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의 생애 및 작품세계
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 1885 ~ 1957의 프로필
1885년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에서 출생.
1902년~1906년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률학을 공부.
1907년~1909년 아테네 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중 희곡〈동이 트면〉과〈뱀과 백합〉의 발표로 그리스 문학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 파리로 유학, 프랑스 대학과 소르본느 대학에서 앙리 베르그송 밑에서 철학을 공부.
1910년~1936년 니체의《비극의 탄생》《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케르만의《괴테와의 대화》, 다윈의《종의 기원》, 베르그송의《웃음》, 단테의《곡》, 괴테의《파우스트》등의 작품을 그리스어語로 번역.
1938년 《오디세이아 Odysseia》를 발표.
1942년 《그리스인人 조르바 Zorba the Greek》를 발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됨.
1945년~1948년 그리스 내무부 장관에 취임. 유네스코(UNESCO)에서 고전 번역부장 역임.
1948년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The Greek Passion》를 발표. 이후 스웨덴어, 독어, 영어 등으로 번역됨.
1950년 《자유냐 죽음이냐 Freedom or Death》발표. 그리스 정교회의 규탄을 받음.
1951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발표. 노벨상 후보로 오름. 이 작품은 2년 뒤 독일어로 번역된 후 그리스 교회의 금서목록에 오름.
1953년 《성 프란치스코 Saint Francisco》를 발표, 시바이쩌에게 바침.
1956년 《영혼의 자서전 Report to Greek》발표.
1957년 마지막 작품《동족상잔》을 발표. 다양한 방면의 문학활동에 막을 내림.
1968년 편지를 중심으로 한 자서전《인간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가 아내에 의해 출간.
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 1885 ~ 1957의 생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른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호메로스에서 취재하여 근대인의 고뇌를 그린 장편 철학시 《오디세이아 Odssa》(1938)가 대표작이다. 그밖에 그리스 난민의 고통을 묘사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 O Khrists Xanastavrnetai》(1955) 등 만년의 소설에 의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人으로 호메로스와 조르바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역사상 인물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다.
1885년 크레타 섬 이라클레이온에서 태어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터키의 지배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내며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그는 자유와 자기 해방을 얻기 위한 3단계 투쟁을 계획하였다. 1단계 투쟁은 압제자 터키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는 크레타가 해방을 맞는 순간 2단계 투쟁으로 발전했다. 인간 내부의 무지, 악의, 공포 같은 모든 형이상학적 추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3단계에서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들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다. 이처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거쳐 부처, 조르바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의 민족시인 호메로스에 뿌리를 둔 그는 1902년 아테네의 법과 대학에 진학한 후 그리스 본토 순례를 떠났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업적은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는다.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人 조르바>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파문 당하기도 했다. 그는 1951년, 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등 세계적으로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다른 작품들로 <오디세이아>,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 <성聖 프란치스코>, <영혼의 자서전>, <동족 상잔> 등이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힌두 교도가 "사부"라고 부르고, 수도승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책과 여행으로부터 찾았다.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보듯이 꿈과 투쟁을 추구하며 평생 방랑을 했다. 그는 파리에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밑에서 배웠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예술에 탐닉하며 보낸 그의 삶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종교적인 삶의 의미를 찾는 방황이 훨씬 강렬했다. "육체가 없는 추상적인 기억에 의해 마음이 살찐 적이 없"는 그는 1902년 아테네 법과대학에 들어가면서 그리스 본토 순례를 떠난다. 이후 스페인, 영국, 러시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 여러 나라를 편력하는 여행은 그에게 있어 절대적인 자유와 지식을 찾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크레타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세상에 기쁨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우며 지중해를 헤쳐 나가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그리스인人 조르바'라는 소설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곳만큼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해 지는 곳도 없으리라.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끝없이 헤매던 바다가 바로 지중 해였다. 지금도 그때처럼 새파란 지중해에는 수많은 신화를 간직한 수백 개의 섬들이 조용히 떠 있다.
중세 기사단의 유적이 남아 있는 로도스 섬, 게이들이 주로 모인다는 아름다운 미코노스 섬,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의 일부였다는 산토리니 섬,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파트모스 섬(성경에는 밧모 섬)등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섬들이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 크레타 섬만큼 매력적인 곳은 드물 것이다. 아테네에서 이집트 쪽을 향해 배를 타고 가다 보면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맥이 범상치 않게 보이는 섬이 있다. 바로 이 섬이 지중해 최대의 섬이며 가장 많은 유적과 가장 흥미로운 신화를 간직한 크레타 섬이다. 이 섬에서는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전부터 고대문명이 크게 꽃 피었었다. 이 문명을 크레타 문명, 또는 전설적인 왕의 이름인 미노스와 연관시켜 미노스 문명이라고도 한다.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에서 '위대한 도시 크노소스, 미노스 왕이 9년 동안 통치하였노라'라고 읊었다.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 하나의 전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일찍이 오리엔트 지방 및 이집트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인 후, 기원전 18세기부터 약 3백년간 화려하게 꽃피었다. 기원전 15세기 경에 남하한 그리스 본토의 도리스인人에게 멸망되어 사라졌던 이 문명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20세기 초, 탐험가 에반스에 의해서였다.
크레타에 현재의 수도인 이라클리온, 예전의 수도로서 베네치아 풍들의 건물이 들어선 매력적인 하니아, 터키풍의 분위기 가 감도는 레팀논,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협곡 중의 하나인 사마리아 협곡 등 가볼 곳이 많다. 역시 관광객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이라클리온이다. 그 근처에 크노소스 궁전이 있기 때문이다. 크레타문명의 대표적인 이 궁전은 완만한 언덕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뜰이 있고 그 뜰을 둘러싸고 있다. 제의祭儀나 공무를 위한 방들과 왕족의 개인적인 용도의 방과 아틀리에와 창고 등이 배치되어 있다. 채광과 배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 좁은 통로는 몇 번이 나 직각으로 돌아야만 입구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궁(迷宮)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신화가 있다.
크레타는 그 당시 그리스를 능가하는 강국이었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제우스의 아들로서 형제들과 왕위 다툼을 벌였을 때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제물로 바칠 소를 달라고 기도한다. 포세이돈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흰 수소를 그에게 보냈다. 신의 지지를 증명한 미노스는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미노스 왕이 그 수소가 너무 아름다워 제물로 바치지 않고 숨긴다. 포세이돈은 저주를 내려 미노스 왕의 아내 파이드라가 수소와 사랑에 빠지게 한다. 결국 왕비는 소의 머리한 인간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낳는다. 왕은 이 괴물을 크노소스궁宮에 가두게 된다. 이 궁宮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이었다. 미노스 왕은 아테네를 정복한 후 이 괴물에게 먹이로 바칠 희생자들로서 9년마다 7명의 소년, 소녀를 보내도록 아테네에 요구한다. 그리스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이를 참지 못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희생자 속에 숨어 들어가 괴물을 처치한 후 밖으로 탈출한다. 그가 미궁임에도 불구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하게 된 미노스 왕의 딸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을 입구에 묶어 놓은 후, 실패를 풀어가며 안에 들어갔다. 그대로 나온 것이다.
지금 크노소스궁宮은 다 폐허가 되어 결코 미궁은 아니다. 그 당시 화려함을 전해주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입구의 백합관을 쓴 날씬한 왕자의 모습과 여인들의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의 몸매와 복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여왕의 방에 파란 색깔의 돌고래들이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도 있다. 그 당시에 활기찬 해양 문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도 있다. 그 옆에 욕실과 수세식 변기가 있다. 그 당시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던가를 알 수 있다. 유적은 지금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라클리온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뿔 모양의 술잔, 인물, 초목, 물고기, 조개, 문어 등의 그림들이 그려진 아름다운 도자기들과 가슴을 드러낸 채 뱀을 들고 있는 상아로 만든 '뱀의 여신상'등이 인상적이다. 뱀은 재생, 젖가슴은 풍요를 뜻하기에 이 여신은 농업의 여신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크레타문명의 특색은 일상적이며 작고 친밀한 예술품들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나 그리스처럼 거대한 조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는 훗날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그리스 문화의 초석이 되었다
이런 고고학적 유물만 크레타의 매력은 아니다. 여느 지중해의 섬처럼 아름다운 해변에서 따스한 햇살을 즐기는 매력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동쪽으로부터 디크티산山, 이다산山, 레프카산山 등이 솟아 있기에, 여러 개의 만灣으로 형성되어 있는 북쪽 해안을 빼놓으면 해안의 대부분이 깎아지른 듯한 험한 산으로 되어 있어 해변이 없을 것 같다. 그 험한 산을 넘어가면 가끔 숨겨진 듯한 비밀스런 해안이 나타난다. 그곳의 백사장과 바위틈에서 종종 사람들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진 채 가장 원시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작열하는 햇살을 즐기기도 한다.
1월 평균 기온 12.2도, 8월 평균 기온이 26.3도로 연평균 기온이 19도인 크레타 섬에서 올리브, 포도, 건포도, 감귤류, 바나나, 아몬드 등의 풍부한 과일을 즐길 수 있다. 거리에서 꼬치 구이인 '수블라키'와 고기와 야채를 얇은 밀가루 빵에 말아먹는 서민적인 음식 '수블라키 삐따'를 즐길 수 있다. 전통 음식점인 타베르나에서 올리브유가 섞인 그리스 전통 음식을 먹으며 크레타 섬의 특산품인 레치나 와인을 곁들이는 낭만은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크레타 섬 어딜 가나 흘러나오는 음악이 있다. 바로 영화 '그리스인人 조르바'에 나오는 음악들이다. 그 영화의 무대가 바로 크레타였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 바로 크레타였다. 그의 유품과 서재가 이라클리온 역사 박물관에 재현되어 있다. 바닷가 근처의 뒷골목에 숨어 있다. 주의해 보지 않으면 지나치게 되는 조그만 박물관 안에 터키의 지배 하에서 일어났던 독립 전쟁에 관한 사진들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방이 따로 있다. 3, 4 평되는 조그만 방에 그의 두상과 육필 원고들이 있다. 책장에 세계 각 국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안쪽의 서재에 그가 생전에 쓰던 책상, 침대, 책장들이 있다. 안락 의자에 방금 외출에서 돌아와 놓은 것 같다. 낡은 고동색 가방이 놓여 있어 지금도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것들은 여행과 꿈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생 여행하고 글을 쓰며 광범위한 지적 편력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정작 그의 몇 평 안 되는 서재는 소박하다. 크레타인人이라는 것에 대해 평생 자부심을 가졌다. 이 위대한 작가는 물론 죽어서도 크레타에 남았다. 그의 묘는 이라클리온 남서쪽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 이라클리온 시가지와 푸른 지중해를 내려다보이는 성곽으로 둘러 쌓인 언덕 위에 있다. 정원처럼 가꾸어진 주위에는 벤치가 빙 둘러져 있고 그의 묘 앞에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그의 묘는 작품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그의 굵직하고 자유 분방했던 정신처럼 그의 묘비는 매끈한 대리석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자연 암석이다. 그의 묘비명에 그리스어語로 이런 말이 쓰여져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현실 속에 튼튼히 뿌리내리며, 또한 하늘을 향해 늘 진지한 자세로 몸부림쳤다. 위대한 작가는 죽어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 의 작품세계
* 그리스인 조르바 Vos kai polita tou Alxi Zormp 1947
조르바는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자유분방하고 호탕하며 농탕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절대 자유의 초인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인(知人)들이 지향해 온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이 책에서 조르바가 펼쳐 보이는 기괴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자유를 향한 영혼의 투쟁한다. 이것은 각박한 현실에 억압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오랜만에 해방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스인人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메토이소노', 곧 '거룩하게 되기'의 개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고 포도주가 되는 것이 물리적, 화학적인 변화라면,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은 바로 '메토이소노'인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바로 이 책에서 조르바의 거침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투쟁을 통해 '삶의 메토이소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항구도시 피라에우스를 무대로 야생마 같은 조르바의 삶을 그린 장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조르바는 실재하는 인물이다. 그는 물레를 돌리는 데 거추장스럽다고 손가락을 잘라버리는가 한다. 여성의 치모를 모아 베개를 만들어 베고 자며 수도승을 꼬여 타락한 수도원에 불을 지르는 등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자유분방하고 호탕하게 산 인물이다. 이런 사람은 죽었거나 살았거나 우리의 삶에서 찾아보기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우리의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아마 호메로스와 부처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를 들 것이다.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삶의 길잡이를 선택하는 문제라면 카니코스 잔차키스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조르바는 글 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때려 부셨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관찰력과 모든 것을 처음 보았듯이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이라는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한다.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으로 초라한 삶을 안전하게 살아한다. 그것을 위해 겁쟁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 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행 따위의 모든 울타리이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 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 잘라 버렸어요.'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을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그는 육체의 즐거움을 정신의 즐거움으로 도약시킬 줄 아는 놀라운 마법을 지녔다. 이성과 교육으로부터 어떤 수혜도 받지 않은 이 늙은 노동자는 일상적인 남자, 여자, 꽃 핀 나무, 냉수 한 컵, 빵 한 조각도 처음 보는 경이로운 수수께끼처럼 열정적으로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다.
조르바를 거치면 일상의 모든 것이 신성한 야만으로 돌아간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산투리(그리스의 현악기)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리는 짐승이요. 짐승에게 자유가 있어야 해요. 춤도 출 수 있소. 그러나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오.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냐고. 단호하게 조르바는 말한다. 뜨겁고 치열하게 생에 밀착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자유. 생의 가장 밑자리까지 질주함으로써 생을 정복하는 조르바의 자유를 사랑한다. 춤추고 싸우고 일하고 산투리를 연주한다. 곡괭이와 산투리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손을 가진 조르바는 `야성의 영혼을 가졌으며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소설 속의 화자(話者)인 두목은 숙명적으로 문자세계에 속하는 인간이다. 현실세계에 갇혀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감히 떠나지도 못한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고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이다.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은 '춤추며 싸우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근육질과 뜨거운 피가 가득 찬 심연을 얻었다. 그 육체성의 뻘 속에서 빛나는 마법의 시간이 무르익는다. 자기 내부에 존재하면서 자기를 초월해 있는 것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싸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돌의 정원>에서 이렇게 쓴다. '그리고 우리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혼례의 행렬에 들어있는 우리는, 신비스러운 침실을 향해 전율하며 돌진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 하나가 혼례의 성스러운 상징을 가지고 간다.' 영원한 청년이며 혼례의 신랑인 조르바가 못 박히고 일그러진 손으로 꽃 한 송이를 만지듯 섬세하게 산투리의 줄을 고르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듣는다. 날마다 죽으라. 날마다 태어나라. 중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고 자유를 위한 싸움이다.
* 영혼의 자서전自敍傳
단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이룩한 커다란 이야기가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영혼의 궤적을 기록하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숨찬 투쟁과 위대성을 웅변한다. 크레타에서 태어나 희랍 조상들의 찬란한 문화를 섭렵하여 자기 나름대로 정신적인 영토를 이루어 나간 작가가,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이 처절한 유서에서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다. 신과의 투쟁으로 점철된 인생을 토해 놓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 잿더미에 한줌의 아쉬움도 없다.
너무나 강렬하고 힘차게 한 세상을 살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팔 벌려 맞으려는 한 작가의 고해이다. 우리들은 삶과 투쟁과 죽음을 배운다. 그것은 가슴 벅찬 교훈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위대성을 뒷받침하는 힘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배운다. 영혼에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은 호메로스와 부처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이다. 그리고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조르바는 불사(不死)를 향한 생명의 흐름과 파괴의 죽음을 향한다. 또한 힘의 흐름을 한 몸 속에 넣고 너무도 유쾌하게 생을 가로지른다. 조르바는 긍지에 찬 모습으로 백정의 춤과 전사의 춤을 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은 `춤추며 싸우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근육질과 뜨거운 피가 가득 찬 심연을 얻는다. 그 육체성의 뻘 속에서 빛나는 마법의 시간이 무르익는다.
*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중국과 일본 여행기다. 1935년 만주사변이 시작한지 4년이 지나서 중국과 일본을 떠돌아다녔다. 이미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대륙을 유린했었다. 중일전쟁의 암운이 드리우기 2년 전이었다. 중국에 대해 뭘 이해하려고 하느냐는 한 중국 노인의 물음에 대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를 만지는 촉수가 다섯 개 달린 덧없는 동물이오 나는 그런 영혼이오. 내게 중국은 나의 오감이 풀을 뜯을 수 있는 새로운 목초지木草地와 같소." 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있어 중국은 기형적으로 작은 발의 여자들, 알몸이거나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 묵묵히 일하는 검게 그을린 남자들, 그리고 종종 구역질나게 하는 냄새와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가득한 나라이다.
중국은 영원하다. 봄은 에메랄드빛을 띤 초록색으로 빛나고, 여름은 은회색으로 바뀌는 끝없이 비옥한 평원이다. 어머니처럼 젖이 넘치는 연민에 찬 대지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개미 떼와 파란 면작업복을 입은 대지의 아이들이 대지의 젖을 빨기 위해 몸을 숙인다. 쌀과 면화와 사탕수수와 뽕나무와 차〔茶)와 거대한 강이 대지를 적시며 무겁게 움직인다. 중국의 모든 것이 현란한 장식이라고는 없이 단순하고 조용하게 천천히 움직인다. 이곳에서 사나운 감정의 폭발도 없다. 파괴와 창조라는 충동적인 격정이 지배하는 열대 지방의 초조하며 불안정한 성급함도 느낄 수 없다. 이곳 중국의 리듬은 인내심이 있고 깊다. 중국의 모든 것이 서두르지 않으며, 불멸인 듯 행동한다. 빠르고 초조한 움직임이 얼마나 덧없다. 그것이 대지의 진지함과 영원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베이징, 상하이, 홍콩, 난징, 항저우 등 중국 주요 도시를 여행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중국만큼 시詩가 발달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문화를 지닌 나라도 없"다. 일본의 전통 연극 노(能)와 그와는 또 다른 성격의 가부키, 세밀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정원, 침묵과 사색의 장이 되는 다도(茶道), 관능적이고 우아한 게이샤 등에 대해 경탄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중국의 한 사원에서 아름다운 부처상을 보고 자유와 열반에 대한 가르침을 스스로 깨닫는다. 이는 동양과 불교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어떠한가를 확인시켜준다. 또한 이 여행이 그에게 있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가 만난 중국인들은 끝없이 흐르는 황허(黃河)처럼 묵묵히 생활한다. 광활한 대지를 경작하지만 어는 한 순간 분노와 광기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인간과 예술,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상이 숨쉬는 곳, 그곳이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만난 두 천상의 제국 중 하나인 중국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소설에서 형태가 없는 추상은 배제한 채 철저하게 자신이 직접 만지고 보고 듣고 냄새 맡은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종종 '구역질나게 하는' 냄새와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을 자세히 묘사한다. 중국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기형적으로 작은 발의 여자들, 알몸이거나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 묵묵히 일하는 검게 그을린 남자들, 적응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로 가득한 땅이다. 이렇게 그는 이곳 중국에서 낯선 소음과 악취를 못 견뎌하며 자신의 메마른 영혼을 흠뻑 적신다. 이제 버려져 황폐해진 쯔진청(자금성)에서 사라진 황제의 절대 권력과 그 무상함을 떠올린다. 갖가지 이상한 재료로 만들어지는 중국의 요리를 맛보면서 중국 특유의 관능과 아름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일본은 '벚꽃'과 '기모노'의 다분히 여성적이고 화려한 인상의 이미지가 먼저 다가온다. 그 뒤에 숨겨진 '대포'를 보면서 '위험이 가득한' 나라이다. 그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같은 중국과 일본의 오랜 역사와 전통의 이면에서 매혹과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장차 세계 무대의 중심이 될 중국과 일본의 저력을 포착한다. 그가 말하는 또 하나의 천상의 제국인 일본은 우아함과 힘으로 충만하다. 가장 단순한 선으로 이어진 발치부터 정상까지 눈에 덮인 순수한 흰색과 하늘 높이 솟은 환상적이고 조용한 산山인 일본의 신성한 후지산山을 통해 일본의 정신과 매력을 본다. 그리고 일본의 힘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원시적인 신비주의에서 가장 발달된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향을 받았다. 한편으로 까뮈 같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기도 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성격은 비관주의와 허무주의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여행을 하면서 일본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일본인의 가장 작은 움직임도 세상을 반사하고 있는 신사의 반짝이는 수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일본인의 그림을 이해한다. 그건 그들이 꽃과 아이들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입술 주위에 떠오른 해독解讀하기 어려운 미소의 의미를 파악한다. 이제 일본 여자들이 왜 굽이치듯 걷는지, 그들의 못생긴 입과 구부러진 무릎에 대해 잊게 만드는 매력이 과연 무엇인지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가장 순수한 나무 상자와 칼과 작은 잔, 인형과 게다 속에 어떤 깊은 주문과 사랑과 이해와 아름다움과 단순함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신사의 물 위로 몸을 숙이며 자신의 얼굴을 일본의 얼굴과 함께 본다. 지금 그들의 춤과 극장과 다도와 정원과 집의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수년 전 그는 한 여자와 함께 우물 위로 몸을 기울인 적이 있다. 서로 닿은 우리의 두 얼굴은 잠시 어둡게 반짝이며 떨고 있는 물 위에서 움직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발휘한다. 신비로운 전통과 정신을 가진 동양의 과거와 현재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관찰하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와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다. 산업화와 제국주의로 무장한 서양의 입장에서 본 당시의 동양은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비참하기까지 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 이면에서 매혹과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발견하고 장차 세계 무대의 중심이 될 중국과 일본의 저력을 포착한다. 또 중국과 일본의 오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감탄과 찬사로 가득하다.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에서 종교, 음악, 미술, 연극, 건축 등에 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탁월한 안목과 생생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세속적인 열망이 넘치는 사원,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뒷골목, 비인간적인 현실의 축소판인 홍등가에 서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내밀하고 진솔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가 찾아 떠난 극동의 두 나라 중국과 일본은 혼란과 매혹, 더러움과 아름다움, 비참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지닌 모순으로 다가오지만 카잔차키스는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표면이 아닌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명민한 작가의 시선으로 눈에 비치는 것들을 포착하고 취한다. 그는 중국에서 가난과 비참함을, 일본에서 군국주의로 치닫는 위험한 모습과 절과 정원에서 보이는 극치의 우아함과 섬세함의 양면을 열정과 이해력으로 보고 기술(記述)했다. 이미 상당한 시각적인 격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수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오랜 역사를 가진 극동 두 나라의 문명, 특히 미술과 음악, 건축과 문학 등에 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해와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다.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한 여행자여,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사막인가, 시장인가. 여행을 삶으로 사는 그에게는 몇 권의 여행에 관한 경전(經典)이 있다. 경전은 언제나 자신의 손 가까이 서가의 심장에 꽂혀 있다. 방금 새로운 경전 하나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 크레타 섬 출신의 그리스인의 동양 편력인 이 경전을 손끝으로 만지는 순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매혹적인 순례기로 행복할 것이라는 예감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맞닥트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백적인 육성 때문이다. '나는 촉감(觸感)의 신이 나의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알게 된 모든 나라들을 촉감으로 느끼게 되었다.'
촉감, 희랍인의 자유로운 본령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돌며 '영혼의 자서전'을 집필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도달한 경지다. 수많은 여행지를 거친 그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기 위해 눈을 감을 때면 마치 연인이 곁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전율하는 천 상의 두 나라,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서 금세 피가 뜨거워진다. 그러나 여행의 또 다른 시작이 아닌가. 완벽한 여행자는 항상 자신이 여행하는 나라를 창조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두 나라를 전혀 다른 촉감으로 재창조한다. 중국은 진흙의 무거움을 나비의 가벼움으로 일순 환치시킬 수 있는 힘과 거대한 영혼성으로 나타난다. 일본은 오직 두 단어, 사쿠라(벚꽃)와 고코로(마음心)만으로 신비와 관능성을 체험하고 자기화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른 여덟 개의 길목 전편에 흐르는 그 특유의 관조와 객관적 균형 감각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들 두 나라의 땅을 밟은 시기는 1930년대 중반이다. 그러니까 산업과 혁명과 전쟁과 삶이 국가를 막론하고 공포와 불안정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다. 유럽인人의 동양 인상기에 그치지 않는다. 상대적 본질을 꿰뚫는 문명서 이며 오늘의 두 나라를 예감케 하는 예언서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에게해海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유럽인人이면서 아시아인人이다. 시인, 철학자, 자연인이면서 문명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이 방랑기에서 유감 없이 발휘한다. 선조 고대 그리스인人들처럼 그는 영혼이란 온 감각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라 믿었다. 천상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오감이 풀을 뜯을 수 있는 새로운 목초지였다.
황혼의 베이징, 버려진 왕국 쯔진청(紫金城), 저주받은 도시 상하이, 일본의 심장 나라, 기계와 숫자에 찌든 오사카, 신기루와 같은 교토, 그리고 무수히 많은 대륙의 거지들과 항구의 여자들과 슬픈 게이샤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촉감에 의지하지 않고서 어찌 벚꽃처럼 날리는 이들을 영혼에 새길 것인가.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된다. 여행은 문학이며 또한 작가의 혼을 찾아 나서는 영원한 환각이다. 여행은 자신의 삶이 남의 삶과 만나는 감촉이며 더불어 만나는 공명(共鳴)이라고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여행을 미지의 새를 만나러 가는 사냥이라고 했다. 이제는 누구도 아닌 내가 떠날 차례이다. 이제 당신이 떠나는 그 길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잘 알려진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연인의 생명력을 발산한다. 또한 여러 작품 속에서 인류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왕성하게 해왔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호메로스와 니체, 베르그송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상적 편력에 힘입은 바 대단히 크다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끈임 없는 여행, 또한 절대적인 자유와 지식을 찾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 영국, 러시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 여러 나라를 편력했다. 특히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는 그가 1930년대 중반 중국과 일본 등 동양을 여행하고 쓴 책으로 이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발표한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동양적 사상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카잔차키스의 여정과 느낌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와 이집트, 인도를 건너 이제 중국과 일본이 인류 문명의 새로운 르네상스의 장이 될 것"이라는 그의 단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동양을 경험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 돌의 정원庭園
그래 이놈의 인생이라는 게 죽음의 가면 이상의 것이었던가. 가면 밖에 못 쓰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가면의 배후 에 숨겨진 것밖에 못 보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 가면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무서운 얼굴을 보는 자만이 나무 랄 데 없는 제 눈의 주인이다. 그 얼굴 뒤로 가면과 얼굴을 함께 보고, 두 얼굴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자에게 복 이 있을 것이다.
*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예수 그리스도는 외견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마음속으로는 인간의 생활로 되돌아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꿈꾼다.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예수의 두려움과 유다와의 대립으로 시작된다. 예수는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심적인 갈등을 겪는다. 나는 과연 신의 아들인가. 예수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예수는 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매달린다. 그리고 환상 속으로 빠져들면서 보여 주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구세주의 역할에 대해서 회의에 찬 비난을 하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평범한 남자로 살면서 간통까지도 서슴지 않는 부랑배로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이 지닌 인성과 신성 사이에서 과감하게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그렸다.
* 기타 소설
미칼레스 대장1951. 전쟁과 신부. 오디세이아 Odissa 1938.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 O Khrists Xanastavrnetai 1955. 성 프란치스코. 동족 상잔.
* 희곡
황금사과1953. 소돔과 고모라1949. 크로스(테세우스)1950.
# 별첨
* 크레타 / 크레타 크노소스 / 크레타 레티몬 / 크레타 하니아 / 크레타 라시티
*크레타 이라클리온
베네치안 요새 / 베네치안 로지아 / 성 티투스 교회 / 성 미나스 교회 / 모로시니 분수 /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지 / 말리아 비치 / 말리아 고고학유적지 / 마탈라 / 크노소스 / 페이스토스 / 크레타 역사박물관 / 이라클리온 고고학박물관
이라클리온(또는 헤라클리온)은 크레타의 수도이며 가장 크고 가장 중심적인 지역이다. 전체 크레타 인구 280,000 가운데 절반이 이라클리온에 살고 있다. 이라클리온은 헤라클레이온(Herakleion)의 도시라는 데서 이름을 땄다. 인구는 150,000이며, 크레타 대주교구의 역사적인 소재지이다. 크노소스(Knossos), 페이스토스(Phaistos) 등과 함께 미노안 문명(Minoan Civilization)의 중요한 중심지이다.
이라클리온은 824년에 아랍인들이 세웠다. 이때는 거대한 요새화 된 해자垓字로부터 유래된 한닥스(Handax)로 알려졌다. 오늘날에는 베네치안 워(Venetian Walls, 14~17세기경 건립)가 있는 구舊시가지 옆에 현대 시가지가 있다. 고고학박물관, 역사박물관, 민족박물관 등이 있으며, 시청사市廳舍, 베네치아 로지아(Venetian Loggia), 아지오스 미나스 교회(Churches of Agios Minas, 19세기 건립), 아지오스 티토스 교회(Churches of Agios Titos), 아지오스 마르코스 바실리카(Basilica of Agios Markos), 모로시니 분수(Morosini Fountain, 일명一名 사자분수, 1628년 건립) 등을 만날 수 있다.
이라클리온 남쪽에서 6km 떨어진 곳에 미노안 문명의 최고의 중심지인 크노소스가 있다. 이 유적은 BC2000년경에 세워져 19세기에 발굴되었다.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들이 이라클리온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지로 페이스토스, 고르틴(Gortyn), 아그카네스(Archanes), 바티페트로(Vathypetro), 암니소스(Amnissos) 등이 있다.
이라클리온 서쪽에 말리아(Mallia)가 있다. 이곳은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전통 촌으로 매우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비치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미노안 궁전도시가 있다. 이 북쪽에 크리솔라코스(Chrysolakkos)의 큰 묘지가 있다. 미노안 숭배에 헌정된 동굴인 비아노스(Viannos)가 아르카로오리(Arkalohori) 근처에 있으며, 리토스(Lyttos) 고대도시의 유적지가 지다스(Xidas) 마을 근처에 있다. 또한 리토스의 항구인 헤르소니소스(Hersonisos)에는 헬레닉 시대와 로마시대의 유적지가 있다. 또한 3개의 미노안 빌라가 있는 티리소스(Tylissos), 미노안 메가론(megaron, 립셉션 장소)이 있는 니로스(Niros)의 주거지 등이 있다.
이밖에 이라클리온에 풍부한 비잔틴 기념물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있다. 또한 유쾌하고 유명한 비치로는 팀파니(Tympani) 근처의 마타라 비치(Matala Beach)가 있는데, 국제적인 관광센터로 유명하다. 이라클리온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신시가지와 구舊시가지. 신시가지에는 현대적인 상점들과 바쁘고 활기찬 광장들이 있으며, 구舊시가지에는 베네치안 분수, 로지아와 상점 및 좁은 길들이 있다. 현대와 과거의 공존이다. 특히 이라클리온은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다.
* 베네치안 요새 쿨레즈
이라클리온 구舊항구에 있는 베네치안 요새 쿨레즈는 베네치아인人들이 세운 요새이다. '캐슬(Castle)' 또는 '쿨레즈(Koules)'라고도 한다. 이것은 외부의 급습을 막기 위하여 베네치안 포트의 입구에 세워졌다. 양 사이드에 성 마르크(St.Mark)의 사자를 새겨 놓았다. 이 요새 정상에는 야외극장이 있다. '쿨레즈'라는 이름은 터기식式 이름이다. 베네치안인人들은 '로카 알 마레(Rocca al Mare)'라고 불렀다. 이 요새 안의 방들은 식품저장고와 군수품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13세기에 최초로 건립되었으며 1303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오늘날의 건물은 1523~1540년에 세워졌다. 이라클리온 구舊 항구의 명소로 유명하다. 크레타에 도착해서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시내를 둘러보며 처음으로 가 본 곳이 이 항구에 있는 요새이다. 이 요새를 따르는 부두에 배들이 정박해 있어 항구도시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 베네치안 로지아
이라클리온 아우구스투스(Augutus) 25번가番街에 있는 베테치아인들이 세운 로지아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로 1623년에서 1628년까지 건축했다. 프로브레프티스 총독 후란시스코 모로시니(Francesco Morosini)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당시에 베네치안 귀족들의 클럽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시청사市廳舍로 이용되고 있다. 복원된 건물이다. 로지아 바로 뒤에 성聖 티투스(St.Titus) 비잔틴 교회가 있다. 크레타의 보호 성인인 티투스의 유골이 교회 내부에 있다.
* 성 티투스 교회
이라클리온 베네치아 로지아 뒤에 있는 성聖 티투스(St. Titus)를 기념하는 교회. 티투스는 크레타의 보호 성인이다. 교회는 성聖 티투스 광장에 있다. 이 교회는 동양과 서양의 건축학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 처음에는 비잔틴양식으로 962년에 지어졌다. 베네치아인人들과 터기인人들에 의해 여러 번 변형되었으며, 베네치아인人들은 카톨릭 교회로 터키인人들은 모스크로 이용하였다. 1856년의 대지진 때 파괴되었다. 1872년에 구舊 건물의 기초를 토대로 재건축 되었으며 나중에 크레타인人에 의해 그리스 정교회로 변형되었다. 성聖 티투스의 유골이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베네치아 로지아 안으로 들어가면 교회가 나오는데, 그리스 정교회 내부에는 처음 들어가 봤다. 로마 카톨릭교회와 사뭇 분위기 다르다. 그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벽화가 교회 내부에 가득하고 예수의 상들도 모양이 다르다. 검은색 사제복司祭服을 입고 있는 사제들은 옷만 사제복司祭服을 걸쳤을 뿐 일반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는 인상이었다. 휴대폰을 목에다 걸고, 살이 쪄 뚱뚱한 모습이 조금은 게으르고 속세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회 마당에 나뭇잎이 거의 진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깜짝 놀랍게도 그 나무에 까마귀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는 흉조라고 여겨보기가 드문데, 이곳에서는 까마귀가 교회 마당에 가득 있어 묘한 문화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 성 미나스 교회
이라클리온 성聖 캐더린 광장에 있는 성聖 미나스(St.Minas, 1862~1895)의 카톨릭 교회. 그리스의 가장 큰 교회 가운데 하나이며, 크레타에서 가장 큰 교회이다. 4개의 곧게 뻗은 기둥과 함께 십자형으로 된 건물이다. 돔이 인상적이며 2개의 매우 큰 벨트모양의 탑이 있다. 북서쪽에 구 성 미나스(St. Minas) 교회가 있다. 교회 내부에 위대한 크레타 아이콘 화가인 미카일 다마스키노스(Michail Damaskinos)에 의해 제작된 6개의 아이콘이 있다. 그는 16세기에 살았으며, 엘 그레코(El Greco)의 선생 중 하나이다.
* 모로시니 분수
이라클리온 시내의 중심인 엘레후테리오우 베니젤로우 광장(Elefteriou Venizelou Square)에 있는 분수. 일명 사자분수. 1628년에 베네치아 총독 프란시스코 모로시니(Francesco Morosini)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 중앙광장은 베네치안 시대 때부터 도시의 중심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만남의 장소이며 이라클리온의 중심부이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중앙시장이 있으며, 신구의 상점들이 있다. 이곳에는 음식점, 관광품 판매점, 보석점, 의류점 등 번화하게 상점들이 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석
이라클리온 관내 가장 서쪽 끝에 있는 크레타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묘지. 베네치안 워(Venetian Wall) 내 평평한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희랍인 조르바> 등의 저자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이다. 그의 묘지석墓地石에 '나는 아무런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으니 정말 자유로운 것 아닌가?' 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크레타에 처음 도착하여 공항 입구에서부터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알리는 표시판이 있어서 꼭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 말리아 비치
이라클리온의 북동쪽에 있는 말리아(Malia) 해변의 비치. 말리아는 근대적인 도시이다. 풍부한 물과 원예작물로 유명하며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풍차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한 훌륭한 흰 모래사장이 빛나는 근사한 비치로 유명하며 이 비치는 크레타의 가장 아름다운 비치 중 한 곳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겨울철이라 비치가 비어 있었고, 매서운 바다 바람만이 맞아 주었다. 비치 근처의 집들과 상점 및 카페는 그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흰색과 파란색 등으로 칠한 집들, 여러 가지 나무와 색색의 큰 항아리 등으로 집 앞을 장식하여 그리스 섬의 풍광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름에 와 보았다면 붐비는 사람들과 흥겨움이 있어 더욱 근사했으리라.
* 말리아의 고고학유적지
시내에서 3km 떨어진 곳에 고고학 유적지가 있다. 경이로운 미노안 도시(Minoan City)가 이 고고학 유적지에 있다. 그것의 고대적 이름은 아직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의 현재의 이름은 말리아(Mallia)로 '지구의 평면을 신는다'는 뜻의 오말리아(Omalli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미노안 초기시대부터 후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위대하게 번영하였음을 증명해준다. 이곳을 지배하였던 왕조는 사르피도나스 왕조(dynasty of Sarpidonas)이다. 이 왕조는 미노스(Minos)와 라다만티스(Radamanthys)의 형제이다. 한 면에는 아테나(Athena)의 머리를, 또 다른 한 면에는 고래를 새긴 주화를 자체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크리솔라코스(Chrissolakos)라 부르는 곳에서 미노안 묘지가 발굴되었는데, 여기에서 사자(死者)에게 장식한 금장식물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라클리온에 있는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마탈라
마탈라는 크레타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마을이다. 이라클리온에서 66km 떨어져 있으며, 섬의 남쪽 해안에 있다. 한때는 조그마한 어촌이었으나, 오늘날 마탈라는 관광 리조트로 개발되었다. 아름다운 모래사장과 절벽에 난 유명한 동굴로 이라클리온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치이다. 1~2세기경에 동굴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무덤으로 이용되었다. 어떤 동굴들은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 크노소스
크노소스 궁전은 이라클리온에서 남동쪽으로 5km 떨어져 있는 미노안 문명 유적지이다. 카이라토스 강(Kairatos river)을 끼고 케팔라 언덕(hill of Kephala)에 펼쳐져 있다. 주위에는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사이프러스나무 등이 에워싸고 있다. 크노소스는 선사시대에 크레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일리어드>, <오디세이>의 작가 호머(Homer)가 트로이전쟁 때 크레타에는 100여 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크노소스를 최초로 언급하였다. 그는 크노소스를 '광대하고' '위대한 도시'라고 묘사하고, 크노소스의 왕이 미노스(Minos)임을 알려주었다. 아테네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미노스가 강력한 해군을 소유하고 그리스 바다의 보다 큰 지역을 지배한 최초로 알려진 인물이라고 하였다.
19세기 말엽부터 진행된 크레타에서 주요한 발굴은 유럽에서의 최초의 진보된 문명인 위대한 문명의 유적에 빛을 밝혀주었다. 이 문명은 대략 BC 2800~1100년 사이까지 펼쳐져 있었며 전설적인 미노스를 본따 미노안 문명(Minoan Civilization)이라고 명명되었다.
미노안 문명의 중심은 크노소스이다. 크노소스의 발굴은 미노스 왕의 궁전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다. 크노소스에 있는 궁전은 전全 미노안 궁전 센터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광대하다. 그것은 BC 1700년경에 세워진 건축 유형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녔다. 즉 전체 건물 단지 중 실질적인 핵심인 직사각형의 중심 궁정(central court) 주변에 4개의 날개(Wing, 翼)가 정렬되어 있다. 동쪽 날개에는 주거지역과 워크숍, 사당을 포함하고 있다. 서쪽 날개에는 커다란 저장단지가 있는 저장실과 사당, 저장고, 왕좌의 방 그리고 위층의 연회장이 있다.
미노안 크노소스는 대략 1평방km에 걸친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구가 약 80,000 정도이었다. 그러나 크노소스에서의 정착은 궁전이 지어지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신석기 시대(BC7000~3000)부터 로마시대까지 그 위에 계속해서 사람들의 정착이 이루어져왔다. 오늘날 보이는 궁전은 BC1700년경의 재해 이후에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진 사실상 크노소스의 두 번째 궁전으로 이전 궁전보다 보다 정교화 되었다. 또한 궁전의 어떤 지역은 최초의 발굴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의 상상에 의해 복원된 곳도 있다.
* 페이스토스 궁전
이라클리온 페이스토스(혹은 festos)시에 있는 크레타에서 두 번째로 크고 중요한 미노안 문명의 도시이다. 페이스토스 궁전은 크레타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인 메사라(Mesara) 평원의 낮은 언덕 위에 있다. 이 언덕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초기 청동기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미노안 도시와 후기에 그리스 도시가 이 언덕 위와 그 주변에 세워졌다. BC 2000~1700년 사이에 최초의 미노안 궁전이 세워졌고, 이 사이에 3차례의 지진으로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BC 1700년 직후 두 번째의 페이스토스 궁전이 지어졌다. 두 번째 미노안 궁전은 굉장한 지진으로 무너져 마침내 BC 1450년경에 크레타 전체가 파괴되었다. 오직 크노소스 만이 미케네인人 지배 하에서 그 터 위에 궁전으로서 계속해서 존재하였다. 페이스토스는 그리스시대에 와서도 계속해서 중요한 도시가 되어 호모에 의해 언급되었다. 페이스토스 종말은 BC 200년경에 도래했는데, 이때 이웃인 고르틴(Gortyn)에 의해 파괴되었다. 고르틴은 메사라평원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발전시켜 나갔다. 페이스토스의 고고학적 연구는 1884년에 할베르(F.Halbherr)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이어 1900~1904년에 할베르의 감독 하에 아테네 이탈리아 고고학회에 의해 계속되었으며, 1950~1971년에는 도로 레비(Doro Levi)에 의해 이루어졌다.
* 크레타 역사박물관
크레타 역사연구회에 의한 안드라스 칼로캐리노스(Andras Kalokairinos)의 노고로 이라클리온에 설립되었다.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칼로캐리노스의 저택을 이용하고 있다. 위치는 이라클리온 레오포로스 소포클리 베니젤로우(Leoforos Sophokli Venizelou)에 있는 제니아 호텔(Hotel of Xenia) 반대편 해안거리에 있는 성 피터와 바울 교회에 근처에 있다. 전시물은 초기 기독교시대에서부터 20세기까지로 고고학박물관 소장품의 연장 박물관이다. 후기 기독교 역사시대를 위한 크레타의 중심 박물관이다.
* 이라클리온 고고학박물관
이라클리온에 있는 고고학박물관이다..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크고 두 번째로 중요한 고고학박물관이다. 단연 첫째는 아테네에 있는 국립고고학박물관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유럽과 그리스의 최초의 문명인 미노안 문명(Minoan Civilization)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 건립 초기부터 박물관의 목적은 BC 7000년 전의 선사시대부터 AD 4세기의 고대세계의 말엽까지 번성하였던 미노스의 위대한 섬에서 번성하였던 문명의 기념물들을 소장하고 발굴하는데 있었다.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전시물은 20세기 동안 그리스와 에게해를 지배하였고 유럽과 그리스에서 최초의 문명이었던 미노안 문명에 의해서 창조된 비할 데 없는 명품들이다. 크레타가 그리스 고전 문명의 창조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행사하였다.
첫 번째 박물관은 1904-1912년 사이에 크레타 고고학자 조셉 카치다키스(Joseph Chatzidakis)와 스테페노스 잔토우디디스(Stephenos Xanthoudidis)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에 설립되었다. 1937년부터 현대적인 건물로 두 번째의 박물관이 스피리돈 마리나토스(Spiridon Marinatos)에 의해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유물의 전시 및 정리는 1950년대에 니콜라오스 플라톤(Nokolaos Platon)과 스틸리아노스 알렉시오우(Stylianos Alexiou)에 의해 조직되었다. 주로 크레타의 중부와 동부에서 발굴된 것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다. 1970년대 들어서 새로운 고고학박물관이 아지오스 니콜라오스(Agios Nikolaos), 시에타(Siteia), 하이나(Chania), 레티몬(Rethymnon) 등에서 설립되었다. 이 박물관들에서는 크레타 섬의 동부와 서부로부터 나온 크레타 문명의 기념물들을 소장하고 전시하고 있다.
모두 20개의 전시실에서 연대순으로 전시되고 있다. 전시물을 특징적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석관(石棺)은 13전시실, 미노안 프레스코화畵는 14~16전시실, 조각물(부조, 조각상, 건축 부분)은 19~20전시실, 성聖 기아말라키스 콜렉션(St.Giamalakis collection, 1962년에 그리스 국가에서 사들인 것임)은 17전시실, 금석문은 박물관 반대편의 보호막이 처 있는 오픈 된 공간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밖에 아카네스(Archanes) 고고학 콜렉션과 고르틴의 고고학 사이트에서 전시되고 있는 고르틴의 글립토테케(Glyptotheke) 등이 있다. 주요 소장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뱀의 여신. 채색된 작은 조각상. 크노소스 궁전 출토. BC17~16세기 제작. 이 종교적인 조각상의 전형적인 특징은 구불구불 움직이는 뱀을 휘어잡고 있는 들어올리거나 혹은 뻗친 어깨와 얇은 허리선, 노출된 가슴, 애프런을 걸친 주름스커트를 입고 있는 모습. 이러한 것들은 미노안 미니애처 조각상의 특출한 예임. 수정단지(rhyton). 자크로스(Zakros) 궁전에서 출토된 우아한 작은 리톤(獻酒단지). BC 17~15세기에 제작. 몸체는 큰 수정덩이를 조각한 것이고 손잡이는 청동으로 된 끈으로 묶은 수정 알로 만들어져 있음. 이 독특한 단지는 수백 개의 작은 파편을 복원한 것임.
황소머리 모양의 단지(Rhyton). 크노소스의 작은 궁에서 출토. BC17~15세기 제작. 검은 동석(凍石)으로 황소머리 모양으로 조각한 헌주(獻酒) 단지. 머리는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고, 눈은 수정과 벽옥(碧玉)으로 상감 되어 있으며, 입은 하얀 조가비(진주의 어머니)로 상감 되어 있고, 뿔은 금박을 입힌 목재로 만들어졌음. 미노안 보석세공의 탁월한 예임. 페이스토스 평원반(Disk). 페이스토스 궁전에서 출토된 점토 평원반. 양면에 242개의 사인이 날인석과 함께 표시되어 있음. 테두리에서 중심 쪽으로 나선형이 새겨져 있음. 이 사인들은 표의문자에 속하고 아마도 음절문자인 듯 한데,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독되지 못하고 있음. 평원반의 정확한 연대도 의문인데, 대략 BC 17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황소를 뛰어넘는 모습의 프레스코벽화.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 BC 17~15세기 제작. 남녀가 황소 뛰어넘기에 참여하는 일종의 콘테스트로 종교적인 성격이 짙은 벽화. 각 사이드에 여자가 있고 황소 등에서 남자가 점프하는 모습임. 이소파타의 황금반지. 이소파타(Isopata)의 한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인장 반지. BC15세기 작품. 백합이 핀 풀밭에서 환상적인 의식 춤을 추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음. 작은 인물은 하늘에서 강신 하는 여신인 것으로 추정됨. 땅 위에는 눈과 뱀의 사인을 볼 수 있음. 미노안 금 세공품의 명품임.
카마레즈(Kamares) 스타일의 과일받침대. 페이스토스 궁전에서 출토된 점토 과일받침대. BC 18~17세기 제작. 다양한 색상으로 채색되고 나선형 모양과 테두리는 이빨모양의 술로 장식되어 있음. 카마레즈 스타일(Kamares Style)의 훌륭한 예임. 흰 백합이 달린 카마레즈 스타일의 크라터(Krater). 페이스토스 궁전에서 출토. 최초의 궁전 시기인 BC 19~17세기 제작. 궁전의 가장 번성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현저하게 돋보이는 솜씨의 작품으로 궁전의 연회 홀에 장식되었던 왕실의 도구였을 것으로 추정됨. 카마레즈는 고대 세계의 가장 장식적인 도기 스타일 중의 하나로서 주목받는 도기의 새로운 스타일로서 다색채 장식이 특징임.
지아말라키스(Giamalakis) 콜렉션의 점토 사당 모델. 알카네스(Archanes)에서 출토된 원형 사당의 독특한 테라코타 모델. 원시 기하시대인 BC 10~9세기에 제작. 사당 내부에 손을 들고 앉아 있는 여인이 있는데, 아마도 여신일 것임. 지붕 위에 있는 두 명의 남자는 경배를 표하며 빛이 나오는 곳으로 여신을 바라보고 있고 개 한 마리가 테두리에 앉아 있음. 청동 소상(小像). 드레로스(Dreros)의 아폴로 델피니오스 신전에서 출토. BC 8세기 말엽에 제작. 청동으로 된 얇은 판을 망치로 두들겨서 만든 3개의 소상. 아폴로와 그의 누이 아르테미스와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됨. 망치로 두둘겨 조각상을 만드는 최초의 예로 알려진 현저한 청동 작품.
아프로디테 조각상. 고르틴(Gortyn)에서 출토된 대리석상. BC 1세기에 제작. 목욕탕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여신 아프로디테를 묘사. 조각가 도이달사스(Doidalsas)에 의해 제작된 헬레니스틱 오리지날의 로만 카피임. 금제 봉납 양날도끼. 크노소스 궁전에서 출토. BC17~13세기 작품. 미노안들이 이 양날도끼를 '라브리스(labrys)'라고 불렀음. 근대어의 '라비린스(labyrinth, 미궁)'는 이 '라브리스의 주거(resident of Labrys)'에서 유래한 것으로, '양날도끼의 궁전'에서 유래된 것임. 도끼는 미노안 종교의 신성한 상징임.
벌 모양의 황금 펜던트. 말리아(Malia)에 있는 크리솔라코스(Chrysolakkos)의 구 궁전(Old Palace)의 묘지에서 발굴됨. 두 마리의 벌이 얼굴을 마주 보고 과일과 벌꿀을 들고 있는 것이 묘사됨. 앉아 있는 여신. 신석기시대의 테라코타 소조각상. 크레타 이라페트라(Ierapetra 혹은 Hierapetra) 근처의 카토 초리오(Kato Chorio)에서 발굴됨. 다산(多産)의 여신을 상징함. BC 4500~3500년경에 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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