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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생애 및 작품세계

by 丹野 2012. 1. 6.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생애 및 작품세계



■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의 연보年譜


1898년 2월 10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아버지 베르톨트 브레히트(하인들Haindl종이공장지배인)와 어머니 조피Sophie (결혼전의 성은 브레징 Brezing) 사이에 태어남.(이름: 베르톨트 오이겐 프리드리히 브레히BertholdEugenFriedrich Brecht)
1904년 초등학교 입학
1908년 아우크스부르크 시립 실업 김나지움 입학.
1914년 베르톨트 오이겐이라는 필명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최신 소식"에 최초의 시와 단편소설들 발표.
1915년 평화주의적 학업 논문으로 퇴학의 위협을 받음. 카스파네어와 친교.
1917년 김나지움 졸업. 뮌헨에서 의학 공부.
1918년 3월, 아우크스부르크 레히강가의 선술집에서 개인적으로 프랑크 베데킨트의 죽음을 추모함. "아우크스부르크 최신 소식"에 베데킨트를 추모함. 아우크스부르크 블라이히가街 2번지의 다락방에서 생활. 루덴도르프 공세 때 아우크스부르크의 어느 야전 병원에서 병역에서 복무. "죽은 병사의 전설"을 씀. 뮌헨에서 의학공부 계속함. 리온 포이히트방어 및 요하네스 R. 베허와 교제. "바알" 초고 완성.
1919년 아우크스부르크 "인민의지"에 극비평(1990.12월까지). 뮌헨 슈테파니 카페문학서클 구성원 됨. 트루데 헤스터 베르크의 "거친 무대"와 칼 발렌틴의 극장에서 함께 활동. "밤의 북소리".
1920년 5월 1일, 모친 사망. 뮌헨 아카데미가 15번지로 완전히 이사. 칼 발렌틴, 블란디네 에빙어 Blandine Ebinger, 에리히 엥엘, 카롤라 네어 등과 교제.
1921년 뮌헨에서 "데어 노이에 메르쿠르"에 단편들 발표. 특히 해적 이야기인 "바르간, 그것을 내버려 두다", "도시의 밀림 속에서" 발표. 칼 발렌틴의 영향으로 "거지Bettler", "그가 악마를 쫓아내다", "어둠 속의 빛" (이들 모두 발표되지 함), "결혼" 등의 단막극을 씀.
1922년 봄, 베를린 여행. 아르놀트 브로넨과 알게 됨. 9월 23일, 뮌헨 소극단서 "밤의 북소리" 초연. 헤르베르트 이어링을 통해 "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상 수상.10 ~ 11월, "하니발 Hannibal" 집필(미발표. 미완성). 11월 3일, 마리아네 초프와 결혼. 12월초, 베를린에서 위르겐 펠링 Juergen Fehing의 연출로 알렉산더 그라나하, 하인리히 게오르게, 블란디네 에빙어 등과 함께 "밤의 북소리" 공연.
1923년 3월 12일, 딸 하네 마리아네 탄생. 5월 9일, 뮌헨 궁정부 소극장에서 에리히 엥엘의 연출로 "도시의 밀림 속에서" 초연. 뮌헨 소극단의 극 전문가로 활동. 뮌헨의 히틀러 폭동 때 리온 포이히트방어와 함께 체포자 명단에 오름. 포이히트방어와 공동작업으로 크리스토프 말로의 "에드워드 2세의 생애" 개작.
1924년 3월 18일, 브레히트 자신의 연출로 뮌헨 소극단에서 "에드워드 2세의 생애초연. 베를린의 슈피헤른가 19번지로 이사. 칼 추크마이어와 극전문가로서 라인하르트의 독일극장에 관여(1926년까지). 여기서 헬레네 바이겔과 처음 만남. 철저한 마르크스주의 연구. 10월 29일, 에리히 엥엘의 연출로 독일극장에서 슐링크역의 프리츠 코르트너와 함께 "도시의 밀림 속에서" 베를린 공연. "남자는 남자다"(1924~1926).
1925년 권투선수 파울 삼손 쾨르너 및 게오르게 그로스와 친교. "베를린 상업신문Berliner Boersen - Courier"(1931년까지), "포스신문 Vossische Zeitung"(1928년까지), "일지 Das Tagebuch" (1929년까지), "세계무대" 등에 단편소설 및 논문들 기고. 단편소설로는 특히 "파산한 이념 Eine Pleite-Idee", "어느 표류자의 보고서 Bericht eines Schiffbruechigen", ‘어느 불독에 한 편지 iefuebereineDagge", "올려치기", "유쾌한 밤 Die gute Nacht" 등이 있으며, 보고서로 "바알의 원형 Das Urbild Baals"이 있다("장면 Die Szene"에 실림.)
1926년 2월 14일, 브레히트 연출, 오스카 호몰카 Oskar Homolka 주연으로 베를린 독일극장에서 "바알" 공연. 9월 26일, 다름슈타트에서 "남자는 남자다" 초연. 아르놀트 브로넨 및 알프레트 되블린 Alfred Doeblin과 함께 드레스덴에서 "아침축제"로 파문 야기. 12월 1일, 프랑크푸르트 극장에서 "결혼" 초연.
1927년 "가정기도서" 출판. "문학세계"에서 시 분야 심사위원. 피스카토르 무대를 위해 가스바라 Gasbarra 및 레오 라니아 Leo Lania와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슈베이크" 개작. 7월 17일, 바덴바덴에서 "소 마하고니 Kleines Mahagonny" 초연. 11월 22일, 마리아네 초프와 이혼.
1928년 1월 5일, 베를린 민중무대에서 에리히 엥엘 연출로 갤리게이역의 하인리히 게오르게와 함께 "남자는 남자다" 공연. "서푼짜리 오페라" 집필. 에리히 엥엘과 공동 연출로 8월 31일 베를린 쉬프바우더가 극장에서 하랄트 파울젠, 로자 발레티, 에리히 폰토, 로테 레니아 주연으로 "서푼짜리 오페라" 공연. 쉬크바우어가 극장은 이제까지 오스카 호몰카, 페터 로레, 에른스트 부쉬, 헬레네 바이겔, 로테 레니아, 카롤라 네어, 알렉산더 그라나하 등의 배우들과 함께 브레히트의 실험들에 활용될 수 있었음. 아머의 비용 번역본을 "서푼짜리 오페라"에서 써먹었다는 이유로 알프레트 케어가 표절 시비. 헬레네 바이겔과 결혼. "마하고니시의 성장과 몰"(1928~1929).
1929년 "린드버그의 비행", "동의에 관한 바덴의 교훈극"이 바덴바덴의 음악제를 위해 집필되어 파울 힌데미트가 곡을 붙였으며, 여기서 파문을 불러일으키면서 초연 프바우어가 극장에서 "해피엔드" 초연. 베를린에서 "예스맨" 초연. "예스맨과 노우맨" (1929~30). "도살장의 성 요하나" (1929~30). 미완성 작품으로는, "요하네스 파처", "무에서는 무가 나온다 Aus Nichts wird Nichts", "빵가게 Der Brotladen". 바일’과 함께 "베를린 진혼가 Berliner Raquiem".
1930년 3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파문을 일으키면서 "마하고니시의 성장과 몰락" 초연. 이어서 발터 길프리히트 Walter Gilbricht 와 표절 소송. 5월, 휴양차 프로방스의 르 라방두로 감. 이어서 뮌헨의 요양서에서 지냄. 10월 18일, 딸 마리아 바르바라 탄생. 12월 10일, 베를린의 독일극장에서 슬라탄 두도프 연출로 에른스트 부쉬, 헬레네 바아겔, 알렉산더 그라나하와 함께 "조치" 초연. "코이너씨 이야기", "라디오 이론 Radiotheorie", "오페라론 ueber die Oper", "조치", "예외와 규칙", "시민을 위한 독본".
1931년 1월 15일, 브레히트 연출로 쉬프바우어가 극장에서 "어머니" 초연. 2월, 베 를린 라디오에서 방속극으로 "도살장의 성 요하나" 방송. 3월, "쿨레 밤페" (브레히트의 시나리오, 슬라탄 두도프 감독)가 영화 검열국에 의해 금지됨. "둥글머리와 뾰족머리" (1932~34), "세 명의 병사 Die drei Soldaten" (게오르게 그로스가 삽화를 넣은 아동용 서적),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개작.
1933년 1월 28일, 에어푸르트에서 "조치"의 공연이 경찰에 의해 금지됨. 그 제작자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음. 다름슈타트 주립극장에서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공연하려는 계획이 시의회 의원들에 의해 거부됨. 2월 28일, 의사당 화재가 있던 날 가족 및 몇몇 친구들과 함께 독일을 떠나 프라하, 빈을 거쳐 취리히로 망명. 4월에서 9월까지, 카로나(테신)에 있는 쿠르트 클레버의 집에 머무름. 3월 10일,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브레히트의 책들이 공개적으로 소각됨. 6월, 파리에서 게오르게 발랑쉰의 지휘 아래 로테 레니아 주연으로 "일곱 가지 죽을 죄"가 단 한번 공연됨. 잠시 파리에 머문 후 가족과 함께 코펜하겐에 체류. 덴마크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그의 추방을 요구하나 정부가 거절. "일곱 가지 죽을 죄", "호라티가와 쿠라티가 Die Horatier und die Kuratier" (1933~34) 발표.
1934년 "회합 Die Sammlung" (암스테르담), "새 세계무대 Die neue Weltbuehne" (프라하), "새 독일신문 Neue deutsche Blaetter" (프라하), "우리 시대 Unsere Zeit" (파리) 등 망명자 잡지들에 기고. 11월에서 12월까지 한스 아이슬러와 함께 런던에 체류. "서푼짜리 소설", 가요, 시, 합창들 집필.
1935년 7월 8일,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민권을 박탈당함. 6월 21 ~ 23일, 파리의 국제 작가회의에서 연설. 시립 레퍼터리 극장에서 11월 19일, "어머니"를 공연 하기 위해 뉴욕으로 감.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1935~1938), "오락극인가 교훈극인가 Vergnuegungstheater oder Lehrtheater", "진리를 쓸 때의 다섯 가지 난점" 발표.
1936년 1 ~ 2월, 한스 아이슬러와 함께 뉴욕에서 반파시즘 선언. "일곱가지 죽을 죄"가 코펜하겐에서 한 차례 공연된 후 중단됨. 11월 4일, 코펜하겐에서 "둥글머리와 뾰족머리" 초연. "국제문학 Internationale Literatur" (모스크바)에 기고. 리온 포이히트방어 및 빌리 브레델 Willi Bredel과 함께 문학 월간지 "말" (모스크바)의 편집을 맡음(1939년 3월까지). "중국 연극예술에 관한 논평".
1937년 5월, 브레히트의 연출로 파리에서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공연. "카라르 부인의 총" 집필. 파리에서 10월 17일 독일어로 초연됨(슬라탄 두도프 공동연출). 10월, "투이소설 Tui Roman"(미완성) 집필 시작. 9월 28일, 이베트 길베르 Yvette Guilbert와 함께 파리의 에트왈극장에서 "서푼짜리 오페라" 공연.
1938년 코펜하겐에서 "카라르 부인의 총" 공연을 계기로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 Martin Andersen - Nexoe와 함께 파리의 일레나 홀에서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가운데 몇 장면 공연(슬라탄 두도프 연출). 5월 26일, 뒤셀도르프에서 브레히트의 작품들이 "퇴폐 예술전"에 전시됨. "리얼리즘적 글쓰기 방식의 폭과 다양성", "갈릴레이의 생애" (1938~1939), "사천의 선인" (1938~1939) 완성.
1939년 5월 12일, 런던에서 "창조적 망명"이라는 망명자 모임에 참가. 5월 20일, 부 사망. 6월, 파리에서 피에르 아브라함스의 새 극단 "앙주 희극단"을 통해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공연. "불규칙박자의 무운시에 관해", "루쿨루스의 심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스벤보르 시". 1940년 5월 12일, 베로뮌스터 라디오로 "루쿨루스의 심문" 방송. 4월, 히틀러 군대의 덴마크 점령 직전, 스웨덴을 거쳐 핀란드의 여류 작가 부올리요키의 영지로 피신. "연구들 Studien", "연극예술의 새로운 기술 Neue Technik der Schauspielkunst", "거리의 장면 Die Stassenszene", "푼딜라씨와 그의 하인 마티" (1940~1941), "민중극에 대한 논평 Anmerkungen zum sstueck".
1941년 4월 19일, 취리히 극장에서 "억척어멈" 초연. 5월, 핀란드에 독일군단이 넘 게 되자 브레히트는 가족과 함께 시베리아 특급열차로 모스크바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감.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 페드로(캘리포니아)로 감. 헐리우드 옆의 산타 모니카에서 집을 구함. 여기서 리온 포이히트방어, 페터 로제, 프리츠 코르트너, 프리츠 랑, 레온하르트 프랑크 Leonhard Frank, 페르디난트 브루크너 erdinand Bruckner, 앨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위스턴 휴 오든 Wyston Hugh Auden, 크리셔우드 Christopher Isherwood, 한스 아이슬러, 파울 데사우, 하인리히 만 등과 만남. 찰리 채플린과 교제.
1942년 아르놀트 쇤페르크와 만남. 10월, 리온 포이히트방어와 함께 "시몬 마샤르 의 환상" 작업 착수 (1943년 2월까지). 에릭 벤틀리, 프리츠 코르트너, 프리트 랑, 블라디미르 포츠너 등과 함께 영화 제작 계획. "건설 Aufbau"(뉴욕), "오스트리아 아메리카 트리뷴 Austro American Tribune"(뉴욕), "다른 독일 Das andere land"(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의 잡지에 기고.
1943년 2월 4일, 취리히 극장에서 "사천의 선인" 초연. 2월, 피스카토르와 뉴욕에 서 함께 지냄. 9월 9일, 취리히 극장에서 "갈릴레이의 생애" 초연. 파울 데 사우와 "행복의 신의 여행 Die Reisen des Gluecksgotts" (1947년까지) 제작.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에서 (프리츠 랑과 공동감독으로) "교수형 집행자들도 죽는다" 제작. 뉴욕에서 W. H. 오든과 Chr. 이셔우드의 번역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한 푼 A Penny for the poor"("서푼짜리 소설") 출판.
1944년 "코카서스의 백묵원" (1944~1945) 집필.
1945년 뉴욕에서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공연.
1946년 찰스 로튼과 "갈릴레이의 생애" 번역 및 공연. 뉴욕으로 여러 차례 여행.
1947년 베를린에서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처음 공연. 7월 31일, 헐리우드 옆의 비벌리 힐즈에서 찰스 로튼 주역으로 영어판 "갈릴레이의 생애" 초연. 11월, 워싱턴에서 반미활동을 이유로 심문 받음. 12월 7일, 뉴욕의 막심 엘리어트 극장에서 "갈릴레이의 생애" 공연. 미국을 떠나 취리히로 감.
1948년 취리히 호숫가의 취리베르크에서 집을 구함. 막스 프리쉬, 귄터 바이젠보른 her Weisenborn과 함께 지냄. 2월, 헬레네 바이겔 주역으로 "안티고네" 모범공 "갈릴레이의 생애"의 모범판. 6월 5일, 취리히 극장에서 "푼틸라씨와 그의 하인 마티" 초연. 서독 입국 허가를 기다림. 연합국 관청에서 이를 거부하자 체코 여권으로 8월에 프라하를 거쳐 동베를린으로 감. 바이센제에 집을 구함. 독일극장 총감독을 맡음. "안티고네 모델 1948", "연극론 소책자", "파리코뮌 시절", "칼렌더 이야기".
1949년 주르캄프 출판사에서 "시험 Versuche" 재간행. 9월, 헬레네바이겔과 함께 베를린 앙상블 설립. 1월 11일, "억척어멈", 11월 12일, "푼틸라씨와 그의 하인 마"를 독일 극장에서 베를린 앙상블을 통해 공연. "줄리어스 시저씨의 사업"(미완).
1950년 4월 15일, 독일극장에서 베를린 앙상블을 통해 렌츠의 "가정교사" 공연. 동 베를린에서 독일예술원 회원으로 됨. 4월 12일,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오스트리아 국적 취득, 부코에서 집을 구함.
1951년 1월 10일, 독일극장에서 베를린 앙상블을 통해 "어머니" 공연. 3월 17일, 베를린 국립오페라에서 "루쿨루스의 심문" 공연. 사회주의 통일당(SED)이 텍스트 시정 명령. 동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연극제에서 "헤른부르크 보고서 errnburger Bericht" 초연. 9월 26일, "독일 작가 및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10월 7일, 일급 민족상 수상. 11월 8일, "세계평화위원회에 보내는 서한", "헤른부르크 보고서", "기장 기르기", "백 편의 시 Hundert Gedichte" 발행. "극장에서의 변증법 Die Dialektik auf dem Theater"(1951~1956).
1952년 2월, 바르샤바 여행. 11월 16일, 독일극장에서 베를린 앙상블을 통해 "카라 르 부인의 총" 공연.
1953년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아더 밀러 Arther Miller, 어니스트 헤Ernest Hemingway에게, 에델 Ethel 및 율리우스 로젠베르크 Julius Rosenberg 때문에 전문을 보냄. 동서 양측 펜클럽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됨. 5월 17일, 독일극장에서 베를린 앙상블을 통해 에르빈 슈리트마터의 "고양이 무덤 raben" 공연. 베를린의 6월 17일 봉기에 대해 울프리히트에게 편지를 보냄. 이 가운데 마지막 문장만 공개됨. 6월 21일, 또 다시 울프리히트에게 전문을 보냄. "투란도트 혹은 변론자의 회담 Turandot oder der Kongress der Weisswaescher". "부코 비가 Buckower Elegien".
1954년 3월, 베를린 앙상블이 "쉬프바우어가의 극장"으로 이사함. 6월 15일, 베를 린 앙상블을 통해 "코카서스의 백묵원" 초연. 7월 말, 파리 연극제에서 베를린 앙상블이 "억척어멈" 공연으로 일등상 수상. 10월, "나의 초기 작품들을 개관하며 Bei Durchsicht meiner ersten Stuecke". 12월 2일, 요하네스 R. 베허와 함께 "전 베를린 토론회 Gesamtberlin Gespraeche" 주도. 12월 21일, 국제 스탈린 평화상 수상 결정. 주르캄프 및 아우프바우 출판사에서 브레히트 전집 출판 시작.
1955년 1월 12일, 베를린 앙상블을 통해 요하네스 R. 베허의 "겨울 전투" 공연. 1 월, 스탈린상 수상을 위해 모스크바 여행. 2월 12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독일 평화위원회에서 파리 협정에 반대하여 연설. 3월 23 ~ 24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펜클럽 회의에 참가. 극장에 관한 다름슈타트의 토론회에 "현재의 세계는 극장을 통해 재현될 수 있는가 Kann die heutige Welt durch Theater wiedergegeben werden?"라는 글을 기고. 6월, 파리 연극제에서 베를린 앙상블이 "코카서스의 백묵원"으로 또 한 번 수상함. 집필을 위해 은거하려고 덴마크의 해변에 집을 한 채 삼. "전쟁 입문" 집필.
1956년 1월, 제4차 독일 작가회의에서 연설. 바이러스성 감기로 공중병원에 입원. 7일 연방의회에 보내는 공개서한 Offener Brief an den deutschen Bundestag in Bonn". 8월 10일, "갈릴레이" 공연을 위한 베를린 앙상블의 최종 리허설. 8월 14일 23시 45분경, 심근경색으로 사망. 8월 15일, 프리츠 크레머가 데드마스크 제작. 8월 17일, 베를린 도로테 묘지에 안장. 8월 18일, 쉬프바우어가에서 장례식.




■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의 생애


언젠가 브레히트는 그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그 사람의 초상을 하나 만들어 그가 그것에 비슷해지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놀란 사람들이 물었다. "누가요. 그 초상이 그 사람에 비슷해진다고요." 브레히트는 차분하게 "아니오, 그 사람이 초상에 비슷해지도록 말이오" 라고 말했다. 이 뜻밖의 답변은 사람은 모름지기 마지막 순간에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브레히트의 신념을 반영해 주고 있다. 또한 "내 자신 속에 한 사람이 들어 있는데, 너희는 그 위에(그것을 토대로 삼아 - 역주) 어떤 것도 지을 수 없을 것이다"는 그의 고백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신뢰할 수 없음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변화를 옹호하는 말이다. 사랑이란 어떤 완성된 사람, 즉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가(흔히 시민사회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듯이) 그 사람이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자 이내 실망해 버리는 어떤 "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고, 그 사람 이상의 것, 그 사람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태도이다.

브레히트는 아욱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우선 부친이 아직 회사원이었을 때 소시민적 환경에서 살았다. 부친이 하인들Haindl의 제지공장의 지배인으로 진급하고 나중에 공장장으로까지 진급하자 그의 가족은 재단소유의 거주단지로 이사하였다. 주변은 프롤레타리아의 환경이었지만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의 크기나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은 그러한 주변환경과 대조를 이루었다. 젊은 브레히트는 이러한 삶의 장점들을 향유하였다. 그는 평범한 부르주아적 청소년기를 보냈고 최초로 습작도 시도했다. "조국의 출범 vaterlandischer Aufbruch" (1914)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한 그는 황제와 전쟁과 조국에 열광적인 찬사를 담은 글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그와 반대되는 면모도 보였다. 이러한 면모는 그가 주도하던 동호회(기타를 치며 노래하기도 하는)인 브레히트파派에서 발전되었다. 이들은 시민들을 놀라게 하면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고 주로 자연 속에서 모임을 가졌다. 1918년 최초의 장편 드라마로 구상된 바알Baal이라는 인물은 비록 브레히트 자신을 제한적 의미에서 반영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의 반反부르주아의 태도가 반영된 인물이다. 바알은 사회적 인습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애호 받는 가치들을 모두 부정하며(젊은 브레히트의 니힐리즘) 자신의 "천성적인" 생명력을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소진시키는 천재적 작가상을 나타낸다. 대학시절을 그는 아욱스부르크와 뮌헨을 왔다갔다하면서 보냈다. 1918년에 쓴 「죽은 병사의 전설」이라는 시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 때문에 그는 20년대에 벌써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브레히트는 뮌헨에서 한번도 제대로 대학공부를 한 적이 없다. 그 대신 그는 최초로 대성공을 거둔 드라마 『한밤의 북소리』(1919)를 써서 클라이스트상賞까지 받게 된다. 브레히트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어링 Herbert Jhering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 문학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고 극찬하였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새로이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부르주아계층階層을 비판한다. 이 부르주아들은 자기들의 몫을 확보하려 한다. 20년대의 인간상을 브레히트는 현실적응주의자인 겔리 게이라는 인물 속에서 포착하였다. 1924년과 1926년 사이에 쓴 희곡 『남자는 남자다 Mann ist Mann』는 인간을 내면 깊숙이 까지 변화시키는 사회적 변화들에 대한 "동의"를 변호한다. 인간은 기술에 종속되어 있고 대중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고립, 소외, 익명성 등이 그러한 대중사회와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동의란 새롭게 주어진 것들을 아무 유보 없이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라는 것이 단순히 소망의 영역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회적 현실에 개입해 들어갈 필요가 있음을 나타낸다. 1924년에서 1931년 사이의 시기는 흔히 "행동주의 Behaviorismus"라는 표제어로 기술되는 브레히트가 자본주의적 적응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시기는 아니다. 그 시기는 늦어도 『한밤의 북소리』에서 시작한 시기이다. 그가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강압들에 항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강압들의 사실성과 인간을 각인시키는 힘을 함께 계산에 넣은 시기이다. 이야기 (이를테면 「북해 새우들 Nordseekrabben」, 1926), 시 (『도시민들을 위한 책 Das Lesebuch fur Stadtebewohner』, 1930) 그리고 희곡 (『도시의 밀림 속에서 Im Dickicht der Stadte』, 1922)에서 그가 거듭 보여준 것은 사회의 발전은 자율적 시민으로서의 개인을 이미 시민계층 자체 내에서 말살시켰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대중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다시 개인으로서 자신을 회복하려고 하면 그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 그에 따라 개인이 무엇이냐를 규정할 때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개인은 더 이상 주어진 것으로 전제될 수 없고 사회적 과정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 "동의한다"는 것 (즉 이해했다는 것,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변화이며 인간 자체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전제이다. 아울러 그것은 "대중"을, 다시 말해 계급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적 힘으로 인정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브레히트의 리얼리즘에는 적절한 생산장소를 택하는 일도 속한다. 그가 1924년까지 작업했던 뮌헨은 비교적 비판적인 동시대인들이 볼 때에 속물화한 거대한 시골로서 장기적으로 별 볼 일이 없었다. 브레히트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자신의 작품들의 공연을 주도하면서 베를린으로 이주할 준비를 한다. (『한밤의 북소리』는 1923년 12월 베를린의 Deutsches Theater에서 공연되었고, 『도시의 밀림 속에서』는 얼마 후 또 같은 극장에서 초연 되었다.)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헬레네 바이겔 Helene Weigel을 그는 벌써 1923년에 알게 되었고 사랑하였다. 브레히트는 고독한 작가적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찾기보다는 분주한 활동을 찾았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대도시의 정글과 사람들과의 교제와 자신의 작업이 공적으로 속히 인정받는 것과 많은 협력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필요한 공동작업을 이미 텍스트-생산 자체에 적용하였다. 그는 모든 정보의 가능성을 이용했고 대화할 때 끈기 있게 경청했다. 그 대화내용을 동시에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 언제나 남녀 친구들로서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1924년부터 브레히트가 죽을 때까지)과 마가레테 스테핀 (1932년부터 1941년 요절할 때까지)을 직접적인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이것 또한 문학과 사회의 변화된 관계에 대한 통찰에서 이루어졌다. 고독과 자유 속의 개인이 아직 쓸모 있는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큰 건물들과 개인이 지을 능력이 있는 그러한 건물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코이너씨의 이야기』의 말미에서 독창성 Originalitat에 대해 조롱하는 말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서푼짜리 오페라』의 초연 뒤에 케어 Alfred Kerr가 가한 표절비난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기존의 것을 이용하는 것은 브레히트로서 당연했다. 그는 케어가 자신에 대해 제기한 표절시비를 자신은 "정신적 소유의 문제에서 원칙적으로 느슨하다"는 말로 일축했다. 모든 전통은 이처럼 가공될 수 있었고 삼중적 의미에서 "지양"될 수 있었다. 즉 가장 즐겨 하기로는 고대 로마 (호라티우스), 셰익스피어, 그리고 루터의 성경이 그것이다

1926년은 브레히트의 전기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로 기록된다. 그는 칼 마르크스를 읽었다. 실제로는 "전환"이라 보다는 그 자신의 리얼리즘에 대한 구상에서 파생된 예견할 수 있었던 결과였다. 초기에는 전기적 성격을 띠었던 그의 작품세계는 점점 더 "시대적 작품"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현실의 문제들과의 대결을 담았고 "한 인격의 표현"이고자 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그의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유래한다. 즉 그는 작품들을 텍스트든지 공연이든지 언제나 새로이 개작하고 "현재화"하였다. 이를테면 『갈릴레이』는 세 가지 판으로 존재한다. 첫째 판(1938)은 작품의 주인공 갈릴레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과학을 배반한 이유로 "실각"하고 "제거"되는 과정이 중심에 놓여있다. 브레히트가 미국 망명시절에 찰스 로흐톤Charles Laughton과 함께 작업한 둘째 판(1944/1945)에서 비로소 원자폭탄이라는 주제가 추가된다. 셋째 판(1953)에서 원폭의 일상성, 그리고 과학이 자명하게 그 원폭을 제조하는 일에 공조한다는 사실이 표현되고 있다. 흔히 주장되는 것과는 달리 브레히트의 마르크스의 읽기는 그의 문학의 "이데올로기화"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는 브레히트에게 주어진 현실들을 파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교육극 시절"(1928-1931)에 쓰여진 『조치 Die Manahme』와 같은 작품조차 마르크스주의의 테제를 형상화한 작품이 아니라 재치 있게 구성한 심미적 집단연습에 속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무식한 오락과 관객 어르기를 통해 대중매체들이 확산되는 데 대해 일종의 의사소통의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관객은 일방적으로 "서비스 받으며"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수용에서의 수동성), 적극적으로 도전 받고 참여에로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적 형식들을 통해 사람들이 물어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사람들이 물어야 하는 것은 미학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미학도 아니다." 이것이 브레히트의 심미적 모토였다.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은 결코 브레히트가 "심미적인 것"을 포기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브레히트는 이 시기에 『서푼짜리 오페라』(1927/1928)를 썼고 이 극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브레히트는 이 오페라를 자기에게 열광의 갈채를 보내는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의도했다. 그는 시대에 맞는 심미적 수단을 찾아낸 것이다. 브레히트 자신이 쉰 목소리로 불렀던 매키 매써(오페라의 주인공 - 역주)의 노래는 유행가로 히트를 쳤고 베를린의 사회는 스스로 창녀와 뚜쟁이와 깡패들의 화류계로 등장했다. 그러한 한에서 이 오페라의 성공은 그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객관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사회는 그 작품을 간지럽고-껄끄러운 오락으로 즐겼다. 다시 말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그 종말(1930)을 예고하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정치와 경제의 상황을 알았다. 그러나 강력한 노동운동을 통해 어떤 대항세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을 냉철하게 예견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교육극들과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Die Mutter』를 따라 만든 혁명극과 상황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 Kuhle Wampe (둘 다 1930)를 가지고 적절하게 선동하고 또 노동자들의 연대를 촉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무위로 끝났다.
나치가 "집권"하자 브레히트는 모든 작업의 토대를 잃었다. 제국의회 화재(1933. 2. 27)를 본 그는 그 사건의 정치적 파장을 곧장 간파했고 독일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선 프라하, 비인, 파리를 거쳐 나중에 덴마크의 스벤드보르크에 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조수인 스테핀과 함께 1933년에 1939년까지 살면서 작업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작품활동의 초점을 전적으로 반反파시즘적 투쟁에 맞추었고 자신의 작품의 테마와 언어를 그 방향에 정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활동을 통해 독일에서 반反파시즘적 세력들이 강해져 이들이 정치적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랬다. 그는 파시즘에서 "야만의 분출"을 보고 또 파시즘에 대항하여 "문화"를 "구제"해 내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조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5년 파리에서 "문화의 방어"를 위한 국제 작가회의에서 그는 이제야 말로 "소유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또 여전히 문화의 구제에 대해 떠드는 이 마당에 정작 구해야 할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촉구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목 졸린 자에게 말이 목에 걸려있다"고 하면서 브레히트는 "그 세계가 깨어났을 때 (나치의 집권 - 역주)" "말은 잠들어 있었다"고 한 칼 크라우스에 반박하였다.

브레히트는 히틀러가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나중에 전쟁이 나서 핀란드(1940)와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하기 전에 덴마크에서 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1941)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전쟁을 계속 행하는 장사로서 보여주며 세 아이들을 잃는 억척어멈의 예를 통해 그 장사에 수반되는 희생들을 드러내 준다. 바이겔이 연기한 『억척어멈』은 나중에 브레히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 되었다. 겉보기에 다정하고 활동적이면서 무자비한 자본가의 전형을 제시한 핀란드의 민속극 『푼틸라 나리와 그의 종 마티』(1940)는 계급화해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1941)은 미국을 겨냥한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그는 자본주의 경제와 시카고의 갱의 세계와 파시즘의 정치적 상승 사이의 연관관계를 그의 새 망명국에 제시하고자 했다.

애초에 브레히트는 미국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산타 모니카(캘리포니아)에 갔고 무엇보다 헐리웃에서 영화대본작가로 활동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일찍부터 소련이 승리하리라고 믿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멤버인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망명가들의 비판적 관찰자로 남았다. "다른" 독일 (전쟁에서 패망할 나찌독일 뒤의 독일- 역주)에 관해 망명객들 사이에 뜻을 일치시켜 이에 기여하면서 활동하려 했다. 그의 시도는 "집단적 죄"를 주장하는 명제에 걸려 좌절하였다. 벌써 그는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대결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았다.

독일로 되돌아 온 것은 당연했다. 독일에서 브레히트는 자신의 관객, 또한 자신의 고향과 자신의 "민족"을 보았다. 접근은 스위스를 경유하여 이루어 졌다. 두 독일 국가가 세워진 뒤에 취득한 (1950) 오스트리아 여권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온전한 하나의 독일을 바라는 그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1945)와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국민이 소유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옹호하였다. "있는 것은 그것을 위해 좋은 자들에게 속해야 한다" 는 『파리 혁명정부 시절』(1948/1949)을 통해서 혁명적 해결, 곧 사회주의적 독일을 옹호하였다. 그가 동독 쪽으로 귀국할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브레히트는 말년을 베를린 앙상블에서 실제적 연극작업을 하는데 보냈다. 베를린 앙상블은 쉽바우어담 극장 Theater am Schiffbauerdamm에 자리잡았고 바이겔이 극장장을 맡았다.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소포클레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부르주아적 해석을 "물려받는" 데 반대한다. 그들을 재해석함으로 그러한 해석전통을 비판적으로 제거하는 작업을 했고 또 평화의 유지를 위해 싸웠다. 그의 리얼리즘과 변화에 대한 동경은 그를 일찍부터 현명하게 만들었다. 『부코우 비가』 (1953)는 괴테의 『서동시집』에 비견할 만한 말년의 작품으로 그의 나이 55세에 쓰여졌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나는 편안한 작가가 아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렇게 남기를 바란다고 써주시오. 그렇다 해도 모종의 가능성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의 작품세계


1898년 독일 아우구스부프크에서 한 제지공장직원의 아들로 태어남 1956년에 사망하기까지 희곡작가 및 연출가로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1918년 처녀작 "바알" 을 발표한데 이어 "한밤의 북소리" 등 희곡을 잇달아 발표했다. 후기에 "갈릴레이의 생애"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사천의 선인들"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의 대작을 남겼다. 나치즘의 광기가 본격화되자 그는 덴마크, 핀란드 등을 거쳐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치즘이 패망하기까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희곡과 연극 이론에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 놓았다.

브레히트에 있어서 연극의 목적은 "어떻게 살아 남아야 하는가"와 ‘그 방법을 관객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배우에 대하여 자신들이 연기하고 있는 인물과 정서적으로 일체될 뿐 아니라 문제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관객을 "이화" 하기 위하여, 곧 무대와 관객과의 사이를 넓혀서 "동화" 를 막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클라이맥스 직전에 장면을 중지했다. 또한 슬라이드를 사용하여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장면의 요점을 강조하는 말이 영사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끈임 없이 "극행동" 을 소개했다. 각 장면의 마지막에서 낮은 하얀 커튼을 치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이화효과"에 의해 관객은 극행동을 차분히 생각하게 된다. 이로써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내고 그 결과 "더욱더 유익한 사회의 일원으로 된다" 라고 생각했다. 현대연극을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브레히트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연극예술에서의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시대상황(저작 후기)

193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독일의 문학은 그야말로 어두운 시기였다. 특히 그중 희곡 문학은 문학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의해 가장 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나치스는 그들이 내세운 소위 "민족적"예술관에 부합되지 않는 현대예술을 "퇴폐한 예술"이라고 낙인을 찍고 정치적으로 규제했다. 정치적 규제가 무대예술을 질식시켰다. 그 결과는 독일 연극의 고립화하였다. 외국의 희곡문학과 교류가 단절된 독일 희곡은 고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외로 망명한 희곡 작가들의 창작활동은 점차로 고갈되어갔다.

문학 예술에서 완전한 획일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한 나치스는 공개적으로 서적 소각을 실시하는 한편 동조하지 않는 문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일부작가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바로 이시기에 브레히트도 망명길에 올랐다. 바로 이 시기가 그의 서사적 걸작품들이 쓰여진 시기다. 서사극 브레히트의 연극론은 종래의 극장과 표현주의 연극에 대한 공격에서 출발했다. 브레히트는 1926년 전환점으로 서사극이라는 새로운 연극 형식을 찾았다. 마르크스주의 학습으로 그의 사상적 이념적 배경을 굳혀갔다. 그의 노력은 종래의 연극을 몰락시키는데 참여했다. 부정적인 측면을 벗어나서 새로운 연극 형식인 서사극을 구축해 나가는 긍정적인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생산적인 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1929년이었다. 이 해에 브레히트는 새로운 획기적인 생각을 전개하여 얼마 후 1930년과 1931년에 이를 좀더 체계화했다. 서사극은 현실의 파악을 위해서 자체가 완성된 구조적 아름다움을 중요시했다. 종래의 희곡과 달리 직선적 인간관계의 사슬을 벗어나 곡선을 그리며 진행된다. 각 장면은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간직한다. 연극전체의 결말에 대한 긴장보다 각 장면의 진행 과정에 대한 긴장이 더 중요하다. 이런 종류의 서사적 요소는 유럽 연극 발달의 초기단계에서 이미 있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원시적인 상태로의 퇴행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아시아 연극의 모범" 에 관심을 가지고 여기서 서사극적 요소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서사극에서 관객은 새로운 주요 요인으로 등장했다. 브레히트는 이미 서사극의 관객이 "냉정하고 탐구적이며 관심을 가진 자세, 곧 과학적 시대를 사는 관객의 태도"를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관객의 새로운 자세가 여기서 더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브레히트는 서사극의 관객이 극장에 들어갈 때 천문대나 체육관에 들어가는 사람들처럼 침착하게 관찰하고 숙고하며 통제하는 과학적 자세를 취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종래의 연극이 꾀하는 암시에 무기력하게 말려들어 감정이입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래야 무대 위의 사건 진행에 대해서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세로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은 예술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 소외효과

완벽한 환상을 목표로 하는 연극은 관객이 마치 사건의 현장에 와서 우연히 그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실제의 사건을 참관하게 되었다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자기의 판단이나 상상력을 까지도 끼어 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을 사진과 같이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표면 뒤에 숨어있는 실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는 항상 예술과 현실의 구분을 강조했다. 현실의 인식과 그것의 실제적 변화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무대상의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연극에서 제시된 사건, 그리고 그것의 인위성까지 동시에 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소외효과"의 개념을 찾을 수 있다. 감정이입은 보는 이의 비판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외효과"로 인해 관객은 눈에 보여지는 것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 서사극 기법

서사극의 기법에는 "해설자의 개입" "노래의 삽입" 등이 있다. 그는 서사극 이론체계의 핵심적인 개념인 소외 및 소외효과를 효과적으로 이룩하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사용한다. 이 중 해설자의 역할을 통하여 이런 기법들이 어떤 식으로 소외효과를 돕는지 알아보면 "해설자" 는 공연에 참여하지는 않고 연극 밖에서 연극적 사건을 연결해 주거나 또는 해설하는 서사적 보고자로서 기능을 발휘한다. "해설자"는 관객에 대해서 우월한 위치에 서서 사건 전반에 관한 개관을 하고 이에 대해서 침착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음유시인과 같다. 그의 역할을 통해 무대 위의 사건 진행은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중개되고 무대 위의 사건진행에 직접적으로 말려들지 않는 관객은 이에 대해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 서사극 이론과 형식

전통적 희곡 형식 - 서사극 형식
관객을 행위 속에 끌어들인다 - 무대가 사건을 이야기
그의 능동성을 소모시킴 - 그의 능동성을 일깨움
그의 감정을 가능케 함 - 그로부터 결단을 강요함
그에게 체험을 중개 - 그에게 지식을 중개
관객은 사건 진행 속으로 말려든다. - 관객은 사건 진행에 대립된다.
암시의 수단이 사용된다. - 논증의 수단이 사용된다.
감정이 축적된다. - 인식에 이르기까지 몰아간다.
인간은 기지의 존재로 전제된다. - 인간은 연구의 대상이다.
고정 불변이 인간 - 가변적이며 변화시키는 인간
결말에 대한 긴장 - 진행에 대한 긴장
한 장면은 다른 장면을 위해 존재 - 각 장면은 독자적으로 존재
사건들이 직선적으로 진행 - 굴곡을 이룸
진화적인 사건 진행의 필연성 - 진행의 도약성
현존하는 대로의 세계 - 생성하는 세계
인간의 의무 - 인간의 필연성
인간의 본능 - 인간의 동기
사유가 존재를 규정 - 사회적 존재가 사유를 규정

서사극은 현실의 파악을 위해서 자체가 완성된 구조적 아름다움을 중요시한다. 종래의 희곡과 달리 직선적 인간관계의 사슬을 벗어나 곡선을 그리며 진행된다. 각 장면은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간직한다. 서사극이 희곡적 연극에 정반대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사극은 후자에 새로운 장조점을 추가한다. 이들은 후자의 효용성을 지양함으로써 한편으로 종래의 희곡론을 부정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종래의 연극에서 무의식적으로 실현되었던 관점을 의식화하고 계속시킴으로써 보전한다.





■ 주요작품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베르톨트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 졌다



* 이 시에서 탁월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진리는 구체적이다""라는 좌우명답게 내용이 구체적이며 산문적이다. 그 구체성은 어떤 상징적 기법보다 사물과 사실의 진실을 드러내는데 충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브레히트는 무엇보다 희곡으로 유명하다.






톱질하는 사람들 /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들은 나무에 앉아
자신이 앉아 있는 가지를 톱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누가 더 빨리 톱질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듯이.
그리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쳐다보던 다른 사람들은
톱질을 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톱질을 계속 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모든 것은 변화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포도주 속에 부은 물을 당신은
다시 퍼낼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포도주 속에 부은 물을 당신은
다시 퍼낼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화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아침 일찍 잠이 깨어
지빠귀의 노래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내게서
죽음의 공포가 사라졌다는 걸.
나 자신이 없어지리라는 것을 빼놓으면
다른 것은 하나도 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 들려올 지빠귀의 노래 소리를
이제야 비로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 /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은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시詩에 불리한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脚韻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서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 이 시는 브레히트가 독일의 나치 정권 치하에서 덴마크로 망명하여 생활할 때 쓴 시로, 어두운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사회 참여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심정을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당의 뒤틀린~말해 준다"는 억압받는 토양에서는 나무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어둡고 힘든 삶을 사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사회와 삶의 터전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시인의 사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하지만~옳다"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잘못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소극적인 민중의 태도 역시 비판하고 있다. 이 시의 2,3,5연은 대립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대립적 문맥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함축한다. 따라서, "내 시에 ~ 보일 것이다."라는 시적 화자의 진술은,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조화와 행복의 세계를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시에 불리한 시대"란 조화와 행복한 세계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시대적 어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제목이다.





임시 야간 숙소 /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 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노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사람에게 / 베르톨트 브레히트-


너는 말한다:
우리의 상황은 나쁘다고.
어둠이 늘어난다. 힘은 줄어든다.
이제 우리가 그렇게 수많은 해 동안 작업을 한 후에
우리는 처음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있다
그러나 적은 훨씬 더 강해져 있다
그의 힘은 신장된 듯하다 그는 무적의 모습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실수를 하였다 그것을 우리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수는 줄어간다
우리의 구호는 혼돈 속에 있다 우리의 말들 중 일부는
그 적이 알아볼 수 없게끔 비꼬아 버렸다
이제 우리가 말했던 것에 대해 뭐가 잘못되어있는가.
몇몇 개인인가 아니면 전부인가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의지하는가 우리는 살아있는 강으로부터
내던져져 남아있는 자들인가 우리는 더 이상
어느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로부터 이해 받을지도 못한 채 살아남는 것인가
우리가 운이 있어야하는가
이렇게 너는 묻는다 너의 대답
이외에 다른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는 말라





선善이 무슨 소용이랴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선善이 무슨 소용이랴
선善한 이들이 얻어맞아 죽거나
선善한 이들에게 선행善行을 베푼 이들이 얻어맞아 죽는다면

자유가 무슨 소용이랴
속박 아래 자유인들이 살아야 한다면

이성이 무슨 소용이랴
부조리不條理가 모든 이가 필요로 하는
음식을 조달할 수가 있다면

오로지 선善하기보다는
선善이 가능한 상황을 창조하는데
노력하여라 보다 좋은 것은
선善이 넘치도록 하는 것이다

단지 자유롭기보다
모든 이가 자유로운 상황을 창조創造하도록 노력하여라
또한 사랑이 자유로움으로 흘러 넘치도록

단지 이성적理性的이기보다
개개인의 부조리不條理를 나쁜 일로
여기게되는 상황을 창조創造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망명기간에 관한 단상 / 베르톨트 브레히트


1

벽에다 못을 박지 말자.
저고리는 의자 위에 걸쳐놓자.
무엇 때문에 나흘씩이나 머무를 준비를 하느냐
너는 내일이면 돌아갈 것이다.

어린 나무에 물을 줄 필요도 없다.
나무는 또 무엇 하러 심겠느냐
그 나무가 한 계단의 높이도 자라기 전에
너는 즐겁게 여기를 떠날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 모자를 얼굴 깊숙이 눌러 써라
무엇 때문에 외국어 문법책을 뒤적거리겠느냐
너를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식은
모국어로 씌어져 있을 것이다.

서까래에서 석회가 떨어지듯
(그것을 막으려고 하지 마라)
정의에 거역하여
국경에 설치해 놓은
폭력의 울타리는 썩어 무너질 것이다.


2

네가 벽에 박아 놓은 저 못을 보아라.
언제쯤 너는 돌아갈 것 같으냐
네가 마음 속 깊이 믿고 있는 지가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날이면 날마다 너는 해방을 위하여 일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다.
네가 너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저 밤나무를 보아라.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를
너는 이제 그리로 무겁게 나르고 있구나





여덟 번째 코끼리의 노래 / 베르톨트 브레히트
- 희곡 "사천의 선인" 삽입


일곱 마리 코끼리가 진 서방에게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여덟 번째가 왔다
일곱은 거칠고 여덟째는 길든 놈이었다
하여 그들을 감독한 것을 여덟째였다
더 빨리들 걸어라
진 서방은 산이 하나 있는데 밤이 오기전 개간이 끝나야 한다
그런데 이제 밤이 곧 닥치는 구나

일곱 마리 코끼리가 숲을 개간한다
그리고 진 서방이 여덟째에 높이 올라탔다.
온 종일 여덟째는 게으름 피우며 감독했다
하여 그들이 해 놓은 것을 구경했다
더 빨리들 걸어라
진 서방은 산이 하나 있는데
밤이 오기전 개간이 끝나야 한다
그런데 이제 벌써 밤이 곧 닥치는구나

일곱 마리 코끼리는 더 하기가 싫었다
벌목하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
진 서방은 초조하고 일곱에게 화가 났다
하여 여덟째에게 쌀 한섬을 주었다
어쩌자는 거냐
진 서방은 숲이 하나 있는데
밤이 오기 전 개간이 끝나야 한다
그런데 이제 벌써 밤이 곧 닥치는 구나
일곱 마리 코끼리는 이빨이 없었다
이빨을 가진 것은 여덟 번째 뿐이었다
여덟째가 곁에 있어 일곱을 마구 쳤다
하여 진 서방은 뒤에서 껄껄대고 웃었다
쉬지 말고 걸어라
진 서방은 산이 하나 있는데
밤이 오기 전 개간이 끝나야 한다
그런데 이제 벌써 밤이 곧 닥치는 구나






신들과 선량한 사람들의 무방비 상태에 관한 노래 / 베르톨트 브레히트
- 희곡 "사천의 선인" 삽입


우리나라에서 유용한 인간은 운이 좋아야 하나요 단지
강한 협조자를 찾아 낼 때 그는
스스로 유용함을 보여 줄 수 있나요
선량한 사람은 스스로 도울 수 없고 신들은 무력하나요
악인을 멸하고 선인을 보호할 탱크와 대포가 왜 신들에게 없나요
탱크와 대포가 왜 신들에게 없나요
군함과 폭격기와 지뢰가 왜 없나요
그 편이 우리와 그들에게 아마 더 좋을 텐 데요

(그녀가 슈이타의 양복을 입고 그의 걸음걸이로 몇 발짝 걷는다)

선량한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오래 선할 수 없나요
접시가 빈곳에서 먹는 이들이 싸움판을 벌여요
신의 계명은 궁핍에 도움이 되지 아니 하나요
왜 신들은 우리의 장터에 나타나지 않나요
풍성한 물건들을 왜 미소 지우며 나눠주지 않나요
빵과 포도주로 힘을 얻은 인간들이 서로
친절하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주지 않나요

(그녀가 슈이타의 가면을 쓰고 그의 목소리로 노래를 계속한다)

점심을 한 끼 먹기 위해서
보통은 제국이라도 건설한 가혹함이 필요하나요
열 들을 짓밟히지 않고 아무도
빈곤한 자 하나를 도울 수 없나요
신들은 저 높은 곳에서 왜 떳떳하게 말하지 않나요
선한 사람에게 일단 선한 세계를 빚지고 있노라고
그들은 탱크와 대포로 선인들을 왜 편들지 아니하고
사격개시를 명령하지 않으면서 인내 아닌 인내를 하나요






망명길의 노자와 도덕경의 유래에 관한 전설을 노래한 담시 / 베르톨트 브레히트


1

칠십 줄 노령에 기운이 쇠해 갈 때
스승은 이제 그만 쉬고픈 마음이니
나라에 선행이 다시금 기운 잃고
악행이 다시금 기세 더해 갔음이라.
그리하여 노사는 신 끈을 매었다.


2

소용이 닿는 데로 봇짐을 꾸려 보니
별 것이 있을까 이것저것 모아져
저녁마다 골초로 피우던 담뱃대와
곁에 두어 읽곤 하던 자그마한 책자며
눈대중에 흰 빵을 단속해 넣었다.


3

첩첩산중 접어들 무렵에 스승은
계곡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잊었다.
노사 태운 황소녀석 어슬렁거리며
입질로 길가 풀을 은근히 즐기니
노장은 발걸음이 급할 것 없었더라.


4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바윗골에
세리 하나 나타나 앞길을 막아섰다.
"과세할 귀중품은?"
"그런 것 없어요."
황소 끌던 동자가 이어서 말하기를
"이 분은 선생님이셨는걸요."
그리하여 이것도 쉬이 해결되었다.


5

그러나 기분 들뜬 저 사내 유쾌해져
"그래 뭘 알아내시었나?" 되물으니
동자가 대답하여 "유약한 물도 흘러
세월 가면 거대한 바위를 이긴다는 것이오
알겠소?강한 것이 진단 말이오."


6

마지막 햇살을 행여나 놓칠세라
동자는 이제야 황소를 재촉했다.
일행 셋이 어느새 소나무 돌아 사라질 때
그 사내 갑자기 흥분하여
"어이 거기 서시오!" 소리쳐 불렀다.


7

"노인장, 그 물이 어떻단 말씀이오"
노사 멈춰 "그게 궁금하신가" 물으니
사내가 답하기를 "소인 고작 관문지기오만
누가 누굴 이기는지 그래도 알고 싶소.
그걸 아시면 말씀해 주오"


8


"내게 적어 주시오 아이에게 불러 주오
그런 것은 혼자 알고 가버리지 않는 법.
소인 집에 종이와 먹물이 족히 있고
밤참 또한 있소이다. 소인은 저기 사오.
그만하면 약속이 되겠소"

9

노사가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니
누더기 저고리와 벌거숭이 맨발에
이마는 온통 주름살투성이니
아, 승리자는 그에게 걸맞지 않았다.
"그대 역시" 노사가 중얼거렸다


10

정중한 간청을 기필코 뿌리치기에
노사께서 아마 너무 나이가 드셨던가.
그리하여 소리 높여 말했다. "묻는 자는
답을 얻는 법이지." "아이 추," 동자도 나섰다.
"그러면 잠시 묵어 가기로 하자"


11

그리하여 현인은 황소에서 내렸고
이레 동안 둘이 함께 써내려 갔더라.
음식을 내며 세리는 (목소리 낮추어
밀수꾼들 욕하기를 그칠 줄 몰랐다)
이윽고 글쓰기가 끝났다.


12

어느날 이른 아침 동자가 세리에게
여든 한 편 경구를 건네어 주었다.
약소한 노자 돈에 감사하며 일행은
소나무를 돌아서 바위 골로 들어갔다.
말해 보오, 누가 더 겸손할 수 있겠소


13

그러나 경서 위에 이름이 찬란한
저 현인만 기려서는 아니 되오!
현자의 지혜는 빼앗아내야 하는 법
그래서 세리에게 감사해야 할지니
그가 지혜를 간구 하여 냈음이오



* 해설

담시는 시문학의 하위 장르이지만, 서사문학의 특징인 사건의 서술, 희곡문학의 특징인 대화를 함께 갖춘 "단순형식"의 일종이다. 문학의 3대 장르가 혼합된 점에 주목하여 괴테는 담시를 문학의 "원초적 알 Ur-Ei"이라고 불렀다. 이 담시는 브레히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로, 그가 극작가이자 동시에 뛰어난 시인임을 보여준다. 제5연에 나오는 물의 비유는 <도덕경> 제78장에서 인용한 것으로,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우열에 관한 상식을 뒤엎는, 암흑시대의 민중을 위한 복음이다. 그러나 이 교훈도 일정한 자세의 결과임이 마지막 연에서 강조된다. 도덕경의 지혜는 노자 개인의 업적으로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그 지혜의 사회화를 가능하게 한 세리의 정중한 자세와 진실을 알려는 욕구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은 20세기 초에 독일 작가들이 즐겨 사용한 소재로서, 1차 세계대전 후 풍미했던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전파되었다. 많은 작가들은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개인의 발전과 자기실현을 저해했다는 비관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중국 고대, 특히 자연으로의 복귀를 주창한 노장의 무위론(無爲論)에서 대안을 찾았다. <도덕경>의 유래에 관한 담시는 산문본 노자 이야기인 <겸손한 중국사람들>과 더불어 브레히트의 중국전통에 대한 애착, 그의 전통관, 철학관, 예술관 등을 이해하는 자료로서도 매우 적합하다. 산문본에는 이미 그의 중국철학에 대한 관계를 특징 짓는 다음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다. 1) 노자가 "생활의 예지"를 가르쳤다는 말에 반형이상학적 처신론으로서의 생활철학의 개념이 암시되고, 2) 서양의 이상주의적 고전철학을 비판하기 위한 출발점 내지는 연계점으로 중국철학이 제시되고, 3) 노자와 세리의 관계는 생산적인 사제관계의 상징으로서 여기에 온고이지신적(溫故而知新的)인 브레히트의 전통관이 나타나며, 4) 춘추전국시대라는 중국 고대철학의 역사적 배경이 박해와 압제가 성행하는 작가 자신의 현실을 생소화(verfremden)하기 위한 사건 현장으로 사용되고, 5) 고대 중국에서는 어두운 세태 속에서도 자본주의 시민사회와 달리 생산적인 인간관계가 가능했다는 판단 아래, 이러한 이상향적인 요소가 작가의 미래상에 반영된다.

위에 열거한 요소들은 브레히트가 수용한 중국철학의 3개 분파, 즉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중국의 사상가,시인들과 공감한 이유는 특정의 개인적 지혜나 인격 혹은 사상체계보다는 그들의 부정적,변증법적 사고방식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도덕경>의 유래에 관한 담시에서 나타나듯이, 노장사상의 수용에서도 도교의 현실도피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는 무시된다. "선별적 긍정적" 수용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유약한 물이 강한 바위를 이긴다"는 노자의 교훈이다. 이 비유가 보여주듯이, 일상의 통념이나 기존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비판적 자세"와,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서술수단으로서의 "낡은 기법"이 브레히트에게는 중요했다. 중국의 철학과 문학은 브레히트의 작품과 사고에 반영된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 독일과 영미의 전통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 희곡작품



그의 작품 -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 "서푼짜리 오페라" "갈릴레오 갈릴레이"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이 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전체 15 장으로 1943년 취리히 시립극장에서 초연 되었다. 덴마크에 망명 중이던 브레히트가 우라늄 원자핵분열에 성공했다는 보도에 자극을 받아 집필한 작품(1938~1939년)이다. 초연 이후에 두 차례(1945~1946년과 1955~1956년)에 걸쳐 고쳐 써서 다시 무대에 올렸다.
몰래 《신과학대화新科學對話》를 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자, 코페르니쿠스가 끝없는 천체 가운데서 새로운 우주체계宇宙體系현상을 발견한 사실을 자신이 증명하고도 지동설을 재판과정에서 취소한다.
이런 갈릴레오의 생애를 그렸다. 갈릴레오가 과학자로서는 위대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지극히 나약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단순한 바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범죄이다 라고 브레히트의 주장한다.



* 코카서스의 백묵원

서막........전쟁으로 폐허가 된 코가서스의 마을에서 염소집단농장 사람들과 계곡을 두고 서로소유권을 주장한다. 그래서 가수 (해설자)의 지도 아래 두 집단이 즉흥극을 꾸밈으로써 그 계곡을 누가 더 유용하게 사용할 것인지 판별하게 된다.

2막.........총독을 상대로 살찐 제후가 반란을 일으키고 통독부인은 피난을 가게된다. 실수로 버려진 총독의 아들 미헬을 그루쉐라는 하녀가 데리고 간다. 그루쉐는 전쟁이 끝나고 돌아올 시몬과 약혼을 한다. 상금이 걸린 미헬을 살찐 제후의 살찐 제후의 무장 기병들이 추적을 한다.

3막..........아이를 안고 산 속 오빠의 집으로 도주하는 그루쉐에게 온갖 역경이 닥쳐온다. 몰인정한 사람들과 미헬을 쫓는 무장 기병들에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오빠의 집에 도착한다.

4막.........오빠의 집에서 아이가 있다는 관계로 냉대를 받게된다. 겨울을 어렵게 보내고 산 너머에 다 죽어 가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결혼식 도중에 전쟁에 끝났다는 소식에 다 죽어가던 남자는 벌떡 일어난다. 그 루쉐는 절망감 속에서 미헬에 대한 애정과 시몬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마침내 시몬과 그루쉐는 재회하나 그루쉐의 배반에 시몬은 돌아선다. 그리고 다시 평정을 찾은 그루시아에서 총독부인이 미헬을 찾아 그루쉐는 아이마저 빼앗기게 된다.

5막........반란이 일어난 부활절 주일 아츠닥은 도망가는 선제후를 모르고 선재후를 숨겨준다. 그러던 중 법정에 출두하여 자기 고발에 나선다. 그러던 중 무장기병들에 의해 재판관이 된다. 아츠닥은 민중의 편에 서서 재판을 한다.

6막.......총독부인은 미헬을 데려간 그루쉐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아츠닥은 백묵원의 재판을 통해 아이에게 진정 필요한 어머니가 그루쉐임을 밝힌다. 시몬도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츠닥은 이 판결을 끝으로 법복을 벗고 사라진다.




* 억척어멈과 그 자식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며 현대사도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다. 전쟁은 사실 비극의 역사다. 그러나 역사는 전쟁의 주역을 영웅으로 기록한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시저가 갈리아를 얻은 것이 이들 혼자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일이었을까. 숱한 영웅들의 승전과 패전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었을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얼마나 많은 여인네들이 전쟁터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채 눈물로 한 많은 세상을 살다 갔을까. 이것들은 독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 이론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나치의 독재와 제 1,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겪으면서 평생 간직했던 의문들이다.

나치의 탄압에 못 이겨 스웨덴으로 망명한 브레히트는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위대한 역사"의 희생물인 백성, 그러면서 역사의 기술에서 제외돼 망각의 세계로 잠겨버린 민중에 관한 서사극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30년 전쟁의 한 연대기"를 쓰게 된다. 이 브레히트의 연대기는 통례적인 다른 연대기와 달리 세계사적 인물이나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억척어멈과 그녀의 자녀들, 즉 민중의 일원인 평범한 소시민들에 관한 연대기다.

브레히트는 이 연대기를 통해 1642년 스웨덴에서 벌어진 30년간의 종교전쟁을 민중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즉 브레히트에게 30년 전쟁은 역사상의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하잘 것 없는 존재인 소매상 안나 피어링(억척어멈)이 전쟁통에 자식들을 잃게 되는 개인적 사건이다.

자식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비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기대어 살아가는 억척 어멈. 그녀에게 전쟁 속에서 자식들을 잃어야 하는 어미의 슬픔과 모진 현실을 끈질기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강인함이 뒤엉켜 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병사들에게 물건을 팔아 먹고사는 가난한 소매상인 억척어멈은 자신들이 처한 시대의 사회경제 체제 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평범한 소시민으로 생존하기 위한 억척어멈의 이 상행위는 자신이 속한 소시민 계층의 이익에 역행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존한다.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기 위해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억척어멈은 자기의 행동이 초래할 타인의 불이익 내지는 희생 같은 것은 고려에 넣지 않고 오로지 이윤추구를 최상의 목표로 삼는 자본가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다.

소매상인으로서의 억척어멈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알게 모르게 후원했다. 어머니로서의 억척어멈은 자신이 협력했던 전쟁의 희생자가 된다. 억척어멈은 자신과 자녀들을 전쟁에 끼어 들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소시민에 불과한 그녀의 자녀들은 차례로 전쟁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그녀는 두 아들이 병사가 되지 않도록 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큰아들 아일립은 그녀가 상사와 흥정을 하는 동안 모병꾼의 꾐에 넘어가 병사가 된다. 그는 전시에 용감한 약탈행위로 포상을 받았다. 잠시 평화가 찾아왔을 때 동일한 행위 때문에 처형된다. 그녀의 정직한 둘째아들 쉬바이처카스는 그가 보관중인 부대의 금고 때문에 체포되었다. 그녀가 뇌물의 액수에 대해 타협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 처형되고 만다. 벙어리 딸 카트린은 어머니의 장사 심부름으로 시내에 다녀오다 병사들에게 난행을 당하한다. 이 후에 공격 위험에 처한 할레시 주민들을 깨우기 위해 북을 치다 군사들의 총탄을 맞고 희생된다.

리어카 소매상과 어머니, 이 두 상반된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모순덩어리 억척어멈. 그녀는 자녀들의 비운을 열거하면서 전쟁을 통렬히 비판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장사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극의 마지막에 그녀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전쟁에서 한밑천 잡으려는 희망을 갖고 리어카를 다시 끈다.

전쟁 중 산전수전 다 겪고 재물은 물론 자녀들까지 다 잃고 `소시민은 전쟁에서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고 승리와 패배의 부담만 진다"는 교훈을 깨닫지 못한 우매하고 맹목적인 억척어멈. 그녀는 브레히트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기존 질서를 통렬히 비판하는 혁명적인 민중은 되지 못했다.그러나 우리는 소시민으로서 어미로서 그녀가 겪는 삶의 고통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느끼며 전쟁의 가혹함을 실감하게 된다.





* 사천의 선인

Der gute Mensch von Sezuan
장르: 비유극
음악: 파울 데사우
도움을 준 사람들: 루트 벨르라우, 마르가레테 슈테핀
집필: 1939 - 1941
초연: 1943년 2월 4일 스위스 취리히

사천의 선인은 브레히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이 비유극은 그가 가장 오랫동안 정성을 쏟은 작품이기도하다. 작가 자신이 밝힌 집필 시기는 1938년 ~ 1940년이다. 이미 20년대에 작품 구상이 시작되어 1930년에 "사랑은 상품" 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장면이 완성되었다. 브레히트는 1939년 덴마크 망명 중에 본격적인 집필을 재개한 뒤 작업에서 손을 뗀 1942년에도 이 작품은 "공연을 통한 확인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밝혔다. 중국 사천의 떠돌이 물장수 왕은 선인을 찾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세 신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려 한다. 신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인간은 가난한 창녀 "셴테"뿐이다. 셴테는 방세를 마련해 줄 손님을 포기하면서까지 신들을 맞이한다. 이들이 숙박료로 지불한 돈은 작은 담배 가게 하나를 마련하기에 족하여 셴테는 이 가게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기반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염치없이 몰려드는 식객들과 건물 주인의 무리한 요구에 가게는 개업하자마자 파산에 직면한다. 마침내 셴테는 잔인하고 교활한 가공의 인물사촌 오빠 "슈이타"로 변장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제 2의 셴테인 "슈이타"는 식객들을 경찰에 인도하고 경관의 도움을 받아 결혼으로 가게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셴테"는 직장이 없는 비행사 양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북경의 비행사 자리를 부정한 방법으로 차지하려는 양순에게 노부부로부터 빌린 돈마저 주게되고 가게까지 처분하려 한다. 양순은 진정한 애정에는 관심이 없다 임신을 한" 셴테"는 "양순"과의 결혼이 좌절되자 다시금 "슈이타"로 변신한다. 장차 태어날 아이만은 구출하겠다는 결심에서 이발사 "슈푸"의 재산과 빈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담배공장을 차린다. "양순"의 지능과 교육까지 동원할 줄 아는 "슈이타"의 기민한 운영으로 사업은 번창한다. 그러나 셴테가 장기간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사촌 여동생을 제거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그는 신들이 재판관으로 등장한 법정에서 악인인 자신이 선인 셴테와 동일인임을 밝히고 "선하며, 동시에 살아가라" 는 신들의 명령이 불가능하다는 체험을 근거하여 기존의 사회질서를 규탄한다. 신들은 절망에 빠진 "셴테"에게 무책임한 말로 현실 세계를 옹호하면서 구름을 타고 -허무-속으로 되돌아간다.

1 등장인물 및 줄거리

<사천의 선인>은 브레히트의 대표적인 비유극이다. 신들의 탐색과 주인공 셴테 슈이타의 경험이 평행을 이루며 진행된다. 서막, 10개 장막, 7개 막간극,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신들은 서막을 비롯하여 5개 막간극에 등장한다. 마지막 10장의 재판 장면에서 재판부 역할을 맡는다. 서막에서 물장수 왕씨는 신들을 처음 알아보고 안내하한다. 셴테가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한다. 1, 3, 6, 7, 9장 다음의 막간극에서는 물장수의 꿈속에 신들이 나타나 인간세계에서의 경험을 토로하거나 셴테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 (4, 5장 다음의 막간극은 셴테가 독백 내지 노래하는 장면이고, 2, 8장 다음에는 막간극이 없다.) 애초부터 왕씨와 셴테에게 인정받던 신들은 그러나 10장에서 인간세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 내지 포기하고 허무 속으로 도피해 버린다. 그들이 등장하는 서막과 10장 사이에 주인공 셴테 슈이타와 주변 인물들 사이의 현실적 갈등이 펼쳐진다. 신들의 출현과 퇴거가 일종의 액자로서 셴테 슈이타의 경험세계를 도입 및 종결한다. 물장수와 신들이 등장하는 막간극들이 주인공의 사건영역에 대비된다. 두 영역을 포괄하는 또 하나의 액자로서 에필로그가 덧붙여져 있다. 이 부분은 배우와 관객, 무대와 객석 사이의 간격 - 이른바 "제 4의 벽" - 을 결정적으로 제거하는 기능을 갖는다.

인물 목록에는 물장수 왕과 세 신을 필두로 셴테 슈이타와 그 상대역 양순, 그의 어머니인 양 부인, 과부 신 씨, 8인 가족 등이 나열되어 있다. 아마도 이러한 배열에는 본극과 막간극의 이중구조, 각 역할의 비중 이외에 인물들의 등장 순서까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인물들은 대체로 부유층과 무산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양분할 수 있다. 이 구도를 도식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이중역의 주인공 셴테 슈이타만해도 몸을 파는 밑바닥 인생에서 "사천의 담배왕"이라는 사업주로 상승한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는 그러나 이 비유극에서 인물과 사건 구성의 중심원리로 작용한다. 친절과 사랑을 베풀려는 주인공의 선의도 생존을 위협받는 순간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장소를 중국 "사천의 반쯤 유럽화 된 수도"로 설정하고 중국 인명을 쓰는 등, 중국풍이 돋보인다. 이것이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지는 않는다. 브레히트는 산업과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유럽보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중국 도시 빈민가 풍경이 작품 배경으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중역의 주인공 셴테 슈이타는 사천의 외곽 빈민가에서 신들의 위탁에 따라 선행의 계명을 실천하려 한다. 이 시도는 대략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그 과정을 10장 재판장면에서 셴테가 다음과 같이 밝힌다.

(....) 내가 저지른 악행은 모두
내 이웃을 돕고
내 연인을 사랑하고
내 어린 아들을 궁핍에서 구하려고 한 짓입니다.

여기에 순차적으로 나열된 이웃사랑, 연인에의 사랑과 모성애는 사건의 진행 순서와 일치한다. 주인공을 통해 플롯의 구조가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를 일단 논외로 하고 셴테의 경험을 중심으로 사건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전통적인 5막극 구도가 드러난다.

(I) 서막 : 도입부
(II) 1-2장 : 첫 시도, 이웃사랑
(III) 3-6장 : 두번째 시도, 사랑과 결혼
(IV) 7-9장 : 세번째 시도, 모성애
(V) 10장 : 결말

I. 도입부

서막 : 사천의 수도에 있는 어느 거리

중국 사천의 떠돌이 물장수로 신앙심이 깊은 왕씨는 선인을 찾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세 신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려 한다. 신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가난한 창녀 셴테 뿐이다. 셴테는 방세를 마련해 줄 손님을 포기하면서까지 신들을 맞이한다. 이들은 신을 경외하는 선인을 발견한 기쁨에 차서 셴테에게 계속 선행을 베풀라고 당부하며 그녀가 방세를 낼 수 있도록 숙박료를 주고 떠나간다.

II. 첫 시도 : 이웃사랑

1장 : 작은 담배가게

신들이 준 돈은 작은 담배 가게 하나를 마련하기에 족하여, 셴테는 이 가게를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기반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염치없이 몰려드는 신 부인, 8인 가족 등 빈민들과 건물 주인의 무리한 요구에 가게는 개업도 제대로 하기 전에 파산에 직면한다. "구조에 나선 작은 배 / 즉시 심연으로 끌려드네. / 물에 빠진 사람 떼지어 / 게걸스럽게 매달리네." - 막간극에서 신들은 왕씨의 꿈에 나타나 셴테의 선행을 살펴보고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그들은 "사천의 선인" 셴테에 필적하는 다른 사람들을 더 찾아내기 위해 탐색여행을 계속할 생각이다.

2장 : 담배가게

셴테는 잔인하고 교활한 가공의 사촌오빠 슈이타로 변장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제 2의 셴테인 슈이타는 빵을 도둑질한 식객들을 경찰에 넘긴다. 그는 또 목수 린토가 요구한 진열대 값 100냥을 20냥으로 무자비하게 깎아 내리는 수완도 발휘한다. 건물주 미취 여사가 셴테의 매춘 전력을 들어 6 개월치의 임대료를 일시불로 요구하자, 슈이타는 경관의 권고대로 셴테를 재산 있는 남자와 결혼시켜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려 한다. 유능한 사업가 슈이타의 등장으로 가게는 보존된다. 그 대신 이웃사랑의 자리에 착취가 들어선다.

III. 두번째 시도 : 사랑과 결혼

3장 : 시립공원의 저녁

자식이 딸린 홀아비와 결혼할 작정으로 맞선을 보러 가던 셴테는 시립공원에서 자살 직전의 직장 없는 비행사 양순을 설득하여 구해내낸다. 물장수 왕씨에게서 물을 한 잔 사서 그에게 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셴테는 연민과 사랑에 빠진다. - 막간극에서 물장수가 셴테의 선행과 어려운 사정을 보고하지만, 신들은 "결정적인 업적은 없다"며 불만스러워한다. 신들은 "사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자인하면서도, 몰인정한 사업가 슈이타가 다시는 셴테의 가게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한다.

4장 : 셴테의 담배가게 앞 상점가

양순의 집에서 자고 아침에 돌아오는 셴테를 빈민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발사 주인 슈푸는 물장수 왕씨가 손님들을 귀찮게 한다고 인두로 때려 부상을 입혔다. 피해보상을 요구하라고 셴테가 왕씨에게 충고한다. 현장을 목격한 빈민들은 아무도 증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양순의 어머니가 찾아와, 아들이 북경에서 비행사 자리를 얻을 기회가 생겼으니 500냥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한다. 셴테는 "이 모든 불행을 박차고, 한 사람만이라도 날아오를 수 있게" 하겠다며 양탄자 가게의 노인 부부가 빌려준 돈 200냥을 선뜻 내어주고 가게까지 처분하려 한다. - 양순에게 줄 돈을 마련할 생각으로 셴테가 막간극에 등장, 슈이타로 변장하면서 "신들과 착한 사람들의 무방비 상태"를 한탄하는 노래를 부른다.

5장 : 담배가게

모자라는 돈 300냥을 얻을 요량으로 양순이 찾아온다. 슈이타로 변장한 셴테가 양순의 진심을 들어본다. 그는 진정한 애정에는 관심이 없고 북경의 비행사 자리도 부정한 방법으로 얻으려 한다. 격납고 관리인을 돈으로 매수하여 현재 비행사를 해고시키고 그 자리를 얻겠다는 것이다. 가게를 헐값에 팔아 그 돈으로 혼자 북경에 가겠다고 양순이 서둘자, 그의 야비한 의도를 알게 된 셴테 슈이타는 절망에 빠진다. "사랑은 나약함이요 파멸"임을 깨달은 그녀는 양순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 셴테가 신 부인의 권고에 따라 "집이 열 두 채나 되고 마누라는 하나 뿐인" 부자 이발사 슈푸의 청혼에 응하려는 순간, 양순이 북경 행 비행기표 2장을 들고 다시 찾아와 셴테와 결혼하겠다며 그녀의 관능에 호소한다. 이에 설득 당한 셴테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겠다"면서 그를 따라 나선다. - 막간극 : 셴테는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으로 가며 독백으로 자신의 관점과 계획을 밝힌다. 신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착할 것도 원하셨으니", "아무도, 자신까지도 파멸시키지 않는 것 / 누구나, 자신까지도 행복으로 채워주는 것, 그것이 / 선행"이라는 것이다. 셴테는 결혼 후에 양탄자 가게 주인 부부의 돈을 돌려주고, 양순을 설득하여 정직하게 시멘트공장에라도 다니게 할 작정이다.

6장 : 도시 변두리에 있는 싸구려 음식점의 옆방

애인의 착한 심성을 일깨우려는 셴테의 의도와 달리, 양순은 그녀의 사촌오빠 슈이타가 지참금 300냥을 마련해 오기를 기다리며 혼인식을 지체시킨다. 셴테가 있는 곳에 슈이타는 물론 나타날 수 없다. 신부의 사랑과 신랑의 이해타산이 희극적으로 대립하며 결혼식은 웃음거리로 끝난다. 연인에게만이라도 선행을 베풀려던 주인공의 시도 역시 이렇게 좌절되고 만다. - 막간극 : 왕씨는 "가상의 책"을 들고 신들에게 장자(莊子)의 비유 "유용성의 환난"[材之患]을 읽어주면서, 셴테도 착한 탓으로 결혼에 실패했다고 알리고 대책을 묻는다. 무력한 신들은 그러나 "재난이 사람을 순화하는 법"이라고 둘러대며 떠나간다.

IV. 세번째 시도 : 모성애

7장 : 셴테의 가게 뒤뜰

양순이 돌려주지 않는 200냥을 노부부에게 갚기 위해 셴테는 가게를 건물주인에게 헐값에 넘기려 한다. 이사짐을 꾸리다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기쁨과 모성애에 사로잡히고, 장차 태어날 아이를 "미래의 비행사"라며 관객에게 소개한다. 목수 린토의 어린 아들이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는다. 이를 보고 놀란 셴테는 자신의 아들만은 반드시 빈곤에서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 "너에게 잘해 주련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면 / 다른 사람 모두에겐 호랑이와 야수가 되겠다." 그러기 위해 셴테는 다시 슈이타로 변장한다. 그는 이발사 슈푸가 결혼 약속의 대가로 내놓는 백지수표와 창고건물, 8인 가족이 숨겨달라고 부탁하는 출처불명의 잎담배, 그리고 빈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담배공장을 차릴 생각이다. - 막간극 : 왕씨는 꿈속에 나타난 신들에게 셴테를 위해 계명을 완화시켜 달라고 간청하지만 효과가 없다. 신들은 소득 없는 편력에 몹시 지친 모습이다.

8장 : 슈이타의 연초공장

슈이타는 슈푸의 가건물에 연초공장을 세웠다. 8장은 양씨 부인이 3개월 전에 아들과 함께 슈이타 사장을 찾아갔던 일을 관객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아들이 파혼과 횡령죄로 고소당하자,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슈이타를 찾아온 것이다. 부인의 간청을 받아들여, 슈이타는 양순이 탕진해 버린 200냥을 임금에서 공제하는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하고 그를 고용한다. 양순은 동료를 고자질하면서까지 슈이타의 신임을 얻은 끝에 공장감독으로 승진, 업주의 하수인이 되어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혹사한다. 지식인인 그의 "교양"과 "지능"까지 이런 식으로 활용하며 셴테 슈이타의 사업은 번창한다.

9장 : 셴테의 담배가게

슈이타는 이제 "사천의 담배 왕"으로 불리 울 만큼 성공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정체가 탄로 날 위험도 커진다. 임신으로 몸이 뚱뚱해지는 것은 아직까지 사업의 성공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착한 셴테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집요해진다. 물장수 왕씨는 친구로서 그녀의 안부를 끈질기게 묻고, 양순은 전날 애인의 소유인 담배사업을 탐내고, 이발사 슈푸는 미녀를 첩으로 삼을 날을 안달하며 기다린다. 슈이타는 재산가인 슈푸와 건물주 미취 여사를 서둘러 불러들여 사업 확장을 결의, 그 소유주가 셴테와 "자자손손 그녀 후손들"이라고 선언한다. 모성애는 이렇게 승리하는 듯하다. 그러나 셴테가 장기간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에 슈이타는 궁지에 몰린다. 양순의 고발로 경찰이 가게를 수색한 끝에 셴테의 옷가지가 나오자, 슈이타는 살인혐의로 체포되어 끌려간다. - 막간극 : 물장수의 꿈속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신들은 비참하게 몰락한 모습이다. 선인을 더 찾으려는 여행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이제 셴테 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그들은 그녀마저 사라졌다는 물장수의 말에 서둘러 탐색에 나선다.

V. 결말

10장 : 법정

신들이 재판관으로 등장한 법정에서 슈이타는 악인인 자신이 선인 셴테와 동일인임을 밝힌다. "선행을 베풀며 동시에 살아가라"는 신들의 명령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체험을 근거하여 기존의 사회질서를 비판한다. 그러나 신들은 절망에 빠진 셴테에게 무책임한 말로 현실세계를 옹호하면서 구름을 타고 "허무" 속으로 되돌아간다.

에필로그 : 불완전한 결말에 대해 연기자 한 사람이 관객의 이해를 구하면서, 올바른 결말을 관객 스스로 찾아 보라고 권한다.

어떻게 저 착한 사람을 도와
좋은 결말에 이르게 할 수 있을지
여러분이 당장 생각해 보세요.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 자 어서, 여러분 스스로 결말을 찾으세요!




■ 작품생성사

비유극 『사천의 선인』은 브레히트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노력이 기울여진 희곡"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구상은 20년대 중반에 이루어져, 『사랑은 상품 Die Ware Liebe』이라는 제목 아래 5개 장면이 완성되었다. 이 제목은 "die wahre Liebe 진정한 사랑"이라는 동음이어로 읽을 수도 있다. 시민사회가 미화하는 사랑과 결혼이 실제로는 매매춘일 뿐이라는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작품의 본격적인 집필은 1938-1940년에 이루어졌고, 1941년에 마지막 개작이 있었다. 1940년 6월까지 이중역의 이름은 리궁 라오고[利公 勞苦]였다. 이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움과 고통을 동시에 주는" 주인공의 모순에 찬 삶을 암시하거나, 장자의 비유 <유용성의 환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최종안인 셴테 슈이타[神德 水大, 신적인 미덕과 홍수 같은 재난]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작가가 기울인 정성에 걸맞게 이 작품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압권이라 해도 좋을 만큼 높은 수준의 형식미를 지니고 있다. 주제면에서 대표성을 갖는다. 선인과 악인이라는 대립적인 두 존재양식으로 분열하는 주인공은 민중극 <푼틸라 나리와 그의 하인 마티>의 주인공 푼틸라를 연상시킨다. 착취와 압제가 행해지는 체제에서 유용한 인간이 파멸한다는 관점은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비롯한 중기 이후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나타난다. 셴테는 <어머니>,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코카시아의 백묵원> 등 브레히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들과 닮았고, 셴테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좀 더 좋은 세계"를 암시하는 점에서 그루쉐가 양육하는 미헬을 연상시킨다.




■ 작품 해설

1) 소재와 선례

<사천의 선인>에 영향을 준 문학적, 철학적 선례들은 여러 학자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밝혀냈다. 맹자의 성선설이 셴테의 성격에 반영되고 장자를 비롯한 중국 고전이 자주 인용된다. 이 작품의 주제나 분위기는 유럽적이기보다 오히려 중국적이라고 앤토니 태틀로우는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론을 얀 크노프가 제기했다. 중국 출전들의 주제는 내면의 안정과 은둔생활인 반면, 브레히트는 선행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라고 촉구하기 때문에 사천은 중국[China]이 아니라 "생소화된 유럽 세계"[Chima, 브레히트의 조어]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지명과 인명이 중국식이고 인물들이 빵 대신 밥을 먹는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유럽인 관객에게 생경스럽고 중국인 내지 동양인에게 특별히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모택동 혁명, 특히 문화혁명 이래의 중국인이 맹자, 장자, 묵자, 백거이 (2장, "추위에 떠는 시중 백성 도우려면 [...] / 시 외곽을 온통 덮어 버릴 / 일만척 길이의 이불이 필요하외다.") 등이 직간접으로 인용된 것을 즉시 알아보고 사천을 중국 도시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유럽인 관객이 니체 (1장, <연기의 노래>), 키플링 (8장, <여덟째 코끼리의 노래>), 성서 (4장, 소돔과 고모라; 5장,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괴테의 <파우스트> (선량한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치스의 파멸, "가슴 속에 두 영혼"을 지닌 파우스트) 등 유럽 문학의 전통을 이 작품에서 즉시 완벽하게 읽어낼지도 의문이다. 출처가 중국이든 유럽이든, 인용 내지 변용된 선례들은 예외 없이 작가의 고유한 해석을 거쳐 작품에 흡수되어 있다. 그러니까 중국이냐 유럽이냐의 논쟁에 집착하기보다는, 동서양의 전통들이 협동하여 이 작품의 생소화 효과와 비유적 성격을 높이고 주제를 일반화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생소화 기법 : 언어와 시간의 다층 구조

이 비유극은 "브레히트의 희곡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 경향들을 거의 모두" 내포하고 있다. 특히 언어의 다층적 차원과 극적 시간영역의 확장에서 작가의 뛰어난 창의성이 드러난다. 대화 위주로 된 18세기 이후 시민문학의 전통적 희곡과 달리, 이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의 기능은 대화에 의한 극적 "사건"과 철학적 "성찰"로 구분된다. 사건 영역에서는 순차적인 사건이 대화에 의해 진행되며, 성찰 영역에서는 1) 대화 속의 운문, 2) 관객을 향한 발언 (물장수의 자기소개, 보고, 설명 또는 논평, 에필로그), 3) 노래 등 세 가지 언어 형식이 사용된다. 철학적 성찰의 순간들은 대체로 지체점을 이루면서 관객의 사고와 판단을 촉구한다.

극적 시간의 확장은 영화예술에서 유래하는 "예시"와 "회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예시 기법은 셴테가 앞으로 태어날 가상의 아이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7장에서 사용되며, 회고는 양씨 부인이 논평 및 보고자로서 과거의 사건을 극중극 형식으로 도입하고 평가하는 8장에 나타난다. 7장 "예시" 장면에 포함된 무언극(팬터마임)은 보이지 않는 것, 미래의 것을 선취하여 보여 준다. 버찌를 몰래 따서 숨기는 법을 셴테가 아이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적 생소화 기법들은 공간적으로는 이른바 "제 4의 벽"을 제거하고, 시간적으로는 희곡 본래의 절대시제인 "현재"의 영역을 연장시킴으로써 연극의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확대한다. 생소화 기법이 무대효과를 확대하고 수준 높은 오락도 제공한다는 사실을 특히 이 작품의 예시와 회고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사건 진행의 실험구도

셴테의 사건영역을 신들의 행위와 결부시켜 보면, 이 작품은 가설 - 관찰과 실험 - 결론(가설의 진위 입증)의 3단계로 진행되는 일종의 "사회과학적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지속적으로 착할 수가 없어 "현재 상태의 세상으로는 안 되겠다"는 아우성이 하늘에 들려오자, 불안해진 신들은 선행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찾아내기 위해 지상에 내려왔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이 충분히 발견되면, 세상은 현재 상태대로 존속해도 좋다"는 것이 천상의 결의 내용인데, 이 결의는 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의 존속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관찰과 실험의 가설이다.

셴테의 선행을 확인한 신들은 안도하며 탐색여행을 계속하지만, 선인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현재상태의 세계가 정상이라는 증거로 셴테 한 사람밖에 찾지 못한 신들은 천상의 결의 내용을 대폭 완화해 본다. - "한 사람이면 충분해. 우리는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 세상을 견뎌낼 자가 하나만이라도 있으면 아직 만사가 다 잘 되어갈 수 있다고." 그러나 그들은 하나 뿐인 선인 셴테마저도 악인 슈이타로 변신해야만 생존할 수 있음을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결론을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유감이네, 우린 잠시밖에
더는 머물 수가 전혀 없네.
묘사하려 오래 살펴보면
귀한 습득물도 사라지니.

셴테를 통한 "실험" 끝에 신들이 내리는 "결론"은 그러니까 "적어도 한 사람은 선할 수 있으니 세상은 현재대로 존속해도 좋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그러나 실제를 왜곡해야만 성립하는 사이비 진실이다. 셴테의 운명이 이 결론의 전반부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가설로서의 천상의 결의 내용에는 이미 그 역의 결론, 즉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선인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고, 셴테가 중심이 된 인간들의 "극적 사건영역"에서 이 역의 가설이 실증된다. 하나 뿐인 선인 셴테마저도 선하게 살아갈 수 없으니, 논리적 귀결로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신들의 계명을 실천하려는 셴테의 시도는 이와 같이 이중의 의미를 지닌 가설의 진위를 확인하는 실험과정이다. 구조적으로 이 작품은 새로운 세상의 제시나 건설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로서 현존세계의 모순성을 점진적으로 폭로하는 데 치중한다. 이 과정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이, "인간에 대한 신들의 심판은 신들에 대한 인간의 심판, 그러니까 그들의 이상과 계명, 그들의 질서에 대한 심판"이 된다. 이들이 시민적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질서가 심판의 대상이다.

4) 유용성의 환난과 인간 분열의 문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추상적, 연역적 비판이 아니라, 그 체제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관념들을 개별적으로 현실에 대비시켜 그 허구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 브레히트의 판단이었다. "체제를 구성하는 문장들은 범죄집단의 구성원들처럼" 서로 결탁해 있으니, "그들이 인식되도록 개별적으로 현실에 대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천을 지배하는 질서의 구조적인 모순은 셴테가 체험하는 "유용성의 환난"이라는 장자의 비유로 수렴된다. 현존 체제에서는 인간이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체제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최소한의 이데올로기라면, 이 이데올로기는 유용한 나무가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비유를 통해 거짓임이 밝혀진다. 셴테의 운명이 그런 허위의식의 반증이다.

송나라에 가시숲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는 개오동나무, 실측백나무와 뽕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 그런데 둘레가 한두 뼘 되는 나무는 개집 재목으로 쓰려는 사람들이 베어 간다. 둘레가 서너자 되는 나무는 귀하고 부유한 집안에서 관의 널판으로 쓰려고 베어 간다. 일여덟자 되는 것은 호화판 별장의 대들보로 쓰려는 사람들이 베어 간다. 이렇게 하여 나무들은 모두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톱과 도끼에 망하고 만다. 이것이 유용성의 환난이다. (6장 막간극. 원전 : 莊子, 南華眞經, 內篇, 3장, 養生主)

이 비유의 뜻을 신들이 "그렇다면 가장 쓸모 없는 나무가 가장 좋은 나무이겠다"고 오해하자, 물장수 왕씨는 "가장 나쁜 나무가 가장 행복한 나무"라고 해석한다.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려다 파탄 위기에 빠진, 그래서 악인 슈이타를 불러와야 하는 셴테의 상황을 지적하는 것이다. 선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악할 수밖에 없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동시에 남을 해치고 착취할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의 역설적인 존재 양상은 인간 실존의 숙명적 비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 속한 인간의 객관적 모순을 반영한다. 사건의 현장 사천을 브레히트는 "반쯤 유럽화된", "인간이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는 모든 지역"을 대표하는 곳으로 표기했다. 셴테 슈이타의 분열이 자본주의 경제법칙의 필연적 현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비판의 표적이 무엇인지는 장소 설명이 없더라도 자명하다. 1장에서 담배가게 주인으로 상승하여 "소시민"이 된 셴테는 새로운 사회적 위치가 요구하는 행동양식, 다시 말해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 경제법칙을 따라야 한다. 가게를 기반으로 이웃을 도우려는 이 여자는 그 기반을 위해 사랑의 계명을 어기며 이웃을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 선행을 위해서는 그에 앞서 이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셴테의 강요된 변신을 통해 작가는 결국 신들의 계명에 내포된 시민사회의 이상과 미덕이 경제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사업이 도대체 정의롭고 인간다운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는냐?"는 이상주의적 질문에, 현존하는 질서에서는 무자비한 사업에 의해서만 그러한 생활이 가능하다는 답변이 제시되는 것이다.

인간애의 실천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한다는 이상은 브레히트에게는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정당성을 보장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였다. <사천의 선인>에서 그는 이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귀납적, 점층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셴테가 실천하려는 선행의 세부적인 덕목은 이웃사랑, 연인에의 사랑, 모성애이다. 이처럼 인간애의 폭이 축소되는 데 반해, 그 실현을 위해 그녀가 입는 피해는 증가한다. 또 그녀가 슈이타의 가면 아래 동원해야 하는 악행도 점차 확대되고 잔인해진다. "선행의 원천"인 가게를 구하기 위해 셴테 슈이타는 식객들을 경찰에 넘겨주고 목수에게 줄 돈을 5분의 1로 깎아 내리는 데 그치지만, 애인 양순을 돕기 위해서는 노부부의 생존을 파괴하고 빈민들의 희망인 자신의 가게마저 잃을 지경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모성애의 단계에서 선인 셴테는 완전히 개인생활의 영역으로 후퇴하여, 공적인 생활은 악한 분신 슈이타에게 전담시키고 만다. 선인은 이제 나타날 수 없고, 자본주로 상승한 분신이 지식인 양순과 더불어 "천민에게는 충분히 양호하지만 담배를 위해서는 충분히 양호하지 못한" 작업장에서 빈민들을 혹사하기에 이른다. 한때 셴테의 구제 대상이었던 사람들이 마침내는 그녀와 그녀 후세의 소유가 될 기업체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은밀히 행해지는 선행은 파멸을 재촉할 뿐이다. 가게에서 다시 쌀이 분배되고, 비오는 날 양순에게 옛 연정을 느낀 셴테 슈이타가 모자를 선물하자, 셴테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의심을 품으며 그녀의 소재를 캐묻는다. 나약함을 보인 슈이타는 결국 살인혐의를 받고 경찰에 끌려간다. 유용성의 환난이 점차 높은 강도로 반복되는 것이다. 셴테 슈이타의 지위 상승과 인간애의 점진적 상실은 비행사 양순의 출세 과정과 함께 "20세기 기술의 시대, 시민사회 인간의 발전 단계"를 상징할 수도 있다. 주인공의 체험과정은 그러나 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브레히트 특유의 귀납적,점층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그것이다. 실험을 연상시키는 구조에서 우리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진보된 방법들을 예술에 도입, 서사적 비유극 형식을 정착시키려 한 작가의 의도를 읽는다.

사천의 체제를 구성하는 관념들은 허구적인 선행의 미덕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범죄집단처럼" 결탁해 있는 요소들에는 신들로 대변되는 수구세력;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치안당국의 대변자 경관; 건물 주인 미취 여사나 이발사 슈푸와 같은 자본가 계급; 양순이 대표하는 교활하고 이기주의적인 지식인; 기름진 거위로 매수되어 설사 때문에 재판정에도 못나오는, 부패한 사법부의 화신 푸이쳉 판사; 무지하여 눈앞의 이익만 탐하는 계몽되지 못한 빈민 계층 - 이들 모두가 이념과 실제의 모순을 보이며 관념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사천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5) 감동과 거리감의 변증법 : 비극성과 희극성

<사천의 선인>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많은 평자들은 물장수를 비롯한 사회 저변 인물들의 절망이나 무지상태가 관객의 토론과 성찰을 자극한다고 해석해 왔다. 난관에 빠진 주인공의 운명이 어찌 되어야 할지는, 에필로그가 요구하듯이, 관객에게 맡겨진다. 계명의 수행과 생존의 위험 사이에서 좌초하는 셴테의 운명은 분명 비극적 감상(感傷)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외견상의 절망에서 작가의 "비극적 비관주의와 세계상"을 읽으려는 사람은 변증법적 생소화 연극이 그 본질상 완벽한 해결책과 세계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셈이다. 관객이 셴테의 운명에서 비극성을 느끼고 거기에 감입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겠으나, 이 작품이 특정한 가치나 미덕의 절대성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비극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셴테의 비극적 상황은 제도의 변혁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시대착오적인 것이기 때문에 희극적으로 반전한다는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셴테의 무지와 맹목성이 야기하는 희극적 효과 때문에 그녀의 진지하고 자발적인 시도마저 관객의 시각에서 완전히 우습게 느껴진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희극적 인물은 허위 의식을 상징하는 세 신과 이발사 슈푸, 건물주인 미취 여사 등으로서 모두 기득권층에 속한다.

본질적으로 비극은 감정이입을, 희극은 거리감을 필요로 하고 또 야기하려 한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놋쇠 구입> 추기에서 서사극 이론에 내재된 "유물론적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감정이입과 거리감 사이의 모순은 심화되어 묘사의 한 요소가 된다"고 밝혔다. 비판의 주도 아래 감입과 거리감, 오락과 교훈의 조화를 시도한 작가의 이러한 "변증법적 연극론"은 비극성과 희극성의 관계에도 준용되어야 한다. 셴테의 운명을 통해 작가는 감동과 비판적 거리감을 동시에 기대한다. 구체적인 예로, 셴테 슈이타가 담배공장을 설립하는 상황을 관객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감정으로 볼 것이다. 이 공장에서 빈민들은 착취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면피한 식객과 도둑의 처지를 청산하게 되며, 대체로 관객의 호감을 얻는 셴테도 자멸하지 않고 자신과 아이의 생존을 지킨다. 그러나 이 양면적 감정은 비판의 주도 아래 더 나은 해결책을 요구할 것이며, 이로써 작가가 의도한 감입과 거리감의 조화가 달성될 것이다.

6) 열린 결말과 이상향

<사천의 선인>이 촉구하는 더 나은 세계로의 사회변혁은 오늘날에 이르러 역사적 필연성을 크게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브레히트가 옛 소련과 중국의 혁명에 고무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혁명이 달성된 뒤 그는 이 작품의 에필로그를 다시 쓰면서, "선하며 동시에 살아갈 수 없는 / 사천의 수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닌 그는 변혁을 통해 이룩될 새로운 사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대신, "살아가기 위해 특별히 미덕이 더는 필요 없는 나라"를 이상향으로 이해했다. "제도가 좋으면 인간은 특별히 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그는 셴테의 입을 빌어, 노동이 착취가 아니라 "친절"을 뜻하는 사회로 묘사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친절을 베푸는 것보다 어떻게 그걸 더 잘 보여주겠어요? [...] 누군가 노래를 부르거나 기계를 제작하거나 벼를 심으면 그게 사실은 친절이예요.

셴테를 통해 전달되는 또 하나의 소박한 호소는 인간성에의 낙관과 신뢰이다. 부르조아 자본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주의 이념이 너무 쉽게 인간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전제한다고 비판한다. 셴테 슈이타의 존재양식에서 드러나듯이, 브레히트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한쪽을 전제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으나, 그럼에도 인간 본래의 성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낙관적이었다. 이마의 핏줄이 불끈 튀어나온 일본 노극[能]의 한 가면을 보면서 그는 악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했고, 여기에 착안하여 매우 감동적인 시를 쓴 바 있다. 그 시가 셴테의 입에 담긴다.


"악의 가면"
(브레히트는 일본 "노[能]"극에서 사용되는 아래 가면을 자의적으로 "악의 가면"이라고 부르고 <사천의 선인> 제7장에 나오는 다음 구절 이외에 같은 제목의 시도 썼다.)

이웃 사람을 짓밟는 일
그것은 힘들지 않나요? 저들 이마의 핏줄은
탐욕에 힘겨워 불끈 부풀어오릅니다.
자연스럽게 뻗친 손은
베풀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볍게 받지요. 오직
욕심 사납게 움켜쥘 때만 그 손은 애를 써야 해요. 아,
얼마나 큰 유혹인지, 남에게 주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요,
친절을 베푸는 것은! 정다운 말 한 마디는
행복에 겨운 한숨처럼 새어 나옵니다.


친절과 선행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 파멸하지 않으면서 그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단순한 친절로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노동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고 믿는 사회가 우리의 이상일 수 있다면, <사천의 선인>이 요구하는 새로운 질서는 오늘날에도 계속 추구되어야 할 인류의 목표가 아닐까? 선인이 고통을 받는 사회, 특별한 미덕을 요구하거나 악용하는 사회가 남아 있다면, 셴테의 고난은 여전히 관객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관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추적하는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연극론은 시대와 체제를 초월하여 응용될 만한 보편적 진실을 담고 있어서, 그의 생전에 이미 동구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도 마찰을 빚고 있었다. 작가의 의도에 반하여, 사천을 사회주의 국가로 바꿔 해석하는 연출도 가능해 보인다. 작가가 그토록 절실하게 노래한 "만물의 흐름"은 그 자신의 사상과 작품에도 여지없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관객이 사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가에 따라 그가 속한 사회의 수준도 드러날 것이다. 작가 당대의 시급하던 현안문제나 계급투쟁의 공격적인 구호들은 호소력을 잃은지 오래 되었으나, 허위와 폭력을 고발하는 생소화 기법과 그 바탕에 깔린 인간애는 아마도 시공을 넘어 남을 것이다. 관객 스스로 "좋은 결말"을 찾으라고 호소하는 에필로그는 애초부터 구속력 있는 특정의 사회혁명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관중은 필경 인간과 사회가 함께 변해가야 한다고 답변하고 싶을 것이다. 비유형식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브레히트의 주장은 이 작품의 보편성과 지속성을 기대한 말이다. 그는 형식과 주제를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사천의 선인>에 긴 생명력을 줄 수 있었다.

7) 음악

삽입 가사와 운문 부분을 파울 데사우가 1947 - 1948년 작곡했다. 노래 가사에서 음악은 비유 내용을 음악적으로 부각시킨다. 8장의 「여덟 번째 코끼리의 노래」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노래의 박자는 양순이 노동자들의 작업을 독촉하는 속도에 맞춰 점차 빨라진다. 「빗속의 물장수 노래」는 자연의 축복, 즉 과잉공급이 빈곤을 초래한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역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 "나는 물을 팔아야 하는데 / 이제 여기 빗속에 서 있네." 가사는 2장 (셴테와 양순의 첫 만남), 7장 (셴테와 아이의 무언극), 9장 (셴테 슈이타와 양순의 마지막 대화)에 반복되어 나오는데, 데사우는 그 비유적 특성에 음악으로 부응하며 주도동기적 기능을 부여했다. 이 노래는 세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셴테의 사랑이 허망함을 암시한다. 노래 가사가 아닌 대화 중간 운문의 경우도 다양하게 처리되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본문에는 주로 민요풍의 선율이, 비인간적 상황을 규탄하는 부분에는 타악기가 사용되었다.

8) 공연

1943. 2. 4. 취리히 극장 Schauspielhaus Zurich에서 초연되었다. 연출 : 레오나르트 슈테켈 Leonard Steckel. 희곡기법상의 개혁과 연기력이 비평계와 관중 모두의 경탄과 호평을 받았으나, 새로운 서사적 수단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면들의 호소력이 너무 강렬하여, 관객이 인물과 사건에 공감한 탓이었다. 독일 내 첫 공연은 하리 부크비츠 Harry Buckwitz 연출, 파울 데사우 작곡으로 1952. 11. 16. 프랑크푸르트 시립극장에서 있었다. 베르린 앙상블의 첫 공연은 브레히트 사후 1957. 10. 5.에 비로소 베노 베손 Benno Besson 연출로 이루어졌는데, 프랑크푸르트 공연과 대조적으로 당시 서독 상황을 풍자하려 했다. "사천은 오늘날 이미 이런 지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브레히트의 추기(追記)를 동독과 결부시키고, 개작된 에필로그로 다음과 같이 서독을 암시한 것이다. - "사람이 착하면서 살 수는 없는 / 사천의 수도는, 여러분, 아시죠, /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었지요. / 하지만 그 비슷한 모습의 것들은 아직도 많답니다." 작품의 희극적 성격을 부각시킨 예로는 서베를린 궁전공원 극장 Schlo park-Theater의 1967. 3. 31. 공연이 있다. 연출 : 한스 슈바이카르트 Hans Schweikart. 신들을 비롯, 물장수까지도 시종일관 희극적 인물로 묘사되어 관객을 즐겁게 했다.






* 서푼짜리 오페라

장르: (발라드) 오페라 [오페레타]
음악: 쿠르트 바일 Kurt Weill (1900-1950)
집필: 1927년 말 - 1928년 8월
초연: 1928년 8월 31일, 베를린 쉬프바우어담(Schiffbauerdamm) 극장

1 개관

18세기 영국 극작가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 The Beggar"s Opera}(1728)를 소재로 하여 씌어진 이 작품은 한때 번안극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상세한 비교분석 결과 브레히트는 오히려 게이와 "상반된 구상"을 시도했음이 밝혀졌다. 예를 들면 게이의 작품이 "공공연한 부패상의 은밀한 비판"인 반면, 브레히트는 "은폐된 부패상의 공공연한 비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동서양의 문화 유산을 광범위하게 수용하여 전통의 변증법적 지양을 실현한 작가로 일컬어지며, 그의 작품들에 사용된 소재 중에는 시사성 있는 작가 당대의 사건보다 전래의 문학적, 역사적 유산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서푼짜리 오페라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장소는 런던이고, 시기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연출가들에 의해 대략 19세기 말 또는 작가 당대의 시기로 해석되어 왔다. 기본 주제는 품위, 도덕, 사업, 법률, 종교 등에 나타나는 시민사회의 외형적인 질서가 실제로는 강도의 질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은 시민이 강도요, 강도 역시 시민이라는 현상을 보여 준다. 이 질서의 수호자로 등장하는 경찰은 피해자 대신 가해자를 옹호하고 지켜준다. 시민은 현상유지를 보장하는 질서에 의존하여 타산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며, 그의 행동은 이익 추구의 구속을 받기 때문에 예상이 가능하다. 그는 모든 대상을 상품으로 전락시키지만, 이를 다른 명칭, 예를 들면 사랑, 우정 등으로 표현하며, 스스로 상품으로 전락하면서도 이를 다른 이름으로 미화한다. 이러한 시민의 모순이 작품의 사건진행을 지배하는 기본 동기이다.

"걸인 동지회" 사장 조나단 피첨의 딸 폴리는 악명 높은 신사 강도 매키 메서와 야반에 남의 집 마구간에서 부모 몰래 결혼식을 올린다. 하객으로는 매키의 일당, 킴볼 목사와 경시청장 브라운이 찾아오는데, 매키와 브라운은 인도에 함께 종군했던 전우 사이로 아직은 최선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거지들에게 의상과 의족을 대여해주는 대가로 그들을 야비하게 착취하는 피첨은 딸의 상실을 묵과할 수 없다. 미모의 폴리는 그에게 가족의 일원이라기 보다는 영업상 필요한 전시물로 더 가치가 있고, 또 매키가 결혼 후 "걸인 동지회"의 내막을 알아 그 운영권을 탈취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리하여 피첨은 여왕의 대관식 행렬에 걸인 군단을 동원하겠다고 브라운을 위협, 매키를 체포하게 한다. 브라운의 딸 루시는 매키와 결혼한 것과 다름없는 사이인지라, 감방에서 그를 구해 탈옥시킨다. 그러나 매키는 이 기회를 피신에 이용하지 않고 종래의 습관대로 창녀들을 찾아가며, 다시금 피첨의 위협에 견디지 못한 브라운은 그를 재차 체포한다. 이제 아무도 그를 도울 용의가 없다. 강도 일당, 루시와 아내 폴리마저도 교도관을 매수할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매키의 처형은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교수대 위에서 목에 밧줄을 맨 순간, "국왕의 말 탄 사자"가 출현하여 사면과 귀족신분의 수여를 통보한다.

강도의 윤리와 시민성이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면은 마구간의 결혼식이다. 강도 일당은 살인과 강탈로 획득한 가구, 집기들을 화물차에 싣고 와 마구간을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장소"로 바꿔 놓는다. 신부 폴리는 "최종적인 예약의 순간"에 처하여 다시 한 번 전시와 쾌락의 대상으로 묘사되며, 강도들은 입에 익지 않은 점잖은 말투를 흉내내고, 생선을 나이프로 먹지 않는다는 시민적 식사예법을 힘겹게 배운다. 결혼식에 목사가 빠질 수 없고, 그는 신랑 측 증인으로 나온 경시청장과 함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점유를 축복한다. 상품화한 인간의 소유가 시민사회의 결혼이라는 착상은 매키의 두 "아내들"이 부르는 이중창 [재산을 위한 싸움]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 작품은 초연에서 거의 1년 간 연속적으로 베를린의 관객을 열광시켜, 20년대 독일 연극사에 유례 없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시민계층의 관객들은 이 공연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강도로 보는 대신 작가의 기지와 재치에 갈채 할 뿐이었다. 이것이 불만스러웠던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 근거한 영화 대본과 {서푼짜리 소설}에서 사회비판적인 경향을 강조하는 한편, 종전 후에는 쏭(Song)들을 개작하여 매키와 그의 일당을 히틀러 집단과 결부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작품이 지닌 오락성과 이에 적응하는 관객의 안일한 자세를 약화시키기에는 무력했다. 이 작품은 브레히트의 희곡들이 교육적 기능뿐 아니라 뛰어난 오락성을 지니고 있으며, 오히려 후자가 일방적으로 우세해질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 매키 메서의 살인노래

<서푼짜리 오페라>의 기본 주제는 품위, 도덕, 사업, 법률, 종교 따위에 나타나는 시민사회의 외면적인 질서가 실제로는 강도의 질서라는 것이다. 시민이 강도요, 강도 역시 시민이라는 현상을 강도단 두목인 매키 메서가 이 서곡에서 노래하여 작품 줄거리의 개요를 관객에게 미리 알려준다. 상어처럼 잔혹한 강도 매키 메서는 실제 상어와 달리 본 모습을 감추고 산다. "살인 상어 지느러미 / 뻘건 피로 물드네! / 매키 메서 장갑 끼어 / 범행 흔적 감추네." - 이처럼 선량한 시민으로 위장하는 부류는 그러나 강도만이 아니다. 반(反) 오페라로 구상된 이 작품은 1920년대 말 베를린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장기 공연되었다. 서곡의 가사와 노래를 괴테/슈베르트의 고전적 가곡과 비교하며 감상해 보기 바란다.

1) 가사

매키 메서의 살인 노래 [Messer 메서: <칼>이란 뜻의 성(姓)] Bertolt Brecht, 1928

- 여러분은 오늘 저녁에 거지들을 위한 오페라를 보시게 됩니다. 이 오페라는 거지들이나 꿈꿀 만큼 화려하게 구상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거지들도 돈을 낼 수 있게 입장료가 싸야 했기 때문에, <서푼짜리 오페라 (싸구려 오페라)>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아래 가사 가운데 적색 부분은 노래에서 생략되고, 청색 부분은 추가된다. 추가된 청색 가사는 작품 <서푼짜리 오페라>의 끝 부분에 나온다.]

식인 상어, 그 놈은 이빨이 있어
버젓이 얼굴에 달고 다니네.
매키스, 그 놈은 칼을 품어도
사람 눈에 그 칼이 보이지 않네.

[상어가 달려들어 피를 흘리면
지느러미 뻘겋게 물이 들지요
매키 메서, 그 자는 장갑을 끼어
악행 흔적 아무도 볼 수 없다오.

초록빛 템즈강의 물가를 보니
갑자기 사람들이 쓰러져 죽네
페스트나 콜레라가 도는 게 아냐
매키스가 나도는 탓이랍니다.

맑게 개인 일요일 밝은 대낮에
남자 죽어 강변에 너부러졌소.
사내 하나 모퉁이 돌아가는데
매키 메서 그 이름 모두 다 알죠.

유태인 마이어가 사라져 가고
부자들 여럿이 또 그러하건만
매키 메서 그들 돈을 차지했어도

놈의 범행 증명을 할 수 없구나.
식인 상어 험한 이빨
보란 듯이 달렸네.
매키스가 품은 칼은
눈에 아니 보이네.

살인 상어 지느러미
뻘건 피로 물드네
매키 메서 장갑 끼어
악행 흔적 감추네.

초록 빛의 템즈 강에
돌연 사람 죽는다
염병 걸린 탓이 아냐
매키 놈의 짓이네.

밝은 대낮 일요일에
강변 남자 죽으니
모퉁이를 도는 사내
매키 메서 그 이름.

유태인 마이어 사라지고
부자 몇도 갔는데
돈 차지한 매키 메서
아무 증거 없다네.


제니 타울러 시체를 찾아내 보니
퍼런 칼이 가슴에 박혀 있었네.
선창 가에 매키 메서 배회하면서
그 일은 난 모르오, 시침이 떼네.

[어디 있나, 마부 알퐁스 글라이트
언제나 이 사건은 밝혀지려나
혹시 누가 알 수도 있으련마는
매키 메서 아무 것도 모른다 하네.

소호에 큰불 나서 사람 죽으니
어린 아이 일곱에 노인네 하나 -
군중 속에 매키 메서 숨어 지내니
묻는 이 없고 놈도 시치미 떼네.]

나어린 미성년자 과부도 있소.
그 이름을 세상이 모두 아는데
잠에서 깨어 보니 능욕 당했네 -
매키여, 그 대가는 무엇이었나

어떤 사람 어둠에 묻혀서 살고
어떤 사람 밝은 빛 받으며 사네.
밝은 빛 받는 자는 눈에 띄어도
어둠에 묻힌 자는 보이지 않네.
밝은 빛 받는 자는 눈에 띄어도

어둠에 묻힌 자는 보이지 않네.
제니 타울러 찾고 보니
칼에 찔려 죽었네.
선창 가에 매키 메서
아무 것도 몰랐네.

[마부 알퐁스 글라이트
밝혀질 날 있을까
행여 누가 알겠지만 -
매키만은 모르네.]

소호 큰 불 희생당한 [Soho: 런던의 환락가]
일곱 아이 한 노인 -
군중 속의 매키 메서
난 모르오 발 빼네.

나이 어린 미성년 과부
그 이름 다 아는데
깨어 보니 욕보았네 -
매키, 벌은 받았소

[어떤 자는 어둠 속에
어떤 자는 빛 속에,
빛 받으면 잘 보여도
어둠 속은 안 보여.
빛 받으면 잘 보여도
어둠 속은 안 보여







■ 참고사항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비유극


1. 서사극의 비유적 성향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대부분 비유 형식을 가지거나 적어도 비유극의 범주 안에서 다뤄질 수 있다. 실제로 "비유극 Parabelstuck"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작품은 <사천四川의 선인善人>(1941)과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 Der 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1941) 등 둘 뿐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후기 작품들이 비유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브레히트는 <시몬 마샤르의 환상들 Die Gesichte der Simone Machard>(1943)부터 <투란도트 Turandot oder Der Kongre der Wei wascher>(1953)에 이르기까지의 창작극에는 장르 표기 부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히틀러를 희화적으로 다룬 <아르투로 우이>는 애초에는 주해에만 비유극이라고 지칭되어 있었고(GW 17, 1179),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한결같이 비유극으로 취급하는 <코카서스의 백묵원 Der kaukasische Kreidekreis>도 작가 자신은 비유가 아니라고 고집했다. 그밖에 주해 또는 해설에서 작가가 "비유극" "비아리스토텔레스적 희곡문학으로서 비유 유형의 극작품들" 따위로 분류한 작품은 <남자는 남자다 Mann ist Mann>(GW 980, 987), <둥근 머리와 뾰족 머리 Die Rundkopfe und die Spitzkopfe>이다. 망명 이전에 발표된 작품으로서 엄격한 의미의 비유극은 <남자는 남자다>(1926)에 국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극"과 "비유극"을 대립개념으로 간주하여 후자에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한스 카우프만 등 동독측 비평가들도 생소화극, 서사극이 본질상 비유적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브레히트의 극작품 거의 전체를 비유극의 척도에 따라 분류한 뮐러는 "역사극"의 대표격인 <파리 혁명정부 시절 Die Tage der Kommune>마저 비유극의 일부로 취급했다.
서사극이 특히 후기에 이르러 비유 형식으로 기울게 된 까닭은 1) 작가의 외국 망명으로 인한 공연 가능성의 제약이 작품 구상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2) 그러한 상황에 앞서 근본적으로는 서사극의 기본 원리인 생소화 효과와 관련, 사회구조에 관한 인식의 중개와 "비판적 자세"의 훈련이라는 영향 미학적 관점이 작품 형식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2. 망명과 비유극 형식의 정착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에 걸친 교육극 시기에 이미 브레히트는 <도살장의 성 요한나 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ofe>(1931)와 <어머니 Die Mutter>(1932)를 발표하여 후기 서사적, 변증법적 연극 작품들의 형식에 토대를 마련했다. 관객이 없이 연기자들의 자기 학습을 유도한다는 "교육극"의 취지는 특히 <어머니>에 이르러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었다. 외형상 "교육극 양식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관객을 위한 공연극으로 구상되었기 때문에 교유극의 이른바 "기본법칙 Basisregel"과 "실현법칙 Realisationsregel"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두 작품은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었을 뿐 아니라 극적 사건의 배경, 주인공의 발전방향, 관객을 향한 교훈 등이 서로 대비를 이룬다는 점에서 비교분석의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브레히트는 두 작품에서 각각 여주인공의 학습 내지 인식과정을 묘사하되, 관객에게 서로 반대 방향의 실제적 행동지침을 전달한다. <성 요한나>가 1929년 세계공황의 맥락에서 비폭력적, 개량주의적 개혁운동의 허구성과 그것을 뒤늦게 깨닫는 주인공의 인식과정을 보여주는 반면, 고르키의 동명 소설을 번안한 <어머니>에서는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노동운동 현장의 학습과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다뤄진다. 작품 배경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산이라 할 뉴욕 증권시장과 사회주의 혁명의 산실인 러시아의 도시 거리가 대조를 이루며, 사건 진행에서는 요한나의 실책에 이은 좌절이 어머니 블라소바의 성공적인 혁명 참여와 대비관계를 보인다. 요한나는 죽음을 앞두고야 비로소 유언으로 혁명을 호소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했어요. / [...] 당신들은 세상을 등지면서 / 착했을 뿐 아니라 남기고 떠날 수 있게 하세요 / 좋은 세상을요!" 그러나 블라소바는 어머니에서 혁명가로 발전하였기에 자신의 변신을 자신있게 옹호하고 관객에게도 권할 수 있다.

끊임없이 듣고 있어요, 얼마나 허망하게
어머니들이 아들을 잃고 마는지를, 하지만 나는
내 아들을 지켰어요. 어떻게 그를 지켰냐구요? 그야
제 3의 일을 통해서죠.
그 애와 나는 둘이었지만, 세번째
공동의 일, 공동으로 수행한 그 일이 바로
우리를 하나로 합쳐 주었어요. (GW 2, 878)

두 작품은 소재의 사실성 및 시의성과 집필 당시의 사회 위기에 직결되는 주제의 호소력에 비추어 후기의 비유극 형식과는 구분된다. 날로 심화되는 파쇼 체제의 폭력과 이데올로기에 대항, 관객에게 사회 상황을 계몽하고 실질적인 지식을 전달하려던 작가의 시도는 1933년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에 이은 덴마크 망명으로 치명적인 제약을 받게 되었다. 무대 공연을 통한 서사극 작품의 시험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브레히트는 이론 분야를 집중적으로 논구하고 서사극 형식을 체계적으로 확충하기에 부심 했다. 이 무렵 서사극 발전과 비유극 형식의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한 작품은 <둥근 머리와 뽀족 머리>(1933)였다. 세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 Measure for Measure를 번안할 계획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곧 나치 정권의 선동정치를 비판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당면한 현실의 절박한 문제를 다루되, 외부에 드러나는 현상에 국한하지 않고 현상 뒤에 숨은 파쇼 체제의 근본 원인을 파헤친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 그는 나치 당국의 인종 이데올로기 뒤에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위기를 숨기려는 음험한 모략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그러한 인식이 작가 자신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직접 전달되도록 작품을 고쳐 썼다. 1938년 판본에 추가된 "서극"에서 극장 감독은 작가를 "세계를 널리 여행한 사람", 즉 망명자로 소개하면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알린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한 가지 차이를 압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차이는
두개골들의 차이보다는 큽니다
그리고 훨씬 더 깊은 흔적을 남기고
그리고 행복과 고통을 결정합니다

.......

그것은 빈부의 차이랍니다.

본극이 시작되기 전에 관객에게 주제를 밝히는 극장 감독과 작가는 서사문학의 서술자에 해당하며, 그를 통해 인종주의가 사회적, 경제적 현실의 은폐 수단이라는 결론이 미리 제시됨으로써 작품의 비유적 성격이 드러난다. 평범하지 않은 표제와 "공포의 동화 Ein Greuelmarchen"라는 부제도 이 작품이 비유임을 암시한다. 그밖에도 서극에서 아예 작품이 "비유/직유화 Gleichnis"로 지칭되어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세 작품은 집필 내지 공연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모두 절박했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사회질서를 희구하던 브레히트로서 혁명을 위한 행동지침을 중개하는 것은 실천적 예술의 화급한 과제였고, 주로 그런 필요에서 개발된 형식이 교육극이었다. 그런데 망명 이후 그는 자신의 극작품이 "활용되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으며, "책상 설합에 넣어 두기 위해" 작품을 쓰는 꼴이 되었다. 작품으로 중개되는 인식이 항상 그 자리에서 실천으로 옮겨질 수 없거니와, 당장 고국의 무대에 오를 전망도 없는 작품을 쓰면서 시의성을 고수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렇다고 지속성을 강조하다 보면 형식과 주제가 시대에 뒤져 호소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 예술 작품의 시의성과 지속성이 이처럼 서로 배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브레히트는 이미 망명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예술의 실용성과 미적 가치에 관한 문제로서 "지속성 있는 작품들의 구성방식에 관하여 ber die Bauart langdauernder Werke]"라는 시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얼른 알아듣지 못할 줄 알면서도 무언가 말을 해줘야 할 때면 / 실천에 시간이 걸릴 줄 알면서도 조언을 해줘야 할 때면 / ... / 그럴 때면 작품들에 오랜 지속성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지속될 작품들을 쓰고 싶은 바램은 / 늘 환영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미리 염려하는 사람은 / 출산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망명 기간이 길어지자, 브레히트는 당장 실제 상황에 소용될 작품보다는 시의성과 지속성을 모두 갖춰 훗날을 기약할 수 있을 작품 형식에 비중을 두게 되었다.

작품에 오랜 지속성을 부여하려는 것은 우선 "자연스러운" 노력일 뿐이지만, 그 노력은 좀더 진지해지기도 한다. 작가로서 자신의 이념들(즉, 그가 대변하는 이념들)이 관철되기 위해 매우 오랜 기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비관적인 가정을 해야 할 근거가 있을 경우에 그러하다. 어쨌든 그런 방향에서 취하는 조치들은 작품의 현실적인 효과를 결코 침해해서는 안 된다. 비유극은 작가가 인식한 사회문제를 훗날에 수용될 수 있도록 보존하기에 적합한 형식이었다. 특히 <놋쇠 구입 Der Messingkauf>에서 서사극의 이론적 근거와 가능성을 재차 진지하게 검토하면서 그는 서사극의 주된 유형으로 단연 비유극을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뮐러가 밝힌 것처럼, "이 형식은 [1] 인식 내용들을 모델(견본)식으로 구체화하여 실용성 있게 하려는 현실적인 욕구에서 개발되었으나, [2]동시에 서사극의 원칙들을 지속성 있는 대규모의 미학적 형상화로 유도하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시의성과 지속성이라는 대립된 두 속성을 비유 형식이 늘 충족시킬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보편적인 답을 구하기 어렵고, 작가 내지 개별 작품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수사학적, 문체사적인 측면에서 비유 형식은 - 특히 성경이 증명하듯이 - 뿌리가 깊고 널리 애용된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서사극의 표현 방식으로 비유를 선호한 동기는, 비유 자체의 속성보다 오히려 서사극의 구조적 요소들이 비유 형식을 통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금세기 독일문학사에서 비유 형식을 애용한 대표적인 작가는 카프카인데, <변신 Die Verwandlung>을 비롯하여 그의 장단편 소설들에 담긴 비논리의 세계는 비유 형식이 인식을 매개하는 수단으로서 반드시 효율적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노베르트 밀러는 "브레히트가 비유 형식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 혁신한 유일한 작가"라고까지 주장했다. 이 말은 과장으로 들리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그의 비유는 오직 서사극의 구현 형식이라는 전제 아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브레히트 이후에 이 전제와 무관하게 시도된 비유 형식들이 곧 한계에 도달한 사실도 서사극과 비유극의 긴밀한 관계 내지 서사극의 비유적 성향을 짐작케 하는 지표라 하겠다.

3. "콜럼버스의 달걀": 비유의 기본구조와 서사극

말년의 브레히트는 비유극을 극작품 구성의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최선의 것"으로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죽음을 얼마 앞두고 에른스트 슈마허와 가진 대화에서 그는 산 오르기에 관한 레닌의 비유(화)를 예로 들어 이 형식의 장점을 설명했다. 비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어떤 형식들보다 꾀바릅니다. 비유를 통해 그[레닌]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여 해결할 수 있었지요. 극작가에게 비유는 콜럼버스의 달걀인 셈이오. 왜냐하면 비유는 본질적인 것을 드러나 보이게 함으로써 추상 속에서도 구체적이니까요. 이 몇 마디 말속에는 비유형식의 기본구조와 그 기능 뿐 아니라 생소화, 서사극 특유의 모사模寫이론, 사실주의 문학론 등 브레히트 미학의 중심 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다.

직유(Vergleich), 비유/직유화(直喩話 Gleichnis)와 비유(화)(比喩話 Parabel)는 "유사성 Analogie"을 토대로 하여 성립하는 수사법 내지 문학 형식이다. 볼프강 카이저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두 행위[사건] 사이의 유사점들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 비유"이고, "좁은 의미의 비유(화(Parabel란 일종의 문학 형식으로서, 그 전체가 비유/직유화Gleichnis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비유의 기능은 교훈에 있다. 집약된 유추로서의 "비교물(das Vergleichende: 직유/비유/비유화)"을 통찰함으로써 독자/청자는 "비교 대상(das Verglichene: 실제 사물/현실)"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비유(화)는 대체로 질문에 답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형식을 취한다. 렛싱이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에서 활용한 반지 비유는 가장 훌륭한 종교가 무엇이냐는 술탄의 질문에 답변하는 내용이고, "탕자" 이야기 등 신약성서에 있는 비유(화)들은 대개 신앙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세익스피어의 <코리올란 비극 The Tragedy of Coriolanus>에 있는 아그리파Menenius Agrippa의 비유도 가장 잘 알려진 사례에 속한다. 로마를 사람의 몸과 비교하여 원로원을 위胃로, 시민을 사지 四肢로 묘사한 이 비유를 브레히트는 번안극 <세익스피어의 코리올란 Coriolan von Shakespeare>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다뤘다.

개념 정의와 고전적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비유는 유추를 통해 대상에 관한 인식을 전달한다. 대상의 특성상 쉽게 드러나지 않거나 숨겨진 본질을 간추려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하되, 그 형상에서 원래 대상의 본질이 드러나야 한다. 따라서 비유에는 인식, 유추, 형상화하는 주체가 전제되는데, 이 주체는 통상 "비유 화자Parabelerzahler", 즉 비유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이로써 비유는 본질상 서사적 장르에 속한다. 카이저는 "서사시가 직유법의 유리한 온상이라는 사실이 호머에게서 드러났고 다른 서사시들에서 확인되었다"고 지적, 비유의 서사적 속성을 강조했다. 호머 이외에 고전적인 비유 화자가 예수와 나탄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서사극이 비유적 성향을 지니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화자 또는 서술자의 존재와 기능이다. 서사극 작품에 서술자가 등장하는 양상은 익히 알려져 있다.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의 노래(Song), <푼틸라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 및 번안극 <가정교사 Der Hofmeister>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건 내용을 미리 알리는 장면 제목 또는 해설, (전통극 배우의 언어 형식인 대화, 독백, 방백 이외에) 직접 관객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논평, <코카서스의 백묵원>에서 극중 극의 관객이자 논평자인 가수가 객석을 향해 전하는 노래 형식의 해설과 논평 - 이들은 형식과 방법은 다를지라도 모두 서사문학의 서술자가 수행하는 기능과 비교될 수 있다. 서사적 비유 화자가 거의 고전적인 원형 그대로 활용되는 경우를 <둥근 머리와 뾰족 머리>의 서극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빈부의 차이랍니다.

......

내가 당신들에게 비유를 하나 써 드리겠소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다 증명해 보이리다
바로 이 차이만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여기에서 화자는 서사극의 서술자이자 비유 화자로서 작품 외부의 현실을 해석 및 형상화하여 그 법칙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 인물은 작가를 직접 대변하는 점에서 작품 속의 일반 서술자보다 훨씬 막강하고 구속력 있는 역할을 갖는다. 그는 현실을 파악하고 추상화하여 비유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작가 자신이다. 비유 화자가 전통적으로 선지자, 현자, 스승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비유 작가 브레히트가 자칭 철학자, 현자, 지자, 스승으로 행세하기를 좋아한 것은 당연한 듯하면서도 흥미롭다.

비유가 현실을 자연주의식으로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비유가 현실과 무관한, 형이상적 "이념들을 형상화"한다고는 볼 수 없다. 앞서 개념 정의에서 강조되었듯이 비유는 현실에서 유추되기 때문이다. 이념의 형상화란, 현실을 추상화한 다음 그것을 다시 구체화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분석에 의해 인식되고 해석된 현실"을 극적 장면으로 구성한 것이 비유극이다. 이 과정을 뮐러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하여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미학외적인 현실이 있고, 그것이 일정한 세계상의 범주에서 해석된다. 이 해석의 결과는 세계상과 연관된 인식으로서 하나의 추상이다. 이 추상이 이제 비유극에서 연극 장면으로 전환된다."
비유 화자 또는 작가에 의해 비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브레히트는 자신의 <갈릴레이> 집필과 대비시켜 설명했다.

기존 자료에서 모종의 이념을 얻는다는 말은 갈릴레이의 생애 자체에 담긴 비유적 교훈을 부각시킨다는 뜻이다. 미국 망명 중 <갈릴레이>의 공연 전망이 생기자 브레히트는 초판본(1938/39)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여러 차례 가졌는데, 그로서 가장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은 작품의 "윤리적 가치 Moral"였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철회한 것은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할 수 있기 위해" 불가피한 결단이었다고 초판본에서는 해석되었지만, 그의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브레히트에게 너무 피상적이고 진부하다고 느껴졌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의 위협에 굴복한 사실을 이제 작가는 민중에 대한 배신으로 풀이하기에 이른다. 현실과 괴리된 지식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서사극 전반의 핵심 주제가 여기에서도 드러나야 했다. "갈릴레이는 학설을 철회함으로써 학문의 본질적인 발전을 포기했고 민중을 저버렸으며, 그 결과 천문학은 다시금 학자들의 영역, 즉 비정치적이고 고립된 하나의 학술분야로 주저앉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측면이 진작 강조되지 못한 원인을 브레히트는 스스로 윤리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없이 기존의 역사 기록을 따르려 한 데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45년 7월 말의 기록에서도 그는 역사극 <갈릴레이>가 애초에 "무엇인가를 증명하려는 여하한 의도도 없이, [...] 단지 전해져 내려온 역사에 따라" 구상되었을 뿐이라고 다시 한 번 밝혔다. 이어 그는 작품의 주제를 다음 3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 첫째, 당대의 사회구조에서는 주인공의 "지식욕이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성격"으로 변질하는 이외에 둘째, 학문의 "순수한 발전과 사회 혁명적 발전"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갈릴레이는 초기 시민계급의 천문학에 내포된 사회혁명적 의미를 제거하여 천문학을 순수한 "학술분야", 즉 "불모상태"로 퇴화시켰다. 셋째,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의 "총체성"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 이 세 번째 주제를 브레히트는 사슬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들이 피압제자들을 결박하는 데 사용하는 사슬은 그 가장 약한 고리보다도 더 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슬은 고리가 하나만 빠져도 전체를 못 쓰게 된다. 지배계급의 존립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그 허위성을 폭로하면, 그들의 이념적 존립기반 전체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가 담고 있는 교훈이다. <갈릴레이>에서 지동설에 대해 교황청이 고수하는 천동설이 바로 그러한 총체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취약한 고리였다.

이 해설 가운데 <갈렐레이> 제 2판본과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한 부분은 두 번째 주제이다. 브레히트는 주인공이 지닌 진실에의 애착이나 지식욕을 정당화하는 대신, 그의 변절이 낳은 역사의 퇴보를 부각시키려 했다. 지동설의 철회가 사회에 대한 배신이자 자연과학의 타락을 상징한다는 해석 방향은 곧 이어 원자탄 투하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층 강조되었는데, 그 결과 비유극과 역사극의 차이가 현저히 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역사극 <갈릴레이>에서는 역사 자료가 주제 또는 이념을 제공했다기보다, 부분적으로는 시의성을 앞세운 작가의 영향미학적 주제의식이 작품 구성의 방향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슈마허는 브레히트가 현재를 겨냥하기 위해 역사를 경향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존 자료에서 모종의 이념들을 제거한다는 말은, 갈릴레이에 대한 전래의 긍정적 평가를 수정하여 자료 자체가 내포한 배신의 의미와 그 여파를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소재에 내포된 이념을 취사선택하여 일부를 돋보이게 하는 일은, 이념을 형상화한다는 비유극의 구성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하필 소재에 가장 충실했다는 역사극 <갈릴레이>의 개작 과정에서 서사극의 비유적 성향이 재차 확인된 것이다.

비유 화자가 현실을 일정한 관점에 따라 해석, 추상화, 재구성하는 과정은 서사극 작가의 생소화 과정과 원칙상 동일하다. "사회 표면의 증후군"을 깨뜨리고 현상계의 실제 구조, 사회의 법칙성을 찾아내기 위해 서사적, 변증법적 연극은 생소화 기법을 활용한다. 비유 구성에서 유사성에 의해 연결되는 1) 비유 자체와 2) 그 비유가 실제 표적으로 삼는 대상 사이의 관계는, 서사극에 있어서 1) 생소화 된 모사물로서 작품과 2) 그 소재인 사회 현실의 관계에 상응하는 것이다. 슈마허와 대화하면서 브레히트는 생소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것(생소화)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으면 그럴수록 더 좋으며, 그래서 비유형식이 아직도 여전히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비유 형식을 생소화 수단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비유와 서사극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해줌과 동시에 양자의 차이점도 암시한다. 전통적인 비유는 특정 이념이나 교훈을 담는 그릇이고 브레히트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생소화는 어떤 긍정적인 의미의 이념이나 세계상을 홍보하는 수단이 아니라 관념과 실제 사이의 일치 여부를 캐묻는 수단이다. 전통 문화의 유산 가운데 형식과 기법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원칙이 비유 형식의 활용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뮐러의 관점은 오해를 불러올 여지가 있다. 현실의 해석 방향을 좌우하는 "일정한 세계상"을 그는 "세계 해석의 방법론, 마르크스주의"라고 단정한다. 신약성서와 계몽주의 문학에서 애용되는 비유가 "완결된 세계상의 전파"에 기여하듯이, "그러한 완결된 세계상 dieses geschlossene Weltbild"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적 학설"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뮐러에 따르면, "이 학설은 작가에게 세계 현상들에 관한 사전 지식을 제공하며, 그 지식에 근거한 思考행위에서 개별 현상들의 설명이 얻어진다." 브레히트가 마르크스주의를 "완결된 세계상"으로 이해했는지 지극히 의심스러울 뿐더러, "마르크스주의적 학설"이라는 개념 자체도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브레히트 자신의 개념인 "생소화이론과 그 이론의 유물변증법적 특성"을 현실 해석의 관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브레히트가 전래의 비유 형식에서 주로 배운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전파하는 기능이 아니라 낡은 세계관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기법이었다. 그것이 또 생소화의 본래 기능이다. 비유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작가에게 유용했던 부분은 그 형식과 기법이 제공하는 서사적 구성 방식과 이데올로기 비판의 가능성이었고, 이것은 그의 비유극을 일종의 사회과학적 실험으로 이해할 때 뚜렷이 드러난다.

4. 비유극의 과학적 실험구도

"과학시대의 연극"에 부여된 역할을 브레히트는 사회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사회발전의 열쇠라 할 비판적 자세를 관객에게 길러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연극은 예술적 수단들을 가지고 "인간 공동생활의 표본들"을 만들어 보이되, 그 표본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회 환경을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본이론은 브레히트가 주창하는 사실주의 문학론 내지 사실주의적 모방이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진짜 사실주의"의 과제는 극장에서 현실이 재인식되도록 하는 것이며, 극작품에서는 "생활의 진행과정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드러나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 법칙들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GW 16, 520) 이것은 자연주의 희곡문학에 대한 비판이다. 자연주의 이론에 따른 현실의 단순한 재현은 물론, 루카치식의 비판적 반영론도 브레히트에겐 진정한 사실주의가 아니었다. "사실주의적"이란 그에게 무엇보다도 "사회적 인과관계를 밝히고 / 지배적인 관점들이 지배자들의 관점임을 폭로하고 ... / 발전의 계기를 강조하고 / 구체적이면서 추상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현상 뒤의 숨은 법칙성을 밝혀 현실을 제어할 수 있게 하는 연극이란 결국 그 모사방법과 목적설정에서 비유 형식일 수밖에 없다. 브레히트는 그러나 사실주의적 모방 내지 모사Abbildung를 전래의 비유 형식뿐만 아니라 근대 과학의 실증적 방법론에서도 배워 서사극에 도입했다. 이것은 그가 전래의 비유 형식을 과학적 실험의 구도에 맞춰 변형시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표본 Modell" 제작이란 원래 자연과학 분야의 실험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온 방법이다. 과학자는 특정 현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성을 발견 또는 확인하기 위해 표본을 만들어 이용한다. <놋쇠 구입>에서 브레히크를 대변하는 "철학자"는 과학분야의 그런 성과들을 연극에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과학은 모든 분야에서 실험 가능성이나 문제들의 입체적 묘사 가능성들을 찾고 있소. 사람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표본들을 만들고, 교묘한 장치로 기체들의 반응을 보여주지요. [...] 내 생각은 당신들의 인간 모방 기술을 그러한 실증작업에 이용하자는 것이었소.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에서 설명이 필요한 사태들을 모방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 입체적인 실증작업을 본 사람들이 실제 이용 가능한 지식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험구도로서의 연극은 자연과학 실험에서와 달리 인간사회의 법칙을 가시화해야 한다. 행동심리학 등에서 인간의 행태에 관한 실험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결과를 실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에 "철학자"는 인간사회의 입체적 모방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에 관한 학문"으로서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소개한다. 그는 그러나 이 학설이 연극에 활용될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주지시킨다. 유물사관과 계급 투쟁론을 담고 있는 마르크시즘의 주요 관심대상은 "대규모 인간 집단들의 움직임"인데, 연극에서는 주로 "개인들 상호간의 행태"가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이해하는 마르크시즘은 또한 확정된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을 제안하는" 학설이다. 이 학설은 모종의 "관찰방법들, 기준들"을 제공한다. 마르크시즘이 여기에서는 비판적 방법론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특히 개개인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지침이 되는, 그래서 연극에 소용될 관점으로 유물변증법적 명제가 제시된다. "[1]인간의 의식은 그들의 사회적 존재에 좌우되고, [2]사회적 존재가 끊임없이 발전함에 따라 의식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생소화 이론에 함축되어 있다. 생소화 효과란 1) 피상적으로만 알려진 현상[= 거짓 의식]을 생소하게 표현하여 그 실체[= 사회적 존재]를 인식케 하고, 2) 인물과 사건을 "역사화"하여 그 유동성을 드러내는 작용을 뜻하기 때문이다. 서사극의 비유적 성향도 결국은 생소화 개념에 귀착하고 만다.

비유 형식을 생소화 기법으로 이해함으로써 브레히트는 전래의 비유 형식을 자신의 연극론에 맞춰 변형시켰다. 전래의 비유에서 전제되는 비유 화자의 사전 지식과 확정된 세계상을 그는 유물변증법의 명제로 대치 내지 한정했고, 특정의 체계화된 세계관을 홍보하는 대신 자연과학의 실험 모델 원리를 도입하여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과 과정을 보여주는 데 치중했다. "이념을 형상화"한 것이 비유라는 작가 자신의 일견 관념론적인 정의를 얀 크노프처럼 억지로 무시하거나 오류로 치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이념"이란 위에서 밝힌 유물변증법의 명제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명제를 쉽게 풀어 보자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한국인의 속담이요, 정치는 맨 먼저 "백성을 배불리 먹이라"는 논어論語의 교훈이요, 브레히트의 화법으로는 "첫째는 처먹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도덕이 생긴다! (Erst kommt das Fressen, dann kommt die Moral!)"는 뜻이다. (그가 공자를 역사상 인류 최대의, 그러나 지극히 "성과 없는" 스승으로 부르면서도 스스로 공자연孔子然하며 즐겨 그 초상화 아래에서 일한 것은, 진실을 실제에서 찾으려던 고대 성현의 용기와 지혜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빵이 앞선다는 명제는 절대적이 아닐지 모르나 보편적 진실이며, 여기에 관념주의의 이념이라는 비판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브레히트의 비유극이 전제하는 이러한 "사전 지식"과 자연과학적 실험 형식은 실제 작품분석을 통해 확인될 것이다. 비유의 실험적 특성에 관해서는 대체로 크노프의 다음 해설이 뮐러의 관점을 보완하고 있다.

실험적 구성은 현실(또는 그 부분들)을 구성 자체의 목적에 맞춰 [...]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선별하고 고립시키면서) 현실의 일부 과정들을 모조한다. 과정들의 작용 상태에 관한 판단, 과정들에 관한 인식은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실험의 결과이며, 이 때 실험은 현실에서 진실임이 확증되어야만 성공한 것이다. [...] 사전 지식이 형상으로 전환되는 게 아니고, 인식되지 못했던 현실이 통찰 가능하게 만들어진다. [...] 비유의 유효성 여부는 작가가 사전에 확보하고 있는 사고 및 지식의 지평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실에서 그 실험을 검증해 봄으로써만 결정된다.

뮐러는 전래 문학형식으로서의 비유에서 출발하여 브레히트의 비유를 평가했던 바, 크노프는 여기에서 그 맹점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비판의 초점이 분명하지 않다. "현실에서의 검증"이 누차 강조되지만, 이 때의 "현실"은 작품 밖의 실제 현실을 가리키기 때문에 논의의 핵심을 수용미학으로 이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보이지 않는 원자 구조를 보이게 하는 것이 원자 모델의 원리이듯이, "사회의 직접 보이지 않는 기능과정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비유극이라는 주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놋쇠 구입>에서 "희곡이론가"가 요구하여 "철학자"가 제시한, 현실의 일부를 선별하는 데 필요한 "방향"이나 "관점"(GW 16, 530)으로서의 유물변증법을 크노프는 완전히 무시하거나 망각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 현황으로 보아 뮐러의 다음 견해는 존중받아 마땅하며, 부분적으로 보완을 필요로 할 뿐이다.

비유 화자로 하여금 제기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사전 지식은 비유 구성의 절차와 방법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동시에 비유의 유효성 여부는 비유를 구성한 사고 및 지식의 지평에 의해 제한 받는다. 그 지평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제시된 해결책의 실질적 의미도 끝나고 만다.

비유 작품에 담긴 해결책은 작가의 인식능력에 따라 수준이 다르고, 그 해결책이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할 경우엔 그 효용성도 끝장이라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 점을 의식하여 "세계를 관찰하는 방법"으로서의 마르크시즘에 의존했다는 것이 뮐러의 결론이다. 그가 1972년에 사용한 "완결된 세계상으로서의 마르크시즘"이라는 표현에 비해 이것은 일보 발전한 관점이다. 그러나 뮐러는 이 마르크시즘이 유물변증법이자 생소화 이론을 가리킨다는 점을 밝히지 않고, 더욱이 전래의 비유 형식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브레히트의 독창적 비유극론을 설득력 있게 규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브레히트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비유극으로서의 서사극 구성에 적용된 최소한의 "사전 지식"은 "세계관"이 아닌 "관찰 방법"으로서의 유물변증법이다. 그러나 일부 시의성이 강한 비유극에서는 이 지식마저도 오류를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자신의 이론에 거역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증명되지 않은 이론을 작품에 반영한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 결과는 대체로 신통치 못하다. 예컨대, 케테 뤼릴케는 <도살장의 성 요한나>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위기론을 근간으로 쓰여졌음을 증명했으나, 이 경우에도 브레히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희곡 작법상의 필요에 따라) 경제학을 임의적으로 처리하는 예술가"라고 한스 마이어는 평가한다. 브레히트의 비유극 가운데 실패작으로 지적되어 온 <둥근 머리와 뾰족 머리>에서도 같은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서극에서 작가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공표 되듯이, 그는 나치스의 인종 이데올로기를 가리켜 자본주의의 위기를 호도하기 위한 파쇼 정권의 자구책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6백만 유태인의 학살을 가져온 실제 상황은 그런 해석을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그런데도 브레히트는 1955년에 이르러서까지 끝내 자신의 해석 방향을 대체로 고수했고, 비유 형식의 우수성에 매료된 뮐러 역시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브레히트는 파시즘의 속성을 오판한 것이 아니라, 당시 코민테른의 잘못된 파시즘 이론에 의존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작가의 오해는 기정사실이고, 그 결과는 관객과 비평가들의 냉대로 나타났다.

개별 비유극 작품의 성격은 1) 해당 작품에 담긴 작가의 교훈 내지 사전 지식의 구속력과 2) 소재의 시의성 및 주제의 보편성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교훈 목적을 가진 전래의 비유 문학에서처럼 구체적이고 확정적인 주장이나 설익은 이론이 홍보될수록 그 비유는 오류에 빠지기 쉽고, 주제가 갖는 시의성의 상실과 더불어 급속히 잊혀질 위험을 안게 된다. 뮐러의 분류에 따르면, 브레히트의 비유극은 다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보편적 문제와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다룸 :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시의 흥망>, <四川의 善人>, <푼틸라 나리와 그의 종 마티>, <루쿨루스 청문회>, <예외와 관습>;

2) 나치스의 본질을 분석 : <둥근 머리와 뽀족 머리>,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 <제 2차 세계대전의 슈베이크>; 전쟁에 처한 소시민의 의식과 운명: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3) 특정의 역사적 시점을 묘사 : <도살장의 성 요한나>, <어머니>, <시몬 마샤르의 환상들>;

4) 생소화 기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사실적 묘사 : <카라르 부인의 무기>, <제 3제국의 공포와 참상>, <파리 혁명정부 시절>.

이 목록은 뮐러의 말대로 이론의 여지가 있다. <코커서스의 백묵원>과 특히 작가 최초의 비유 희극인 <남자는 남자다>가 누락되었고, 비유극이라는 장르개념이 너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3), 4)항 전부와 <억척어멈>에는 비유극이라는 장르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 참고 도서


* 세추앙의 착한여자(희곡선집 1) : B. 브레히트, 박준용 역, 포도원, 1992
* 악한자의 가면 : B. 브레히트, 김길웅 역, 청담사, 1991
* 코카시아의 백묵원(범우희곡선 2) : B. 브레히트, 이정길 역, 범우사, 1990
* 브레히트의 리얼리즘론 : B. 브레히트, 남녘 편집부 역, 남녘, 1989
* 서사극이론-브레히트 연극론(한마당문예 3) : B. 브레히트, 김기선 역, 한마당, 1989
* 베르톨트 브레히트 희곡선 사천의 선인 : B. 브레히트, 임한순 역, 한마당, 1987
* 상어가 사람이라면(문예 4) : B. 브레히트, 정지창 역, 한마당, 1987
* 살아남은 자의 슬픔 : B. 브레히트, 김광규 역, 한마당, 1985





■ 연구서


* 브레히트와 영화 : G. 랠리스, 이경윤 외 역, 말길, 1993
* 지식인들 상하 : P. 존슨, 김욱 역,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93
* 삶과 문학-브레히트 평전 : M. 케스팅, 홍승용 역, 한마당, 1992
* 브레히트 초기시 연구(예문신서 6) : 이희원, 예문, 1989
* 브레히트 평전 : 김태식, 종로서적, 1989
* 브레히트 평전 : R. 그레이, 한밭 편집부 역, 한밭, 1985
* 현대비극론 : R. 윌리엄스, 임순희 역, 학민사, 1985
* 브레히트 연구 : 이원양, 두레, 1984
* 브레히트 평전 : 임양묵, 한밭, 1984
* 제 3세계와 브레히트 : W. 헤히트 외, 김성기, 윤부한 편역, 도서출판일과놀이,
1984
* 빈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W. 벤야민, 반성완 역, 민음사, 1983
* 현대 드라마의 이론(1880-1950) : P. 손디, 송동준 역, 탐구당, 1983
* 현대연극의 사조-1800년부터 현대까지 : B. 휴히트, 정진수 역, 형성사, 1979
* 현대연극 : 허영, 형설출판사, 1979
* 현대서사극의 본질 〈현대독문학의 이해〉 : 김광규 편, 민음사, 1984
* 존서, 브레히트, 아르토-현대의 교술주의 연극 〈영어영문학〉 70 : 김태진, 한국
영어영문학회, 1979






■ 별첨



브레히트의 시 "후세대들에게" 이해를 위한 소고 / 강태호


I. 들어가는 말

본 소론은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잘 알려진 연작시 "후세대들에게 An die Nachgeborenen"의 적절한 이해를 위한 해석의 예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브레히트의 연작시 "후세대들에게"가 정확히 언제 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브레히트 연구자들은 이 시가 덴마크 망명시기인 1934년부터 39년 사이에 창작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브레히트가 처음부터 연작시를 만들 의도를 가지고 이 시를 구성하는 세 부분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차례로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마르쉬 Marsch의 견해에 따르면 두 번째 부분이 가장 먼저 씌어졌을 것이고 첫 번째 부분이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하며, 보네르트 Bohnert는 ‘후세대들에게’ 라는 제목을 지녔던 것은 원래 세 번째 부분뿐이며, 나머지 부분들은 제목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집 "스벤트보르그의 시 Svendborger Gedichte" (1939)에 싣기 위해 1937년에 씌어진 두 가지 초기 원고 - 시 제목은 "망명기의 시 Gedichte im Exil" - 에는 두 번째 부분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이 시가 시집 "스벤트보르그의 시"의 마지막 시로 들어간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939년 7월 잡지 "Neue Weltbühne"에 실린 이후라고 한다.
이러한 발생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의 세 부분의 형식적 구성들 사이에서 확실한 연관 관계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는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씌어진 세 부분이 추후에 커다란 형식적인 변화 없이 단지 순서만 바뀐 채 하나의 제목 아래에 합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보기에 오히려 중요한 것은, 왜 브레히트가 이 세 부분을 발생시기에 따라서 배열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로 배열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이 점에 주목하면서 우선 시의 세 부분을 각각 형식적, 내용적으로 분석하고, 이 세 부분이 현재 순서로 배열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나아가 작가의 배열 의도를 이해해 보려고 한다.


II. 연작시 "후세대들에게" 분석

II.1. 첫 번째 부분 분석

I

확실히, 나는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다!
악의 없는 말은 어리석다. 매끄러운 이마는
무감각함을 나타낸다. 웃는 자는
끔찍한 소식을
다만 아직 듣지 못했을 뿐이다.

너무나 많은 비행들에 대한 침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나무들에 대한 대화는 거의 범죄나 다름없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저기 조용히 거리를 지나가는 자는
어려움에 빠져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진실이다: 나는 아직 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믿어다오: 그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라는 것을. 내가 행하는
그 어떤 것도, 내가 배부르게 먹는 것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만일 행운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끝장이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먹고 마셔라! 네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라!
그러나 만일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바로 배고픈 자에게서 뺏은 것이라면,
목마른 자가 내가 마시는 물 한 컵도 구할 수 없다면,
어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먹고 마신다.

내가 정말 현명하다면 좋을 텐데.
현명하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세상의 다툼과 거리를 두고, 짧은 시간을
두려움 없이 지내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하며
악을 선으로 갚고
자신의 바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잊는 것
이것이 바로 현명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할 능력이 없다:
확실히, 나는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다!


연작시의 첫 번째 부분은 각각 길이가 다른 다섯 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브레히트가 망명 시절에 창작한 대부분의 시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형식적 기본 운율 구조는 드러나 있지 않다. 그리고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는 수용자 Adressat인 ‘후세대들 die Nachgeborenen’은 여기서 익명의 복수 형태로 표현된다 (제 3연의 “Aber glaubt mir”).
시의 첫 번째 부분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확실히, 나는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다! Wirklich, ich lebe in finsteren Zeiten!”라는 호소로 시작하고 끝난다는 점이다. 한탄조의 호소에 의해 틀 지워진 구조는 화자의 출구 없는 상황을 암시하며 비극적 정조를 자아낸다. 이러한 출구 없음은 특히 “어두운 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 “현명하게 weise” 살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나”의 대립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제 5연). 우리가 이 시를 실제 시인의 체험 진술로 간주한다면, 이 부분에는 망명이라는 상황에 처한 시인 브레히트의 절망감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립 구조는 어두운 시대 상황의 강압 속에서 발생하는 화자의 의식과 행동방식 사이의 괴리 속에서도 표현된다. 예를 들면, “악의 없는 말 Das arglose Wort”과 “어리석은 töricht”, “매끄러운 이마 Ein glatte Stirn”와 “무감각함 Unempfindlichkeit”, “웃는 자 Der Lachende”와 “끔찍한 소식 die furchtbare Nachricht” (이하 제 1연), “나무들에 대한 대화 Gespräch über Bäume”와 “그 많은 범죄행위에 대한 침묵 Schweigen über so viele Untaten”, “조용히 ruhig”와 “곤란에 처한 in Not” (이하 제 2연), “식사 essen”와 “굶주리는 자들 Hungernde”, “음료수 trinken”와 “목말라하는 자들 Verdurstende” (이하 제 4연) 등의 대립적 표현들이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시인은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행동조차도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 2연에 등장하는, “종종 오해되어져 온” 유명한 표현인, “나무들에 대한 대화는 거의 범죄나 다름없다 Ein Gespräch über Bäume fast ein Verbrechen ist”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을 소재 혹은 주제로 삼는 자연시 Naturgedicht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오히려 “어두운 시대”의 강압에 대한 탄식 또는 당대 정치 현실의 잔혹성에 대한 한탄이다. 브레히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자연시에 대한 그의 거부가, “어두운 시대”의 압력, 곧 자본주의의 극우적 형태인 파시즘이 지배하는 시대의 압력에 의해 강요당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싸우도록 강요했다. 그것은 우리의 환경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해 숲 속을 걸어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경찰들 속으로 들어간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당시에 창작된, 브레히트의 다른 시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내 안에서/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격과/ 페인트공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두 번째 것만이/ 나로 하여금 책상 앞에 앉도록 만든다. 혹은 “바람 때문에 저 호두나무에서 호두가 떨어졌을 때라고 말하는 대신,/ 저 페인트공이 노동자들을 짓밟았을 때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또는 “오로지 점점 심해지는 혼란 때문에/ [...]/ 더 이상 항구도시들, 지붕 위의 눈, 여자들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 지하실의 익은 사과 냄새, 고기의 느낌에 대해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언급은 브레히트의 "메티: 전환의 책 Me-ti: Buch der Wendungen"에 실린 우화 "순수 예술에 대하여 Über reine Kunst"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메티가 말했다: 최근에 시인 킨예가 나에게 묻기를, 이런 시국에 자연 정조에 대한 시를 써도 되느냐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자연 정조에 대한 시를 썼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왜 쓰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독자가 즐기면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과제를 상상해 보았으며, 이에 대해 숙고하고 이따금 끄적이면서,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모든 사람들이, 곧 집 없는 사람들, 잠잘 때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까지도 즐겁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가 두려워 뒤로 물러섰다고 했다.
나는 예술은 오늘날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항상 그러한 빗방울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시는 오랫동안 남아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는, 그러한 시는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에만 씌어질 수 있을 거라고 슬프게 말했다.

여기서도 암시되듯, 브레히트는 자연시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시를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두운 시대 상황에 대해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 시기에 적지 않은 ‘나무들에 대한 시’들을 썼다는, 언뜻 보기에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연관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의 ‘나무들에 대한 시’들은 전통적인 자연시와는 구분된다. 전통적인 자연시에서 달리 그의 시에서 자연적 전원 풍경은 항상 시인이 처한 절망적인 시대 상황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려진다.
첫째 연과 둘째 연에서 - 시의 첫 행을 제외하고 - 망명이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객관적 시점에서 기술되어 있는 반면, 셋째 연부터 마지막 연까지 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 Essen und Trinken”, 곧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들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망명 상황에 대해 화자 자신이 일인칭 서술 시점으로 고백하고 있다.
두 번 등장하는 “우연 Zufall” (제 3연)이라는 단어와 같은 연에 나오는 “행운 Glück”이라는 표현은 화자의 의지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더욱 강조해 준다. 말하자면, 화자가 거처를 구할 수 있고,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연과 행운 덕택이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자에게 이러한 모순을 벗어날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지 “현명한 weise” 사람만이, 곧 고전적인 의미에서 “세상의 다툼과 거리를 둘 sich aus dem Streit der Welt halten” 줄 알며 “악을 선으로 갚을 Böses mit Guten vergelten” (제 5연) 줄 아는 사람만이, 이러한 모순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능력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부분이 한 편의 독립적인 시가 아니라 다른 부분들과의 연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이 부분의 절망은 새로운 희망을 위한 토대로 작용하게 된다.


II.2. 두 번째 부분 분석

II

배고픔이 지배했던
혼란스런 시대에 나는 이 도시들에 들어왔다.
나는 격동의 시대에 사람들에게로 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항거했다.
지상 위에 내게 주어졌던
나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전투와 전투 사이에 식사를 했고
살인자들 밑에서 잠을 잤으며
사려 없이 사랑을 했고
자연을 참을성 없이 바라보았다.
지상 위에 내게 주어졌던
나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나의 시대에 거리들은 늪으로 향했다.
언어는 나를 학살자에게 밀고했다.
나는 아주 적은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내가 없어서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를 나는 바랬다.
지상 위에 내게 주어졌던
나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아주 적은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달해야 할 목표는
너무도 멀리 놓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보였다, 비록 나는
거의 도달할 수 없을 지라도.
지상 위에 내게 주어졌던
나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연작시 "후세대들에게"의 두 번째 부분은 형식적인 면에서 나머지 두 부분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 부분은 동일한 구조를 지닌 네 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연은 모두 여섯 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일한 비가적 후렴구를 지닌다. 각 연의 첫 네 행은 과거를 새로운 방식으로 묘사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두 행은 같은 결론으로 끝난다: “지상 위에 내게 주어졌던/ 나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또한 여기서 수용자 혹은 청자는 드러나 있지 않다.
내용적으로 보아 이 부분은 자신의 지나간 시절에 대한 화자의 서사적 보고이다. 그래서 이 부분의 시제는 다른 부분과는 달리 과거로 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는 브레히트의 유명한 시 "가련한 B. B.에 대하여 Vom armen B. B."를 들 수 있다. "가련한 B. B.에 대하여"에서와 유사하게, 이 부분 역시 시인의 운명에 결정적이었던 계기를 강조하면서 출발한다: “혼란스런 시대에 나는 이 도시들에 들어왔다. In die Städte kam ich zur Zeit der Unordnung”. 여기서 복수형으로 사용된 “도시들”은, 브레히트의 여러 초기시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세계를 지칭한다.
시의 첫 번째 부분에서 “어두운 시대”, 곧 망명 시대가 문제가 되었다면, 이 부분의 첫째 연과 둘째 연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암시하는 “혼란스런 시대 Zeit der Unordnung” 혹은 “격동의 시대 Zeit des Aufruhrs”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어두운 시대”에서와는 달리,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는 적어도 시인에게 있어서 행동과 의식 사이의 괴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인이 아직은 “사람들 Menschen”로부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실존적 관계는 일그러져 있긴 했지만 (“사려 없이 사랑을 했고/ 자연을 참을성 없이 바라보았다.”), 화자는 적어도 자기모순으로 인해 고통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대립하고 있는 것은 “나 Ich”를 포함한 “사람들”과 “살인자 Mörder”이다.
셋째 연부터는 다시 망명 상황과 관련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시의 정조는 다시 비관적으로 바뀐다. 화자는 “사람들”과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아주 적은 일밖에 할 수 없”으며, 그래서 오히려 그는 때때로 자신의 부재를 합리화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내가 없어서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를 나는 바랬다”). 여기서 대립 구조는 둘째 연과는 달리 “사람들”과 분리된 “나”와 “지배자들 die Herrschenden” 사이의 불균등한 세력관계로 나타난다. 이는 결국 넷째 연에서 “힘 Kräfte”과 “목표 Das Ziel” 사이의 괴리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러나 지배자들은 Aber die Herrschenden” 이라는 시구가 넷째 행의 앞부분이 아니라, 셋째 행의 뒷부분에 놓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의도된 앙장브망 Enjambement은 마지막 연의 첫 행 - 여기서 다음 문장의 주어 “목표 Das Ziel”는 끝에 놓인다 - 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앙장브망은 “힘”과 “목표” 사이의 괴리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폐쇄적인 구조를 통해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첫 번째 부분과는 달리, 연작시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비관적 상황에 대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열려져 있는 듯이 보인다. 넷째 연에 나오는, “그것은 분명히 보였다. Es war deutlich sichtbar”와 “비록 나는/ 거의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wenn auch für mich/ Kaum zu erreichen” 라는 표현은, 특히 이 부분을 시의 세 번째 부분과 관련시켜 읽어보면, 후세대들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 혹은 그가 속한 세대는 추구했던 목표에 도달할 수 없었지만, 시인은 후세대들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써 연작시의 두 번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의 절망적 상황과 세 번째 부분의 긍정적 전망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II.3. 세 번째 부분 분석

III

우리를 가라앉혀 버린
홍수 위로 떠오를 너희들이여
기억하라
너희가 우리의 약점에 대해 얘기할 때도
너희들이 빠져나온
어두운 시대를.

하지만 우리는 나라를 신발보다 더 자주 바꾸면서 다녔다
계급의 전쟁을 치르면서,
단지 불의만 있을 뿐 항거가 보이지 않았을 때에는 절망하면서.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야비한 행위에 대한 증오는
또한 우리의 모습과 행동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는
또한 우리의 목소리를 쉬게 만든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함을 위한 토대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친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협력자가 되는
그런 시기가 도래한다면,
우리 시대를 기억하라
관용을 가지고서.


처음부터 ‘후세대들에게’ 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던 세 번째 부분은 길이가 다른 네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이 부분도, 첫 번째 부분과 유사하게, 닫힌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째 연의 첫째 행과 마지막 연의 첫째 행에 각각 등장하는 “기억하라 Gedenkt” 라는 단어는 괄호를 열고 닫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첫 번째 부분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점은, 이 부분이 미래형으로 시작하고 끝나며, 화자는 “나 Ich”라는 개별적 형태가 아니라 “우리 Wir”라는 집단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둘째 연과 셋째 연의 과거는 첫째 연과 마지막 연에서 보여지는, 후세대들에 대한 “가라앉은 자들 Untergegangen(en)” (제 1연)의 희망과 바램, 곧 희망찬 미래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첫째 연의 셋째 행은 마치 희망과 바램을 담은 비문 Inschrift처럼 보인다. 행의 길이가 “기억하라”라는 한 단어로 극도로 축소되고 연의 한 가운데에 놓임으로써 비문으로서의 시각적 효과는 더욱 강화된다. 또한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너희들, 떠오를 사람들이여 Ihr, die auftauchen werdet”와 “가라앉은 우리들 wir untergegangen sind” 사이의 대조이다. 이러한 대조는 “홍수 Flut”라는 단어를 통해 강조된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대홍수 Sintflut를 연상시키는 이 단어는, 마지막 연에서 암시되듯, 마르크시즘의 의미에서 역사적 단절, 곧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시의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의 비가적 정조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둘째 연과 셋째 연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가라앉은 자들”의 “약점 Schwäche” (제 1연)에 대한 전형적인 고백으로 읽힌다. 특히 둘째 연에서는, 시의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의 셋째 연에서와 유사하게, 정치적 입장 때문에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절망이 그려지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신발보다 더 자주 바꾸면서 다녔다 Gingen wir doch, öfter als die Schuhe die Länder wechselnd” 라고 시작되는 첫째 행은, 히틀러의 강점 위협 때문에 한 망명국에 오래 머물 수 없었던 시인 세대의 절박한 상황을 암시한다. 둘째 행과 셋째 행은 히틀러의 유럽 점령기에 국내외에 거주하던 파시즘 항거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퍼지고 있던 절망감을 나타내 주며, 또한 망명자들이 독일 국내의 정치적 운동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갖게 되었던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느낌을 표현해 주고 있다. 여기서 둘째 연의 한 가운데 놓여 이 연의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는, “계급의 전쟁을 치르면서” 라는 구절은, 시인이 이러한 망명 상황을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준다.
셋째 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두운 시대”의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다. 시인에 따르면, 역사적 상황은 망명자들로 하여금 “야비한 행위 Niedrigkeit”에 맞서서 “증오 Haß”로, “불의 Unrecht”에 맞서서 “분노 Zorn”로 반응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들은 증오가 그들의 모습과 행동을 일그러뜨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쉬게 만든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친절함 Freundlichkeit”이 지배하는 세상을 위해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동안 오히려 자기 자신은 정작 친절할 수 없었다는 비통한 자기 모순을 고백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 모순의 인식은 연작시의 첫 번째 부분의 마지막 연이 제시했던 결론과 일치한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어두운 시대”의 모순에 대한 인식으로만 끝나는 첫 번째 부분과는 달리, 여기서는 마지막 연에서 “어두운 시대”에 대한 부정으로서 미래의 긍정적인 사회가 암시된다는 점이다. 시인이 상상하는 긍정적인 사회란 “사람이 사람에게 협력자가 되는 der Mensch dem Menschen ein Helfer ist” 사회를 말한다. 물론 첫째 연의 “홍수”와 둘째 연의 “계급의 전쟁”을 마르크시즘의 의미에서 ‘역사의 혁명적 단절’과 ‘계급 투쟁’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사회는 노동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나아가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가 지양된 사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는 “홍수” 아래로 “가라앉는” 세대들에게는, 이미 시의 두 번째 부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너무도 멀리 in großer Ferne” 놓여 있다. 말하자면, “분명히 보이지만 deutlich sichtbar”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nicht erreichbar” 희망일 뿐이다. 그래서 “가라앉는” 세대를 대표하여 화자는, 이러한 사회 상태에 도달하게 될 “홍수 위로 떠오를” “후세대들”을 기다리며, 그들에게 자신의 세대를 “관용을 가지고 mit Nachsicht” 보아줄 것을 부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용 역시 화자가 기대하는 사회의 “친절함”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III. 맺음말

지금까지 본 소론은 브레히트의 연작시 "후세대들에게"의 각 부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각 부분 사이의 연관 관계를 고려하여 시 전체를 이해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연관 관계는 각 부분이 현재의 연작시 상태로 결합됨으로써 비로소 발생하게 된 것이며, 이를 통해 각 부분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의미 또한 변화, 확장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의 세 번째 부분에서 인식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첫 번째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현재에 대한 절망감과 두 번째 부분에 묘사된 목표를 향한 과거의 노력 덕택에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의 “후세대들”에 대한 화자의 당부는 오히려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에서 그려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절망감을 통해서 더욱 호소력을 얻는다. 더 나아가서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의 화자 “나”의 진술은, 복수 주어인 “우리”가 후세대들에게 말을 하는 형식을 취하는 세 번째 부분과 연결되게 됨으로써, 더 이상 망명 상황에 처해 있는 화자의 개인적 운명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파시즘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싸웠던 자신의 세대 전체에 대한 정당화로 읽혀질 수 있다.






■ 별첨


* 사춘기(희곡원명 : 봄의 깨어남) / 프랑크 베데킨트
-"세기전환기" 의 독일문학에 나타난 성과 사랑의 담론


프랑크 베데킨트는 재치 있고, 냉소적인 풍자작가로 알려져 있고 그로테스크하게 희화된 작품 속에서 시종일관 반시민적 보헤미안 사회와 도덕주의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인습에 지배되는 기성 시민사회의 도덕을 위선적인 부도덕이라고 공격하며 그가 그려내는 것은 인습적인 시민사회의 틀을 벗어난 아웃사이더적인 삶의 형태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에로틱한 본능의 세계이다.

"어린이 비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사춘기』는 베데킨트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으로 1891년에 출판되었으나 공격적인 사회비판으로 오랜 동안 공연되지 못하고 여러 장면 수정을 거쳐서 15년 후에야 당시 독일 연극계의 거장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을 통해 공연에 이르게 된 작품이다.(1906) 작가 자신의 청소년 시절의 체험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는 이 작품에는 1890년대 독일 청소년들의 문제가 부각되며 청소년들의 세계가 인습과 규범이 지배하는 기성 시민사회와 첨예하게 대립된다



* 오페라 "" 룰루 "" / 프랑크 베데킨트
- 여성신화와 반反신화 - 프랑크 베데킨트의 이중비극 『룰루』의 유혹 모티프


원작인 프랑크 베데킨트 Frank Wedekind, 1864 - 1918)의 극 "판도라의 상자"를 관람한
베르크가 영감을 얻어 만든 이 오페라는, 미완성으로 남겨졌다가, 후에, 다른 작곡가에 의해 완성되어, 공연되어졌다.
베르크는,"" 모차르트에게 "돈 죠반니" 가 있다면, 내겐 "룰루"가 있다"" 고 했다.
감상하기 전, 대충의 줄거리와 주변의 정보 등등에 의해 "룰루"라는 여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타락한 요부"" 다. 마치, 치명적 바이러스처럼, 그에게 빠져드는 남자들을 모두 몰락시키고, 자살 혹은 타살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오늘 감상한 Graham Vick 연출의 룰루는 위에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 타락한 요부 "가 아닌, 남성의 욕망에 의해 희생되어지는 여성으로 표현된다. 유부녀인 룰루와 계속 내연의 관계를 가지는 아내를 독살한 남자, 화가와의 은밀한 관계를 눈치채고 심장마비로 죽는 룰루의 남편, 룰루의 과거를 알고 자살하는 화가, 아버지의 연인인 룰루를 흠모하는 아들, 룰루와 동성애 관계인 여자. 그 외에도 룰루와 은밀한 관계를 가진 수많은 남자들... 이들 모두, 스스로 선택할 뿐, 그로 인한 고민이나, 고뇌는 없다. 오직, 룰루를 온전히 갖지 못한 소유욕에 대한 집착만 가질 뿐이다.
사실, 그들로 인해, 룰루는 점점, 타락해 간다. 한 번의 살인(아내를 독살한 남자), 두 남자의 자살(화가, 첫 남편) 마침내, 룰루는 여러가지 치정 사건에 휘말려 파리에서 런던으로 도망가고, 매춘부로 전락하여 생계를 유지하다 결국, 단골손님(?)에 의해 살해당한다. 터부시 되어있는 불륜, 근친상간 등 인간 깊이 눌려 있던 성적인 욕망들이 "룰루"를 통해 끌어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 의해, 욕망 분출을 위한 대상으로 "룰루"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룰루는, 타락의 대상이 되어지는 것이 아닌, 남성 스스로 타락하기 위한, 하나의 메타포일 뿐이다
사랑이란 이름표를 단, 이기적인 욕정과 "타락한 인간성"이 만들어 낸 여인 " 룰루"로 해석되어진 오페라였다. 함께 감상했던 주변 남성들은, 좀 더 카리스마 있는 소프라노 에바 마르톤같은 "룰루"를 원했지만, 쉐퍼 버젼의 이 "룰루"가 사실은 더...인간적이어서, 맘에 든다. 언젠가, 오페라속에서 악인에 대한 순위를 매긴적이 있다. 악이나 선은 절대적이다.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고뇌한 다는 것은 이미,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절대 악이란, 악행에 대한 자책이나 갈등이 없다.
만일, "룰루"가 뭇 남성들을 무조건 타락만 시키는 악의 화신이였다면, 오히려 더, 재미없는 오페라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그저 그렇게 가는 것이 운명이란 변명을 만들게 한다. 그러나, Graham Vick 연출의 "룰루"는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작품이었다.
장면 장면마다, 시 처럼, 가수들의 연기 하나 하나가 어떤 메타포를 지니고 있는, 그래서 감상내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런 오페라가, 정말...좋다. 문득, 오페라에는 왜! 추리물이 없을까...;;


* 판도라의 상자 (Pandora"s Box 1928)

독일 감독 G.W.파브스트는 프랑크 베데킨트의 악명 높은 희곡 <룰루 Lulu>를 영화화하면서 중심역을 연기할 적절한 여배우를 여러 달 동안 찾았다. 결국 그는 미국인 여배우 루이스 브룩스를 만날 수 있었다(브룩스가 베를린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었을 때, 그의 두 번째 선택은 마를렌느 디트리히였지만 브 룩스가 승낙을 했으므로 디트리히는 1930년 <블루엔젤>에 캐 스팅될 때까지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 하였고 브룩스는 사운드의 출현으로 인해 <오버랜드역의 추적자들 Overland Stage Raiders> 이라는 B급 영화로 할리우드에서 무책임하게 버려졌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녀의 연기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것 중 하나였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까만 단발머리(파브스트가 원했던것은 퍼머머리였지만)로, 부끄럼 없는 선정성과 순수의 강요된 혼합인 비도덕적인 룰루-그녀의 관능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녀 자신마저도 파괴한다-의 역을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 브룩스가 사귀던 실제 연인들 중 한 명인 프란츠 레더러와 연기하는 장면서, 감독인 파브스트는 속옷을 벗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룩스가, 감히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냈을 때, 파브스트는 태연하게 "레더러"라고 대답했다.






■ 표현주의 연극 expression!ISM


1. 표현주의 연극의 개관 OVERVIEW OF expression!ISM

1) 표현주의 연극의 배경과 정의

표현주의는 우리의 주변세계를 인식하고 묘사하는 기본적인 양식의 하나이다. 일반 관객에게 표현주의 연극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다소 막연하게 사실주의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표현주의 연극에서는 의자 위에 서서 세계에 관해 외칠 것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20세기에 나타난 여러 연극 양식에 관해서 아직 어느 누구도 융통성 있는 이론을 밝히진 못했지만 한가지 모든 표현주의 희곡에 공통된 요점은 그것은 매우 엄격한 반사실주의 연극이라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몹시 거치른 신낭만주의로 시작되어 변증법적 사실주의로 발전되었다.

표현주의는 회화에 최초로 적용되었다. 이용어는 불란서의 화가 줄리앙 오귀스트 에르베가 1901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생각했으나 존 윌레트는 그보다 반세기 전에 이 용어가 이미 사용되었음을 밝혀 냈다. 표현주의 화가들은 그가 본 것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자신의 내부의 생각이나 관점을 전달하고자 했다. 표현주의자는 모든 사실주의 양식을 명백한 모방으로 간주하고 이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즉 이들은 객관적인 현실에 흥미를 갖지 못 했고 표면적인 세부묘사에 반발했다. 초기의 표현주의 화가들은 단순히 이 세계에 관한 반항적이고 격렬한, 때로는 괴상한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을 담았다. 연극에서도 이러한 주관성은 관객에게 비판적인 자극을 줄 수 있지만 주관성이 지나칠 때에는 관객에게 완전히 거부당하기도 한다.
표현주의 연극에서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단편적 요소와 함께 환상과 상징이 결합된다. 한 극작가의 주관은 그의 정서적 경험에 필연적으로 영향 받게 되며, 정서적 경험은 또 그 세계관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경험과 사상 그리고 성격에 있어서의 왜곡현상이 일어난다. 등장인물들은 등 퇴장이나 시간, 공간의 연속성을 잃어버리는, 꿈이나 정신착란에 비유되는 정신상태를 대변한다. 그때, 극작가는 "주관을 객관화시킨다." 즉, 그는 자신이 머리 속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표현주의 연극에서는 환상과 현실이 교묘히 교차하기 때문에, 등장인물은 때때로 로보트나 꿈속의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현실적 인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로보트 같은 인물의 등장은 기계화된 사회의 반영이다.) 등장인물들은 흔히 의무나 도덕, 혹은 가족 관계 따위의 인습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어머니","노동자" 등등의 일반적 명칭이 붙여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므로써 극작가는 개인을 초월시켜 전인류를 대변하도록 하고, 인간적 가치를 강조하거나 개인을 궤뚫어 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원시성과 단순성을 표방하였다.

표현주의 연극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그것은 일종의 저항극으로서 1차대전 이전의 가족제도와 관료제도의 권위, 완고한 사회질서, 종국적으로 산업사회와 삶의 기계화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다. 표현주의 희곡은 니체의 영향을 받아 개인을 찬양하고 항의적인 인간성을 이상화했다. 또한 20세기 초반에 성립된 프로이드와 융의 심리학의 도래는 극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감추어진 비밀스런 심적 상황을 드러내도록 자극했다. 그리고 그 후에 닥친 1차 대전으로 참호 속에 팽개쳐진 병가들의 시체는 표현주의 극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작품 내용을 약화시키도록 했으며 인간과 사회에 관해 좀더 섬세한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표현주의 극작가들은 정치적인 급진성과 마르크스주의자의 열정을 받아들였다.

* 1차 대전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 사실주의 연극운동으로 시청각적 연극수단인 장치, 조명의 강조를 통해 배우연기를 대체했고 변증법적 요소를 도입한 에피소드식 구성의 사용과 함께 일정한 계층을 대표하는 유형적 인물이 등장했으며 전보문체의 대사, 스타카토, 비명, 울부짖은 그리고 기계적이고 왜곡과장된 동작을 통해 인간의 내적 진실을 극대화 시켜 표현하고자 했던 연극운동으로 후에 극장주의 연극운동이나 서사극에 영향을 끼쳤다.

2) 표현주의 희곡의 특징적인 성격과 테크닉

(1) "극의 분위기"는 꿈과 같고, 악몽과 같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비사실적 조명과 무대장치의 시각적인 변형에 의해 강조된다. 대사와 대조를 이루는 침묵의 유지는 비정상적일 만큼 긴 시간 동안 유지되면서 꿈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2) "무대장치"는 자연주의 연극의 세부 묘사를 피하고 극의 주제가 요구하는 철저히 단순화된 이미지를 창조한다. 괴상한 형태와 선정적인 색을 이용하는 장식이 자주 등장한다.

(3) 극의 "플롯 혹은 구조"는 각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에피소드, 사건, 극적 장면으로 분리되어 있다. "잘 만들어진 극"이 갖고 있는 극적 갈등 대신에 항시 작가 자신의 대변자인 몽상가에 의한 긴 극적인 대사가 강조된다. 이러한 구성으로부터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큰 영향을 받았으나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도록 고안된 표현주의 연극과는 달리 서사극은 관객에게 지적 자극을 주기 위해 이러한 구성을 취한다.

(4) "등장인물"은 그들의 개성을 상실한 단지 이름없는 "아버지","남자","아들","노동자","기술자" 등으로 지칭된다. 이러한 등장인물은 개인적인 개성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유형화된 인물이며 충자화된 인물들이다. 그리고 특수한 개인이기 보다는 사회의 집단을 대표한다.
이러한 개성의 상실은 무대 위의 등장인물을 그로처스크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며, 연극의 일차적인 상징으로서 가면을 무대 위에 다시 등장하게 한다.

(5) "대사"는 대화와는 달리 시적이며 열정적이며 또한 광상적이다. 대사는 때때로 긴 서정적 독백형태를 취하다가도 한두단어, 혹은 감탄사로 이루어진 단음적인 전보문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대사로 배우의 동작이나 제스쳐를 지시하는 피란델로의 소위 "구변행위"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그대신 표현주의극의 대사들은 직접적인 공감을 일으키게 한다.

(6) "연기 양식"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주의 연기양식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즉, 인간 행위의 세부적인 묘사를 피함으로써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보이며 마치 인형의 연기 같은 과감하고도 기계적인 움직임을 취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고골리의 <검찰관> 같은 작품에 적합했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도 후에 나타나는 장엄한 극을 위해 수정되었다.


2. 표현주의의 선구자들

1) 게오르그 뷔흐너 GEORGE BUCHNER (1813-1837)

그는 현대 연극의 움직임이 태동하기 오래 전, 그의 작품이 공연되는 것을 보지 못 한 채 23세의 젊은 나이에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짧은 극작기간을 통해 현대 표현주의의 많은 테크닉들이 그의 극에서 시도되었기 때문에 그를 초최로 현대적인 극작가로 보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의 첫작품 <당통의 죽음>은 1902년에 가서야 비로소 공연이 되었고 또한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인 <보이체크> 역시 베테킨트의 극처럼 20세기초 독일연극의 거장 막스 라인하르트의 관심을 끌게 된 1913년에 비로소 공연되었다. 그러나 뷔흐너의 창의력과 실험정신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백년이나 걸렸는가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의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은 그의 극이 20세기에도 놀라운 것이었듯이 19세기에는 전혀 이해 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뷔흐너는 극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와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숙명론적 인식과 "인간 개개인은 파도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신의 관점을 구체화시킬 표현 방식을 추구해 갔다. 그는 적극적인 개혁주의자였으며 청년 독일운동의 회원이었고 1833년에는 헤세 농민신문에 초기 공산주의 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더욱이 당국의 잔인한 탄압은 그에게 환멸을 주었다. 따라서 그는 첫 희곡 작품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손에 죽음으로써 결국 자신이 일으킨 혁명의 희생자가 된 프랑스혁명의 지도자 조르즈 당통의 슬픈 이야기를 소재로 택했다. 뷔흐너와 같은 혐오감에 젖어 있는 당통은 자신이 지금까지의 피를 흘려 투쟁해 왔던 혁명이 혁명이전보다 사람들을 조금도 개혁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며 죽어 갔다. 뷔흐너는 1835년 <당통의 죽음>을 5주만에 썼다. 이 작품은 그해 출판업자가 붙인 <공포시대의 연극적 영상들> 이라는 제목으로 조심스럽게 수정되어 발간되었다. <당통의 죽음> 원본은 1850년에 비로소 출간되었다

그는 그의 극에 지금 우리가 말하는 "변증법적인 형식"을 구사했으며 또한 그의 에피소드식적인 성격의 극 구조는 후에 등장할 영화기법을 예언했고 세익스피어 극에서 볼 수 있는 장면과 분위기의 신속한 전환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놀라운 작품은 미완성된 <보이체크>이다. 이 독특한 작품은 1836년에 쓰여졌으나 1879년에 발견되어 출판업자가 바랜 대본을 화학 약품으로 처리해 대본을 재생시킨 후 판독하여 출간했다. 이 글은 순서가 정해지지 않고 구분도 되지 않은 27개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극의 자유로운 배열이 가능하며 작품이 발견된 이후 편집자와 연출가들은 마치 카드를 섞듯이 장면을 배열해 출판하고 공연도 해왔다. 이 극의 표현주의적인 에피소드들은 <당통의 죽음>에 나오는 이야기들보다 훨씬 비논리성이 강하기 때문에 작가가 생각했던 원래의 순서는 앞으로도 밝혀질 것 같지 않다.

그의 극이 갖고 있는 소위 "열린" 구성방식은 극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또한 현대 극작형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병렬법, 즉 서로의 명백한 연결없이 장면을 연결하는 방법은 세익스피어에 의해 이미 사용된 방식으로 에이젠슈타인 이후 영화의 주요한 구성방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병렬법에 의해 뷔흐너는 극의 중심 인물을 여러 인물과 사건의 몽타즈속에 배치시킴으로써 등장인물의 역사적 배경과 인식의 단편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보이체크>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이 만족할 만한 장면의 순서를 결정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다. 특히 이 극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 관계에 의한 장면 배열이 완전히 일련의 극적인 사건들로 대치되고 있으며, 각 장면들은 그 자체가 어떤 심리적 혹은 상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한 장면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주제나 동기 및 그에 관한 견해까지도 담을 수 있었다. 극의 다른 부분과는 별 관련이 없는 듯한 끝부분의 한 장면에서는 노파가 등장해 한 불쌍한 고아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데. 그 고아는 달이 한 조각의 나무로 변하고 해는 말라비틀어진 꽃송이로, 별들은 죽은 파리들로, 그리고 지구는 뒤집혀진 변기로 변하는 것을 본다. 이 장면은 보이체크의 환멸과 외로움을 확대시키기 위한 직접적인 상징이다. 이처럼 단편적 장면의 빠른 전환은 표현주의 여늑의 공연에서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극작가와 연출가의 새로운 평가와 함께 뷔흐너의 작품은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1920년대 연극계의 특수한 현상이 되었다. 에른스트 돌러는 뷔흐너극의 주제의 초시간성과 이를 다루는 방식에 매료되었는데 이로 인해 정치적인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하느냐 하는 오래된 숙제가 풀리는 듯했다. 브레히트 역시 뷔흐너의 극에 큰 영향을 받았고 서사극의 모델을 뷔흐너의 극에서 찾았다. 즉 당통과 보이체크로 인해 서사극에 필요한 서술적 요소들이 꼭 잘 구성된 플롯에만 맞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먼저 한 사람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그 다음에 변증법적으로 다른 사람의관점에서 서술될 수도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이밖에도 뷔흐너가 브레히트에게 준 영향은 무대 위에서 민욜르 사용한 점인데, 이는 브레히트의 극에서 코러스에 의한 직접적인 논평 구실을 할 뿐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사실적인 분위기에 몰립하는 것을 막고 거리감을 취하게 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또한 뷔흐너의 극에서 이름없는 인물들이 등장에 극에 사회적인 배경을 형성하곤 했는 데 이와 마찬가지로 브레히트도 등장인물에게 사투리를 쓰게 해 관객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익스피어와 엘리자베스조 연극시대의 무대기법에 기울인 뷔흐너의 관심은 브레히트로 하여금 세익스피어극의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이것은 백 명의 표현주의자들의 실험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2) 프랑크 베데킨트 FRANK WEDEKIND (1864-1918) <루루극:지령, 판도라의 상자>

뷔흐너의 또 다른 열광적인 추종자는 베데킨트였다. 독일의 젊은 표현주의자들의 업적은 악명 높은 베데킨트의 초기작품들과 비교한다면 그다지 혁명적인 것이 못 된다. 베데킨트는 홀로 모든 금기를 타파해 나갔고 표현주의의 폭발적인 무대 효과를 20여년 앞서 예언했다. 또한 일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은 부르조아 사회의 허위 의식을 과감하게 공격했고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주제를 무대 위에 도입했다. 그의 주된 주제는 "성"문제였고, 후에 브레히트, 주내의 극에서도 나타나듯 범죄자를 극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고 매춘부를 미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베데킨트의 극이 특히 당시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베데킨트의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의 삶에서보다 확대된 인물들이고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기 보다는 풍자화된 만화적인 인물들이다. 또한 이들은 마치 소극에 등장하는 광대들처럼 행동하는 데 이것은 항시 등장인물의 행위를 냉혹한 유머로 충자하기 위한 것이다.
스트린트베리와 마찬가지로 베데킨트 역시 자연주의의 경계를 맴돌았으며 사실주의에 기인한 요소를 첨가하기도 했고 또한 명백한 이유 없이 극을 악몽적인 분위기로 이끌어 가기도 했다. 배우인 프리드리히 카이슬러는 베데킨트에게 "당신은 개연성이라는 자연주의적인 괴물의 목을 비틀고, 연극의 요소를 다시 극장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군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데킨트의 격렬한 냉소주의는 그 후에 등장하는 젊은 표현주의자들의 격정적인 톤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그 후 <루루극>에서 보여지는 특이한 기법은 그 자체로 심각한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 기법에도 불구하고 이 극의 주제, 인간의 성욕은 매번 비극적인 덫에 걸리고 있는 데 여기서 도피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풍자적인 작가로서 베데킨트는 자신의 소재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베데킨트는 부인의 틸리 노이에스와 함께 배우극단을 조직해 자신의 극을 공연하면서 독일을 순회했다. 브레히트에 의하면 그는 많은 억압된 에너지를 지닌 힘있는 배우였다. 20세기초 비사실적인 공연 양식을 갈구하던 신예 연출가들에게 베데킨트의 극은 큰 도전을 안겨주었다.

2) 어거스트 스트린트베리 AUGUST STRINDBERG <다마스커스로> <꿈의 연극> <유령소나타>

거실연극의 대표적인 극작가로서 그는 1차 대전 직전 독일 부대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었던 현대 극작가였다. 푸르네스는 1913년에서 1915년까지 24편의 그의 작품이 1035회의 공연을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제임스 애거트는 스트린트베리가 "이 세계를 피난처로 보고 이 피난처에 자신의 등장인물을 설정하고 있다." 고 말한다. 이것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파악한 표현일 것이다. 젊은 독일 극작가들은 그의 극이 그들이 나아갸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그의 불만이 자신의 취향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련의 극작가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추종했고 이로 인해 스트린트 베리는 오늘날 표현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꿈의 연극을 무대화하는 데 있어 효과적 방법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스타일면에서 그의 영향력이 폭넓게 미친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스트린트베리는 죽음을 앞둔 몇 년 동안 표면적인 현실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했고 표현주의 극으로 이끌려 갔다. 따라서 그의 극은 관객의 개념적인 사고에 호소하기 보다는 음악적인 형식과 서정적이며 마술적인 언어, 마임과 다른 시각적인 암시성, 그리고 침묵과 사이, 시간과 공간의 비틀림을 통해 마치 악몽같은 관객의 내부 경험, 무의식의 감정에 호소하고자 했다. 독일의 젊은 표현주의극작가들이 스트린트베리의 후기의 극들을 그들의 기법상의 교과서로 삼은 사실은 불행한 일일지도 모르나 자신의 머리속에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큰 자극을 주었다. 숀 오케시는 스트린트베리를 "가장 위대한 현대 극작가"로 생각했으며 "입센은 조용히 그의 <인형의 집>에서 쉴 수 있지만 스트린트베리는 천국과 지옥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두 현대 연극의 대가를 비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