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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생애 및 작품세계

by 丹野 2012. 1. 6.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의 생애 및 작품세계



�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의 연보年譜

1899년 7월 21일 태어남
1917년 10월에「캔자스시티 스타」기자로 취직
1918년 4월에「캔자스시티 스타」에서 사직. 5월에 적십자 소속 구급차 부대에 소위로 입대해 1차 세계대전에 참가. 7월에 포살타디 파이버에서 오스트리아 군이 쏜 박격포 탄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음. 밀라노 병원에 3개월 입원하던 중에 일곱 살 연상의 간호사인 애그니스 폰 쿠르스키와 사랑에 빠짐. 10월에 전선으로 돌아갔지만 황달로 인해 다시 밀라노의 병원으로 옴.
1919년 3월에 애그니스에게 절교를 당함
1921년 첫 번째 아내인 여덟 살 연상의 해들리 리치드슨과 결혼. 12월에「토론토 스타」가 특파원 자격으로 아내와 함께 파리에 가서 정착
1922년 2월에 에즈라 파운드와 3월에 제임즈 조이스를 만남. 6월에 뉴올리언스의「더블 딜러」에 그의 시 〈궁극적으로〉가 포그너의 시 〈초상〉과 같은 면에 실림. 10월에 그리스와 터키 전쟁과 11월에 로잔회담을 취재.
1923년 2월에 에즈라 파운드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 4월에서 5월까지 프랑스가 점령한 루르 지방을 취재. 5월과 67월에 처음으로 스페인을 여행. 8월에 첫 작품집〈세 편의 단편소설과 열 편의 시〉를 콘텍트사에서 출판. 8월에 토론토로 돌아감.「토론토 스타」에서 사직
1924년 1월 다시 파리로 감. 1월 에즈라 파운드의 소개로 포드 매독스 포드를 만나서 ‘트랜스어틀랜틱 리뷰’의 편집을 도와줌. 3월에 소품집〈우리 시대에〉를 스리마운틴스사에서 출판. 여름에 스페인의 팜플로나에서 투우를 구경. 12월에 이듬해 3월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탐
1925년 단편집〈우리 시대에〉를 보니 앤드 리버라이트 사에서 출판.
1926년 2월에 네 살 연상인 폴라인 파이퍼와 불륜관계에 들어갔다. 5월에 〈봄의 급류〉를 뉴욕의 스크리브너스 사에서 출판. 8월에 아내 해들리와 별거. 10월에 장편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를 스크리브너스 사에서 출판
1927년 1월에 해들리와 이혼. 3월에 이탈리아 여행. 5월에 폴라인 파이퍼와 재혼. 여름에 스페인 여행. 10월에 두 번째 단편집〈여자 없는 남자〉를 출판. 12월 스위스로 스키여행
1928년 파리생활 청산하고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에 정착. 12월 아버지가 오크파크에서 권총으로 자살
1929년 4월에 프랑스로 감. 7월에 스페인 여행. 9월에 프랑스로 돌아옴. 9월에〈무기여 잘 잇거라〉를 출판
1931년 5월에 스페인 여행
1932년 4월에 제인 메이슨과 사랑에 빠짐. 9월에〈오후의 죽음〉을 출판
1933년 8월에 스페인으로 가서 10월까지 지내다가 잠시 프랑스에 들렸다가 11월에 아프리카로 사냥 여행을 감. 10월 세 번째 단편집〈승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마라〉를 출판
1935년 10월에〈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을 출판
1936년 4울에 제인 메이슨과 결별. 7월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정부군에 협조. 단편소설〈킬리만자로의 눈〉,〈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를 발표
1937년 종군기자로 스페인 내란에 합류.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를 만남. 10월에〈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출판
1938년 10월에〈제5열과 처음 마흔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출판
1939년 9월에 폴라인과 결별. 12월 쿠바로 이사
1940년 봄에〈제5열〉이 뉴욕에서 상연됨. 6월에〈제5열〉이 출판. 10월에〈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출판. 11월에 폴라인 파이퍼와 이혼. 마서 겔혼과 결혼
1941년 2월에서 5월까지 중일전쟁 보도 특파원으로 중국을 여행.
1942년 소설집〈싸우는 사람들〉을 출판
1944년 4월에 ‘콜리어스’ 소속 종군기자로 유럽 전쟁에 참가
1945년 쿠바로 귀환. 마서와 이혼.
1946년 3월에 메리 웰시와 결혼
1948년 12월에 이탈리아 여행 중 아드리아나 이반치크와 사랑에 빠짐
1950년 9월에〈강 건너 숲 속으로〉를 출판.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아드리아나 이반치크가 쿠바의 헤밍웨이를 방문
1951년 6월에 어머니 사망. 10월에 전처 폴라인 사망
1952년 9월에〈노인과 바다〉를 출판
1953년 5월에〈노인과 바다〉로 플리처 상 수상. 6월에 스페인을 거처 아프리카로 사냥여행. 8월에 아프리카에 도착
1954년 아프리카 여행 중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 4월에 베네치아에서 아드리아나 이반치크와 마지막 재회. 10월에 노벨 문학상 수상.
1959년 봄에 밸러리 댄비를 만남. 5월에서 10월까지 스페인 순회하여 쓴 투우 견문기를〈위험한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라이프’지에 연재. 나중에 밸러리 댄비를 비서로 고용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짐.
1960년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
1961년 7월 2일 아이다호 주의 자택에서 엽총으로 자살.
1964년 유작〈이동축제일〉출판
1970년 10월에 유작〈해류 속의 섬들〉출판
1985년〈위대한 여름 〉단행본으로 출판
1986년 유작〈에덴동산〉출판



�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의 생애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강하고 힘찬 글과 대담하고 널리 공개된 생활로 유명했다. 사냥과 낚시를 좋아한 의사인 클래런스 에드먼즈 헤밍웨이와 미술에 관심 있던 그레이스 홀 헤밍웨이의 맏아들로 시카고의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와 활동은 부모의 서로 다른 취미를 결합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상한 체하는 태도와 인습주의자 이었다. 그의 출생지에 대한 끊임없는 반발도 많은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공립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고등학교 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시절 활발한 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크파크와 그것이 상징하는 것을 작품에서 결코 다루지 않았다. 이후에 많은 단편소설이 보여주듯 그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미시간 북부의 왈룬 호수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여름이었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다지 안정되지 않은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대학에 가는 대신 캔자스시티로 가서 당시 주요한 신문이었던〈스타 Star〉지의 기자로 채용되어 귀중한 직업훈련을 받았다. 눈에 결함이 있어 계속 군 입대를 거절당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가까스로 미국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했다. 1918년 7월 8일 19세도 채 안 된 나이에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의 포살타디피아브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영웅적 행위에 대해 훈장을 받고 밀라노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적십자사의 간호사인 아그네스 폰 쿠로프스키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거절했다. 이 일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고향과 미시간에서 건강을 되찾은 뒤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한동안 시카고에서 허드렛 일을 하다가 헤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했다.〈토론토 스타 Toronto Star〉지의 해외통신원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파리에서 F.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같은 미국 작가들의 충고와 격려에 힘입어 비非저널리즘적的인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1925년 최초의 중요한 책인 단편집〈우리 시대에 In Our Time〉를 뉴욕에서 출간했다. 이듬해에 장편〈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를 발표했다. 이 소설로 처음으로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비관적이지만 활기 넘치는 이 소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체류하고 있는 목적 없는 망명자들, 곧 헤밍웨이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 자신은 경멸했던 표현인 전후의 '잃어버린 세대'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처음으로 남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그는 이후 주목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어했다.

그는 전후의 몇 해 동안 대부분 집필에 전념했다. 그동안 아들 존을 얻고 첫 번째 결혼은 실패했다. 그 뒤 폴린 파이퍼와 결혼하여 패트릭과 그레고리를 낳았다. 그는 파리에 살면서 스키・투우・낚시・사냥을 하며 두루 여행을 다녔다. 그 무렵에는 이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며 많은 글의 배경을 이루었다. 단편소설의 대가로서 그의 지위는 1927년〈부인 없는 남자들 Men Without Women〉을 발표하면서 나아가기 시작하여 1933년〈승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Winner Take Nothing〉로 확고해졌다. 그러나 적어도 공적으로는 장편소설〈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1929)가 이 두 소설보다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군인으로 보낸 경험을 연애이야기와 전쟁이야기를 융합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섬뜩하면서도 서정적인 소설로 발전시켰다. 많은 비평가들은 헤밍웨이의 훌륭한 소설들이 이 무렵 이미 모두 씌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평가는 너무 가혹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익숙하지 않은 실패를 겪었다. 예전보다 펴내는 책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는 사냥이나 낚시에 시간을 덜 소비했다면 더 많은 글을 썼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러한 취미활동과 함께 전쟁에 관심을 가져 평생 전쟁에 몰두했다. 개인적으로 커다란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취미활동을 정력적으로 추구했다. 그는 결국 많은 모험을 기초로 책을 썼다. 문학적으로 또 경험을 위해서도 그러한 모험을 열렬히 추구했다. 스페인에 대한 사랑과 투우에 대한 열정은〈오후의 죽음 Death in the Afternoon〉(1932)을 낳았다. 이것은 그가 투우를 스포츠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의식으로 보고 그 구경거리를 깊이 있게 연구해서 쓴 글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사냥 여행은〈아프리카의 푸른 산들 Green Hills of Africa〉(1935)을 낳았다. 이것은 큰 짐승을 잡는 사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낚시를 위해 플로리다 주의 키웨스트에 집 한 채를 샀다. 또한 쿠바 만류에서 큰 녹새치를 잡는 것에 이끌려 자기 소유의 낚싯배인 '파일러'도 구입했다. 1937년에 쓴 소설〈유산자와 무산자 To Have and Have Not〉는 경제 불황기의 키웨스트와 그 근처가 배경이다. 헤밍웨이는 이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스페인은 내전이 한창이었다. 스페인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헤밍웨이는 4차례나 그곳을 여행했으며 한 번은 통신원으로 방문했다. 그는 프랑코 장군의 반란에 맞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돈을 모았다. 포위된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한 희곡〈제 5열 The Fifth Column〉(1938)을 썼다. 그의 많은 저작에서처럼 이 희곡의 주인공도 작가 자신을, 그의 애인은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마르타 겔호른을 기초로 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이혼이 확정되자 그녀와 결혼했다. 스페인 내전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 그는 쿠바의 아바나 교외에 그리 넓지 않은 농장 핀카 비지아('전망 좋은 농장')를 구입했다. 아내와 함께 또 다른 전쟁, 곧 일본의 중국 침략을 취재하러 갔다.

전쟁과 평화 기간에 스페인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0)라는 소설이 나왔다. 이 소설은 판매 부수 면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었다. 현실적이고 인상적인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애초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자신도 죽게 될 공격에서 세고비아 근처의 전략적인 다리를 폭파하는 것을 지원한 미국인 게릴라를 다루고 있다. 헤밍웨이는 전 생애에 걸쳐 전쟁(〈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전쟁의 무의미함에,〈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전쟁이 만들어내는 동지애에 초점을 맞추었음)에 몰두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제 2차 세계대전에도 관여했다. 그는 오랫동안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예견해왔다.

그는 쿠바로 돌아간 뒤 독일 스파이들의 쿠바 유입과 쿠바 해변의 잠수함을 조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비공식 활동을 하면서도 공식 승인된 대적(對敵) 정보활동기구인 '크룩 팩토리'를 설립했다. 그는 또 다른 계획을 승인 받아 자기 배인 '파일러'에 U보트를 유인하는 장비를 갖추어 여기에 유인된 U보트들을 파괴시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 두 사업을 모두 효과적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중요한 승리를 하나도 거두지 못한 것에 실망하여 좀더 실제 전투에 다가가기 위하여 다시 한번 저널리스트로서 런던에 갔다. 그는 영국 공군과 함께 비행 임무를 몇 번 수행했으며 진격 개시일(1944. 6. 6)에는 미군과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넜다. 그는 보병4사단 22연대에 소속되어 노르망디와 벌지 전투에서 상당히 많은 전투를 보았다. 또한 파리 해방에 참가했다. 비록 겉으로는 기자였지만 전투에서는 용감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군사문제와 게릴라 활동, 특히 정보수집에서는 실질적인 전문가로서 직업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쿠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3 번째 결혼 역시 파탄에 이르자 4 번째로 런던에서 만난 통신원 메리 웰시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보냈다. 그들은 쿠바의 핑카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곳에서 다시 진지하게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널리 여행을 다녔다. 아프리카에도 한 차례 여행을 갔으며 그곳에서 사냥여행을 하다가 2차례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뒤 곧〈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1952)라는 장엄한 단편소설(거대한 녹새치를 낚아 운반하다가 결국 상어들에게 빼앗기고 마는 쿠바의 늙은 어부에 대한 이야기)로 소설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1953). 1954년 노벨 문학상을 타는 데 이바지한 이 소설은, 베네치아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죽는 직업군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예전의 소설〈강 건너 숲 속으로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1950)가 혹평을 받은 것만큼이나 열광적인 칭찬을 받았다.

1960년경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이 일어나자 헤밍웨이는 핑카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아이다호의 케첨에 집을 구입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예전처럼 작품을 쓰려고 했다. 잠깐 성공을 거두었으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에 2차례나 입원하여 전기쇼크 치료를 받았다. 케첨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지 2일 뒤 그는 엽총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많은 원고를 남겼다. 그중 일부는 뒤에 출간되었다. 파리의 견습 시절에 관한 회고록〈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제 A Moveable Feast〉는 1964년에 출간되었다. 카리브 해의 비미니 섬과 전시의 아바나, 쿠바 해안에서의 U보트 수색작업에 관한 평화시의 회상들을 직접 다룬, 밀접하게 연관된 중편소설 3편이 실린〈만류 속의 섬들 Islands in the Stream〉은 1970년 출간되었다.

완전히 상반된 성격을 지닌 헤밍웨이는 재치 있고 쾌활하고 성미가 급한 반면, 호탕하고 이기적이고 개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쾌락적이고 헌신적이었다. 삶을 사랑하면서도 그 자신이 고백했듯이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타고난 스포츠맨이자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또한 술을 많이 마시고도 아침 일찍 일어났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복잡한 생활을 했다. 유능하면서도 늘 손해를 입었다. 결국 무자비하게 자기 자신을 버린 용기의 화신(한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용기를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품위'라고 정의함) 그 자체였다. 20세기의 미국 작가들 중 헤밍웨이가 얻은 명성을 뛰어넘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가 큰 짐승의 사냥이나 투우, 전투에서 경험한 육체적 감각을 그대로 재생하려고 한 작품의 힘찬 특성 뒤에는 사실 매우 섬세한 미적 감수성이 깔려 있다. 그는 중년에 이르기 훨씬 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진지한 비평들은 그의 인기를 입증하고 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의 작품세계


그의 아버지는 수렵 등 야외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였다. 어머니는 음악을 사랑하고 종교심이 돈독한 여성이었다. 이러한 부모의 성질이 그의 인생과 문학에 미묘한 영향을 주었다. 고교시절에는 풋볼 선수였다. 처음에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의《스타》지 기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8년 의용병으로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이 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 중 다리에 중상을 입고 밀라노 육군병원에 입원, 휴전이 되어 1919년 귀국하였다. 전후 캐나다《토론토 스타》지의 특파원이 되어 다시 유럽에 건너가 각지를 시찰 여행, 그리스와 터키 전쟁을 보도하였다.

1923년에《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Three Stories and Ten Poems》를 출판하였다. 1924년 주로 청소년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단편집《우리들의 시대에:In Our Time》를 발표하였다.《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1926)에 이르러 그의 명성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1928년 파리에서 귀국하여 같은 해 아버지의 권총자살 등 어려운 사건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이듬해 전쟁의 허무함과 고전적인 비련을 테마로 한《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를 완성하여 전쟁문학의 걸작으로서 국외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에는 에스파냐내란을 배경으로 미국 청년 로버트 조던을 주인공으로 한 그의 최대의 장편《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발표하여《무기여 잘 있거라》이상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강을 건너 숲 속으로: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1950)는 예전의 소설의 재판이라 해서 좋지 못한 평을 얻었다. 다음 작품《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1952)는 대어(大魚)를 낚으려고 분투하는 늙은 어부의 불굴의 정신과 고상한 모습을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묘사한 단편이었다. 이 작품으로 1953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53년 아프리카 여행을 하던 헤밍웨이는 두 번이나 비행기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이후 전지요양에 힘썼다. 그 후 1961년 7월 갑자기 엽총 사고로 죽었다. 자살로 추측된다.

헤밍웨이의 미발표 장편 소설 '여명의 진실'(True at First Light)이 미국 스크리브너 출판사에서 7월21일 출간되었다. '여명의 진실'은 헤밍웨이가 1953~1954년 부인 마리와 아프리카 장기 여행에서 돌아와 쓰기 시작한 것이다. 케냐의 사파리에서 온몸으로 탐닉했던 아프리카의 대자연을 무대로 삼아 문명과 원시, 인간성의 범죄와 자 연의 순수성을 대비한 소설이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에서도 인간 욕망에 대한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발휘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심취했던 야생 동물 사냥을 생생하게 그렸다. 또한 잿빛 안개 깔린 대초원, 지평선을 건너가는 얼룩말 무리,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는 하이에나 울음소리 등등 아름다운 풍광 묘사가 일품이다.

'여명의 진실'을 쓸 당시 헤밍웨이는 노벨 문학상(54년)을 받은 직후라 작가로서 최고 절정기에 올라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종종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글에 대해 만족하는 일도 드물었다. '여명의 진실'이란 제목은 그가 붙인 것이 아니다. 그는 아무 제목도 붙이지 않은 채 2만여 단어 분량까지 써놓은 초고만 남겨놓았었다. 생전에 이 소설을 출판하지 않기로 결정한 뒤 더 이상 손을 대 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신작을 발표하지 않은 채 우울증과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다가 62세 생일을 앞두고 엽총으로 자살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원고는 비록 최종 탈고를 거치지 않았었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셈이다. '여명의 진실'은 아프리카 여행에 따라갔던 아들 패트릭이 그 원고를 정리하고 편집도 해서 만든 320쪽 짜리 단행본이다. 제목 '여명의 진실'은 '아프리카에선 여명 아래 진실인 것이 한낮이면 거짓말이 된다' 는 헤밍웨이의 문장에서 따왔다. '마리가 마셨고, 나도 마셨다. 마리가 말했다 : - 당신 알아요? 아프리카야말로 진짜 진(술)도 물보다 독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란 걸. - 허풍떨지 마. -그냥 해본 소리예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요. 여긴 물맛도 좋아요. 물과 진을 비교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요.". 헤밍웨이가 부인 마리와 사냥을 마친 뒤 독주로 목을 축이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여기서 마리는 그의 네 번째 부인이다. 이 소설은 이처럼 작가의 사적 일상과 회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 헤밍웨이 소설의 성격적 특징

헤밍웨이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특징은 용기와 미덕의 인간상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전쟁으로 용기와 미덕이 사라져 가는 상실의 시대에 용기와 미덕을 가진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그의 문학적 위대성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사흘간의 신고 끝에 잡은 고기를 상어에게 물어뜯어 먹혀 앙상한 뼈만 남자,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사자 꿈을 꾼다는 설정은 실패를 하나 패배를 모르는 불굴의 인물을 그려 인생과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였다.

* 헤밍웨이의 문체

헤밍웨이 소설의 문체는 그가 7개월간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것을 바탕으로 한다. 짧은 문장 및 긍정어의 사용, 속어 표현, 형용사 사용의 자제, 특히 '장려한. 화려한, 원대한'과 같은 극단적인 형용사의 사용 금지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헤밍웨이는 이러한 문체뿐만 아니라 냉정히 객관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힘도 이 시기에 배웠다. 그리하여 후일에 그의 문학은 소위 하드보일드 리얼리즘이라는, 감정을 거부하며 사물을 냉정하게 비정적으로 묘사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 문학적 상징주의

문학적 상징주의는 실제 삶과 경험의 '사실들'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상을 갖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는 사실들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풍겨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징주의는 이야기의 내용이 전적으로 사실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마음속에 울려 퍼지도록 만드는 방법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인과 바다'는 문학적 상징주의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산티아고의 이야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이 정확한 묘사로 씌어져 있어서 독자가 산티아고를 일차적으로 어부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는 곧 불굴의 의지로 상어와 싸우는 노인을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게 된다. 노인을 십자가에 고통 받는 예수나 혹은 창작의 고독을 경험하는 예술가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의 상징성과 이상주의

'바다'는 이 작품에서 여성으로 되어 있다. 바다는 인간에게 있어 결코 적대자가 아니라 '은혜를 주고, 때로는 가진 것을 베풀어 주는' 어머니인 것이다. 노인에게는 자연을 단순히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 과학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에게 있어 '바다' 는 인간이 싸우고 괴로워하고 죽도록 운명 지워진 무목적 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용기를 가지고 싸울 때는 반드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는 세계이다. 이 작품에는 헤밍웨이의 이러한 이상주의가 분명히 엿보인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고독한 늙은 어부의 순수한 행동을 통해, 이른바 문명에 따르는 안이감, 침체감, 정신적 마비에서의 탈출을 높이 외치며, 인내, 용기, 그리고 근본적인 인간 정신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 '노인'의 의미

주인공 노인은 계속 불행한 일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끝까지 저항한다. "인간은 지지 않는다."고 버티지만 노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노인이 마지막에 대망의 고기를 낚았으나 뼈만 남는다는 것은, 인간의 무상・허무함을 상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체념하고 말 터이지만 노인은 피곤해 지쳐 잠자면서도 사자의 꿈, 곧 힘의 상징을 꿈꾸는 것이다. 온갖 고난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어 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보인다.

* '노인과 바다'에 나타난 헤밍웨이 문학의 특성

첫째, 인생에 대한 작가의 심오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패배에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정신으로 인내하는 산티아고 노인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노인은 대어와 투쟁해서 이기지만 뜻 하지 않은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잔해만 남기고 다 빼앗긴다. 그러나 노인에게 후회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내일을 위해서 잠을 잘 뿐이다. 노인의 인생은 허무하고 건조한 것이지만 유구한 내일을 위해서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면서 살아간다. 그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작가 헤밍웨이의 근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작품 속에 내재된 풍부한 상징성을 들 수 있다. 노인과 소년을 비롯해서 바다, 구름, 돌고래, 상어, 야구 선수, 사자 그리고 바다의 생물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것들은 상징적 존재들이다. 바다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며, 노인은 인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노인을 보살펴 주는 소년한테서는 우애 정신을 발견하게 되고, 노인이 떠올리는 야구와 야구 선수들에서는 고통을 인내하는 불굴의 정신을 연상할 수 있다. 노을 진 바닷가에서 노는 사자들한테서는 힘의 순결과 평화를 연상하게 된다.

노인은 신 앞에서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동등한 존재라고 여긴다. 노인은 사욕을 위해 신의 도움을 빌리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하는 일의 성공은 단지 자신의 운과 기술에 달려 있을 뿐이다. 노인은 신의 존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신 앞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동등하고,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형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인이 고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고기를 포획한 결과를 두고 말한다기보다는 그가 포기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싸우는 과정 속에서 자기 주위의 자연물에 대해 보다 확실한 깨달음과 이해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두고 말해야 할 것이다. 노인이 고기에게 느끼는 동정은 결국 사랑으로 승화되며, 이것의 바탕에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형제이고 신 앞에서는 차별 없는 존대라는 인생 철학이 깔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헤밍웨이 규약

헤밍웨이의 주요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공통된 성격을 일컫는 이름이다. 헤밍웨이 규약에 따르면 인간의 가치는 육체적, 성적 능력, 혹은 재산 정도에 의해 판단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과 손해를 견딜 수 있는 인내, 스스로가 자기 능력껏 최선을 다했다는 자긍심, 패배했다고 낙심하지 않고 또 승리했다고 자만하지 않겠다는 의지 등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산티아고도 이러한 규약을 따르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는 늙고 가난하지만 사나이답게 꿋꿋하게 행동한다. 비록 기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그의 인내와 의지는 여전히 남아서 패배에 직면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대결을 펼친다.



� 주요작품


* 노인과 바다

노인은 멕시코 만류에 조각배를 띄우고 혼자 고기를 잡으며 사는 노인이다. 고기 마리도 못 잡은 날이 84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처음 40일은 한 소년이 같이 있었다. 그러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날이 40일이나 계속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은 이제 완전히 '살라오'(최악의 사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소년은 부모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다른 배로 옮겨 탔다. 그 배는 고기잡이를 나가 첫 주에 큼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빈배로 돌아왔다. 그것이 소년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소년은 늘 노인을 마중 나가서 노인이 사린 낚싯줄이랑 갈퀴랑 작살이랑 돛 등을 챙기는 일을 도와주었다. 돛은 밀가루 부대로 여기저기 기워서 만든 것이다. 소년은 다시 노인과 같이 고기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소년이 탄 배에 운이 트여 있다며 그 배에 계속 있게 한다. 소년은 노인에게 테라스에서 맥주를 산다. 다른 어부들은 노인이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자 그걸로 노인을 놀려댔다. 그러나 노인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점잖게 고기를 잡으며 경험한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했다. 소년은 노인과 같이 고기를 잡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며 노인을 위해 정어리를 구해 온다고 한다. 처음엔 네 마리를 구해 온다고 하지만 결국 두 마리만 구해 온다. 노인과 소년은 선구를 집어서 자신의 판잣집으로 옮겼다. 아무도 노인의 것을 훔치려 하진 않지만 밤이슬과 만약을 방지하기 위해서 가지고 올라가는 것이다.

방안에 아내의 유품인 예수의 상과 코브레의 성모 마리아 상을 채색한 그림이 걸려 있다. 전에는 아내의 빛 바랜 사진이 걸려 있었으나, 그것을 볼 때마다 너무 울적해져서 노인은 구석 선반 위, 빨아 놓은 내의 밑에 두었다. 둘은 야구를 좋아했다. 둘은 야구 이야기를 했다. 노인과 소년은 양키즈의 디마조를 좋아했다. 소년은 타이거즈 팀과 인지언즈 팀을 겁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팀이 양키즈를 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년과 노인은 얘기를 나누다가 소년이 정어리를 잡으러 나갔다. 소년이 다시 돌아 왔을 때는 노인은 의자에 잠들어 있었고 해는 이미 진 후였다. 한참을 그대로 지켜 본 소년은 노인을 깨웠다. 소년은 주인인 마틴이 준 껌정 콩밥과 바나나 프라이, 스튜를 노인과 나눠 먹기 위해 가지고 왔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야구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내일 고기잡이를 위해서 잠을 잤다. 잠에서 노인은 꿈을 꿨다. 아프리카의 해변과 사자들 꿈...노인은 잠에 깨어 소년을 깨우기 위해 소년의 집으로 갔다. 어부들을 위해 일찍 문을 여는 음식점으로 가 그들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소년이 가져오는 정어리를 받아서 노인은 바닷가로 나갔다. 노인은 새의 움직임을 보고 가서 십 파운드나 되는 다랑어를 잡았다. 정말 엄청나게 큰 고기가 물렸다. 그 고기는 미끼를 입에 물고 날이 밝도록 계속 북을 향해 4시간 이상을 달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 노인은 물을 마시고 용변을 보고 갑자기 소년이 생각이 났다. 그리곤 소년이 옆에 있어주면 좋았을 텐데..하며 소년을 생각한다.

노인은 새와 이야기를 한다. 마치, 사람과 이야기를 하듯이 그렇게 새와 이야기를 한다. 갑자기 고기가 잡아끄는 바람에 노인은 손을 다쳤다. 그리고 노인의 유일한 벗인 새는 날아 가 버렸다. 한참을 가던 고기의 속력이 조금 준 것을 노인은 느꼈다. 미풍이 불어 고기의 몸을 그 때 노인은 처음 보게 되었다.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고기였다. 이틀이 지나면서 노인은 지쳤다. 하지만 고기는 도저히 멈출 기세가 아니 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는 노인도 아니 이었다. 그리곤 끝내 고기를 잡았다. 배와 나란히 묶고 항진을 하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노인은 상어의 습격을 받았다. 상어는, 고기를 뜯어먹었다. 그러나 노인은 "사람은 죽음을 당하지만 지지는 않는다."라고 하며 2마리의 상어와 싸워 이긴다. 그러나 고기는 반 이상 뜯겨 버렸다. 그는 다시 항구로 돌아와 캄캄한 밤에 혼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아침, 소년이 올 때까지 노인은 잠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항구로 가서 노인이 잡아 온 고기의 뼈를 구경하고 있었다. 다들 고기의 크기에 감탄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윽고 노인이 일어나자 소년은 노인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소년은 이제 자신과 함께 바다에 나가자고 한다. 그리고 노인을 위해 손에 바를 약과 음식과 신문, 깨끗한 셔츠를 가지로 내려가며 소년은 하염없이 울었다. 노인은 다시 잠이 들었고 소년이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퓰리처상賞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예술가의 창조적인 고투를 상징한 듯한 작품으로 온갖 고난과 절망을 겪으면서 끝까지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는 불굴의 인간 모습이 늙은 어부를 통해 힘차게 묘사되어 있다 「노인과 바다」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장 헤밍웨이가 묘사하고자 한 삶의 정신이 집적되어 있는 소설이다. 파리와 에스파냐를 무대로 찰나적이고 향락적인 남녀를 내세워 전후(戰後)의 풍속을 묘사하여 '잃어버린 세대(Lost Gene ration)'의 대표 작가로 주목받았다. 헤밍웨이는 그의 대표 장편「무기여 잘 있어라」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와는 달리「노인과 바다」에서는 어떠한 사상도 관념도 상징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포기를 모르는 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순수한 인간이 끈질긴 투지로 얻어내는 행복감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운명의 험난함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나타냈다. 삶은 덧없으며 이 세상살이에 괴로움이 반복됨을 드러내고 있다. 절대 고독의 상황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현실의 고난에 맞서 싸우는 불요불굴의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곧 황폐하고 불모지 같은 현실에서 올바른 삶의 방향에 대해 탐구하였다. 그리고 패배를 모르는 한 노인의 삶을 독백체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언뜻 아무런 재미도 없는 황량하고 피폐한 노년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닌 상징성을 음미하면서 읽을 경우 많이 다르다. 우선 사흘간이나 노인과 사투를 벌이는 상어는 인생에서 부닥치는 여러 일들로 볼 수 있다. 또 노인이 어부 생활을 하는 무대인 바다는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상징할 수 있다. 그 바다는 노인에게 적대의 대상은 아니다. 상어도 적은 아니다. 바다는 노인이 용기를 가지고 싸울 때 보상을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상어도 어쩔 수 없이 노인과 싸울 뿐 둘 사이에 근본적으로 적대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 상어는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강탈자의 이미지를 지닌다. 결국 노인은 상어에게 다 뜯기고 앙상한 뼈만 가지고 귀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어부로서 자기의 최선을 다했고 비록 뼈뿐이다. 그러나 거대한 잔해를 가지고 귀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비극적이고 환멸을 남기는 싸움에서일지라도 불굴의 투지와 의지를 가지고 싸운다는 인간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바다의 의미는 바로 인간의 삶의 터전이고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헤밍웨이 나름대로의 실존 철학이 담겨져 있다. 노인은 상어로 상징되는 현실의 고통과 싸우다가 결국 패배한다. 그러나 희망을 끝내 버리지 않고 돌아와서 사자를 쫒는 꿈을 꾼다. 결국 헤밍웨이는 노인을 통해서 어떠한 일에도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고난과 맞서 싸우는 데서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특히 헤밍웨이의 이러한 철학은 서구인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잘 알게 해준다. 이 소설에서 바다는 운명을 상징하는 동시에 인간의 삶의 터전을 뜻한다. 즉 노인은 이러한 바다에서 굽힐 줄 모르는 인간의 의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배 위에서 수없이 혼자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상어와 끝까지 싸우는 것은 현실의 고난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한 표현이다. 결국 상어에게 고기를 빼앗겼음에 불구하고 노인의 모습에서 종교와 같은 믿음,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색채감도 없는 황량하고 피로한 노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거대한 물고기의 흰 뼈가 표상 하는 생생한 젊음의 아름다움은 노년기의 어두운 그림자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독특한 시선을 인식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 작품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간이 가져야만 할 불굴의 투지와 강인한 의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주인공 산티에고 노인의 모습을 통해서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황폐하고 불모지적인 상황에서 올바른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산티에고 노인의 삶이 아무리 비극적이고 환멸뿐이라 해도 인간은 불패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임을 바다와의 싸움을 통해서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산티에고 노인이 고독한 투쟁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심리의 변화를 그의 독백을 통해서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1930년대의 스페인은 프랑코 총통에 의한 독재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저항하는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전 세계의 양심적인 지식인, 작가들이 여기에 참전했다. 행동주의 문학을 기치로 내건 헤밍웨이, 생텍쥐페리 등이 그들이었다. 헤밍웨이는 이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썼다. 서재에서 벗어나 직접 치열한 현장으로 달려간 이들의 결단은 전 세계인에게 깊은 공감을 남겼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란을 제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하는 것보다 지식인의 용기 있는 결단과 연인・동료와의 순수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또한 문체상으로도 인간의 내면 심리에 대한 장황하고 설명적인 대목을 줄이고 외부에 드러난 행동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하드보일드(hard-boiled)란 물이 펄펄 끊는 상태를 말한다. 어째서 물이 끓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전자의 뚜껑이 들썩거리는 외부의 모습을 엄격하게 반영한 것이 헤밍웨이 특유의 하드보일드 문체다. 수록 부분은 부상당한 남자 주인공이 애인과 동료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어차피 죽을 목숨인 자신만 남아 있겠다고 결심하는 결말 부분이다. 격한 감정이 배제되고 비정한 모습으로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기에서 그 용기 있는 결단에 감동하게 될 것이다.

1937년 5월 말의 토요일 오후에서, 다음 주의 화요일 낮까지의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룬 것이다. 미국인 대학교수 로버트 조던은 스페인 내란 당시에 민주주의의 방위를 위하여 정부군을 원조하고자 참전한다. 산 중턱에 몸을 숨기고 길 안내를 하는 노인으로부터 눈 아래에 벌어지고 있는 지형의 설명을 듣고 있다. 두 사람은 정부군의 명령으로 정부군의 공격 개시 직후에 혁명군의 후방에 있는 철교를 폭파하기 위하여 사전 조사차 와 있는 것이다. 조던은 철교 폭파의 임무를 맡고 유격대에 합류한다. 이 산 속에 공화국에 충성을 맹서한 게릴라 부대가 몇몇 조로 잠복하고 있었다. 그 지도자의 한 사람인 파블로를 만난다. 그의 동료들이 있는 동굴로 안내되어 식사대접을 받는다. 조던은 이 자리에서 마라아라는 아름다운 스페인 아가씨를 만난다.

이틀째인 일요일, 조던과 마리아는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조던은 다른 게릴라 부대의 대장인 엘 소르드에게 원조를 청하러 간다. 삼일 째인 아침, 엘소르드는 적의 기병대의 습격을 받는다. 그의 게릴라 부대는 전멸한다. 조단은 이것을 멀리에서 바라보지만 구원하러 갈 수 없었다. 유격대의 도움으로 철교 폭파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는데 그러는 사이에 마리아와 조던의 사랑도 깊어 간다. 드디어 최후의 날, 사전 계획대로 본부대의 폭격 습격과 동시에 파블로는 혁명군의 주둔지를 습격한다. 철교 폭파 작전은 성공으로 끝난다. 그러나 적의 반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조던이 타고 있던 말은 적탄에 쓰러진다. 그는 말에서 떨어져서 왼쪽 손이 골절되어 움직이지 못한다. 적의 총탄에 깊은 상처도 입는다. 적의 병력은 다가오고 위기의 상황 속에서 조던은 마리아와 동료들에게 떠나라고 말한다. 미친 듯 울부짖는 마리아를 보낸 다음 조던은 침착한 마음으로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을 향해 발사하며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다.


* 무기여 잘 있어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북부 이탈리아 전선에 의용군으로 종군한 미국인 군의관 프레더릭 헨리 중위는 이탈리아군의 야전 병원차 운전사로서 처참한 전선에서 카페와 매춘 굴이 있는 후방을 왕래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인 리날디가 영국의 종군 간호원인 캐서린 버클리를 소개한다. 프레더릭 헨리 중위는 전선에서 식사하는 중 포탄이 떨어져 양쪽 발에 부상을 입게 된다. 밀라노에 후송되고 수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 캐서린 버클리가 전속되어 왔다. 부상한 프레더릭 헨리 중위는 밀라노에서 캐서린 버클리의 간호를 받다가 서로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캐서린 버클리는 야근을 자청하여 매일 밤 프레더릭 헨리 중위를 보살펴 주었고 수술은 성공하였다. 그리고 9월에 캐서린 버클리는 임신했다. 프레더릭 헨리 중위는 부상이 완치되어 전선으로 복귀한다.

전선에 도착하고 며칠 뒤 적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프레더릭 헨리 중위는 이탈리아 군이 총퇴각할 때 스파이 혐의를 받고 총살 직전 탈주했었다. 프레더릭 헨리 중위는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내려간 다음 언덕에 올라가 견장을 떼버린다. 화차를 올라타고 밀라노에 도착하여 평복을 벗고 다시 군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캐서린 버클리의 뒤를 쫓아 스트레자로 가서 캐서린 버클리와 재회한다. 프레더릭 헨리는 헌병들의 추격을 피해서 보트로 호수를 횡단하여 캐서린 버클리와 함께 스위스로 도피한다. 두 사람은 스위스로 탈출에 성공하여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낸다. 봄이 되자 캐서린 버클리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제왕절개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리고 캐서린 버클리는 출혈을 많아서 죽는다. 혼자 남은 프레더릭 헨리는 비를 맞으며 쓸쓸하게 호텔로 돌아간다.


* 해는 또다시 뜬다

주인공 제이크 바안스(Jake Barnes)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파리에서 미국신문사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미국인 소설가 로버트 코온(Robert Cohn)을 알게 된다. 부잣집 아들로 유태인이기도 한 코온은 프린스턴 대학 재학 중에는 유태인으로서 받는 사회적 열등감을 이겨내려고 미들급 복싱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완력을 휘두른 적이 없고 매우 내성적이고 단순한 성격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곧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가 먼저 도망을 치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다. 사실 아내와 헤어지려고 결심하고 있을 때 아내를 버리는 것이 잔인하다고 여겨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스스로 집을 나간 것은 코온에게 충격을 주기는 했다. 이혼 수속이 끝나자 코온은 캘리포니아로 가서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으며 잡지 편집에 투자했다가 돈만 날리고 사업에 실패한다.

그러나 그의 첫 번째 소설이 인기를 얻는다. 여자들이 그를 따르자 우월감이 생긴다. 소설가로 문단에 진출했다. 그는 두 번째 소설을 아직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프랜시스 클라인(Frances Clyne)이라는 여인을 새로 알게 되어 비밀리에 동거한다. 두 사람은 파리로 건너와 함께 생활하며 제이크와도 어울리지만 방황의 삶을 보내고 있다. 제이크는 전쟁 중에 이태리 인들과 함께 전선에서 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다. 불행하게도 성불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전쟁으로 과부가 된 미모의 영국 여인인 브렛 애쉬리(Brett Ashley)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제이크는 육체적 사랑이 불가능하지만 브렛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포기하지 못한다. 브렛은 육체적 사랑 없이는 자신의 사랑을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이다.

제이크는 그녀와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히 사랑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하지만 육체적 사랑을 즐길 수 없는 제이크는 자신의 자제력을 이겨 낼 수 없는 밤에는 홀로 잠자리에서 울기도 한다. 제이크는 브렛의 불행한 과거와 현재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첫 사랑의 애인이 전쟁터에서 죽자, 얼마 후 영국 귀족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 애쉬리는 부인인 브리드를 항상 침대가 아닌 마루에서 재웠다. 나중에는 정신 질환의 영향으로 권총으로 그녀를 쏴 죽인다고 위협해서 그녀는 항상 불안에 떨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한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브렛 마이클 이라는 남자와 약혼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없는 건달이었던 것이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두 번째 결혼했다. 지금 이혼단계에 있는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막연하게 소망하면서 술과 남자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어린 시절 훌륭한 가문에서 자랐고 본래 좋은 성격이었던 브렛 간호사로 참전하여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체험하였고 자신의 참사랑을 잃었던 것이다. 제이크는 누구보다도 그녀가 겪은 마음의 상처와 공허감을 이해하고 그녀를 사랑한다. 허무와 환멸의 감정 때문에 항상 술집을 전전하던 어느 날 밤 제이크가 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로버트 코온과 클라인을 포함해 한 패의 친구들이 들이닥치고 조금 있다가 브렛이 들어온다. 코온은 첫 눈에 브렛에게 반해 버린다. 코온이 함께 춤을 추자는 요청을 거절한 브렛은 자신은 제이크와 데이트 약속이 있음을 밝히고 제이크와 함께 카페를 나가 버린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잠시 드라이브를 즐기며 키스도 나눈다.

그러나 브렛은 제이크가 애무를 하면 자신의 몸이 녹아 버릴 정도로 강렬한 성욕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제이크와의 애무를 거부한다. 제이크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브렛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자 브렛은 다시 카페로 돌아 가 남자들과의 술자리에 어울린다. 제이크는 브렛을 만나면 괴롭다. 물론 그가 성불구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을 브렛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데서 그는 더욱 실망한다. 그는 여자와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이크의 지나 친 바램이었다. 여자에게는 ' 단순한 가치 교환' 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브렛을 처음으로 만난 다음 날 코온은 자신의 애인인 클라인을 런던으로 보내 버리고 오직 브렛에게 매달리기 시작한다. 한편 제이크는 친구인 빌 고오튼(Bill Gorton)에게서 프랑스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뉴욕에서 살고 있는 빌은 명랑한 성격으로 제이크와 함께 스페인으로 투우 구경을 가기 위해 파리에 왔는데 그는 소설가로 꽤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은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기죽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이크가 별로 유머가 없는데 비해 빌은 유머를 즐긴다. 그는 제이크를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 하지만 제이크가 조국 미국을 버리고 외국에 와서 떠도는 것에 몹시 불만스러워 한다. 더구나 제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방황하면서 술이나 계속 마시고 삶의 목표를 상실한 채 본국과의 유대관계를 잃어버린 국적상실자라고 제이크를 나무란다. 꿈이 없는 제이크에 비해 멋진 꿈을 꿀 줄 아는 빌은 분명 제이크 보다 살아가는 방법과 삶의 가치관이 훨씬 건전하다. 제이크와 빌은 호모섹슈얼이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서로 좋아한다. 철학과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로서의 우정이 남녀간의 사랑보다 메마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건전하게 우정을 즐기고 있다.

브렛에게 계속 접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온은 브렛과 함께 산 시베스찬으로 둘이서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코온과의 여행이 그에게 즐거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약혼자가 있는 브렛이 자신과 일주일간의 여행을 하게 되자 코온은 브렛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단정해 버린다. 한편 제이크와 빌은 둘이서 스페인에서 송어 낚시를 한 다음 팜프로나로 투우 구경을 가기로 계획을 세운다. 이 때에 브렛과 결혼하기로 한 약혼자 마이클 캠벨(Michael Campbell)이 영국에서 파리에 도착한다. 캠벨과 브렛은 팜프로나에서 제이크와 빌과 합류하기로 약속한다. 그들은 코온이 자신들의 여행에 합류하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브렛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한 코온은 브렛이 가는 곳을 찾아 간다

제이크와 빌이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코온이 이미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낚시를 떠난다. 제이크는 사물이나 세상이 무엇이냐고 알려고 대들기보다 우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관심을 둔다. 먼저 어떻게 사느냐를 알게 되면 세상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리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에게 도덕이란 어떤 규범이나 법이 아니고 스스로의 느낌에서 연유한다.


* 인디언 부락

호수 기슭에 또 한 척의 보트가 끌어 올려져 있었다. 인디언 두 명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닉과 아버지가 고물에 올라타자, 두 명의 인디언이 보트를 밀다가 한 사람이 올라타 노를 젓기 시작했다. 조지 숙부는 인디언이 부락의 보트에 올라탔다. 젊은 인디언이 배를 밀다가 뛰어올라 노를 젓기 시작했다. 두 척의 보트는 어둠을 가르고 나아갔다. 닉의 귀에는 저편 보트의 노 젓는 소리가 훨씬 앞쪽 안개 속에서 들려 왔다. 인디언은 잽싸게 노를 젓고 있었다. 물 위는 추웠다. 닉 네 보트의 인디언도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으나, 다른 보트가 줄곧 훨씬 안개 속을 전진하고 있었다. 보트가 건너편 기슭에 닿자, 이미 한 척은 끌어 올려져 있었다. 조지 숙부가 어둠 속에서 엽궐련을 피우고 있었다. 젊은 인디언이 와서 닉 네 보트도 끌어올려 주었다. 조지 숙부는 두 인디언에게 엽궐련을 주었다.

호숫가 모래톱에서 풀밭 쪽으로 걸어가자, 풀잎이 밤안개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랜턴을 든 인디언이 앞장을 섰다. 그들이 숲으로 들어가자 이내 재목 운반용의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은 언덕으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양쪽의 나무가 벌목이 되어 있어서 숲길이 훨씬 훤했다. 젊은 인디언이 멈춰 서서 랜턴의 불을 불어 끄자 모두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이 커다랗게 휘어 도는가 싶더니, 개가 밖으로 뛰어나와 컹컹컹 짖었다. 나무껍질을 벗기는 인디언들이 사는 오두막집의 불이 보인다. 개가 여러 마리 달려 왔다. 안내를 맡은 인디언이 개를 쫓는다. 그 문간에 노파가 남포등을 들고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나무 침대에 젊은 인디언 여자가 누워 있었다. 출산 때가 되어 벌써 꼬박 이틀째나 고생을 하고 있다. 부락의 늙은 아낙들이 다 나서서 산모가 지르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길가 어둠 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닉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오두막에 들어설 때 여자가 째지는 듯한 신음소리를 질러 댔다. 2층 침대의 아랫간에 누워 있는 여자는, 이불을 덮고 있는데 어지간히 붕긋해 보였다. 얼굴은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윗간에는 여자의 남편이 누워 있다.

아버지가 수술 도구도 없이 잭나이프만으로 제왕 절개 수술을 하는 것을 보고 닉은 흥미를 잃어버린다. 인디언 오두막 램프 불빛 아래서 의사인 아버지는 마취제도 없이 메스 대신 제크 나이프로 인디언 산모를 수술한다. 산모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아이는 태어나고, 산모의 절개 부위는 낚싯줄로 봉합된다. 다리를 다쳐 꼼짝할 수 없이 이층 침대에 누워 있던 산모의 남편은 아내의 비명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칼로 자기의 목을 베어 자살한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아버지는 매우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발을 다쳐 누워 있던 산모의 남편이 자살한 것이 밝혀진다. 아버지는 닉을 데려온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닉은 이 경험을 탄생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은 자살하지 않으리라 결심 한다

이 작품은 1925년 미국 판으로 출간된 '우리 시대에(In Our Time)'라는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헤밍웨이의 초기작에 해당한다. 소년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의사인 아버지가 근처 마을에 왕진을 갈 때 따라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이 곳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출생과 죽음이라는 생의 근본적인 동시의 겪는 소년이 그의 대해 의문을 갖고 나름의 해답을 찾아보는 통과 제의적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야기는 인생의 궁극적인 두 측면을 한꺼번에 보게 된 어린 소년이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년 닉은, 의사인 아버지가 수술 도구도 없이 잭나이프로 제왕 절개 수술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호기심을 잃을 정도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거기에다가 산모의 남편이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까지 겪게 된다. 이러한 현장을 목격하고 생의 고통스러움과 가혹함을 느낀 닉은 이제 아버지의 보호막에 갇힌 어린 소년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에 직접 대면하여 그 해결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하룻밤 사이에 닉은 내면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이다. 이 작품이 일종의 통과 제의 소설이라는 지적은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과 존재의 문제에 눈을 뜨는 한 소년의 내적 성장 과정을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닉은 아버지를 따라 인디언 마을에 갔다가 '저녁 - 밤 - 새벽'이란 시간사이에 산모의 수술과 산모 남편의 죽음이란 충격적인 체험을 한다. 이러한 체험은 이전의 '닉'과 새로운 '닉'을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 낯선 시・공간의 체험을 토해 닉은 변화하는데, 여기에서 밤은 존재 변화의 장(場)이다. 새벽이 오자, 고통과 출산, 그리고 죽음이라는 어제 밤의 어두운 체험은 아침의 밝음으로 수렴되다. 이것은 체험의 부정이 아니다. 체험을 통해 삶에의 긍정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한 소년이 탄생과 죽음의 고통스러운 장면을 동시에 목격함으로써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보는 통과제의(祭儀)이다. '저녁-밤-새벽'의 흐름을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기본적으로 간단명료한 문체를 통해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무거운 문제를 담담히 조망하고 있다.




� 참고도서


* 저서

・ 헤밍웨이 전집 전5권 / E. 헤밍웨이 / 휘문출판사 / 1969
・ 헤밍웨이 전집 전7권 / E. 헤밍웨이 / 대양서적 / 1973
・ 헤밍웨이 단편선(Anam Library 3) / E. 헤밍웨이 / 고려대학교 출판부 / 1975
・ 헤밍웨이 서한집 / 소설에서 못 다한 얘기 / E. 헤밍웨이, C. 베이커 편 / 예유사 / 1981
・ 헤밍웨이 전집 전5권 / E. 헤밍웨이 / 학력출판사 / 1983
・ 무기여 잘 있거라 /을유문화사 / 1988
・ 헤밍웨이의 아프리카로 떠나는 여행 / 시학사 / 1999,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범우사 / 1999
・ 여명의 진실 / 문학사상사 /1999
・ 내 생애 가장 불우했던 시절 / 거송미디어 / 1999
・ 노인과 바다 / 범우사 / 1999
・ 킬리만자로의 눈 / 범우사 / 1999
・ 비둘기를 잡아먹던 시절 /거송미디어 / 2002
・ 에덴의 동산 / 민중출판사 / 2003,


* 연구서

・ 헤밍웨이의 문학수업시대 / C. A. 펜턴 / 창문사 / 1958
・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연구 / 정호영 / 동아대학교 / 1963
・ 영미작가론 / 한국영어영문학회 편 / 신구문화사 / 1963
・ 헤밍웨이론 / P. 영 / 한국영어영문학회 편 / 한국영어영문학회 / 1963
・ 헤밍웨이 문학의 연구 / 김병철 / 을유문화사 / 1968
・ 헤밍웨이의 사상과 기법 및 문체고 / 김계민 / 진주교육대학 / 1968
・ 나의 형 헤밍웨이 / L. 헤밍웨이 / 김병철 / 을유문화사 / 1969
・ 헤밍웨이 전기 / 김병철 / 을유문화사 / 1970
・ 헤밍웨이 연구 / 김병익 / 민음사 / 1979
・ 헤밍웨이 문학에 나타난 비극적 인생관 / 여영돈 / 효성여자대학교 / 1980
・ 어니스트 웨밍웨이 / 김종원 외 / 민음사 / 1983
・ 헤밍웨이 평전 / 김병철 / 범우사 / 1987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의 문학 / 한영희 / 한글 / 1992



� 참고논문


* 어너스트 헤밍웨이의 어부 - 영원한 맞수와의 겨룸 / 한국해사문제연구소 / 이원철 / 1977
* 헤밍웨이의 여성 /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 여영돈 / 1985
* 헤밍웨이의 유산자와 무산자 / 상명여자사범대학 / 유영두 / 1988
* 정치와 헤밍웨이 문학 - For Whom the Bell Tolls를 중심으로 / 한국강원영어영문학 /백낙승 / 1993
* 헤밍웨이의 작품에 나타난 여자들 /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 여영돈 / 1994
* 헤밍웨이 문체에 나타난 시간 / 한국영어영문학회 / 소수만 / 1998.
* 헤밍웨이 문체에 나타난 시간 / 한국영어영문학회 / 소수만 / 1998
* 헤밍웨이의 행동철학에 관한 수사학 / 한국강원영어영문학회 / 양병현, 탁기현 / 1999
* 헤밍웨이의 행동철학에 관한 수사학 / 한국강원영어영문학회/ 양병현, 탁기현 / 1999
* 헤밍웨이 소설에 나타난 양대 서술패턴 / 세계문학비교학회 / 소수만 / 2000
* 헤밍웨이의『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에 나타난 부정적 남성성과 타자 /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 권석우 / 2002
* 헤밍웨이의『우리들의 시대』에 관한 문화적 접근 / 중앙영어영문학회 / 박병주 / 2003





� 참고자료


* 하드보일드Hard Boiled 문학

원래는 달걀을 '단단하게 삶은'의 뜻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비정(非情), 냉혹(冷酷)'의 뜻으로 되었다.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문체로써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문체로써 주로 색다른 사건을 취급하는 문학의 한 형식이다. 문장을 짤막하게 끊고 사물을 뚜렷이 표현한다. 그 속에서 스스로 하나의 리듬이 생기게 한다. 1930년대 로스트 제너레이션, 특히 헤밍웨이의 문체의 특징을 가리킨다. <노인과 바다>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범죄소설가로 유명한 대시얼 해밋 등이 대표적인 이 스타일의 작가로 꼽힌다.


* 하드보일드 小說hard-boiled fiction

거칠고 비정한 미국 범죄소설의 한 유형

탐정소설 분야에 새로운 분위기의 세속적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를 도입했다. 섹스와 폭력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몰인정하고 더러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며 속도감 있으면서도 상스러운 대사를 구사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문학 장르로 인정받게 한 사람으로는 대시얼 해밋(1894~1961)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전직 핑커턴 사립탐정이었고 통속잡지에 탐정소설을 기고했다. 1929년〈블랙 마스크 Black Mask〉지에 발표한 플라이 페이퍼 Fly Paper〉로서 진정한 하드보일드 소설을 개척했다. 해밋은 자신의 경험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도스 패소스 같은 작가들의 사실주의를 연결함으로써 보통 요리사・거지・친척들이 사는 시골집을 무대로 한 영국식 미스테리 소설, 즉 수세대 동안 미국작가들이 독창성 없이 답습해온 소설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소설을 써냈다. 해밋의 탐정소설 가운데 처녀작은〈붉은 수확 Red Harvest〉(1929)이다. 흔히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몰타의 매 The Maltese Falcon〉(1930)에서 유명한 탐정 샘 스페이드가 선보인다.〈그림자 없는 남자 The Thin Man〉(1932)는 해밋이 써낸 5편의 소설 중 가장 성공을 거두었다.

해밋의 혁신적인 문학형식은 제임스 M. 캐인(1892~1977)의 하드보일드 풍 멜로드라마에 도입되었는데, 특히〈우편배달부는 언제나 벨을 2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1934)〈재해배액 지불특약 Double Indemnity〉(1936)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하드 보일드 계 작가로는 레이먼드 첸들러(1888~1959)가 있는데, 그의〈긴 잠 The Big Sleep〉(1939)〈안녕, 내 사랑 Farewell, My Lovely〉(1940)〈예쁜 누이 The Little Sister〉(1949) 등의 소설들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부패와 암거래를 다루었다. 이 계통의 다른 중요 작가로는〈그림 살인자 Murder with Pictures〉(1935)〈목격자 Eye Witness〉(1950) 등의 스릴러물을 쓴 조지 하먼 콕스(1901~84),〈작은 시저 Little Caesar〉(1929)〈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1949)을 쓴 W. R. 버넷이 있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결국 극단적인 선정주의와 노골적인 사디즘으로 흘렀고, 베스트셀러 작품〈내가 심판관 I, the Jury〉(1947)을 쓴 작가 미키 필레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을 두고〈얼리 퀸즈 미스테리 매거진 Ellery Queen's Mystery Magazine〉은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드보일드 류의 작품들은 널리 영화화되었으며 영화관객의 구미에 맞게 수정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 행동주의 문학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조・경향을 가리킨다. 이전의 유럽에서 한때 유행처럼 내면세계를 파헤치고 자의식을 추구하는 문학 작품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20년대 후반기부터 전 세계는 경제 공황에 휩쓸리고 히틀러로 대표되는 파시스트 정권이 권력을 잡고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그리하여 사회 상황이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문학도 현실에 개입해서 그 바람직한 방향으로서의 건설을 위해 영웅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반 파쇼 투쟁에 나선 앙드레 말로,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등이 이에 속한다.


*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기존의 모든 이상과 가치를 잃어 버렸다는 상실감에 빠져서 주로 국외에서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벌인 일군의 미국 작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신념의 상실과 절망과 환멸 속에서 생활의 방향을 잃은 수많은 전후 청년들의 심리 상태와 현실을 여실히 묘사하였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말로 '길 잃은 세대'라고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대를 의미한다. 특히 전쟁 중에 성인이 되어 1920년대에 문학적 명성을 얻은 미국 작가들을 말한다. 이 용어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당신들은 모두 길 잃은 세대요"라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헤밍웨이는 이 용어를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1926)의 권두 인용문으로 사용했다. 이 작품에서 전쟁이 끝난 후 환멸 속에서 술에 의지하며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파리의 젊은 국외이주자들의 면모가 포착된다. 이 세대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가치관이 더 이상 전후세대와 연결되지 못했다. 하딩 대통령의 '정상 복귀' 정책 아래에서 절망적으로 편협하고, 물질주의에 물들고, 정서적으로 황폐해 보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정신적 소외를 느끼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다. 이 세대에 속하는 작가로는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 존 더스 패서스, e. e. 커밍스, 아치볼드 매클리시, 하트 크레인 등과 1920년대에 파리를 문학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그 밖의 많은 작가들이 있다. 그들을 결코 문학의 한 파(派)로 볼 수는 없다. 1930년대에 이들이 다른 쪽으로 전향하자 그들의 작품에서는 더 이상 전후 시기의 독특한 특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나온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피츠제럴드의〈밤은 부드러워라 Tender Is the Night〉(1934)와 더스 패서스의〈거금 The Big Money〉(1936)이 있다.


*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

미국 문학사상‘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뒤를 이은 세대를 말한다. ’50년대 모든 기성세대의 질서와 도덕 및 문학에서 탈피하고, 인간 고유 성격의 밑바탕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특징이다. 메일러, 긴스버그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비트 제너레이션은 '패배의 세대'라는 뜻으로 로스트제너레이션의 뒤를 이은 세대를 이르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5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중심으로 대두된 보헤미안적인 문학가・예술가들의 그룹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들은 현대의 산업사회로부터 이탈하여, 원시적인 빈곤을 감수함으로써 개성을 해방하려고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인 개인주의의 색채가 짙으며, 재즈・술・마약・동양적인 선(禪) 등에 의한 도취에 의하여 ‘지복(至福:beatitude)’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1956년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장시《울부짖음 Howl》, 1957년 잭 케루악(Jack Kerouac) 의 장편소설《노상(路上)》이 발표되고 나서 이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 일파에는 그밖에 시인 L. 펄링게티, 소설가 G. 스나이더, M. 매클루어, K. 렉스로스, W. S. 버로스, N. 메일러 등 여러 연령층의 작가 시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반체제적 태도를 고집하고, 극한적인 부정에 입각하여 새로운 정신적 계시를 체득하려고 하였다. 미국 로맨티시즘의 한 변형으로도 생각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였다.




� 참고자료


* 미국문학 美國文學 American literature


・개요

미국에서 영어로 씌어진 문학작품의 총체.

다른 나라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미국문학도 미국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처음 150년 남짓 동안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에 흩어져 있는 식민지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으나 모국인 영국에 대한 항쟁을 거쳐서 합중국이 되었다. 19세기말에는 남쪽으로는 멕시코 만, 북쪽은 북위 49°, 서쪽은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넓어졌다. 동시에 세계열강의 하나로서 위치를 차지했으며, 20세기에는 2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유럽과 극동 문제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그동안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생활양식만이 아니라 사상과 감정상에도 갖가지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요소가 미국문학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17세기

미국문학은 우선 영국인 저작가들의 식민지문학으로부터 출발했다. 그 최초의 한 사람인 존 스미스는〈버지니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 A True Relation of…… Virginia……〉(1608)〈버지니아, 뉴잉글랜드 및 서머 제도 통사 The generall Historie of Virginia, New England, and the Summer Isles〉(1624)에서 영국인들에게 식민 개척의 기회를 설명했다. 이윽고 각 식민지에 관해서 미국을 경제적 가능성이 풍부한 땅으로 찬양하는 책들이 잇달아 나왔다.

이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지만 식민자들이 모국을 등지게 된 생각의 차이를 피력하는 책도 나왔으며, 정부의 권한이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을 논했다. 그 가운데 보수적인 입장을 논한 것이 〈미국의 애거왐에 사는 소박한 구두수선쟁이 The Simple Cobler of Aggawam in America〉(1647)를 쓴 매사추세츠 만의 내서니얼 워드로서 시류에 편승한 사상을 비난하고 기존의 제도를 옹호했다. 이와 반대의 입장에는 존 윈스럽의 〈일기 Journal〉(1630~49)가 있는데, 이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 신정제(神政制), 즉 하느님을 우두머리로 하며 성서에 근거한 법률을 지닌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이상적 신정제의 옹호자로는 인크리스 매더와 그의 아들 커튼 매더가 있다. 윌리엄 브래드퍼드는〈플리머스 식민지사 History of Plymouth Plantation〉(1856)에서 순례자인 분리주의자들이 영국국교와 결별하게 된 경위를 적었다. 그보다 더 과격한 로저 윌리엄스는 논쟁적인 팜플렛(1643~52)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 주권재민(主權在民), 각 신앙에 대한 관용을 주장했다.

17세기에 나온 실용적 저작 가운데는 자서전・전기・논문・항해기설교집 등이 있으며 희곡이나 소설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청교도의 입장에서 이러한 문학형식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시는〈찬송가집 Bay Psalm Book〉(1640)이나 칼뱅주의 교리를 시 형식으로 요약한 마이클 위글즈워스의〈심판일 The Day of Doom〉(1662) 등이 인기를 끌었으나 그다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인 앤 브래드스트리트는〈10번째 뮤즈 The Tenth Muse〉(1650)라는 서정시집에서 종교적 정서와 가정에 대한 감개를 감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현대 비평가들이 그녀보다 높이 평가하는 시인으로서 작품이 193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간행된 사람이 있다. 이 숨겨진 시인은 영국 태생의 목사이며 의사로서 보스턴과 웨스트필드에서 살던 에드워드 테일러이다. 테일러에게는 청교도적인 우울한 그림자가 적었으며 오히려 크리스트교의 신앙과 체험의 기쁨을 노래하는 서정시가 많았다. 17세기 미국의 모든 저작은 같은 시대 영국의 저작을 본떠서 씌어졌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에서 두드러지게 영국적이었다.

18세기

18세기 초에는 낡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저작가들이 있었다. 커튼 매더는 방대한〈미국에서의 그리스도의 위업 Magnalia Christi Americana〉(1702)과, 힘찬〈목회 안내 Manuductio ad Ministerium〉(1726)에서 옛 청교도 신앙을 옹호했다. 조너선 에드워즈는 신앙부흥을 목표로 한 '대각성운동'을 일으켜 동부 연안 전체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원래 타락한 존재이며,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미덕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칼뱅주의의 교리를 강력한 설교와 아름답고 명석한 산문으로 논했다. 그의 대표적인 철학논문이〈의지의 자유 Freedom of Will〉(1754)이다. 그러나 매더와 에드워즈는 운명이 다해 가는 교의(敎義)를 옹호한 셈이다. 한편 존 와이스나 조너선 매이휴 같은 자유주의적 뉴잉글랜드 목사들은 한결 관용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보스턴 지사이며 상인인 새뮤얼 시월은 그의 흥미로운 〈일기 Diary〉에서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 이기는 했으나 뉴잉글랜드의 활발한 상업의 세속적인 태도가 엄격한 청교도주의를 대신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새라 나이트 부인의〈일기 Journal〉에는 1704년의 뉴욕 여행이 희극적인 필치로 그려져 있다. 남부에는 이들보다 다소 늦게 등장한 버지니아의 윌리엄 버드 2세가 있다. 이 귀족적인 농원주는 암울했던 선인들과는 전혀 대조적이다. 대표작으로는 1728년의 측량여행을 기록한〈측량기 The History of the Dividing Line〉와 변경에 있는 자기 토지를 찾아간〈에덴동산기행 A Journey to the Land of Eden〉(1733)이 있다.

미국 독립전쟁 초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페인이며 그밖에 새뮤얼 애덤스, 존 디킨슨, 조지프 갤로웨이가 있다. 프랭클린은 1722년부터 형이 발행해오던 신문〈뉴잉글랜드 커런트 New England Courant〉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서민과 농부를 대변했고 쉽게 이해되는 언어와 실용적인 논의를 폈다. 프랭클린이 1732~57년에 걸쳐 해마다 편집한〈가난한 리처드 달력 Poor Richard's〉은 경구로 넘쳐 있어 널리 읽혔다.〈자서전 Autobiography〉(1771~88)에는 출세와 성공을 위한 세속적인 지혜가 들어 있다. 그가 쓴 영국과의 분쟁에 관한 논문・논평・보고서 등은 식민지 측의 주장을 밝히고 그것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국 태생인 토머스 페인은 미국에 건너와 필라델피아에서 잡지 편집인이 되었으며, 곧이어 식민지 편의 가장 유력한 선전원이 되었다.〈상식 Common Sense〉(1776)이라는 논평은 식민지 사람들이 독립을 선언하는 데 큰 힘이 되었고,〈위기 The American Crisis〉(1776~ 83)는 암담한 전쟁의 시기를 싸워나가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둘 다 이 항쟁을 멜로드라마로 그린 것으로 천사와 같은 식민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악한 영국 사람들과 대항한다는 서술이 크게 선전 효과가 있었다. 페인이 성공한 또 다른 이유는 시적 열정과 길이 기억에 남는 고양된 언어로 표현한 때문이었다. 이 같은 논쟁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새로운 미국인 상을 재빨리 정립시킨 작가는 프랑스 태생인 미셸 기욤 장 드 크레브쾨르이다. 그의〈미국 농부의 편지〉(1782)는 유럽 대륙과는 판이한 새로운 토지와 인간의 탄생을 당당하게 그려내고 있다.

신생국가

독립전쟁 이후의 시기에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은〈페더럴리스트 The Federalist〉지의 집필자들과 독립선언문의 토머스 제퍼슨이다.〈페더럴리스트〉(1787~88)는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가 집필한 85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으며, 깊은 통찰력과 냉철한 논리로 새 헌법의 장점을 풀이한 것으로서 미국의 정치이론의 고전적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제퍼슨은 미국의 정치사상가 가운데 가장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논문과, 특히 서간,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개인의 자유와 지방자치를 계속 주장했고 영향력도 매우 컸다.

・주요작품

시인과 시

독립전쟁 동안에 시는 국왕 파와 독립파 양쪽에서 무기로 이용되었는데 각자의 주장을 펴고 또 영웅을 칭송하는 시가 많이 씌어졌다.〈양키 두들 Yankee Doodle〉〈네이선 헤일 Nathan Hale〉〈에필로그〉등이 유명한데, 이런 노래의 대다수는 당시 잘 알려진 영국의 멜로디에 맞추어 애창되었다. 이 무렵 코네티컷 주의 하트퍼드를 중심으로 시인의 무리가 나타나 '하트퍼드 재사'(Hartford Wit)라고 불렸다. 그중 가장 유명한 시인이 존 트럼벌, 티모시 드와이트, 조얼 바로이다. 이 시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시인은 필립 프리노이다. 최초로 유명해진 시는 독립전쟁을 노래한 풍자시로서 선전물로도 큰 효과를 거두었다. 그는 신고전파 풍의 과장된 어법을 즐겨 썼지만 〈인디언 묘지 The Indian Burying Ground〉〈야생 인동 The Wild Honey Suckly〉등의 우아하고 낭만적인 서정시도 있으며 19세기에 중요하게 부각된 문학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희곡과 소설

18세기말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중요한 희곡과 소설이 씌어졌다. 직업적인 배우에 의해서 상연된 미국 최초의 희극은 로열 타일러의〈대조 Contrast〉(1787)이다. 이 희곡에는 영국의 골드 스미스와 셰리든의 영향의 흔적이 뚜렷하지만 미국 특유 양키의 전형을 선보였다. 윌리엄 던랩은 많은 희곡을 썼으며, 다른 극작가들의 노력을 격려했다.

최초의 미국소설〈공감의 힘 The Power of Sympathy〉(1789)을 쓴 사람은 윌리엄 힐 브라운인데, 이것은 영국의 새뮤얼 리처드슨이 만들어낸 감상소설 형식을 따른 것이었다. 그 후 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 감상적 소설의 흐름은 계속되었다. H. H. 브래큰리지 와같이 세르반테스와 헨리 필딩을 따른 작가도 나타났다. 그의〈현대의 기사도 Modern Chivalry〉(1792~ 1815)는 꽤 인기가 있었던 소설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풍자와 변경생활의 묘사가 흥미롭다. 또 찰스 브록던 브라운의〈윌런드 Wieland〉(1798)〈아서 머빈 Arthur Mervyn〉(1799~1800)〈에드거 헌틀리 Edgar Huntly〉(1799)는 고딕적 공포물의 미국풍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작품성보다는 선구적인 의미가 더 크다.

19세기

초기

독립전쟁과 1812년 영국과의 전쟁 이후 국민문학을 대망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그러자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 워싱턴 어빙,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에드거 앨런 포를 선두로 한 위대한 반세기의 문학적 발전이 시작되었다. 브라이언트는 23세의 나이에〈사관(死觀) Thanatopsis〉(1817)이라는 시로 주목을 끌었지만, 18세기 영국 신고전파 시인의 영향에 이어서 워즈워스를 비롯한 낭만파 시인의 영향 아래 뉴잉글랜드의 정경을 생생하게 그린 서정적인 자연시를 썼다.〈물새에게〉〈숲의 찬가 A Forest Hymn〉 같은 시는 사상과 감정을 결합한 인상적인 표현을 이루었다. 또 브라이언트는 전투적인 자유주의자로서 오랫동안 뉴욕의 〈이브닝 포스트〉지의 주간을 지냈지만 그 명성에 있어서는 뉴욕 태생의 워싱턴 어빙에 미치지 못한다. 어빙은 처음 맨해튼의 시민을 풍자한〈샐머건디 Salmagundi〉(1807~08)지의 발간을 도왔으며 이어서 디트리히 니커보커라는 필명으로〈뉴욕 역사 A History of New York〉(1809)를 썼다. 이것은 현학적인 학식과 명문의 네덜란드계 시민을 빗댄 익살스러운 역사 이야기이다. 그 후〈스케치 북 The Sketch Book〉(1819~20)과〈브레이스브리지 홀 Bracebridge Hall〉(1822) 같은 에세이 풍 작품에서는 새로운 낭만적 분위기를 도입했으며, 영국 비평가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은 최초의 미국 작가가 되었다. 쿠퍼의 걸작은 위대한 변경 사람 내티 범포의 생애를 그린 5권으로 된〈가죽 각반 이야기 Leatherstocking〉(1823~41)이다. 그밖에 독립전쟁과 해상생활을 다룬 소설과 몇 권의 사회소설이 있는데, 플롯과 성격 묘사에도 뛰어나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읽혔다. 에드거 앨런 포는 남부 태생이지만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 시에서 잡지편집인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평론・시・단편소설을 썼다.〈어셔가의 붕괴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1839)〈붉은 주검의 가면 The Masque of the Red Death〉(1842)〈아만틸라도의 술통 The Cask of Amontillado〉(1846) 등은 고딕 풍 공포소설의 걸작이며 치밀한 심리적 수법으로 씌어졌다. 같은 수법으로 씌어진〈모르그가의 살인 The Murders in the Rue Morgue〉(1841)은 추리(탐정)소설의 효시로 평가된다.〈갈가마귀 The Raven〉(1845)라는 시로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얻은 포는 격조 높은 선율과 암시적인 이미지가 넘치는 많은 시를 썼다. 그의 시와 평론은 보들레르의 번역을 통해서 프랑스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걸출한 남부 출신의 소설가로는 존 펜들턴 케네디와 윌리엄 길모어 심스가 있다. 케네디의〈제비 헛간 Swallow Barn〉(1832)은 버지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농원생활을 즐겁게 그리고 있다. 심스는 역사소설〈예마시족 The Yemassee〉(1835)에서 변경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역사를 다루었고,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도 여러 권 썼다.

미국문예부흥(1830~70)

1830년대에 등장해 남북전쟁 말까지 활동한 유머 작가와 뉴잉글랜드 지방 작가, 허먼 멜빌, 월트 휘트먼 등은 새로운 정신으로 작품을 썼다.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취임(1829)하면서 민주화의 확대와 함께 자국의 풍물과 인물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경향에 맞추어 이들 작가들도 작품 속에서 미국을 형상화했다. 특히 발랄한 필치를 보인 것은 두 그룹의 유머 작가였다. 그 하나는 뉴잉글랜드를 근거지로 하는 시버 스미스, 제임스 러셀 로웰, 벤저민 P. 실레이버 등의 무리로서, 이들은 상식에 바탕을 둔 논의와 꾸며낸 유머로 정치・사회 문제를 논평하는 미국적인 인물의 유형을 창출해냈다. 한편 남서부 지방에서는 데이비 크로켓, 오거스터스 볼드윈 롱스트리트, 존슨 J. 후퍼, 토머스 뱅스 소프, 조지프 G. 볼드윈, 조지 워싱턴 해리스 등이 들끓는 듯한 변경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렸고, 잭슨식 민주주의의 한 부분인 보통 사람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뉴잉글랜드의 지식인(브라민)

하버드대학교 및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와 인연이 깊은 뉴잉글랜드 작가의 무리는 모두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서,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올리버 웬들 홈스와 앞에서 말한 제임스 러셀 로웰이 이에 속한다. 이 3명은 귀족적이고 외국문화에 심취했으며 모두가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다. 롱펠로는 유럽식의 시법(詩法)과 이야기 방식을〈에반젤린 Evangeline〉(1847)〈하이와서의 노래〉(1855) 등의 미국 사를 다룬 이야기 시에서 사용했다. 홈스는 〈아침 식탁〉(1858~91) 연재에서 품위 있는 익살을 잘 살렸다. 로웰은 미국의 풍경을 그린 시에서 고향의 정경을 담았고, 남북전쟁의 전사자를 추모하는〈하버드 기념제 송시 Harvard Commemoration Ode〉에서 기품 있는 감정을 잘 표현했다.

초절주의자

1830년대 후반에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 콩코드는 또 다른 중요한 문학 그룹인 초절주의자(transcendentalist)들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9세기 초에 엄격한 칼뱅주의를 대체한 유니테리언 파의 목사로서, 콩코드의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랠프 월도 에머슨이 이 그룹의 지도자였다. 유니테리언 파 교리의 협소함을 느낀 에머슨은 초절주의로 돌아서서, 직관이야말로 논리와 경험을 초월하여 가장 심오한 진리를 계시한다고 믿었다. 단순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사상을 표현하려고 힘쓴 그의 산문은 압축된 잠언 풍의 표현이 돋보인다.〈에세이집 Essays〉(1841~ 44)〈대표적 인물 Representative Men〉(1850)〈영국인의 특성 English Traits〉(1856) 등은 그의 신념의 시적인 해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정시는 다듬어지지 않았으면서도 그 안에 충실한 사상・감정을 담고 있어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파 시'처럼 시적 긴장을 자아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에머슨의 가까운 이웃이자 사상적인 동지였으나, 에머슨보다 더 현실적이고 또한 흙내음을 직접 느끼게 하는 자연관찰 가였다. 그리고 유머도 에머슨보다 풍부해서 역설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또한 박식한 독서가였으며 유럽의 고전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전에도 정통했다.〈콩코드 강과 메리매크 강에서의 한 주간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1849)이나〈월든 호수 Walden〉(1854)에는 그의 이러한 특성이 드러나 있다.〈월든 호수〉에서는 검소한 생활이야말로 생명의 진수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믿고, 깊은 숲 속의 월든 호수의 통나무집에서 지낸 경험과 명상의 기록이다.〈시민 불복종 Civil Disobedience〉(1849)은 무정부주의적인 정치관을 표명한 평론으로 미국적 개인주의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사람 외에도 초절주의자로서 브론슨 올콧, 조지 리플리, 오레스티스 브라운슨, 마거릿 풀러 등이 있다. 풀러는 초절주의 운동의 기관지인〈다이얼 Dial〉지(1840~44)를 편집하기도 했고, 저서〈19세기의 여성 Woman in the Nineteenth Century〉(1845)은 여권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뉴잉글랜드의 개혁자와 역사가

사회적 변화를 요망하는 세계적인 움직임은 1840년대 후반에 정점에 달했으며 뉴잉글랜드에서는 개혁의 기운이 높아갔고, 고고한 지식인과 초절주의자들까지도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리버레이터 The Liberator〉(1831~65)라는 부수는 적지만 영향력이 큰 신문을 통해 노예제도를 공격했다. 이 신문의 가장 중요한 기고가이며 이 운동의 지도적인 문인은 존 그린리프 휘티어이다. 노예제 폐지를 호소한 그의 시는 〈노예제 폐지문제의 진전중에 씌어진 시 Poems Written During the Progress of the Abolition Question ……〉 (1837)〈자유의 목소리 Voices of Freedom〉 (1846) 등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운동의 뛰어난 소설가로서 가장 폭넓은 호응을 얻은 것은 해리엇 비처 스토였다.〈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Uncle Tom's Cabin〉(1852)은 그 당시의 유머와 감상소설을 한데 합쳐 노예의 곤경을 극적으로 표현한 소설이다.

이 시기에 뉴잉글랜드 문학의 전성기에 공헌한 또 다른 작가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역사가들로서 외국에서 배운 학자적인 방법과 극적인 서술형식을 갖추었다. 조지 뱅크로프트는 중량감에 넘치는〈미국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12권, 완성 1882)를 썼고, 존 로스롭 모틀리는 네덜란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왕국의 역사를 매력적인 필치로 펴냈다(9권, 1856~74). 그러나 이 그룹의 대표적인 작가는 미국의 변경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각축을 생생히 기술하고 자신의 서부여행을 기록한〈오레곤으로 가는 길 The Oregon Trail〉(1849)을 쓴 프랜시스 파크먼이다.

호손, 멜빌, 휘트먼

이 시대의 뉴잉글랜드 소설가 가운데 제1인자라고 할 수 있는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이나 로맨스에서도 역사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예컨대 그의 걸작〈주홍 글씨 The Scarlet Letter〉(1850)의 무대는 식민지시대이며,〈일곱 박공의 집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1851)은 과거와 현재를 다루고 있다.〈대리석 목양신(牧羊神) The Marble Faun〉(1860) 같은 작품은 먼 유럽을 무대로 삼고 있다. 이들 작품은 때로는 일상적인 현실에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깊은 심리적인 통찰을 보여주며 복잡한 윤리 문제를 파헤치고 있다.

또 한 사람의 대작가는 허먼 멜빌이다.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바다 생활에 뛰어든 그에게는 포경선이 '예일대학교이며 하버드대학교'였다. 초기에 쓴 작품은 선원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한〈타이피족 Typee〉(1846)〈오무 Omoo〉(1847)이었으며, 수년 후에 쓴〈레드번 Redburn〉(1849)〈화이트 재킷 White Jacket〉(1850) 등도 이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1846~51년에 걸쳐 철학과 고전, 호손의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작품을 탐독한 결과 새로운 문학적 관심과 의욕이 생겨났다.〈마디 Mardi〉(1849)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그 시대의 사상을 비평한 우화형식으로 씌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관심의 정점을 이룬 것이〈백경 Moby Dick:or, The Whale〉(1851)이다. 이것은 지극히 복잡하면서도 훌륭하게 통합을 이룬 상징성에 넘치는 작품이다. 단편소설 중 걸작으로 꼽히는〈베니토 세리노 Benito Cereno〉, 심리소설〈피에르 Pierre〉(1852), 중편〈빌리 버드 Billy Budd〉(집필 1890?)에서도〈백경〉을 쓴 멜빌의 천재적 요소가 드러난다.

맨해튼의 열렬한 찬미자인 월트 휘트먼은 삶의 어두운 면에 사로잡힌 멜빌과는 달리 위대한 낙천가였으며 보통 사람의 가능성과 잭슨의 민주주의를 신봉했다. 시인을 예언자로 보는 낭만주의적 관념과 에머슨의 초절철학에 고무되어 휘트먼은 1855년에〈풀잎 Leaves of Grass〉 초판을 간행했다. 이 시집은 운문 자서전으로서 미국에서 개인주의가 고양되는 시기에 보통시의 사상과 신념 및 감정을 노래했다. 다만 자유시의 형식을 취해 용어나 리듬이 당시의 시와는 달랐기 때문에 많은 독자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시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1960년대에는 일종의 부흥현상까지 나타났다.

남북전쟁에서 1914년까지

남북전쟁은 새로운 생활양식으로의 이행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 후 산업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고, 공장이 늘어나고 도시가 팽창해진 반면 농업의 중요성은 쇠퇴해갔다. 변경은 점점 서쪽으로 후퇴하다 19세기말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근대 미국의 출현은 자연히 문학에서의 중요한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유머 작가들

오랫동안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모아온 유머 작품에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아티머스 워드, 페트롤리엄 V. 내즈비, 빌 아프(1826~1903), 조시 빌링스, 빌 나이 등은 독자의 인기에 편승하여 지금까지의 지역적 특색을 버리고 개성이 약화된 유머 작가로 돌아섰다. 유머의 성질도 인물묘사에서 문법과 철자가 엉망이고 속어 투성이인 우스꽝스러운 어법으로 옮겨갔다.

소설과 지방색 작가

이 시기부터 소설이 중심적인 장르가 되었다. 먼저 인기를 얻은 것은 지방색 작가로 불린 소설가들로서 새로운 유머 작가들이 포기한 지역적 특성을 그려내는 일을 떠맡고 나섰다. 브렛 하트는 이 같은 지방색 소설의 창시자로서 가장 뛰어난 작가였다. 이 장르에 속하는 것으로는 뉴잉글랜드를 그린 해리엇 비처 스토의〈그리운 마을 사람들 Oldtown Folks〉(1869)・〈샘 로슨의 그리운 마을 난로가 이야기 Sam Lawson's Oldtown Fireside Stories〉(1871)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광산촌 생활의 해학적이며 감상적인 이야기를 그린 브렛 하트의〈로링 캠프의 행운 외(外) Luck of Roaring Camp, and Other Sketches〉(1870), 인디아나 주의 초기 개척지를 다룬 에드워드 이글스턴의 장편〈인디애나의 교사 Hoosier Schoolmaster〉(1871)를 들 수 있다. 20세기로 들어와서는 위의 3명의 작가가 세운 형식을 따른 단편소설과 몇 편의 장편소설이 나왔다. 그 대표적인 것에는 조지 W. 케이블에 의한 루이지애나 주의 크리올(프랑스계 이민), 토머스 넬슨 페이지에 의한 버지니아의 흑인, M. N. 머프리에 의한 테네시의 산간 주민들, 새러 온 주엣이나 메리 E. W. 프리먼의 뉴잉글랜드의 과묵한 사람들의 묘사 등이 있다. 또 헨리 카일러 버너와 O. 헨리(본명 윌리엄 시드니 포터)에 의한 뉴욕 시 주민들의 이야기도 있다.

이들 작가는 여러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미국인 전체의 상호이해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의 단편소설은 대체로 사실성이 한정되었다. 그 이유는 작가들이 그들 시대를 묘사하는 대신에 과거를 회고하는 경향이 있었고 매력적이 아닌 것은 제쳐놓고 감상이나 유머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들 지방색 소설은 로맨스에 젖어 있기는 했지만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공감과 이해심을 가지고 그려낸 점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본명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에게는 유머 작가와 지방색 작가의 영향이 강하며, 남북전쟁 이전의 지방 유머 작가들로부터 배운 바도 있다. 초기작〈철부지의 해외여행기 The Innocents Abroad〉(1869)〈고난을 넘어서 Roughing It〉(1872)는 여행기이며 남북전쟁 후의 직업적 유머 작가들과의 결연이 뚜렷이 나타난다. 〈톰 소여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om Sawyer〉(1876)과 속편〈허클베리 핀의 모험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1884) 및〈미시시피 강의 생활 Life on the Mississippi〉(1883)은 그의 최고 걸작들로서 미시시피 강 연안의 생활을 발랄한 필치로 재생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에서도 곧잘 유머 작가들처럼 익살을 떨거나 벌레스크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그의 기지나 대화 및 인물창조의 재능은 빼어난 것이어서 미국의 대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하이오 태생인 윌리엄 딘 하우얼스는 사실주의 소설의 가장 효과적인 제창자였다. 그가 생각한 사실주의는 일상적인 생활의 양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고 비극적인 것보다는 희극적인 것을 선호했다.〈그들의 신혼여행 Their Wedding Journey〉(1872)〈현대인다운 이야기 A Modern Instance〉(1882)〈사일러스 래프햄의 출세 The Rise of Silas Lepham〉(1885) 등에는 그의 기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애니 킬번 Annie Kilburn〉(1888)〈새로운 운명의 모험 A Hazard of New Fortunes〉(1890) 등의 후기작에서는 평범한 인물의 생활을 다루면서 사회・정치・경제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자연주의자

19세기말에는 사실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주의를 따르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햄린 갈런드는 이 같은 움직임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농민의 비참한 현실과 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하우얼스보다 한결 솔직했다.〈발길 잦은 길 Main-Travelled Roads〉(1891)〈더처 집안의 장미 Rose of Dutcher's Coolly〉(1895)에서는 소설이 철학적 또는 사회적 신조의 표현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 작품과〈무너지는 우상 Crumbling Idols〉(1894)이라는 신소설을 위한 비평적 선언서는 자연주의 운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같은 무렵에 프랑스의 자연주의자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예컨대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초기의 사실주의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대담한 것으로 보였을 주제를 들고 나왔다. 인간의 행동이 '화학적인 강제력'에 좌우된다고 생각한 드라이저는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인물, 또는 강력하고 무자비한 상대에게 패배 당하는 인물을 묘사했다. 그의 작품에는〈시스터 캐리 Sister Carrie〉(1900)〈제니 거하트 Jennie Gerhardt〉(1911)〈자본가 The Financier〉(3부작, 1912)〈거인 The Titan〉(1914)〈미국의 비극 An American Tragedy〉(1925)이 있다. 드라이저는 문체나 상징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스티븐 크레인과 프랭크 노리스는 문체에 관심을 쏟고 세부의 상징적 효과를 살리려고 했다. 크레인의 중편〈거리의 여자 매기 Maggie:A Girl of the Streets〉(1893)〈빨간 무공훈장 The Red Badge of Courage〉(1895)과 몇몇 단편에서는 환경에 압도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인상주의적 색채가 드러난다. 노리스는 사실적인 문체로〈맥티그 McTeague〉(1899)〈문어 The Octopus〉(1901)〈밀 판매장 The Pit〉(1903) 등에서 크레인처럼 인생에 대한 불빛을 밝히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요절했지만 그들의 문학적 실험은 20세기 소설의 선구로서 의의가 크다.

헨리 제임스

뉴욕 태생으로 영국에서 거주한 헨리 제임스에 이르러 소설은 또 다른 방향을 취했다. 소설이 현실을 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사실주의자나 자연주의자와 같았지만 제임스는 소설 가운데 그려진 현실은 2번의 번역을 거친 것이라고 보았다. 첫째는 소설가의 독자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소설가가 그것을 그려감으로써 이중의 굴절을 겪는다는 것이다.〈소설의 기법 The Art of Fiction〉(1884)과 그의 전집 판에 붙인 뛰어난 서문은 소설 기술의 논의를 위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단편작가로서도 뛰어났지만 제임스의 의의는 역시 그의 이론을 구체화한 장편소설에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미국인 The American〉(1877)〈어느 부인의 초상 The Portrait of a Lady〉(1881)〈포인튼가의 수장품 The Spoils of Poynton〉(1897)〈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것 What Maisie knew〉(1897)〈비둘기 날개 The Wings of the Dove〉(1902)〈사절들 The Ambassadors〉(1903)〈황금 주발 The Golden Bowl〉(1904)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초기 작품은 미국인과 유럽인, 또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다룬 국제적인 소설이다. 그 후 제임스의 관심은 차츰 작중인물의 심리적 추이와 그들의 한정된 통찰과 인식 및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되었다.

도금시대의 비판자

남북전쟁에서 1914년에 걸쳐 꽃피워진 여러 유형의 문학 가운데 사회에 대한 항의 문학이 있다. 대기업의 세력증대와 정부의 부패를 공격하는 소설이 잇달아 나왔으며 유토피아 소설도 나왔다. 헨리 애덤스의 소설 민주주의 Democracy〉(1880)는 정치적 부패와 무능을 다루었다. 에드워드 벨라미의〈돌이켜보면 Looking Backward〉(1888)은 자본주의에 대한 고발이며 집산주의 적인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하우얼스의〈알트루리아에서 온 나그네 Traveler from Altruria〉(1894)는 정부가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하는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제창한다. 1906년에는 업튼 싱클레어의〈정글 Jungle〉이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정치・경제를 비판하고 그 구제방안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한 수많은 저작 가운데 첫 작품이다.

한편 시 장르에서는 에드윈 마컴이 1899년〈괭이를 든 사나이 Man with the Hoe〉에서 노동 착취에 항의함으로써 곧 전국적인 관심을 일으켰다. 그 다음해 윌리엄 본 무디는〈망설임의 시대의 송시 Ode in Time of Hesitation〉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했다.〈필리핀에서 쓰러진 병사에게 on a Soldier Fallen in the Philippines〉(1901)는 같은 주제를 한결 효과적으로 발전시켰다. 저널리즘 잡지의 융성과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폭로작가'라고 명명한 저널리스트들이 미국의 비판자로서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아이다 M. 타벨의〈스탠다드석유회사 역사 History of the Standard Oil Company〉(1904)와 링컨 스테펀스의〈도시의 치욕 Shame of the Cities〉(1904)은 저널리즘을 통해 사회를 계몽시키려고 한 전형적인 저작이다.

헨리 애덤스

미국의 근대생활 전반에 대해 매우 통렬하면서도 품위를 갖추어 공격한 것은 헨리 애덤스의 자서전이다. 그는〈미합중국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1889~91)〈몽 생 미셸과 사르트르〉(1904)를 쓴 위대한 교사이며 역사가로 자서전 헨리 애덤스의 교육 The Education of Henry Adams〉에서는 질서와 신앙을 추구한 그의 탐구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이 시대의 시

세기의 전환기는 미국시의 빈곤기였으나 주목할 만한 시인이 2명 나타났다. 그 한 사람은 시드니 러니어(1842~81)로서〈옥수수 Corn〉(1875)〈교향곡 The Symphony〉(1875)〈글린의 늪 The Marshes of Glynn〉(1878)에서 음악적 리듬과 교향곡 주제의 전개수법을 활용한 재능 있는 음악가 시인이었다. 또 한 사람은 에밀리 디킨슨이다. 수줍고 장난기 있고 괴짜인 그녀는 생전에 작품을 1편도 발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최초의 시집이 출판된 것은 그가 죽은 지 4년 뒤인 1890년이었다. 그러나 각운(脚韻)을 의식적으로 깨뜨린 점, 짧은 시절(詩節) 속에 숨은 의미를 압축해서 잡아넣으려는 경향 등의 독특한 수법은 이후의 시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 1914~1945년

시기에 이루어진 문학적 형식은 매우 다양했으며, 희곡・시・소설 등에서 근본적인 수법의 변혁을 시도하려는 작가들이 많았다.

연극에 나타난 실험정신

19세기에는 연극이 주요한 문학 장르는 아니었으나 종전의 상업무대에 반기를 든 새 연극만큼 실험적인 문학형식도 없었다. 20세기 초에 유럽을 찾은 미국인들은 유럽 연극이 활발한 데 놀랐다. 그들은 귀국하자마자 상업적인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소극장운동에 의한 연극실험에 착수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연출가・배우・극작가 등이 생겨났고, 소극장 그룹 가운데 몇 개는 상업극단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예컨대 1915년에 창설된 ' 워싱턴 스퀘어 극단'은 1919년에 시어터 길드가 되었다. 거기서부터 실험적이고 진지하고 그러면서 원숙한 희곡이 생겨났다.

유진 오닐은 이 시기에 나타난 미국 최대의 극작가인데 이상과 같은 연극운동이 낳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희곡은 연극적 실험성에 있어서도 두드러지게 그 폭이 넓다.〈지평선 너머 Beyond the Horizon〉(1920)〈애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1921)〈느릅나무 그늘 밑의 욕망 Desire Under the Elms〉(1924)〈얼음장수 오다 The Iceman Cometh〉(1946) 등은 자연주의적인 작품이고〈황제 존스 The Emperor Jones〉(1920)〈털보원숭이 The Hairy Ape〉(1922)에서는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했다. 또한〈이상한 막간극 Strange Interlude〉(1928)에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작에 사용했으며,〈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Mourning Becomes Electra〉(1931)는 심리분석이 돋보인다. 마크 코널리는 푸른 목장 The Green Pastures〉(1930)에서 성서 풍의 흑인 민속극을 썼으며 감동적인 환상을 살렸다. 엘머 라이스는 표현주의 적인 작품〈계산기 The Adding Machine〉(1923)와 자연주의적 작품〈거리의 정경 Street Scene〉(1929)을 썼다. 맥스웰 앤더슨은 사실주의자로 출발해 〈여왕 엘리자베스 Elizabeth the Queen〉(1930)〈원터셋 Winterset〉(1935) 같은 시적 희곡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풍자적인 뮤지컬 코미디〈니커보커의 휴일 Knickerbocker Holiday〉(1938)을 썼다. 로버트 셔우드는〈빈에서의 재회 Reunion in Vienna〉(1931) 같은 희극과 밤은 오지 않으리 There Shall Be No Night〉(1940)라는 비극 등 뛰어난 작품을 썼다. 클리퍼드 오데츠는 노동조합주의를 옹호한 레프티를 기다리며 Waiting for Lefty〉(1935)에서 무대와 관객석을 활용했으며, 〈깨어나 노래하라 Awake and Sing〉(1935)를 썼다. 자연주의 풍의 손턴 와일더는〈우리 마을 Our Town〉(1938)에서 양식화된 무대와 시적 대화를 살렸으며〈위기일발 The Skin of Our Teeth〉(1942)에서는 환상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대체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시법을 따르면서도 일반 독자와 비평가에 의해서 널리 환영받은 뉴잉글랜드 시인이 2명 있다. 그중 한 사람인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은 1896년에 첫 시집을 냈는데 전통적인 소네트(14행시) 민요풍 시와 무운시(無韻詩)를 썼다. 1920년대에〈시집 Collected Poems〉(1921)〈2번 죽은 사나이 The Man Who Died Twice〉(1925)〈트리스트럼 Tristram〉(1927)으로 3번이나 퓰리처상을 받았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정형시와 무운시를 썼다. 첫 시집〈소년의 의지 A Boy's Will〉(1913)에 이어서〈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1914)〈뉴햄프셔 New Hampshire〉(1923)〈아득한 산맥 A Further Range〉(1936)〈이성의 가면극 A Masque of Reason〉(1945)이 간행되었다. 이 두 시인은 인생의 비극적인 양상에 주목했고 안이한 해결책에는 회의적이었는데, 이러한 태도와 감정이 당대의 기분과 잘 어울렸던 까닭에 널리 애독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근대극이 소극장에서 시작되었듯이 미국의 근대시도 소잡지(리틀 매거진) 가운데서 생겨났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해리엇 먼로가 시카고에서 창간한 포이트리 Poetry:A Magazine of Verse〉이었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는 곧 세 시인의 근거지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베이첼 린지는〈윌리엄 부스 장군 천국에 가다 외(外) General William Booth Enters into Heaven, and Other Poems〉(1913)〈콩고 강 외(外) The Congo, and Other Poems〉(1914) 등에서 전설적인 소재와 미국적 웅변술을 살려서 불규칙적인 송시 형식을 만들었다. 칼 샌드버그는〈시카고 시집 Chicago Poems〉(1916)〈민중이여, 그렇다 The People, Yes〉(1936)와 같은 시집에서 대평원과 도시의 민중생활을 자유시형으로 힘차게 노래했다. 에드거 리 매스터스의〈스푼리버 선집 Spoon River Anthology〉(1915)은 큰 인기를 얻었는데, 시골에 사는 남녀의 독백을 자유시형으로 엮어놓은 작품으로서 그 대다수는 좌절된 인생을 쓸쓸히 회상하고 있다.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와 새라 티즈데일은 전통적인 소네트나 짧은 서정시를 썼지만, 다같이 낡은 기준에서 볼 때 특히 여성시인으로서 파격적인 솔직성을 발휘했다. 스티븐 빈센트 베네는〈존 브라운의 유해 John Brown's Body〉(1928)에서 감동적인 운문소설을 썼다. 로빈슨 제퍼스는 거친 이미지와 무운시를 사용했는데 이 시기의 시인 가운데 가장 비장한 태도를 표현한 시인이었다. 또 3명의 뛰어난 흑인시인 제임스 웰던 존슨, 랭스턴 휴스, 카운티 컬런은 다같이 새로운 주제, 특히 흑인문제를 전통 시 형식으로 다루었다. 콘래드 애이큰은 교향곡 형식의 시적 응용과 '의식의 흐름'기법을 적절히 섞었으며, 메리언 무어는 색다른 자유시형을 고안하여 절묘하게 사용했다. e. e. 커밍스는 파격적인 구두법과 주로 소문자 인쇄기법을 사용해 감상시・풍자시를 썼다.

영시와 산문에서 모더니스트적 혁신을 불러일으킨 에즈라 파운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유럽에서 살았다. 그러나 시인으로 서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의 후원자로서 20세기의 미국 시에 미친 그의 영향은 대단하다. 장시〈칸토스 The Cantos〉(1925~59)는 지금까지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대작이다. 미국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은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와 윌리스 스티븐스이다. 윌리엄스는 처음에는 이미지즘의 실험 시를 썼으며 미국의 정경을 활용해 때로는 매우 객관적이고 지극히 자전적인 목소리로 생활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노래했다. 5부작〈패터슨 Paterson〉은 미국의 '문화적 서사시'로서 그의 대표작이다. 스티븐스는〈하르모니엄 Harmonium〉(1923)에서 프랑스 상징파 시인의 영향을 보이면서 섬세한 심미적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때로 철학적 추상 속에 몰두하면서도 극명한 시각적 언어를 구사하고 현실을 재구성하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두 시인이 미친 영향력은 사후에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엘리엇은 1917년〈프루프록과 다른 관찰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 1922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황무지 The Waste Land〉를 발표했다. 시인이며 비평가로서 제1・2차 세계대전 기간에 대단한 영향을 발휘했다. 그의 최대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는〈4개의 4중주 Four Quartets〉(1943)에서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이미지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와 인류의 과거 및 인간 역사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엘리엇과 몇몇 시인은 영국의 17세기 형이상파 시인, 특히 존 던의 영향을 받았다. 엘리엇의 영향은 아치볼드 맥리시의 작품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의 초기 시는 〈황무지〉를 연상케 하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엘리엇의 종교적 태도와는 다른 사회진보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를 표명하고 있다. 존 크로 랜섬과 앨런 테이트 같은 남부 시인에게도 엘리엇의 영향과 형이상파 시인의 영향이 보인다. 하트 크레인도 기법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소재와 내용은 독자적이다. 그밖에 개성적인 방법과 사상을 지닌 형이상파 시인으로는 루이스 보갠, 뮤리얼 류카이저, 델모어 시워츠, 칼 셔피로가 있다.

소설

시의 성장을 촉진한 소잡지는 미국소설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소잡지는 인습적인 형식을 깨뜨린 단편소설과 기성작가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을 실었고 전위적인 소설의 의의를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가장 강력한 소잡지는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인 H. L. 멩켄이 편집한〈스마트 세트 The Smart Set〉(1914~23)〈아메리칸 머큐리 American Mercury〉(1924~33, 공동편집) 등이었다. 멩켄은 새로운 수법의 단편을 실었고, 미국의 기성제도와 신념을 공격했다. 멩켄이 후원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 제임스 브랜치 캐벌(1879~1958)이다. 그는〈저겐 Jurgen〉(1919)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정통적인 신념과 제도를 공격한 소설이다. 시골마을 생활의 협소함과 좌절감을 그린 작가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셔우드 앤더슨인데, 단편집〈오하이오 주 와인즈버그 Winesburg, Ohio〉(1919)〈달걀의 승리 Triumph of the Egg〉(1921)에서 억압과 공포증에 시달리는 시골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1920년에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낙원의 이쪽 This Side of Paradise〉과 싱클레어 루이스의 〈중심가 Main Street〉가 성공하면서 새로운 경향의 소설들이 되었다. 작가들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곧 현대생활의 솔직한 묘사를 지향했다. 그리고 시대의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1920년대에는 기존의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을, 1930년대에는 경제 및 정치제도에 대한 항의를 표현했다.

사회비판문학

피츠제럴드의〈낙원의 이쪽〉(1920)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젊은이들의 환멸과 도덕적 혼란을 그리고 있다. 또한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1925)도 같은 주제를 한결 성숙한 태도로 추구했다. 역시 사회를 비판한 루이스는〈중심가〉(1920)〈배빗 Babbitt〉(1922)〈애로스미스 Arrowsmith〉(1925)〈킹스블러드가의 혈통 Kingsblood Royal〉(1947) 등에서 편협한 지방근성, 평범한 사업가, 물질주의적인 과학자, 인종적 편견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제임스 T. 패럴의 3부작〈스터즈 로니건 Studs Lonigan〉(1932~35)도 면밀한 세부묘사가 돋보인다. 리처드 라이트의〈톰 아저씨의 후예들 Uncle Tom's Children〉(1938)〈미국의 아들 Native Son〉(1940)은 흑인의 곤경에 대한 항의이다. 사회적 저항소설가로서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존 도스 패서스이다. 그는 먼저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반전소설 〈3명의 병사 Three Soldiers〉(1921)에서 출발해 3부작〈유에스에이 U.S.A.〉에서 좌익적인 관점에서 현대의 사회경제체제를 폭넓게 고발했다. 내서니얼 웨스트의〈미스 론리하츠 Miss Lonelyhearts〉(1933)〈메뚜기의 철 The Day of the Locust〉(1939)에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세계에 대한 통렬한 비전과 블랙코미디 풍의 문체가 돋보인다.

헤밍웨이・포크너・ 스타인벡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초기 단편소설과 장편소설〈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1926)・〈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1929) 등에는 이른바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의 전후시대에 대한 환멸이 넘쳐 있다. 그는 그 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집단적 행동의 가능성에 신뢰를 보이게 되었고,〈가진 자와 없는 자 To Have and Have Not〉(1937)〈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0)・〈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1952) 등에서도 이 같은 새로운 신념이 엿보인다. 윌리엄 포크너는 미시시피 주의 요크나파토파 군(郡)이라는 신화적인 지방을 무대로 하여 시점(視點)의 이동과 '의식의 흐름' 기법을 대담하게 이용한 복잡한 구성의 장편소설을 썼다.〈음향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1929)〈죽음의 자리에 누우면서 As I Lay Dying〉(1930)・〈8월의 햇빛 Light in August〉(1932)〈촌마을 The Hamlet〉(1940) 등은 전반적으로 혹독한 인간 조건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무덤의 침입자 Intruder in the Dust〉(1948)〈약탈자 The Reivers〉(1962)에는 한결 낙관적인 신념이 나타나 있다. 존 스타인벡의 첫 작품〈황금잔 Cup of Gold〉(1929)은 역사소설이며 반항적인 1920년대의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개인을 찬양한 것이다. 그 후 발표한〈승산 없는 싸움 In Dubious Battle〉(1936)〈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39)에는 집단적 행동에 대한 신념이 깔려 있다.

서정적 소설가

현대소설의 흥미로운 전개의 하나는 시, 곧 서정성과 상징적인 의미를 심화・확대해 가는 경향이다. 헤밍웨이・스타인벡・포크너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서정성이 돋보이는 것은 윌라 캐더의〈나의 안토니아 My Antonia〉(1918)〈대주교에게 죽음이 찾아오다 Death Comes for the Archbishop〉(1927)이다. 캐서린 앤 포터는 형이상파 시인 풍의 문체를 즐겨 썼다.〈꽃피는 박태기나무 Flowering Judas〉(1930)〈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Pale Horse, Pale Rider〉(1939) 등에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복잡하고 미묘한 상징성을 보여준다. 또 한 사람의 주요한 서정소설가 토머스 울프는〈천사여 고향을 보라 Look Homeward, Angel〉(1929)〈시간과 강에 관하여 Of Time and the River〉(1935)〈거미줄과 바위 The Web and the Rock〉(1939)〈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You Can't Go Home Again〉(1940)라는 대하소설에서 그 자신의 생활을 서정적으로 기록했다.

비평

20세기 전반은 문학비평이 두드러지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어빙 배빗을 중심으로 한 신인문주의(New Humanism) 비평가들과 우상파괴에 앞장선 H. L. 멩켄을 비롯한 저널리스트 비평가들 사이의 문학논쟁으로 주목을 끈다. 신인문주의 비평가들은 전통적 문학관을 옹호하고 현대소설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비판했으며, 저널리스트 비평가들은 꾸밈없는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결국 자연주의가 신장되었고, 문학은 해묵은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회 변화가 두드러진 이 시기에 문학을 사회와 정치와의 관련에서 고려하려는 비평가들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밴 와익 브룩스와 버넌 루이스 패링턴은 사회의 반영으로서의 문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케니스 버크와 에드먼드 윌슨은 심미적 관심과 사회적 관심을 관련시키면서 문학작품을 해석했다. 한편 지나친 이데올로기적 비평에 반발하여 문학작품 그 자체의 분석과 감상에 치중하는 순수하고 심미적인 분석비평, 이른바 신비평이 대두되었다. 이 그룹의 중심은 남부 출신의 존 크로 랜섬, 앨런 테이트 및 클리언스 브룩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소설・시・희곡의 모든 분야에서 포크너・헤밍웨이・스타인벡 등 전 시대의 대가들이 계속해서 중요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국문학에서 두드러진 것은 문체・기질 등에 드러난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두 그룹의 작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문화적 충격, 특히 기술적 공포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노먼 메일러는〈벗은 자와 죽은 자 The Naked and the Dead〉(1948), 어윈 쇼는 〈젊은 사자들 The Young Lions〉(1948), 제임스 존스는〈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1951)에서 자연주의적 수법을 사용해 전쟁의 비극을 기록했다. 이들보다 젊은 세대인 조지프 헬러는〈캐치 22 Catch-22〉(1961)에서, 커트 보니것 2세는〈제5도살장 Slaughterhouse Five〉(1969)에서 사실적・자연주의적 수법 대신 초현실적 블랙 유머와 환상을 사용해 전쟁의 비인간성과 군대의 관료성 등을 풍자했다. 특히 원자탄의 참화는 미국작가들에게 블랙 유머와 부조리 적 환상을 추구하게 했다. 사회현실을 묘사하는 대신 전 시대의 소설을 모방하는 지극히 자의식적 소설인 '메타픽션'도 나타났다. 러시아 태생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롤리타 Lolita〉(1955)〈프닌 Pnin〉(1957)〈창백한 불꽃 Pale Fire〉(1962)〈아다 Ada:Ardor:A Family Chronicle〉(1969)와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스 루이스 보르헤스의〈미로 Labyrinths〉(1962)는 이러한 새 메타픽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보코프와 보르헤스의 제자임을 밝힌 존 바스는 자신의 작품을 "'저자'의 역할을 모방하는 저자에 의해서 씌어진 소설의 형식을 모방하는 소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스는〈연초 도매상 The Sot-Weed Factor〉(1960)〈염소소년 자일스 Giles Goat-Boy〉(1966)〈서간집 Letters〉(1979)에서, 도널드 바셀미는 백설공주 Snow White〉(1967)에서 역사소설, 서간체 소설, 동화 등 전통적인 문학형식을 풍자적으로 모방한 패러디를 썼다.

부조리 적 우화의 대표적 작가인 토머스 핀천은 〈브이 V〉(1963)〈제49호 품목의 경매 The Crying of Lot 49〉(1966)〈중력의 무지개 Gravity's Rainbow〉(1973)에서 엔트로피, 즉 물질적・도덕적 에너지의 붕괴의 불가피성이라는 가정을 깔아놓았다. 윌리엄 버러스는〈벌거벗은 점심 Naked Lunch〉(1959)에서 마약중독자의 의식을 통해 추악한 현대의 정경을 묘사했다. 바스・바셀미・핀천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전통적 소설관을 배격한 데 반해 사회적 사실주의를 고집하는 작가들도 많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솔 벨로는〈희생자 The Victim〉(1947)〈오기 마치의 모험 The Adventures of Augie March〉(1953)〈허조그 Herzog〉(1964)〈샘러 씨의 행성 Mr. Sammler's Planet〉(1970) 등에서 현대의 악몽 같은 현실을 의식하면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 없이 인간다움의 필요를 강조한다. 유대교와 미국의 초월주의를 비롯해 수많은 사상에 바탕을 둔 벨로의 신비적 비전은 매우 긍정적이다. 버나드 맬러머드, 필립 로스, 아이작 바세비스 싱어 같은 유대계 작가들도 유머와 관용으로 인간의 조건을 다루었다. 맬러머드의 희극적 재능은〈마술의 통 The Magic Barrel〉(1958)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로스의 최대업적은 어느 유대계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3부작〈유령작가 The Ghost Writer〉(1979)〈풀려난 주커만 Zuckerman Unbound〉(1981)〈해부학 시간 The Anatomy Lesson〉(1983)이다. 폴란드 태생인 싱어는 원래 이디시어로 쓴 단편집으로 197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J. D. 샐린저는〈호밀 밭의 파수꾼 The Catcher in the Rye〉(1951)〈프래니와 주이 Franny and Zooey〉(1961)에서, 존 업다이크는〈달려라 토끼 Rabbit, Run〉(1960)〈부부 Couples〉(1968)〈돌아온 토끼 Rabbit Redux〉(1971)에서 미국 중산층의 성적・도덕적 혼란을 그렸다. 존 치버는 단편과〈웝숏가 연대기 The Wapshot Chronicle〉(1957)〈웝숏가 추문 The Wapshot Scandal〉(1964)에서 기억에 남는 많은 기인들을 창조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황금 팔의 사나이 The Man with the Golden Arm〉(1949)의 넬슨 올그런과〈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The Last Exit to Brooklyn〉(1964)의 휴버트 셀비는 하층계급의 도시생활을 솔직하게 그렸다. 포크너에 이어 남부소설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킨 작가로는 남부의 고딕 소설에 새 방향을 제시한 플래너리 오코너와 유도라 웰티, 카슨 매컬러스(1917~67) 등 세 여성작가를 들 수 있다. 오코너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종교적 관심과 놀라운 희극적 재능을 훌륭히 결합했다. 웰티는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였다.〈냉혈 In Cold Blood〉(1966)을 쓴 트루먼 커포티는 다큐멘터리 사실주의에 뛰어났다. 윌리엄 스타이런은〈냇 터너의 고백 The Confessions of Nat Turner〉(1967)〈소피의 선택 Sophie's Choice〉(1979)에서 남북전쟁 이전의 흑인폭동,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과 같은 인류역사의 어두운 면을 조명했다. 워커 퍼시는〈영화 팬 The Moviegoer〉(1961)〈마지막 신사 The Last Gentleman〉(1966)에서 남부 소설의 중요한 목소리를 확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흑인작가들은 리처드 라이트 방식의 사회적 항의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제임스 볼드윈은〈산에 올라가서 말하라 Go Tell It on the Mountain〉(1953)〈또 하나의 나라 Another Country〉(1962)에서 흑인사회의 다양성을 묘사하고, 수필집〈다음에는 불을 The Fire Next Time〉(1963)을 통해서 민권운동을 자극하기도 했다. 랠프 엘리슨은〈보이지 않는 인간 Invisible Man〉(1952)에서 흑인의 역사와 서구 신화를 결합시키고 있다. 최근에는〈가장 푸른 눈 The Bluest Eye〉(1970)〈술라 Sula〉(1973)〈솔로몬의 노래 Song of Solomon〉(1977)를 쓴 토니 모리슨과〈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1983)의 작자 앨리스 워커의 두 흑인 여성작가가 흑인의 역사, 아프리카와 유럽의 신화, 유럽의 동화, 흑인의 민속 문화 등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독창적 작품과 흑인 페미니스트 소설을 발표했다.

전후의 미국소설을 개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현실 자체는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작가들은 새롭고 박진감 넘치는 소설 형식을 발견하거나 창출해야 할 압력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가장 매력적인 2명의 현대작가는 노먼 메일러와 조이스 캐럴 오츠로서, 이들은 새 방향을 추구하는 대표적 작가이다. 메일러는〈밤의 군대들 The Armies of the Night〉(1968)〈사형집행인의 노래 The Executioner's Song〉(1980)를 발표하면서 사회적 저항소설에서 '비소설의 소설', '역사로서의 소설', '진짜 삶을 다룬 소설'로 돌아섰고, 오츠는〈지상적 환희의 정원 A Garden of Earthly Delights〉(1967)・〈그들 them〉(1969) 등의 자연주의 전통에서 출발해〈이상한 나라 Wonderland〉(1971)〈벨플뢰르 Bellefleur〉(1980)에서 초현실주의와 고딕풍 환상 등을 실험하면서 새로운 소설형식을 넓혀가고 있다.



소설에서와 같이 전후의 시도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시인들은 전쟁 전의 경향을 버리고 극적 또는 변증법적 구성을 추구했다. 또한 경구 풍의 기지가 돋보이는 시를 썼으며, 시법의 엄격성에 이끌려 각운을 사용하기도 했다. 로버트 로웰, 시어도어 레트키, 로버트 펜 워렌, 존 베리먼, 랜덜 재럴, 리처드 윌버, W. D. 스노드그레스 등이 새 시단을 대표한다. 이들 중 몇몇 시인은 정신질환, 성, 이혼, 알코올 중독 등의 자전적 요소를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일상생활에 기초를 둔 명석한 구어적 리듬을 살린 시를 썼는데 그의 영향은 '블랙 마운틴' 파로 알려진 시인들에게 뚜렷이 나타나 있다. 찰스 올슨과 로버트 크릴리가 대표적인 블랙 마운틴 시인이다. 태평양연안에서는 1950년대에 '비트'파 시인이 등장한다. 이 파는 짧은 기간 주목을 끌었지만 앨런 긴즈버그와 로렌스 펄링게티는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 뉴욕 파 시인으로는 존 애시버리, 캐니스 코크, 프랭크 오해라 등이 있다. 1960년대 이후에 주목받은 여성시인들 가운데는 실비아 플래스, 에이드린 리치, 앤 섹스턴, 데니스 레버토브가 있으며 고백시, 페미니스트 시로 유명하다.

연극

전후 극단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테네시 윌리엄스와 아서 밀러이다. 윌리엄스는〈유리 동물원 The Glass Menagerie〉(194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1947) 등에서 파격적인 무대장치, 시적인 대사 등을 사용해 실험성을 높였다. 밀러도〈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1949)〈시련 The Crucible〉(1953) 등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실험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사회비판과 항의를 계속했다. 젊은 극작가로는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비평가에게 인정받은, 지식인 부부의 생활을 신랄하게 꼬집은〈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1962)〈동물원 이야기 The Zoo Story〉〈미국인의 꿈 The American Dream〉(1964)의 작가 에드워드 올비가 있다. 흑인 작가로는 로레인 핸즈버리와 이마무 아미리 배러카(르로이 존즈)를 들 수 있다. 최근의 주요 실험 작가는〈카우보이 Cowboys〉(1964)〈진짜 서부 True West〉(1980) 등을 쓴 샘 셰퍼드이다. 전후 연극의 중심은 브로드웨이에서 오프 브로드웨이로, 다시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로 옮겨갔다. 많은 전위극이 다락방, 교회, 카바레 등에서 상연되었고 즉흥・충격・부조리 기법이 실험적 연극의 특징이 되었지만, S. 베케트, E. 이오네스코, B. 브레히트 등 유럽 극작가들이 미친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비평

1950년대까지는 분석적이고 심미적인 신비평이 가장 유력했지만 한편에서는 프로이트 주의, 마르크스주의, 원형・신화 비평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아카데믹한 신비평과는 별도로 문학의 현장에 밀착한 저널리즘의 영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앨프레드 케이진, 어빙 하우가 대표적인데, 이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현실에 대한 발랄한 관심이며 순수한 문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나 역사에도 독자적인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심미성과 사회성을 종합해 균형 있는 감각의 비평의 모범을 보인 것은 에드먼드 윌슨과 라이오넬 트릴링이었다. 1970년대 이후의 중요한 비평운동은 구조주의・해체주의 비평과 페미니스트 비평이다. 구조주의・해체주의 비평은 프랑스의 자크 데리다와 롤랑 바르트의 영향 하에 언어학과 철학의 혁신에 입각한 추상적 비평이 시도되었으며, 문학보다 비평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에 반해 페미니스트 비평은 문학의 사회적, 심지어는 정치적 기능을 강조한다.




� 참고자료


* 아메리카 인디언Amerindian, Amerind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으로 에스키모와 알레우트 족은 예외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아시아의 몽골 인종에 속하는 수렵민으로서 빙하시대 말(약 2만~3만 5,000년 전) 베링 해협의 육교를 건너 북아메리카로 이주했으며, 불을 사용하고 개를 기르는 것이나 특수한 의식과 치료법 등의 문화적인 특징이 당시의 아시아 문화와 비슷했다. 구대륙의 다른 문화적인 특징들(예를 들면 목축, 특정 식물 경작, 바퀴와 쟁기의 이용)은 아메리카 대륙에 없었다.


* 북아메리카 인디언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서로 약간의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 북아메리카 서부, 그레이트플레인스 지역, 동부지역의 여러 고(古)인디언 수렵사회는 환경의 차이가 있었으나 생활은 비슷했다. 주요 식량원은 고기였으며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홍적세의 포유동물을 도살하는 데 이용했던 도살장 유적지에서 수렵사회 전통에 속한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가장 독특한 형태의 발굴물 가운데 하나는 뉴멕시코 클로비스 부근 도살장 유적지에서 처음 발굴한 세로 홈이 팬 클로비스의 화살촉으로서 대략 BC 900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작살 모양의 도구는 맘모스를 도살하는데 이용했다. 사막문화 부족들은 오리건에서 멕시코 북부지역, 태평양 연안에서 로키산맥 동쪽에 이르는 지금의 미국 서부지역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유랑생활을 하는 수렵채집으로서 동굴이나 바위를 은신처로 삼고 살았다. 씨앗을 가는 데 이용한 맷돌과 같은 유물을 통해 원시농업 기술의 발달 정도를 알 수 있다.

동부 아케익Archaic)기는 (BC 8000~1500년에 지속되었다. 그레이트플레인스와 그레이트베이슨 지역의 춥고 습한 기후가 덥고 메마른 기후로 바뀌었기 때문에 홍적세의 동물이 멸종되었다. 사회 유형은 수렵채집생활로 바뀌어 BC 6000년 무렵에는 일반적으로 해안과 강가에서 살게 되었다. 후기 아케익 기의 특징은 홈이 파인 돌도끼, 절구공이, 끌, 추 등과 같은 도구의 발달과, 서로 다른 지역의 부족들 사이에 교역제도가 발달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아케익 기(BC 8000~3000)에는 홈이 패이지 않은 플라노 화살촉을 써서 사냥했으며, 주요 사냥감은 들소였다. BC 3000~2000년(후기 플라노 시대)에 기후가 온화해짐으로써 일부 부족들은 목초지를 찾아가는 짐승들을 따라 서스캐처원과 앨버타로, 더 북쪽으로는 북극 툰드라 지대로 이주했다.

BC 2000년 무렵 미국 남서부의 여러 부족집단들은 옥수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원시농업이 인디언 문화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세기 이후였다. 오하이오 강과 일리노이 강 유역의 경우 옥수수 농사는 발전된 호프웰 문화의 경제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BC 200~AD 200). 잉여자원은 특권을 지닌 특정집단의 부로 이용되었다. 정교한 장례의식에 사용되기도 했다. 200~700년에 한랭기가 찾아오면서 농업발달이 위축되고 문화는 후퇴했다. 700~1200년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촌락 중심의 문화가 발달했다. 발전된 농업방식과 복잡한 종교의식이 특징이었다. 종교의식에는 전문적인 제조소에서 만드는 의식용품이 사용되었고 사제조직이 의식을 주관했다.

아나사지・모고욘・호호캄 등은 푸에블로 족 이전의 문화들로 700~1200년에 남서부지역 전체에 분포했다. 모고욘 문화의 농사기술(특히 작물에 물을 대기 위해 빗물과 시냇물을 이용한 것)은 아나사지 문화에 와서 더욱 개선되었다. 애리조나 남부지역 호호캄 문화는 관개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1100~1300년 건조기가 찾아옴으로써 문화발전이 멈추었으며 인구가 줄었다. 1000년 무렵 푸에블로 문화가 시작되었으며, 돌과 아도비 벽돌로 공동주택을 짓는 기술이 발달했다. 작물로는 섬유가 긴 목화와 여러 종류의 옥수수가 있었다.

고전 푸에블로 시기(Classic Pueblo period:1050~1300)는 건축기술과 도기제조 기술이 크게 발달한 것이 특징이었다. 벼랑에 지은 1~4층으로 된 큰 공동주택에는 20~1,000개의 방이 있었으며, 고유한 지역적 양식의 다채색 도기가 생산되었다. 1300~1700년은 퇴행 푸에블로 시기(Regressive Pueblo period)에 해당한다. 부족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한 동안에는 버려진 공동주택이 많았다. 근대 푸에블로 시기(Modern Pueblo period)는 1600년대 말 스페인 인들의 영구정착과 함께 시작되었다. 푸에블로 문화와 농사방법 가운데 일부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식민지시대 유럽 국가들이 시행한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공식적인 정책은 국가마다 달랐다. 스페인 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크리스트교도로 개종해 지정된 지역으로 이주시키려 했으나, 프랑스 인들은 주로 인디언과 교역관계를 맺는 데 관심이 있었다. 초기 영국 법은 불법으로 인디언 영토를 몰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1763년 선언을 통해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지역 전체를 아메리카 원주민 영토로 규정했다. 이 정책은 영국 지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뒤에 미국 정부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다. 지금의 캐나다를 생겨나게 한 1867년 영국령(領) 북아메리카 법에 따라 캐나다가 인디언과 그 영토에 관한 입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강제 정책이 오랫동안 시행되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백인들이 서부를 향해 대규모로 이주했으며, 수많은 조약을 통해 서부 개척으로 주변 영토에 대한 인디언의 권리는 무효화되었다. 1876년 수족과 샤이엔 족의 커스터 학살을 포함해 무시무시한 전쟁이 여러 차례 잇따라 일어났다. 1887년까지 대부분의 인디언이 보호구역으로 이주했다. 1887년 도스 일반 토지 분배법에 따라 인디언은 약 34만 8,100㎢에 이르는 영토를 잃게 되었다. 1934년 인디언 재조직법(Indian Reorganization Act)에 따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위향상을 위한 사업계획이 확정되었다. 1950년대 이후 여러 가지 새로운 정책이 수립되고 시민권을 중시하는 분위기에 따라 인디언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인디언 문제에 관한 미국민의 인식이 높아졌다.


* 중앙 아메리카 인디오

인디오가 니카라과에서 멕시코 북부지역에 이르는 중앙아메리카에 들어온 것은 1만 년 이전의 일이었다. BC 4500년 무렵 농사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옥수수・콩과 같은 주요작물의 재배기술이 꾸준히 발전한 결과 BC 2000년 무렵 농경사회가 확립되었다. 그 뒤 몇 세기 동안 식량공급이 안정됨에 따라 작은 규모의 마을이 큰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도기 및 다른 여러 가지 기술이 발전했다.

1000년까지의 고전기 동안 마야와 같은 문명이 생겨났다. 마야 족은 여러 가지 제의를 통해 결합했으며 사제계급의 지배를 받았다. 사제의 기능은 농사주기에 영향을 미쳐 풍년이 들도록 하는 데 있었다. 풍요의 신 틀랄록은 가장 중요한 신에 속했는데, 틀랄록의 상징 재규어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조각품에서 주제로 등장한다. 후기 문화에서는 재규어가 더욱 호전적인 독수리로 바뀌었으며,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의식이 되었다. 중앙아메리카의 종교국가들은 1000년 무렵부터 톨텍 제국과 아스텍 제국에 밀려났다. 이 두 제국은 스페인이 침략할 때까지 번영을 누리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또 절정기에는 아스텍 제국의 군사력이 중앙아메리카 거의 전체를 지배할 정도였다.

초기 이주민으로부터 지역에 따라 여러 개로 분류할 수 있는 소(小)문화집단이 생겨났다. 지금의 멕시코 북서부지역 연안, 사막, 산악지대에 한 집단이 살았으며, 또 다른 집단 타라스코 족은 미초아칸 산맥에 정착했다. 마야 족은 과테말라 여러 지역과 유카탄 반도, 멕시코 치아파스 등에 살았으며, 아스텍 족은 멕시코 중부 고원과 지금의 멕시코 시 지역에 집중해 살았고, 멕시코 남부 연안과 고원 지역에 5번째 집단이 살았다.

중앙 아메리카 인디오 문화는 소규모 사회를 구성하며 개별 가족이 기본 사회단위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남성과 연장자가 사회를 지배하며, 상속은 부계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부계와 모계 양쪽을 모두 인정한다. 공동체 활동은 농산물과 공예품을 교환하는 시장과 정치기구에 집중되어 있다.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은 종교적인 역할도 겸한다.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지도자들이 마을을 대표한다.

주요 종교형태는 스페인 인들이 전파한 로마 가톨릭이지만, 크리스트교 성인들에 대한 의식과 널리 퍼져 있는 애니미즘・미신・점술을 통해 옛 종교의식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가톨릭과 아울러 유럽의 기계와 기술을 들여온 스페인의 정복은 옛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식민지 정복 초기에 예수회에서 북서부지역에 특별 종교구역을 설치했으며, 다른 교파에서는 스페인 정부의 감독 하에 개발된 '엔코미엔다'(encomiendas)에 정착했다. 그 뒤 엔코미엔다가 해체되고 특별구역이 교회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되자 플렌테이션・목장・광산이 식민지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식민지 태생 스페인 인들과 혼혈인들은 1821년 혁명을 통해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획득하고 새로운 공화국의 정책을 수립했다. 그 뒤 산업화・상업화 시기 동안 인디언 사회는 경제적인 손실이 있었음에도 문화적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점점 고립주의적으로 변해갔다. 멕시코에서는 그 후 1910년 혁명을 통해 배타적인 사회・경제・정책이 폐지되었으며, 인디언의 정치적・문화적・경제적인 업적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디언 문제 해결을 위해 중요한 계획들이 수립되었으며, 국민들은 멕시코 원주민의 예술과 전통에 관심을 기울였다. 과테말라에서도 비슷한 정책을 채택했으나 곧 폐지되고 말았다. 과테말라의 원주민 인구가 더 빨리 늘어났지만, 20세기 후반에는 과테말라보다 오히려 멕시코의 인디언이 도시와 농촌 사회에 더욱 완전하게 통합된 듯하다.


* 남아메리카 인디오

고고학적인 기록에 따르면, 남아메리카 문명은 BC 10000년 이후 언젠가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에서 첫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첫 이주민이었던 수렵채집민은 지금의 티에라델푸에고, 아르헨티나, 칠레 남부지역, 그란차코 중남부 평원지역, 안데스 중부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수렵채집민 사회는 훨씬 더 발전한 농경사회에 밀려났다. 이동 수렵민들은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았는데, 집단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사냥감이 더 풍부한 지역이나 기후조건이 더 좋은 지역으로 자주 이주할 수 있었다. 열대림지대의 농경민과 마찬가지로 이들 수렵민은 친족관계에 바탕을 둔 집단을 이루었으며, 집단마다 연령과 성을 기준으로 서열을 결정했다. 그러나 브라질과 아라와크 연안, 대(大)앤틸리스 제도, 내륙 삼림지대 농경사회에서는 옥수수・콩 등 고유작물 재배에 성공하고 수렵도 함으로써 규모가 더 큰 규모의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수렵민 사회와 삼림지대 농경사회에서는 다른 미개사회와 마찬가지로 주변 환경을 지배할 목적으로 주술의식을 거행하는 관습이 있었다. 카리브 해 인접지역과 안데스 북부지역 농민들은 군사적・종교적 지도력에 바탕을 둔 좀더 복잡한 형태의 사회조직을 발전시켰으며 그러한 사회조직은 기술적으로 훨씬 발전한 농업으로 유지되었다. 이 부족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부족사회를 발전하게 하고, 노예와 희생의식의 제물을 제공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초보적인 중앙집권적 지배형태를 수립하고 주술에서 벗어나 마침내 초기단계의 종교로 이행한 것이 이들 사회와 삼림지대 농경사회를 구별 짓는 큰 차이였다.

BC 2300년경 남아메리카 원주민 문화 가운데 가장 발전한 문화가 안데스 중부지역에 뿌리를 내린 뒤 수천 년 동안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켰다. 1000년 무렵부터 여러 왕국(치무・티아우아노코・ 잉카 왕국 등)이 생겨나 16세기 초 스페인이 침략할 때까지 번영을 누렸다. 페루에서 칠레 북부지역에 걸쳐 영토를 확장했던 잉카 왕국에는 효율적인 관개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식량생산・저장・배급 제도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절정기에는 거의 350만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사회계층은 세습왕족에서부터 귀족과 장인계층, 평민인 농민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잉카 문명의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관습에 따른 사회조직이 법률제도로 바뀐 것과 예술품, 특히 금속세공 분야에서 수준 높은 예술품이 생산된 것이다. 이들 4가지 사회문화 유형은 남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역사발전 단계와 일치한다. 획일적인 사회구조의 이동수렵민이 처음 들어온 이후 수천 년 동안 외부세계의 도움 없이 목축・농업 등 여러 분야에서 기술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점점 복잡한 사회구조가 생겨났으며, 중앙집권적인 정부와 엄격한 계급제도가 나타났다. 11세기 안데스 중부 여러 제국들은 BC 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옛 지역 제국들의 원형이 최고로 발전한 형태였다.

16세기 유럽의 정복으로 인해 남아메리카 주민들의 전통문화가 파괴되면서 일부 부족이 거의 사멸했으며 대부분 완전히 식민화되었다. 가장 심하게 파괴된 문화는 주요항로 주변에 있던 사회였다. 한편 항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안데스 부족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 고유문화를 보존해왔으며 인구도 꾸준히 증가해왔다. 그러나 잉카 제국의 농사풍습과 정치관습은 스페인 식으로 완전히 바뀌었으며 종교도 로마 가톨릭에 밀려났다. 귀족과 장인계급은 어느 정도 식민지 계급구조 상층에 흡수된 반면, 원주민 농민들은 비천한 노예 신분으로 떨어졌다. 착취가 덜한 지역에 남아 있는 일부 잉카 족은 문화유산의 일부를 보존하는 동시에 현대 산업 중심지와 경제적인 교류를 해왔다. 아라우칸인과 같은 다른 남아메리카 인디언은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했으나, 그 후 동화되거나 보호구역으로 이주했다.




� 참고사항


투우와 비극 /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리의 봄은 모든 것이 약간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마이크와 나는 스페인에 가기로 결정했다. 스트레이터는 우리들에게 스티릭스 식당의 메뉴의 뒷면에다 스페인의 그름을 잘 그려 주었다. 또한 그는 이 메뉴에다 어린 돼지 로스구이가 별미인 마드리드의 식당 이름과 투우사들이 살고 있는 비아 산 제로니모의 하숙집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우리들은 이 메뉴와 낡은 옷으로 완전히 준비를 한 다음에 스페인으로 떠났다. 우리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 투우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어느 날 아침 파리를 떠나 그 다음날 12시에 마드리드 기차역에서 내렸다. 우리는 그 날 오후 4시 30분에 투우를 처음으로 구경했다. 표를 얻는 데에 두 시간이나 걸렸다. 마침내 우리들은 암표 상한테서 25 페스타 씩 각각 주고 표를 구입했다. 투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들의 자리는 링사이드의 첫줄이며, 투우들이 나오는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암표 상에게 12 페스타를 더 줄 테니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얻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그런 자리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두 장에 50페스타를 지불한 다음 그 표를 주머니에 넣고 퓨에르타 델 솔 근처에 있는 큰 카페 앞에 있는 인도에 나와 있었다. 표를 주머니에 넣고 스페인에서 첫 하루를 카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가 오나 개거나 간에 한 시간 반 동안 투우를 구경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지 더 토소라는 이 투우장은 어떤 들판의 거리 끝에 있는 황갈색의 큰 벽돌 원형극장이었다. 노랗고 붉은 스페인 깃발이 그 위에 나부끼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거지들의 떼가 있었다. 남자 어른들은 붉은 질그릇 병 속에 든 물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부채와 지팡이, 구워서 소금을 친 복숭아를 팔고 있었다. 군중들은 유쾌하고 즐거워했지만 모두가 출입구로 열심히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말은 탄 민간 경비원들은 가죽 모자를 곧바로 쓰고 기총을 허리에 찬 채 마치 조상처럼 말 위에 앉아 있었고 군중들은 물결처럼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투우장 안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관람석에 있는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남자들은 더 잘 보기 위하여 망원경을 갖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좌석을 찾았고 군중들은 투우장을 떠나 콘크리트로 된 좌석의 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투우장은 원형으로 되어 있었고 바닥은 모래가 있었다. 링 주위는 사람이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나무판대기로 된 벽이 있었다. 바레리아라고 불리우는 이 나무 판대기벽과 좌석의 첫 줄 사이에는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원형경기장 안에 있는 좌석은 만원이었으며 경기장은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중세기의 복장을 한 네 명의 의전관들이 일어나서 나팔을 불자 경기장의 군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자 링 저쪽 끝에 있는 입구에서 검은 비로드 옷을 입고 풀이 뻣뻣한 칼라를 한 네 명의 기수들이 말을 타고 햇볕이 빛나는 경기장안으로 들어왔다. 양지바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열기 속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네 명의 기사들 뒤에는 투우사들의 행렬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입구에서 모두 대오를 짜서 행진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자 안으로 들어왔다. 앞 열에는 세 명의 에스파다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날 오후에 여섯 명의황소를 죽이는 일을 떠맡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짙은 수를 놓은 노랗고 까만 복장과 금으로 된 자수, 어깨 망토, 재킷, 셔츠, 칼라, 무릎까지 내려오는 바지, 그리고 분홍색 스타킹을 착용한 그 낯익은 투우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투우할 때에 그 분홍색 스타킹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은 항상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세 명의 투우사 뒤에는 팀들이 행진했다. 그들은 투우사들과 똑같이 옷을 입었지만 그들만큼 화려하게 입지는 않았다. 투우사들은 넓고 납작한 모자를 쓰고, 크고 묵직한 갈색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창문을 버티는 긴 막대기와 같은 창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뒤를 유쾌한 마구를 단 노새 팀들과 투우장의 종업원들이 따라갔다.

투우사들은 투우장을 가로질러 행진하여 대회장석으로 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활보하면서 조금도 과장된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자연스런 우아함과 직업 선수의 약간 구부정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주요 야구선수단원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짙게 수놓은 그 어깨 망또들을 종업원들이 붉은 담에 놓았던 그 투우용 어깨 망토와 바꾸었다.

우리들 바로 밑에는 오후에 싸울 세 명의 투우사들이 담에 기대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투우사는 담배를 피웠다. 그는 키가 작고 피부 색깔이 고운, 집시인 지타닐로라는 사람이었는데 금으로 수놓은 굉장히 좋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기술이 좋지 않아." 나는 옆에 앉아 있던 밀짚모자를 쓰고 틀림없이 미국제일 신발을 신고 있는 젊은이가 말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황소들을 알고 있어. 그는 위대한 킬러야."
"당신은 미국인 아니십니까?" 마이크는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 젊은이는 씽긋이 웃었다.
"하지만 나는 이 투우사들을 알고 있어요. 저 사람은 지타닐로입니다. 아저씨는 그를 보고 싶죠. 통통한 얼굴을 한 애는 취쿠엘로입니다. 그는 투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민들은 그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빌랄타입니다. 그는 굉장한 투우사입니다."
나는 빌랄타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창과 같이 곧았고 마치 늑대처럼 걸어 다녔다. 그는 관람석에 있는 친구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광대뼈 위에는 큰 붕대가 접착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그는 말라가에서 황소에 찔렸어요." 라고 그 미국인은 말했다.

경기장에서 투우사들은 그들의 흔들리는 안장에서 곧바로, 그리고 뻣뻣한 자세로 앉아서 그들의 노쇠한 말들을 타고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그러자 세 명의 투우사들만 남고 다링에서 사라졌다. 이 세 명은 붉은 페인트를 칠한 담으로 몰려갔다. 그들의 말은 눈이 하나씩 붕대로 덮인 채 기대어 있었고 창은 벽에 세워 두고 있었다. 비로드 재킷과 흰 주름 칼라가 달린 옷을 입은 두 명의 의전관들이 말을 타고 들어왔다. 그들은 회장석으로 말을 몰아 모자를 벗고 나지막하게 인사를 했다. 회장석에서 어떤 물건이 하나 던져졌다. 의전관 중의 한 명이 그의 깃털이 있는 모자로 그것을 받았다.

"황소 우리를 여는 열쇠입니다." 라고 진 보틀 킵이라는 미국인이 말했다.
두 명의 의전관은 급히 경기장을 가로질러 말을 타고 달렸다. 그들 중의 한 명이 그 열쇠를 토레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었다. 이들 두 사람은 깃털이 있는 모자를 흔들며 인사를 하고서 링에서 사라졌다. 큰문은 닫혀져 빗장이 걸려졌다. 더 이상의 출입구는 없었다. 군중들은 외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열쇠를 가진 사람이 쇠로 된 빗장이 있는 붉은 문으로 향하여 가더니 그 빗장을 벗겼다. 문이 확 열려졌다. 그 남자는 문 뒤에 숨었다. 그 문안은 캄캄했다.

갑자기 황소 한 마리가 머리를 숙이면서 컴컴한 우리에서 경기장 안으로 나왔다. 무게가 1톤 이상 되는 이 황소는 부드럽게 뛰면서 나왔다. 이 황소가 나올 때 태양은 순간적으로 그를 눈부시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었으며, 그의 근육은 빳빳해져 있었고 눈은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고슴도치 바늘처럼 까맣고, 희고, 날카로운 그의 뿔은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돌격 자세로 앞으로 나갔다. 그가 돌격하고 있을 때 나는 갑자기 투우라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황소라는 것은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완전히 치명적이고 악독한 어떤 큰 유사이전의 동물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뛰면서 돌격했다. 그는 돌아설 때에 마치 고양이처럼 네 발로 돌았다.

그가 돌격을 할 때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물건은 그 비참한 말을 타고 있는 투우사였다. 투우사는 그의 박차를 말에다 박고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 황소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말의 옆구리를 꽝하고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말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뿔의 하나를 높이 들어 투우사의 넓적다리 쪽으로 몰고 들어가 투우사와 안장과 그밖에 모든 것을 말의 등에서 떼어내 버렸다.

황소는 경기장에 누워 있는 그 투우사를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 다음의 투우사는 돌격의 충격을 받을 준비를 하고 창을 쥔 채 그의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황소는 측면에서 그를 쳤다. 그러자 말과 투우사는 공중 높이 솟아오르더니 황소의 등위로 가로질러 떨어졌다. 보병같이 생긴 취쿠엘로는 담을 뛰어넘더니 황소 쪽으로 달려가 그의 어깨 망토를 황소의 얼굴에 대고 펄럭거렸다. 그 황소는 그 어깨 망토를 공격했고 취쿠엘로는 뒤로 피했다.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황소는 취쿠엘로를 공격했다. 취쿠엘로는 서서 그의 발뒤꿈치로 돌면서 어깨 망토를 마치 발레 무용가의 스커트처럼 황소의 얼굴에 대고 펄럭거렸다.
"와와!" 군중들은 함성을 질렀다.
황소는 다시 재빨리 달려들어 공격했다. 취쿠엘로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황소와 싸웠다. 그의 다리는 뻣뻣해졌으나 황소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피하면서 어깨 망토를 아름답게 좌우로 흔들었다. 군중들은 또 다시 함성을 질렀다. 취쿠엘로는 이 일을 일곱 번이나 했다. 그때마다 황소는 몇 인치 차이로 그를 놓치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군중들은 그에게 함성을 질렀다. 그는 한번은 황소에다 대고 어깨 망토를 펄럭거리면서 황소 뒤로 돌아가서 황소에게서 빠져 나왔다.

"그는 잘하고 있군요." 라고 진 보틀 킹은 말했다.
"어깨 망토를 가지고 좌우로 흔드는 것을 베로니카라고 부릅니다."
일곱 번이나 놀라운 베로니카를 했던 그 얼굴이 통통한 투우사는 바로 우리들 밑에 있는 담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빛 속에서 땀으로 반짝였고 거의 표정이 없었다.
그의 눈은 투우사를 돌격하기로 결심을 하면서 서 있었던 투기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 황소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왜냐하면 몇 분 후에 이 황소를 죽이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일단 그의 붉은 칼자루가 있는 가는 칼과 붉은 헝겊 조각을 갖고 그 황소를 죽이러 나서면 그가 죽느냐, 아니면 황소가 죽느냐 둘 중의 하나였다.

나는 이날 오후의 나머지 일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이날 내가 본 것은 나에게는 최초의 투우였으나 그것은 최고의 투우는 아니었다. 최고의 투우는 나바르 구릉 위에서 있는 팜플로나라는 소도시에서 몇 주일 후에 벌어진 것이었다. 팜플로나에서는 서기 1126년 이후부터 매년 6일 동안 투우가 계속되었고 매일 아침 6시에는 시민들의 반은 황소보다 앞장서서 뛰어가고 그 뒤를 황소들이 뛰었다. 그래서 그런지 팜플로나에서는 모든 남자와 소년들이 아마추어 투우사였고 20,000명이 참석하는 가운데 아마추어 투우가 벌어졌다.

나는 투우에 대해 변명의 말을 하지 않겠다. 투우는 로마의 대 연기장이 있었던 시대의 유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설명이 필요하다.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스포츠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이다. 매우 큰 비극이다. 비극은 황소의 죽음이다. 그것은 세 개의 분명한 행위에서 수행된다.

그런데 진(술)을 마시지 않는 진 보틀 킹은 우리들이 구운 어린 돼지와 옥수수 빵을 별미로 하고 있는 그 작은 식당의 이층 방에 앉아 있을 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비아 산 제로니모에 있는 투우사들의 하숙집에서 배웠다. 우리들은 산 세바스치엔으로부터 그라나다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여러 다른 곳에서 투우를 16번 구경했었다.
여하튼간에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비극이며 그것은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투쟁을 상징한다. 한 번 투우하는 데는 황소가 대개 6마리가 나온다. 투우는 경마용 말처럼 사육된다. 이 투우를 사육하는 어떤 곳은 수백 년이 된 곳도 있다. 좋은 황소는 2,000불이나 나간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속력, 힘, 그리고 악독함을 길러 준다. 다른 말로 하면 좋은 황소는 절대로 교정 불가능한 나쁜 황소이다.

투우는 지극히 위험한 직업이다. 16변의 시합에서는 심한 상처가 발생하지 않았던 경우는 겨우 2번밖에 없었다. 반대로 이 직업을 보수가 매우 좋다. 인기 있는 투우사는 오후에 한 번 나오는데 5,000불을 받는다. 그러나 인기가 없는 투우사는 500불도 받지 못하는 수도 있다. 투우사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황소의 정면에서 직접 접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위험의 요소이다. 마치 당구 선수처럼 되도록 이면 많은 테크닉을 사용하면서 어깨 망토를 갖고 수행해야 하는 온갖 종류의 복잡하고 어려운 고비가 있다. 또한 관습대로, 그리고 법에 정해진 대로 이 오래된 비극(투우)을 수행해야 한다. 투우는 우아하고, 외견상으로는 힘 안들이고, 그리고 항상 위엄 있게 수행되어야 한다.

이 비극의 세 개의 행위는 우선 투우사들이 투우들한테 공격을 받고 창으로 자기를 보호할 때이다. 이때 말들은 퇴장한다. 두 번째의 행위는 던지는 화살이다. 이것은 새로운 투우 팬들이 이해하기에는 가장 흥미 있고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이 던지는 화살은 길이가 3인치이다. 이 던지는 화살을 황소에게 꽂을 사람이 혼자서 투우가 있는 곳으로 나온다. 그는 이 화살을 들어서 투우에게 던진다. 그리고 나서 그는 "토로, 토로"라고 소리친다. 황소는 그를 향해 돌격한다. 황소는 처음으로 완전히 당황한다. 그는 피할 수 없는 화살의 그 따끔따끔한 맛을 보고 있다. 그는 돌격할 말이 없기 때문에 투우사에게 계속 돌격한다. 그러나 그가 돌격할 때마다 그는 많은 화살의 세례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황소의 죽음이 온다. 각 투우사는 오후에 두 마리의 황소를 맡는다. 황소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야 하는 투우사는 칼로 황소의 목 바로 뒤에 있는 어깨와 뿔 사이를 찌른다. 그러나 그는 이 황소를 죽이기 전에 큰 냅킨만한 붉은 헝겊을 갖고 일련의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한다. 이때에 대부분의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