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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생애 및 작품세계

by 丹野 2012. 1. 6.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생애 및 작품세계


■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연보年譜

1905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
1907 아버지 사망, 외가인 슈바이처가家에 들어감.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한유명한 의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사르트르의 어머니의 사촌.
1915 파리에 있는 앙리 4세 학교에 입학.
1916 어머니 재혼, 어머니를 따라 라 로셸로 이사.
1917 라 로셸 중학교에 입학(1919년에 졸업).
1919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에 입학(1922년에 졸업).
1924 고등사범에 입학, 철학을 전공하며(1929년까지) 교수자격 시험을 준비. 시몬느 드 보봐르와 만남.
1926 나중에 <상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논문 완성.
1928 칼 야스퍼스의 <일반 정신병리학> 공역.
1929 군에 입대, 뚜르에서 기상병으로 복무(1931년까지).
1931 르 아브르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
1933 베를린의 프랑스 문화원에서 1년 간 장학금을 받아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과 마르틴 하이데거를 연구.
1933 헤겔 강의 시작(1939년까지). 프랑스에 헤겔 사상이 처음으로 도입된 계기.
1934 베를린에서 돌아와 다시 르 아브르 고등학교에 복귀. <자아의 초월> 집필.
1936 라옹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 <상상력> 출간.
1937 파리의 파스퇴르 고교로 전근(1939년까지 근무). <자아의 초월> 출간. 라캉, 자아의 기능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거울 단계 이론 발표.
1938 <구토> 출간.
1939 <감정 이론 초고>와 단편집 <벽>출간. <지향성, 후설 철학의 한 기본 개념> 집필. 군에 소집됨.
1940 독일군에 포로로 잡힘(6월). <상상적인 것> 출간.
1941 프랑스로 돌아와 파스퇴르 고등학교에 복귀.
1942 파리의 콩도르세 고교로 전근(1944년까지 근무). 레지스탕스 운동. <행동의
구조>출간.
1943 <존재와 무>, 희곡 <파리떼> 출간.
1944 희곡 <출구 없는 방> 초연.
1945 고교 교직을 떠남.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실존주의의 대중적 인기 폭발하다.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 정당을 창당하려 했으나 실패. 미국에서 순회 강연 시작(1946년까지).
1946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유태인 문제 고찰>, 희곡 <더러운 손>, <무덤 없는 주검> 출간. 잡지 <현대> 공동 발기인으로 창간.
1947 <출구 없는 방>, <일은 벌어졌다>, <존경할만한 창녀>, <상황 1>, <보들레르) 출간.
1948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상황 2>로 출간. 희곡 <더러운 손> 출간. 사후에 출판될 <진실과 실존> 집필.
1949 <자유의 길> 제3권 <비탄에 빠져>, <상황 3> 출간. 시몬느 드 보봐르, <제2의 성> 출간.
1951 희곡 <악마와 선신> 출간.
1952 카뮈와 논쟁. <장 주네, 희극배우 혹은 순교자> 출간. 메를로 퐁티, 현대지의 공동 편집인 사임.
1953 <앙리 마르텡 사건>. 라캉, 소르본느에서 세미나 강의 시작.
1954 러시아와 중국 여행. 알렉상드르 뒤마의 <킨> 각색.
1955 시몬느 드 보봐르, <만다린> 출간. 메를로 퐁티, <변증법의 모험> 출간. 이 책에서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의 정치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
1956 희곡 <네크라소프>
1957 <1957년의 실존주의의 현 상황>(나중에 폴란드 잡지에 <방법의 문제>로 실리게 될 논문.
1958 <프로이트의 일생>에 대한 영화 대본 작업.
1960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1권>을 <방법의 문제> 를 서문으로 하여 출간. <방법의 문제>는 현대지에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이라는 제목으로 실린바 있음. 희곡 <알토나의 유폐자들> 출간. 쿠바 방문.
1961 메를로 퐁티 사망.
1962 <스탈린의 유령>집필. 레비 스트로스, <야만의 사고> 출간. 존 휴스턴의 영화 <프로이트> 출시.
1964 노벨 문학상 거부. <말들> 출간. 레잉과 쿠퍼), <이성과 폭력 : 사르트르의 철학 10년, 1950-1960> 출간.
1965 유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자들> 각색.
1966 <상황, 7> 출간. 라캉, <에크리> 출간.
1971 <집안의 백치> 1, 2권 출간.
1972 <상황, 8>, <상황 9> 출간. <집안의 백치> 3권 출간.
1976 <상황 10> 출간. 영화 <사르트르 자신에 의한 사르트르> 출시.
1980 4월 15일 파리에서 영면. 향년 75세.
1983 <윤리학을 위한 메모장>(1947-48년에 씌어진 것) 출간.
1985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2권 출간.
1989 <진실과 실존>(1948년에 씌어진 것) 출간.



■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생애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이며 파리에서 출생했다.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외조부 C. 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나병 환자의 구제사업을 벌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A. 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다녔다. 동급생 중에는 M. 메를로 퐁티, E. 무니에, R. 아롱 등이 있었다.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 소년시절부터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된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해후도 그 때의 일이다.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후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루아브르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이 포구는 후일 《구토》(1938)에서 묘사된 부비르라는 도시의 모델이라 한다.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하여 E. 후설과 M.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저서 《자아의 극복》(1934) 《상상력》(1936)은 당시 사르트르의 현상학에 대한 심취가 낳은 철학논문이다. 1938년에 소설 《구토》가 간행되었다. 존재론적인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한 듯한 이 작품의 특수성은 세상의 주목을 끌어 신진작가로서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1939년 9월 참전하였다가 이듬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1941년 수용소를 탈출하여 파리에 돌아와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장편소설 《자유의 길 1945~1949)의 대부분과 《시튀아시옹》(1947~1965)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도 전시하의 산물이었다.

특히 1943년에 발표한 대작 철학논문 《존재와 무》(1943)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서 결정적인 작업이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걸친 그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웅대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 등의 협력을 얻어 《레탕모데른》지(誌)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에서 밝혀 두었다.

그가 말하는'문학자의 사회 참여'란 그 이전의 《구토》나 《존재와 무》에서 볼 수 있었다.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세계관과의 사이에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사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는 이른바 '사회참여'사상으로 일관해온 것이라 하겠다. 특히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는 그 때까지의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욱 경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생 주네》(1952)는 《도둑 일기》의 작가 주네의 평전(評傳)으로 쓰면서 개인적인 실존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그러한 세계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한 듯한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1960)은 그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 주는 노작이다.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동맥경화증에 빠져 있는 양상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기 모순적인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오래 전부터 친교를 맺어 왔던 친구들이 계속하여 떠나게 되었다. 마지막에 카뮈와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 많은 극작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파리》(1943) 《출구 없음》(1944) 《무덤 없는 사자》(1946) 《더럽혀진 손》(1948) 《악마와 신》(1951) 《알토나의 유폐자들》(1959)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 때마다 사르트르의 사상을 현상화한 것으로 주목된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작품세계


* 초기생애와 작품활동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는 의료 선교사로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삼촌으로 소르본대학 독문학과 교수였다. 같이 놀 친구를 찾아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을 배회하던 소년 사르트르는 키가 작았고 사팔뜨기였다. 그의 뛰어난 자서전인〈말〉(1963)은 어머니와 어린이가 공원에서 자신들을 받아주었으면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이런저런 무리에 기웃거리다가 결국 "꿈이 머무는 언덕에 있는" 그들의 아파트 6층으로 돌아가는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말〉은 사르트르를 구해주었다. 사르트르의 끝없는 글쓰기 작업은 자신을 거부한 세계, 그러나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될 세계로부터 탈출구였다.

사르트르는 파리에 있는 앙리 4세 리세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어머니가 재혼하고 나서는 라 로셸에 있는 리세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유명한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1929년에 졸업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이름 붙인 '부르주아적 결혼'에 저항했지만, 아직 학생이던 시절 시몬 드 보부아르와 결합하여 평생동안 안정된 동반관계를 유지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회고록〈얌전한 처녀의 회고담 〉(1958)과〈나이의 힘〉(1960)은 학생시절부터 50대 중반 때까지 사르트르의 생활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 대학에서 장차 매우 유명한 문필가가 될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 레몽 아롱, 모리스 메를로 퐁티, 시몬 베유, 에마뉘엘 무니에, 장 이폴리트,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등이 있었다. 1931~1945년에 사르트르는 르 아브르, 라옹, 마지막으로 파리의 리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활동은 2차례, 즉 한번은 베를린에서 1년 동안의 연구생활과 또 한번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1939년 징집되면서 중단되었다. 그는 1940년에 포로가 되었다가 1년 뒤 풀려났다.

르 아브르에서 가르치는 동안〈구토〉(1938)를 출판해서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다. 일기체 형식으로 쓴 이 소설은 로캉탱이란 사람이 사물 세계와 마주친다. 즉 다른 사람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신체를 인식하면서 겪는 감정의 급작스런 변화를 묘사한 것이다. 몇몇 비평가는〈구토〉를 병리학적인 증상으로, 즉 신경증 적인 현실도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매우 독창적이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작품이고, 나중에 전개할 철학적 주제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르트르는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로부터 현상학적 방법을 이어받았다. 이 방법은 연역보다는 주의 깊고 편견 없는 기술(記述)을 제안한다. 그는 이 방법을 매우 능숙하게 사용하여 연속적인 세 작품,〈상상력〉(1936),〈감정 이론 개요〉(1939).〈상상적인 것:상상력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1940)를 썼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지닌 대가의 면모를 드러낸 작품은〈존재와 무〉(1943)이다. 그는 인간 의식 또는 비사물성(neant 無)을 존재, 즉 객관적 사물성(e存在)과 대비시킨다. 의식은 바로 이 특징 때문에 모든 결정성에서 벗어나 있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그 모든 내용과 더불어 희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란 지금도 앞으로도 쓸모 없는 것이라는 끊임없는 여운 때문에 이 작품은 비극적이기도 하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활동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옹호한 사르트르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에 눈을 돌렸다. 수년 동안 그는 가난한 사람과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받는 사람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교사였지만 넥타이 매기를 거부했다. 넥타이와 더불어 자신의 사회 계급과 결별하고 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 작품들에서 가치 있는 특정 목적이나 목표가 필요하지 않은 무상의 활동으로 여겼다. 자유 자체가 소책자〈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에서 인간의 투쟁 수단이 되었다. 이제 자유는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소설과 희곡으로 세계 만방에 윤리적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자유에의 길〉이라는 4권 짜리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그 가운데 3권, 즉〈이성의 시대〉(1945),〈집행유예〉(1945).〈영혼의 죽음〉(1949)을 완성했다. 그는 제3권을 출판한 후 의사소통 매체로서 소설의 유용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희곡으로 돌아갔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행위하고 있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참다운 인간이다. 희곡은 바로 이것을 그린다. 그는 이미 전쟁기간에 이 장르로 글을 썼다. 〈파리떼 〉(1943 공연),〈닫힌 방〉(1944),〈더러운 손〉(1948),〈악마와 선신(善神)〉(1951),〈네크라소프〉(1955),〈알토나의 유폐자〉(1959) 등 희곡작품을 썼다.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생경한 적대성을 강조한 이 모든 연극은 지극히 비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르트르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 내용은 구원의 도덕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의 다른 출판물은〈보들레르〉(1947)와 프랑스의 작가이며 시인인 장 주네에 관한 다소 모호한 윤리적 연구서인〈성(聖) 주네, 희극배우와 순교자〉(1952)가 있다. 그밖에 수많은 글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창간하고 편집한 월간지인 〈현대 〉에 실렸다. 이 글들은 나중에〈상황〉이라는 제목 아래 몇 권으로 묶어졌다.


* 정치활동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치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고 공공연하게 좌익으로 기울었다. 또 비록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1954년에 소련, 스칸디나비아, 아프리카, 미국, 쿠바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6년 부다페스트에 소련 탱크가 진입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는〈현대〉에〈스탈린의 환상 〉이란 긴 글을 써서 소련의 침공과 모스크바의 독재에 굴복한 프랑스 공산당을 모두 비난했다. 몇 년이 지나 이러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사르트르적 사회주의'란 형식이 나타났다. 이것은 새로운 주요저서〈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에서 표현되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착수했고 소련식 변증법은 살아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당대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화석처럼 굳어졌으며 특정 상황에 적응하는 대신 그 특정 상황을 미리 정해진 보편성에 따라 억지로 짜 맞춘다고 인정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그 근본적, 일반적 원칙이 무엇이든 다른 구체적 실존상황을 인정하는 법과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빈약한 구성이 문제였다. 지금보다 좀더 관심을 끌 만한 인상적이고 유려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제2권을 기획했다가 포기했다. 대신〈말〉을 출판할 준비를 했다. 이 책이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을 알고 수상을 거부했다.


* 만년

1960~1971년 주로〈플로베르〉란 제목의 4권으로 예정된 저서를 쓰는 데 관심을 쏟았다. 2,130쪽에 달하는 2권은 1971년에 출간되었다. 이 방대한 기획은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총체적 전기'를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2가지 수단, 즉 마르크스의 역사 및 계급 개념과 프로이트의 방법을 사용했다. 프로이트의 방법은 어린 시절과 가족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어두운 구석을 조명하는 것이다. 때때로 사르트르의 천재성이 곳곳에 나타나고 박식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넘쳤다. 어마어마한 분량과 플로베르의 하찮은 말들에 대한 극히 미세한 묘사 때문에 이 책을 아주 즐겁게 읽기는 힘들다. 사르트르 자신이 그 저작의 지나친 분량에 짓눌려 1971년 일년동안 거의 쓰지 않았다. "참여는 행위이지 말이 아니다"란 신념으로 사르트르는 폭동, 좌익 문학활동, 그밖에 '혁명'을 촉진한다고 생각으로 자주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같은 급진적인 사회주의자가 1972년〈플로베르〉의 제3권〈집안의 천치〉를 출판했다. 이 책은 부르주아 지식인이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어려운 책이었다.

사르트르의 엄청난 필력(筆力)은 이 무렵 고갈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기민하고 적극적이어서 인터뷰를 하고 영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윤리학에 관한 책도 썼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충실한 생산성을 지닌 비상한 위력을 펼칠 수 없었다. 눈이 멀고 건강이 악화되어 1980년 4월 폐암으로 죽었다. 약 2만 5,000명이 참석하여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훌륭한 선임자 위고가 받았던 국장(國葬) 승인은 없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사르트르가 항상 그의 글로써 권리를 지켜준 사람들이었다.



■ 주요작품


* 구 토(1938)

구토는 사르트르의 최초의 장편 소설이다. 그의 출세작인 동시에 20세기 걸작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이는 비록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확립하기 이전이다.'존재와 무‘를 내놓기 5년 전에 내놓은 작품이다. 작가의 태도와 작중 인물의 위치는 확실하다. 그는 로캉탱이라는 한 고독한 지식인이 실존적 의식에 눈떠 가는 과정을 일기체로 쓰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은 사물을 보고 있는 인간의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등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는 바닷가의 조약돌을 주웠을 때 처음으로 구역질을 느꼈다. 파이프나 포크를 잡는 손에서 다시금 그 구역질을 느낀다. 이 구역질은 사물과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조건이 마련된다. 그 다음에 그러한 사물이나 타자 속에 있어서의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생기는 생리 작용이다.'무상성’을 느꼈을 때의 당혹함을 보여주는 것이 구역질인 것이다. 로캉탱은 권태에 빠진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혐오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생리에서 탈피하려는 이의 전형이다.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으로 보인다. 신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건 생각하지 않던 간에 모든 것은 그들의 자유인 것이다. 모든 것은 결정할 나름이다.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신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자유는 신이 애초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 있어서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인간에게 자유는 어떤 행동의 결과에서 자기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워준다. 자신을 안정된 자리에 정지시키는 아무것도 없이 스스로 그것을 구해 나가야 한다. 인간 존재는 무한한 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것과 다름없는 존재이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이전에 인간을 가리켜 ,내던져진 존재,라고 표현한 이유가 설명된다. 그래서 로캉탱은 이 존재성에서 오는 공포로 말미암아 ,나는 무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한 무의 세계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려고 한다. '존재에 대한 증오나 염증도 결국은 나를 존재케 하고 나를 존재 속으로 몰려들어가게 하는 것이다.'라고 일기에 쓰는 것이다.

로캉탱은 30대이다. 그러나 연금을 받는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지금은 부빌이라는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3년 전부터 로르봉 후작의 자료가 갖추어져 있는 도서관에서 18세기 인물들의 전기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물가에서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는 순간 갑자기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돌을 떨어뜨리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이후에 지속적으로 일어나 그는 그 때마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2년 1월 말부터 약 1개월 간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의 생활은 무미건조한 나날들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기껏해야 로르봉 후작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거나 카페에서 들려주는 〈언제나 가까운 날에〉란 음악을 듣는 것이 고작인 그야말로 혼자만의 생활이었다. 간혹 그는 일상 생활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살피기도 하고, 이 지방 특유의 것을 알아내기도 했다. 이 지방에서 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 지방 유지들의 초상화가 진부하면서 전통적인 인간의 문화 속에 지배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그가 살아온 것을 경험이 아니라 말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거와 합일점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기 자신은 과거의 그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그는 정녕 한 사람의 전기를 쓸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가 이러한 난해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옛날 자신과 헤어졌던 여인이 파리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내온다. 그녀는 예전에 완벽한 자아의 충실을 기대하며 꿈꾸던 여인이었다. 그는 옛 여인을 만남으로써 자기에게 희망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기묘한 감각은 쉴 사이 없이 일어난다. 그의 손이 닿거나 눈길만 주어도 일어나는 이상한 감각은 그의 몸을 떠날 줄 모른다. 그리고 강력한 증오감과 함께 구토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마로니에의 나무뿌리는 그 마로니에 나무뿌리라는 말의 형체를 벗고 모든 부위를 통해 그의 몸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구토란 인간이나 사물의 언어에 의해 성립되는 의미나 본질을 박탈한다. 그리고 괴물처럼 허물허물 한 무질서의 덩어리이거나 무섭고 음탕한 벌거숭이의 덩어리로 나타난다. 이것은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체계이다. 또한 세계를 체험한 본질의 것이었다. 그가 드디어 생각해 낸 것은 벗겨진 존재로 사방에 온통 널려져 있는 항상 귀찮은 존재이거나 근거도 없는 부조리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도 이러한 생명체인 이상 이 어쩔 수 없는 실존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옛 여인 아니를 만나게 된다. 그녀도 이제는 그 실존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녀가 꿈꾸던 완벽한 순간을 단념한다. 그녀는 살아있는 고독하고 비만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전기 집필을 포기하고 부빌을 떠나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언제나 가까운 날에〉를 듣는다. 소설 집필을 위하는 행위가 부조리와 대항하는 정당한 방법임을 알고 또다시 새로운 희미한 희망을 품게 된다.


* 존재와 무(1943)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게 일상생활에서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나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자유의 부담'이란 역설일 뿐이며 사치스런 핑계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자유는 흔히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 존재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한다. 철학적 관념론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일상적인 의미의 자유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사르트르의 자유 그것은 본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자유를 가리킨다. 일상적인 자유라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자유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사르트르의 가장 주요한 철학 저작은 『존재와 무』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자유의 개념은 이 책제목 자체에 이미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존재란 즉자 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무란 대자존재 인간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기 안이 텅 비어 있기에 항상 바깥을 지향하며 지향하는 것마다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자유로우면서 자유의 부담을 숙명처럼 지고 있는 인간존재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사르트르가 지적하는 바이다. 이를 통하여 사르트르는 인간 자신을 돌아 볼 것을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쓴다는 것은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독자의 고매한 마음이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서 세계를 제시하는 행위이다. 나쁜 소설이란 독자에게 아첨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는 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란 독자에 대한 요청이며 신뢰이다.

우리가 읽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현재의 우리나라 소설은 그 역사가 매우 짧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소설들이나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들은 오래된 소설도 아니고 고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것들은 현대소설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문학의 한계성을 말하자면 언어적, 동물적 특질 등 허무에 직면한 것들이 현실 앞에 당면해 있다. 그 중 문화와 역사적 차이는 사르트르가 제시한 것들 중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문학이 직면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서구의 문예사조를 살피는 것보다 우리가 영향을 받은 부분들과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피는 게 오히려 옳을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데는 이 문화와 역사의 차이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쓴다는 것,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47년 작가의 상황 등으로 나눠 사르트르는 문학에 대해 논하고 있다. 각 장들은 유기성은 없다. 그 소제목에 따라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작가는 자신의 말을 표현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최대한 참여문학 쪽의 손을 들어주는 말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쓴다는 것, 무엇을 위해 쓰는가에 관해서 자신의 확신한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뒷부분들은 또 다른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참여문학이 한때 성행했던 시절 사르트르의 주장은 어느 정도 통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함께 한 문학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누구를 위해 쓰는가. 그 결과를 벗어나 결과를 기반하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역사와 함께 비교한다면 다른 역사와 역사관을 잘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은 글을 쓰는 각자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그것은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세계에 참여하고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또한 마루야마 겐지가 그랬듯이 비평가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기 넋두리도 아니다. 적어도 이 사회에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왜 말하려고 하는지, 자신에게 문학은 여느 기능을 살펴봐야 하는지 성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단순히 작가의 세계에서 작품화가 되어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흘러들어 가는 작용이 문학은 아닐 것이다. 수 없는 화살표가 얽히고 영향을 받는 문학 사이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는 게 중요할 것이리라.



■ 도서 및 논문목록


도서목록

* 자유의 길 / 사르트르 / 정음사, 1958
* 말 / 사르트르 / 지문각, 1964
* 파리떼 / 사르트르 / 가정문고, 1977
* 구토 / 사르트르 / 지문각 / 1985
* 문학이란 무엇인가 / 사르트르 / 문학과지성사, 1998
* 사르트르와 20세기 / 정명환 / 문학과지성사, 1999


논문목록

* 사르트르의 인간관」/ 김붕구 / 일조각, 1971
* 사르트르의 대여관對他觀 / 김붕구 / 불어불문학연구, 1972
* 사르트르의 사상과 행동 / 정명환 /민음사, 1979
* 사르트르의 문학참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정명환 / 학술원, 1987
* 사르트르의 '구토'를 통해서 본 철학과 문학 /정명환 / 한국철학회, 1989
* 사르트르의 문학참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정명환 /학술원, 1991
* 푸코와 사르트르」/ 정명환 /문학동네, 1999





■ 별첨


* 친애하는 카뮈여

귀하와 나와의 우정이 탐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정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귀하가 오늘 그것을 끊어 버린다면 당연히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많은 일로 귀하와 나는 접근하고 작은 점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점으로 충분했다. 우정도 또한 전체적으로 흐를 경향이 있어 모든 점에서 일치하든지 싸우고 헤어지는 것이다. 당파에 속하지 않는 자라도 가공의 당파의 투사로서 행동한다. 이건 정말 이치니까 여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와 나의 현재의 논쟁이 어엿한 논거에 서고 상처 입은 허영심 따위는 조금도 섞여들지 않기를 바란다.

귀하가 `트리스탄'의 역을 맡고 내가 `봐뒤우스'의 역을 한다 (모리엘의 <어학자>속의 인물. 둘이 다 현학자). 작자끼리의 싸움으로 귀하와 나 사이에 모든 게 끝장날 것이라고 말하고 생각한 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기 대답하고 싶지 않다. 도대체 누굴 설복하란 말인가. 귀하의 적은 물론 내 친구들도 설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리고 귀하 편에서 누구를 설복하겠는가. 귀하의 친구와 나의 적이다.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귀하와 나의 적으로부터 우리들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건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귀하가 하필 나를 쳐들어서 싫은 소리를 하기 때문에 여기에 나도 면목 상 그냥 있을 수가 없다 해서 귀하에게 대답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별로 화를 낸 것은 아니다. 귀하와 알고 난 뒤에 처음으로 기탄 없이 말하기로 한다. 귀하에게 늘 그늘진 자홀과 약점이 뒤섞여 있다. 나는 진실을 까놓고 얘기하는 것을 늘 자제해 왔었다. 그 결과 귀하는 귀하의 내적인 곤란성은 감추고 그늘에 도사린 과격함(이것을 귀하는 지중해적 중용이라고 하겠지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차피 누가 귀하를 향해서 내가 생각하는 그런 말을 하겠지.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나는 여기에서 귀하의 초상에 대해서 운운하지 않을 셈이다. 귀하가 `장송'을 향해서 한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비난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귀하의 공개장을 얘기하고 필요한 경우에 귀하의 작품에 두세 가지 언급하기로 한다. 반공주의자가 소련에 대해서 말하듯이(유감이지만 귀하 자신이 소련에 대해서 말하듯이) 귀하에게 대해서 말하여야 한다. 귀하는 자신의 `열월혁명' (로베스피에르 정권이 타도되고 공포정치가 종식됐다)을 하였다 라는 것을 보이면 충분하다.

까뮈여, `뫼르소'와 `시지프스'는 어디에 갔는가. 영구혁명을 설명하고 있었던 저 심정의 `트로츠카스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반드시 살해되었거나 망명했을 것이다. `장송'의 비평은 (너무나 경향적이어서 귀하에게 육박할 수는 없었지만) 다치지 않으면 아니 될 원리며 어마어마한 인격을 해할 우려가 있었다. 귀하가 `그를 옳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공격과 원리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우리들이 사는 이유이다. 그리고 모순을 극복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정당한 희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뮈여, 귀하의 책을 논하면 어떤 신비 때문에 인류로부터 사는 이유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는 것인가. 귀하에 대한 비난이 어떠한 기적으로 곧 독성으로 변한단 말인가. 귀하는 `변호할 사람은 몇 천이나 있는가. 형제는 한 사람도 없는 빈곤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기를 돌려주겠다. 빈곤이 귀하를 찾아와서 정말로 "가라, 그리고 나의 이름으로 말하라." 라고 했다고 해도 조용히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저 바른 말을 하면 나는 귀하 생각을 잘 알 수가 없다. 귀하는 빈곤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그 변호사인가 형제인가 또는 형제이며 변호사인가. 그리고 귀하가 빈곤의 형제라고 한다면 어떤 경우로 그렇게 되었는지, 혈통으로 보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동정으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 귀하는 빈민들을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다. 귀하가 `보로니아'의 공산주의의 실업자나 `바오다이'와 식민지 인에 반대해서 인도차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가난한 일용인부의 형제라고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의 경우로 귀하는 빈민출신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귀하는 `장송'이나 나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다. 나는 빈곤에 대해서 말하는 귀하의 권력을 부정하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귀하가 그렇게 말하려거든 우리들처럼 귀하 자신의 위험을 치르면서 부인 당할 가능성을 처음부터 알고 난 뒤에 해주기 바란다.

주註. 왜냐하면 `장송'이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려면 귀하는 자신의 사상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버릇이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귀하의 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위협인가, 협박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사람을 소스라치게 하려는 수단이다. 불행한 비평가는 갑자기 용사와 순교자의 무리에 싸여서 군인 속에 휩쓸려든 한 시민처럼 귀하를 경계하는 것이 된다. 게다가 대단한 배신이다. 저 투사, 억류자, 반항자, 빈민들은 모두 귀하의 배후에 있어서 뒷받침이 되었다고 귀하는 우리들에게 생각하고 싶은가. 천만에, 귀하는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귀하는 갑작스레 변해 버렸는가. 귀하는 어디에서나 폭력의 행사를 거부해 왔다. 지금은 모럴의 이름으로서 우리들에게 덕의 폭력을 쓰고 있다. 귀하는 귀하의 모랄리즘의 첫째 종이었다. 지금은 귀하가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귀하의 공개장에서 실망하는 것은 너무나 `씌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귀하의 천성인 행사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겠다. 귀하가 귀하의 노여움을 경솔하게 서두르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현대에 여러 가지 불쾌한 일이 있어서 혈기가 많은 자는 때로 큰 소리를 지르며 탁자를 치고 큰 숨을 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인정한다. 여러 가지 할 얘기가 있을 정신의 무질서 위에 귀하가 수사적인 질서를 만들어 놓는 것이 유감스럽다. 의식의 폭력에 관대할 수 있어도 생각해낸 결과의 폭력에 그럴 수가 없다. 어떠한 술책을 써서 귀하는 평정을 보인 뒤에 한층 더 우리에게 격노를 퍼붓는가. 어떠한 기교를 통하여 노여워해 보이고 상대를 마음놓게 하는 사기꾼의 미소 밑에 곧 그것을 숨겨 버리는가. 이것은 중죄재판소에서 하는 버릇이라고 생각해도 내가 나쁠 것인가. 실상 검사장은 혼자서 저 좋을 때에의 `아리아'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혼의 공화국'에서는 귀하를 검사로 임명했단 말인가.

우리들이 10년 동안의 교우관계에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귀하는 나를 `주필 귀하'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귀하의 의도는 분명히 `장송'을 반교하는데 있는데 사실은 나를 상대로 하였다. 이것은 나쁜 방법이다. 귀하의 목적은 귀하의 비평가를 물체로, 시체로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는가. 귀하는 그에 대해서 `수프' 접시나 `만들린'처럼 말하고 있다. 결단코 `그에게 향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인간계 외에 놓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하의 인격 속에서 저항자, 억류자, 투사빈민 들이 그를 돌멩이처럼 변형해 버렸다. 때때로 귀하는 그를 완전히 말살해 버리고 내가 필자인 것처럼 `귀하의 논문'이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귀하가 이런 수를 쓴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카뮈여. 이러한 우회의 방법으로 말하는 귀하는 대체 어떤 자냐. 어찌하여 귀하에게 `장송'에게 대하여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우월감이 있는 체할 권리가 있는가. 귀하의 문학적 공적은 이유가 못된다. 귀하의 문장이 더 낫다든지 이치에 더 밝다든지 혹은 그 반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귀하가 마음대로 가지고 있는 `장송'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권리를 귀하에게 주는 우월감이란 `종족'의 우월감임에 틀림없다. `장송'은 그 비평으로 개미와 인간이 다르듯이 그와 귀하가 다른 것을 표시했던가. 귀하는 아름다운 귀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것은 귀하다.

귀하들의 교류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이런 방법은 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귀하의 태도가 옳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 귀하는 그의 정신에 배짱 검은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데 제일 간단한 것은 그것을 거기에 넣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요컨대 문제는 무엇인가. `장송'은 귀하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말했다. 그것이 귀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통이다. 귀하는 그의 비평을 비평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귀하를 책할 수 없다. `드 몽텔랑' 씨가 매일하고 있는 것이다. 귀하는 좀더 극단으로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든지, 나는 바보라든지 해서 <현대>지 동인의 지성은 의심스럽다고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좀더 화려한 논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귀하의 기고가는 커뮤니즘의 정당과 그 국가 이외이면 무엇이나 반항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라는 데는, 바른 말로 나도 몹시 기분 좋지 않다. 상대가 문학가이거니 했더니 경찰의 색안경으로 본 자료로 사건을 심사하는 재판관이 상대였다는 셈이다. 그를 본심을 보이지 않는 인간 취급하는 것이 역시 비위에 맞아서 귀하는 게다가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배반자를 만들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 `필자는 읽은 것을 읽지 않은 체했다....나는 (논문 속에) 관대도 성실도 읽지 않았다. 곧 정말 싸울 수가 없으면 표명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을 보이는 무익한 의지를 읽었다.'

귀하는 그의 의도(물론 숨겨진)를 분명히 하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생략했거나 책의 주제를 변하게 해가며...귀하가 하늘이 푸르다고 하는데 검다고 말하게 하고' 참된 문제를 피하여 귀하의 책이 밝혀 놓은 `러시아'의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온 `프랑스'에 숨겨두곤 하는 그 의도는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삼 말할 것 없이 마르크시즘이 아닌 사상은 모두 반동이라고 하는 것 보여주는 일이다. 그런데 결국 그는 왜 그렇게 하는가. 이 점 귀하는 그리 명백하지 못하다. 이 부끄러워해야 할 마르크시스트는 빛을 무서워하고 있다 는 모양이다. 그는 서투른 솜씨로 귀하의 사상의 창을 모두 막아버리고 명징의 눈부신 빛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귀하를 낱낱이 이해했다면 마르크시스트라고 하는 따위의 칭을 할 리가 만무하다. 그는 불쌍하게 커뮤니스트이며 동시에 부르주아일 수가 허용되는 줄 생각했다. 그는 쌍검을 쓰는 것이다. 귀하는 그에게 선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공산당에 들어가든지 귀하처럼 `부르주아'가 되든 지이다.(註)

주註. 왜냐하면 카뮈여, 귀하는 나와 한가지로 부르주아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귀하는 딴 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내 책의 비평은 모두 이 사실(러시아의 수용소에 관한)에 터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쓸 때는 귀하는 `장송'에게 향해서 말하고 있다. 그 논문에서 강제수용소에 관해서 말하지 않은 점으로 이 비평가를 책하고 있다. 이것은 귀하가 말하는 대로일 것이다. 아마 `장송'은 비평가가 말해야 할 것을 저자가 결정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더구나 귀하의 책 속에서 그럴 만큼 수용소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멋도 모르는 입빠른 자가 우리들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고 귀하로 하여금 믿게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귀하가 당돌하게 수용소를 가지고 문제삼기를 요구하는지 어찌 석연치 않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이것은 귀하와 `장송'끼리 해야 할 정당한 논쟁의 문제다. 귀하는 그 뒤에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혁명의 이데올로기, 특히 마르크시즘이 제출하는 여러 문제에 부딪치지 않는다. 귀하는 소련에 있어서 수용소의 사실을 무시하는 상대적 권리를 가지고있다. 이 문제에 부딪치면 `귀하는' 그 권리를 잃고 만다. 귀하는 내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또 "귀하가 수용소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서 귀하는 나에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사기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귀하는 `장송'이 그의 권리였던 것처럼' 귀하의 책에 관한 것이다. 소련의 수용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이 부정 못할 사실을 이용해서 사회에 참가하고 있는 셈으로 있는 잡지의 주필인 내가 이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성의에 대한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단지 이것은 거짓이다. `무세'의 성명의 수일 뒤에 수용소에 대해서 내가 전 책임을 가지는 사설과 많은 논문을 우리들은 발표했다. 그 일부를 비교한다면 그호는 `루세'가 개입하기 전에 되어진 것을 알 것이다. 이러한 것은 크게 중대하지 않다. 단지 우리들은 수용소의 문제를 제출하고 프랑스의 세론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 뚜렷이 입장을 밝힌 것을 귀하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귀하는...을 무시하는 상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투로 써 놓고 귀하는 대체 어쩔 셈인가. `장송'이란 사내는 존재하지 않고 그건 내 익명의 하나라고 하는 것인가. (실없는 이야기지만) ---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여태까지 수용소에 관해서 한마디도 한 일이 없단 말인가. (이건 얼토당토않은 중상이다.)

그렇다. 카뮈여, 나도 귀하와 같이 저 수용소를 용서 못할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부르주아적 신문'이 매일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도 한가지로 용서하기 어렵다. 나는 `톨크매니스탕' 사람보다 `마다카스칼' 사람에게 입히고 있는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톨크매니스탕' 사람을 이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반공주의자들이 저 형무소의 존재에 갈채를 보내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자기들의 양심을 쉽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톨크매니스탕' 사람에게 원조를 보내기는 고사하고 `소련'에서 그 노동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 불행을 이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철의 장막은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절반은 다른 절반을 비치고 있다. 이쪽의 나사못을 1회전시키면 저쪽의 못이 빙그레 돈다. 결국 이쪽과 저쪽에서 우리들은 돌리는 자이며 돌리 움을 당하는 자란 것이 다. 미국의 경화가 마녀 사냥(적색분자를 사냥하는 것)의 유행의 모습으로 나타내면 `러시아'의 경화는 아마도 병기증상과 강제노동자의 수가 증가한다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 반대도 참될 것이다.

파리의 거리거리의 벽에 "자유의 나라 소련에서 휴가를 지내거라." 라고 써놓았다. 철장 속에 회색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멋없는 포스터를 보았다. 나는 러시아 사람을 천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 알아주게, 카뮈여. 귀하가 `프랑코'의 압정과 프랑스정부의 신민정책을 몇 번이나 고발하고, 귀하의 힘의 범위 안에서 싸워온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귀하는 소련의 수용소에 대해서 말할 `상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다음의 두 점에 있어서 귀하는 나쁘다고 생각한다. 현대에 대해서 설명해 줄 의도를 가진 진지한 저작 속에서 수용소에 대해 기재하는 것은 귀하의 엄밀한 권리이고 의무이기도 했다. 용서하기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 귀하가 수용소의 토론회의 일을 공개변론처럼 사용한다. 귀하도 또 `톨크매니스탕' 사람이며 `쿠르드' 사람을 이용해서 귀하 일을 칭찬하지 않은 비평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귀하가 주인들을 구별하는 것을 격려하는 퀴에티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폭력을 만들어낸 것은 유감스럽다. 왜냐하면 귀하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인을 뒤섞어 놓은 것이다. 노예를 뒤섞어 놓은 것이나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귀하가 노예들을 구별하지 않았다면 귀하는 그들에 대해서 원칙적인 동정밖에 갖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노예'가 귀하가 말하는 주인 측의 한 사람에 가담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귀하가 `인도차이나'의 전쟁에 난처한 것을 느낀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을 귀하에게 적용한다면 `비트만'족은 식민화 되었기 때문에 노예이다. 더욱이 그들은 커뮤니스트이기 때문에 폭군이다. 귀하는 유럽의 프롤레타리아가 소련을 공공연히 비난하지 않았다고 해서 책망한다. 또 한편 유럽의 정부가 스페인을 유네스코에 가맹시켰다고 해서 책망한다. 그렇게 된다면 귀하에게 있어 해결의 길은 `갈라파고스' 섬에 가는 것뿐이다. 나는 반대로 저편의 노예들을 돕는 유일한 방법은 이쪽의 노예들에게 가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으로써 끝을 맺을까 했다. 그런데 귀하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까 귀하의 논고는 우리들의 사상에까지 미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모든 점에서 귀하는 `구속되지 않는 자유'라고 하는 말로 우리들의 인간적 자유의 관념을 목표한 것 같다. 이 말을 귀하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귀하에 대한 무례일까. 아니 귀하는 이런 오僅를 할 턱이 없다. 귀하는 이 말을 `트로와폰티느' 신부의 연구서에서 얻은 것이다. 이 점 적어도 나에게 헤겔과 공통의 것이 있을 것이다. 귀하는 어느 것도 읽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귀하는 언제나 원전에 부딪치지 않는 버릇이 있다. 귀하는 구속이란 것은 이 세상의 실제적인 힘에 적용되는 것이다. 또 행동을 좌우하는 인자의 어느 것에 적용되는 것이다. 또 행동을 좌우하는 인자의 어느 것에 작용하고, 어떤 물체의 물리적 운동을 구속하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 자유는 힘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그렇게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정의 상으로 봐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유는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러나 자유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인과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별개의 질서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구속이 없는 편향이란 말로 하면 귀하도 웃어댈 것이다. 이 철학자이래 결정론의 관념, 따라서 자유의 관념은 조금씩 복잡해져 버렸다. 결렬, 단절, 중단 같은 사상은 남아 있다. 나는 귀하에게 <존재와 무>를 참조해 달라고 권하는 것은 그만두자. 그것을 읽더라도 귀하는 괜히 어렵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귀하는 어려운 사상은 싫어하기가 알지 못했구나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거기에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깨끗하게 판단해 버린다. 나는 그 책에서 이러한 결렬의 조건을 미리 설명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귀하가 타인의 사상을 몇 분간 생각해 준다면 자유는 구속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무엇이 자유를 구속하는가. 구속할 필요가 있는가. 차는 구속되지 않는 일도 있다. 차는 브레이크를 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유에 차륜이 없다. 다리도 없으며 수레를 끼울 데도 없다. 자유는 구속과 무관계여서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문제가 다르다. 자유는 그 기도 그것으로써 결정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마땅히 그 자신의 한정된 성질 속에서 한정된다.

우리들은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획은 우리들을 비치고 상황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또한 상황을 초월하고 필경 그것을 포함하는 이외에 방법이 없다. 우리들의 계획은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그 조명 밑에서 우리들과 세계와의 관계가 확정된다. 목적과 기구가 나타나서 사물의 적의와 우리들 자신의 목적을 동시에 보여 준다. 이렇게 결정하고서 카뮈여, 귀하 자신의 사상을 쌓을 수 있는 자유를 `구속되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말하여라(왜냐하면 인간이 `자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의미를 갖는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식도가 없는 자유라든지, 염산이 없는 자유라든지 말하는 것과 한가지로 무의미할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귀하도 정책과 철학을 혼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구속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경찰도 재판도 없다. 알코올 음료의 소비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허락한다면 주정꾼과 사는 정숙한 아내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1789년의 사상은 귀하의 것보다 더 뚜렷하다. 저 권리의 제한(말하자면 자유의 제한)은 다른 권리(말하자면 이것도 자유)이며 뜻을 알 수 없는 `인간적 자유'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 인간적이든 아니든 - 인간을 눌러버릴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살아 있는 채로 물건의 상태로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이 물건인 것은 타인의 인간에 있어서이다. 여기에서 두 개의 개념(난해하리라고 생각하지만)이 있다.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물건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것의 관념이 우리들의 현상을 결정하고 압박을 이해시켜 준다.

귀하는 누구를 신용하고 선가. 나는 나의 동지에게 낙원적 자유를 우선 주고서 다음에 그들을 감옥 속에 집어넣었다고 믿어버렸다. 나는 그뿐 아니라 처음부터 예속적이고 `나면서부터'의 노예상태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자유밖에 내 주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우리들의 자유란 오늘 `자유로이 되기 위해서 싸우는 자유로운 선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공식의 모순된 양상은 우리들의 `역사' 조건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귀하도 알겠지만 우리의 동시대인을 `조롱 속에 넣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 속에 있는 것이며 반대로 힘을 합해서 그 창살을 깨뜨리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카뮈여, 우리들도 조롱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귀하가 정말로 대중의 운동이 전제에 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철두철미 그것을 책하고 귀하가 사막에 후퇴한다 운운해서 협박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귀하가 말하는 사막도 같은 조롱 속의 비교적 사람이 가지 않는 장소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싸우고 있는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투쟁에 가담하고 볼 일이다. 몇 가지의 것을 변화시키려면 우선 많은 것을 인수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가만큼 절망적인 상황을 제공한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예언이 허락되는 것이다. 현대의 투쟁을 어느 쪽이나 친한 두개의 괴물의 어리석은 결투라고 밖에 못 보는 인간은 이미 우리들을 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혼자 구석배기에 가서 볼멘 얼굴을 한다. 그가 조심스럽게 등지고 있는 시대를 심판관처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아주 시대에 조건 지워지고 아주 역사적 유한으로부터 생겨난 거부에 받쳐져 있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귀하는 나에게 악의가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것은 아니다. 가령 내가 오욕의 독기에 물들어 있어도 귀하보다 훨씬 정신이 분명하고 자제한 느낌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귀하는 마음을 편케 해 두기 위해서 처벌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귀하가 죄인이 아니면 전 세계가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귀하는 귀하의 판결을 선언한다. 그리고 세계는 가만히 있다. 그러나 판결이 세계를 감동시키면 귀하의 처형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언제나 되풀이다. 귀하가 멎으면 귀하의 모습이 잘 보일 것이다.

시지프여, 너는 처벌하게끔 처벌되어 있는 것이다. 귀하는 여태껏 우리들에게 대해서 - 내일도 역시 그럴지 모르지만 - 인물과 행동과 작품의 뛰어난 결합이었다. 그것은 45년의 일이었다. 사람은 <이방인>의 작자 카뮈를 발견했다. 비밀출판의 <콩바>지 주필과 어머니나 연인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거부할 만큼 성실한 우리들의 사회에서 사형에 처해진 `뫼르소'를 결부했을 때, 특히 귀하가 그 양자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을 진보시키고 귀하 자신은 모범적 인물에 가까웠던 것이다. 왜냐하면 귀하는 위대함의 감정과 미에 대한 정열적인 기호와를 살아가는 기쁨과 죽음의 의미와를 결부했기 때문이다. 벌써 전전부터 귀하가 부조리라고 부른 쓰디쓴 경험에 대해서 모멸로써 자기를 지킬 것을 귀하는 선택한 것이다. 귀하는 `일체의 부정은 긍정의 개화를 품는' 것을 바라고 있다. 거절의 구석에 만족을 발견하고 `사랑과 반항의 조화를 재는' 것을 원하였다. 귀하에 의하면 인간은 행복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리고 `행복이란 존재와 그 실재와의 단순한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지속하는 욕망과 죽음의 이중의 의식 이외에 인간과 생활을 거부하는 정당한 조화가 있을 것인가.

행복이란 완전히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또 완전히 하나의 행위도 아니다. 죽음과 삶의 힘과의 또 승낙과 거부와의 사이의 긴장이다. 인간은 이것에 의하여 `현재'를 - 결국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 정의 짓고 자기 속에서 변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과 자연과의 일시적 조화를 실현한다. `루소'로부터 `부르통'에 이르는 프랑스문학에 중요한 주제를 제공한 특수적 시간의 하나를 썼을 때 귀하는 도덕성에 관한 전혀 새로운 색채를 도입할 수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직분을 다하는 것이었다. 귀하는 우리들에게 `행복의 의미'를 밝히었다. 그리고 이 의무감이란 인간을 `의미를 갖는 것을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유일한 존재라고 하는 확인이 혼합돼 있었다. `바스티유'의 `형벌'에 닮는다. 그러나 더 복잡하고 풍부한 행복의 경험으로 해서 귀하는 비난하게끔, 또한 참회하도록 부재의 신 앞에 가로 서 막았다. `인간은 영원한 부정과 싸우기 위해서 정의를 긍정하고 불행의 세계에 항의하기 위해서 행복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행의 세계는 사회적이 아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이방인이고 죽게끔 강요되고 있는 무관심하고 공허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성의 영원한 침묵'이다. 이리하여 귀하의 경험은 일시적인 것과 항구적인 것과를 밀접하게 결합하였다. 소멸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귀하는 `틀림없이 부패하는'진실을 상대로 하는 것밖에 바라지 않았다. 귀하의 육체도 그 한 가지였다. 귀하는 `혼과 관념' 의기을 거절했다. 귀하 자신의 말에 의하면 부정은 `항구적'이기 때문에 - 결국 신의 부재는 역사의 변천을 통하여 불변하기 때문에 - 의미를 `갖는' 것을 요구한다(말하자면 그 의미는 누구로부터인지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과 영원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신과 직접적이고 노상 반복되는 관계는 그 자신 역사를 초월하고 있다.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실현이 되는 긴장은 - 동시에 존재의 본능적인 즐거움도 되지만 - 나날의 `동요'와 `역사성'에서 인간을 탈취하고 최후에 그 조건과 일치시키는 참된 전환이 된다. 이것이 궁극이어서 이 순간의 비극 속에서 어떠한 진보도 찾아볼 수가 없다. 부조리주의자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부조리주의자였던 `말라르메'는 일찍이 이렇게 쓰고 있다. "극은 곧 회전하고 섬광과 더불어 퍼지는 그 패배의 시각을 보였다." 다음과 같이 쓰고 있을 때 그는 귀하의 극의 열쇠를 미리 주려고 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주인공은 그를 창조하는 찬가 - 모성의 - 를 `해방'하고 그 찬가가 묻혀 있는 신 비극 그 자신에 돌아간다." 요컨대 `파스칼'을 제하고 `데카르트' 이래 모든 역사에 반대하는 고전적 대전통 속에 귀하는 있는 것이다. 귀하는 미학적 향락, 욕망, 행복과 영웅주의를 종합하고 충족한 명상과 의무를 `지듯' 식의 충실과 `보들레르'식의 불만를 종합했다. 귀하는 엄밀한 모랄리즘으로 `메나르크'의 인모랄리즘을 완성하였다. 그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하나의 사랑밖에 없다. 여자의 몸을 안는 것은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저 신기한 기쁨을 얼싸안은 것이기도 하다. 지금 곧 부드러운 압셍 속에 뛰어들어서 그 향기를 몸에 배게 하면 나는 모든 편견에 반대하고, 태양의 진리이며 또 나의 죽음의 진리도 되는 그런 진리를 이루는 의식이 될 것이다."

이 진리는 만인의 그것이다. 그 극단적인 단독성은 바로 진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하는 것이다. `나다니엘'이 신을 찾고 있는 순수 현재의 껍데기를 귀하는 깨뜨려 버리고 `세계의 심연', 다시 말하면 죽음 위에 그것을 열었기 때문이다. 귀하는 이 음울하고 고독한 쾌락 끝에 어떤 윤리의 보편성과 인간의 연대성을 발견한 것이다. `나다니엘'은 이미 혼자가 아니다. 그는 죽음보다 강한 저 삶에 대한 애정을 `전 인류와 나눌 것을 의식하고 자랑으로 알고 있다.' 물론 마지막은 만사가 좋다. 세계가 이 화해하기 어려운 자유사상가를 삼켜 버리고 만다. 거기에서 귀하는 `오벨망'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할 것을 귀하는 좋아한다. "반항하면서 멸하여 가자. 그리고 허무가 우리들에게 남긴다면 그것을 옳은 것으로 보는 것은 그만두자." 그래서 귀하는 역사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그 용모를 공포 속에 발견했기 때문에 역사를 거절한 것이 아니었던 것을 부정하지 말자. 우리들의 문화가 역사를 거절하고 귀하는 `하늘'과 인간의 싸움 속에 인간적 가치를 주었던 때문에 모든 경험 이전의 역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귀하는 귀하의 개인적 숙명이며 귀하가 해결을 주었던 불안과 불행을 사색하면서 현재대로의 귀하를 선택하고 귀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때를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슬픈 예지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귀하는 감연히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귀하는 영예도 화려한 것도 없는 투쟁을 행하였다. 위험은 거의 앙양 적이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은 타락하고 친하게 될 우려가 있었다. 언제나 괴로워서 고립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이러한 노력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 그래서 귀하와 역사와의 최초의 접촉은 귀하에 있어서 희생이라고 하는 양상을 띠었다. 귀하는 어디에서 `신비에서 희생을 잡아떼는 뉘앙스를 위해서' 싸웠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잘 알아주기를 바란다. `귀하와 역사와의 최초의 접촉'이라 하여 내게 귀하와 다른 좀더 멋있는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즈음 우리들 인텔리가 가진 것은 귀하 것과 같았다. 그것을 귀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귀하가 우리들 가운데의 많은 사람보다(또 나 자신보다)좀더 깊이 전체적으로 그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이 투쟁의 사정으로 해서 때때로 역사에 공물을 드리고 그만한 권리를 얻은 뒤에 참된 의무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귀하는 옮겨 받은 것이었다. 귀하는 독일사람들이 귀하의 하늘과 싸움에서 귀하를 잡아떼어서 인간들의 일시적인 투쟁에 억지로 참가시킨 것을 책망하였다.

`몇 년 전부터 귀하들은 나를 역사 속에 보내려 하고 있다....' 또한 그 앞에 서 `귀하들은 할 일을 했다. 우리들은 역사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5년 동안은 벌서 새들의 울음소리를 즐기지 못하였다(독일 사람에의 편지).' 역사라는 것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귀하에게 그것은 `타인의 미친 지랄'이었다. 전쟁은 창조하지 않고 파괴한다. 풀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고 새가 울고 인간이 연애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실 외적 상황이 귀하의 견해를 확증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귀하는 `평화 속에' 우리들의 운명의 부정에 대해서 일시적이 아닌 싸움을 행하였다. 그리고 `나치스는 이 부정에 참가한 것처럼 귀하에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세계의 맹목적인 힘과 협력하여 그들은 인간을 파괴하려고 기를 쓴 것이다. 귀하가 쓴 것처럼 `인간의 관념을 구하기 위해서' 싸웠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귀하는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역사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하려고 생각했다. 귀하는 그 증거로 최후에 현상복귀밖에 생각 안 했다. `우리들의 조건은 의연히 절망적이었다.' 연합군의 승리는 귀하에게 있어서 `우리들 속의 몇 사람이 보다 나은 죽음을 치르게 한 것밖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 같은 두서넛 뉘앙스를 획득'했다. 귀하는 역사적인 5년 간을 지난 뒤에 (귀하도 딴 사람도 다) 인간이 행복을 이끌어낼 절망에 돌아가서 말이다. 곧 인간이 `그의 참을 수 없는 숙명에 대해서' 행하는 절망적 투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부정에 값을 하지 않는(누구의 눈에?)' 것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한 귀하가 우리들은 얼마나 좋았는지. 우리들은 역시 역사의 신 참가였다. 그리고 40년의 전쟁이 그것에 앞서는 수년간과 마찬가지로 역사성의 한 형태이었던 것을 이해하지 않았다. 억지로 역사에 복종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귀하에게 `말로'의 말을 빌었다.

`승리는 전쟁을 사랑하지 않고 가버린 자들에게 주어질 것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이것을 반복하면서 적지 않게 스스로를 불쌍히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 동안에 까닭도 모르면서 귀하처럼 위협받고 있었다. 문화는 마침내 소멸하려고 할 때 좀더 풍부한 작품을 낳을 때도 있다. 그러한 낡은 가치와 그것을 결실 하게 한다. 또 그것을 죽이는 것 같은 새로운 가치와의 치명적 결혼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귀하가 시도한 시합 속에서 행복과 동의는 우리들의 낡은 휴머니즘에서 온 것이다. 또 반항과 절망은 배어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미지의 사람이 우리들의 정신의 시찰을 증오의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귀하는 우리들의 문화유산을 살피는 데 이러한 눈치를 차용하였다. 그들의 단순한 적나라한 존재가 우리들의 고요한 즐거움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숙명에 도전, 부조리에 반항, 이것은 모두 귀하로부터 왔든지, 귀하에게서 전달되어진 것이다. 3, 40년 전의 일이었다면 귀하는 이런 나쁜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하의 `반항'은 이러한 막연한 대중으로 넣어졌기 때문에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귀하는 반항이 사라져버리는 하늘 저편에 그것을 간신히 돌리는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귀하가 보였던 도덕적 요구라고 하는 것은 귀하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귀하가 포착한 전혀 실제적인 요구의 이상화한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귀하가 실현한 균형은 단지 한 사람의 인간에게 거의 한순간 한번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다. 독일사람에 대한 공통의 투쟁이 귀하의 눈에도 우리의 눈에도 비인간적인 숙명에 대한 만인의 결합을 상징하는 그런 행운에 귀하는 힘입은 것이다. 부정을 택함으로써 독일사람들은 스스로 자연의 맹목적인 힘에 가담하여 버리었다.

그리고 귀하의 <페스트>에서 아무라도 그 속임수를 알아차리듯이 세균으로 하여금 독일사람의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귀하는 수년간 여러 계급의 연대성의 증거이며 상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또 저항운동의 외견이다. 귀하가 초기의 작품 속에 "인간의 참기 어려운 숙명과 싸우기 위하여 그 연대성을 다시 발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여러 저항이 겹쳐지고 그것의 드문 일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하나의 인생이 진실을 나타내기 때문에 귀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싸움이 마찬가지로 낡았고 좀더 무자비한 다른 싸움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싸움의 원인이다. 동시에 결과인 것에 눈을 가리워 버리고 만 것이다. 귀하는 죽음에 반항하고 있었다. 거리거리를 에워싸는 철의 장막 안에서 사망률을 증가시키는 사회적 조건을 딴 사람들이 항쟁하고 있었다. 어린이 하나가 죽으면 귀하는 이 세상의 부조리를 책망하고 또 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 위하여 귀하가 만들어낸 눈도 귀도 없는 신을 책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부조리한 조건이 `파씨' 가나 `반쿠르'가에서 동일하지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귀하는 귀하 자신 속에서 귀하 자신에 의하여 도덕적 긴장으로 만인의 행복을 실현하고 원하였다. 우리들이 발견하기 시작한 음울한 대중은 그들이 조금도 불행하게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들 편에서 행복을 단념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일사람은 갑자기 문제외가 되어버렸다. 한번도 문제가 된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저항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우리들은 믿고 있다. 저항의 방법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귀하가 가까운 과거의 사람과 아마 가까운 미래의 사람까지도 역시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을 때 귀하의 관념적인 저항 속에 그들이 너무나도 현실적인 노여움을 찾아볼 수 없던 1천만의 프랑스사람에 있어서는 귀하는 이미 특권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귀하의 죽음, 삶, 대지, 반항, 신, 부정, 긍정, 사랑 같은 것은 왕후의 놀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아니 서커스의 놀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아니 서커스의 놀이라고 말하는 자까지도 있을 것이다. 귀하는 썼다. "고뇌보다도 비극적인 것은 행복자의 생애뿐이다." 또 절망 속에 어느 정도 머무르고 있으면 기쁨을 낳을 수가 있다." 또 쓰기를 "빈곤의 극단이 언제나 세계의 사치와 부유와 맺어지는 것을 알고 있는 만인의 증명이 이 세상의 뛰어난 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귀하와 마찬가지로 특권자인 내게는 귀하가 말하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귀하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귀하는 많은 사람들보다도 훨씬 어떤 종류의 죽음이나 무일물에 접근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귀하는 비참하지는 않았더라도 참된 가난을 알았던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문장도 귀하가 쓰면 `모리악' 씨가 `드 몽테를랑' 씨의 책 속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 `이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난의 밑바닥에서 호사를 발견하는 것은 안락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교양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불공평한 부유함이 필요한 것을 사람은 알고 있다. 귀하의 생활이 제상황은 가령 어떠한 고난에 차 있어도, 귀하는 특히 뽑히어서 개인적인 구원이 만인에게 미치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만인의 마음속에서 위협과 증오의 사상이 우세한 사상이 되기 위하여서는 그것은 몇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증오의 사상, 하나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무엇이나 물어뜯는다. 귀하 자신에게도, 독일 사람을 증오하는 것마저 원하지 않았던 귀하에게도 귀하의 저서 속에 볼 수 있는 그런 신에 대한 증오가 있다.

귀하는 무신론자라고 하기보다 반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피압박자는 가치가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을 모두 딴 사람에게 대한 증오 속에 함께 넣어 버린다. 동지에 대한 우정도 적을 통하여 전해진다. 귀하의 저서도, 귀하의 예도 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귀하는 사는 기술 `인생학'을 가르친다. 귀하는 육체의 재발견을 가르친다. 하나, 그의 육체는 깊은 밤 재발견할 때 - 하루종일 도적 맞은 뒤에 - 이미 그것을 채우고 천하게 하는 것은 커다란 곤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나이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의 제일 처음의 적은 인간이다. 공장이나 조선소에서 변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만나도, 인간의 이야기를 들고 온다. 그것은 쓸 물건이 되도록 형무소에서 그놈을 두들겨 고친 자도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금후 귀하가 할 일은 무엇일까. 압박 당한 대중의 요구를 만족시키면서 귀하의 성실을 얼마간 남겨두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귀하를 고치는 일이다.

그들의 대표가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귀하에게 험구를 퍼붓지 않았더라면 귀하도 아마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귀하의 내부에서 행하여지고 있었던 전환을 귀하는 갑자기 그만두어 버렸다. 귀하는 새로운 도전 때문에 만인의 눈앞에서 죽음에 대한 인간의 결합과 여러 계급의 연대성을 표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여러 계급은 이미 귀하의 눈앞에서 그들의 투쟁을 또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얼마 동안 `모범적 현실'이었던 것이 `이상'의 전혀 공허한 긍정이 되어 버렸다. 역사가 나쁜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들어온 귀하는 역사의 흐름을 해석하는 것보다 부조리성의 증가를 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결국은 귀하는 귀하의 처음의 태도를 또다시 쳐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귀하는 `말로'나 `가드쥬', 그 밖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간의 신격화'라고 하는 그 뜻을 알 수가 없는 관념을 빌어다가 인류를 처벌하고, 그쪽에서이지만 최후의 아방세라쥬' 사람처럼 열외에 서 있다. 사건에 의해서 길러진 한 현실적이고 싱싱하였던 귀하의 인격은 신기루가 되어 버렸다. 44년에는 귀하의 인격은 미래였다. 1952년에 과거이다. 귀하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부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귀하의 외부로부터 오고 있으며 귀하 자신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귀하에게 세계가 이전과 같은 재산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인간들이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보라. 그렇게 되면 모두 사라져 버리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귀하는 나를 잔악한 놈이라고 생각해도 무서워할 것은 없다. 나는 곧 나 자신도 그렇게 말해 보겠다. 귀하는 내게 따라오려고 해도 헛수고일 것이다. 나를 신뢰하라. 나도 주의해서 모든 것을 귀하를 위해서 애쓰기로 하자. 왜냐하면 귀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내이다. 그러나 자연의 흐름으로 내 `이웃'이기 때문이다. 귀하와 같이 역사에 참가하고 있으나 나는 역사를 보는 것이 귀하와 다르다. 역사를 지옥으로부터 보는 자에게 반드시 그것은 멋없이 무서운 용모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과 공통의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개미나 꿀벌의 역사가 있다. 반드시 우리들은 그것을 큰 죄, 풍자, 암살의 우스꽝스럽고 불결한 연속이라고 볼 것이다. 귀하의 발끝으로 더운물을 건드리면서 `뜨거울지도 몰라' 하는 계집애처럼, 흠칫거리면서 역사를 보고 손가락을 찌르고, 급히 또 튀어나와서 `의미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사정은 다르다. `현상을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현상을 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하는 이제는 명확한 보증이 있는 것밖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피와 진흙 뿐의 못이라고 하면 나도 귀하와 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뛰어들기 전에 몇 번이나 그것을 쳐다볼 것이다. 이미 내가 그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 견해에 대해서 귀하의 불평 그 자체가 귀하의 역사성의 증거가 된다면 어떠할까, 만약 그것이 정말이라면 역사에게 덜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는 동시대인과 같은 목적을 가지지 않게 되며 단지 인간적 혼란의 부조리밖에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혼란에 반대의 의견을 표명하여도 그것 때문에 그 의지에 반하여서 그는 역사적 연쇄 속에 들어가 버릴 것이다.

역사에 의미가 있느냐고 귀하는 묻는다. 역사에 목적이 있느냐고 귀하는 묻는다. 내게 이러한 물음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그것을 만드는 인간에 있어서 추상적인 행동의 개념에 지나지 않다. 그것에 목적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문제는 그 목적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는 데' 있는 것이다. `공포' 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 폭력이다. 귀하가 물리친 역사가 이번에 귀하를 물리쳤을 때 귀하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폭력적이 되었다. 귀하는 이미 반항의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귀하의 불신은, 모든 피고는 첫째 죄인이라고 추정케 했다. 그래서 `장송'에 대한 귀하의 검찰적 방법이 나온 것이다. 귀하의 모럴은 우선 모랄리즘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이미 문학에 지나지 않는다. 내일이 되면 그것은 아마 인모랄리즘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귀하와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서로 같은 진영에 있을지도 모르고, 안 있을지도 모른다. 시대는 엄격하고 또 혼란해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귀하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만약 귀하가 대답하고 싶으면 본지는 귀하를 위해서 개방할 것이다. 하나, 귀하는 이제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귀하가 말하고, 하는 일이 무엇이든 나는 귀하와 싸우는 것을 거절한다. 우리들의 침묵이 이 논쟁을 잊게 하는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 참고자료



* 실존주의문학 (實存主義文學)


1940~1950년대 프랑스에서 전개된 문학 경향의 하나. 존재의 부조리성에 대한 의식(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하여 자기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인생을 선택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며, <상황> 속에서 역사나 사회에 <참가>하면서 그 상황을 인식,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려는 인간을 묘사하려고 하는 문학이다. 1940~1950년대 프랑스에서 전개된 문학 경향의 하나. 존재의 부조리성에 대한 의식(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하여 자기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인생을 선택하고 책임 있는 행동한다. <상황> 속에서 역사나 사회에 <참가>하면서 그 상황을 인식,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려는 인간을 묘사하려고 하는 문학이다.

실존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은 이전부터 있었으나(C. P. 보들레르, G. 모파상, F. M. 도스토예프스키, F. 카프카 등의 작품), 인간의 한 새로운 생활방식으로서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뒤의 J. P. 사르트르, A. 카뮈, S. 보부아르 등의 문학이었다. 이와 같은 문학의 발생 계기가 된 것은 20세기 전반에 거듭되었던 전쟁과 동란이었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에 의해 인간은 자기의 개성과 본질 및 그것들이 형성하는 자유가 역사, 사회 및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신이 본질을 만든다고 하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存在)>, 즉 <즉자(卽自, en soi;단순히 존재함)>에서 <대자(對自, pour soi;존재함에 대한 의식)>로 이행하는 <존재>를 중심명제로 한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문학

사르트르는 처음에 예술로 존재를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했으나, 전쟁체험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의 획득과 함께 진정한 존재의 완성은 역사, 사회 및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획득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장편소설 《구토(1938)》에는 실존의식을 자각한 인간이 소설을 쓰는 일(예술)로 생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단편소설 《벽(1937)》에서는 인생을 선택할 수 없고 단지 존재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을 그렸다. 희곡 《파리 떼(1943)》에서는 자기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행동에 의해 자기를 판정하는 인간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실존주의문학이 사회참여의 문학인 이상, 작가는 서재에서의 고독한 창작활동에만 머무르는 일을 중지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와 정치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르트르는 사회, 정치, 시사 문제(헝가리사건, 알제리문제 등)에 정면으로 부닥쳤다. 그러한 참여를 통하여 정치에서의 목적과 수단을 묘사한 희곡 《악마와 신(1951)》 등의 작품을 썼다. 이런 이유로 사르트르의 문학 및 실존주의문학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휴머니즘문학이라 일컬어진다.


* 카뮈의 실존주의문학

카뮈의 경우 사르트르의 《구토》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 《이방인(1942)》이다. 주인공은 <부조리> 의식을 가진 까닭에 일상성과 양식을 대표하는 사회에 의해 살인죄로 재판 받는다. 사실은 재판하는 측도 자기 기만 죄로 고발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카뮈는 인간에게 허위와 기만을 강요하며 인간의 진정한 존재를 부정하는 부조리와의 싸움이야말로 인간의 의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의무는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항의, 반항의 형태를 취하여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1942)》에서는 계속해서 벼랑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절망적인 인간의 반항행위 속에서 존재해야 할인간의 모습을 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카뮈에게서는 반항이 부조리의식을 가지는 인간의 참여행위가 된다. 이것을 구현한 것이 장편소설 《페스트(1947)》의 주인공으로서, 그는 페스트 때문에 공황이 일어난 도시에서 신이나 악마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고독이라는 지옥에 빠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습이나 안이한 타협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연대에 의지하여 자기의 직무를 수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조리에 반항하여 계속 인간성을 추구하는 길은 역시 휴머니즘과 통한다. 그리고 부조리적 인간의 성실한 인간성 탐구의 길이 이와 같은 반항과 행동을 취하는 까닭에 카뮈의 부조리문학도 필연적으로 사회 참여가 된다.


* 보부아르의 실존주의문학

보부아르는 학생시절에 사르트르를 만났는데 두 사람의 결합은 격렬한 반 순응주의와 출생환경(부르주아지)에 대한 반항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이 2가지 명제가 그녀의 문학적 출발점이 되었다. 보부아르의 문학활동은 여성의 <본질>과 여성이 되는 <실존> 사이의 모순상극의 고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장편소설 《초대받은 여자(1943)》는 질투라는 영원한 테마를 새롭게 다룬 것인데, 주인공 프랑수아즈는 자기와 남편 사이에 개입된 <타인>이란 존재, 즉 초대받은 여자 구사비에르를 살해한다. 타인의 행복에 대한 지향과 타인의 존재는 항상 자아의 파괴라는 인식이 묘사되어 있다. 장편소설 《타인의 피(1944)》에서는 레지스탕스의 연대와 책임문제를 다루었고, 방대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문학적 여성론인 《제 2 의 성(性, 1949)》은 <여성은 암컷과 거세자의 중간적 존재로서 사회적, 심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여성이 타인에 의해 자기를 규정시키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여성의 복권을 추구하였다.


* 그 밖의 작가들과 영향

장 주네는 사르트르로부터 <성(聖) 주네>라고 불린 <참여문학자>로서 알려졌다. 《도둑일기(1949)》 《꽃의 노트르담(1944)》 등은 초현실주의 형식의 수법으로 쓴 장편소설인데, 동성연애자, 직업적 범죄자로서의 자기의 굴욕과 반항의 반생을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묘사하였다. 사르트르의 친구로 제2차 세계대전중 전사한 P. 니장은 자기계급에 대한 반항, 사회의 위선을 문학 형태로 고발하였다. 보부아르에게 인정받았던 작가 V. 르뒥의 자전적 소설 《사생아(1964)》는 동성연애자인 자기를 모든 관점에서 더럽고 추한 존재로 규정하며 그 속박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고독의 고리를 스스로 깨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문학은 문학적 의식, 문학의 방법, 작가 및 문학작품의 사회참여 등의 측면에서 이후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의식을 <사물> 쪽으로 소외시키면서 인간의 조건과 형성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누보로망 문학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 한국의 실존주의문학

언제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제 2 차세계대전 뒤 특히 1950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1940년대에는 사르트르의 《프랑스 인이 본 미국 작가(1946)》, 전창식(田昌植) 번역의 《벽(1948)》, 양주동(梁柱東)의 평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1949)》, 김명원(金明遠) 번역의 《흑사병(1950)》 등이 발표되었다. 50년대에 정명환(鄭明煥) 번역의 《자유의 길(1958)》 《벽(1958)》, 방곤(方坤) 번역의 《구토(1959)》 등의 사르트르의 작품과 김붕구(金鵬九) 번역의 《카뮈의 문학과 사상(1958)》, 정명환 번역의 《현대의 증인》 등의 카뮈의 해설 및 작품번역이 나와 실존주의가 한국의 문단을 주도하는 인상을 주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손창섭(孫昌涉), 오상원(吳尙源) 등 한국작가들에게 인간조건의 추구라는 점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론은 50년대 말 이후 참여문학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 참고자료


* 사르트르와 실존철학의 선구자들


① 키에르케고르

프랑스에서 실존주의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1946년에 사르트르는 한 대중 강연에서 실존주의를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갈래로 나누고, 야스퍼스와 가브리엘 마르셀을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하이데거와 자신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명명했다. 이 두 줄기의 근원에 19세기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와 니체가 있다. 실존주의가 키에르케고르(1813-1855)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엄청나게 다르다. 「절망」, 「절규」,「슬픔」등의 키에르케고르적 감수성을 사르트르에게서 기대하는 독자가 있다면 실망할 것이 틀림없다.

가령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즉 「나의 온 생애는 하나의 감탄사이며 나의 슬픔은 울부짖는 절망이고, 열광적인 시적 감흥인 나의 기쁨은 하나의 율동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는 다분히 감각적이고 낭만주의적이다. 그에게 논리적인 체계가 없다. 그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라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말로 논리적 체계의 불필요성을 역설했다. 헤겔과는 반대로 순리적(純理的)지식이 결코 개인적 실존을 설명할 수 없다는 그의 사상에서 「주관성이 곧 진리이다」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객관적 진리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타당할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혼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나」라는 주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예외자이며 단독자이다. 이처럼 개별성, 주체성으로서의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양식이 실존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인간적 실존의 과제는 참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참」이란 나 자신에 대해서 「참되다」, 「성실하다」의 뜻이다. 그러니까 참된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는 것은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참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감성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라는 세 단계의 자기 형성을 제시했다. 첫째, 감성적 실존이란, 감성적 욕구의 충족 즉,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젊을 때 방탕한 생활을 했던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체험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런데 말초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러한 실존의 양식은 참된 자기의 발견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상실이다.

이 사실을 문득 깨달은 인간은 윤리적 실존이라는 두 번째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것은 양심을 가지고 윤리적인 것을 의무로서 이행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윤리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이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족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윤리적 실존도 참된 자기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제 인간은 최종적으로 가장 완벽한 실존인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 오르게 된다. 이것은 신앙을 가지고 사는 단계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이다. 까뮈의 문학을 말할 때 흔히 우리는 「이방인」, 「페스트」, 「전락」의 세 시기를 구분하여, 감각적 쾌락의 인간인 뫼르소, 헌신적 인류애의 화신인 리유의사, 그리고 자신의 윤리적 삶에 회의를 느끼는 변호사 클라망스를 대표적 성격으로 부각시킨다. 그런데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형성의 3단계와 거의 일치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서는 이러한 단계를 볼 수 없다. 마지막에 종교로 이어지는 키에르케고르의 귀결은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사르트르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각 인간은 예외자, 단독자여서 그 어떤 보편적, 객관적 진리도 그에게 적용시킬 수 없다는 「주관성의 불환원성」은 무신론이나 기독교의 입장을 떠나, 모든 실존주의의 공통적인 주제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공통되는 부분은, 신을 지향하는 그 내용이 아니라, 생성과 선택이라는 실존형성의 방법에 있다. 우선 생성의 문제를 보자.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신앙은 한번 얻으면 절대로 잃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마다 새로이 획득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물처럼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는 긴장상태를 실존의 성격으로 보는 것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한번 주어지면 영원히 지속되는 그런 자질, 또는 기본성격이 없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실존한다. 이때 존재란 사물의 존재양식, 즉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어떤 변화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실존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연한 상태이다. 실존하면서 인간은 조금씩 자기를 만들어간다. 인간에게는 어떤 본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란 그의 앞에 있는 것, 그가 실현시켜야할 어떤 것이다. 인간은 개념에 의해서 규정되기에 앞서 먼저 실존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의 생각과 행위에 의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 사람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이것이다. 사르트르가 악시옹(Revue Action, 1944, 12)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은 이 철학적 명제를 손쉽게 풀이한 것이다. 『인간은, 우선 여기에 있고, 그 다음에 이것 또는 저것이다. 그가 조금씩 자기를 규정해 나가는 것은 이 세상에 몸을 던짐으로써, 거기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투쟁함이다. 따라서 한 인간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열려있는 상태이다.』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의 두 번째 공통점은 선택의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실존형성의 3단계는 각기 질적으로 다르고 또 비연속적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처럼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이다. 즉 지양에 의한 종합의 결과가 아니라 좌절에 의한 비약의 결과이다. 방탕한 생활에서 윤리적인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방탕을 지양하여 윤리성이라는 종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뼈아픈 어떤 좌절의 계기를 통해 방탕을 버리고 윤리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고, 자유이다. 바로 이점이 사르트르와 일치하는 부분이다. 사르트르의 철학 체계에서 자유만큼 중요한 개념은 없다.

모든 것이 자유에서 시작하여 자유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선택과 동의어이다. 앞서 우리가 실존의 개념을 논할 때, 한번 굳어지면 영원히 변치 않는 사물적 존재양식과 달리 실존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긴장 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단순히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옮겨간다고 해서 그것을 실존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예컨대 불에 빨갛게 달구어진 쇠막대기나, 수압으로 돌아가는 터빈이 잠시 후 다른 상태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실존은 아닌 것이다. 그것들의 변화는 물리적 인과율에 의한 자연현상일 뿐이다. 참된 생성과 참된 실존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상태 변화의 매 단계마다 선택이 개입되며, 그 선택은 자유에 의해 내려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 이전에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어떤 권위도 없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게 해주는 그 어떤 가치 척도도 없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자신일 뿐이다.

사르트르의 3부작 소설인 「자유의 길」은 이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한 일종의 주제소설이다. 제1권 「철들 나이」에서 마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는 자유의 절대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그가 바라던 것을 할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충고할 권리가 없었고, 그가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선도 악도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모든 것이 그의 자유다. 그런데 자유란 선택하는 자유이다. 선택하지 않는 자유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선택하지 않음이란 실상,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유와 선택의 동일성, 그리고 자유의 절대성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만 빼고는 완벽하게 자유롭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우리는 자유롭도록 처단되었다』라고 썼고, 자유가 「가치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까지 말했다. 실존이 자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실존은 인간만의 특권이고, 인간의 존재양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이끌려 진짜 자신의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야스퍼스나 하이데거처럼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스스로 형성하는 사람, 자기 일에 종사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실존하다. 소설「철들 나이」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만 속하고 싶다』라는 다니엘의 말은 그런 점에서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다


② 니체

실존의 최고 단계를 신앙에서 찾는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적 실존주의의 선구라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1844-1900)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던져진 존재」로 규정한 하이데거나, 인간존재를 무상성(無償性), 우연성으로 보는 사르트르의 인간관은 모두 니체의 사상과 같은 선상에 있다. 신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동시에 모든 가치의 근원이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그 근원을 잃어버리고, 모든 가치가 그 가치로움을 상실했다는 뜻이 된다. 인류의 역사, 개인의 인생이 모두 신의 존재 위에서만 뜻을 지녔었는데, 이제 그 발판이 없어졌으므로 역사와 인생은 갑자기 허공에, 무(無)위에 뜨게 되었다. 이것이 니체의 허무주의이다.

생의 의미도 없고, 목표도 없고, 무(無)의 끝도 보이지 않고,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이 인생을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명명했었다. 신이 베풀어준 생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던져준 생인지 모른다. 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나왔으며, 나의 출생 이전과 사망 이후는 완전히 무(無)이다. 인간은 이렇게 무(無)위에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이처럼 지고(至高)의 가치를 상실하고, 인생의 목표가 없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어진 상황을 하이덱거는 「던져져있음」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니체를 자기사상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가 동일하지만, 인간의 불안을 규정하는 데서 두 사람의 생각은 달라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불안은 인간적 실존이 그 근거가 없다는 데서 유래한다. 즉 무(無)의 자각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있어서는, 인간의 불안은 그의 절대적 자유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비롯된다.


③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와 거의 동일하다. 하이데거의 거의 모든 개념을 차용하여 사르트르는 방대하고도 치밀한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은 어떤 것인가? 존재 추구를 자기 철학의 기본 과제로 설정했던 그는 우선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했다. 존재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 현전성을 말한다. 나무, 집, 하늘, 책상, 잉크병 등이 모두 존재자이다. 물질적 현전성이 아니라 언어나 행위 같은 추상적인 「있음」도 역시 존재자이다. 그러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건들만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존재자)인 이 책상은 그 물질적 현전성 속에 「있음」(존재, das Sein)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담고 있다.

존재자는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지각의 대상인데 반하여, 그 밑에 깔려있는 「있음」은 아무리 찾아 헤매도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물건인 존재자와 다르면서 그 밑바닥에 있는 것, 만물의 속에 있으면서 만물을 나타나게도(존재자)하고 없어지게도 하는 「존재」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책「존재와 무」에서 "존재적"), "존재론적"이라는 용어의 구분이 자주 눈에 뜨이는데, 이때 「존재적」은 존재자와, 「존재론적」은 존재와 짝을 이룬다. 즉 「존재적」이란 주어진 사실로서의 존재자에 관한 경험적인 태도이고, 「존재론적」은 이 경험을 성립시키는 본질적인 제약이나 근원적인 조건에 관한 선험적인 태도를 뜻한다.

인간도 물질적인 현전성을 가진 존재자임에 틀림없다. 여기 이 책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도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불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성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현실 속에 「있음」은 책상이 현실 속에 「있음」과 결코 동일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따로 떼어, 구체적으로 「거기(Da) 있는(Sein)자」, 즉 Dasein이라고 명명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프랑스어로 tre-l 라고 번역했으며, 우리는 현존재(現存在)로 번역한다. 「인간」이라고 하면 책이나 집, 또는 고양이 등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의 하나일 뿐인데 왜 유독 인간만을 현존재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존재이해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상이라는 존재자의 「있음」(존재)을 이해하고 있다. 책상은 결코 자기 옆에 있는 의자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재를 이해하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현존재(인간)에게만 귀속되는 특징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달리 스스로 존재하면서 언제나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 특별한 존재자이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방식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이다. 나무나 책 같은 다른 존재자는 결코 자신의 존재방식을 문제삼는 법이 없다. 처음에 한번 성질이 주어졌으면, 물질적인 마모로 존재가 없어질 때까지, 그것은 시종일관 같은 성질을 유지한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하기는 하되,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스스로 결정해 가는 존재자이다. 이렇게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고, 거기에 관심을 쏟는 존재를 하이데거는 실존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라는 똑같은 실재(實在)에 현존재(現存在)와 실존(實存)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붙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명칭 외에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라는 또 하나의 명칭을 추가시킨다. 「거기 있음」이라는 조어(造語)가 보여주듯이 현존재는 애초부터 「세계 속에 있는」존재방식이다. 여기서 「세계」라는 개념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적인 의미의 세계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의미, 즉 세계정세니, 세계일주니 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가장 단순화시켜 말해본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 그러니까 주체성인 「나」의 밖에 있는 일체의 외부적 환경이 세계이다.

그러나 이때 「나」와 「세계」의 관계는 결코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다. 가령 옷장 속에 옷이 걸려있듯이, 또는 서랍 속에 편지가 들어있듯이 그런 방식으로 내가 세계 속에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옷장과 옷, 서랍과 편지의 관계는 단순히 공간 속에서 위치관계일 뿐이다. 옷이 없어도 옷장은 애초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옷장이 없어도 옷은 그냥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이 세계 속에 있는 것은 이처럼 독립적, 중립적인 방식이 아니다. 인간은 무대 장치 속의 배우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는 달팽이와 달팽이집의 관계와 같다. 세계는 인간의 일부이고, 세계가 변하면 그에 따라 인간의 존재도 변한다.

세계는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거대한 도구 연관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사물을 도구로 변형시킨다. 여기서 사물과 도구의 문제가 제기된다. 길에 흩어져 있는 돌들은 우리의 현실 생활과 아무 관계도 없을 때는 그냥 사물이다. 그러나 못을 치기 위해서 우리가 그 중의 하나를 골랐을 때 그 돌멩이는 망치라는 도구가 된다. 처음과 전혀 다름이 없는 동일한 돌멩이가 현존재의 어떤 관심에 의해 사물에서 도구로 변모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무엇을 만들던가, 사용하던가, 잃어버리던가, 관찰하던가, 등등의 방식으로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현존재가 세계 속에서 만나는 것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도구이다.

당장 도구로 쓰지 않는다 하더라고 여하튼 거대한 도구연관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사물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도구연관의 고리를 통해 결국 현존재에까지 이르는 그 관련성의 전체가 한 인간의 환경을 이루는 세이다. 인간은 이러한 세계 속에 들어있다. 따라서 그는 세계-내-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계라고 할 때 그 속에는 도구(즉 사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현존재, 즉 타인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 타인들에 대해 마음을 쓰면서 그들과 함께 공동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공동세계이다. 그러니까 도구에 대한 배려이건, 타인에 대한 고려이건 간에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관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 또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하여 어떤 계획을 하고, 자신의 몸을 앞으로 내던진다. 신(神)이 없으므로 인간은 그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하이데거는 말했지만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내던져진 존재만은 아니다. 인간은 앞을 향하여 던지기도 하는 존재이다. 그때 앞을 향해 던지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또는 하고자 하는 어떤 계획, 혹은 기도(企圖)이다. 따라서 독일어의 Entwurfen과 프랑스어의 projet는 우리말로 투기(投企), 즉 기도를 앞으로 투사한다는 조어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처럼 내던져진 동시에 앞으로 던지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피투적 투기(被投的 投企, )라는 어려운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던져져있음이 과거의 필연성이라면 내던짐은 미래의 가능성이다. 던져졌다는 과거의 필연성에 떼밀려 아무런 계획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정한 실존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일상적 자기와 본래적 자기를 구분한다. 우리가 공동세계 속에서 만나는 타인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사는 「나」는 모두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자기, 평균적인 세상사람에 불과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신들린 듯이 스포츠나 오락, 또는 음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뭔가 잊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들이 도취의 상태에서 도피 하는 것, 애써 생각지 않으려는 그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본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면서 또한 유한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무엇 때문에 나를 내던졌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출생 이전도 무(無)지만 죽음 이후도 무이다. 우리의 인생은 무위에 떠있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이 불안감은 숙명적이며,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스포츠나 음주, 오락, 또는 일에 몰두하여 우리는 그것을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근원적인 불안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극복, 또는 초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성 속에 매몰되어 근원적인 인간의 조건을 망각하는 것, 이것이 일상적 자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적 자기가 아니다.

참된 실존에서부터 전락한 상태이다. 우리는 참된 자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를 연상한다. 그러나 참된 자기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르다. 키에르케고르에서는 최종적으로 신에 귀의하는 것이 참된 자기를 되찾는 것이었지만, 하이데거에서는 죽음의 불안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실존을 되찾는 길이 된다. 죽음을 앉아 기다리거나, 그 불안에 허덕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질러 죽음을 떠맡음으로써 「죽음의 불안」은 오히려 「죽음에의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불안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존재의 근거가 무(無)임을 인정하고, 이런 유한성의 자각을 토대로 자신의 기획을 앞으로 투사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죽음도 기획투사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와 다른 점이다. 사르트르는, 출생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안간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사실성(事實性 ) 이므로, 죽음은 우리의 기획투사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앞에서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의 기본적인 관심이 존재에 대한 추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현존재(인간)가 존재자 중에서 유일하게 존재이해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니까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분석하는 것은 그대로 우리를 존재의 이해로 인도할 것이다.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1927)이 그러한 시도였다. 그런데 그는 존재추구를 위해 현상학적인 방법을 따랐다고 말했다. 「존재와 시간」도 그의 스승이며 현상학자인 훗설에게 바쳐졌지만, 사실상 훗설의 현상학이 없었다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도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상학적 방법이란 「대개의 경우 드러나 있지 않고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존재란 존재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가려져 있는 존재를 추구하는 하이데거의 철학과 사르트르의 철학은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무」의 부제를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붙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스승인 훗설의 현상학을 검토해볼 차례가 되었다.


④ 훗설

훗설(1859-1938)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현상은 감각적인 현상이 아니라 의식의 현상이다. 그러니까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사물의 형상」이라는 상식적인 의미의 현상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상학에서의 현상은 물질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현상이다. 『나는 .....을 의식한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인식에는 어떤 대상이 있게 마련인데, 현상학은 그 대상의 존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의식에게 주어지는 방식에 주목하는 학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지향성(志向性)이라는 기본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향성이란 무엇인가. 경험비판론자, 신 칸트주의자, 심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식작용을 분석함에 있어서 의식을 마치 소화기관처럼 생각했다.

그들에 의하면 의식은 마치 거미줄 같아서, 일단 어떤 사물이 여기 걸리면 의식은 그것을 날쌔게 불잡아, 분비물로 그것을 감싼 후 천천히 삼키며 분해하여 마침내 자신의 자양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훗설은, 결코 인간은 자기의식 속에서 사물을 분해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우리가 창문 밖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나무가 잔디밭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본다. 그게 전부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 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무는 의식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훗설은 실재론자는 아니다. 실재론이란,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건 아니건 간에 사물이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적 태도이다.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는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우리의 지각의 영역을 벗어난다고 해서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기 이전에 저 나무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바라보기를 그친다 해도 저 나무의 존재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실재론은 세계를 대상으로 의식하는 주체의 존재를 거의 무시한다. 그러나 훗설은 실재론자는 아니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이 나무의 실재가 아니라 그것을 실재로서 의식하는 인간의 의식작용이다. 그에게 있어서, 의식과 세계는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의식의 밖에 있는 세계는 그 의식과 상관관계에 있다. 훗설이 생각하는 의식은 결코 어떤 물질적인 이미지를 갖고있지 않다. 그 안에 대상을 삼켜 넣고 소화를 시키는 그런 「내부」도 갖고 있지 않다. 의식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그 대상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쪽을 「향하여 자신을 연속 폭발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서 몸을 빼내어 「자기 아닌 것」을 향해, 저기, 나무 옆으로 간다. 그러나 나무의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역시 나무의 외부에서 겉돈다. 왜냐하면 나무는 의식과는 다른 것이며, 의식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나무 속에 용해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나무도 의식 속에서 용해될 수 없다. 그저 나무는 나무고, 의식은 의식일 뿐이다. 따라서 의식은 나무의 밖에 있다. 그러나 「나」에게서 벗어나 나무쪽으로 갔으므로 「나」에 대해서도 밖에 있다. 이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의식이란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으며, 그저 단지 「자기에게서 도망치려는 운동」이고, 「자기 밖으로의 미끄러짐」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의 성질은 「자신의 외부」「절대적 도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예 의식으로서의 어떤 성질을 갖기를 거부하는 속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무런 속성도 없고, 물체도 아니고, 그저 텅 빈 상태에서 끊임없이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마치 인공위성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해 연속폭발을 하는 로케트처럼, 대상을 향해 연속폭발을 해 가는 어떤 것, 이것이 우리의 의식이다. 여기에서 훗설의 그 유명한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일 뿐이다』라는 명제가 생겨난다. 의식이 어떤 고유의 물질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전적 철학자들과는 달리 훗설은, 그것 자체로 아무 것도 아닌 텅 빈 상태이며, 대상이 주어질 때 존재하는 것이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의식이, 자기 아닌 어떤 것에 대한 의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을 훗설은 지향성(志向性)이라고 명명했다. 훗설은 이 지향성의 개념을 브렌타노에게서 도입했다. 그러나 브렌타노에게 있어서 지향성은 나무를 관찰한다든가, 반가운 소식을 듣고 즐거워한다든가 등 대상과 의식이 1대1로 대응하는 정적 관계인데 반하여 훗설에게서 의식이 대상을 형성한다는 동적 관계이다.

나무는 우리가 바라보기 이전에 엄연히 나무로 실재했다. 그러나 그것을 관심 혹은 지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 나무는 거의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무라는 대상을 대상으로 성립케 하는 작용, 이것이 의식의 지향작용이다. 여기서 노에시스(noesis), 노에마(noema)라는 훗설 특유의 개념이 생겨난다. 대상을 대상으로 형성하는 작용이 「형성작용」이고, 의식의 지향작용에 의해 형성된 대상은「형성체」(noema)이다. noesis는 희랍어로 「주목함」, 「바라봄」, 「이해」등의 의미를 지녔고, noema는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의미한다. noesis를 「의식작용」, noema를 「의식된 내용」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형성작용과 형성체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고, 지향적 의식의 근본 구조이다.

대상과 의식은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특정한 대상 없는 막연한 일반적 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훗설은 현상학을 「대상에서부터 이것을 체험하는 주관적 체험 및 형성 작용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시도 및 과제」로 규정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직접 문제삼지 않고, 대상을 형성하는 지향작용을 분석, 기술(記述)하는 것이 현상학적 태도라는 것이다. 가령 수(數)라는 대상은 수를 형성하는 셈의 작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때 수를 대상으로 삼는 의식의 지향성이 형성작용이고, 이 작용에 의해 대상으로 형성된 수가 형성체이다. 예를 들어 수학자는 형성체인 수를 직접 다루는 사람인데 반하여 현상학자는 수를 있게 하는 형성작용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상학은 설명이나 분석이 아니라 기술(記述)의 철학이다. 존재에 대한 그 어떤 태도의 설정도 유보한다. 그저 단지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는 과정만을 기술할 뿐이다. 그러니까 노에마의 기술이 현상학적 작업의 일차적인 과제이다. 이러한 작업은 「자유로운 태도 변경」 「괄호로 묶음」 「판단중지(」등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이것을 모두 환원적 방법이라고 한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방대하고 난해한 철학서이다. 그러나 전통적 철학서와는 달리 거기에는 도박대의 초록색 융단, 피에르와 만날 약속을 한 카페, 혹은 사랑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여러 가지 철학 중에서 특히 실존철학을 문학에 가장 가깝게 만든 요인일 것이다. 실존철학은 애초부터 주체에 진리가 있음을 내세운 철학이었다. 실존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진리는 객관적, 비인칭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개인의 정신 속에만 있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 명제나, 확립된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다. 체계적인 진리는 논리적으로 증명이 되지만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실존적 진리는 증명 아닌 묘사를 통해 전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존철학의 방법은 논증이나 증명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하여금 본래의 자기를 깨닫고 그리로 비약하게 하는 호소의 방법일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문학의 방법이다. 그런데 실존주의 문학은 특히 인간의 추악한 면, 어두운 면을 가차없이 묘사했기 때문에 「새로운 자연주의」니 「폭로주의 문학」이니 하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⑤ 헤겔

인간의 의식작용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현상학적 기술을 한 것은 훗설이 처음은 아니다. 그보다 1백년 앞서 헤겔(1770-1831)은 「정신 현상학」을 통해, 정신의 인식행위로서의 의식의 단계를 세밀하게 분석, 기술했다. 헤겔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의 원조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도 그의 「정신 현상학」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생(生)의 존재양식을 운동성(mobilit )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의 실존주의보다 훨씬 앞서 헤겔의 청년기 저작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우선 「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이다」라는 명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대상을 지향하는 그 어떤 의식도 실은 자기 의식에 의해 추동 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자기의식으로 복귀, 통일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의식이란 자기에 대한 의식인데, 헤겔이 의식 중에서 최고의 단계로 본 이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확신」과 「지각」, 「오성」의 3단계가 필요하다. 첫번 단계에서는 대상의 존재를 감성적으로 확신하고, 둘째 단계에서는 대상의 성질을 지각하며, 셋째 단계에서는 대상 세계의 법칙을 인식한다. 이 3단계가 모두 대상에 대한 의식이며, 이 대상의식(헤겔은 이것을 그냥 「의식」이라고 부른다)은 아직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성에 사로잡힌 대상 지향적 의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어떻게 자기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는가. 헤겔은 인간의 의식 자체가 자기의식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주체가 대상을 지향하는 이유는 대상을 자기 것으로 구성하려는 「자기에 대한 궁극적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타인을 알고자 하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함이요, 타인을 인정하는 것은 나를 인정하는 것이고, 타인을 증오하는 것은 타인 속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을 증오하는 것이다.

즉 주체와 객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세계 속에서 만나는 타인 역시 또 다른 자기의식이다. 두 자기의식이 마주 보는 최초의 상태는 일방적으로 자기의 인정만을 구하는 두 자기의식의 투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정(認定)투쟁이다. 이 투쟁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하나의 자기의식이 또 다른 자기의식을 마주볼 때 그 사이에는 즉각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중 하나의 자기의식은 탈자(脫自) 상태에 빠져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존경하거나, 상대방의 권위에 눌려 꼼짝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제 그의 본질은 타자에 달려있고, 타자가 그를 지배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렇게되면 원래의 자기의식은 고양되기 전의 의식 차원으로 다시 떨어지고, 타자에게 예속된다. 이렇게 타자에게 예속된 자기의식은 그러나 탈자(脫自)되는가 싶은 순간에 타자를 지양하여 그것을 자기화(自己化)한다.

즉 타자를 본질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식 차원에 떨어졌던 자기는 다시 자기의식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때 반대로 상대방이 이쪽의 자기의식에 예속된다면 두 자기의식의 관계는 영원한 지배-예속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자기의식은 타자를 자기와 대등한 자기의식으로 인정하고 또 자기도 그렇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된다. 자기의식은 원래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타자를, 자기의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존재를 자립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 상대방 속에서 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했던 이쪽의 자기의식 역시 실체적 존립을 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일방적인 타자 지양은 있을 수 없고, 나의 완전무결한 존재는, 나와 완전히 대등한 또 다른 자기의식에 의해 인정됨으로써만 보장된다.

헤겔의 그 유명한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이 바로 그것이다. 주인은 노예를 해방함으로써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노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앞에서 본, 자기의식의 순환 운동에 의해 그가 역으로 예속 당하여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참된 자유는 나와 타자와의 동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타자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또 나에 의해서 자유로운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나는 참으로 자유롭다」내가 인정받으려 하면 타자도 마찬가지로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실체적 존립기반을 타자에게서 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타자를 인정해 주어야만 한다. 타자 부정은 자기 부정이고, 타자 긍정은 자기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완전히 상호동등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헤겔의 생각을 사르트르는 인식론적 낙관주의라고 비판하다. 「존재와 무」의 제3부 「대타(對他)존재」는 헤겔의 이 낙관주의적 인식론과 존재론을 주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헤겔은, 나의 인식이 「자기의식」으로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출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기의식이란 스스로 자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의식인데, 이 의식이 발생한 최초의 순간에 나는 나 자신과 완전무결하게 일치되는 상태가 된다. 헤겔의 그 유명한 「자기=자기」, 또는 「나는 나다」(Je suis je)라는 공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나의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아직 진리는 아니다.

이 확신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가 자신의 눈에도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으로 보여야만 할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타자이다. 타인은 내 자기의식의 확신이 진리로 되기 위한 매개적인 수단이다. 남이 나를 미인으로 알아주었을 때, 혹은 남이 나를 천재로 알아주었을 때 비로소 진정 나는 미인이거나 혹은 천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매개 수단으로 삼는 타자는 또 어떠한가. 그도 역시 자신의 자기의식을 진리로 만들기 위해 나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내 편에서 볼 때 내가 본질적이고 타자가 비본질적이듯이 상대편에서 볼 때는 그가 본질적이고 내가 비본질적이다. 그러니까 의식의 만남은 이중의, 상호적 배제 관계이다.

따라서 타자는 내게 있어서 부정성의 성격을 가진 비본질적 대상이다. 나도 또한 그에게 그렇게 보인다. 상대방도 엄연히 「자기의식」이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이 나 자신을 비쳐 주기만을 기대한다. 나는 타자가 나의 「또 다른 자기」인 한에서, 즉 「대상화된 내 자신」인 한에서만 그에게 관심이 있다. 타자 속에서만 내 자신이 하나의 대상으로 객관화될 수 있다는 것은, 내 존재의 인정이 타자에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 그것이 바로 나의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타자에 대해서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 대상, 또는 객체를 의미하는 「오브제」는 물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로 상대방을 물체로서 노려보는 두 자기의식의 대결 속에서, 내가 비본질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대방이 팽팽한 시선의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포기하여 자기 스스로 나에 대해서 비본질적인 존재라고 체념하는 수가 있다. 이때 그는 노예고 나는 주인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본질은 그 자신이 아니라 바로 나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변증법적 순환에 의해 주인은 당연히 노예로 전락하게 되어있다.「노예는 주인의 진리이다」라는 헤겔의 유명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주인은 이때까지 남에게 행했던 것을 자신에게 해야하고, 노예는 이때까지 자신에게 행했던 것을 남에게 행하는 순간」이 와야만 한다. 사르트르의 비판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여러 의식들의 투쟁은 각기 자신의 확신을 진리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는 타자가 나에 대해서 한갓 대상(객체, 물체)이 될 때에만 가능함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각기 자기의식을 고스란히 인정받는 상호인정의 상태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닌가. 나와 타자 사이의 동시적 상호인정은 「남이 자기를 보듯이 나를 본다」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개별성, 특수성이 본질인 인간에게서 이러한 자기의식의 보편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내가 남에게 나타나는 방식, 그리고 남이 내게 나타나는 방식 사이에 공통의 척도가 있어야만 이것은 가능한데 이러한 동질성은 어디에도 없다. 헤겔도 처음에는 그것을 시인하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상호적이 아님을 확인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러한 상호성이 정립되어야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워 논리의 비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객체인 타자와 주체인 나 사이에 아무런 공통의 척도가 없고, 자신에 대한 의식과 남에 대한 의식 사이에도 역시 공통의 척도가 없다. 나는 타자를 대상으로 삼을 뿐 절대로 그의 진정한 존재, 즉 그의 주관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사르트르는 헤겔의 인식론이 오류로 끝났다고 말한다. 결국 사르트르의 대타관(對他觀)은 매우 비관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훈훈한 인정의 사회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대 인간의 관계는 투쟁의 관계일 뿐이다. 희곡 「밀폐된 방」의 그 유명한 대사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참고논문



사르트르와 루카치에 있어서의 패자승(敗者勝)의 개념차이

박 정 자


들어가는 말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친구와 싸우고 들어가 분을 삭이지 못하는 아이에게 인자한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 격언은 실상 엄청난 변증법의 도식이다. 이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자기운동, 양의 질로의 변화, 비약, 낡은 것의 소멸과 새로운 것의 발생, 전진과 후퇴를 자발적으로 반복하는 나선형적 발전이라는 사물의 운동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안쪽으로 자꾸 밀면 어느새 바깥쪽으로 나오게 되는 호텔의 회전문처럼 모든 유한한 사물들은 그 자체 안에 모순을 포함하고있어 끝없는 자기부정의 운동을 통해 긍정과 부정이 교대된다.

지금 좋은 일이 생겼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고, 지금 실패했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말 한 마리를 잃어 슬퍼했으나 그 말이 몇 달 후 준마를 끌고 왔고, 공짜로 말이 생겨 기뻐했으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상하여 다리를 부러뜨렸으며, 아들의 부상에 상심했으나 부러진 다리 덕분에 곧 이어 쳐들어온 오랑캐와의 싸움에 나가지 않아 아들의 목숨을 건진 그 옛날 중국 노인의 고사처럼 모든 것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이처럼 한쪽이 극에 달하면 다른 한쪽으로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이 사물의 운동 법칙이라면 거꾸로 두 번째 것을 얻기 위해 앞의 것을 짐짓 포기하는 전략도 가능할 것이다.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則必死, 死則必生),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 하면 살리라', 이것이 패자 승의 격언이 가진 위안이며 구원의 메시지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이 격언은 절대예술, 순수예술로 통하는 기본 도식이다. 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은 인생이고, 사는 것은 예술이다. 인생에서 패하고 예술에서 승리한다는 이 도식은 그가 일생 동안 연구했던 보들레르, 장 주네, 플로베르의 드라마틱한 삶의 기본 구도이다. 그리고 <말들>에서 보여준 그 자신의 문학관이기도 한다. <집안의 백치>에서는 거의 2천여 페이지가 이것에 할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하면 루카치에게서는 패자승(敗者勝)이 <소설의 이론>에 단 한번 나올 뿐이다.

루카치 자신이 "관념론적 신비론으로 가득 차 있고...오류 투성이며...반동적인 작품"이라고 스스로 비판했던 책이어서 인지 이 개념의 후속 적인 전개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패자 승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우리는 사르트르의 저서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소설의 이론>(1922년)에서 이 도식을 발견하고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상호 텍스트 성인가? 아니면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개념으로 쓰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관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실존주의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마르크시즘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패자 승에 대해서는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가? 두 개념의 확인은 결국 두 사람의 예술관 전체를 조감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사르트르의 패자승

사르트르의 패자승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산문에서의 실패가 시의 승리로 끝난다는 언어의 문제가 그 첫 번째이며, 삶과 글 쓰기를 대립적으로 생각하여 인생에서의 실패가 곧 예술의 승리라는 절대 예술의 개념이 그 두 번째이다.

A)언어에서의 패자승

주지하는 대로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언어를 도구로 생각하느냐, 사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산문가와 시인의 길이 갈린다고 말했다. 너무 단순화시킴으로써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 표현은, 그러나 산문을 헤겔적인 의미에서 서정과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게 흠잡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쓰는 말은, 그것이 글로 쓰여졌건 입으로 말해졌건 간에, 두 개의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의 머리속 생각을 정확하게 남에게 전달하기 위한 도구적 기능이고, 또 하나는 말을 질료로 삼아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기능이다. 도구로서의 말은 그것을 넘어서서 다른 어떤 사물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기호의 투명성을 지녔고, 예술적 질료로서의 말은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사물의 불투명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거칠게 시와 산문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문학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그 책 좀 줘 봐."라는 친구의 말이 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책 좀 줘 봐."는 책을 집어 친구에게 건네주는 나의 행위를 지칭하고 그 행위의 실행 안에서 해소되어 없어진다. 남는 것은 내가 친구에게 전해준 책일 뿐 그 발화는 투명하게 없어졌다. 그러나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라는 시구에서 우리는 시인이 정말 모란이 필 때까지 자기의 봄을 기다리고 있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이 구절은 모란이 필 때까지 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지시하는 문장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 구절의 기호적 측면이 지시하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언어 자체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일상적인 언어와 문학적인 언어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평생 시 한 편 읽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나 시인의 언어가 똑같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똑같은 언어를 가지고 일상적인 말이 아니라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의 도구적이고 기호적인 측면을 죽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적 언어는 산문의 폐허에서 솟아오른다.

라는 말의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완벽한 도구가 아니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끼는데, 그것이 섬세한 직관이나 감수성을 전달하는 문제가 되면 언어는 완전히 무력한 도구임이 드러난다. 단순한 무능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일찍이 플로베르는 언어에 대한 무력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말이 생각을 드러내준다는 바보 같은 금언이 있다. 말은 생각을 왜곡한다는 것이 차라리 더 정확한 이야기일 것이다. 생각 그대로를 말로 표현해 본적이 있는가? 당신이 구 상했던 그대로 소설을 써본 적이 있는가.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역설적으로 비 소통의 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투명한 기호가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거기에 가 부딪히는 불투명한 사물이 될 것이다. 기호는 자기를 넘어서서 자기 아닌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데 비해, 사물은 자기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책상'이라는 말은 '책상'이라는 그래픽 이미지 또는 발음을 통해 그 말 자체가 아닌, 저 편에 있는 진짜 사물인 책상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사물로서의 책상은 자기를 넘어서서 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이 책상일 뿐이다. 기호가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사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기호와 사물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기호이기를 그친 말들은 유리 구슬과 똑같은 사물이 된다. 그러고 보면 언어에는 의미를 발생시키는 기호적 측면과 스스로 자족하여 타자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사물적 측면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시에 들어 있는 셈이다.

의미작용에서 차단된 언어는 자기 자신으로 떨어져 자기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 언어가 스스로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말들을 더 이상 실용적으로 사용하려 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우리가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대상이 된 다. 말들의 시각적 물질성, 특히 청각적 물질성이 귀스타브를 열광케 했다.

사물 중에서도 말은 아름다운 사물이다. 적어도 사르트르가 포스트 낭만주의라고 불렀던 19세기의 시인,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칠보와 카메오를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고답파의 테오필 고티에가 그렇고, 보석과 광물질 예찬을 댄디즘의 기초로 삼았던 보들레르가 그러하며, 언어를 대리석처럼 깎고 다듬고 보석처럼 박아 넣고(상감) 레이스처럼 섬세하게 조각하는 '장인'이 될 것을 다짐했던 플로베르가 그러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보통 사람들은 말의 이러한 물질성을 무시하고 말이 가진 언어적 의도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데, 언어의 예술가들은 언어의 의미를 애써 무시하고 그 물질성만을 취하려 애쓴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도구인 말을 이처럼 아름다운 물질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패자승의 전략이 필요하다. 즉 언어가 가진 실용적 도구의 측면을 무시하고, 언어의 또 하나의 측면인 물질성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도구를 훔쳐내어 그것을 자기 멋대로 용도 변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참여문학 옹호를 위해서건 아니면 19세기 순수문학의 미학을 정립하기 위해서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나 <집안의 백치> 등에서 '언어를 부르주아에게서부터 훔쳐내어"라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것은 플로베르의 상호 텍스트 성이며, 플로베르가 사르트르에 끼친 영향을 증명하는 여러 사례중의 하나이다. "예술이 끔찍하게 무섭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을 사르트르가 정리한 설명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로부터 훔쳐내어 그것을 자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언어를 그 실용적 목적에서 되돌려 굳이 현실이 아닌 어떤 허구, 또는 상상의 표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가 가진 현실성을 탈색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19세기 포스트 낭만주의자들의 글 쓰기 전략이었다고 사르트르는 주장한다.

글 쓰기 작업은 언어를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는커녕 그것을 사람들로부터 훔치려, 다시 말해서 그것을 탈현실화 하려고 시도했다.

언어를 탈현실화 시키려면 언어 주체의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즉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인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만들겠다는 특이한 태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미학적 태도」이다.

말이 무상적(無償的)으로 되었을 때, 다시 말해 그것을 부르주아들에게서 훔쳐내어 그것에 대해 미학적 태도를 취했을 때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미학적 태도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음악회에서 또는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멋진 영화에서 우리는 벅찬 감동을 느낀다. 어두운 홀 안에서 화면이나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에 완전히 빠져 있는 순간 우리는 일상적인 근심사를 완전히 잊고 있다. 그러나 불이 켜지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감동으로 아직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머리 속에서는 서서히 현실의 모든 일상사가 되살아난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초월적으로 느껴졌던 세계가 까마득하게 멀어져 보이고, 우리는 모든 관습이 굳건하게 자리잡은 현실의 세계 속에서 빈틈없는 상식으로 돌아와 있다.

그렇다면 극장 안과 바깥이라는 공간이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성하는가. 모든 연주, 모든 영화가 다 그런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설득력이 없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거기에는 현실을 무화 시키고 현실이 아닌 어떤 세계에 빠져들겠다는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 것이다. 심한 갈등이나 근심에 사로잡혀 도저히 영화를 볼 기분이 아닐 때 아무리 좋은 영화를 보아도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려면 우리는 현실적인 태도를 미학적인 태도로 전환시켜야만 한다.

이 두 의식을 사르트르는 초기의 저서인 <상상적인 것>에서 「현실의식」과 「이미지 의식」으로 나누었다. 「상상하는 의식」이 아니라 「이미지를 형성하는 의식」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상'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허황된 상(像)을 연상할까봐 사르트르가 만들어낸 조어이다. 그러니까 이때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미지는 실재의 대상과 짝을 이루는 의식작용이며, 그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것을 상상의식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미지가 우리의 의식 앞에 나타나는 과정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한 <상상적인 것>에서 사르트르는 현실과 이미지(또는 현실과 상상)의 차이를 '지각의 유무로 결정했다. 예를 들어 여기 우리의 전통 공예품인 8면 체의 색지함이 내 앞에 놓여 있다고 치자. 각 면이 각기 다른 색깔의 네 개의 삼각형으로 분할되고 그 한 가운데에 태극 문양이 들어 있는 그 화려한 종이 상자를 나는 천천히 관찰한다. 이때 나는 대상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각(知覺)이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앞에 놓여진 색지함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색지함이라는 실재(實在)의 대상을 지각하고있는 것이지, 그것을 상상하거나 그것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앞에 색지함이 없는 곳에서 어제 본 색지함을 내 머리 속에서 상상해 본다고 치자. 이때 나는 눈을 감아도 좋고 감지 않아도 좋다. 어제 본 화려한 색지함의 모양과 색깔이 선명하게 내 의식 속에 떠오른다. 눈을 감아도 좋고, 감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 중요하다. 요컨대 나는 실제의 대상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라는(또는 이미지 작용이라는) 의식 작용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감각 기관은 열려 있어도 좋고 닫혀 있어도 좋다. 이제 현실과 상상의 구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실적인 것은 지각의 대상이고, 상상적인 것은 지각이 없는 의식의 대상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예술론으로 직결된다.

미학적 대상은 비현실이고, 예술 작품은 비현실이다.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유동대리물(類同代理物) 개념이 생겨난다. 조각, 음악, 연극 등 모든 예술에 이 이론을 적용시킨 사르트르는 우리의 현실의식이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인 물질적 측면, 예컨대 캔버스나 대리석 조각 같은 것을 유동 대리물이라고 부른다. 상상의식이 집어낼 수 있는 미학적 대상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비현실'(이므로 그것을 우리의 지각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미학적 대상과 아주 유사한 현실의 물질로 만들어낸 것이 예술작품이라는 의미이다. 예컨대 화가는 그 자체로서는 도저히 전달이 불가능한 어떤 심상(心象)에서 출발하여 얼마동안의 작업 끝에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물체를 대중 앞에 만들어 놓는다.

이때 사람들은 상상에서 현실로의 전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화된 것은 캔버스 위에 붓질과 색칠을 한 결과일 뿐, 이 물질적 요소가 미학적 감상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각에 주어진 물질적 대상이 아니다. 마티스의 빨강은 페인트공이 바닥에 흘려 놓은 빨강과 같을 수도 있다. 우리의 지각대상으로서의 빨강은 마티스의 빨강이나 페인트공의 빨강을 똑같이 인지하지만 우리의 상상의식, 또는 미학적 태도는 마티스의 빨강 앞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낀다. 결국 화가는 자신의 심상을 현실화시킨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물질적 아날로공을 구성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 유사물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이미지, 즉 미학적 대상을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화가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은 상상의 현실화가 아니라 기껏해야 상상의 객관화일 뿐이다. 감상의 측면에서건 창작의 측면에서건 간에 미학적 태도란 현실을 무화(無化) 하고 상상의 세계로 들어감을 뜻한다. 사르트르는 자신과 세계를 비현실화 시키는 이러한 태도를 시적인 태도라고도 말한다.

시적 태도란 현실에서 도망쳐 상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술적 행위는 상상을 현실화시킴으로써 현실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플로베르m,등 19세기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작가들에 대하여 사르트르가 '상상의 작업자, '영원한 탈 현실화의 중심', '비현실의 아름다운 대상을 만들어내는 현실의 생산자'라고 지칭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예술이 '비현실'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과 대립된다. 결국 사르트르에게서 '아름다움'은 '비현실'과 동의어이다.

이 몇 개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현실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상상적인 것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치이며, 그 본질적 구조 안에 세계의 무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미(美)를 얻기 위해 우선 언어에서부터 비현실을 택했다. 언어의 현실성인 도구적, 기호적 측면을 부정하고, 아름답지만 실재가 없는 가상의 이미지를 취한다. 그런데 언어에 대한 비현실적 태도는 언어 자체에만 국한될 수 없다.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어야만 시인은 이미지를 가지고 놀 수 있다. 언어에 대한 미학적 태도는 결국 세계에 대한 비현실적 태도를 전제로 한다. 현실 원칙이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비현실이란 근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실패이다. 그래서 시인은 좀더 놓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아예 처음부터 실패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이것이 언어의 패자승이며 동시에 삶과 글 쓰기를 대립시키는 패자승으로 전환점이다.

시는 패자승이다. 그리고 진정한 시인은 얻기 위해 우선 죽을 정도로 실패를 선택한다.


B) 삶의 실패, 예술의 승리

글쓰기는 삶과 반대이다. 글쓰는 행위가 활동적 삶과 배치되는 행동이어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체험을 글로 옮겼을 때 그것은 이미 실제의 체험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햄릿이 작가였다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사느냐, 쓰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매일 밤 죽음을 물리치기 위해 이야기를 했던 <천일야화> 의 세헤라자데와는 달리 작가는 삶과 글쓰기 중에서 글쓰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죽음의 등가물이다. <말들>의 다음 구절이 그것이다.

글쓰기 취미는 삶의 거부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일찍이 플로베르가 고백한 말이기도 하다.

나는 살지 않기 위해 예술 속에 침잠한다.

건강한 보통의 삶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질병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구토>에서 글 쓰기와 질병의 관계를 간파한 것은 조세트 파칼리였다. 그녀는 <구토>의 다음 구절에서 몸이 나았다는 것과 글 쓰기를 포기했다는 것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음을 주목했다.

이제는 병이 나았다. 나는 소녀처럼 새 공책에 그 날 그 날의 인상을 기록해 넣는 일을 포기했다.

글 쓰기는 병과 동격이고, 병에서 치유되었다는 것은 글 쓰기를 그쳤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로캉탱의 구토는 실존의 자각 앞에서의 어지럼증이라는 존재론적 의미 이외에 예술의 선택이라는 미학적 의미를 새롭게 획득하게 된다.

로캉탱이 벤치에서 구토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술을 선택한 것이다.

로캉탱의 구토증이건, 플로베르의 간질병이건 문학은 병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기도가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이 세상에서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한다. 실패야말로 사르트르의 평생의 저작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쇄말이다. 그가 플로베르, 보들레르, 주네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에게 바쳐진 3천여 페이지의 <집안의 백치>는 실패의 미학, 실패의 사회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시골 의사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야심 만만한 외과의사 아버지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일찌감치 의사가 된 형 밑에서 변호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플로베르가 사법시험에서 두 번 떨어진 후 간질로 쓰러졌을 때 그는 집안의 수치였고, 그의 인생은 완전한 실패였다. 신흥 명문가의 둘째 아들이며 앞으로 변호사가 될 전도 유망한 청년에서 단숨에 수치스러운 병을 지닌 무능한 젊은이로 전락한 이 사건을 사르트르는 패자승의 전락으로 해석한다.

지는 자가이기는 게임을 하기 위해 - 이것이야말로 그의 신경증의 깊은 의미이다 - 사소한 희망을 버리는 것은 불가피했다.

병자가 된다는 것은 부양 받을 권리,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권리, 세속적 욕망을 포기할 권리, 독신자 또는 수도승이 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플로베르는 법학을 공부하여 어엿한 직업을 갖고 사회적으로 출세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적이고 속물적인 부르주아지의 위에 우뚝 올라서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능력이 없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이 없다면 밑으로 빠져나오면 되지 않겠는가. 위로 나오건 밑으로 나오건 여하튼 그것은 부르주아지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1842년 8월에 그가 처했던 상황에서 유일한 출구는 집안의 백치가 되는 것, 영원히 실패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출구는 집안의 백치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미 그는 이것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42년 8월의 실패는 아마도 그의 깊은 의도를 나타내는 것인 듯 하다. 즉 모든 것을 잃고 서서히 내적 작업을 통해 진짜 실패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플로베르의 간질병 발작을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과 비교한다. 원단 외판원 그레고르 삼사는 날이면 날마다 출장을 다녀야 한다. 여행의 피로감, 열차 시간에 대어야 한다는 강박감, 불규칙하고 형편없는 식사, 대인관계의 긴장감. 단 하루라도 이 피곤한 일에서 벗어나 아침에 달콤한 늦잠을 잘 수는 없을까? 그러나 게으름을 부리면 가혹한 사장은 당장 그를 해고할 것이다. 그에게는 부양해야할 부모와 누이동생이 있다. 아들에게 냉정한 아버지는 5년전에 파산하여 병들어 있고, 어머니는 심한 천식으로 돈을 벌 처지가 못된다. 바이올린을 잘 켜는 열일곱살된 누이동생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다. 빨리 돈을 모아 누이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고 싶다. 그러나 판매 실적이 부진하여 현재의 보잘 것 없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극도의 피로감과 중압감 사이에서 어느 날 아침 그는 갑자기 흉칙한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가족들의 요구에서 해방되는 길이었다. 끔찍한 벌레로 변신하여 가족들을 수치 속에 몰아넣은 이 불쌍한 희생자는 사르트르의 구도 안에서 플로베르와 대칭을 이룬다.

수치심으로 죽어가며, 자기 가정을 치욕 속에 몰아넣은 벌받은 죄인, 가족들의 무고한 희생자, 혐오감을 주는 이 끔찍한 벌레는 그가 발작에 의해서 되고자 하는 어떤 미지인의 여실한 상징이었다.(...) 귀스타브는 공포에 질려 자기가 벌레로 변하는 장소와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다.

물론 카프카의 <변신>(1912년)은 플로베르가 첫 번 간질 발작을 일으킨 퐁 레베크 사건(1842년)보다 70년 뒤에 쓰여진 것이다. 사르트르가 변신을 플로베르의 상징으로 자신 있게 거론한 것은 카프카가 도스토엡스키와 플로베르를 좋아했다는 것, 그리고 세 사람 모두 당당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갈등을 빚으며 힘겹게 문학의 길을 택한 심약한 아들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플로베르의 간질이 심리적 친부살해의 계산된 전략이라고 까지 말한다.

과연 간질이 어떤 무의식적 반항의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질병인지에 대한 논의는 우리의 관심 밖이다. 중요한 것은 사르트르가 이 의도성을 패자승의 도식과 연결 지었다는 사실이다. 인생에서의 실패는 다른 영역에서의 승리를 뜻한다. 실생활에 서투르고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못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서 '장엄한 부적응자', 또는 '선민(選民)의 표시로서의 실패'라는 주제가 제기된다.

너무 순수한 이상을 가졌고, 너무 높은 야망을 가졌으며, 너무나 명징한 눈을 가진 고귀한 영혼은 법학자들의 소인배적 관심사에 흥미가 없다. 장엄한 부적응자라는 주제는 다시 한 번 그의 편이 되었다. 실패는 선민(選民)의 표시인 것이다.

현실에서 패하고 난 후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이다. 문학도 그냥 문학이 아니라 거의 종교의 차원으로 올라간 절대 예술로서의 문학이다. 기독교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생을 얻으려면 우선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상의 삶에 비하면 지상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얻기 위한 시련의 기간이다. 따라서 내세의 행복을 위해서는 지상의 삶을 희생시켜야 한다. 신의 율법에 대한 절대 복종은 물론, 모든 세속적 욕망을 멀리하는 청빈과 순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플로베르나 보들레르 또는 말라르메에게 있어서 천상의 영광은 바로 문학이었다. 그들은 마치 수도사가 고행하듯 언어를 다듬는 일에 정진했다. 다시 말하면 문학은 그들의 구원이었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천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 세속의 삶에서는 일부러 실패했다.

19세기이래 비교적 최근까지도 신경증은 걸작을 위한 왕도로 여겨졌다. 플로베르나 도스토엡스키는 간질 환자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보들레르처럼 마약이나 알코올을 통해 인위적으로 자신의 심신을 망가트려야만 했다. 퇴폐적인 생활로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 문학의 천재성을 보증해주는 것으로 여겨졌고, 글쓰기는 신경증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와 세상물정에 대한 근본적인 부적응증을 전제로 했다. 사르트르는 19세기 포스트 낭만주의자들이 삼중의 실패(triple chec)를 추구했다고 말한다. 작가로서의 실패, 인간으로서의 실패, 그리고 작품으로서의 실패가 그것이다. 작가로서의 실패는 우선 모든 독자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1850년대의 훌륭한 문학은 명성이 선험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거부되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었다.

당시의 작가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이 상품이 아님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품을 팔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팔기 위해서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는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작가들이 추구했던 것은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의 생활이었다. 그들의 선배인 귀족 출신 낭만주의 시인들처럼 그들도 이 부르주아 세계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절대 팔리지 않는 순수한 작품을 쓰는 일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물려받은 귀족이기는커녕 기껏해야 시골 의사나 공증인의 아들로 밥벌이를 위해 직업을 가지거나 아니면 아주 미미한 연금으로 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의 문학적인 태도는 자기 계급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인 부르주아지 위에 우뚝 올라서서 그 어떤 귀족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사치품, 다시 말해서 완전히 쓸데없고 무상(無償)적인 걸작을 만들어 내어 부르주아들에게 그들의 천박한 이윤추구를 수치스럽게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자기 계급 이탈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은 인류 전체에서 이탈하는 태도를 보였다. 높은 하늘에 올라가 저 아래 인간들을 내려다보듯, 마치 자신은 그 속의 일원이 아니라는 듯 초연한 무감동의 시선을 사람들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참여문학론에서 반대파를 비난하는데 사용했던 중요한 개념인 고공(高空)의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공의식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 결코 현실이 아니라는 데에서 그들의 실패는 진짜 실패가 된다.

그들의 활동에 선행하는 조건들, 예컨대 자기 계급 이탈, 인류에서의 이탈, 고공의식, 무감동 등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이 이 문학세대의 근원적인 실패였다.

인간으로서의 실패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보들레르의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개념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커다란 바다새 알바트로스는 현실에서 낙오한 시인의 상징이다. 뱃사람들에게 사로 잡혀 지상에 내려온 알바트로스는 그 커다란 날개 때문에 잘 걷지 못하고 뒤뚱대는 모습이 '서투르고 못생겼다'. 사람들은 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치며 조롱한다. 이 부끄러운 불구의 모습, 이 무능함은 바로 현실 생활에서의 시인의 무능함이다. 너무나 큰 날개가 거추장스러워 땅위에서 잘 걷지 못하는 새처럼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수가 없다. 그러나 그를 조롱하는 다른 사람들은 이 불구와 무능이 우월함의 표상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지상에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웠던 새가 일단 하늘로 날아오르면 그 커다란 날개가 창공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장엄하기 그지없다. 지상에서 실패했으나 천상에서 승리하는 알바트로스, 이것은 그대로 패자승의 형상화이다.

말라르메가 제라르 드 네르발을 우스꽝스러운 햄릿, 병자, 기묘한 쇠고동 나팔을 부는 어릿광대라고 불렀을 때 그는 저주받은 시인의 실패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리고 미(美)의 승리, 다시 말해서 예술의 승리가 있기 위해서는 대중의 조롱과 어릿광대의 우스꽝스러움이 반드시 있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르콩트 드 릴르,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은 모두 시와 저주를 동일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시와 저주를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모든 시인은 저주받았으므로 저주받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시인이었다.

19세기에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던 작가, 시인들은 왜 현실에서의 실패를 예술의 전제조건으로 삼았을까? 사르트르는 그들의 전 세대인 낭만주의 시인들이 귀족계급이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샤토브리앙, 마담 드 스탈, 위고, 비니, 뮈세 등의 낭만주의자들은 모두 귀족이었다. 그러나 대혁명 이후 왕정의 몰락과 함께 귀족도 몰락하기 시작하여 시대는 이미 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평민의 세상이 되었다. 물론 왕정복고와 제정의 선포등 정치적으로는 아직 공화정이 아니고 귀족들도 과거의 특권과 재산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어쩐지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가는 듯한 몰락의 기미를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귀족 출신 낭만주의 시인들의 그 원인 모를 멜랑콜리는 몰락하는 계급의 허무와 슬픔을 담고 있다.

더 이상 자기들과 맞지 않는 시대에 더 이상 사회적 성공의 보장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자포자기적으로 문학에 심취하며 뭔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좌절감을 감미로운 언어에 실어 표현했다. 어느 때는 사랑의 실패, 또 어느 때는 사회적 부적응의 실패를 비탄의 어조로 노래했던 그들의 시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1840년대에 20대의 청년으로 문학 수업을 받았던 플로베르와 보들레르 등은 불행하게도 부르주아 출신이었으나, 그들의 문학적 스승은 귀족의 낭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근원적인 열등감과 좌절감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모든 시인이 귀족이었으므로 그들에게는 문학이 귀족의 특권인 듯이 보였다. 문학을 하려면 귀족이어야 한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문학이 거부된 듯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은 문학에 대해 타는 듯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귀족의 시인들은 현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술과 연애로 인생을 소진하며 주옥같은 시를 써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인생은 실패했다. 귀족은 실패한 사람이므로, 보통 사람도 실패하면 귀족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포스트 낭만주의의 문학도들은 일부러 인생의 실패를 자초했고, 나는 이 사회에서 저주받았노라고 과장된 제스추어를 썼다. 실패와 예술의 상관관계는 여기서부터 생겨났다. 이제 탐미적 예술가들은 일체의 행동을 거부하고 마치 수도사처럼 정신의 단련에만 정진하는 정적(靜寂)주의에 빠져들었다.

행동의 거부와 정적주의 역시 그들의 출신 계급인 부르주아지에서 벗어나 귀족을 흉내내려는 기도의 일환이다. 태어나는 것만으로 가문의 명예와 부를 물려받아 자신의 가치가 정립되는 귀족과는 달리 부르주아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귀족이 존재의 인간이라면 부르주아는 행위의 인간이다. 실용성에 얽매이지 않는 귀족의 대범함과 꼼꼼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의 공리주의에는 이런 계급적인 근거가 있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하나도 없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구축해야 하는 부르주아에게 있어서 유일한 자산은 근면한 활동뿐이다. 자기 몸을 부지런히 놀려 돈도 벌고 명예도 쌓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action)은 부르주아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열병에 사로잡힌 젊은 작가 지망생들은 신분상승을 위해 악착같이 행동하는 가족과 주위의 모든 부르주아들이 천박하고 상스럽게만 보였다. 이 계급에서 몸을 빼내는 길은 그들과 다른 생활 태도를 갖는 것, 즉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사르트르는 플로베르의 편지들에서 간파한다.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나와 있듯이 그는 경멸하여 일부러 행동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말을 빌면 그는 완벽하게 행동할 자신이 있었고, 소위 '행동적인 인간'들 보다 더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에 몸바치기 위해 이 헛된 움직임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러나 행동은 부르주아들만의 것은 아니다. 행동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범주이다. 먹고살기 위한 직업을 갖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정적인 행복이나 사회적인 출세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예 인생의 목적 자체가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에서 몸을 빼냈을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서 몸을 빼냈다.

요컨대 인간은 행동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에서 몸을 빼기 위해서는 행동의 불능성으로 충분하다.

간질로 평생 어머니와 조카의 보살핌을 받으며 시골집에 틀어박혀 글만 썼던 플로베르나 방탕한 생활로 금치산 선고를 받았던 보들레르 등이 모두 일생을 미성년자처럼 보냈던 것은 이처럼 행동의 불능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다른 인간들과 다른 그들의 비인간적인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종교처럼 추구했던 것은 바로 아름다움(美)이었다. 미를 실현시키기 위해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희생시켜야 했으며 미는 그들의 절대적인 목표였다. 예술적인 아름다움만이 그들을 인간의 영원한 업보인 목표-수단의 악순환에서 해방시켜줄 구원이었다. 철저하게 인생을 희생시키다보니 마치 그들의 인생이 예술이라는 절대적 목표의 수단인 듯이 보일 정도였다.

절대적인 목표가 그를 자신의 유일하고도 본질적인 수단으로 선택했다. 비인간적 목표에 대한 인간의 소외를 뜻하는 미(美)란 우선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소외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세속적인 실패는 선민(選民)의 표시가 된다.

예술가는 인간이 되기에는 너무나 큰 사람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고통과 실패한 인간의 우스꽝스러움 속에서 알아 차렸다.

작가로서 실패하고 인간으로서도 실패한 예술가는 이제 작품에서 마저 실패해야 한다. 삼중 실패의 세 번째 항인 작품의 실패는 언어의 물질성과 소통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앞의 A절에서 다룬바 있다. 소통 불능성으로 규정되어 완전히 즉자 존재가 된 작품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미(美)일 뿐이다.

그들이 앞으로 해야할 작품은 작가로부터도 독자로부터도 완전히 고립된 즉자-존재로서 제시되었다. 즉 자신의 존재론적 밀도를 오로지 미(美)에만 빚지고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이런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난파를 당한 듯 당황한다. 이 난파는 무엇에 대한 암시인가? 그것은 존재-저 편의-존재이며 또 혹은 존재에 대한 비존재의 우위성이다. 현실은 시시하고 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비현실이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

작품은 모든 실재를 부정하는 것을 자기 의미로 삼음으로써 우선 현실을 한정짓는 듯이 보였다(작품은 비현실화의 실재적 중심이다). 그런데 이제 그 의미는 작품으로 되돌아와 그것을 감싸고 해체한다. 그러자 작품은 비현실 속으로 들어가 상상으로서밖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상상적인 것>에서, 그리고 플로베르를 다룬 <집안의 백치> Ⅰ,Ⅱ권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상상의 역할과 플로베르의 비현실의 문학에 그토록 호감을 보이던 사르트르는 19세기의 객관적 신경증을 다룬 <집안의 백치>Ⅲ권에 와서 돌연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논조로 되돌아가 플로베르를 비롯한 19세기의 포스트 낭만주의자들을 혹독하게 질책하고 있다. 예컨대,

앞으로 해야할 문학에는 이미 말을 물체화 하고, 그것으로 고독하고 비인간적인 기념비를 만들어야 한다는 헛되고도 미친 명령이 들어 있었다.

라는 문장에는 순수문학을 단죄하던 참여문학 주창자의 어조가 되살아나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그러나 1970년 마들렌느 샵살과 가진 회견에서

작가란 언제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얼마간의 상상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일정량의 허구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 나는 그 허구를 플로베르에 대한 작업에서 발견한다.

라고 말함으로써 상상을 문학의 필수 조건으로 규정하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문학관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76년 미셸 시카르와 회견에서는 침묵과 무(無)의 작가인 플로베르와 말라르메를 언급하면서

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나는 글이란 침묵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글 뒤에 침묵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가들을 특별히 찾았다. 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침묵 - 진짜 완전한 침묵 - 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참여문학 논조와도 멀고, <집안의 백치> Ⅲ권의 단호한 문체와도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회견이 <집안의 백치>의 출판(1972년) 이후 그의 평생의 작업을 마무리하는 시점(그는 1980년에 죽었다)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그의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미학 이론으로 간주해야 할 것 같다.
결국 패자승은 사르트르가 19세기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작가들을 비판하기 위해 쓴 도식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필생의 미학적 태도를 떠받치는 중요한 도식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역시 샵살과의 회견에서

나는 글쓰기의 취미 속에 나의 영생의 욕망을 쏟아 부었다.

고 말했듯이 그는 플로베르나 보들레르, 또는 말라르메와 꼭 마찬가지로 문학을 종교처럼 절대적이고 신성한 것, 그리고 유일한 구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내 상상 속에서 문학적 인생은 그대로 종교 생활을 베낀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오로지 나의 구원만을 생각했었다.



2. 루카치의 패자승


A) 헤겔의 계승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철두철미하게 헤겔적이다. 우선 작가의 소설 쓰기 작업을 주관성의 과정으로 본 것부터가 그러하다. 작가는 자신과 비슷한 성질의 대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의 구조화 작업은 여하튼 자신과 비슷한 성질의 대상을 취득하는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예술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 즉 정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하나의 존재 방식만을 갖고 있는데, 유일하게 인간은 이중의 존재를 갖는다. 사물과 같은 즉자적(卽自的)존재가 그 하나이고,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대자적(對自的) 존재가 그 두 번째이다. 인간이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이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방법은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가만히 앉아 자신의 내면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기마음의 경향과 숨겨진 부분을 의식하고, 자신을 관찰하며, 자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상으로 떠올리고, 내부 혹은 외부의 자료를 가지고 자신을 파악한다.

두 번째는 좀더 동적인 실제적 행동에 의해서이다. 의식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으로 나가 외부의 대상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주관성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객관성 속에 들어가 있다. 이것이 정신의 외화(外化)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헤겔은 연못가에 앉아 돌을 던지는 아이의 비유를 든다. 아이가 던진 조약돌은 고요하던 연못에 파문을 일으킨다. 아이는 수면 위에 일렁이며 멀리 퍼지는 몇 개의 동심원을 보는 것이 즐겁다. 돌을 던지기 전까지 연못은 그의 밖에 위치해 있었고,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소원(疎遠)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조약돌은 손에 잡아 팔매질을 하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내면성을 그 대상에 새겨놓았다. 이 아이의 의식이 저 멀리 연못 속에 구체적, 가시(可視)적 실재가 되어 나타났다. 외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대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대상의 이 심한 소원(疎遠)성을 제거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

외부 세계의 심한 소원(疎遠)성을 제거하기 위해 주체는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그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의 외부적 형태를 발견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연못에 조약돌을 던져 물위에 파문이 번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나 자연의 재료를 가공하여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희열은 그런 점에서 같은 것이다. 외부 사물을 변화시켜 거기에 자신의 내면의 흔적을 만든다.


B) 주관성의 희생, 총체성의 승리

앞에서 우리는 헤겔의 자기의식이 정적(靜的)인 것과 동적(動的)인 것, 두 가지가 있음을 살펴본바 있다. 거기서 첫 번째 것, 즉 자신을 사유대상으로 삼는 의식의 단계가 바로 주관성이다. 이때 사유의 대상은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들어있는 '나'라는 대상이다. 나는 나를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식에 의해 나의 존재를 확립한다. 그런데 이때 나의 존재는 실재의 대상 세계와 아무런 관련 없이, 또는 이 대상 세계의 도움이 없이 자유롭게 정립되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 매개되거나 또는 그 어떤 것에 의존함이 없이 자율적으로 존재한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아 절대 자유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실재성이 없으므로 추상적이다. 이때 자기의식의 대상인 자아는 사유하는 의식에서 직접 도출된 것이므로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실제적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사유가 지닌 구심력에 이끌리어 어느 때라도 사유로 환원되어 버릴 수 있는 순수 사변적 자아에 불과하다.

자기의식의 표현은 자아=자아로서, 추상적인 자유, 순수한 관념성이다. 따라서 이 자기의식은 실재성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대상인 자기 자신은 이 대상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으므로 실은 대상일수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으로 매개되지 않은 순수 주관성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어떤 대상으로 구체화되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은 공허한 추상일 뿐이다. 가령 한민족의 우수성을 굳게 믿고 있는 우리가 외국인들의 경멸 섞인 무관심에 접했을 때 느끼는 무력감과 낭패감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이때까지 요지부동의 확신처럼 여겨졌던 민족적 자존심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꺼져 버리지 않는가? 객관성이 결여된 주관성은 실체가 없고 추상적이다. 이처럼 주관성이 객관성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직접성의 단계이며, 무반성적 체험이라는 점에서 주관성은 직접성(비매개성으로 번역되기도 함), 체험, 또는 전반성(前反省)과 동의어가 된다. 그러니까 직접 체험에 의한 주관성이 가장 구체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주관성은 직접성이고 동시에 추상성이다. 우리가 직접 겪은 사건도 신문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사건이 되지 않고 그대로 스러져 버린다. 우리가 저지른 어떤 행위는,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남이 알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타인의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게 된다. 직접성과 추상성이 동일한 것임을 발견한 헤겔의 변증법은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도 유용한 틀이 됨직하다. 카프카나 조이스 등 아방가르드(이것은 루카치의 분류 방식이다)작가들의 작업이 세계관 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직접성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규정한 루카치도 직접성과 추상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며 헤겔의 발견에 경탄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생겨나는 예술적 표현은 추상적이고 단조롭다. 이상의 설명에 어떤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즉 직접성과 추상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헤겔에게서도 볼 수 있는 바이지만, 직접성과 추상의 내적인 연관관계를 발견하고, 직접성의 기반 위에서는 단지 추상적인 사유밖에 형성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 것은 변증법적 방법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우리는 루카치 등의 사회주의 문학이론가들이 왜 그렇게 주관성을 매도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주관성은 관념적, 사변적이지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주관성이 존재를 획득하는 것은 객체라는 매개를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모든 예술은 매개 행위이다. 모든 예술가는 아직 관념적 단계인 자신의 주관성을 작품이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현실화시켜 거기에 존재를 부여했다. 이렇게 모든 예술이 매개일진대 왜 루카치는 모더니즘 작가들의 소설을 직접성이니, 비매개성이니, 주관성이니 하고 비난을 하는가.

여기서 서정성과 서사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는 소설을 고대 희랍의 세 문학양식인 비극, 서사시, 서정시중에서 서사시의 계승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 역시 소설을 "근대 부르주아의 서사시" 라고 규정한 헤겔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비극은 그 본질이 훼손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반면, 서사시는 완전히 새로운 문학양식, 즉 소설에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헤겔의 말마따나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인 소설은 산문적으로 조직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산업 사회 이전의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내면성과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 사이에 별 다른 갈등이 없었다. 자연과의 화해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평온하게 일생을 마치는 것이 보편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되면서 극심한 경쟁과 피곤한 사회 노동에 의해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깊은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 개인의 마음은 한없이 여리고 순수하고 서정적인데 그가 맞서서 헤쳐나가야 할 세계는 무뚝뚝하고 살벌하기만 하다. 마음의 시(詩), 사회의 산문이라는 그 유명한 헤겔의 도식은 이렇게 나온 것이다.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소설에 잘 맞는 갈등 중의 하나는 마음의 시와 사회관계의 산문, 또는 외부환경의 우연성의 산문과의 갈등이다.

여기에 소설 문학의 특징이 압축적으로 들어 있다. 개인과 사회, 개인의 내면성과 외부적 현실, 그리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데에는 소설 형식이 가장 적격이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과 사회가 첨예하게 대립되기 시작한 근대 이래의 부르주아 사회에 가장 알맞은 문학 형식은 소설이다.

그러나 개인은 이제 사회와 동떨어져 고립되어 살수는 없다. 온갖 갈등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야한다. 그리고 자아와 세계는 별도로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제한하는 상호조건 속에 있다. 이러한 소설 주인공을 루카치는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른다. 문제적 주인공은 인습적 세계와 첨예한 대립 관계에 있다. 그런데 문제적 개인이 세계와 부딪치는 방식, 다시 말해서 내면성과 세계 사이의 화해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을 수 있다. 내면성이 외부로 전개되어 과잉 행동을 보이는 돈키호테나 줄리앙 소렐(<적과 흑>)같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현실의 난폭한 힘에 굴복하여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프레데릭 모로(<감정교육>)같은 인물도 있다. 주인공의 외부적 투쟁이나 갈등을 떠맡기보다는 그것을 피하여 자기 속에 칩거하는 이런 형식의 소설을 루카치는 '환멸의 낭만주의'로 규정한다. 흔히 성장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환멸 소설 속에서 시적이고 여린 마음씨의 감수성이 강한 청년들은 각박한 사회와 대면하여 자신의 이상이 여지없이 꺾이는 것을 보고 인생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또 한편으로 루카치가 데카당(퇴폐예술)으로 명명했던 카프카의 세계도 있다. 주위 환경의 이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힘에 완전히 마비되어 무능하게 된 카프카 적 주인공들은 인간에게 영원히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현실에 대해 원초적 공포를 느낀다. 루카치는 이런 종류의 소설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이들 소설들은 너무 주관적이고 직접성이어서 매개되어 있지 못하고 총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리얼리즘이 아니다. 그가 바람직한 소설로 극찬한 작가들은 발자크, 톨스토이, 토마스만 등이었다.

그러면 리얼리즘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우선 서사적 태도가 중요하다. 서사적 태도란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그것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내면성과 세계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소설에서 내면성이란 주관성이고, 주관성의 표출이 바로 서정성이기 때문이다. 주관성의 표출이 서정성이라면 모든 예술은 주관성에서부터 출발하므로 예술 전체가 서정성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루카치는 가짜 서정주의와 진짜 서정주의를 나누는 고육책을 썼다.

환멸 소설의 특징인 가벼운 기분의 가짜 서정주의는 객체와 주체의 단절이 그 특징이다.

그러니까 주관성을 한껏 죽이고 순수 수용기관이 되어 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진짜 서정주의이고, 객체와 주체가 단절되어 주관성이 자기 속으로만 웅크리고 드는 것은 가짜 서정주의이다. 루카치가 보기에 낭만주의는 현실에 이러한 가짜 서정주의의 외관을 씌우고 있다.

현실의 낭만화는 현실을 시(詩)의 서정적 가짜 외관으로 덮어씌우는데, 이 서정적 외관은 현실을 서사적 사건으로 변모시키기에는 무력하다.

여하튼 루카치에게 있어서 서정성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는 타기 할 만한 것이고, 서사성이 특징인 리얼리즘은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정성은 주관성의 과잉이고, 서사성은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다. 주체와 객체의 조화로운 통일, 이것이 다름 아닌 총체성이다. 총체성은 루카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미학적 평가 기준이다.

총체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성으로는 결핍과 불안감을 느껴 객관적 대상 속으로 나아가 거기서 자기와 다시 화해하는 정신이다. 총체성이란 결국 주관과 객관의 일치이다. 정신의 산물인 예술 또한 추상적인 주관성에서 나와 객관적 실재의 매개를 통해 다시 자기와 합일을 이루는 이념이므로 역시 총체성이다. 예술은 자기 충족적이며 독립적이다. 헤겔은 이러한 진정한 총체성, 살아있는 독립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관심 및 욕구가 고대 그리스의 예술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어 있다고 보고 그 시대를 "아름다운 총체성"으로 명명한바 있다.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다시없을 그 완벽한 미(美)의 이상을 후세의 우리가 상실한 것은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대두와 함께 생겨난 노동 분화, 사회의 계층화, 직업의 전문화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헤겔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를 계승한 루카치에게 있어서도 총체성은 삶의 충족인 동시에 예술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특히 루카치에게 있어서 총체성은 거의 배타적인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띄면서 가장 중요한 미적 범주가 되었다.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는 총체성의 부재가 성장소설의 위험이라느니, 소설 형식이 반드시 요구하는 총체성은 "인물과 세계의 체험적 통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총체성이 소설의 필요 불가결한 요건이며, 그것은 개인과 세계의 통일성임을 암시했다. 그리고 다음의 구절에서 총체성은 곧 규제적 관념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의미를 좀더 확실하게 밝혀 놓고 있다.

그 모든 것의 최종적인 토대, 다시 말해서 모든 부분들을 결합시켜주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것들(소설의 여러 요소들) 안에서이다. 즉 그것은 규제적 관념인데, 이것이 바로 총체성이다.

규제적 관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칸트의 규제적 원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세계라든가, 영혼이라든가 신(神)같은 대상들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개념들이다. 따라서 그는 이것들을 선험적 이념 혹은 순수이성 개념으로 본다. 이런 대상들은 우리의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이론적 인식의 한계를 규정하거나 그 목표를 설정해주는 규제적 원리가 될 뿐이다. 그러니까 규제적 관념이란 한 사회, 또는 한 소설의 전체를 떠받쳐주고 거기에 어떤 목표를 제시해주는 근본 원리이다. 다음의 예문에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기분과 반성이 소설적 형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현실의 기초에 있는 규제적 관념의 체계가 그것들 안에서 드러나고, 그것들이 매개를 통해 형식을 부여받을 때 그것들은 형식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그것들이 - 비록 문제적이고 역설적이라 할지라도 - 외부 세계와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될 때 비로소 이 요소들은 형식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루카치가 보기에는 소설 속에 묘사되는 주인공의 가벼운 기분이라든가 내적 성찰 같은 것만으로 소설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통해 작가가 어떤 깊은 생각을 표출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소설의 형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진지한 문학이 아니라 값싼 대중 소설일 뿐이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소설의 지주가 되는 어떤 사상이 주인공의 심리상태나 사건들을 통해 형상화될 때에 이 소설은 훌륭한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의 받침대가 되고 지주가 되는 관념은 작가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말하고 싶어하고, 또 어떤 작가는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고 싶어한다. 루카치는 여러 규제적 관념 중에서 유일하게 총체성을 규제적 원리로 간주한다. 이제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라는 헤겔의 총체성이 루카치에게 있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위의 인용문 끝 부분 "그 요소들이 외부 세계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을 때"라는 구절에서 확연하게 떠오른다. 총체성이란 소설 주인공을,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연관관계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1938년 <말>지 6호에 실린 리얼리즘론에서 우리는 그의 총체성의 개념을 좀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는 객관적 현실의 합법칙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또한 아주 깊숙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고 오직 매개를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의 제관련에 도달하기 위하여 - 추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 그의 체험적 소재를 가공한다.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는 세계관적 임무와 예술적 임무라는 이중의 임무를 지닌다.

그는 사회적 현실의 객관적 총체성을 강조한다. 총체성이 없이 직접적 인상과 체험에만 의지하는 자연주의와 표현주의는 사회적 현실을 주관적으로 파괴하며, 결국 허무주의와 퇴폐주의로 빠져 버린다고 주장한다. 「전위주의의 세계관적 기반」에서 루카치가 조이스와 토마스만의 유사한 기법에도 불구하고 조이스를 형편없는 작가로 깎아 내리는 반면 토마스만을 극찬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조이스의 <율리시즈>첫 부분과 끝 부분에서 블룸과 그의 아내가 각기 화장실과 침대 속에서 늘어놓는 독백과 토마스만의 <바이마르의 롯테>에서 잠을 깬 괴테가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을 비교하면서, 그는 조이스의 자유연상 기법이 이 작가의 미학적 구성원칙의 궁극적인 목표 그 자체인데 반해, 토마스만의 내적 독백은 괴테의 모습을 당대의 사회적 정신적 환경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보여주기 위한 기법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조이스에게서 모든 디테일들이 끊임없이 불안하게 움직이지만 그것들은 어떤 목표나 방향성을 지니지 못 한 채 단편적인 체험들이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 거기에는 총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에 대한 비판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론에는 안 맞아도 그 작품에서 어느 정도 구체적인 당대의 현실이 나타난다는 말로 조이스와 카프카를 인색하게 인정하기는 했다. 결국 루카치의 문학이론은 건강한 리얼리즘과 병든 모더니즘이라는 이분법적 선악 개념으로 관통되어 있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총체성의 이론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키에르케고르를 "현대 퇴폐주의 조상이며 고전적인 대표자"라고 매도하고, 하이데거는 비정상적인 것을 찬양하려는 의도로 사회적 삶을 '세인'(世人, Das Man)이라는 말로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졸라나 공쿠르의 자연주의는 마치 세잔느의 인상주의가 그렇듯이 인물들을 정물로 만들었고, 포크너의 주인공들은 백치적 악몽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베케트는 병적이고 변태적인 인간들을 마치 인간조건의 전형인양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루카치는 사회적 연관관계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모든 고독한 개인들은 병적인 것으로 보고, 그러한 주인공을 그리는 모든 작가들을 현실 도피자로 낙인찍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직된 평가 기준은 유치한 소재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더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은 개별적인 개체이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속에 있기 때문에 고독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와 단절된 채 한없이 자기 속으로 칩거하는 무기력한 개인의 실존적인 고독은 비사회적인 것이기는커녕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주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진리이다. 개인 속에서 사회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 아도르노의 말은 그런 점에서 루카치의 이론을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맺는 말

사르트르와 루카치는 똑같이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라는 친근한 속담을 예술론의 기본 도식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같은 도식에서 출발한 두 사람의 예술론은 하늘과 땅 만큼 벌어져 있다. 사르트르에게서 그것은 플로베르,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 '예술을 위한 예술'가들의 예술 정신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또한 자기 자신의 예술론을 집약하는 경구이기도 하다. 예술과 삶은 별개의 것일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기도 하다는 것, 따라서 예술을 살리기 위해서는 삶을 완전히 희생해야 된다는 것이 이 도식이 기본 이념이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미(美)가 본질적으로 '비현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물론 사르트르의 패자승이 칸트를 시원(始原)으로 하는 예술의 무상(無償)성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 될 것이다. 참여문학의 주창자라는 완강한 선입관이 그것을 막고 있기도 하지만, 그의 수많은 담론과 행적들이 그러한 평가를 유보하게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사르트르가 철두철미하게 문학의 사회적 효용성을 옹호하는 사상가였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마치 나눗셈의 나머지 숫자처럼, 난외로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상상적인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집안의 백치>등의 책에서 그의 예술론은 심한 굴곡을 보이지만, 같은 책 안에서도 우리는 무수한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삶이 다 모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사르트르는 규범과 욕망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느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여하튼 그는 사회주의 사상의 토대 위에서 순수 예술의 집을 지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순수 예술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의 가건물을 지었다. 그의 어느 면을 보고 싶어하는가는 보는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 줄 것이다.

한편 루카치에게 패자승은 주관성을 죽이고 객관성을 최대로 살리라는 암호의 말이 된다. 이것은 그의 독특한 총체성 이론과 직결되어 있다.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 총체성이라는 헤겔의 사상은 루카치에 이르러 주인공이 자기 시대의 현실과 맺는 역사적, 사회적 관계라는 함의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위성, 다시 말하면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 실재의 우위성이라는 헤겔의 유물론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객관성으로 매개되지 않은 상태의 주관성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관적인 의식이 자기 시대의 역사와 맺는 관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발자크나 톨스토이 같은 방식일수도 있고, 카프카나 누보 로망의 방식일수도 있다. 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예술은 그 시대의 소산이다. 호머의 서사시가 화약이나 총, 또는 인쇄 기계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총체성을 좁게 한정시켜 현실에 대한 관심 표명만을 예술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루카치의 미학은 그런 점에서 매우 옹색하다. 어쩌면 예술의 한계를 벗어나 이데올로기적 정의라 할 수 있겠다.

패자승이라는 열쇠 말에 의거해 우리는 루카치와 사르트르의 문학이론을 대강 살펴보았다. 정치적으로 나란히 사회주의 진영에 속해 있던 두 사람이 예술론의 최종지점에서 리얼리즘과 순수예술로 간격이 크게 벌어진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론 중 사르트르의 이론이 좀더 지속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말년에 순수 예술 이론으로 크게 기울었던 사르트르가 결국 이기는 게임을 한 듯하다.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
- 사르트르와 푸코

박 정 자


들어가면서

사르트르와 푸코가 각기 20세기 중반기와 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신시대에 스타로 떠오른 한 사회학자의 `지식 기사' 개념이라든가, 참여문학론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한 문학 진영은 모두 사르트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다만 프랑스에서의 사르트르의 영향력이 40-50년대에 절정을 이루고 그 후에 쇠퇴했다면 한국에서는 근 20년의 시차를 두고 70-80년대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많은 추종자를 둔 사르트르의 지식인론과 문학론은 마르크시즘의 계급 투쟁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계급 투쟁의 타도 대상은 부르주아 계급이다. 문필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고 또 그 중의 주도적 문필가들은 예외 없이 모두 부르주아에 대한 격렬한 증오나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프랑스의 특이한 지적 풍토였다.

17세기이래 광인이나 부랑자의 대 감금, 감시에 의한 규율 사회의 정착, 성의 담론을 부추기는 인문과학의 대두 등의 문제를 다룬 푸코의 담론 역시 그 귀결점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문제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20세기적 사유의 결산에 필수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부르주아 혐오에 있어서 플로베르, 보들레르 등 19세기 작가들의 연장선상에 있던 사르트르가 2차 대전 이후부터 그것을 마르크시즘의 주물 속에 집어넣은 것에 반해 푸코는 좀더 니체 적인 방식으로 권력 문제에 접근하여 계급 문제의 섬세한 갈피를 역사 속에서 찾았다. 현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보통명사화 하여 단순히 유복한 특권계급을 뜻하고 있지만, 원래 그것은 유구한 서양 역사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해온 역사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20세기의 지배적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1. 남을 지배할 권리

우선 부르주아가 타도 대상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유복함 때문이 아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경멸하며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 때문이다. 그들은 남보다 돈이 많아서 오만하고, 남보다 지식이 많아서 오만하다. 부(富)나 지식은 가족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모든 자부심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다. 남을 경멸하는 부르주아적 오만의 원천은 가문이다.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깡땡이 부빌시의 시립 박물관에서 관람하는 백50명 명사들의 초상화도 모두 훌륭한 가문의 인사들이다. 그들은 더 할 수 없이 아름답다.

로깡땡은 특히 빠로땡의 초상 앞에서 경탄을 금치 못한다. 머리는 약간 뒤로 젖혀져 있고, 장갑을 낀 손은 진주 빛 회색 바지 옆으로 내려져 있으며, 실크 햍을 썼다. 흠잡을 것 하나 없고 천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작은 발, 부드러운 손, 당당한 넓은 어깨, 신중한 우아함, 그리고 약간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주름살 없는 얼굴이 깨끗하기 그지없다.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그의 입가를 감돌고 있다. 그러나 그의 회색 눈은 웃지 않는다. 50은 되었을 텐데 30대처럼 젊고 아름답다. 로깡땡은 그에게서 어떤 흠을 찾아내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초상화의 인물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제서 로깡땡은 자신이 왜 이 인물에 그토록 거부감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린다. 그가 빠로땡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 인물에게 타격을 가하지 않는데, 반대로 빠로땡의 평가는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마침내 그의 존재의 권리마저 문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만한 부르주아의 모습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부르주아가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폭력을 휘둘러서도 아니고 노동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선이 문제이다. 차갑고 냉정한 시선 하나로 그들은 앞에 앉은 사람을 돌처럼 얼어붙게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메두사(머리칼이 뱀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하는 희랍 신화의 괴물)의 시선이라고 한다. 그 비수 같은 시선 앞에서 가진 것 없는 사회의 약자는 갑자기 자신이 후줄근하게 여겨지고, "내가 과연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라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강조하는 `존재의 권리'라는 말에 모든 수수께끼가 다 들어있다. 무상성(無償性)과 우연성이 특징인 인간 존재는 그 누구도 존재의 권리가 없다.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져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순전히 자신의 선택과 기획 투사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실존의 존재 양식이다.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부조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삶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 권리는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부르주아 계급은 마치 자신들이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사르트르가 부르주아를 혐오하는 철학적, 사회학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깡땡은 직업도, 가족도, 친구도 없고, 현실에 뿌리박을만한 아무런 구체적 생활이 없다. 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는 남편이며 아버지이고 직장에서는 어떤 부서의 장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다.

그 자신은 마치 돌멩이나 풀 또는 미생물 은 삶을 살고 있다. 하찮은 풀이나 돌멩이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제멋대로 이 세상에 생겨나 나뒹구거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도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나와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아무 의미 없는 소음으로 자각될 때도 있다. 한 마디로 삶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의 결여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냉혹한 빠로땡의 회색 눈이 갑자기 그에게 이 엄연한 사실을 깨우쳐 준 것이다. 아마도 빠로땡의 인생은 로깡땡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심장의 고동 소리, 다른 신체 기관의 희미한 소음까지도 그에게는 순수한 `권리'의 작은 리듬으로 들렸을 것이다. 평생 그는 한번도 자신이 과연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지, 남의 존경과 복종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 사치와 안락을 누릴 권리가 있는지 의심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손톱만큼의 흠도 없는 60년의 일생 중 그는 그저 당당하게 자신의 `살 권리'를 행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생 불유쾌한 현실이나 타인들의 고통 같은 것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이 자기 권리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절도 있게 살며 과도한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장엄한 서재에서 균형 있고 절제 있는 독서를 통해 세련된 교양을 키웠을 것이며, 매일 밤 가벼운 독서 끝에 자신의 권리와 의무에 스스로 만족하며 기분 좋게 수면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몸은 살과 뼈, 그리고 순수 권리로 되어 있는 듯 하다고 로깡땡은 생각한다.

그렇다. 권리가 문제다. 부르주아는 권리로 무장되어 있다. 살 권리, 일할 권리, 부(富)를 소유할 권리, 남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리, 남의 존경을 받을 권리, 그리고 하다 못 해 영생을 얻을 권리까지도. 지배계급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3중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여권운동가들의 말처럼 이들의 권리 또한 가부장적 남성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잘 양육될 권리, 흠잡을 데 없는 가문과 번창하는 사업의 상속자가 될 권리, 남편이 되어서는 보살핌을 받을 권리, 부드러운 애정에 감싸 일 권리, 아버지가 되어서는 존경받을 권리, 수장(首長)(chef)으로서는 남의 복종을 받을 권리를 그들은 요구한다. 『그게 바로 지도자다 (c' tait un chef)라고 로깡땡은 탄성을 지른다.

단편 소설 <지도자의 어린 시절>에서 우리는 `지도자'(chef)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4대째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플뢰리에 가의 어린 외아들 뤼시앵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앞에서 굼실거리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chef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남을 지배하는 권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권리가 세습적이라는 점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사장(chef)이 될까요? 물론이지. 내가 너를 낳은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권리의 세습은 출발부터 불평등이라는 점에서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존재론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매순간 직전의 자기 존재를 무화(無化)해 가며 새로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함으로써 자기 인생을 형성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양식일진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인생의 종착역이 정해진 이런 인생이 진정한 실존일수는 없다.

태어나기 9개월 전에 이미 나의 이름과 직책과 성격과 운명이 정해졌다 고 한탄하는 프란츠(희곡 <알토나의 유폐자들>의 주인공)가 폐인이 된 것이나, 작가 플로베르의 형 아실 플로베르(<집안의 백치>)가 아버지의 복사판으로 개성 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를 물려가며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이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chef라고 지칭한다. 우리가 위에서 `지도자', `수장(首長)', 또는 `사장'이라고 번역한 chef(셰프)는 레스토랑 주방장에서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과 단체의 장을 지시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어휘 영역에서 이것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의 계급관 전체를 함의하고 있다. <유물론과 혁명>의 다음 구절은 그의 문학 작품과 철학적 담론 사이의 텍스트 상호성을 잘 보여준다.

지배계급의 모든 구성원들은 마치 자기들의 권리를 신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chef들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남을 지배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는 생각을 주입 받는다 . 그들은 자신들이 온갖 권리를 다 갖고 있으며, 특히 남의 윗사람이 될 권리와 남을 지배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salauds(살로)(`치사한 놈들'이라는 비속어)라고 부른다. 살로와 함께 chef는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부르주아와 동의어이고, 지배자이며, 남을 지배할 권리가 믿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들에게 이런 권리를 주었는가. 그들의 권리는 정당한 것인가. 부르주아 역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토록 당당하게 이 체제의 수혜자를 자처하는가. 대부분의 가정의 역사를 1-2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거기엔 벼락부자가 있지 않은가? 라고 말했을 때 사르트르도 이 부르주아적 권리의 역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
- 사르트르와 푸코

박 정 자



1. 부르주아의 기원으로서의 계몽주의

오늘날 부르주아지는 지배 계급이지만 대혁명 이전까지 그들은 귀족과 성직자 다음의 제3신분으로 정치적 억압을 받던 피지배 하층 계급이었다. 왕정복고 시절(1815-1830)의 사회를 그린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서도 보케 부인의 `부르주아적 하숙집'은 파리 뒷골목의 초라하고 값싼 하숙집을 뜻한다. 도시에 거주하는 자유 직업 종사자를 지칭하는 부르주아가 문헌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240년 릴르의 성-베드로 성당 기록집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각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부터이다. 이미 17세기에 홉스와 로크 등의 자연법 사상을 바탕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시킨 영국에 비하면 백년이 뒤진 것이다.

사르트르는 18세기, 당시의 상승계급인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마련한 것이 루소, 볼테르등의 부르주아 문필가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 계몽 사상 밑에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가 감추어져 있다는 그의 생각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밑그림이 그려지고 플로베르에 대한 종합적 글쓰기인 <집안의 백치> 제3권에서 완벽하게 다루어져 있다. 그는 그들의 투쟁의 도구가 자연법 사상과 `인간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분석이성이었다고 말한다. 분석이성이라면 코기토를 존재의 시발점으로 삼은 17세기의 데카르트의 방법이다. 결국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a) 데카르트

서구 계몽주의 사상은 데카르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독창적 방법인 분석이성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우선 계몽주의 사상의 기본축인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데카르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양식(良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라는 말로 <방법서설>을 시작한다. 자기 이성의 확실성을 명백한 것으로 간주하고, 거기서부터 일체의 합리주의적 탐구를 시작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했을 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신의 인도가 없이도 확실한 사실이고, `나'는 이미 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데카르트는 교부들의 권위까지도 거부하고 주체적 개인을 진리의 유일한 근원으로 확인한다. 집요하게 자신이 자기 고유의 출발점이 되기를 고집하고, 자신을 자신의 근원과 일치시키려 한다.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함께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자기 존재의 시원(始原)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는 최고의 부르주아 철학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자기 존재의 원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역사에 대한 거부는 결국 기득권의 부정이라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방법 서설>에서 주창한 분석이성 때문이다. 그는 방법의 문제에 있어서, 즉 우리의 사유 활동에서 존중해야 할 질서 개념으로 수학을 들었다. 수

2. 푸코의 역사적 접근 방식

부르주아의 계급 구성이 18세기의 계몽주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라면, 푸코는 그것을 18-19세기의 역사학에서 찾는 입장이다. 물론 17세기 광인들의 대 감금 현상 뒤에 데카르트의 광기의 배제 와 이성중심주의가 있었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을 미루어 보면 그가 계몽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을 일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그의 역사학적 접근 방식은 계몽주의적 가설의 바탕 위에서 곁가지의 분야를 추적해 본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거의 기억과 직관으로만 글을 써나가는 사르트르에 비해 푸코는 주변적 자료까지 꼼꼼히 챙기는 세밀한 계보학적 방식을 쓰고 있다.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도시를 부각시킨 브레키니와 샵살의 담론을 제외하고는 18세기까지 제3신분(부르주아지)은 역사에 정치적 기획을 투입하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역사를 정치투쟁에 이용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역사를 발굴하여 그 초기의 법이나 세력 균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 안에서 한때 영광스러웠던 자기 조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침입, 메로빙 왕조, 카롤링거 왕조, 그리고 샤를르마뉴 대제에 이르기까지 중세 이전의 역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거기에서는 제3신분 혹은 부르주아지의 질서 비슷한 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18세기에 부르주아지가 역사에 거부감을 갖고 역사에 대해 침묵을 지켰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역사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귀족, 그리고 왕정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오래 동안 반-역사적이었다. 자연법이니 사회 계약론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18세기말 대혁명 이전과 그 초기에 부르주아지가 열광했던 루소 사상은 권력의 장안에서 싸우고 있던 귀족과 왕권 등 다른 정치적 주체들의 역사주의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루소 주의자가 되는 것, 미개인을 동경하는 것, 계약에 호소하는 것은 모두 5세기이래 게르만의 침략 이후 이루어진 귀족과 왕정 등의 특권계급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a) 귀족의 권리 주장

처음으로 역사를 권력 투쟁의 장안에 끌어들인 것은 귀족이었다. 때는 루이 14세 시대인 17세기였고, 그 중심 인물은 불렝빌리에였다. 그때까지 역사는 곧 왕조사였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로마사였다. 유럽의 모든 왕정은 자기들의 시조가 트로이 성의 피난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이 희랍, 로마의 법통을 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역사는 권력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역사, 권력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남에게 시키는 역사였을 뿐이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권력의 역사였다. 불렝빌리에에 의해 처음으로 역사는 이러한 역사적 기능에서 벗어났다. 역사를 기술하는 새로운 주체가 떠올랐으며, 그 역사 기술의 대상인 새로운 주제가 부상했다.

이제부터 역사에서 발언권을 얻어 말하게 될 사람은 왕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머나먼 과거의 역사 속에 공동의 시조를 갖고 있는 비슷한 신분의 한 계급이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이라고 말하면서 유구한 역사 속의 온갖 법과 불의, 패배, 승리들을 자신들의 운명 주변에 자기들 관점으로 재배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17세기에는 귀족이었고, 19세기에는 부르주아지였다. 그 이래 역사학은 현재의 힘의 관계를 수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불렝빌리에 이래 역사학은 단순히 여러 세력들을 분석하고 판독하는 틀이 아니라 그것을 수정하는 틀이 되었다. 즉 역사적 앎의 질서를 통제하고 그 안에서 자기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역사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은 계급의 헤게모니 장악에서 결정적으로 전략적인 고지를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단은 루이 14세의 손자이며 왕위 계승자인 부르고뉴 공(公)을 교육하기 위한 텍스트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왕세자가 나중에 국정을 담당할 때를 대비하여 루이14세가 자신의 행정부와 감독관들에게 요구한 프랑스의 정체(政體)에 대한 거대한 보고서이다. 왕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앞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될 지식으로서의 프랑스 명세서, 다시 말하면 프랑스의 풍속, 제도, 경제, 사회에 대한 일반 연구였다. 이 보고서가 나온 후 부르고뉴 공의 측근들은 왕세자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이 방대한 자료를 줄여서 요약하는 일을 불렝빌리에에게 일임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정치적 권력을 손상시킨 데 대해 루이 14세의 체제를 심하게 비판하는 반동적 귀족들이었다. 마침내 불렝빌리에는 수많은 비판적 성찰과 담론을 곁들여 이 방대한 자료를 추리고, 중요한 것만 골라 두 권의 두꺼운 해설서로 요약했다.

이 불렝빌리에의 텍스트는 귀족들에게 유리한 가설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가난한 귀족에게 불리한 매관제도를 비난하고, 귀족들로부터 사법권 및 그와 연관된 이득을 박탈한 것을 항의하며, 왕의 참사원에 귀족도 한 자리 차지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지방 행정부에서 행정감독관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왕과 왕자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바로 그 행정 조직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왕이 자기 국정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전적으로 이 행정감독관들이 정의하고, 처방하고, 가로채고, 식민화 정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왕이 만든 거대한 행정조직은 그의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의지의 소산이므로 그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관료인 신하들이 그에게 거역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군주는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간에 이 행정부가 그에게 다시 전달해주는,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정보에 의해 자신의 행정부와 밀착되어 있다. 행정부는 왕이 무제한적인 의지로 온 국민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반대로 행정부는 자신들이 왕에게 제시하는 정보의 성격과 질에 의해 왕을 지배한다. 이것은 푸코의 앎-권력 이론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푸코가 1976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왜 불렝빌리에에게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불렝빌리에 이래로 모든 귀족 역사학자들의 진정한 공격 목표는 국가 절대주의와 행정 조직을 연결하는 이 앎-권력의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재산을 탕진하고 부분적으로 권력 행사에서도 밀려난 귀족 계급이 그들의 반격과 재반격의 목표로 삼은 것은 권력의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인 재탈환이나 잃어버린 부(富)의 회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계급이 권력의 정상에 있을 때조차 소홀히 했던 권력 체계의 한 중요한 고리, 즉 앎을 챙기는 것이었다. 귀족 계급에 의해 무시되었던 이 전략적 부분은 옛날부터 교회, 성직자들, 법관들, 부르주아지, 행정가들, 그리고 재정가들에 의해 차례차례 소유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불렝빌리에가 귀족들에게 정해주려는 전략적 목표와 다시 차지해야 할 지위, 그리고 모든 앙갚음의 조건은 군주의 시혜 가 아니라 바로 왕의 앎이었다. 왕의 앎, 또는 왕과 귀족들이 공유하는 어떤 앎, 다시 말하면 그 옛날 왕과 귀족의 상호적 약속이었다. 그동안 경솔하게 내버려졌던 귀족의 기억과 그리고 아마도 악의적으로 감추어졌던 군주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일이 그들의 목표였다.

왕의 앎에 다시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싶어하는 귀족들의 가장 큰 적, 다시 말해서 제거해야만 하는 앎은 우선 법률적 앎, 즉 재판관, 검사, 법률가, 재판소 서기들의 앎이었다.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앎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궤변으로 그들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함정에 몰아 넣은 앎이며,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사법권과 재산마저도 앗아간 앎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왕과 신하 사이를 오가는 순환적 앎이므로 더욱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왕이 자신의 권리를 알아보기 위해 서기와 법률가에게 물어보면 그 대답은 물론 판사와 검사의 시각에 의해 수립된 앎이다. 그러나 판사와 검사는 왕 자신이 만들어낸 직위이므로 왕은 그들로부터 자기 권력에 대한 찬사만을 듣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앎에서 왕은 자신의 권력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귀족들에게 저질렀던 횡령의 총체는 법이라는 합법적 양상 속에 은폐된다. 이 앎에 대항하여 귀족들이 내세운 전혀 다른 앎이 바로 역사였다. 이 역사는 왕이 자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찬사(다시 말해서 언제나 로마에 대한 찬사)만을 듣는 재판서기들의 앎이 아니라 권리의 역사적 공정성의 근거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종래의 역사 뒤에서 문서화되지 않은 계약들, 공식문서나 텍스트를 남기지 않은 충성의 서약들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왕을 위해 뿌려진 귀족들의 피를 상기시키고, 잊혀진 가설들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귀족과의 계약을 파기한 왕권에 의해, 그리고 왕권과 귀족의 권한을 동시에 침해했던 법관들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불공정, 부당, 남용, 박탈, 배신, 불성실 등의 결과가 현재의 법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의 의지에 따라 법조문을 작성했던 재판서기들의 앎에 대항하여 이제 역사적 앎은 배신당하고 모욕 받은 귀족들의 무기가 될 것이다.

귀족들의 두 번째의 커다란 적수는 행정감독관들의 앎이었다. 재판관들의 앎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앎도 귀족의 권한과 부를 좀먹게 했기 때문이다. 이 앎 역시 왕을 현혹시키고 그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왕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얻어내며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앎 덕분이었다. 이것은 행정적, 경제적, 수량적 앎이다. 이런 앎에 대항하여 귀족들은 다른 형태의 인식, 즉 역사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부(富)의 역사, 다시 말해서 부의 이동, 수탈, 도적질, 속임수, 빼돌리기, 빈곤화, 파산 등의 역사이다. 왕과 부르주아지에 의해 자행된 부도덕한 행위들의 결과인 실제적인 부(富)가 어떤 파산, 어떤 부채, 어떤 부당성으로 축적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부의 생산이라는 문제의 뒤편으로 돌아가 보는 역사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부의 분석이 아니라 끝없는 전쟁에서 귀족들이 파산하는 과정의 역사이고, 교회가 교묘한 계략으로 토지와 소득을 차지하는 과정의 역사이며, 부르주아지가 귀족을 빚지게 하는 과정의 역사이다. 한 마디로 국왕의 금고가 귀족들의 소득을 깎아먹는 과정의 역사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불렝빌리에가 역사 속에서 찾아낸 잊혀진 앎, 교묘하게 감추어진 계약은 무엇인가. 그는 5세기, 결국 서 로마 제국의 붕괴를 불러온 야만족(로마인들은 북방의 게르만족을 이렇게 불렀다)의 갈로-로멩 지역(기원 원년부터 로마가 5백년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옛 지역) 침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크족(게르만의 한 부족)은 언제 골(Gaule, 프랑스의 옛 지명)에 침입했으며,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질문이다. 17세기의 전설적인 역사 이야기에 의하면 프랑크족은 원래는 골인이었으나 일찍이 골 지방을 떠나 라인강 저편으로 이주해간 골인들이며, 그들이 고토에 다시 돌아왔을 때 갈로-로멩 체제는 로마의 지배권과 행복한 화해를 이룬 도원경과도 같은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렝빌리에가 묘사한 골은 그저 단지 로마인들에게 정복된 땅이었을 따름이다.

정복된 땅이란 로마의 절대권, 다시 말하면 로마인들에 의해 제정된 황제권 혹은 왕의 특권이 골에서 결코 백성과 국토와 한 몸이 되어 받아들여지고, 수락되고, 토착화된 권리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이 권리는 그저 정복의 사실이었을 뿐이고, 골은 그저 예속된 나라였을 뿐이다. 로마의 지배권은 백성들로부터 동의된 통치권이 아니고 단지 한 민족에 대한 이민족의 지배였을 뿐이다. 로마 지배 시대의 골이 아주 행복한 도원경이었다는 17세기 당시의 전설을 무산시키는 이 묘사는 왕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다. 왕이 로마의 절대권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골의 영토에 대한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 과정이 결코 명예스럽지 못한 한 특정 시기의 역사에 유래한 권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로마의 절대권은 결국 게르만에 의해 전복되고, 쓸려나가고, 정복되었다. 그것도 우연한 군사적 패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타락의 필연성에 의해서였다. 여기서부터 불렝빌리에는 골에 대한 로마 지배의 실질적인 효과를 분석한다.

기원 원년 줄리어스 시저가 골 지방을 점령한 후 로마인들은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토착의 군사 세력인 귀족 무사들의 무장을 해제했다. 귀족을 무장 해제시키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그들의 지위를 저하시킨 것은 하층민의 인위적인 지위 부상에 의해 가능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귀족을 새로 형성했는데, 이것은 무사 귀족이 아니라 - 무사들은 그들에게 대적할 위험이 있으므로 - 행정적인 귀족이었다. 이들 행정적인 귀족이야말로 골의 로마 화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골의 부를 끌어내어 그들에게 유리한 재정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한 존재였다. 이렇게 해서 민간적, 사법적, 행정적 귀족이 탄생했다. 이 귀족의 특징은 첫째 로마법에 정통하여 그것을 아주 섬세하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었고, 둘째 로마 어를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귀족이 나타난 것은 어학 실력과 법 수행의 주변에서였다. 이처럼 무인 계급을 없애고 문치의 귀족을 만들어낸 순간부터 로마인들은 라인강 저편에서 온 침략자로부터 골을 지킬 능력이 없게 되었다. 더 이상 군사 귀족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이 골의 땅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용병, 다시 말해서 돈을 받고 싸우는 병사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의 유지는 엄청난 재정을 필요로 했다. 로마의 지배층은 이 부담을 골인들에게 지웠다. 골인들로부터 용병을 차출했을 뿐만 아니라 용병의 유지비용도 그들에게 물렸다. 이 부담으로 산업은 정체되고 사람들은 가난해졌다. 프랑크족의 골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총체적 황폐화의 상태 안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골 지방이 어떻게 그리고 왜 가난하고 인구도 별로 많지 않은 소수의 게르만 민족에게 정복되었는가의 의문이 남는다.

여기에서 불렝빌리에는 스와송의 항아리라는 하찮은 에피소드를 역사에서 발굴해 자기 가설의 중요한 지렛대로 삼는다. 나중에 메로벵 왕조의 시조가 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전리품을 나눠주는 의식을 거행할 때, 그는 한 항아리 앞에서 이건 내가 가져야지! 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전사가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 항아리를 가질 권리가 없소. 아무리 왕이라도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전리품을 나눠야 하오. 당신은 전쟁에서 얻은 것에 대해 아무런 선매권도, 절대적 선점권도 갖고 있지 않소. 전쟁을 통해 노획된 것은 여러 정복자들에게 절대 소유물로서 분배되어야 하고, 왕이라고 해서 우선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오. 이 일화는 게르만 무사들의 독립적이고 자유스러운 기질과 민주적인 체제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또 게르만 인들이 로마 적인 권력 조직에 얼마나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비교적 적은 숫자로 골에 침입하여 그때까지 가장 강했던 제국을 격파할 수 있었던 프랑크족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열쇠이다.

프랑크 인들은 로마인들의 허약성과 대비되는 강건함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우선 로마인들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 다시 말하면 무사적 귀족의 존재에서 나왔다. 프랑크 사회는 완전히 무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마의 군인들이 용병인 것과는 달리 이들은 모두가 프랑크인들이었다. 이 무사 귀족들은 왕을 하나 갖고 있었지만 그 왕의 기능은 평화 시절에 분쟁을 해결하고 사법적 문제를 다루는 것뿐이었다. 왕들은 민간의 법관일 뿐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왕은 무인 그룹의 공동의 동의로 선출되었다. 그들이 수장(首長)을 뽑는 것은 강력한 조직과 유일한 권한이 필요한 전쟁 기간뿐이었다. 그리고 그 수장의 직위도 절대적인 다른 모든 원칙들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수장은 전쟁의 수장이고, 반드시 민간 사회의 왕일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은 일치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클로비스 같은 사람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뽑힌 민간의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수장이었다. 여하튼 프랑크의 사회는 평화시에는 최소한의 권력만이 있는 사회, 그러니까 최대한의 자유가 있는 사회였다. 그런데 이 무사적 귀족들이 누렸던 자유는 만인의 평등과 관용의 자유가 아니라, 지배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는 자유였다. 다시 말하면 타인 존중의 자유가 아니라 잔인함의 자유였다. 무례하고 거친 풍습, 용맹스럽고, 경박하고, 신의가 없고, 탐욕적이고, 참을성이 없고, 성마른 자유의 애호자들 니체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이와 같은 야만인의 초상은 바로 불렝빌리에의 텍스트에서 빌려 온 것이다.

금발 머리에 기골이 장대한 이 게르만의 전사들은 골에 들어오면서 갈로 로멩 인들과 동화를 거부하고, 특히 로마 제국법에 대한 복종을 거부했다. 그들은 너무나 자유스러워서, 다시 말하면 너무나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하여 전쟁의 수장이 로마 적 의미에서의 군주가 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유스럽게 지배와 정복을 탐했으므로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골의 땅을 차지했다. 그래서 전쟁의 수장이었던 왕은 프랑크의 정복으로 골 땅의 주인이 되지 않았고,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과실을 향유했다. 요컨대 스와송의 항아리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아득히 먼 봉건제의 희미한 밑그림이었다. 무사들은 각자가 땅 한 조각씩을 가졌고, 왕도 자기 몫의 땅을 가졌다.

따라서 골 영토 전체에 대한 로마 식의 통치권은 없었다. 무사들은 각기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영주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머리 위로 로마 황제의 계승자가 될 왕을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게르만 인들은 싸우는 것 이외에는 다른 직업이 없었다. 그들은 농사를 짓는 골인들을 군사적으로 지켜 주는 대가로 농민들에게 지대(地代)를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현물 지대를 내는 농민들과 무사 계급 사이에는 안보와 생산의 상호교환에 의한 행복한 공존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6세기이래 거의 15세기까지 유럽 사회를 특징짓는 역사적-사법적 체제로서의 봉건제이다. 불렝빌리에 이전에 그 어느 역사학자도 봉건제를 말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불렝빌리에의 역사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

로마를 멸망시키고 골을 차지할 수 있게 해준 이 무인적 성격이 나중에 차츰 그들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처음에 유리했던 똑같은 요소라도 시간과 상황이 달라지면 정반대의 불리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귀족들은 광대한 토지의 여기 저기에 흩어져 살면서, 전쟁 수행의 대가인 지대의 부양을 받으면서 점차 자신들이 만들어낸 왕으로부터 멀어졌으며, 동시에 자기들끼리의 전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이나 자녀들의 교육, 훈육, 라틴어 학습, 지식 같은 것을 모두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을 무력하게 했다. 무사적 귀족들은 마침내 권력과 부의 핵심을 잃고, 결국 왕권의 굴레에 예속되었다.

프랑크의 왕은 그가 전쟁 동안에만 지명된 전쟁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처음에는 이중적인 상황의 왕이었다. 그의 권력의 절대적 성격은 전쟁이 지속되는 기간 동안에만 효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이중적 상황의 왕이 조금씩 항구적인 세습왕이 되어 마침내 유럽 대부분의 왕국들이 나중에 경험하게될 절대권력의 왕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우선 별로 많지 않은 숫자의 군대가 적어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을 거대한 나라에 정착했다는 사실에 의해서였다. 프랑크의 군대가 점령지 골에서 상당 기간 전쟁 태세로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점령이 장기화함에 따라 전쟁의 수장이었던 사람이 민간의 수장을 겸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군사 체제의 연장에는 상당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평화시까지 군사 독재가 연장되는 것을 수락할 수 없었던 프랑크 전사들로부터 반발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해제인 채 남겨두는 것이 좋았을 골인들과 외국인들로부터 모집한 용병에 새로이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차츰 귀족들은 자신의 절대권을 유지하려 애쓰는 왕권과 왕의 절대권 유지를 위해 조금씩 동원된 골 민중 사이에 끼여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스와송의 항아리 의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자신에게 스와송의 항아리를 갖지 못하도록 한 무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클로비스는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군대를 사열하다가 그 무사를 행열중 에서 찾아낸다. 바로 그 순간 클로비스는 커다란 도끼를 집어들고 스와송의 항아리를 기억하라 고 외치면서 무사의 두 개골을 박살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절대왕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왕정이 절대 왕권을 구성하는 중요한 계기는 왕권과 구 골 귀족들 사이의 연합 때문이었다. 프랑크 군대가 들어 왔을 때 가장 고통 받은 계층은 골의 구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게르만의 무사들에게 토지를 박탈당하고 특권적 지위도 빼앗겼으므로 아무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도피처는 교회였다. 그래서 골의 옛 귀족들은 교회로 도망쳤다. 그들은 교회 체제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해 그들이 유포시킨 신앙 체계에 의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민중들에게 뿌리박고 확산시켰다.

귀족들은 또한 교회 안에서 라틴어 실력을 연마했고, 절대지배권의 법인 로마법을 갈고 다듬었다. 프랑크의 군주들이 한편으로는 자기 동족의 무사 귀족들에 대항하여 민중에 의존하려 했을 때,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왕이 절대권을 갖는 로마 방식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을 때, 교회에 피신했던 골의 구 귀족말고 어디에서 적합한 연대 세력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민중에 대한 영향력도 막강했고, 무엇보다도 특히 로마법에 정통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라틴어와 로마법의 지식, 그리고 사법적 수행능력과 함께 절대왕권의 커다란 연합세력이 되었다. 무사 귀족의 머리 위로 왕권과 민중이 연합했고, 또 한편으로는 교회, 라틴어, 사법능력에 의해 왕권과 옛 골 귀족이 연합했다.

라틴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학문 언어, 법률 언어가 되었다. 귀족이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된 중요한 요인은 그들이 다른 언어 체계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은 게르만 어를 말했고, 라틴어를 몰랐다. 그래서 모든 법체계가 라틴어 칙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해서 소유와 지배에 탐욕스러웠던 게르만인들, 현재에 그토록 집착했던 금발 머리에 몸집이 큰 이 무사들은 조금씩 자기 자신의 땅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고, 마침내 재산과 권한을 모두 박탈당한 기사(騎士)적 인간 혹은 십자군적 인간으로 변했다. 불렝빌리에는 십자군 원정을 귀족의 무력화(無力化)가 절정에 달한 시점으로 이해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로 그 시기에 왕과 교회와 골의 구 귀족들은 그들의 땅과 권한을 완전히 박탈할 수 있도록 라틴어로 법을 정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렝빌리에의 호소가 시작된다. 그것은 천년에 걸쳐 서서히 권한을 박탈당한 귀족들에게 무력의 반란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귀족에게 호소한 것은 앎을 되찾으라는 것이었다. 즉 자기들 고유의 기억의 되살림, 의식의 각성, 인식과 지식의 회복이다. 그대들이 박탈당한 - 아니 어쩌면 그대들이 한 번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 앎의 지위를 회복하지 않는 한 그대들은 결코 권리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어느 일정 시기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언제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것이 불렝빌리에의 메시지라고 푸코는 해석한다. 귀족이 힘을 되찾고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자의식을 되찾고, 앎의 직조(織造) 안에 다시 편입됨으로써 라고 불렝빌리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b) 부르주아의 권리 주장

17세기의 불렝빌리에에 이어 18세기까지도 역사를 강조했던 것은 귀족 계급이었다. 그들은 제3신분과의 교묘한 연대 속에서 귀족들을 소외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왕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옛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역사를 뒤졌다. 왕권과 귀족이 각기 역사 속에서 자기들 권리의 근거를 찾으려고 필사적인 투쟁을 하는 동안 부르주아지는 어쩐지 한옆에 제외된 듯한 깊은 소외감 속에서 아예 모든 역사를 부정하며 인간의 보편성만을 논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지가 오래 안 반-역사적이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불렝빌리에 등 귀족 학자들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었던 판사, 검사, 재판 서기 등의 법률가들과 행정감독관등의 관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모두 부르주아지였다. 부르주아들은 법률적 앎, 행정적 앎으로 이미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하고, 도시적인 자유업과 상업을 통해 엄청난 재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부르주아지의 실질적인 힘이 거의 사회를 압도하게 된 18세기에도 부르주아들은 여전히 역사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자연법 사상과 사회계약론은 그들의 반-역사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지는 지배자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해 근본적으로 역사를 부정했다. 건강한 미개인을 찬양했고, 인류의 모든 악이 문명 된 사회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대혁명기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적 중세 소설도 봉건제에 대한 부르주아의 혐오로 읽어야 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공포와 신비감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들은 고딕 예술에 대한 지식과 함께 우리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정치소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군주, 무자비한 유혈적 영주들, 거만한 사제들의 우화이며, 권력남용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국가의 모든 힘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다고 느낀 순간, 제3계급은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3등급의 제도는 전혀 현실적 힘의 관계에 일치하지 않는 가상의 단위일 뿐이었다. 제3신분은 이미 국가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분쟁 당사자인 귀족들은 이들에게 사소한 권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폭발한 것이 1789년의 대혁명이었다. 격렬한 동요로 3계급 체제를 소멸시킨 대혁명의 지향점은 단순했다. 그동안 야금야금 국가의 모든 기능을 흡수한 제3신분이 이제부터는 실질적으로 민족과 국가를 다 떠맡겠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역사학자인 오귀스땡 티에리는 대혁명을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모든 불법적이고 극심한 불평등, 주인과 노예, 정복자와 피정복자, 영주와 농노 등을 사라지게 하고, 마침내 그 자리에 단일한 인민, 만민에게 평등한 법, 자유스러운 주권국가를 출현시킨 거대한 진보라고 정의했다.


가) 도시의 가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역사학은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 그들의 투쟁의 무기가 되었다. 그것은 도시와 민족의 두 가설 주변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도시의 가설을 살펴보자. 부르주아지를 우리는 시민계급이라고 번역한다. 이 역어에 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부르주아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농사를 짓는 농민이 아니다. 어원적으로 보아도 부르주아는 읍내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도시의 먼 기원이었을 이 명칭은 예컨대 스트라스부르나 함부르크 같은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도시가 부르주아의 환유(換喩)가 된 것은 17세기의 역사학자 브레키니와 샵살에서부터이다. 이들의 가설은 게르만이 침입하기 이전의 갈로-로멩 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두 역사학자는 골 지방을 지배하던 로마의 정치 체제가 두 층위로 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

즉 절대권력의 중앙 정부와 자유스러운 지방 도시라는 두 체제이다. 로마인들은 원래 자기 나라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자유를 골인들에게도 허용했다. 그래서 로마지배 시대의 골은 절대권력의 대제국의 일원인 동시에 국토 전역에 걸쳐 드문드문 자유의 중심지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자유는 로마가 지배하기 전의 켈트인들(골인들의 종족명)이 누리던 자유와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로마 적인 자유이면서 동시에 켈트 적인 자유이기도 했다. 여하튼 로마의 옛 도시 국가에서 그 형태를 차용한 이 자유는 이곳저곳의 자치 도시들에서 활발하게 기능했다. 자유가 자치도시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켈트의 조상들이 누리던 구시대의 자유가 아직 촌락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면, 로마 적인 자유는 도시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자유는 도시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자유가 투쟁을 할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역사적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도시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적 자유의 도시들은 게르만족의 침입에서도 파괴되지 않았다. 유목민이며 야만인인 게르만은 도시에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대자연의 들판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르만의 무사들은 광활한 들판에 정착했다. 우리가 지금도 흔히 보는 중세의 성과 그 주변의 황량한 들판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프랑크족으로부터 관심 없이 버려진 도시들은 전쟁의 폐해를 딛고 다시 살아나 새로운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10세기말) 말기에 봉건제가 들어섰을 때 세속 혹은 교회의 대영주들이 이처럼 규모가 커진 도시의 부를 빼앗으려 했지만 역사를 통해 힘을 축적한 도시들은 이에 맞서 싸웠다. 카페 왕조 초기에 일어난 공동체의 저항 운동들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부르주아 계급은 희미한 윤곽선과 함께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활기찬 에너지와 상업에 의한 부(富) 덕분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로마에서 차용했지만 원래 구시대부터 있던 매우 세련된 도시적 원칙에 의해 형성된 이 계급은 꾸준히 상승하여 마침내 사회의 최상층에 오르게 될 것이다.

19세기의 부르주아 역사학자인 오귀스땡 티에리도 이 가설을 계승했다. 중세까지의 프랑스 역사는 게르만과 골이라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대결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이라는 두 경제-법률적 사회가 행정권과 정부 장악권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인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왕과 귀족 등 특권층을 이루고 있는 게르만의 후예들과 그들의 지배를 받는 골의 후예인 민중과의 역사적 이원성은 해체되고 만다. 정복의 역사만을 다루던 이때까지의 역사 기술 방식에서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부르주아지가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도시 주민이라는 당당한 세력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들판에 정착한 게르만의 정복자들은 주위에 토착 농민들을 거느리고 그들의 안보를 지켜주는 대신 지대를 받았다.

이것이 나중에 봉건 사회로 이행하게될 농촌 사회였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로 드문드문 도시가 있었다. 거기에는 부의 원천을 땅에서 구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자유업, 상업의 종사자들이 있었다. 이 두 사회 사이의 갈등은 가끔은 무력 충돌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것이었다. 이 두 유형 사이의 대결이 국가 형성을 위한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티에리는 주장한다. 이로써 부르주아는 스스로에게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기능을 부여하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권리를 요구한 셈이다. 9-10세기까지 국가의 보편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번번이 패했던 것은 도시들이었다. 그런데 10-11세기부터 북쪽에서는 북구의 모델에 따라, 그리고 남쪽에서는 이탈리아의 모델에 따라 도시들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도시 사회가 승리한 것은 도시가 군사적 승리를 거두어서가 아니라, 도시가 가진 부, 행정능력, 도덕성, 특정의 삶의 방식, 특정의 존재 양식, 의지, 혁신적 사고와 행동 때문이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기능들이 도시의 손에서 생겨나고 도시의 손을 거쳐간다는 사실에서 도시가 보편성을 획득했다. 티에리가 단순히 농촌과 도시라고만 말했을 때 그것은 결국 귀족과 부르주아를 뜻하는 것이다. 농촌은 골의 토착 농민들이 기본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커다란 장원 속에서 귀족인 영주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레마스의 기호 사각형을 잠시 차용해 본다면 농촌과 귀족은 연접성이다. 한편 도시는 누구인가? 그때까지는 아직 이름이 없었지만 그 힘이 점점 커져 나중에 왕과 귀족을 타도하고 보편계급으로 올라선 부르주아지이다. 그러므로 도시와 부르주아는 연접성이다. 농촌 사회와 도시 사회의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도시가 승리했다고 티에리가 주장했을 때 그것은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 계급을 이겼다는 의미이다.


나) 민족의 가설

두 번째는 민족의 가설이다. 너무나 확고하여 마치 태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단어들은 실상 모두 어느 특정 시기에 특정 사람들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역사를 갖고 있다. 명명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 모른다. 명명이란 실체가 먼저 있고, 다음에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는 의미인데, 어떤 집단이나 현상의 명칭은 그 순서가 뒤바뀌어 이름에 따라 실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계급의 개념이 그런 것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의 정의를 내리자마자 이때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개인들이 마치 자석 주위에 쇳가루들이 모여들 듯 한데 모여 노동계급이라는 실체가 되었다.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너무나 그 의미가 견고한 단어이지만 근세 이전까지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혹 단일한 땅위에 사는, 비교적 단일한 언어와 풍습, 그리고 단일한 법을 가진 다수의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민족이 아니었다. 관습과 언어의 같음과 다름이 혼재하면서 희미한 국경선 너머로 서로 넘나들던 아득한 중세의 사람들이 나중에 누군가 민족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자 헤쳐 모이기의 바쁜 동작 속에서 그중 가장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데 모여 집단을 형성했다. 하나의 단어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단어가 지칭하는 실체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만일 같은 단어를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정의했다면 그 중에서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살아남는 정의가 결국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다.

민족은 처음에는 왕의 신민을 뜻했다. 집단 구성원 각자가 살아있는 육체적 실체인 왕과 법률적이며 동시에 물리적인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민들 각자와 물리적-법률적 관계를 맺고 있는 왕의 육체, 그것이 바로 민족의 몸체였다. 17세기의 법률가인 르몽테(Lemontey)는 각 개체는 왕을 향한 하나의 개인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민족은 실체가 없고, 오로지 왕의 인격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이 절대왕정 옹호자들의 민족 개념이다. 그러나 왕에 대항하여 귀족의 권리를 주장했던 불렝빌리에에게 있어서 민족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나라의 귀족 계급을 뜻했다. 그는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의 이해(利害)에 의해 결속된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그들 사이에 공통의 풍습, 습관,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민족의 세 번째 정의는 대혁명 당시의 부르주아 계급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직업과 공통의 법률 및 입법기관을 갖춘 집단이라고 정의되었다. 오늘날 민족의 정의는 대체로 세 번째 것과 일치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역사의 헤게모니를 잡았다는 의미이다.

민족의 부르주아적 개념을 정립한 사람은 대혁명 당시의 정치가인 시예스이다. 그는 민족의 법률-형식적 조건에 역사-기능적 조건을 덧붙임으로써 왕당파의 가설이건, 루소 주의의 방향이건 간에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민족 개념을 뒤집었다. 우선 하나의 민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정부가 있을 필요도 없다.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군주가 생기기 전에, 권력의 대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민족은 존재한다. 시예스에 의하면 하나의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명시적인 법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제정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법-입법기관의 필수적인 짝짓기는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형식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을 정의하는 첫 번째 단계는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존속하고, 그들의 법률이 적용되고, 그들의 입법기관이 인정받고, 그들이 역사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직업 과 직책이다. 직업은 농업, 수공업, 공업, 상업, 자유업 등이고, 직책은 군대, 사법, 교회, 행정부 등이다. 요컨대 민족에 대한 법률적 정의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시예스는 농업, 상업, 공업 등을 민족의 실체적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요소들은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보다 오히려 민족의 존재에서 파생되는 후속적 결과들인 것이다. 대지 위에, 숲 가장자리 혹은 초원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농업을 발전시키고, 상업을 개시하며, 상호간에 경제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의 법과 국가, 혹은 정부를 스스로에게 마련해 줄 것이다.

이 모든 기능들은 결국 민족의 존재에서 생겨나는 결과의 차원이다. 다만 민족이 법률적으로 조직되었을 때 이 기능들이 더 잘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예스는 그 분석을 뒤집어 직업이나 직책, 기구들을 민족에 우선시켰다. 하나의 민족은 그것이 상업, 공업, 수공업의 역량이 있을 때에만, 그리고 군대, 사법부, 교회, 행정부를 구성할 능력이 있은 개인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민족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 역사 안에 진입하여 역사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처럼 앞뒤를 뒤집어 약간의 무리가 따르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시예스의 숨은 의도가 있다. 농업, 수공업, 상업, 자유업 같은 직업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제3신분이다. 누가 군대, 교회, 행정부, 사법부를 움직이는가? 물론 상층의 중요한 직위는 귀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 기구들의 10분의 9는 제3신분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 공동의 법은 없었다. 귀족에 적용되는 법, 제3신분에 적용되는 법, 성직자에 적용되는 법이 따로 있었을 뿐이다. 공동의 법과 입법기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국민 전체는 민족은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민족의 역사적 실체를 보장해주는 능력을 갖춘 개인들의 집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시예스의 중심 개념이다. 그는 제3신분이 완벽한 민족이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서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유도된 결론은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다는 것과, 민족의 역량은 부르주아 계급만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민족이라는 개념 하나로 부르주아지는 근세 이후의 보편계급으로 우뚝 올라섰다.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이는 역사 기술이 사실은 언제나 그 기술자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 왕권과 부르주아지의 공모

언제나 권리가 문제였다. 18세기까지 프랑스를 지배해온 왕가들은 5세기에 골 지방을 정복한 게르만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이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 권리(王權神授說)는 이 아득한 옛날의 정복의 권리였다. 그들의 조상과 함께 정복군으로 들어온 게르만의 무사들은 귀족 계급이 되었다. 당시에는 왕과 무사들이 별로 다를 것이 없었으나 우연히 왕으로 뽑혔던 사람의 후손은 왕가를 이루었고, 시골로 내려가 영주가 되었던 사람들은 귀족이 되었다. 이처럼 출생은 쌍둥이 자매였으나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서 이 두 계층은 평온한 외관 밑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벌이는 적대 세력이 되었다. 왕권과 귀족의 힘 겨루기는 최초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이들의 엎치락뒤치락 싸움은 역사를 매개로 해서였다. 이 역사적 싸움은 17세기에 불렝빌리에가 시작했다.

귀족의 반동을 대변하는 그는 최초의 프랑스 왕이 로마의 법통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 함께 들어온 정복군은 모두 평등했다는 것, 따라서 현재의 왕은 지배의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당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뒤보스와 모로는 프랑크족이 불렝빌리에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게르만의 침략 같은 것은 없었고, 따라서 야만의(게르만의) 귀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절대 왕정만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의하면 물론 침략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민족들, 예컨대 부르군디나 고트족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침략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던 로마인들이 군사적으로 우수한 한 소수 민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크족이었다. 그러니까 프랑크족은 침략자 혹은 지배와 약탈 가능성이 있는 무서운 야만인이 아니라 다만 유용한 연합 세력인 소수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왕권과 귀족의 이런 줄다리기 사이에서 부르주아지는 착실히 실력을 쌓아가며 힘을 축적했다. 그리고 대혁명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기까지에는 귀족을 적대 세력으로 하는 왕과 부르주아지의 공모 내지는 연합이 큰 몫을 했다. 19세기의 망명 귀족인 몽로지에의 가설이 그것이다.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왕은 조공신민들에게 조공을 면제해주고, 노예를 해방하고, 도시들에게 권리를 부여하여 그들을 귀족으로부터 독립시켰다. 결국 왕은 권리에 있어서는 귀족과 동등하고, 인구에 있어서는 귀족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새로운 인민,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왕은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 새 계급의 생생한 활력과 저항을 이용했다. 영주들에 대한 도시의 저항, 지주들에 대한 농민 반란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저항의 뒤에는 물론 새로운 계급의 불만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특히 왕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몽로지에는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왕정과 민중 봉기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관 관계가 있다. 왕은 모든 저항들을 지원했다. 이 모든 저항은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왕의 권한을 강화시켰으며, 이로써 왕들은 귀족들의 양보를 받아낼수 있었다. 과거에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정치 권력이 왕정으로 이전된 것은 왕권의 지지로 활기와 집중력을 얻은 이 저항들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왕정은 혼자서 권력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계급에 기대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새로운 계급에 맡겼고, 이렇게 해서 이 계급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최종의 단계는 최후의 반란, 즉 이 새 계급의 수중에 떨어진 국가 전체가 왕권을 벗어나는 그런 단계일 것이다.

이제는 민중 저항에 의해 지탱되는 권력밖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왕과 손안에 국가의 모든 도구를 장악한 민중 계급만이 서로 1대1로 얼굴을 마주본 채 남아 있었다. 이 역사의 마지막 에피소드, 그것이 바로 대혁명이었다. 그러니까 몽로지에의 분석에서 대혁명은 역설적으로 왕권의 완성 단계이다. 모든 사물의 질서는 너무나 완벽한 순간 정반대의 방향으로 역전되는 성질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주장 안에는 물론 귀족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국유화된 재산을 환수하며, 옛날에 인민 전체에 대해 그들이 행사했던 지배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결의가 들어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왕과 귀족이 치열한 역사적 싸움을 벌였으며, 귀족을 약화시키기 위해 왕과 민중이 연합했고, 그 산물이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나가면서

18세기까지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역사적 존재로 자리잡기까지에는 데카르트의 이성중심 철학과 계몽주의의 자연법 사상이 필요했으며, 도시와 민족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가설이 필요했다. 18세기말 대혁명으로 보편성을 획득한 이들은 천년이 넘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꾸준히 상승하며 귀족과 경쟁하고 투쟁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작 2백년 전, 혹은 완전히 공화체제가 된 제3 공화국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1백30년 전만 해도 그들은 귀족 앞에서 비굴하게 몸을 굽히던 피지배 계급이었다. 귀족의 억압이 부당하다는 인권 사상의 이데올로기로 사회의 헤게모니를 잡았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보편 계급이며, 따라서 계급은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사회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만인의 평등은 겉에 내세우는 허구의 외관일 뿐 실질적인 계급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르트르가 부르주아 휴머니즘을 허구의 거짓 휴머니즘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르트르 또는 푸코가 부르주아의 역사를 문제삼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당신들은 그렇게 당당히 남을 지배할 권리가 있는가? 고작 1-2백년 전만 해도 당신들은 비참하고 비굴한 계급이었는데. 라고 그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부르주아들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앎과 건강이다. 천년 동안 다져진 혈통의 명예도 없고, 평생 무위도식하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재산도 물려받지 못한 이들에게 건강한 육체와 명석한 두뇌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결국 이들은 앎이 총칼보다 무서운 권력쟁취의 수단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보여준 셈이다. 이 앎-권력의 가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단숨에 해체시켜 버린 새롭고도 충격적인 문제틀이었다. 20세기 후반에 푸코가 그토록 강한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의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의 권리의 기원은? 한국의 인문학적 교양인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질문들이다.







언어의 사물성과 도구성
- 사르트르의 미학 체계를 떠받치는 하나의 토대

박 정 자


서 문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40년대와 50년대에 사르트르를 일약 전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올려놓은 참여문학론의 이론서이다. 이 책의 제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는, 예술의 현실참여는 문학에 국한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산문에 한정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운문으로 되어있는 시는 차라리 음악이나 미술에 가까워서 참여문학의 범주에는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참여문학론 자체가 작금의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대변혁 이전부터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고, 저자 자신이 말년의 저서「집안의 백치」에서 이미 부정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스물 다섯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제1장의 이 짧은 텍스트에 대해서도 우리는 할말이 많다. 우선 미술이나 시가 순수예술이어서 현실참여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이 책이 쓰여진 1947년에 이미 존재했던 멕시코의 화가 시케이로스의 혁명화나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을 생각해 보면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주장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선동적인 판화를 제작한 민중화가들, 그리고 격렬한 구호를 닮은 시를 쓴 민중시인들이 많이 있지 않았던가? 또 한편으로, 이 텍스트에 대한 평자들의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할 말이 있다. 그것은 산문과 시를 구분한 이 텍스트의 내용을, 시에 대한 비하 또는 단죄로 규정한 잘못된 해석이다. ) 물론 '순수예술은 공허한 예술과 동의어이며, 이러한 미학적 순수주의는, 착취자로 백안시되기보다는 차라리 속물로 비판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19세기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방어전략' )이라는 구절이 하나 들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참여문학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책의 전체적인 톤을 유지하기 위해 집어넣은 도입부의 단서일 뿐, 이것을 시에 대한 사르트르의 일방적인 비난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의 초기 철학서인「상상적인 것」이나 말년의 저서「집안의 백치」를 참조하여 읽는 독자라면 이 같은 오해는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참여시, 혹은 참여미술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또 사르트르의 이 텍스트가 시를 형편없이 깎아 내리고 있다는 잘못된 독서법도 잠시 덮어두기로 하자. 우리는 다만, 이 책의 1장에서 산문과 시를 구분할 때 그 근거로 제시한 사물과 도구성의 관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시의 언어적 실패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당연히 하이데거의 체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 될 것이며, 아울러 사르트르의 마르크시즘 미학의 철학적 행로를 그리는 하나의 밑그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자료체는 어디까지나「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제1장에 국한된 것임을 밝혀둔다.


Ⅱ. 사물과 도구

사물은 불투명하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서, 그리고 사르트르에게서 사물은 도구와 대립되는 존재양식이다. 따라서 도구는 투명함일 것이다.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무엇이 사물이고, 무엇이 도구인가. 하이데거는 사물의 성질을 '눈에 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그것이 다른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평상시에는 전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가령 취사용의 가스 레인지나 진공 청소기를 사용할 때 우리는 전혀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를 돌리고, 청소를 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청소기를 작동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들이 고장이 났을 때 우리의 시선은 드디어 그 기계 자체에 머무른다. 청소기를 오래 써서 많이 낡았고 여기저기 긁히고 때가 끼어 더럽다는 것도 처음으로 '눈에 띈다'. 작동이 잘 되었을 때 그 기계는 마치 투명한 물체인양 전혀 우리 눈에 띄지 않았었다.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던 그 물체가 갑자기 집안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게 거추장스럽고, 빨리 치워 버려야 속시원할 것 같고, 나의 시선에, 또는 집안의 질서에 방해가 된다. 그것은 나의 시선을 통과시키는 투명성이 아니라 내 시선이 거기에 가 부딪치는 불투명성이다. 다시 말해서, 고장난 기계는 사물이 되었다. 이제 사물과 도구의 성질이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도구는 '무엇을 위하여'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 구두는 사람의 발을 보호하기 '위하여' 있고, 청소기는 청소를 하기 '위하여' 있다.

'무엇을 위하여'라는 용도성이 있고 없고 이에 따라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가 구별된다. 그런데 이처럼 '무엇을 위하여'를 갖고 있는 도구적 존재가 도구성을 상실할 때, 그때 비로소 거기에 가려져 있던 사물적 존재성이 나타난다.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그것의 존재를 새삼 눈에 띄게 하고, 거추장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눈에 띔', '강제성', '저항성' )이라고 말했다. 고장난 도구는 갑자기 눈에 띄고, 우리에게 빨리 무슨 행동을 취하도록 강제하고,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을 통과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에 완강히 저항한다. 이것이 사물의 불투명성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도구적 존재성은 '눈에 안 띔, 재촉하지 않음, 방해되지 않음'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투명하다.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가 사용 불가능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대상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본다. 도구가 전혀 지장 없이 기능을 하고 있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한다는 이야기이다.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의 형태나 상태 등을 알게되고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과 그것을 주시하며 인식한다는 것은 정반대의 행동이다. "인식함은 어떤 것을 다루며 사용하는 양상의 결여태이다." ) 반대로 도구가, 그 도구적 존재양식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 속에서이다. 망치를 손에 들고 사용할 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그 형태와 성질을 멀건히 바라보기만 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손에 잡고 활기차게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것의 도구적 존재성과 만나게 된다. 이러 저런 사물의 외양을 아무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해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도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망치질을 함 자체가 망치의 독특한 유용성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물로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며, 도구로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사물과 도구가 따로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둘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선행해 있는가? 우선 도구란 무엇인가.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상정해 보자. 이때 만년필은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다. 벽에 못을 치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때 망치는 못을 치기 위한 연장이다. 이처럼 도구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도구는 결코 어느 하나만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본질적으로 무엇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물인데, "수단성이라는 구조 속에는 이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시(指示)가 숨겨져 있다" ). 이 말은, 어떤 수단의 목표가 또 다른 목표의 수단이며, 이런 무수한 목표와 수단의 고리들이 연결되어 도구연관성의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책꽂이는 책을 꼽기 위한 수단이다. 이때 책꽂이의 목적은 책이다. 그러나 한편, 책은 방 주인의 독서를 위해 놓여져 있으므로 그것은 독서행위라는 목적의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지시(指示)한다. 그러나 또, 독서는 방 주인이 어떤 학문적인 연구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 이번에는, 그의 학문적인 연구는 최종 목표인가? 그것은 또, 어느 연구소의 연구를 위한다던가,

또는 그의 생계비의 소득원이라든가 하는 다른 목표의 수단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도구 복합체의 영원한 지시성(指示性)'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이 도구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물간의 근본적인 관계, 그것은 도구적 관계이다." ) 그렇다면 사물과 도구는 어떤 것이 먼저인가. 먼저 사물이다가 나중에 도구가 되는가, 아니면 먼저 도구이던 것이 나중에 사물로 드러나는가. 하이데거가 먼저, 그리고 사르트르도 나중에 이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사물은 언제나 동시에 도구인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와 무』에 나오는 '사물-도구' 라는 합성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그와 비슷한 다른 합성어들과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사물이 된 도구가 아니고, 사물과 도구가 서로 등가적인 관계이다. 모든 사물은, 그리고 모든 도구는, 사물이면서 동시에 도구이다. 땅 위의 돌멩이를 집어 벽에 못을 쳤다면 이때 돌멩이는 훌륭한 연장이 된 것이다.


Ⅲ. 예술적 질료의 사물성

여기 탐스러운 흰 장미꽃 다발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장미를 보고 한 사람이 "이 장미의 꽃말은 '정숙'이야. 그래서 나는 이 꽃을 좋아해"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때 이 사람은 이 장미를 장미로서 보기를 그친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장미를 통과하여 그 뒤에 있는, '정숙함'이라는 추상적 덕성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흰장미의 소담스러운 모습이나 은은한 향내에는 관심조차 없다. 마치 우리가 유리창을 통해 밖의 경치를 내다 볼 때 우리의 시선은 유리를 통과하지만 그 유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과 똑같다. 이때 장미는 마치 유리창과도 같은 투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정숙함'이라는 덕성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옆에서, 이 장미의 꽃말에는 아랑곳없이 꽃 자체의 고운 자태와 향기에 감탄했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 즉 목적은 장미꽃일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장미꽃은 그의 시선을 가로막는 불투명성이다.

그의 눈길은, 마치 단단한 돌부리에 발이 걸리듯, 그렇게 그 장미꽃에 가서 탁 부딪친다. 그 장미꽃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멈춰 선다. 이때 장미꽃은 그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장미는 사물이 된 것이다. 장미는 원래 사물이지 않은가, 라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의 예를 들어보자. 커피나 홍차를 저은 후 찻숟가락을 찻잔 받침에 내려놓을 때 딸깍하는 소리가 들린다. 늘 무심히 지나쳐 버렸던 이 소리가 유난히 마음에 파고들며 뭔가 알 수 없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나는 머리 속에서 아까 들었던 그 소리를 자꾸만 반추해본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소리에 자꾸만 다시 돌아와, 그 소리의 성질 앞에 멈춰 서서, 그 소리 자체에 매료된다. 평소에 투명했던 그 소리는 지금 불투명하게 되었고, 그것은 사물이 되었다.

이번에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생각해 보자. 추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구상화의 경우에도 화가가 초록, 빨강, 노랑 등의 색깔을 칠하는 것은 단순히 나뭇잎이 초록색이니까, 또는 꽃이 빨간색이니까 그런 것은 아니다. 마티스의 빨간 카페트는, 그가 그린 방의 카페트가 실제로 빨간색이어서가 아니다. 만일 그가 현실 속의 어느 방을 그대로 딴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면, 화폭 위의 그 방은 현실의 어느 방을 지시하는 하나의 기호일 것이다. 그러나 화폭 위의 색깔은 전혀 그런 의도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 색깔 자체에 매혹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매혹시킨 그 색깔을 내기 위해 고심하며 색배합을 하고, 그것을 화폭에 옮겼을 것이다.

이때 색깔은 사물이 되었다.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앞에 와서 머무르는 불투명의 사물이 된 것이다. '물체가 된 색깔'이라는 합성어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색깔만이 아니다. 형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화가는 날아가는 새, 접시 위의 물고기, 또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을 화폭 위에 그릴 수 있다. 이때 그는 단순히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새나 물고기 또는 집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 그리기 위해 그것들을 그린 것은 아니다. 모델로 삼은 새나 물고기 혹은 집이 실제로 있었을지 몰라도 그의 그림은 그대로 그것들을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그 대상들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라면 사진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 말은 물론 이 그림들이 사실 속의 물건과 닮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닮고 닮지 않다는 무의미하다. 이 세상의 어떤 물건을 그림으로 나타내려는 것이 화가의 의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화가가 종이 위에 선을 그린 새나 물고기나 집은, 새를, 물고기를, 또는 집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다. 만일 새를 지시하기 위해 새의 그림을 그렸다면 우리는 그 화폭 앞에서 화폭을 유리창처럼 통과하여 그 뒤에 있는 어떤 새의 모습을 연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화폭을 통과하지 않고 그 앞에 머물러 그 새의 순수한 형태와 색깔에 한없이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새의 형태는 사물이 되었다.

화가는 자기 화폭에 기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기를 원한다.

물론 이렇게 창조된 '색깔-물체'가 화가의 은밀한 경향을 반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말이나 표정이 우리의 분노나 고통, 또는 기쁨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듯이 그렇게 그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기호는 아니다. 틴토레토의 그림을 예로 든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골고다 언덕 위의 하늘을 노란색으로 칠한 틴토레토는 예수의 고뇌를 의미하기 위해, 또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고뇌를 야기하기 위해 이 색깔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고뇌를 느끼며 이 색깔을 칠했다 해도 이 노란색은 고뇌의 기호는 아니고 차라리 '사물로 굳어진 고뇌'일 뿐이다. 만일 화가가, 또는 음악가가 자신의 어떤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했다면 이때 색과 소리는 완전히 언어와 똑같은 기능의 기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예술은 아니고 도로 표지판이나 광고 차원의 실용적인 기술일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말해본다면 예술가는 색깔이나 소리를 언어로 보지 않고 ) 사물로 보는 사람이다. 그럼 언어 자체를 재료로 예술작품을 만든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도망치자, 저리로 도망치자, 새들이 취한 것 같다.
하지만, 오, 내 마음이여 수부(水夫)들의 노래 소리를 듣자.

여기서 둘째 연의 '하지만'(Mais)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연결해 주는 기능이 전혀 없다. 그저, 마치 마을 입구에 우뚝 서있는 거석처럼 문자의 앞에 버티고 서있을 뿐이다. 말은 사물을 지시하는 대표적인 기호이지만, 시에서는 말조차 기호가 아닌 사물이 되고 있다. 또 한편을 더 보기로 하자.

오 계절! 오 성(城)들이여!
결점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

이 시의 둘째 연은 의문형으로 되어있으나,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누구이고, 또 질문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이 질문 자체가 스스로의 대답인 듯 하다. 다시 말하면 이 질문은 절대적 질문이며, 사물이 된 질문이다(주8을 참조할 것). 독자는 이 질문을 넘어서서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지 이 문장 앞에 멈춰 서서 그것을 소리내어 읽을 때의 아름다운 울림과, 그것이 주는 어떤 이미지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산문에서 말들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 다시 말해서 기호이지만, 시에서의 말들은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사물이 된 단어들', '물체가 된 문장'이라고 썼던 것이다. 시속에서 단어들은 마치 사물처럼 서로 끌어 잡아 다니거나 밀치기도 하고, 혹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한다. 이처럼 사물이 된 단어들이 모여 이루어진 문장은 그 역시 '물체화한 문장'일 수밖에 없다.


Ⅳ. 언어의 도구성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색깔이나 소리 같은 추상적인 것도 사물성과 도구성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인가. 언어는 대자존재의 의식의 소산이므로 그 자체가 현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호이다. 기호는 도구이며, 그 도구의 성격은 표시성이다. 도로표지, 경계석, 항해용 폭풍우표지, 신호, 깃발, 상장(喪章)등이 모두 기호이다. 행사장에 표시된 화살표는 사람들을 그리로 안내하기 위한 표시이다. 그 화살표는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도 무엇을 지시한다. '책상'이라는 말(그것을 음성으로 말했건, 종이 위에 글로 썼건 간에)은 책상을 지시하기 위한 기호이지, 그 자체로 무슨 물건은 아니다. 우리는 매번 무거운 책상을 대화 상대방 앞에 들고 나오지 않기 위해 '책상'이라는 말을 만들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바로 위 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시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을 '편리하게 사용'한다는 말을 썼다. '위하여', 또는 '편리하게 사용'은 무엇을 상기시키는가? 바로 도구성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기호는 '가리킴의 목적'을 갖고 있는 도구이며, 기호의 존재론적인 근원은 지시성(指示性)에 있다. ) 그런데 언어는 과연 기호인가, 만일 그렇다면 기호로서의 언어는 도구인가 아니면 현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하이데거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하이데거가 사물을 동시에 도구적 존재로 규정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사물성과 도구성으로 파악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뭔가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옆에 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든다. 위험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아까 집어든 물건이 망치인지 나무 막대기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 신체의 연장(延張)이라도 된다는 듯이, 여섯 번째 손가락, 또는 세 번째 다리라도 된다는 듯이 그것을 전혀 대상으로 의식하지 못한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타인 앞에서 우리를 보호해주거나, 타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 마치 우리 감각의 연장 같기만 하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그 뒤의 다른 목표를 향해가느라고 언어 자체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언어 앞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처럼 언어는 도구이며, 이 도구의 목적은 의사소통이다. 언어가 이처럼 도구인 것은 근원적으로 그것이 사물에 대한 명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직 동물적 상태로 살고 있으면서 처음으로 말을 한 두 마디씩 만들어 내던 때를 한번 상상해 보자. 매번 꽃을 꺾어 상대방 앞에 들고 오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언젠가 누구인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앞으로는 이것을 꽃이라고 부르자. 내가 꽃이라고 말하면 언제나 그것은 이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꽃'이라는 말은 빨간색의 어떤 예쁜 형태를 가진 물건을 가리킬 뿐(指示) 그것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엇을 이름지을 때 이름은 이름지어진 사물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시킨다. 헤겔이 말했듯이, 본질적인 사물 앞에서 그 사물의 이름은 비본질적이다. )

그러니까 '꽃'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빨갛고 예쁜 어떤 형태의 실체, 그것이 중요하지 '꽃'이라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시선은 마치 햇빛이 유리창을 통과하듯이 말을 통과해,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현실 속의 어떤 사물을 향해간다. 이처럼 언어는 도구이다. 모든 도구가 그렇듯이 언어도 투명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다른 누구에게 전할 때 그 사람의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기지 못하면서 그 내용은 정확히 옮길 수 있는 것, 이것이 언어의 투명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벽에 못을 박기 위해 망치를 사용하듯이, 우리는 머리 속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또는 세계 속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텍스트에서 사르트르가 '사용한다'라는 말을 이탤릭체로 쓴 것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한다'라는 도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Ⅵ. 언어의 실패로서의 시

언어가 1차로 도구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사물로 관조한다는 것은 언어의 도구성이 훼손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도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은 언어 본래의 목적인 의사소통이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실패가 사르트르 미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시적 언어는 산문의 폐허 위에서 솟아오른다"(라는 문장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진해서 언어의 도구성을 거부한 사람이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실패가 그대로 구원이 된다. 애당초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이와 같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아닐까? 예술이 아닌 현실 생활 속에서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어떤 목적의 수단이다. 내가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잡으려고 손을 뻗칠 때, 손을 앞으로 내뻗는 행동은 연필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도구성의 고찰에서 보았듯이 모든 수단은 투명하여 우리 눈에 안 띄고, 우리의 관심도 끌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연필일 뿐,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치는 행동은 부차적이고, 덜 중요하고, 비본질적인 가치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목표에 의해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은 이 관계를 전도시킨다. 원래의 목표가 흐릿해지고 중간 단계의 수단만이 남은 것, 그것이 그 옛날의 무훈담이나 춤이 아니었던가. 시(詩)야말로 이러한 전도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라면, 항아리는 물긷는 처녀가 그 속에 물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지만, 시에서는 그것이 물긷는 처녀의 우아한 자태를 위해 존재한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헥토르나 아킬레우스가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

시(詩)에서 헥토르나 아킬레우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트로이 전쟁이 존재한다. 이렇게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킨 시인에게 있어서 말은 더 이상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망가진 연장이다. 도구에서 도구성이 벗겨지면 거기에는 사물이 남는다. 유용성이 우리 행동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무용지물은 우리 행동의 실패를 뜻한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말은 이제 더욱 분명하게 그것의 실재성과 개별성을 되찾고, 이번에는 인간의 실패의 도구가 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던 말의 의미는 그 자체가 순수한 소통 불능성이 된다. 말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계획은 말에 대한 순수직관으로 대치되고, 오히려 실패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이 생긴다. 사르트르 미학의 또 하나의 주요 개념인 '지는 자가 이기리라'의 의미가 그것이다.

시는 '지는 자가이기는' 게임이다.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죽일 정도로 패한다.

이 개념은 나중에 플로베르를 다룬『집안의 백치』에서 좀더 심화되고 확대되어, 19 세기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용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9 세기의 예술만이 아니라 산문과 대비된 시 전체에 이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시인은 예술에서의 승리를 위해 실제 인생에서는 패배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흔히 상식적으로, 시인은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실제의 인생에서 실패한다고 말하는데, 사르트르는 현실에서의 실패가 시인의 원초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를 망가진 도구로 간주하는 행위가 어떻게 인생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도구연관의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책꽂이는 책을, 책은 독서를, 독서는 연구를, 이런 식으로 이 세계는 촘촘한 망상(網狀)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도구연관의 세계이다.

그 어느 것도 고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시의 연속이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도구란 결국 모두가 나에 의해 행해져야할 어떤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책은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빗자루는 내가 쓰레질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계의 도구성의 전체는 정확히 나의 가능성과 일치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대자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가능성의 총화이다. 그렇다면 도구란, 사물에 투사된 내 가능성의 이미지일 뿐이다. ) 다시 말하면 사물 속에 각인된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세계는 도구연관의 거대한 사슬로 이어져 있으므로 그 중의 어느 고리 하나만을 끊어도 전체의 구조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이 세계의 도구적 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세계-내-존재인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세계 안에서의 내 인생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언어라는 도구가 결코 완벽하게 쓸모 있는 연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왜곡하는 매체이다. ) 일상언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섬세한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문학 작품에서 시인의 머리 속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는, 언어 이전의 어떤 생각을, 시인은 언어라는 기성품의 주물 속에 집어넣어 시를 만든다. ) 따라서 그의 시 작업은 애초부터 실패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실패라는 말은 도구연관의 세계 속에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 뿐, 시인이 추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패배하지만 美를 종교처럼 생각하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불운'이나 '저주'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집안의 백치』를 읽지 않은 많은 독자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던「문학이란 무엇인가」제1장의 주(註)4번의 마지막 문장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산문의 이의제기는 좀더 성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면, 시의 이의제기는 패배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그 패배는 모든 승리를 은닉하고 있는, 숨겨진 패배일 뿐이다.

이 문장을, 산문은 문학의 성공이고, 시는 문학의 실패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구적 측면과 사물적 측면에서 고찰한 언어의식의 결과이며, 또, 열렬한 참여문학의 외피로도 감추지 못했던 사르트르의 은밀한 미의식의 내비침인 것이다.



* 참고문헌

방법서설, 성찰, 정념론, 철학의 원리, 제규칙 / 데카르트 / 김형효역 / 삼성출판사, 1977.
존재와 시간 / 하이데거 / 전양범 옮김 / 시간과 공간사, 1992.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 이기상 / 문예출판사, 1991.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박정자 / 상명대학교 출판부,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