르와 장》(88)의 서문에서 지적, 자연주의의 한계를 명시하고 있다. 또한 자연주의에서 출발해 신비주의로 나간 위스망스나 몽상의 세계로 도피한 릴라당은 자연주의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사실주의 연극은 에밀 오지에(10~89)에 의해 개척되었다. 사회의 현실 문제들을 소재로 하여 건전한 부르주아 도덕을 옹호하고 있다. 그의 《푸아리에씨의 사위》(80) 등의 풍속희극은 제2제정 때 사회상의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뒤마 피스(24~95)는 부르주아 사회의 편견과 인습을 고발하는 《춘희(椿姬)》(52) 등의 문제극이었다. 라비시(15~88)는 《페리숑씨의 여행》(80) 등의 풍자적 노래가 삽입되는 소희극 보드빌(vaudeville)로 연극에서 사실주의를 대표하고 있다. 냉혹한 필치로 인간의 추악함을 그려낸 앙리 베크의 《까마귀떼》(82)로 무대 위에 자연주의가 실현되었다.L 그러나 지나친 현실 폭로가 관중의 환심을 오래 사지는 못해 자연주의 극은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앙드레 앙투안이 81년에 세운 자유극장과 더불어 보다 자유로운 근대극의 태동을 보게 된다.

역사비평문학에서 이 시대를 대변한 것은 르낭과 텐이었다. 르낭은 신학자들에게서 종교사를 아서 내어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한 첫 사람이다. 텐은 모든 정신과학에 자연과학적 방법을 적용한 결정론자로서 19세기 후반기 문학에 미친 영향이 크다. 시단에서 르콩트 드 릴이 이끄는 고답파(高踏派)가 낭만파의 지나친 심정 토로를 억누르고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념으로, 52년에 나온 고티에의 《칠보(七寶)와 나전(螺鈿)》 및 르콩트 드 릴의 《고대풍(古代風) 시집》이 이러한 새 기운을 예고하였다. 고답파의 시집 《현대의 파르나스》(66,71,76)에는 이 두 시인을 비롯해 방빌, 에레디아, 보들레르, 프뤼돔, 코페, 베를렌, 말라르메 등의 시가 실렸다. 프뤼돔은 예술지상에서 벗어나 과학과 산업을 주제로 삼으면서 시의 사회적 효용을 중시했다. 《악의 꽃》(57)의 보들레르는 상징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고답파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정확 세밀한 묘사에 골몰했다면 상징파는 내면생활과 생존의 신비를 파고들어 그 이미지를 상징 등의 간접표현을 써서 들추어내고자 하였다. 《목신(牧神)의 오후》(76)의 말라르메를 비롯한 베를렌, 랭보 등이 풍성 다양한 시 활동으로 프랑스 시단을 전에 없이 찬란하게 장식하며 그들의 상징주의는 발레리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다. 논리와 절연된 일종의 자동적 산문으로 자신의 인간조건에 대한 혐오와 절망 분노를 터뜨린 《말도로르의 노래》(69)의 로트레아몽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비로소 이해 평가된 20세기 문학혁명의 선구자이다.


Ⅶ. 20세기

연대에 따른 문예사조의 집대성이 전세기들에서처럼 뚜렷하지 않다. 20세기 문학은 오히려 여러 갈래로 공존하는 경향이 있다. 편의상 제1차 세계대전 전, 양차 대전 사이, 전후의 3세대로 구분되는 것이 보통이다. 문학활동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치는 살아남은 대가들은 자연주의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했다. 그 경향은 각각이어서 아나톨 프랑스(1884~1924)의 지적 회의주의, 로티(1850~1923)의 이국취미, 부르제(1852~1935)의 전통주의, 바레스(1862~1923)의 국민주의 등 매우 다양하다. 더구나 1897년에 일어나 프랑스 정신계를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은 문학계의 사상 대립을 빚어내었다. 반(反)드레퓌스파는 부르제와 바레스가이다. 드레퓌스파는 졸라와 프랑스 그리고 다음 세대인 로맹 롤랑, 앙드레 지드 등이 가담했다. 국가이익과 질서를 앞세우는 민족주의와 정의와 이성을 내세우는 인도주의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철학계에서 19세기 실증주의의 계승자들과 이성이나 과학의 한계를 선언한다. 직관을 내세워 생명의 힘을 재인식시킨 베르그송 계열이 맞선다. 거기에 악숑 프랑세즈 계열인 샤를 모라스, 레옹 도데의 극우사상과 장 조레스, 조르즈 소렐의 사회주의가 겨룬다. 이것은 20세기의 분열과 혼돈을 예고해주었다. 그러나 대화나 논쟁을 통해 풍요한 새 창조력의 성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프랑스문학의 특징인 20세기 프랑스문학은 어느 전 세기의 그것보다도 또 어느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질과 양에 있어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 아나톨 프랑스의 4부작 《현대사》(1896~1901)와 《신들은 목마르다》(1912), 로티의 《아이슬란드의 어부》(1886), 부르제의 《제자》(89)와 《죽음의 뜻》(1915), 바레스의 《뿌리뽑힌 사람들》(1897)과 《영감받은 언덕》(1913), 르나르의 《홍당무》(1894),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1903~1912), 알랭푸르니에의 《그랑 모느》(1913) 등의 걸작 소설로 약 20년 동안의 문학적 수확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민감한 적응에서 시가 소설을 앞질렀다. 알베르 사맹, 앙리 드 레니에를 비롯한 에밀 베라렌, 마테를링크 등의 신상징주의, 노아유 부인과 폴 포르 등의 신낭만주의에서 본연주의(naturisme), 전일주의(unanimisme), 환상주의(fantaisisme)에 이르기까지 갖가지의 새로운 시법 모색이 혼란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고유의 새로운 시 개척에서 출중한 전위시인은 아폴리네르이다. 이 시기에 군림한 대가들은 프랑시스 잠, 샤를 페기, 폴 클로델 같은 서정적 가톨릭 시인들이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 미학을 세우기도 한 아폴리네르는 시집 《알코올》(1913) 등으로 대담한 시법 혁신에 성공한다. 1920년대 이후의 초현실주의 시 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에스프리 누보(esprit nouveau)'의 대변자이다. 프랑시스 잠은 자연과 시인과의 대화에서 신의 계시를 느끼게 하는 순박 섬세한 전원시인이다. 페기는 잔 다르크를 찬양하고 자신의 독특한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를 정립한 신비와 이단(異端)의 가톨릭 시인으로 다음 세대에 가서 그 명성과 영향력이 확립되었다. 잠과 함께 상징파에서 출발한 클로델은 시편 하나하나를 바로 신앙행위로 인식한 철두철미한 가톨릭 시인이다.

갖가지 경향이나 유파의 난립현상은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앙투안의 자유극장운동을 잇는 뤼녜포의 작업극장(1893) 등 실험무대운동과 병행해 살아남은 유파들이다. 곧 에드몽 로스탕의 낭만극, 쥘르나르와 옥타브 미르보의 자연주의극, 퀴렐 등의 문제극, 사상극, 포르토 리슈 등의 연애, 심리극, 쿠르틀린 등의 희극, 폴 포르 등의 상징극 등이 공존했다. 독창적인 극의 시도에서 성공한 것은 자리의 《위뷔왕》(1895)의 전위극과, 로맹 롤랑의 《이리떼》(1998) 《당통》(1901) 등의 민중극, 그리고 클로델의 《불모》(1910) 《마리아에게의 알림》(1912) 등의 종교극이다.

비평문학은 진화론을 도입한 과학주의적 비평을 시도한 브륀티에르가 있다. 이와 달리 작가의 내면생활에 치중한 해설비평의 파게, 인상비평의 르메트르, 학문으로서의 문학사의 방법을 최초로 확립해 명저 《프랑스 문학사》(1894)를 완성시킨 귀스타브 랑송 등이 있다. 이 세대의 평단(評壇)을 대표하고 있다. 양차 대전 사이의 4반세기는 경제공황(1929), 히틀러의 집권(1933), 인민전선 결성에 따른 좌우의 격돌, 에스파냐 내란(1936) 등이 안팎으로 빚어내는 소용돌이에 문학이 전에 없이 말려 들어간 시기이다. 그러나 나이로는 롤랑이나 클로델과 같은 전 세대에 속하는 지드, 프루스트, 발레리가 인생탐구의 3대 거장으로서 이 시대에 군림했다. 역시 나이로 다음 세대인 모리아크, 마르탱 뒤 가르, 쥘 로맹, 뒤아멜 등과 같은 문학세대를 이루고 있어 문학 면에서 전에 없이 풍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지드나 프루스트에 이르러 모랄리스트로서 인간 내면탐구와 예술가로서 새로운 미학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변모한다. 지드의 《배덕자(背德者)》(1902)에서 《테토우스》(1946)에 이르는 일련의 소설은 끊임없이 거듭되는 자기탈피를 통한 새 모랄의 탐색했다. 미래의 소설구조를 예고하는 《사전(私錢)꾼들》(1926)도 있다. 7부 15권의 입체적 구조를 지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8)는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에 바탕을 둔 생생한 과거재현법의 추구한다. 그러면서 자아의 끊임없는 단절 변모와 죽음에 대한 끈질긴 집념이 전편을 꿰뚫고 있다. 그리고 예술에 의한 죽음의 극복이라는 초인적 시도로 평가된다.

쥘 로맹, 마르탱 뒤 가르, 뒤아멜은 발자크나 졸라의 전통을 이은 대하소설에서 인간을 사회 속에 두고 그려냈다. 발레리, 라르보, 몽테를랑 등은 미술이나 시에서와 같은 대담하고 전위적인 지적 모험을 소설에서 시도하였다. 모리아크를 비롯한 베르나노스, 쥘리앙 그린 등의 가톨릭 작가들은 30년대를 전후한 정신적 고뇌와 불안을 신앙을 토대로 그려냈다. 20세기에 태어난 생텍쥐페리와 앙드레 말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의 긴박한 정신상황에서 행동에 의한 새로운 가치탐구라는 비장한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이 밖에 콜레트, 라디게 등의 심리소설, 앙드레 모루아, 라크르텔, 마르셀 아를랑 등의 모랄리스트 소설, 외젠 다비 등의 서민소설, 바르뷔스, 아라공, 셀린 등의 혁명적 소설, 장 콕토나 마르셀 에메의 기발한 소설, 조르지 심농의 추리소설 등 실로 다양한 소설들이 있다.

시단에서 먼저 말라르메의 제자인 발레리가 모든 사조나 유파를 초월해 독자적인 시 세계를 이룩한다. 시를 기하학적인 지적 활동과 같은 것으로 보고 영감을 배격한다. 엄밀한 방법과 테크닉을 신조로 삼아 제작된 《해변의 묘지》(1920)나 《젊은 파르크》(1917)는 철학과 음악과 순수지성과 관능적 감각이 정묘한 조화를 이룬 현대시의 최고봉이다. 또한 그는 탁월한 모랄리스트 문명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산문 에세이집인 《바리에테》(5권 : 1924~1944) 등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파괴의 몸부림을 치던 다다운동에서 출발한 브르통, 아라공, 수포, 엘뤼아르 등의 젊은 시인들이다. 이들은 브르통이 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계기로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한다. 로트레아몽에서 스승을 발견하고 프로이트의 잠재의식 이론에서 무기를 얻는다. 초현실주의는 논리적 사고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의식세계를 파괴하고 자동서술(自動敍述) 등의 방법으로 무의식 심층 세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써 숨겨진 생명력의 해방을 꾀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아라공, 엘뤼아르의 이탈로 분열되긴 했다. 그러나 막스 자콥, 산드라르스, 폴 르베르디, 파르그, 쉬페르비엘, 콕토, 장 주브, 생 종 페르스 등의 많은 시인을 배출한 점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운동이다.

연극도 자크 코포를 중심으로 한 전위극 운동에 힘입어 전에 없이 활기를 띠었다. 루이 주베, 조르주 피토에프 등이 이 운동을 이어받았다. 또 지로두, 콕토, 살라크루, 장 사르망 등이 많은 문제작들을 내어 이에 가담하였다. 부르주아 취향의 희극으로 마르셀 파뇰의 풍자극, 사샤 기트리의 익살극, 사상면에서 문학성이 짙은 연극으로 《상선(商船) 테나시티》(1920)의 빌드락, 《크노크》(1923)의 쥘 로맹 등이 이 시기의 극단을 장식하였다.

비평문학은 베르그송을 반박한 쥘리앙 방다의 합리주의, 자크 마리탱의 가톨릭 사상, 가브리엘 마르셀의 그리스도교적 실존주의가 이 세대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체계 없는 철학의 알랭이 그 뛰어난 강의와 수필들로 하나의 정신 가족을 길러내었다. 지드가 창간한 월간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 NRF》는 비평문학의 본산(本山)으로서 작가와 독자를 이어 주는 중개자로서의 공적이 컸다. 그래서 티보데나 샤를뒤 보스 같은 평론가를 배출하였다. 또한 알랭처럼 체계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사색에 알맞은 장르로서 등장한 에세이는 앙드레 모루아 같은 박식다재한 수필가를 낳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점령군에 협력한 샤를 모라스, 몽테를랑, 셀린 등도 있었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 앙드레 샹송 등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웠다. 모리아크, 아라공, 장 게노, 카뮈, 베르코르 등은 <심야총서>같은 비밀출판으로 대독(對獨) 레지스탕스를 벌였다. 베르나노스나 생텍쥐페리처럼 망명지에서, 또 사르트르처럼 수용소에서 간접적인 항독을 계속한 작가들도 있다.

양차 대전 사이에 활약한 작가들의 창작활동은 종전 후에 계속된다. 해방 직후의 불안기를 대변한 것은 실존주의 문학이다. 소설 《구토》(1938)로 작가생활에 들어간 사르트르와, 《초대받은 여자》(1943)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앙가주망(사회참여)을 통해서 활동한다. 《이방인(異邦人)》(1942)의 카뮈는 반항을 통해 새로운 휴머니즘을 모색함으로써 1940년대의 문학계를 휩쓸었다. 5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설은 전환기를 맞는다. 전쟁과 더불어 청년기를 맞아 허무와 불신이 몸에 밴 세대가 누벨바그(새물결)의 기수로 등장한다.

《칼》(1949)에서 《어느 사랑 이야기》(1953)에 이르는 로제 니미에, 《슬픔이여 안녕》(1954)에서 《까무러친 말》(1960)에 이르는 프랑수아 사강 등이 철학에 치우쳐 변모된 실존주의 소설에 반발, 풍자 유머 모험 환상 관능 등에 의한 소설의 새로운 변모를 꾀하였다. 그러나 이들 소설이 개성을 제대로 지닌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소설의 전통적인 형식에 매어 있는 데 반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사전꾼들》이 보여준 소설 개혁의 시도를 더욱 밀고 나가 소설적인 허구와 맺어져 있는 모든 요건을 물리치려는 실험적인 시도 등이 나타난다. 마침내 사르트르가 '앙티 로망(反小說)'이라고 부른 것에 도달한다.

이 세 번째로 변모된 소설은 나중에 '누보 로망(새소설)'이라는 명칭으로 낙착된다. 나탈리 사로트의 《낯선 사람의 초상》(1948)으로 이목을 끌기 시작한 이 그룹은 로브그리예의 《고무》(1953)에서 《뉴욕혁명계획》(1970)에 이르는 철저한 시각적 객체 묘사와 시간의 분해, 동시화법으로 갖가지 실험을 거듭한다. 이 새롭고 놀라운 주장이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표명된 것은 미셸 뷔토르의 《시간표》(1956) 《변모》(1957) 및 《단계》(1960)이다. 이는 그가 새로운 테크닉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그것을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레지스탕스 시절에 비탄과 분노를 담은 대중적 표현으로 국민적 공감을 북돋우는 데 가장 성공한 것은 시인들이었다. 아라공이나 엘뤼아르 등을 뺀 대부분의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세계 탐구로 되돌아왔다.

피에르 에마뉘엘, 파트리스 드 라투르 뒤 팽, 뤼크 에스탕 등은 영혼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기유비크나 프랑시스 퐁스 같은 시인들은 사물세계의 사실적 표현에 전념한다. 그런데 초현실주의에서 출발해 전후에 가장 큰 명성을 누렸던 시인은 화가로도 이름난 앙리 미쇼, 시나리오 작가로도 유명한 자크 프레베르, 정의와 자유의 정신으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있는 르네 샤르 등이다. 전후 세대로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현상학적인 명상을 시에서 전개하는 이브 보느포아가 기억될 만하다. 사르트르나 카뮈는 극작가로서 활약이 커 문제작들을 남겼다.

그러나 전후의 대표적인 극작가는 장 아누이와 반연극(反演劇)의 기수 사뮈엘 베케트와 외젠 이오네스코이다. 《앙티곤》(1940)에서 《금붕어》(1970)에 이르는 많은 걸작에서 아누이는 풍자와 고뇌의 표현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고도를 기다리며》(53)의 베케트나 《대머리 여가수》(1950) 《학살유희(虐殺遊戱)》(1970)의 이오네스코는 종래의 연극구조의 파괴 위에 새 연극의 구성을 꾀하였다. 비평문학 분야에서 사르트르, 카뮈 등의 실존주의 문학이론이 50년대 초반까지는 주류를 이루었다. 《예술심리학》 3부를 완결한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 예술에 관한 탐구는 최근의 《덧없는 인간과 문학》(1976)에까지 이어졌다. 《인간의 증인들》(1957)의 피에르 앙리시몽, 《20세기의 지적 모험》(1959)의 알베레스, 《로트레아몽과 사드》19(49)의 모리스 블랑쇼 등은 작가론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신비평과 전통적 비평 사이의 논쟁은 17세기 말의 신구논쟁을 방불케 한다. 신비평은 하나의 파가 아니어서 여러 갈래가 있다. 인문과학을 끌어들여 문학연구의 과학화를 꾀하고 있는 점은 공통된다. 프로이트에서 출발해 실존적 정신분석의 입장을 취한 사르트르는 1946년에 창간한 월간지 《현대:Les Temps moderne》를 중심으로 현대작가들에 대한 뛰어난 평론들을 발표하면서 보들레르, 플로베르 등의 작가연구를 계속, 실존주의 비평의 온상이 되었다. 《몽상(夢想)의 시학(詩學)》19(60)의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식론 연구에서 출발해 시적 상상력을 탐구하여 현대비평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구조주의에 입각한 형식주의의 비평으로는 기호학(記號學)에서 출발해 '누보 로망'의 이론적인 뒷받침을 한 롤랑 바르트와 잡지 《시학지》의 편집동인이며 《문학의 이론》(1965)의 저자인 토도로프 등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분석》(1962)을 야콥슨과 함께 시도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 말로와 사르트르, 카뮈를 이어 프랑스 사상계를 철학자 '사회학자인 R. 아롱과 더불어 대표한다. 철학 언어학 등의 인문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도 긴밀한 교류를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 문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 별첨



* 예술기행 / 민중극의 메카, 아비뇽 / 김화영 / 고려대교수



그 장내場內와 장외場外


「죽은 사람들, 내가 사랑했던 옛 사람들, 난 그들을 내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요. 그들은 매일같이 내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나곤 해요. 그저 재미있다는 느낌이지요. 나는 산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 못지 않게 죽은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고 있어요.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우글거리고 있거든요. 나는 처음에는 이를테면 그저 하나의 조그만 마을에 지나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적인 대도시가 되고 말았어요. 내 마음의 마을은 그만큼 인구가 불어나 버렸거든요 나는 내 과거를 안고 다녀요. 그러나 그 과거 속으로 고개를 내밀고 들여다보진 않아요. 나는 그저 나의 과거일 뿐이랍니다. 반면 미래를 멀리 서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가오기를 기다려요. 물론 그 모든 것 다 떠메고 다니자니 무겁기 짝이 없지요. 우리네 직업에 있어서 제일 끔찍한 일은 앞서 있었던 것을 항상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에요. 관계를 끊어야 하는 거 말예요. 안도감을 주는 그 무엇에다가 우리를 비끌어 매어주는 그 모든 관계를 다 끓어버려야 해요. 지나간 세월동안 내가 연기했었던 그 모든 인물들이 어쩌면 내 방 커튼 뒤에 숨어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런가 어떤가 한번 살펴보긴 해야겠어요. 그러나 극중인물들이란 어린 자식들과도 같아요. 뱃속에서 배어 가지고 낳아서 다 키워놓고 나면 안녕! 이지요. 이제 그들은 각자 저 혼자서 다른 사람들, 즉 관객들 속으로 제 갈 길을 가고 마는 거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대 배우 쟌느 모로다. 금년 여름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그 여자는 연극배우의 존재방식에 대하여, 그리고 그녀의 기나긴 예술적 이력 속에 가로놓여있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추억에 대하여, 이렇게 감동적으로 술회했다. 그녀가 올해 정확하게 몇 살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되던 해, 그러니까 1947년 여름에 교황청 뜰의 무대에 섰을 때 쟌느 모로는 아직 파리 연극학교 학생이었다. 그리고 1951년, 1952년(아, 그때 우리는 6. 25의 전화 속에 파묻힌 채 굶주리고 있었다!)제라드 필립과 함께 그 유명한 「옹부르의 왕자」를 연기하면서 아비뇽 페스티벌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매일같이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속에는 누구보다도 쟝 빌라르와 제라르 필립이 가장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녀의 기억 속에서 만이랴. 그 쟌느 모로가 금년에 다시 페르난도 로하스의 극「라 셀레스틴느」의 주역으로 교황청 뜰의 무대에 섰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니 가히 이 페스티벌의 산 증인이라 할만하다. 그 사이에 빌라르도, 제라르 필립도 갔다. 그러나 쟌느 양은 빛나는 눈빛으로 아비뇽의 무대 위에 돌아왔다.

프랑스 혁명 2백주년 기념행사들과 때맞춰 프랑스 외무성의 초청을 받은 10명의 교수단과 함께 내가 아비뇽에 도착한 것은 그러나 축제가 시작된 지도 열흘이 지난 7월 23일이었다. 그에 앞선 2주일을 엉뚱하게도 니스에서 보내면서 사실은 12일부터 이미 시작된 아비뇽 페스티벌의 순서가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아쉬움이 많았었다. 미리 전해 받은 프로그램에 따르면 이 페스티벌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앙트완느비테 연출, 쟌느 모로 주연의 「라 셀레스틴느」는 7월 12일부터 22일까지로 예정이 잡혀있었으니 그 기간동안 꼬박 우리는 니스와 그 근교의 미술관과 바닷가를 돌아다니느라고 그걸 고스란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페스티벌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는 8월 3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속도 빠른 TGV기차로 아비뇽 역에 도착했을 때는 때아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순한 눈빛의 어떤 젊은 아가씨가 마중을 나왔다. 사미야라는 이름이 귀에 설다 했는데 알고 보니 알제리아 출신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을 숙소로 안내해갈 대형버스는 우리를 태운 채 우람한 아비뇽 요새의 성벽을 따라 도시를 거의 완전히 한바퀴 돌더니 역에서 우측으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성문 앞에다가 내려놓았다. 성안의 구시가 길이 너무 좁아서 버스가 들어갈 수 없으니 여기서부터 숙소까지는 걸어 가야한다는 설명이었다. 운전기사는 그 독특한 억양으로 보아 영국인이었다. 아랍태생의 안내원에 영국인 기사라! 축제의 아비뇽은 바야흐로 「국제적」이 되어 있었다. 마음씨 좋은 그 아가씨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참 뒤에 우리들의 짐을 숙소까지 실어다줄 미니 버스 한 대를 구해왔다. 우리나라 봉고버스와 거의 같은 모양의 낡은 자동차 표면에는 각종의 그림과 글자들이 그려져 있어서 히피들이 타고 다니곤 하는 그 친근하고 약간 불결한 교통기관을 연상시켰다. 어떤 극단이 사용하는 차를 잠시 빌렸다는 것이었다. 여름마다 아비뇽을 찾아오는 연극광들의 표현이 생각났다. 「7월에 아비뇽 역에 내리면 역 앞 광장에서부터 공기 속에 연극냄새가 난다!」마냐낭 성문에서 숙소까지는 사실 걸어서 5분도 채 안되었다. 아비뇽에서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라는 콜레쥬 셍-죠젭의 기숙사가 우리의 숙소였다. 1백50년이나 묵은 우람하고 음침한 ?자 3층 건물, 넓은 마당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연극연습을 이제 막 끝낸 참인 듯한 일단의 젊은이들이 몰려 서 있었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미니버스를 빌려 주었던 것이다. 뜻밖의 일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 일단의 아시아 연극인들 속에 땀을 흘리고 서있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내가 이장호 감독의 영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제작과 관련하여 한동안 만나곤 했던, 그 영화의 남자주인공역의 김명곤이었다. 그야말로 「아비뇽!」이었다. 그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배우들로 구성된 혼성극단의 일원으로 아비뇽 페스티벌에 「아시아의 외침」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김명곤씨 이외에도 눈빛이 서글서글한 또 한사람의 젊은 연기자가 더 있었다. 그 이튿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산울림 극단」의 여러분들과 아울러 내가 2주간의 아비뇽체류동안에 자주 얼굴을 만나게 될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초장부터 벌써 축제분위기는 급속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금년으로 42번째에 접어든다. 이제 그 역사는 하나의 전설, 하나의 신화 혹은 하나의 「종교」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 종교의 신은 쟝 빌라르Jean Vilar요, 메시야는 제라르 필립Gerard Philippe 이요, 이제는 성인으로 추앙되는 사도들로 말하자면 마리아 카자레스Maria Casares 알렝 퀴니Alain Cuny, 미셸 부케Michel Bouquet,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 혹은 캐럴린 칼슨Carolin Carlson, 그리고 마돈나는 쟌느 로랑Jeanne Laurent이라고. 1963년 TNP(프랑스 국립민중극장)의 극장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 축제의 신 쟝 빌라르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고 소박하게 그 「전설」을 요약했다. 「아시다시피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옛날 옛적에 한 남자와 한 도시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였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어 아기를 낳았으니 그 이름을 페스티벌이라 하였다.」

그 출발을 좀더 산문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1946년 12월 아비뇽 출신의 대시인 르네 샤르Rene Char가 쟝 빌라르를 찾아갔다. 당시 빌라르는 쟈크 프레베르, 마르셀 카르네의 콤비가 만든 영화 「밤의 문」으로 데뷔한 34세의 연극인으로서 10년 간의 배우와 연출자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T. S 엘리엇의 「대 사원의 살인」을 비유, 콜롱비에 극장에 올려 무려 1백 50회의 공연기록을 세우고 비평가상, 연극대상을 받았다. 르네 샤르는 자기가 시나리오와 다이얼로그를 쓴 영화 「물의 태양」에서 빌라르가 역을 맡아주기를 청하기 위하여 찾아간 것이다. 그 기회에 그는 빌라르를 크리스티앙 제르보에게 소개했다. 제르보는 「예술 노트」지의 사장으로 마티스, 레제, 칸딘스키, 피카소 등 거장들의 작품을 가지고 아비뇽에서 3개월 간의 「현대회화 전」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발전되어 샤르와 제르보는 그 기회에, 즉 1947년 4월 아비뇽 교황청 뜰에서 어느 토요일 단 1회로 제한하여 「대 사원의 살인」을 공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빌라르는 우선 그 작품에 대한 권리가 자신의 손을 떠났는데 다가 별로 신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특히 그의 생각으론 교황청의 뜰이 극장으로는 적절치 않았던 것이다. 「그곳은 벽의 돌덩어리 하나 하나가 다 어떤 과거를, 아주 구체적인 과거를 말하고 있는 장소다. 우리가 그 뜰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벌거벗은 뜰에 발을 들여놓아 보면 그야말로 아무런 형상이 없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벽이 아니라 바닥이 그렇다는 말이다. 기술적으로 이건 연극이 불가능한 장소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연극을 하기에 나쁜 장소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역사가 너무나 웅변적으로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물론 지금부터 6세기 전인 13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황 클레멘트 5세는 당파싸움을 피하여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오늘날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40년 후인 1348년 교황 클레멘트 6세는 이 도시를 시실리의 여왕으로부터 매입했다. 그사이 도합 18년에 걸쳐 이곳에 교황청이 건축되었다. 여섯 사람의 교황이 이곳을 거쳐갔고 1377년 그레고리 11세가 마침내 로마의 교황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교황의 로마귀환에 불만을 품은 추기경회의는 또 하나의 교황을 선출했으니 역사는 이를 참칭교황이라고 부른다. 이 교회분리는 마지막 참칭교황이 1403년 아비뇽을 떠나도 수습되지 않고 있다가 1499년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에서 막을 닫게 된다. 이러할진대 그 어느 연출자, 그 어느 배우가 여기에 깃들어있는 그 요란한 역사의 목소리를 눌러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그 시대, 장소, 물적인 조건, 빌라르의 기질과 기분, 모두가 아비뇽 페스티벌의 탄생을 가로막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축제는 태어났다.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새로운 연극의 탄생을 의미했다. 빌라르는 제안을 수락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안을 스스로 내놓았고 그것을 성사시켰다. 세 편의 전혀 다른 연극을 제작하여 아비뇽 교황청 뜰에서 선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950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부터 4년 전 내가 모리스 카즈뇌브, 그리고 쿠소노와 함께 파리의 리용 역에서 기차를 탔을 때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내게는 상당히 야심에 찬, 그리고 그럴싸한 목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이었다. 연극에다가, 연극이라는 집단적 예술에다가, 꽉 닫혀진 곳이 아닌 새로운 장소를 다시 찾아주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들에게는 사르두, 바타이유, 앙트완느의 그것과는 다른 무대를 제공하고 골방과 지하실과 살롱에서 시들어 가는 예술인이 속 시원히 숨을 쉴 수 있게 하고 마침내 건축과 극적인 시를 서로 만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는 이처럼 아름답게 회고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 그 같은 계획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프랑스의 큰 도시에서 작은 소읍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다 한 가지씩의 페스티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저 엄청난 예산을 움직일 수 있는 몇몇 도시의 특권인 음악 페스티벌이 몇 군데, 그것도 손꼽을 만큼 드물게 열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이로이트는 나치의 악몽에서 간신히 깨어나려는 참이었고 잘스부르그는 모차르트의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모색하는 중이었고 엑상프로방스의 음악 축제는 나른하게 졸고 있었다. 반면 연극 페스티벌이라는 것은 아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즈음에 예산지원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그것도 문화예술의 지방자치라는 개념이 아직은 낯설기만 한 사정 속에서 지방의 소도시에 배우들을 모아 가지고 하늘이 보이는 무대 위에다가 무려 3편씩의 연극을 선보인다는 것은 과연 모험중의 모험이었다. 「아비뇽? 아니 왜 타이티에 가서 무대를 차리지 그래요.」하고 비웃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모험은 시작되었다. 아비뇽시장이 시의 예산으로 50만 프랑을 대기로 했고 문화성의 공연국장 잔느 로랑이 50만 프랑을 대여했으며 쟝 빌라르 자신이 부족 분을 구해 댔다. 이리하여 1947년 9월 4일에서 10일까지 「아비뇽 예술주간」이 막을 올렸다. 3개월 간의 현대회화전 회에 고전 및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두 가지 음악회, 그리고 7회에 걸친 연극공연이 그 내용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Ⅱ세의 비극」을 쟝 퀴르티스가 각색하고 쟝 빌라르가 연출하여 교황청 뜰에서 3회 공연, 폴 클로델의 「토비와 사라의 이야기」를 모리스 카즈뇌브가 연출하여 교황청「과수원」에서 2회 공연, 젊은 모리스 클라벨의 작품 「정오의 테라스」를 쟝 빌라르가 연출하여 시립극장에서 2회 공연.

오직 웅장한 고성의 벽과 이 지방 특유의 거센 바람인 미스트랄 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엄청난 것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건축가, 무대장치 전문가, 화가, 소설가, 여인숙 주인, 그리고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대가 다같이 힘을 합하여 무대를 만들고 조명장치를 했다. 그리고 알렝퀴니, 미셸 부케, 실비아 몽포르, 쟌느 모로 등 25명의 배우들이 악조건 속에서 싸웠다.

전체 7회 공연에 입장한 총 관객의 수는 4천8백18명, 그 중 유료관객은 겨우 3천명 남짓했다. 물론 상당한 적자를 냈다. 그러나 빌라르와 배우들을 위시하여 이 축제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은 「전에 없던 그 무엇」을 찾아내었고 창조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연기자들이 고정적으로 식사를 했던 「오베르쥬 드 프랑스」의 주인 에세 빌라르는 입장료 수입으로 밀린 식사대금을 다 지불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하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렇다면 더욱 내년에 또 와야 갰군요.」

극단은 곧 적자에도 불구하고 아비뇽 축제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948년에 이미 「카르푸르」지의 르네 바르쟈벨은 다음과 같은 열광적인 기사를 썼다.

「이제부터 연극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니 아름다움의 한 순간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일 년에 한 번씩 마치 집시들이 셍트-마리-드-라-메르를 찾듯이 성지 아비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부자들은 호화로운 자동차를 타고 그곳으로 가서 가장 비싼 좌석을 예약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의무다. 경제적으로 중간층인 사람들은 부르타뉴나 노르망디로 가는 바캉스를 포기하고 아비뇽의 축제의 날짜에 휴가날짜를 맞추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이익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보로든, 혹은 히치하이킹을 해서든, 빵을 구걸하든 길에서 남의 집 닭을 훔쳐 잡아먹으면서도, 서둘러 아비뇽을 찾아갈 길이다. 그들의 피곤과 배고픔 고통, 그 모든 고생을 아비뇽의 저녁은 씻어주리라.」

이 같은 느낌과 격려에 힘입어 1948년에도 축제는 계속 되었다. 이번에는 「예술주간」이 「제2회 아비뇽 페스티벌」로 승격했고 9월이 아니라 7월 후반의 2주간으로 시기를 바꿨고 모든 프로그램의 장소가 교황청 안으로 집약되었다. 이 같은 관습의 골격이 장차 40여년 동안 계속된다. 뷔흐너의 「당통의 죽음」, 쥘 쉬페르비엘의 「셰에라자드」,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Ⅱ세의 죽음」등 3편의 연극이 모두 빌라르의 연출에 의하여 막을 열었다. 도처에서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연극을 통한 교육」그룹이 연기자 지망생들 중 하나였던 도미니크 쇼탕-티리는 이렇게 회고한다.

「프로방스를,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 전쟁이 끝난 지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모든 아름다움이 눈앞에 폭발하듯이 전개된 겁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받아들였죠. 귀뚜라미 소리, 환하게 불켜진 건물들, 냄새, 색채, 정다운 돌들의 색깔들, 시프레 나무, 이런 모든 것 가운데서 옥외의 한밤중에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미풍에 실리는 연기자의 목소리, 하나 하나의 소리와 동작을 연장하는 바람, 그 모든 것들 위에 가득히 빛나는 별들과 끝이 없이 깊어 가는 밤들, 나는 지금도 이런 세계를 새로이 발견하는 사람들의 행복이 부럽습니다.」

지금 다시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때 그 추억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당시 새롭던 프로방스 풍경의 발견과 서사시적인 연극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적절한 상관관계가 어우러져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출가 롤랑 모노는 이렇게 회상한다. 「쟝 빌라르가 살아있을 때 나는 그저 관객이나 기자 자격으로 아비뇽 페스티벌에 갔었다. 내가 그곳에서 감동적인 체험을 하게된 것은 내가 아직 스무 살이었고 프랑스와 이 세계가 세계 제2차대전의 터널에서 막 빠져나오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의 아비뇽을 찬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청춘을, 역사의 예외적인 한 시대를, 예술적 사회적인 어떤 모험의 출발을 찬미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에 죽치고 들어앉아 있거나 점령시대의 가정 속에 갇혀 지내다가 다시 찾은 자유와 희망 속에서, 그것도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모두 한데 모이게된 그 가슴 설레는 출발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비뇽을 처음 찾아간 것은 1970년이었다. 벌써 페스티벌도 20여 년의 역사를 쌓은 뒤였다. 특히 1968년 5월 학생혁명의 소용돌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에서 초청한 리빙 디어터Living Theatre의 충격과 소란이 막 가셔진 무렵이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연극이 아니라 교황청의 그 어마어마한 홀을 가득 메우는 피카소 대전(유화1백67점, 소묘50점)을 구경하러 간 것이었다. 이 대전은 아비뇽 페스티벌의 역사에 길이 남은 전시회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 유학생활 초기여서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한 모든 것에 다 무지했다. 그래서 막상 아비뇽을 찾아가고서도 어디 가서 어떻게 표를 사야하고 무슨 구경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지금도 그대로인 아비뇽 거리만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도시에 기차로 도착하는 사람은 그 역앞 광장과 성문을 지나 똑바로 뻗은 길을 그저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유명한 레퓌블리크 대로다. 불과 얼마를 걷지 않아서 길 오른쪽에 관광센터가 나타난다. 모든 여행자가 이곳에서 이 지방의 여행안내를 받고 지도를 얻을 수 있는 곳이지만 페스티벌 기간 중에는 공식 공연프로그램의 예약을 하거나 입장권을 사게 되는 곳이며, 예약이 다 끝나 표를 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각종 공연정보와 인쇄물을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장소다.

그러나 사실 아비뇽 페스티벌은 그것이 축제인 만큼 「직업적」으로 연극구경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아비뇽의 축제 분위기에 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 우선 역에서 내린 사람은 아주 한가하게 그 레퓌블리크 대로를 걸을 일이다. 바로 역 앞거리에 가득히 진열되어 있는 헌책판매대를 기웃거리며 오래 묵은 채색판화들을 감상하고 1950년대에 나온 대가들의 희곡집과 낡고 싼 포켓북들을 뒤적여 보는 것도 프로그램의 일부다. 대로변에는 축제의 깃발이 펄럭인다. 미스트랄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 깃발이 소리까지 내면서 흔들린다. 다리가 아프면 그 흔한 카페의 테라스 의자에 가 앉아 엽서를 쓴다. 무엇보다도 아비뇽은 페스티벌 일색인 만큼, 우선 페스티벌 공식포스터가 찍힌 그림엽서를 고를 수도 있고 유명한 교황청이나 끊어진 아비뇽다리의 그림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조금 더 걸어갈 필요가 있다. 도보로 10분을 채 걷지 않아서 온통 쾌적한 의자와 탁자들로 가득 찬 시계탑 광장이 나타난다. 여기에 이르면 비로소 「아! 내가 축제 속으로 들어왔구나」하는 실감이 나게 된다. 광장 입구 여기 저기에 세워진 공연선전 입간판들.

이번 제42회 아비뇽 페스티벌 속으로 당도한 첫 날 우리들의 발걸음 또한 자연히 시계탑광장을 향했다. 니스 같은 큰 도시에서 자동차도 없는 여행자 신세라 가물에 콩 나듯 오는 시내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뙤약볕 속을 진이 빠지도록 걸어다녔던 우리에게 조그만 고도 아비뇽이야말로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좁은 도시, 좁은 골목길이라 걷다보면 어제 본 연극의 배우도 만나고, 모퉁이를 돌다보면 산울림극단의 임영웅 선생도 만나고 조선일보의 정 기자도 만난다. 서울서도 만나기 어려웠던 숙대의 임 교수와도 마주친다. 아기자기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서 전에 찾아왔던 이 도시의 지형을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떠올리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찬 광장으로 나섰고 그 자욱한 카페들 저 너머로 거대한 교황청의 한 모퉁이가 보였다. 밤에도 잔치는 한창이었다. 광장 한구석 시립극장 정문 계단 앞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섰고 구성진 플라맹고 가락이 신명을 돋구고 있었다. 널빤지를 땅바닥에 깔아놓고 양손에 굵은 쇠줄을 빙빙 돌려 판때기를 쳐 그 소리로 박자를 맞추면서 춤을 추는 더벅머리 청년과 날씬한 검은머리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거운 쇠줄의 강한 힘과 유연한 몸의 동작이 유별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춤이었다. 공연에 못지 않게 아비뇽에서 훌륭한 것은 관객이다. 아무런 울타리도 없고 입장료도 없는 공짜 구경이지만 그 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거리의 관객은 언제나 연기자가 손에 들고 도는 모자 속에다 삽시간에 동전을 가득 채워 주는 것이었다. 아비뇽축제가 다름 아닌 프랑스 국립 민중극장(TNP)의 책임자 빌라르에 의하여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하는 광경이었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연극을 거리로, 뜰로, 하늘이 보이는 광장으로, 파리의 거만한 무대로부터 프로방스의 여름밤 속으로 끌어낸 빌라르의 정신은 바로 거리의 보통관객과의 참으로 살아있는 「만남」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비뇽의 첫 날밤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북으로는 론느강, 남으로는 뒤랑스강을 끼고있는 이 도시의 특수한 지형 덕분으로 이곳은 모기떼들의 천국이기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피투성이의 싸움을 치르고 나서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체류문제를 챙겨주는 아비뇽언어교육센터(CELA)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로베르 브느와 씨를 만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코미디 프랑스세즈나 그 밖의 극단에서 배우로 활약하다가 지금은 극본과 시나리오를 쓰며 지내는 직업적 연극인이었다. 그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현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기간중 아비뇽에서 하루에 수백 편씩 막을 올리고 있는 그 공연물의 바닷속에서 귀중한 길잡이 구실을 해주었다. 특히 쟝 빌라르에 의하여 40여년 전에 개막한 이른바 공식「페스티벌IN」(이른바「場內」)에 못지 않게 지금은 그 중요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된 「페스티벌 OFF」(이른바「場外」)에 대한 안내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우선 금년도 「페스티벌IN」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이미 언급한 앙트완느 비테 연출의 「라 셀레스틴느」를 비롯하여 소포클레스의 「외이디프스」와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를 연결시켜 3부작으로 만든 쟝-피에르 벵상 연출의 작품, 죠엘 주아노의 해학적인 희극「르 부리숑」등 25편의 연극 외에 알렉시스 그뤼스의 서커스단 공연, 「도시에 온 시인」이란 프로그램 속에 묶어 마르티니크의 대시인 에메 세제르를 소개하고 그의 작품을 낭송하는 10여 개의 프로그램, 소련의 위대한 감독 아이젠슈타인의 고전적인 영화 「10월」에다가 영국의 노던 신포니아 오브 잉글랜드의 연주로 원래의 작곡가 에드먼드 메이셀의 음악을 재생시켜 대형 스크린에 비추는 영화의 밤 등이었다. 그밖에 수많은 음악, 춤, 전시회, 토론회 등을 일일이 소개하기엔 지면이 모자란다. 7월 12일에서 8월 3일까지 2주간에 무려 52개의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때가 때인 만큼 금년의 프로그램 속에는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된 연극이 많았다. 아르튀르 슈니츨러의 「녹색의 앵무새」나 하이너 뮐러의 「사명」은 둘 다 대혁명을 바로크 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수선스럽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쟝-피에르 벵상 연출의 「외이디프스」3부작 역시 민주주의의 탄생과정을 겨냥한 것으로 대혁명 정신의 연장선상에 놓인다고 하겠다. 특히 금년에 주목되는 사람으로는 현재 한창 떠오르는 극작가인 발레르 노바리나Valere Novarina다. 그의 작품이 아비뇽의 무대에 오르는 것은 물론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알렝 티마르 연출의 「이동식 아틀리에」, 주베와 불가코프의 텍스트를 섞은 것이긴 하나 극의 바탕이 된 「배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특히 극작가 자신이 무대장치, 의상, 연출을 맡은 「말로 하는 여덟 가지의 춤」등 한꺼번에 3개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다수 작품들의 예약이 끝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황 처의 뜰에서의 「라 셀레스틴느」를 놓친 것은 심히 유감이었다. 작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교황청 뜰의 공연은 아비뇽 페스티벌의 무게중심이기 때문이다. 이 장소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광대해서 무려 3천여명의 관객을 「한데 모은다.」이 한데 모은다는 개념은 적어도 아비뇽 페스티벌에 관한 한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 한데 모였던 대규모 관객들은 나중에 다른 수많은 형태의 창조행위들이 이루어지는 다른 극장들로 흩어지고 그 흩어졌던 관중들이 다시 교황청의 뜰에 별빛을 받으며 한데 모인다. 교황청의 뜰은 동시에 「민중의 것」으로 변하는 위대한 극작품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회이기도 하다. 교황청의 뜰은 세계「초연」을 기록하는 발견의 장소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실험적인 작품을 대중에게 결정적으로 가깝도록 만드는 곳이다. 내가 1978년 교황청 뜰에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런 의미에서 베르나르 도르의 표현대로 「우리시대 연극사에서 중요한 한 단계」였다.

1953년 테아트르 드 바빌론이라는 아주 자그마한 극장에서 초연된 이 실험극을 교황청 뜰의 3천여 명에 달하는 관중에게 선보인다고 했을 때 모두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라고 만류했었다. 그러나 아르망 델캉프는 마치 하나의 도전처럼 이 꿈을 실현했다. 1978년 어느 여름 밤, 미스트랄 바람에 씻겨진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오토마르 크레이카 연출로 죠르쥬 윌송, 미셸 부케, 뤼퓌스, 죠제-마리아 플로타 등 호화배역이었다. 벌거벗은 교황청의 벽 앞에 세운 아무것도 없는 타원형의 무대, 가냘픈 나뭇가지 하나가 무대 한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서 있었다. 「나는 아비뇽에 잠시 들르신 나의 아버지의 친구 분을 「고도」에 초대했었습니다. 그분이 연극구경을 하신 것은 그분의 일생에 처음이었습니다. 그분은 극이 상연되는 동안 줄곧 고도를 기다리고 계셨지요. 그러다가 모든 관객이 일어서서 요란스럽게 박수를 칠 때 그분은 연극에 정통한 어느 관객보다도 더 진한 감동의 드라마를 체험하셨습니다. 그와 연극 사이에는 아무런 울타리도 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감격을 가누지 못했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감격이 제 눈에는 당신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살아 숨쉬게 만들고 계신 유토피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 해 20세 되는 어떤 관객은 페스티벌의 대회장 폴 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도 아비뇽의 교황청 뜰에서 「고도」를 통해서 연극의 「첫 세례」를 받았었다. 우리들의 기립박수 속에 프로방스 하늘의 별떨기들이 후두두둑 감동의 불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 듯 했다. 그 이튿날 아비뇽 시내의 모든 서점에서 베케트의 텍스트는 단 한 권도 남아나지 않았다. 교황청의 뜰에서 가진 「고도를 기다리며」의 공연(1978)은 상징적으로 하나의 전환점을 기록했다. 크레이카가 연출한 「고도」는 벤노 베쏭이 연출한 「코카서스 분필위원」에 이어 상연되었다. 그곳에서라고 해서 그 극이 낯설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반대였다. 그 뜰에서 「대중적」인 관객들을 앞에 두고 미셸 부케나 죠르쥬 윌송 같은 스타들이 연기하는 「고도」는 새로운 차원을, 즉 크레이카의 말대로 「근원적인 조건과 가장 일상적인 체험 속에 드러나는 삶의 메타포어로서의 연극」이 가진 차원을 획득했다.」라고 르 몽드는 격찬했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1951년 모든 청년들의 우상 제라르 필립의 등장으로 그 한 절정에 달했고 아비뇽과 파리의 TNP라는 쌍두마차로 연간 5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58년에는 공연이 아비뇽 성곽 안에 제한되지 않고 론느강을 건너 빌뇌브의 수도원 안으로까지 무대를 확장했다. 그 후 60년대 말까지는 교황청 뜰이라는 장소, TNP라는 그단, 빌라르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유례 없는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프랑스 민중극의 메카로 군림하던 아비뇽은 1971년 5월 28일 쟝 빌라르의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제 아비뇽은 결코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이 작은 도시는 문자 그대로 연극에 「점령」당해 버렸다. 공식 페스티벌이 전개되던 10여 군데의 장소로부터 이제는 무려 백 여 곳의 지하실, 창고, 마당, 학교강당, 뜰에서 막이 오르게 되었고 론느 강을 건너 라 바르틀라스 섬과 빌뇌브-레스-아비뇽으로, 그리고 그 보다도 더 먼 채석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여기에다가 1969년부터는 이른바「페스티벌OFF」가 가세하여 공연의 수는 몇 배로 불어났다. OFF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을까? 인간의 문화적 모험이란 그 정확한 태동을 짚어 말하기 어렵다. 본래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아비뇽의 광장과 거리에는 이 도시에 밀려드는 군중에 편승하여 밤이면 집시들이 춤판을 벌렸었다. 그리고 곡예사들과 어릿광대, 아마추어 악단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자생적인 욕망, 창조의 욕망, 보여주고 싶은 욕망, 만남의 욕망, 직접적인 접촉의 욕망, 틀 속에 박히지 않고 장외에서 잔치를 벌리고 싶은 욕망 요컨대 저 「원초적인 연극」의 욕망이 거리거리에서 불붙은 것이다. 이제 아비뇽에 왕도는 없어졌다. 우리는 연극의 정글 속에서 길을 잃기에 이르렀다.

오늘에는 장내 속에 장외가 있고 장외 속에 장내가 있게 되었다. 확실한 차이가 있다면 「페스티벌IN」은 주최측의 예산지원을 받아 자체경비를 들이지 않고 공연하는 반면 OFF는 오직 입장수입과 자체 경비에만 의존해야 한다. 흥행이 시원치 않으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금년의 OFF가 내년의 IN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1989년 여름 OFF본부가 배부하는 화려한 안내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아비뇽OFF의 테두리 속에서 하루에 공연되는 작품의 수가 무려 2백 60여 편이다! OFF는 아침 10시부터 자정까지 성문안과 밖 도처에서 막을 올린다.

다행히도 아비뇽 도착 다음 날에 만난 로베르 브느와씨는 이미 파리나 기타 지방공연에서 그 중 2백여편을 관람한 경험에 따라 약 40여 편의 작품을 추천해 주었다. 그 길로 나는 교황청 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아비뇽-퓌블릭-오프Avignon-Pnblic-OFF」(음악학교건물)로 달려가 체류가 가능한 동안 최대한의 좌석예약을 했다. 인근 지방으로 여행을 하는 날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2회(오후공연과 밤공연) 정도를 예약하니 거의 20편이 가까웠다. 1982년에 OFF협회가 가동되면서 해마다 충실한 서비스를 해주고 있는 「아비뇽-퓌블릭-오프」사무실은 매우 기능적이다. 이곳에서는 OFF에 관한 모든 공연 정보를 얻게 되고 50프랑 짜리 회원카드Carte Public Adherent를 사면 모든 공연에 대하여 30퍼센트의 할인을 받을 수 있고 각종의 공연정보 서비스를 받게된다.

한편 OFF의 테두리 안에서 참가하고자 하는 극단은 늦어도 매년 4월 이전에 신청을 완료하여 6월에는 전체프로그램이 찍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사전에 아비뇽 현지방문을 전하고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아비뇽-퓌블릭-오프18Rue Buffon-Avignon」으로 수개월 전에 공연장소 목록을 요구한 다음 공연장 책임자와 연락 및 계약절차를 밟고 체류할 거처를 마련하고 다시 OFF와 최종접촉을 함으로써 참가할 수 있다고 안내한다. 참고로 공연장의 시간당 사용료는 우리 돈으로 최하 10만원 정도에서 25만원 정도 사이라고 한다.

이제 끝으로 내가 찾아가 본 OFF공연물을 소개해야겠는데 어느새 정해진 원고의 분량이 초과되고 있다. 산울림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아비뇽의 「아르모니」극장에서 막을 열고 있는 이 유명한 극을 나는 결국 파리에 올라가서야 볼 수 있었다)와 김명곤과 다른 아시아 연기자들이 고등학교 교정에서 보여준 도전적이고도 야심만만한 「아시아의 외침」에서도 특히 나는 「연극의 사랑」과 「네 번째 벨소리가 울리면」을 인상깊게 보았었다. 극장 「담배 피우는 개」의 1백 여석 남짓한 모든 자리가 완전히 가득 차고 불이 어두워지면서 이제 막이 열릴 참인데 입구의 문이 열리더니 부부인 듯한 젊은 남녀 두 사람이 들어서서 한참을 망설이며 두리번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바로 막에 코가 닿을둣 가까이에 가져다 놓은 보조의자에 가 않는다. 가장 앞 열에 앉아 있었으므로 내게는 그들의 등이 보였고 막에서 너무 가까이 앉게된 그들이 내 보기에는 아슬아슬했다. 남자가 슬그머니 등으로 팔을 내밀어 여자의 허리를 껴안자 여자는 움찔하며 노골적으로 화를 낸다. 필경 공연시간에 늦은 이 부부는 밖에서 한바탕 다투고 들어온 모양이다. 남자가 재차 껴안으려고 시도, 여자가 노골적으로 거부, 화가 난 남자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다. 혼자 남은 여자가 관객석을 돌아보며 「저는 사실 남들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는 걸 제일 싫어하는 성격이에요.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해요」하고 울먹이며 긴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는 사이에 막이 열리고 무대 위의 남자 배우(잠시 전에 벌떡 일어나 나간 남자)가 이제나저제나 여자관객이 진정하기를 기다린다. 어디까지가 연극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연극의 사랑」은 연극 속의 사랑인 동시에 무대와 관객사이의 기이한 사람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라고 만들어진 것일까? 여기에 놀라운 대답을 마련하고 있는 극이다」라고 「누벨 옵세르바퇴르」지는 평했다. 로베르 브느와씨 덕분에 며칠 후 나는 「연극의 사랑」이 끝난 바로 다음에 상연되는 「네 번째 벨소리가 울리면」을 보러가서 다른 관객보다 더 일찍 입장할 수 있었다. 그 기회에 하나의 연극무대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철거되고 다음 연극의 매우 복잡한 무대가 얼마나 신속하게 가설되는가를 목격했다(그 짓이 매일 되풀이되는 것이 아비뇽이다).「네 번째 벨소리가」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모두가 자동화되어 있는 어느 대형 스펙터클에서 주연급배우가 예기치 않은 일로 출연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그 길고 우렁찬 대사를 외워놓고 그 복잡한 의상을 차려입은 채 분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스페어 배우의 드라마다. 따라서 막이 열리며 나타나는 무대는 그 대형 스펙터클의 무대 뒤쪽, 즉 분장실이다. 여기서도 대혁명이 주제이므로 한 사람은 로베스피에르, 다른 한 사람은 당통의 대역이다. 진짜 배우가 무대로 나가면 이들은 신속히 병정이나 농부나 하인 복장 등으로 의상을 갈아입고 단역배우로 무대와 분장실을 미친 듯이 드나들어야 한다. 까딱 순서를 바꾸거나 실수를 하면 무서운 무대감독에게 벌을 받는다. 마침내 참다 못한 스페어 주역들이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복장으로 무조건 무대로 뛰어나가 그 감동적이고 웅변적인 대사를 쏟는다. 혁명 속의 혁명이요 연극 속의 혁명이다.

그밖에 모파상에서 따온 독창적인 인형극「오를라」, 담백하면서도 내면으로부터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안녀, 체홉 선생」, 그 밖의 많은 노래 극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음탕한 이야기를 천하지 않게 들려주는 「14세기 아랍의 에로틱한 콩트」(그 우아하고도 해학적인 여배우는 앞줄에 앉은 내게 다가와서 두 귀를 붙잡더니 「이 귀를 보면 당신의 바지 속에 담긴 물건이 비둘기를 닮았다는 걸 잘 알 수 있답니다」하고 속삭이며 정력에 좋다면서 말린 살구를 한 개 입에 넣어 주었다).

8월 초순에 접어들자 페스티벌은 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바람은 서늘해졌고 극성을 부리던 모기떼들도 다소 고요해졌다. 오오 축제의 끝은 서글펐다. 하루가 다르게 거리는 한산해졌다. OFF사무실 광고판에는 직업을 구하는 연기자들의 메모가 하나씩 둘씩 나붙기 시작했다. 이제 소란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던 아비뇽의 원주민들이 하나씩 돌아올 때다. 「쟝 빌라르의 집」마당에 가득 널린 연극서적들의 가격이 할인가격으로 바뀐다. 골목의 옷가게는 「50퍼센트 할인」을 광고한다. 오, 신이여, 지나간 여름은 위대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