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및 작품세계
■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1890년에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의식의 흐름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 인간의 의식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마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강물처럼 연속적으로 흐르는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했다.
그 때부터 의식의 흐름 기법은 현대소설의 중요한 방법론에 하나를 나타내는 용어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이 의식의 흐름의 기법은 작중 인물의 생각, 감정, 기억, 그리고 비논리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연상과 더불어 때로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단편적인 사고와 뒤섞여 흐르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방법이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제어된 사고를 직접적인 언어표현으로써 보여주려는 내적 독백과는 구별되는 기법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이야기의 논리와 정규적인 구문이나 문법, 수사법 등을 무시하면서까지 인간의식의 무질서하고 잡다한 흐름을 그대로 옮겨 놓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실존이 외부에 나타나는 것처럼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아니라 비논리적이고 잡다한 파편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는 믿음에 근거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감각이나 지각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사고, 기억, 연상 등과 섞이게 되는 등장인물의 끊임없는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물의 무한한 사고를 통해서 의식과 무의식의 연속적인 흐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곁으로 보기에 비문법적인 언어의 흐름을 하나로 묶는 결속체는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문법의 틀보다는 병치竝置에 의해 작동되는 연상논리이다. 정신작용을 재현하는 의식의 흐름은 그 성공이 주의 깊게 선별과정에 좌우됨에 불구하고 자발적이고 억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연관성이 많다. 20세기 초 문학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되었었다. 이렇게 시작되어서 버지니아 울프의 델리웨이 부인과 그 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진 불후의 대표적인 작품이 창작되었다.
우리 문단에서 이러한 문학적 활동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다시 말해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따른 어떠한 구상이나 기법을 찾아보기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나 과거의 반복적인 재창조일 뿐이다. 이런 부분은 대중성에 치우치기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우리의 문학계 내에서 여성작가들의 활동은 더욱 취약하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버지니아 을프는 어린 시절 빅토리아 시대라는 유년기를 보냈고,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아 왔으나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문학의 흐름을 바뀌어 놓았다.
■ 버지니아 울프(18821941)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을 가진 여성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명명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은 그 형식의 독특함으로 인해 모호한 부르조아 계층의 폐쇄적인 문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영국 모더니스트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이스, 프루스트, 카프카와 비견되는 문학가로 위치되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시대에 소설이 갖추어야 할 새로운 요소들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진실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그가 보여준 의식의 흐름 기법은 인간 심리를 가장 깊은 곳까지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이나 올란도에서 보여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서술 방식은 이러한 버지니아 울프의 정신을 즉, 모더니즘 운동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개인사는 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성들의 고단함을 보여준다. 그의 개인적인 체험들은 그의 작품과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생애가 작품의 예민함으로 반영된다면 그가 여성으로서 느꼈던 문제들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버지니아 울프로 나타난다. 버지니아 울프가 겪었던 길들여지기를 강요했던 교육과 이복오빠에게서 느꼈던 육체적 모욕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경험은 더 나아가 왜 사람들은 여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왜 여성들은 남자들이 그들에게 나누어 준 일만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낳는다. 재능을 가진 여성들이 자신의 영역을 개척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해 그는 발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작가로서의 그의 위치만큼이나 중요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던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낡은 유럽이 해체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사회형태가 붕괴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우리는 이 시대를 버지니아가 섬세한 시선으로 어떻게 잡아내고 있는지를 그의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작가로서는 새로운 모더니즘 실험의 선구자로, 페미니스트 사상에 있어서는 탁월한 예견자로 나타나고 있다.
■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생애
1882년 1월 25일 런던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레슬리 스티븐과 아름답고 활동적인 어머니 줄리아 덕워스 사이에서 네 아이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레슬리는 정신박약인 딸이, 줄리아는 2남 1녀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2남 2녀가 태어났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그 중 셋째였다. 그래서 그녀는 여덟 살부터 예순 살까지 열한 명의 식구와 일곱 명의 하인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자라났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유복한 환경이었다. 남자아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녔고, 여자아이들은 집에서 가정교사와 부모로부터 배웠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웬만한 가문에서는 여자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라니 그녀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아버지의 손님들인 당대 일류 문사들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녀가 열세 살 때인 1895년 5월 5일 어머니 줄리아가 인푸렌자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그녀는 최초의 신경쇠약을 겪었다.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의 부재와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상심은 온 집안의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열세 살 위의 의붓언니 스텔라가 살림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 스텔라는 세상을 떠난다. 그 후에는 불과 열여덟 살이던 바로 손위의 언니 바네사가 살림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점점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갔다. 두 의붓오빠들 역시 자매에게는 견뎌내기 힘든 존재였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1904년 2월 22일 아버지마저 작고한다. 그녀는 그 해 5월에 신경쇠약이 재발하여 자살을 기도한다. 그런 가운데 1906년 사남매의 그리스 여행은 불행하게 끝났다. 11월 20일에 토비는 여행에서 얻은 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달랐던 형제자매들은 제각기 흩어진다. 바네사는 동생들을 데리고 블룸즈베리의 고든 스퀘어 46번지로 이사한다. 가난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주로 사는 조용한 동네이다. 비좁고 침침했던 옛집과는 달리 집안을 환하게 꾸몄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녔던 남동생 토비의 친구들을 초대한다. 1907년 타임즈지誌에 문예비평을 썼으며 블룸스베리 그룹을 형성하여 화가 던칸 그란트, 경제학자 케인즈, 소설가 E. M. 포스터, 후에 남편이 될 레너드 울프 등과 문화와 사회에 대한 폭넓은 주제로 모임을 가지면서 울프는 세계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지성인으로 떠오른다.
클라이브 벨, 색슨 시드니-터너, 리튼 스트래치, 메이나드 케인즈, 레너드 울프 등이 드나들었다. 어떤 규범이나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반항적인 정신들이 맞부딪치며 예술과 철학과 문학을 토론했다. 바네사와 버지니아는 안주인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에 동참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는 친구의 소개로 가디언지誌에 정기적으로 기고하여 원고료를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네사는 클라이브 벨과 결혼했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계속 번창했다. 버지니아는 어느새 스물 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게다가 정신병이 있었다.
그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09년이었다. 1912년 1월 레너드 울프가 버지니아에게 청혼한다. 그들은 그 해 8월 10일에 결혼을 했다. 토비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던 레너드 울프는 버지니아에게 둘도 없는 반려가 되어주었다. 병원에서는 악화시킬 뿐인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해 규칙적이고 안정된 생활 습관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창작을 격려해주었다. 그녀의 거부로 인해 처음부터 성생활이 배제된 백지 결혼이었다. 결혼이 반드시 성관계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아닐 때 그것은 이상적인 결혼이었다. 레너드는 일생의 지적 동반자로서 버지니아가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진실이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달라지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출항을 쓰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작품 속에 경험의 끊임없는 흐름,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인물의 성격, 그리고 의식을 자극하는 외부환경을 담아냈다. 버지니아 울프의 처녀작 출항은 1913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출간시기가 늦춰져 2년 뒤에 출항(1915. 3. 26.)이 출간되었다.
레너드는 1917년 호가스 출판사를 세운다. 버지니아의 벽에 있는 흔적(1917년 7월), 식물원(1919년 5월), 밤과 낮(1919. 10. 20.), 제이콥의 방(1922. 10. 27.) 등이 호가스 출판사에서 출간되면서 차츰 인정받기 시작한다. 재미 삼아 사들인 수동식 인쇄기로 시작한 호가스 출판사 역시 차츰 궤도에 올랐고 명성과 수입을 얻기에 이른다. 제이콥의 방 이후 울프는 흘러가는 시간의 느낌과 역사적 시간에 대한 자각의 느낌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레너드 울프는 1922년 11월 의원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이들 부부는 레너드가 1923년 네이션의 편집장이 되면서 오랜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 해 버지니아는 톨스토이의 사랑의 편지를 번역한다. 그리고 보통의 독자(1925년 4월), 댈러웨이 부인(1925년 5월), 등대로(1927. 5. 5.)에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이용해 인간심리의 가장 깊은 곳을 탐구하기도 했다. 환상역사물인 올란도(1928. 10. 11.)과 페미니즘 비평서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1929)을 쓰게 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자기만의 방은 남성 중심적 세계에서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그린 작품이다. 여성운동가들은 울프의 작품에서 페미니즘 이론의 초석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째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란 그토록 어려운가를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명한 이 에세이는 출간 당시부터 이미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지침서가 되다시피 하였다. 우리가 모두 일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소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많은 평론과 에세이, 작가의 내면 풍경으로 솔직하게 풀어놓은 여러 권의 일기를 남겼다. 울프는 그 동안 남성 작가들이 전통적으로 구사해 온 소설작법에서 벗어나 특유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남성과 여성의 이분된 질서를 뛰어넘어 단순히 여성 해방의 차원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인간 해방의 깊은 문학을 지향한다.
아울러 이성적 언어 이전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울프는 죽음의 문제만큼이나 삶의 심연을 천착하면서 깊고 다양한 문학 세계를 이루고 있다. 문학사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또, 1960년대 말부터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그러한 문학적 업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전설적인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생전에 이미 블룸즈베리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데다가, 비범한 성격과 용모, 만성적인 정신분열증, 결국 자살로 마감한 생애는 그녀를 하나의 전설로 만드는 것이다.
파도(19230. 10. 8.),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32. 7. 1.), 플러시(1933. 10. 5.), 세월(1937. 3. 15), 3기니(1938. 6. 2.)가 출간된다. 그 사이 1938년부터 전쟁으로 심한 혼란을 겪는다. 1939년 리버플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 수여하겠다는데 울프는 거절을 했다. 로저프라이 전기(1940. 7. 25.), 막간(1941년 2월)이 출간되었다. 1940년 마침내 전쟁으로 메클렌버그 스퀘어의 집이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마지막 유작 소설 막간으로 작품활동을 마치게 된다. 대표적 페미니스트로 꼽히는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가이자 철학가, 비평가로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였다.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뛰어난 작품 세계를 일궈 놓은 선구적 페미니스트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 했던 질문, 윤리, 양심 같은 것들은 학자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한테서 물려받은 기질이다. 1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버지니아와 형제들은 상실감에 빠져있던 독재적인 아버지와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되며 이 때의 경험은 버지니아 울프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녀의 작품들은 빅토리아 시대 가부장적 가족 제도 하에서 느끼는 압박감과 여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다. 뛰어난 모더니스트 작가들의 작품처럼 버지니아의 작품도 긴장과 모순으로 가득 차있으며 그녀는 열정적으로 삶을 찬미하는 한편 끊임없이 죽음을 주제로 다뤄 소설은 우울하고 슬프며, 신비로운 특성이 있다. 그런 신비로움은 외형적인 것 이면에 있는 실체에 도달하려는 버지니아의 시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아홉 권의 소설, 수준 높은 비평과 편지, 일기와 전기를 남겼다. 자신의 출판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여러 강연과 강의로도 잘 알려진 적극적인 페미니스트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새로운 실험적 소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말했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진실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야말로 울프는 미래의 여성상을 살아갔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나서 울프 부부의 삶에는 점차 암운이 덮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침공은 유태인인 레너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시골집으로 대피했으나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시의 불편과 고통은 버지니아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 다시금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전쟁이 한창인 1941년 3월 28일 남편 레너드에게 짐이 될 것을 우려하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리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슬이 아직도 촉촉한 초원을 씩씩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강으로 나가서 주머니에 돌멩이들을 가득 집어넣고 서섹스에 있는 집 근처 우즈강으로 들어갔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이다. 시체는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
■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주요작품
이미 알고 있듯이 버지니아 울프의 처녀작은 출항이라는 소설이다. 그녀는 출항을 집필하는 동안 극심한 신경과민에 시달렸다. 그 후에 반복되는 우울증 때문에 지쳐버렸다. 또한 자신의 작품이 놀림거리가 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병원을 들락거리던 1915년 3월 26일에 출판되었다. 이 출항은 그녀의 자서전적인 흔적이었다. 주인공인 레이철 빈레이스는 화물선을 타고 남아프리카로 간다. 그 곳에서 연애사건을 체험하고 열대병으로 죽는다.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삶, 그녀를 에워 싼 문제들과 사람들, 즉 부모, 언니 버네서, 불룸즈버리 친구들의 직접적인 거울이었다.
1919년에 출간된 밤과 낮은 영국소설의 충실히 따르며 그녀의 소설적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제곱의 방은 그 때까지 문학형식에서 쓰여지지 않았던 과격한 기법으로 소설을 구성했다. 이 소설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소설의 주제는 인식, 생각 그리고 외부세계 모습들의 흐름이다. 이 소설로 인하여 버지니아 울프는 문학의 선구자 대열에 오른다. 그녀의 남편 레너드 울프 역시 네이션의 문화면 편집자가 되었다.
1925년 출간된 댈리웨이 부인은 소설형식의 혁명을 보여준 작품이다. 하루동안 즉 24시간이라는 시간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서로가 아무런 연관성 없이 시간의 평행선상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의 몽타주를 통해서 절묘하게 전개된다. 전통적인 영국소설의 표현처럼 점차적으로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기법을 버렸다. 그녀는 전통적인 의미의 어떤 이야기도 서술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서 줄거리의 문제가 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생각의 과정과 감정의 흐름을 서술했다.
1927년에 출간된 등대로는 당시 그녀의 소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31년에 출간된 파도 역시 로저 프라이를 비롯한 평론가들에게 걸작 중에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32년에 잠재능력을 지닌 작가들에게 아주 주관적인 충고를 던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와 보통독자라는 두 권의 이론서를 출간한다. 이미 1929년에 출간한 자신만의 방과 1938년에 출간한 3기니는 총체적인 남성의 지배로부터 여성을 해방되어야 한다는 즐거운 기분으로 썼다. 이러한 글쓰기는 일종의 휴식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만의 방은 캠브리지에 있는 뉴넘 칼라지로부터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초청 받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소설은 여성의 지위를 단순히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명쾌하고 재치 있는 해석으로 풀어나간다.
작품세계
■ 출항유년기 체험과 자전적인 소설
그녀는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에 의해 빅토리아 시대의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을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쪽이다. 이 집의 보수성은 어머니 줄리아가 죽고 난 다음 파괴될 조짐을 보인다. 어머니가 죽고 나자 아버지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하고 나머지 가족은 큰 혼란에 빠진다. 그나마 집안 일을 돌봐주던 스텔라마저 죽고 난 뒤 버네서와 버지니아는 계속적인 아버지와의 충돌을 통해 보수적인 집안의 분위기를 파괴하고 싶어한다. 이들은 살롱 생활과는 다른 생활을 하며 빅토리아 시대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버네서와 버지니아의 의식 깊숙이 캠브리지에 다니는 토비가 항상 있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 버네서와 버지니아는 불룸즈버리로 이사해서 토비의 친구들과 어울린다. 불룸즈버리 써클은 캠브리지 대화사회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문학과 철학, 미학적인 주제, 진리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이 모임은 버네서와 버지니아에게 소중한 의미이며 이것은 곧 사회의 참여였다. 버지니아는 출항을 통해 자서전적인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그리고 출항을 쓰는 내내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그것은 작품을 쓰는 부담감이었다. 출항은 버지니아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이며, 유년기와 여행체험을 통한 직접적인 경험의 작품이다.
■ 자신만의 방, 3기니남성에 대한 콤플렉스
버지니아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이복형제인 조지 때문에 굉장히 남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녀는 남자들과의 경험이 조금도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연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과의 편안한 관계를 선택했다. 특히 버지니아가 남성을 기피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조지 덕워스에 의해 생겼다. 이복형제인 조지는 버지니아와 버네서에게 신체적 접촉을 자주 시도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열등감, 불안, 부끄러움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녀의 사춘기에서 일어난 신경과민이 정신병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버네거와 바이얼릿 디킨슨과 같은 여성들에게 끌렸다. 그녀는 아이가 없으면서 모성애를 간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녀가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무의식 속에서 발현된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이고 지독한 페미니즘이나 동성애로 흐를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생긴 남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방은 버지니아의 이러한 세계를 잘 보여주는 투쟁서이다. 버지니아는 우수한 재능을 지녔던 여자는 쫓겨나거나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16세기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녀는 19세기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사회적인 편견을 극복하려 했다. 그녀의 결론은 여성의 경제적인 자립이 남성들의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자신의 방이 그것이었다. 사회에서 여성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돈을 벌고, 자신의 시간을 벌고, 자신의 방, 자신의 일, 곧 여성들이 확신을 갖도록 장려하는 일이었다. 거의 10년이 지난 후 버지니아는 이 주제를 다시 집어 들고 투쟁했다. 그것이 바로 3기니이다. 모두들 칭찬하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버지니아는 중요한 책이었다. 그녀는 3기니을 통해 여성문제를 날카롭고 훨씬 격렬하고 반어법을 쓰지 않고 세밀하게 다루었다. 그녀는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남성사회와 나란히 단결하고 일치되어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댈리웨이 부인, 막간의식의 흐름에 의한 글쓰기
댈리웨이 부인은 소설의 형식을 바꿔 놓았다. 1942년 5월 버지니아 울프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현대소설의 등장인물’에 대해 대강 이런 내용의 강의했다. 과거처럼 잘생긴 주인공이나 단순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형식 없는 소설은 없어져야 한다. 이것은 소설의 등장인물에 대한 말이 아니다. 등장인물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가 그들의 의식 속에 파묻혀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써야 한다. 인간의 의식 속에 반사된 현실, 일상의 기록, 난잡한 연상, 하루동안의 일, 일생을 결정하는 수많은 일들의 너절한 부분을 써야 한다. 작가적인 서술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설가는 인간들의 발걸음을 하나하나 포착하여 그 뒤에 숨겨진 현실의 조각을 인식해야 한다.
댈리웨이 부인은 전통적인 의미의 그 어떤 이야기도 서술하지 않았다. 줄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생각의 과정과 감정의 흐름을 서술했다. 소설 속에 현재는 늘어지고 무절제하게 한숨을 쉬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몇 초 동안 반짝였던 회상과 뒤엉켜 문장의 파편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간은 흘러가고 과거의 역사와 현재가 뒤섞이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꿈들이 용해된다. 이렇게 그녀의 소설 세월, 막간도 역시 형식적으로 댈리웨이부인과 유사성을 보인다. 이런 의한 글쓰기는 버지니아 울프의 총체적인 문학이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으로 규정했던 소설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소설을 근대로 끌어올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지독한 정신병에 시달렸다. 또한 남성에 대한 콤플렉스, 아이가 없음에 대한 콤플렉스, 그리고 형편없는 작가라고 몰아 세우는 주변의 비평을 두려워하며 늘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다. 모든 것들이 버지니아 울프를 죽음으로 몰고 가게 했다. 그녀는 의식의 흐름에 의한 글쓰기는 20세기 소설역사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녀가 페미니스트이든 동성연애자이든 상관없이 여자가 아닌 작가로써 문학의 자리를 지켰다. 20세기 초 매부리코의 깡마른 그녀는 분명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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