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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생애 및 작품세계

by 丹野 2012. 1. 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Jose Garcia Marquez의 생애 및 작품세계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Jose Garcia Marquez의 프로필

1928년 콜롬비아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나다.
194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고타 국립 대학 법학과 입학하다.
1947년 『세 번째 체념』으로 문단 데뷔하다.
1948년 가족과 함께 까르따헤나로 이주한 후 『엘 우니베르살』지에서 기자로 일하다.
1954년 『관객』지에서 연극 비평과 시대평론을 담당하다. 콜롬비아 전국 단편소설 대회에 『토요일 하루 뒤』라는 작품으로 국가문학상을 수상하다.
1955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4대국 국제 회의에 특파원으로 파견되다. 『낙엽』을 발표하다.
1958년 쿠바를 방문하다.
1962년 『어려운 시간』으로 에쏘 문학상 수상하다.
1967년 바로셀로나로 이주하다. 1965년부터 써오던 『백년간의 고독』을 출간하다.
1974년 극우파 정권에 대항하는 ''저항 문학가 협회''를 주도하고, 좌익 성향의 『라 알떼르나띠바』 지를 창간하다.
1975년 『족장의 가을』을 발표하다.
1981년 콜롬비아 좌익 게릴라들에게 쿠바로부터 무기를 공급해 준다는 혐의를 받자 당국의 수사를 피해 멕시코로 망명하다.
1982년 『백년간의 고독』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한다.
1985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출판하다.
1989년 『미로 속의 장군』을 출판하다.
1992년 조국 콜롬비아로 귀국한 후 폐암 수술을 받는다. 이후 『열두 개의 순례하는 단편들』, 『사랑과 또 다른 악마들에 관하여』, 『납치일기』등을 발표하다.
1998년 『캄비오』지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하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Jose Garcia Marquez 1928~ 의 생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28년 남아메리카 북부에 있는 콜롬비아의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아라카타카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마르케스는 12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태어난 후 8년 간을 외조모부의 집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괴이한 용모와 억센 고집으로 부모의 속을 무척 썩였다. 그러므로 식구들 중에서 누구 하나 그에게 애정을 품거나 귀여워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그는 집에 정을 붙일 수 없어서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갔다. 이때부터 그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고 안 가져 본 직업이 없었다. 군인이 되어 전선에 나가 싸우기도 했다.

그의 성장 배경과 삶의 과정에서 마르케스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마르케스는 기괴한 것을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주의와 결합시키는 자신의 서술 방식과 지역 신화 및 전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모두 외할머니 덕분으로 돌린다. 한편 외할아버지는 1890년대 콜롬비아에서 벌어진 내전에 참가했던 인물로서 외손자인 마르케스가 위대한 등장 인물을 창조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마르케스는 여덟 살 때 맞이한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이후로는 나에게 흥미로운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마르케스의 주제와 본질적 기교는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되었다.

1946년에 마르케스는 보고타 근처의 시파키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고타에 있는 콜롬비아국립대학과 카르타헤나대학에서 법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그가 문단에 뛰어들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47년 《세 번째 만남》을 쓰면서부터였다. 1948년에 저널리스트로서 첫 출발을 하여서 카르타헤나, 바랑키야, 보고타 등지에서 일했다. 1950년대 말에는 보고타의 일간지 〈에스펙타도르 El Espectador〉의 로마, 파리 주재 외신특파원으로 있었다. 곧 이어 1954년 친구의 권유로 콜롬비아 전국 단편소설 대회에 《토요일 하루 뒤》라는 작품으로 국가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55년 《낙엽La hojarasca》이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콜롬비아의 우수한 작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낙엽La hojarasca》이야말로 콜롬비아 문단이 삼십 년 만에 수확한 일대 걸작이라고 극찬 받은 것이다. 《낙엽La hojarasca》은 침체기에 빠져 있던 콜롬비아 문단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낙엽 La hojarasca》에서는 이후 작품 배경으로 많이 등장한 가상의 콜롬비아 마을 '마콘도'가 선보인다. 그가 즐겨 쓰는 문체의 특징인 리얼리즘과 환상적 구상의 결합이 나타나 있다. 그 뒤 그는 파리 체류 때 써놓았던 《불길한 시간》을 발표하여 콜롬비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에소 문학상'을 획득함으로써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55년 카리브해에서 10일 간 표류한 콜롬비아인 선원의 고통스런 체험에 대해 기사를 썼다. 그가 콜롬비아 해군을 비판했기 때문에 신문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질서에서 콜롬비아의 실권자 구스타프 로하스 피니야 장군은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하지도 않고 오히려 개인적 축재에 급급했다. 구스타프 로하스 피니야 장군은 권력을 이용해서 밀수 행위까지 자행함으로써 국민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 이런 과정에서 마르케스는 파리에서의 외국 통신원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후에야 쿠바 통신사인 '프렌사라티나'에 들어가 보고타, 뉴욕 ,멕시코시티 등에서 일하는 한편, 광고 회사에도 다니고 영화 대본도 썼다.

마르케스는 콜롬비아의 실권자 구스타프 로하스 피니야 장군의 밀수 행위를 보도한 혐의로 국외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몇 년 후에 구스타프 로하스 피니야 장군은 실각되었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고국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카스트로가 집권한 멕시코로 곧바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는 멕시코에서 단편집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을 출판하였다. 1958년에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가 콜롬비아 잡지 《비토 Mito》에 처음 게재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국가를 위해 싸웠으나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그리고 지워져버린 늙은 퇴역군인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는 비로소 이 소설로 인하여 스페인어 작가군 중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 루마니어 등으로 번역되어 여러 나라에서 절찬을 받았다. 1958년 에 콜롬비아를 거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1959년에서 1961년에는 콜롬비아, 아바나, 뉴욕 시에서 쿠바의 새로운 통신사 '프렌사' (La prensa)에서 계속 일했다. 단편집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Los funerales de la Mama Grande》(1962)과 함께 번역되었다. 이즈음 마콘도에서의 정치적 억압을 묘사한 《암흑의 시대 La mala hora》(1962)도 내놓았다. 그 후 1965년까지 콜롬비아, 프랑스, 베네수엘라,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그는 멕시코 시에 거주하면서 시나리오 작가, 저널리스트, 출판업자로서 지냈다. 가장 유명한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 Cien anos de soledad》(1967)은 멕시코에 처음 체류했을 때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마콘도의 역사와 이 마을을 세운 부엔디아 가족을 그리고 있다. 이는 콜롬비아의 실제 역사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인류가 체험하는 신화와 전설을 표현한 것이다. 이 소설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사용한 밀도 있고 복잡한 문체는 마르케스 자신이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말했듯이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함께 문학비평서 《라틴아메리카 문학 La novela en America Latina》(1968)을 썼다.

1970년에는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바르셀로나 주재 영사직을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취임을 거절하였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는 단편집 《결백한 에레디라 외(外) La increible y triste historia de la candida Erendira y de su abuela deselmada》(1972)를 낳게 했다. 그밖에 연작소설 《푸른 개의 눈 Ojos de perro azul》(1972)도 출판했다. 그 후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집필 생활에 몰두했다. 1973년 스페인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했다. 그 뒤 라틴아메리카 군부독재자를 풍자한 《족장(族長)의 가을 El otono del patriaca》(1975)를 썼다. 1979년에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 1980년대 초에는 정치노선에서 좌익 견해를 주장했기 때문에 본국 콜롬비아와 미국에서 여러 번 여행 제한을 받았다. 라틴아메리카 소도시를 배경으로 명예를 위해 저지른 살인사건들을 다룬 《예고된 죽음 이야기 Cronica de una muerte anunciada》(1981)를 썼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Jose Garcia Marquez 의 작품세계


그는 어려서부터 반항적 기질이 강했다. 그의 기질은 신문기자로 있으면서도 다루기 힘든 폭로기사에 전념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 정의와 질서를 위해서였지 독자의 감각적 쾌락을 위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사석이나 공석을 막론하고 소설 작품은 모름지기 정치적 이유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공언하였다. 그런데 작품의 정치화에 대한 그의 소견은 후에 많은 작가들에게 잘못 인식되어 작품의 정치화는 곧 카스트로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말았다. 그러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진의는 라틴 아메리카와 같이 정치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지역에서는 가장 시대적 감각에 예민한 작가들이 지성적 이상에 바탕을 둔 사실주의를 지향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성을 올바르게 의식하자는 데 있었다.

당시 콜롬비아의 치안은 대낮에도 길에서 권총이 난사되었다. 이런 무법천지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질서를 지킬 수 없었다. 그런데 질서로부터 이탈속도는 잘못된 정치 작품으로 인하여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되어갔다. 1959년 카리브해에 카스트로라는 인물이 나타나자 라틴 아메리카의 곳곳에서 질서의 파괴가 미화되었다. 이것은 정치 작품들을 표방하고 있는 환상적 영웅주의의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역경 속에서 얻은 질서의 숭고한 의미를 가지고 도전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안타까울 정도로 부단하게 반복되고 있다. 과격한 기질의 국민성 때문에 무정부 상태의 극한에까지 이른 당시 콜롬비아의 사회상은 급기야 그 어떤 허탈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마르케스가 결정적으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서였다고 한다. 그 소설을 읽고 마르케스는 이런 일들도 현실 속에서 벌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라면 자신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학 공부를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작가 수업을 시작한다. 당시 그가 좋아했던 작가들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스탕달, 발자크와 같은 리얼리즘 작가들이었다. 마르케스의 청년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카탈란의 현자'로 묘사되기도 했던 학자 라몬 비녜스였다. 이 문학적 스승이 주재하는 소모임에서 그는 현대적인 작가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존 스타인 벡, 윌리엄 포크너와 같은 영미작가들이었다. 이중에서도 마르케스가 가장 매료된 작가는 윌리엄 포크너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82년에 5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작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이제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 속에 나타난 `마술적 사실주의'가 21세기 문학의 향방을 예언한다고 말한다. 상호 모순된 `마술적'이란 말과 `사실주의'가 보여주듯이 마술적 사실주의란 마술,현실의 논리적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모더니즘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려는 성격도 강하기 때문에,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이 용어가 지닌 역사성을 보지 못했다. 단지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이론적 틀에 맞게 재단했다. 그래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문학 형식에 국한된 문제로 오인되었다. 마찬가지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단순히 문체적 경향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경계의 파괴를 통해서는 개인의 일상만을 서술할 뿐이다. 그래서 역사적 현실로 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유럽과 미국문학의 무기력하고 폐쇄된 분위기를 벗어나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황을 완벽하게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마르케스가 즐겨 쓰는 환상과 사실의 문제를 잘못 이해하면 환상과 현실도 분명 잘못 파악하게 된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말할 때 대부분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린다. 피가 온 동네를 돌아 어머니까지 흘러가는 장면이나, 미녀 레메디오스가 침대 덮개를 잡고 하늘로 올라가거나, 신부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생각한다. 그러나 마술적 사실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바나나 농장 사건이다. 사실주의처럼 아주 정확하게 묘사된 이 역사적 사건은 마술적인 것의 핵심이 3000명이 죽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정부와 바나나 회사가 공식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잊게 하려고 했다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마술적 사실주의가 이룬 승리 중의 하나는 정치와 역사의 해석을 환상적이며 사실적으로 통합했다는 것이다.

물론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사회적인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통해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하나로 만든다. 여기서 개인적인 것이란 가족이나 성적 욕망 또는 낭만적 사랑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인 것이란 전쟁, 반란, 파업, 억압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속에서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서로가 연결되며 뒤엉키고 혼합된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영역처럼 보인다. 결국 그것은 사회적 결과로 발전된다. 반면에 사회적 발전은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문학 형식의 실험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의 관심사를 배제하지 않고 도피적이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 말은 한번쯤 되새김해 볼만하다. “사회적 배경이 어떻든지 소설가의 의무는 훌륭한 작품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설은 운명적으로 비순응적이다. 따라서 반듯이 반항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항상 그래왔다. 또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 철권통치 고발한 "콜롬비아의 솔제니친"

현멕시코 시티에서 살았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일과는 수십 년간 판에 박은 듯 했다. 5시 기상, 독서 2시간, 테니스 1시간, 그리고 오후 늦게까지 글 쓰는 작업이 이어졌다. 근년에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언론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서 확인이 힘들었다. 조강지처라고 할 수 있는 메르세데스 바르챠 여사와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 자신의 소설 내용과는 달리 부부 사이 금슬도 좋다.

그는 한 작품을 끝내고 다른 작품을 시작할 때 중간 휴식기가 없는 걸로 유명하다. 이것은 "손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본인은 말하고 있다. 손이 식은 작가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기에. 그의 노년 욕심은 대단하다. 몇 년 전 콜롬비아의 시사주간지 `캄비오'를 인수했다. 그는 잡지사를 경영하고 싶은 평소의 꿈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한 프랑스 잡지와 인터뷰에서 "지금부터 내가 1백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써야만 하는 것들을 다 쓰기엔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문학청년들의 필독서다. `백년동안의 고독'은 1967년 초판이 나온 후 1982년 작가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지금까지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돼 20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카뮈의 `이방인' 이후 초대형 베스트 셀러인 셈이다. 한국에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미로 속의 장군', `납치일기' 등도 번역돼 있다.

`납치일기'는 콜롬비아 최대 마약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에게 납치된 언론인들이 겪는 공포의 기록이다. 1990년 8월부터 1991년 6월까지 콜롬비아에서 있었던 실제 납치사건이 소재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닌 `사실적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기자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그는 1940년대부터 `엘 에스펙타도르' 등 리버럴 신문들에서 일했다. 그는 "문학은 저널리즘과의 사랑행위"라고 말할 만큼 다큐멘터리적 글 쓰기에 관심이 지대했다. 반면 그의 초기작들은 `제3의 은퇴', `큰 엄마의 장례식',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등에서 보듯 프란츠 카프카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콜롬비아의 솔제니친'으로 불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남미 독자들에게 `가보'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그는 반세기나 되는 작가 생활을 대부분 정치적 이유로 조국을 떠나 유럽, 멕시코, 쿠바 등지로 떠돌아 다녔다. 명작 `백년 동안의 고독'은 그를 망명작가로 내몬 남미의 정치, 사회사를 반영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수상연설문 `남미의 고독'을 통해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그리고 독립 후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들의 철권 통치를 겪어야 했던 남미인들의 `고독'을 전 세계에 호소하기도 했다.


* `납치일기'서 범죄-부패에 찌든 조국 그려

콜럼비아의 노벨상 수상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향은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불렸다. 혼돈의 중남미 현실을 드러내는데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그의 소설의 방식은 유효하다. 그러나 '납치일기'는 마르케스 소설 의 새로운 모색을 보여줘 주목된다. '납치일기'는 `사실적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였다. 그가 '마술'보다 '리얼리즘'에 쏟는 열정이 얼마나 더 큰가를 전한 것이다.

'납치일기'는 콜롬비아 최대 마약 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에게 납치된 언론인들이 겪는 공포의 기록이다. 1990년 8월부터 91년 6월까지 콜롬비아에서 있었던 실제 납치사건이 소재이다. 정부의 마약 규제법 제정에 대항하려는 조직은 콜롬비아 전직 대통령 가문의 인사를 포함한 10명을 납치한다. 무고하게 인질이 된 사람들은 복면을 뒤집어쓴 난폭한 보초들의 경계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 소설은 마치 저널리즘의 르포기사처럼 씌어졌다. 기자로도 활동했던 마르케스는 한때 '문학은 저널리즘과의 사랑행위'라고 말할 만큼 다큐멘터리적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철저히 사실들을 따라간 글쓰기가 어느 허구보다도 더 허구적이고 드라마틱하다는데 아이러니가 있다.

'납치일기'가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20년 이상 콜롬비아 전체를 좀먹고 있는 범죄와 부패다. 그는 그저 늑대 같은 지배자가 양처럼 순한 민중을 짓밟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지 못하고 일확천금의 미몽에 빠져있는 콜롬비아인 전체의 중병을 반성한다. 그는 "정직한 사람들보다는 범죄자가 더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이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고 말한다. 작가 서문에서 마르케스는 이렇게 썼다 ."이 책을 유죄이면서도 무죄인 콜롬비아인 모두에게 바친다." 마르케스는 이 소설을 쓴 직후인 1997년 또 조국을 떠나 멕시코에 망명해 살았다.


* 절필 선언과 라틴 아메리카를 위한 투쟁

<족장의 가을>을 출판한 이듬해인 1976년 마르케스는 멕시코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칠레에 독재자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고 있는 이상 더 이상 소설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의 사회주의 정부인 아옌데 정권을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쿠데타로 전복하고 쿠데타 기간 동안 3만여 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이것은 스페인 내전 당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스페인에서 독재자 프랑코 정권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일화와 비슷하다.

그는 이미 1973년에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에 "칠레 민중은 미제국주의의 하수인인 당신들과 같은 범죄자 집단이 통치하게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쓴 전문을 칠레 군부에게 보낸바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후 수년간 그는 정치적 활동에만 전념한다. 자유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아베아스Habeas재단의 창설 (1979년)뿐만 아니라, 콜롬비아에서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수감자와 고문에 대해 고발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벌인다. 물론 그가 출판 거부를 한 이후에도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에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고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반동이 극에 달하는 시점이 된다. 엘 살바도르에서는 로메로 주교가 엘 살바도르 군부의 암살부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한국에서는 5. 18이 벌어진다. 피노체트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소설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한 마르케스 1981년 4월에 스스로 이 약속을 깨고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출판한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했다.


■ 주요작품


* 백년동안의 고독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행동이나 사건들은 바로 이 아우렐리아노라는 한 인물로 수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어쩌면 이 유일한 배우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바이블의 모든 사건들이 한 사람의 신, 예수의 등장을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것이 예형론적 해석이라면, 마콘도의 창건자로부터 바나나 공장의 기계공인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마지막 아우렐리아노의 아버지)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부차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을 뒤에서 움직이고 조종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마지막 통합이나 실현의 조건들을 부여하는가. 그는 물론 멜끼아데스로서, 마치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등장하는 티레시아스처럼, 부엔디아 가문과 마콘도의 창조에서부터 종말까지를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젊었다가 늙었다 자유자재로 변모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다. 히브리서(7 : 3)를 보면 멜키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는 전통적으로 예수의 예형으로 간주되어왔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왔던 빵과 포도주의 선물에 기인한다.

멜키세덱이건 멜끼아데스건 둘 다 인간의 얼굴로 위장한 성령으로서 신의 도래를 알리는 주의 천사인 것이다. 멜끼아데스는 마콘도를 방문, 부엔디아 집안의 모든 면모를 말끔히 제거한, 유리로 지은 집들이 가득 찬 위대하고 빛나는 도시를 예견한다. 그는 어린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향해 이런 말을 한다. 나이가 백 살이 될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 원고의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소설 끝 부분에 나오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말이다. 실상 멜끼아데스는 백년간이나 그의 신성한 계획을 실현해줄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5:11)에는 멜키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가 어려우리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바로 멜끼아데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결국 『백년 동안의 고독』의 이야기 전체는 이 멜끼아데스의 신비를 캐는 일이다. 범위를 좁혀서 말하면 양피지의 비밀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수많은 인물들의 편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맨 마지막 장에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멜끼아데스의 원고를 해독할 때 소설도 끝난다. 이런 점에서 멜끼아데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동일한 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마콘도의 백년간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기록된 멜끼아데스의 원고는 바로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이블의 중심이 예수의 재림에 있다면 『백년 동안의 고독』의 그것은 사라진 멜끼아데스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대감에 있다. 왜냐하면 마콘도가 유리로 지은 집들이 가득 찬 위대하고 빛나는 도시가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사실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현시(顯示)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전개는 기상천외하고 환상적인 사실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언뜻 보기에는 환상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환상 속에서의 현실성이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또한 모든 것이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이성적 감각으로는 환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사촌 여동생 우르술라와의 근친상간적 결혼 생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남미의 처녀림 속에 마콘도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려 한다. 이 원시적인 마을은 물질 문명의 혜택을 잔뜩 누리는 번화한 도시로 발전하였다가 무지개처럼 하루아침에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 환상적인 무대에서 고독을 운명으로 타고난 한 집안의 백년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런데 이 마을의 역사 속에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얼마만큼이 환상적인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만큼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르케스가 환상과 현실을 격리시키고 있는 벽을 제거하는 데 무척 고심한 작품이다. 마르케스는 조부모의 밑에서 성장했다. 외할머니는 미신을 많이 믿고 신비적인 것을 아주 좋아하여 죽은 자나 죽음의 신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고대의 민화나 전설에 있어서는 극히 흔한 일이었다. 그러한 외할머니는 마르케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특히 외할머니는 환상적이고도 터무니없는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해 주었다. 곧 마르케스는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옛날 이야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채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었다.

환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던 마르케스는 바로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순식간에 타이프를 두드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완성시켰다. 흔히 작가들은 미리 세워 놓은 계획에 의해서 작품을 쓰면서 그 속에 분석과 증언을 열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자기대로의 분석과 증언으로서의 태도를 배제했다. 그리고 대신에 유년기부터 들어 온 전설이나 신화로 포화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인도를 받아 붓 가는 대로 매일 매일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생활을 기록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어디까지가 실제 현실이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환상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 또는 사실과 환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졌다.

이것이 새로운 하나의 문학적인 경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데서 마르케스의 작가적 성공을 이루었다. 그는 환상적 작품에 역사적인 현실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자기 특유의 제3의 현실을 창조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바나나 농장의 참살극은 실제로는 13명이 죽은 사실을 그는 3천 명으로 과장했다. 이러한 과장에 대해서 마르케스는 백년 후에는 3천 명이라는 환상적 숫자가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곧 사람들은 자기의 픽션(fiction)을 믿지 역사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케스는 이렇게 해서 역사적 사실을 그 사실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통해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행위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루어진 제 3의 현실은 개념적 세계를 환상적 세계로 대치시킨다. 이러한 세계가 신비하고도 마술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그 마술은 독자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작품은 신비와 역사와 서사시의 교류이다. 작품상에 나타나는 외국 회사가 중미에서 어떤 일들을 자행했는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위 증언 문학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씌어진 작품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숙명적인 교차를 복합적 기법으로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성과 희극성을 알 수 있다. 한편 중남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혈육들의 모습을 이 작품의 등장 인물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장치되어 있는 마술적 구조는 현대소설의 대부분이 새로운 기법의 실험과 감각적인 표현으로 흐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형식이다. 그리고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종횡무진으로 발휘되고 있다. 이는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환상적인 요소와 현실적인 요소가 작가의 독특한 문체의 도움을 입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수수께끼의 죽음을 한 호세 아르카디오의 피가 그의 집을 빠져나와 우르술라가 있는 곳까지 이르는 장면이나, 미녀 레메디오스가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 이사벨 신부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장면, 메르키아데스와 푸르덴시오를 비롯하여 이미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처럼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돼지 꼬리가 달린 아우렐리아노가 태어나 개미떼에게 끌려감으로써 부엔디아 집안의 고독의 역사가 끝나게 되는 등,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에피소드들이 현실적인 요소들과 뒤섞여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작품 전편을 통하여 흐르고 있는 '고독'이라는 주제 의식이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분필로 지름 3미터의 원을 그려 놓고 그 한복판에 선다. 그리고 아무도 심지어는 어머니마저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아마란타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일생 동안 반추하며 자신의 수의(壽衣)를 짜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대령의 형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 그리고 메메의 아들 아우렐리아노 등 모두가 하나같이 지울 수 없는 고독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이러한 고독은 애정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애정이 결여된 부엔디아 집안의 역사가 백년을 흐른 다음 처음으로 애정에 의하여 갓난아기 아우렐리아노가 태어난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돼지 꼬리를 달고 태어나 부엔디아 집안의 역사는 마콘도의 운명과 더불어 메르키아데스의 예언대로 막을 내리게 된다.

어쨌거나 “백년동안의 고독‘에 마술적 장치가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문제성을 아주 실감 있게 인식하도록 할 수 있는 가장 역량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문학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그 분야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세계화시켰다. 작가의 의식 세계와 라틴 아메리카라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사실성을 총 정리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설로서 그 대륙을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당연한 결과로 1982년 그에게는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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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이 작품은 콜롬비아 카리브 해의 어느 이름 없는 마을을 배경으로 식민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19세기말부터 1930년대까지의 이야기를 다뤘다. 사랑했던 여자 페르미나 다사를 다시 만나기 위해 무려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린 남자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이야기가 작품의 기본 뼈대다. 의사인 우르비노 박사는 친구의 자살을 계기로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느 날 우르비노 박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자 플로렌티노는 장례식장에서 우르비노 박사의 미망인 페르미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한다. 소설은 이 때부터 5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는 부유한 상인의 딸 페르미나를 보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누지만 페르미나의 아버지는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 딸에게 여행을 강권한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페르미나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별을 고한다. 이후 페르미나를 잊기 위해 플로렌티노는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보지만 그녀를 완전히 잊지는 못한다. 페르미나와 결혼한 우르비노 박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인생과 사랑, 늙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고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러브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사회에 대한 강판 비판과 풍자가 숨어 있다. 작가는 제목에서 시사하듯 사랑과 늙음, 질병이라는 주제와 함께 자살과 노화공포, 근대화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콜롬비아 대학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진 프랑코는 이 작품에 대해 "19세기의 진보가 남긴 폐허 속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전통적 삶의 모습에 관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 납치일기

193일 간의 숨막히는 납치극을 증언하는 마르케스의 르포소설이다. 이 책의 출간으로 마르케스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납치일기」는 마르케스가 '20년 이상 콜롬비아를 좀먹고 있는 대학살'이라고 표현한 범죄와 부패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최대 마약 조직의 두목과 정부간의 치열한 싸움을 193일간의 긴박한 납치극으로 그려 보인다. 잔혹한 납치에 희생된 인질들의 이야기는 하루에 20여 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나흘에 한번 꼴로 대량 학살이 벌어지고, 한 달이면 500명의 경찰관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곳에서 폭력과 공존하는 법 대신 '폭력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 칠레의 모든 기록

1985년 계엄령하의 칠레에 잠입하여 모든 기록을 촬영한 미겔 라틴의 기적적인 6주일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마르케스의 유려한 필치로 생생하게 기록된 칠레의 모든 것이다. 외부에서는 좀처럼 들여다볼 수 없는 칠레 군사정권의 구체적인 모습을 벗겨내는 데 다시없는 소중한 자료가 될 이 책은 인간의 삶에 대한 진한 애정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입장에서 존재가치가 두드러진다.




■ 참고 도서

* 가르시아 마르케스 / 송병선 엮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 납치일기 1. 2 /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1999년
* 백년의 고독 1. 2 /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 사랑과 다른 악마들 / 한뜻 / 1995년
*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 / 김훈 옮김 / 푸른숲 / 1999년
*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 울산대학교출판부 / 1996년
* 이방의 순례자들 / 한나래 / 1995년
* 칠레의 모든 기록 / 조구호 옮김 / 크레파스 / 2000년
*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 서성철, 김창민 편/ 까치/ 2001




■ 참고 논문


* 삶의 드라마 그 비극적 비전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 대한 원형비평 EL DRAMA DE LA VIDA Y SU VISION TRAGICA: Ana>lisis de Cien Anos de Soledad de Gabriel Gareia Ma>rquez a trave>s de la Critica arquetipica
서성철 徐聖哲


<논문초록>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는 수많은 민속 모티브들, 신화, 에피소드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주요한 것들만 열거해 보면, 이 소설 속에는 불멸을 찾아 떠나는 길가메쉬의 모험이 있으며, 오디세우스의 귀향의 여행, 영원성을 추구하는 연금술사의 자기실현 과정이 있으며,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들의 이야기(Saint Graal), 디오니소스적 광란의 축제, 원시 민족들의 입사의식(入社儀式), 엘리어트식의 황무지 재생신화, 햄릿류의 운명의 사이클의 신비등등 인류가 시간을 통해 쌓아올린 모든 문학적 경험들이 한데에 녹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보다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그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빌려온 틀은 모든 서구 문학에 상상력과 동기를 불러일으킨 바이블(Bible)이나 그리스 고전신화이다. 한마디로 말해 '백년동안의 고독'은 서사시이고, 비극이고, 로만스이며, 신화이다. 그것은 협소한 의미에서의 장르적 구분이 아니라 한 문학과 다른 문학과의 관계, 즉 프라이적 의미의 원형(archetype)을 의미한다. 이런 원형을 통해 '백년동안의 고독'은 모든 인류의 문학 전통 안에 끼워 넣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소설에서 관심을 갖는 부분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라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이 전체 문학의 구조물과 비교해 어떤 유사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보편적 의미의 탐구에 있다. '백년동안의 고독'은 100년 간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승리와 좌절의 대서사시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소설의 구조나 시간관은 시작은 종말에 내재되어 있고, 종말은 시작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종말론적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형식이나 시간관 안에서 움직이는 영웅들의 행동이나 사유 패턴은 신약 속의 사건들은 구약 속에 예시되어 있고, 모든 구약의 사건들은 신약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성서예형론(typology)의 예언(type)과 실현(antitype)의 두 축에 있다. 바이블과 비교할 때 고전신화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상상력의 몇몇 기본 패턴을 보여준다. 고전신화는 영웅의 신비한 탄생과 승리, 결혼, 죽음과 배반, 그리고 최후에 가서의 재생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 패턴은 문학 작품에서 끝없는 반복과 회귀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이 두개의 주요한 원리, 시작과 종말이라는 직선적인 양상과 순환의 사이클이 '백년동안의 고독'을 통과하는 커다란 축이다. 이런 두개의 신화적 조망에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바라보면 인간의 삶과 도시의 운명, 그리고 역사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주기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 모든 것들은 현재에 존재하고 있으며, 똑같은 사실의 영원회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은 바로 인간 존재의 비시간적 원형들이다. 다시 말해, '백년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개개의 인물들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우리들은 소설 속에서 그들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존재로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역사와 이야기는 단순히 한 마을의 역사,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곳에서 일어났고, 현재의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고, 미래의 어디선가에서 일어날 수 잇는 하나의 아키타이프(archetype)로서, 우리들에게 보편적인 역사관, 시간관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백년동안의 고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궁극의 비전인 것이다.




■ 참고 문헌


* 마르케스의 생애와 작품 세계


1

1967년에 발표된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르케스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 혹은 '신비적 사실주의'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기법과 문체를 구사하여 라틴 아메리카는 물론 세계 각국의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매일 매일의 생활 혹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역사성과 토속 신화나 전설과 같은 환상적 요소를 혼합하여 간단하고도 쉬운 문장으로 사건의 상황이나 움직임만을, 분석이나 설명함이 없이 붓가는 대로 서술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르케스는 대중적인 이야깃거리를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소설 형태로 성공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작가이다.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은 어찌 보면 천일야화(千一夜話)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케스의 작품에서는 '의식의 흐름'과 같은 난해한 기교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작품구성이나 기교는 기존 전통을 따르고 있어, 현대 중남미 작가들 중에서는 독특한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에 익숙해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마르케스의 작품 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조명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28년 남아메리카 북부에 있는 콜롬비아의 아라카다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괴이한 용모와 억센 고집으로 부모의 속을 무척 썩였다. 그러므로 식구들 중에서 누구 하나 그에게 애정을 품거나 귀여워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또한 집에 정을 붙일 수 없어서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갔다. 이때부터 그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감당해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고 또한 안 가져 본 직업이 없었다. 군인이 되어 전선에 나가 싸우기도 했다. 이러한 파란 많은 삶의 편력은 원래 문학적 재질이 풍부한 그에게 무진장한 소재로 작용했다. 그는 보고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기자가 되어 유럽에 잠시 체류하였다가 그 후 멕시코로 건너가 창작 활동을 하였고,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쿠바로 건너가서 국영통신사의 뉴욕 특파원이 되는 등 인생 역정의 편력은 계속되었다.

그가 문단에 뛰어들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47년 《세 번째 만남》을 쓰면서부터였다. 곧 이어 1954년 친구의 권유로 콜롬비아 전국 단편소설 대회에 《토요일 하루 뒤》라는 작품으로 국가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55년 《낙엽》이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콜롬비아의 우수한 작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낙엽》이야말로 콜롬비아 문단이 삼십 년만에 수확한 일대 걸작이라고 극찬받은 것이다. 《낙엽》은 침체기에 빠져 있던 콜롬비아 문단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뒤 그는 파리 체류 때 써놓았던 《불길한 시간》을 발표하여 콜롬비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에소 문학상'을 획득함으로써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70년에는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바르셀로나 주재 영사의 직을 받았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취임을 거절하였다. 현재는 스페인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집필 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다.


3

어려서부터 반항적 기질이 강했던 그는 폭로기사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 정의와 질서를 위해서였지 독자의 감각적 쾌락을 위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사석이나 공석을 막론하고 소설 작품은 모름지기 정치적 이유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공언함으로써 소설의 정치화를 강조하였다. 그런데 작품의 정치화에 대한 그의 소견은 후에 많은 작가들에게 잘못 인식되어 작품의 정치화는 곧 카스트로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말았다. 그러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진의는 라틴 아메리카와 같이 정치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지역에서는 가장 시대적 감각에 예민한 작가들이 지성적 이상에 바탕을 둔 사실주의를 지향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성을 올바르게 의식하자는 데 있었다.

백주대로상에서 권총이 난사되고 밤에는 무서워 거리에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풍토에서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의 질서로부터의 이탈은 잘못된 정치 작품들로 인하여 그 이탈의 속도가 더욱 심해졌다. 특히 1959년 카리브해에 카스트로라는 인물이 나타나자 라틴 아메리카의 곳곳에서 질서의 파괴가 미화되었던 것도 정치 작품들을 표방하고 있는 환상적 영웅주의의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바로 이러한 것에 그가 역경 속에서 얻은 질서의 숭고한 의미를 가지고 도전하려고 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안타까울 정도로 부단하게 반복되고 있다. 과격한 기질의 국민성 때문에 무정부 상태의 극한에까지 이른 당시 콜롬비아의 사회상은 급기야 가르시아 마르케스로 하여금 그 어떤 허탈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집권자였던 구스타프 로하스 피니야 장군은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개인적 축재에만 급급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밀수 행위까지 자행함으로써 국민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

마르케스는 그 밀수 행위를 보도한 혐의로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몇 년 후에 구스타프 로하스 피니야는 실각되었지만 마르케스는 고국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멕시코로 건너간 그는 단편집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을 출판하였고, 그 뒤를 이어 그 자신이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하는 《대령에게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는 비로소 스페인어 작가군 중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마르케스는 이 작품에서 옛날과 같은 영웅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하여 비굴을 초월한 권위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느 대령의 초라한 모습을 묘사하여 퇴폐적 분위기 속에서나마 그 어떤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 루마니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 국에서 절찬을 받았다.

대서양을 건너 파리에 머문 마르케스는 그 곳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문학의 정수를 마음껏 맛보면서 집필 생활에 몰두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고국에 돌아가서 부정적인 면만을 부정적으로 파헤치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정확한 의식을 가지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문학 세계를 구축하려면 콜롬비아보다는 아무래도 유랑생활이 더 효과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어서 그는 1967년에 《백년 동안의 고독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이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서 일약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였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어느 신문이나 잡지를 막론하고 이 《백년 동안의 고독》에 대한 소개나 평을 싣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4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일단 손에 들면 누구든지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의 전개는 기상천외하고 환상적인 사실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는 환상적인 것 같지만 실은 환상 속에서의 사실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왜냐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또한 모든 것이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이성적 감각으로는 환상으로 보일지라도.

이 작품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사촌 여동생 우르술라와의 근친상간적 결혼 생활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남미의 처녀림 속에 마콘도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는데, 이 원시적인 마을은 물질 문명의 혜택을 잔뜩 누리는 번화한 도시로 발전하였다가 무지개처럼 하루아침에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 환상적인 무대에서 고독을 운명으로 타고난 한 집안의 백년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런데 이 마을의 역사 속에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얼마만큼이 환상적인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만큼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르케스가 환상과 현실을 격리시키고 있는 벽을 제거하는 데 무척 고심한 작품이다. 마르케스는 어린 시절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의 할머니는 미신을 많이 믿고 신비적인 것을 아주 좋아하여 죽은 자나 죽음의 신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고대의 민화나 전설에 있어서는 극히 흔한 일이었다. 그러한 그의 할머니는 어린 마르케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특히 그녀는 환상적이고도 터무니없는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해 주었다. 즉 마르케스는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옛날 이야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채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었다.

환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던 마르케스는 바로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순식간에 타이프를 두드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완성시켰다. 흔히 작가들은 미리 세워 놓은 계획에 의해서 작품을 쓰면서 그 속에 분석과 증언을 열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자기대로의 분석과 증언으로서의 태도를 배제했고, 대신에 유년기부터 들어 온 전설이나 신화로 포화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인도를 받아 붓 가는 대로 매일 매일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생활을 기록했으므로, 그의 작품 속에는 어디까지가 실제 현실이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환상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환상이 독자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새로운 하나의 문학적인 경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데서 마르케스의 작가적 성공이 이루어진 셈이다. 다시 말해, 그는 환상적 작품에 역사적인 현실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자기 특유의 제3의 현실을 창조한다. 예를 들어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바나나 농장의 참살극은 실제로는 13명이 죽은 사실을 그는 3천 명으로 과장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과장에 대해서 마르케스는 백년 후에는 3천 명이라는 환상적 숫자가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즉 사람들은 자기의 픽션(fiction)을 믿지 역사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케스는 이렇게 해서 역사적 사실을 그 사실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통해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행위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루어진 제3의 현실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환상적 세계로 대치시킨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신비하고도 마술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술은 독자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이 작품을 가리켜 신비와 역사와 서사시의 교류라고 칭찬했다. 작품상에 나타나는 외국 회사가 중미에서 어떤 일들을 자행했는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위 증언 문학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씌어진 작품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숙명적인 교차를 복합적 기법으로 포착하려고 시도한 박력 있는 작품으로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폭로 소설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성을, 그리고 그 희극성을 진지하게 알게 된다. 한편 중남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혈육들의 모습을 이 작품의 등장 인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장치되어 있는 마술적 구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설계되어 있다. 먼저 이 작품의 형식적인 특색이다. 현대소설의 대부분이 새로운 기법의 실험과 감각적인 표현으로 흐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백년 동안의 고독》은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종횡무진으로 발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작품에는 환상적인 요소와 현실적인 요소가 작가의 독특한 문체의 도움을 입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수수께끼의 죽음을 한 호세 아르카디오의 피가 그의 집을 빠져나와 우르술라가 있는 곳까지 이르는 장면이나, 미녀 레메디오스가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 이사벨 신부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장면, 메르키아데스와 푸르덴시오를 비롯하여 이미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처럼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돼지 꼬리가 달린 아우렐리아노가 태어나 개미떼에게 끌려감으로써 부엔디아 집안의 고독의 역사가 끝나게 되는 등,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에피소드들이 현실적인 요소들과 뒤섞여 있다,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작품 전편을 통하여 흐르고 있는 '고독'이라는 주제 의식이다. 분필로 지름 3미터의 원을 그려 놓고 그 한복판에 서서 아무도, 심지어는 어머니마저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일생 동안 반추하며 자신의 수의(壽衣)를 짜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마란타를 비롯하여, 대령의 형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 그리고 메메의 아들 아우렐리아노 등, 그들은 하나같이 지울 수 없은 고독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이러한 고독은 애정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애정이 결여된 부엔디아 집안의 역사가 백년을 흐른 뒤, 처음으로 애정에 의하여 갓난아기 아우렐리아노가 태어나지만, 불운하게도 돼지 꼬리를 달고 테어나 부엔디아 집안의 역사는 마콘도의 운명과 더불어 메르키아데스의 예언대로 막을 내리게 된다.

어쨌거나 이 소설의 마술적 장치는 실제로 이 작품을 읽음으로서만 풀 수 있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성을 아주 실감 있게 인식하고 또한 이 인식한 것을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역량 있는 작가는 두말할 나위 없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그의 문학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그 분야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세계화시켰다면 작가의 의식 세계와 라틴 아메리카라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사실성을 총정리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설로서 그 대륙을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한 결과로 1982년 그에게는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다





* 카리브해에 내리는 하얀 고독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 중남미문학기행


카리브해의 햇빛은 희다. 한국의 가을 오후에 비껴드는 엷은 홍시 빛깔이 아니다. 바다와 길 사이의 늪지대에 무수하게 솟아 있는 부러진 검은 고사목 등걸들도 하얗고 우아하게 빛난다. 고사목 위로 해오라기들이 날아다닌다. 해오라기들 뒤편의 푸른 바다는 규칙적으로 허연 거품을 일으키며 몸을 뒤챈다. 검은 얼굴의 콜롬비아인 트럭 운전수 움베르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열정적인 음악에 맞추어 연신 핸들을 두드려댄다. 풍성한 하얀 빛 속에 고독이 끼여들 틈은 보이지 않는다.

콜롬비아 북서부 항구 까르타헤나에서 산타마르타까지 왕복 400km를 카리브해를 따라 달려갔다. 라틴아메리카의 '창세기'이자 '묵시록'으로 일컬어지는,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72)의 노벨문학상 수상작(1982) '백년 동안의 고독'의 배경을 탐색하기 위해서다. 저주받은 '부엔디아' 가문의 백년에 걸친 마모 과정을 담은 이 작품은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대작으로, 1967년 발표되자 마자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구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한 이 소설은 스페인 식민지시절을 거쳐 내전과 미국 자본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남미의 현실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꿰어낸 소설이다. 사랑에 실패했거나 아예 사랑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죽어가고, 급기야 그들이 살던 '마꼰도'라는 마을이 '고독의 허리케인'에 휩쓸려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이야기다.

처음에 카르타헤나에서 기자를 안내하기로 한 사람은 그곳에서 새우잡이를 하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들어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알려진 카르타헤나에서조차 무장 강도들에게 두 번에 걸쳐 총격을 받았다. 공포에 질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던 그는 안내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회사에서 트럭과 운전사를 내주었다. 게릴라들로 인해 내전 상태나 다름없는 혼돈을 겪고 있는 콜롬비아인들은 정부와 게릴라들에게 두 번씩이나 세금을 내야하고, 여차 하면 생명을 무참하게 빼앗긴다. 초기와는 달리, 게릴라들에게는 이제 이념도 뚜렷한 기치도 없어졌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에 공급되는 코카인과 헤로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콜롬비아의 마약 온상지를 제거하기 위해 최근 의회에서 13억 달러에 이르는 예산을 승인 받기도 했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뒤에는, 이른바 '1000일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좌우익의 내전을 겪었고 지금은 미국 자본과 게릴라들로 인해 몸살을 겪고 있는 나라. 그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온 마르케스가 느껴야 했던 '고독'의 뿌리는 바로 이러한 조국의 끝없는 미로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 직설적인 방식으로 조국의 고독을 담아내진 않았다. 현실은 환상적으로, 환상은 현실적으로 묘사해내는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의 정수를 활용해 콜롬비아의 현실을 뛰어넘어 남미의 고독을, 더 나아가 인류의 저주받은 '고독'을 세기의 벽화에 굵고 깊게 음각해낸 것이다. 근친결혼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날까봐 결혼 뒤에도 악착같이 동침을 거부하던 아내 때문에 동네에서 놀림을 받았던 1대 부엔디아. 그는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던 남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헤메다 '마꼰도'라는 늪지대에 이르러 마을을 창건한다. 그를 따라왔던 주민들과 더불어 유토피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근친상간의 저주는 6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시민전쟁에 참여한 그의 아들 부엔디아 대령은 서른 두 번의 전투 끝에 결국은 황금물고기를 만들었다가 다시 녹여내는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그의 후손 하나는 노랑나비를 몰고다니는 바나나 농장의 엔지니어와 사랑에 빠졌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마지막 후손 아우렐리아노는 이모와 간통했다가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은 뒤 도시의 파멸을 목도한다. 이야기는 이야기의 꼬리를 물고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이 소설에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두 가지 큰 사건은 '1000일 전쟁'과 바나나농장 학살사건이다. 1000일 전쟁은 콜롬비아 자유당과 보수당의 갈등을 배경으로 일어난 내전이고, 여기에 마르케스는 실제 존재했던 전설적인 인물에다 마꼰도의 부엔디아 대령을 대입시킨다. 후반부에 이르러 미국의 자본이 건설한 바나나농장에서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에 불만을 품고 파업을 하자 무자비하게 기관총을 난사해 수많은 생명을 죽였던 사건은 소설 속에서 마꼰도를 폐허로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당시 정부는 처음에는 사망자가 전혀 없었다고 잡아뗐고, 뒤이어 불과 10명 안팎의 희생자에 불과하다고 후퇴했지만, 실제로는 3천 명 이상이 학살됐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다. 소설 속에서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가 노동자를 선동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는 시체를 바다로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의 주검더미 위에서 기사회생해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 돌아와서 그 비극을 증언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어 그는 죽을 때까지 고독의 수렁에 유폐돼야 했다.

소설 속 '마꼰도'의 모델은 마르케스가 태어난 대서양 쪽 아라카타카 부근의 농장이다. 하지만 아라카타카까지는 갈 수 없었다. 최근 들어 기세가 더 강해진 게릴라들의 본거지 중의 하나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꼰도는 카리브해의 주변부 마을의 상징적인 이름으로, 카르타헤나에서 산타마르타에 이르는 카리브해 변방 지역은 소설의 배경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1928년 산타마르타 초입의 시에나가 바나나농장 학살사건의 실제 무대에 이르러, 움베르또에게 급히 차를 세우게 한 뒤 먼지 풀썩이는 농장입구로 걸어갔다. 완강하게 닫혀있는 정문의 쇠창살 사이로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장총을 둘러맨 사내들이 튀어나온다. 사정을 설명하자, 그들은 의외로 친절하게 거대한 철문을 열어 빨리 찍고 돌아가라는 몸짓을 취한다. 서둘러 사진 몇 장을 찍은 뒤돌아본 그들은 찌든 얼굴의 피폐한 복장이었고, 장총만 어깨에 둘렀을 뿐이지 순박한 웃는 쭈그러진 표정이 영락없는 우리네 촌로의 모습이다.

"남쪽으로는 영원한 식물성 상피(上皮)로 뒤덮인 습지들과, 거대한 늪지의 광활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집시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 늪지는 끝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 거대한 늪지는 서쪽으로 수평선도 없는 망망대해와 맞닿아 있었다." 마꼰도는 소설 속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비록 아라카타가의 풍경은 아니지만 카르타헤나에서 산타마르타에 이르기까지의 카리브해 연변은 어디나 비슷한 풍경이 널려 있다. 카리브해변의 고사목 늪지 뒤편 움막, 바다와 바다 사이의 좁은 공간에 벌집처럼 운집한 퇴락한 마을, 해변 노천시장에 운집한 부엔디아 가문의 후손들. 그들은 게릴라들이 출몰하건 말건, 대통령이 게릴라의 정치자금을 받았건 말건, 생업에 충실하면서 밤이면 해변의 달밤에 몰려나와 정열적인 춤을 추어대는 고독한 남미의 주민이었다.

이미 스페인 식민 종주국의 피가 섞인 이들이 대부분인 '강간당한 원주민'들이 해변에서 춤을 춘다면, 국제적인 휴양지 카르타헤나의 밤 디스코장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방인들이 점령한 '해방구'였다. 무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테이블 옆의 비좁은 공간이나 테이블 위에서 그들은 남미인들의 열정이 만들어낸 음악에 맞추어 세상의 끝을 보려는 양 광란의 춤을 추어대고 있었다. 그 해방구에서도 '고독'은 저주처럼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마르케스가 1982년 노벨문학상 시상직장에서 행한 연설 '남미의 고독'은 이렇게 이어진다.

"제가 금년에 스웨덴 아카데미로부터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것은 단지 문학적 표현양식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공할 현실 때문이라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종이 위에 씌어진 현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고 있고, 매일 헤아릴 수 없이 죽어 가는 우리의 매순간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또한 비참하지만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고 고갈되지 않는 창작의 샘물을 솟구치게 하며, 이런 창조적 샘물을 지닌 콜롬비아 사람은 행운을 지닌 사람들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





■ 별첨


바랑끼야 그룹의 문학세계
유 왕 무*


1. 머리말

라틴아메리카 소설은 1940년까지의 지역주의적 사실주의 세대를 거쳐 40년 이후에는 '신소설Nueva narrativa' 세대가 시작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와 소설 미학적 변화, 두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40년대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문명과 야만,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과거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탈피하여 서구와 라틴아메리카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대의 보편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시각적 변화를 모색함과 동시에, 소설 미학적으로는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포크너, 브레통 등 영미와 유럽 작가들의 창작방법을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서사기법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과거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와 유럽의 미학주의 사이에 존재했던 괴리를 없애주는 한편, 이제 라틴아메리카 소설이 라틴아메리카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서구를 포함한 현대 세계의 모순과 위기를 진단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신소설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학적 완숙성이 절정을 이루게 되고, 상업적으로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전으로 출판시장이 다변화되고 대중독자층이 두터워지면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폭발적 판매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60년대를 소위 '붐' 소설 세대라고 일컫는 것이다. 40년 이후의 신소설 세대를 이끈 나라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였으며, 콜롬비아를 위시한 다른 나라들이 그 뒤를 따르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던 콜롬비아 소설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보고타, 메데인, 깔리 등 내륙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한 내륙문학과 산따 마르따와 바랑끼야 등 북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안문학이 그 것이다. 이 두 부류 중에서 해안문학파들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외국과의 활발한 접촉으로 미국과 유럽 작가들의 문학 창작 기법을 내륙문학파들 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어서 콜롬비아 신소설 발전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특히 해안문학파의 주류를 이끌었던 '바랑끼야 그룹'은 그들 대다수가 언론계에 종사한 관계로 외국 문화계 소식에 빨리 접할 수 있었기에 라틴아메리카 신소설 경향에 선도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주로 20년대에 출생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바랑끼야 그룹은 언론인으로서의 현실감각과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바랑끼야 그룹이 활발한 활동을 보인 시기는 1940년대부터이지만 콜롬비아 국내에 그룹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5년이다. 바로 한 해 전인 1954년에 콜롬비아 최대 일간지 엘 띠엠뽀에 보고타 출신의 기자인 쁘로스뻬로 모랄레스 빠디야가 그들의 지적, 예술적 활동에 대해 호평을 한 바는 있으나, 그 당시에는 그룹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었다. '바랑끼야'라는 지리적 공간을 공유한 지식인들끼리의 자생적 모임으로 출발한 이 그룹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으로 인해 콜롬비아의 정태적 문화 분위기에 비판과 자극을 줌으로서 국내의 문화적 수준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특히 문학 분야에서 이들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외국 문학계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하고 국내 문학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제기함으로써 콜롬비아 문학이 붐 소설 대열에 동참케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본고에서는 바랑끼야 그룹의 의미 있는 구조estructura significativa를 이루는 문학정신과 작가의식이 어떠한 국내외적 컨텍스트하에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것이 콜롬비아 문학계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들의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보다는 바랑끼야 그룹 초기에 형성된 글쓰기 자세와 문학적 이념이 어떠했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1950년대 중반부터 활발히 출간되기 시작하는 그들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인생관과 세계관, 문학관이 그 이전에 그들이 바랑끼야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획득한 문학적 자세와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바랑끼야 그룹이 주축이 되었던 콜롬비아 해안문학의 전통과 특징을 먼저 살펴보고, 주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획득한 문학정신의 특징, 그러한 문학정신이 콜롬비아 문학계 전반과 신소설 형성에 끼친 영향 등을 고찰하는 한편, 전후 격변기를 맞이한 라틴아메리카의 미래에 대한 그들의 전망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작품 속에서 보여준 작가정신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콜롬비아 해안문학의 전통

마르께스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바랑끼야 그룹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해 콜롬비아 해안지역 소설가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지만, 정작 바랑끼야 그룹이 형성되기 전까지의 전통을 이어 왔던 선배 작가들에 대한 연구는 극히 부진한 실정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연구가 바랑끼야 그룹 문학세계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바랑끼야 그룹 이전까지의 해안문학 전통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해안문학의 특징부터 살펴보자면 지형적 영향으로 인한 개방성과 대중성을 들 수 있겠다. 보야까나 꾼디나마르까와 같은 내륙 고원지대의 문화가 전통적으로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엘리트주의적이며 문자문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 해안지방의 문화는 오를란도 팔스 보르다가 지적한대로 대중적이며 구비(口碑)문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내륙문화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변화에 대한 수용이 적은 반면, 해안문화는 반대로 타지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다. 식민지 시대부터 항구를 통한 밀수의 최적 장소였기에, "지적인 문화까지도 수입을 하게 되어 그 영향이 물리학과 자연과학의 논문은 물론 문학적 변혁"까지도 가져왔다고 평가받고 있다.

해안문학의 뿌리는 1844년에 출간된 후안 호세 니에또Juan Jose Nieto의 『잉헤르미나Ingermina』에 두고 있다. 니에또는 평민 출신으로서 까르따헤나 지방 호족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인해 자마이카에 피신했었다. 그러나 그 후 수령의 자리에 성공적으로 복귀하게 되어 1850년대와 1860년대에 지방 호족으로서의 권력을 향유하게 된다. 그는 뛰어난 글 쓰기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자메이카로 망명하기 전에 이미 한 권의 책을 발간했는데, "콜롬비아에서 쓰여진 최초의 지역 지리학 책"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까르따헤나 지방의 지역적, 통계적, 역사적 지리학Geografia historica, estadistica y local de la provincia de Cartagena』(1839)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1840년대의 망명기간 중에도 『잉헤르미나』를 비롯해 『모로인』(1845), 『로시나 혹은 차그레스 성의 감옥』(1850) 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 잉헤르미나』는 원래의 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530년대의 스페인 정복기와 식민시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이 소설의 핵심은 자유의 추구이다. 당시가 스페인으로부터의 자유, 중앙정부로부터의 해안지역 자유등이 거론되던 시점임을 고려한다면, 이 소설이 비록 국가전체의 정체성을 추구하지는 못했다는 한계점은 지니고 있지만 해안지방의 정체성을 추구한 역사소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언어를 통해 오래된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침묵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현대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큰 과제임을 인식한다면, 『잉헤르미나』는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나 쎄뻬다 사무디오의 『저택La casa grande』과 맥을 같이하는 해안지역 최초의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니에또의 뒤를 이은 소설가로는 마누엘 마리아 마디에도Manuel Maria Madiedo, 깐델라리오 오베소Candelario Obeso, 아브라암 사까리아스 로뻬스-뻬나Abraham Zacarias Lopez-Penha 등이 있다. 이들은 니에또보다 구비 문학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으며, 바랑끼야와 주변 해안지역의 고유문화를 재생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바랑끼야 그룹 이전의 해안문학을 이야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발행되었던 잡지 '목소리Voces'이다. 헤르만 바르가스German Vargas는 이 잡지의 성격에 대해 "국내외 시인과 소설가들에 대한 소개와 토론, 세련된 유머감각이 두드러진, 국내의 여타 잡지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출판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여기서 바르가스가 지적한 유머감각이란 내륙문학의 전통인 엄숙함이나 절도와는 대조를 이루는 요소로서, 이후 호세 펠릭스 푸엔마요르Jose Felix Fuenmayor에서 마르께스로 이어지는 해안문학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푸엔마요르의 『꼬스메Cosme』와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보여주는 유머스러운 태도에서 이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꼬스메』에서 보여준 일화, 유머, 언어유희에의 강조는 해안문학의 전통과 합치되는 것으로서 훗날 바랑끼야 그룹 작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출판 사업의 활성화도 해안문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는 바, 해안지방에서 출판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바랑끼야에서 해안작가들이 책을 출간하기 시작한 것은 '모고욘 인쇄소Imprenta Mogollon'와 '문디알 출판사Editorial Mundial'에 의해서 였으며, 푸엔마요르의 두 번째 소설 『열 네 성현의 슬픈 모험Una triste aventura de 14 sabios』(1928)도 '바랑끼야 문디알 출판사'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 때부터 시작된 출판문화의 발달은 해안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해줌으로써, 40년대 이후 마누엘 사빠따 올리베야, 엑또르 로하스 에라소 등의 걸출한 소설가들과 바랑끼야 그룹 동인들을 배출하는 한편, 해안문학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카프카에서 포크너에 이르기까지 영미와 유럽의 저명 작가들의 작품도 쉽게 접하고 근대적 서사기법을 빨리 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됨으로서, 이 지방 작가들이 콜롬비아 신소설 발전에 선두적 역할을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3. 바랑끼야 그룹과 저널리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라틴아메리카 붐 소설 작가들은 대부분 외교관이나 언론인 등 이른바 지식층 출신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콜롬비아 문단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론인 라몬 비녜스Ramon Vinyes를 중심으로 해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바랑끼야 그룹은 화가인 알레한드로 오브레곤Alejandro Obregon을 제외하곤, 헤르만 바르가스, 알폰소 푸엔마요르Alfonso Fuenmayor, 알바로 쎄뻬다 사무디오Alvaro Cepeda Samudio,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ia Marquez, 베르나르도 레스뜨레뽀 마야Bernardo Restrepo Maya, 호세 펠릭스 푸엔마요르 등 모든 구성원들이 언론계에 몸담고 있었다. 엄격히 얘기하자면 이들은 소설가로서보다는 신문기자로서 먼저 문필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 중에서 기자로서뿐 아니라 소설가로서도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마르께스의 예를 대표적으로 살펴보면, 저널리즘이 그들의 문학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께스가 공식적으로 신문사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49년으로서, 콜롬비아 정국이 소위 '폭력시대La Violencia'로 접어들기 시작한 때였다. 정국의 혼미로 보고타 대학이 문을 닫자 마르께스는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까르따헤나로 오고, 갓 창간돤 일간지 엘 우니베르살El Universal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1950년 우연한 기회에 들른 바랑끼야에서 엘 나시오날El Nacional 기자인 쎄뻬다 사무디오, 헤르만 바르가스, 엘 에랄도El Heraldo 기자인 알폰소 푸엔마요르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인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는 푸엔마요르의 주선으로 엘 에랄도에 취직을 하게 되고 <기린La Jirafa>이라는 고정 칼럼란을 맡아 매일 한 편씩의 칼럼을 쓰게 된다. 비록 작은 월급이었지만 그는 바랑끼야 그룹들과의 교호를 통해 포크너,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카프카, 조이스 등의 세계적 작가들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1954년에는 보고타로 돌아가 엘 에스펙따도르 EL Especta dor의 리포터로 자리를 옮겨 주로 영화와 문화관계 평론을 맡았으며, 서독, 프랑스 뿐 아니라 러시아, 폴랜드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여행하였다. 쿠바혁명 이후로는 주로 정치적 기사를 많이 써왔지만 여전히 그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흐름을 이끌고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언론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활의 방편으로 시작된 그의 기자생활이 이제는 오히려 그의 작품활동에 활력을 주고 창작세계를 풍부히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기자와 리포터로서의 이러한 경력은 마르께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간결하고 함축성 있는 문체의 습득이며, 또 하나는 현장에서의 풍부한 경험 축적을 들 수 있다. 마침 1960년대부터 신문의 특성과 소설의 기법을 조화시킨 신저널리즘의 경향이 미국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였는데, 마르께스도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 문학적 글 쓰기 기법에 신문이 지니는 간결성이 결합하는 독특한 형태의 양식을 익히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신간 『피랍일지Noticia de un secuestro』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히 문체의 수준을 넘어서 구조나 기법면에서 까지 신문과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양쪽이 공존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글 쓰기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신문기자 시절 사건을 붸아 다니던 습성은 문학의 현장성과 진실성 제고로 나타난다. 이는, 바르가스 요사가 지적했듯이, 저널리즘은 살아있는 생생한 길거리의 역사를 접하는 현실과의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나에게 있어, 길거리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소위 살아있는 역사와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다. 나는 골방에 틀어박힌, 개인적인 세계에 빠진 작가들의 이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거리의 삶은 창작의 세계, 환상의 세계에 끊임없이 물을 대 주고 있으며, 이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저널리즘은 누군가 완전한 상상 속에만 유폐되어 있을 때, 그 것을 깨주는 현실과의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마르께스가 기자시절 획득한 진실에 대한 탐구자세는 그의 문학세계를 꿰뚫는 의미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1940년대 말 콜롬비아 정국이 극도로 혼미해질 때부터 시작된 기자생활은 그의 삶 자체가 콜롬비아 역사의 증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의 진실을 파악하려는 그의 노력은 더욱 가열 찰 수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 저널리즘의 목적과 대중매체의 기능은 매우 명확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상과 거짓의 혼돈 속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도 형평을 잃고 어느 한 쪽의 얘기만을 믿고 보도하는 자세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항상 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조사'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공권력기관에서 유포된 정보일 경우에 특히 더 그러하다.

저널리즘은 원칙적으로 탐구적이다.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하고, 출처를 믿지 말아야 한다. 단일 출처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직업 중 가장 나쁜 점은 우리가 정보 출처의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숨길 만한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소설창작에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바나나농장 파업사태시 정부의 일방적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하며 역사적 진실을 들추어내려는 객관적 자세가 바로 그 것이다.

여하튼 마르께스나 쎄뻬다 사무디오와 마찬가지로 바랑끼야의 모든 동인들이 지녔던 기자로서의 경험은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 습득에 도움을 주었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올바른 사회인식과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비단 콜롬비아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와 서구 열강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반제국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비판적 글 쓰기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널리즘과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또 다른 점은 바랑끼야 그룹 동인들이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당시 꽤 유행하던 장르로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보고타에서 발간되는 주요 신문의 부록이나 문학잡지 등에 많은 투고를 하였다. 특히 가장 권위있는 '엘 띠엠뽀'의 부록이나 각 신문마다 매주 발행하는 '일요특집'을 통해서 많은 내륙작가들과 기자들의 에세이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바랑끼야 그룹에게 있어 에세이는 지적(知的)이기 보다는 '사회적' 성격이 더 짙은, 진지한 사고가 결핍된 텍스트에 불과했다. 그들은 에세이적 설명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직접 제시하고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제기와 함께 즉각적 결론을 유도하는 비평적 성격이 강한 칼럼을 위주로 발표하였다. 만일 바랑끼야 그룹과 기존 문단이 서로 공존관계를 이루었다면 콜롬비아 저널리즘에 비평 에세이라는 효과적인 글쓰기 양식이 뿌리를 내릴 수도 있었을 법한데, 그러한 양식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몇 개의 글을 꼽는다면, 알바로 쎄뻬디아가 '엘 에랄도'에 연재한 〈문화의 나침반La brujula de la cultura〉과 〈단편소설과 단편작가El cuento y el cuentista〉, 헤르만 바르가스가 '엘 나씨오날'에 쓴 〈무검사 카드Fichas sin revisar〉 정도일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바랑끼야 그룹 동인들이 '엘 띠엠뽀'나 '엘 에스?따도르'와 같은 보고타의 중앙 일간지에의 투고를 매우 기피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는 보고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그룹과 이념을 달리 하였으며 그들의 행동양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들 수 있다. 바랑끼야 그룹이 특히 비난했던 점은 작가와 비평가들 사이에 팽배했던 상호간 치켜세우기 문화였다. 그래서 당시 상당한 권위를 누리던 라몬 비녜스도 그룹 초창기 때 고작 세 편의 문학비평을 실었을 뿐이었다. 알폰소 푸엔마요르 또한 4년 간이나 보고타에서 살았었지만 '엘 띠엠뽀'에 두 편의 글만을 썼기에 그는 비평가로서 널리 알려지질 않았다. 쎄뻬다 사무디오나 마르께스 역시 비평가나 에세이 작가로서보다는 단지 단편작가로서만 인식되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타의 신문사와 관계를 맺은 경우는 주로 리포터로 활동한 경우인데, '끄로모스Cromos'의 리포터로 있던 알폰소 푸엔마요르가 1946년 바랑끼야로 돌아와 '세마나Semana'의 리포터를 맡았고, 1949년에 헤르만 바르가스가 그 뒤를 이어 활동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책임있는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던 바랑끼야 동인들의 특징을 정리하자면 첫째, 현실에 대한 진실탐구 자세를 견지하였고 둘째, 가벼운 에세이보다는 좀 더 진지한 문화비평을 선호하였으며 셋째, 콜롬비아 지식인 풍토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보고타에서의 출판을 기피하는 현상을 드러냈다. 이러한 바랑끼야 그룹의 특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보여주는 한편, 다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콜롬비아 문학현실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4. 바랑끼야 그룹의 문학이념

주요 신문의 칼럼을 맡고 있던 바랑끼야 그룹은 당시 콜롬비아 문학의 현주소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해안 지역의 전통을 이어받아 해외를 보는 시각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작품의 질적 비교가 가능했고, 따라서 콜롬비아 문학이 왜 해외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누구보다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40년대에 신문지상을 통해 콜롬비아 문학의 문제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론가들이나 작가들이 내놓은 분석은 콜롬비아 출판 유통의 부족과 정부의 문화 지원 정책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데 머물렀다. 어느 누구도 국내작품들의 수준이 해외의 장벽을 뚫기에 역부족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특히 동료들끼리 서로 추켜세우기에 익숙해져 있던 인물들은 더욱 그러했다.

당시 콜롬비아 문학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로 바랑끼야 그룹뿐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이 지적한 것은 동료간 '상호 칭찬'의 관습이었다. 특히 보고타를 중심으로 많이 행해졌던 이 세태는 작품의 질적 우수성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동료 작가나 비평가의 비판없는 일방적인 칭송으로 인해 작가와 작품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호세 펠릭스 푸엔마요르였으며, 알폰소 푸엔마요르는 이러한 현상을 '주식회사'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상호 찬양 단체의 관심을 매우 강하게 끄는 것은 칭찬을 용서해주는 마음씨 좋은 동업자들이다; 그것은 물론, 상당한 명망을 지닌 회사로서, 주주들에게 이익배당금을 지불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회사의 본사는 수도이고, 출판 조직은 그 곳의 신문들이며, 그들의 칼럼 뒤에는 상호성과 협력관계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회사에서 열광적인 칭찬을 아끼지 않는 주주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알폰소 푸엔마요르는 위와 같은 조직적 악습의 탈피를 주장하면서 현재 콜롬비아 문학이 성장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또한 높은 문맹률,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가 부재, 출판 산업의 열악성, 그로 인한 비평의 무용성 등도 콜롬비아 문학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동의하는 알바로 쎄뻬다 사무디오의 비판은 좀 더 직설적이다. 그가 항상 관심을 가져왔던 소설 분야의 빈곤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에두아르도 살라메아 보르다는 '엘 에스펙따도르'에 흥미 있는 앙케이트를 마련했다. 질문은 간단하고 구체적이다: "당신은 영어로 번역될 만한 콜롬비아 소설이 열 권 이내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얼핏본다면 쉽게 답이 나올만 하다: "열 권이 아니라 스무 권이라도 영어로 충분히 번역될 수 있다" 라고. 그러나 문학적,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수준의 번역 가능한 작품들을 골라야 한다면, 그러한 작품들은 어떠한 곳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영어로 성공적인 번역을 기대할 수 있는 콜롬비아 소설은 한 손가락으로 꼽는데 불과하던가, 아니면 그 손가락도 남게 될 것이다.

쎄뻬다 사무디오의 지적은 외국과의 비교를 통한 가치판단이라는 점에서 콜롬비아의 다른 비평가들의 의견과 구분된다. 쎄뻬다 사무디오 뿐 아니라 바랑끼야 그룹 모두가 지녔던 외국문학과의 비교 태도는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상호 칭찬의 한계를 벗어나, 그 때까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건전한 비교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며, 바랑끼야 그룹과 다른 문학가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해 주는 점이다. 외국문학의 흐름을 소개하고 비교하려는 바랑끼야 그룹의 움직임은 국내 문학계의 폐쇄적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비교문학적 비평방법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역기능보다 순기능에 더 많은 점수를 두고 있다.

비교비평: 이러한 비교비평 방법은 겉으로 보기엔 매우 딱딱해 보이지만 -단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문학계에서는 아주 좋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문학 창작의 품질이 주로 이미 행해진 독서량에 달려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보고타와 깔다스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인들은 국내 문학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자기만족감에 빠져서 현실안주를 꾀하며 기법과 테마 등에서의 발전을 등한시하였다. 그들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토착적인 것', '지역적인 것'을 '민족적인 것'으로 혼동한 나머지 미학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바랑끼야 그룹은 어설프게 문학적 민족주의를 외치던 기존의 내륙문학가들 보다는 오히려 신예작가들이나 비전문작가들의 글이 더 낫다고 주장하면서, 국내 문학계의 반성을 촉구하고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라도 외국문학 모델 도입이 시급하다고 느낀 것이다.

외국문학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미국문학이었다. 라몬 비녜스가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읽었던 포크너의 작품에 대해 1940년에 쓴 글이나, 알폰소 푸엔마요르가 1945년에 헤밍웨이의 작품을 번역한 것이 그 결과이다. 헤르만 바르가스 또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미국문학과 비교하면 아직 부진한 점이 많다면서 미국문학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오늘날 가장 흥미있는 소설은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영국을 제외하곤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싱클레어와 같은 작가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콜롬비아 문화적 발현에 미국의 영향이 구체적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바랑끼야의 젊은 평론가 마리오 마드릿 말로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예고스, 구이랄데스, 리베라의 세 작가에 대한 평론집인 그 책에 대해 "세 작가의 시각을 전부 스케치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소설과 미국 소설 사이의 유사성과 상이점을 분석하고 아메리카 소설의 일반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테마와 기법면에서 놀라움을 발견했다" 고 밝혔다. 마르께스도 "아직 콜롬비아에서 조이스, 포크너 혹은 버지니아 울프의 복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소설은 없었다. 내가 '복된'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현재 우리 콜롬비아인들은 그 영향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며 동조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문학뿐 아니라 프랑스의 문학기법을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는데, 알폰소 푸엔마요르가 그 장본인이다. 헤밍웨이의 작품을 번역한 바도 있는 그는, "우리의 돌파구는 콜롬비아에서 사르트르 작품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길 염원하는 것"이라며, "사르트르의 영향이 아직 불어닥치지 않은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며 우리는 이를 매우 슬퍼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개방화의 추세는 바랑끼야 그룹이 1950년 4월부터 12월까지 발행한 주간지 '연대기Cronica'를 통해 매회 외국단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후 쎄뻬다 사무디오가 '엘 에랄도'지에 1951년 8월 30일부터 11월 19일까지 최신 문화계 소식을 연재한 〈문화의 나침반〉을 통해 외국문학을 끊이지 않고 소개하였다. 외국의 문학상 수상 소식이나 신간 발표에 대한 소식 또한 국내의 타사보다 월등 빨랐던 것을 보면 지리적 이점과 언론기관에서 활동한 이점을 톡톡히 살린 듯하다. 예를 들면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야수문학Bestiario』이 1951년 3월에 발간되었는데, 쎄뻬다 사무디오는 그 해 8월에 그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단편: 매우 훌륭한 단편작가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최신작이 콜롬비아에 도착했다. 『야수문학』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을 없애는 일련의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보르헤스의 작품이 '수르Sur'지를 통해 바랑끼야와 보고타에 전해졌지만 초기에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은 바랑끼야 그룹 동인들 뿐이었고, 내륙에서 그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46년에 '엘 문도El Mundo'를 통한 헤르만 바르가스와 라몬 비녜스의 평론에 의해서 였으며, 1950년에는 '연대기'를 통해 『엠마 순스Emma Zunz』와 『칼의 모양La forma de la espada』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보고타에서 그의 작품이 소개된 것은 겨우 1951년에 이르러서 였다. 그것도 그 해 '엘 에스펠따도르'지에 『칼의 모양』이 실렸고 그 다음 해 '엘 띠엠뽀'에 『죽음과 나침반La muerte y la brujula』이 실린 것이 고작이었다. 바랑끼야 그룹의 이러한 기민성과 적시성은 물론 그들의 친구인 호르헤 론돈이 경영했던 〈세계서점Libreria Mundo〉에서 수시로 문학계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들이 평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러한 활동을 위한 기본준비를 철저히 해왔기에 가능한 것이라 판단된다.


5. 라틴아메리카의 주체성 추구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4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대부분은 향토색이 짙고 땅내음이 풍기는 작품들이었고, 또 그런 소설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그래서 도시를 무대로 작품을 쓴 보르헤스나 오네띠 보다는 안데스 산맥, 셀바, 팜파를 다룬 가예고스, 구이랄데스, 알레그리아의 소설들이 오히려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소용돌이』를 지은 콜롬비아의 리베라도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이 뿜어내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모습이고, 콜롬비아의 이미지라고 여겨져 왔던 것이다.

바랑끼야 그룹도 지역주의 문학 경향의 역할을 일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다: "가예고스의 소설들은 무엇보다도 기록문서이며 거대한 사회학적 벽화이다. 아마 그 소설들 속에 내재한 심리학적 노련미나 작가의 묘사력을 옹호하거나 신문 소설적인 요소에 깊이 동감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대한 페이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와 동향인들과의 우의를 돈독히 해주는 신실한 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이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에는 인식을 달리한다. 문학은 지형에 따른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시선을 인간에게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토착적 성격이 짙은 작품보다는 차라리 혼합주의적 문화를 표현한 작품을 더욱 라틴아메리카적인 작품으로 평가하기에 이른다: "아르씨니에가스 작품의 중심인물이 바로 우리 아메리카이다. 흑인, 백인, 인디오의 기묘한 혼합,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신세계에서 형성되었던 이 모든 혼합이 우리의 아메리카인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화를 한 마디로 혼합문화라고 규정하는 현재의 평가로 본다면 이러한 그들의 인식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한 그들은 전후 현대사회의 격변기를 맞이하여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질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대한 우려와 함께 라틴아메리카가 취해야 할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다. 바랑끼야 그룹은 항상 세계의 역사 바늘과 호흡을 함께 하려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문제를 세계의 문제 속에 집어넣고 판단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선호했으며,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을 이루던 어떠한 형태의 독재나 군국주의를 혐오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주의는 반동과 보수의 색채를 띤 것이 아니라 발전과 자유를 옹호하는 민주주의다. 이러한 점은 1946년부터 1950년까지 프랑코 총통을 비난하는 칼럼을 발표한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프랑코를 단지 군부 독재자로서 평가한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권력의 영속성을 통해 나치와 파시즘의 군국주의가 부활되고 연장되어 가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들은 추축국과 대항해 싸웠던 단합된 시절을 그리워하며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환경 앞에서 혼란스러움과 당혹감, 희망의 상실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 세계전쟁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었던 평화주의적 환상은 단지 가능성으로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필연적 요소로 나타났으며, 프랑코 정권이 또 한 번의 세계 분할이라는 끔찍스러운 오점을 남기도록 허용할 수는 없다고 느낀 것이다. 알폰소 푸엔마요르나 헤르만 바르가스도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었으나, 프랑코를 고발하는데 가장 열렬히 앞장선 사람은 쎄뻬다 사무디오였다.

이러한 자세는 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랑끼야 그룹은 국제적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나서, 미국의 자유주의 부르조아지가 반공산주의를 제창함으로써 주전론이 비등해졌으므로 냉전의 책임이 미국쪽에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1948년 쎄뻬다 사무디오는 미국 진보당의 일시적 지도자였던 헨리 월레스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월레스는 미국 내에서 적색 공포증을 지니지 않은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한 명으로서,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트루먼의 마샬 플랜을 유럽의 재건이라는 미명 하에 유럽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제국주의를 이식시키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반대입장을 표명하였으며, 유럽국가에 대한 지원은 이념을 떠나 모든 국가들에게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쎄뻬다 사무디오는 월레스의 이론에 모두 공감하였으나, 유독 스페인의 경우에서는 이견을 보였다. 즉, 스페인 국민들은 한창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으나, 그들을 돕는다는 것은 결국 굶주림의 원인 제공자인 프랑코를 지원하는 꼴이 되므로 스페인에 대해서만은 지원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만일 그들의 이념을 지원할 것이었다면 왜 전쟁을 하였으며 왜 히틀러와 맞서서 싸웠는가?" 라는 그의 물음에서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바랑끼야 그룹은 세계대전과 변화하는 세계질서 재편과정을 주시하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는데, 특히 히로시마 원자탄 폭격으로 인하여 그러한 인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콜롬비아에서는 이러한 새롭고도 근심스러운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어서, 원자폭탄 투하 사건을 2차 대전 중 일어났던 여타의 다른 사건들과 별 차이가 없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치부하고 말았으며, 1945년 8월에 발간된 신문의 일면을 장식한 톱뉴스는 알폰소 로뻬스 뿌마레호 대통령의 사임과 알베르또 예라스 까마르고 신임 대통령 임명에 관한 소식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핵폭탄의 파괴력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지식인 중의 한 명으로 살라메아 보르다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 달 전에 이미 원폭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바 있었으며, 전쟁 후에도 원폭의 위험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였다. 바랑끼야 그룹에서 원폭의 존재로 인해 고뇌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가장 명쾌하게 밝힌 사람은 쎄뻬다 사무디오였다. 그는 즉자적 현실을 넘어서서 작가로서의 혜안과 안목을 가지고 바랑끼야의 '엘 나시오날'지에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다른 동인들도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가 인류의 역사에 미칠 파장과 변화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그들의 모든 행동에, 심지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나 콜롬비아인들의 시대착오에 대해 풍자할 때에도 내비쳐지곤 하였다.

바랑끼야 그룹은 전후의 미,소 중심의 냉전체제 형성에 반대입장을 취했으나, 콜롬비아도 냉전시대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자유 개혁파의 지도자인 호르헤 엘리에쎄르 가이딴 암살 사건이었다. 1948년 4월 9일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보고타 사태Bogotazo'라 일컫는 도시 폭동이 일어났으며, 콜롬비아는 소위 '폭력의 시대La violencia'로 접어들게 된다. 이 사건 이후로 콜롬비아는 준내란 상태로 비화되었다. 초반부에는 정부군, 특히 경찰과 자유당 소속 무장집단 간의 대결 양상이 두드러졌으나, 1950년부터는 똘리마와 꾼디나마르까 등 일부 지역에서 공산당의 주도로 농민들이 자체의 방어 지역을 설정하여 완전히 독립된 국민 정부, 소위 독립 공화국 또는 붉은 공화국을 수립하기까지 하였다. 또 한편으로, 사건 직후에 열린 '제 9차 전미협의회 Novena Conferencia Interamericana'는 전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반공산주의 이념을 강압적으로 뿌리내기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바랑끼야 그룹의 입장은 분명했다. 모든 폭력에 대한 반대와 자유주의 이념의 강압적 요구에 대한 반대이다. 쎄뻬다 사무디오는 이미 칠레에서 일어난 빠블로 네루다 박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을 분명히 표명한 바 있다. 콜롬비아인들, 모든 라틴아메리카인들은 미국인들의 터무니없는 불법행위에 익숙해져있다. 우리는 어느 이념에 대한 찬, 반의 극심한 선전전을 수용하는 법을 묵묵히 배워왔다.(...) 수개월 전부터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적색 혐오증, 증오심을 지녀 왔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대대적인 선전을 펼쳐온 것이다.(...) 칠레 대통령, 곤살레스 비델라도 미국인들과 함께 놀아났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행동은 거의 비논리적이었기에, 처음부터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본 칼럼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빠블로 네루다에 대한 칠레 대통령의 우매한 판단은 결국 괴상망칙하고 어리석은 결과를 빚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즉, 쎄뻬다 사무디오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이 미국의 반공산주의 이념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에 대해 강한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신문 칼럼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사항을 정리해 보면, 첫째, 반파시스트 투쟁 시절 보여준 일체감에 대한 향수, 둘째, 라틴아메리카 제국 사이의 진정한 평등권을 보장하는 정전으로서의 먼로 독트린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 셋째, 미국의 압력에 대한 정체성 추구 요소로서의 이스빠니스모hispanismo 고양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전후시대의 새로운 질서 구축에 있어 라틴아메리카가 과거의 종속적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며, 바랑끼야 그룹 동인들이 지녔던 반제국주의적 색채를 느낄 수 있다.

결국, 바랑끼야 그룹은 자신들의 조국에까지 불어닥친 냉전체제의 바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냉철하고 분별력 있게 주시하면서 콜롬비아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시하고 있는 콜롬비아의 상황은 비단 콜롬비아 국내 문제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세계적 추이이며 최근 발생하고 있던 갈등문제의 한 결과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바랑끼야 동인들이 향후 라틴아메리카가 국제적으로 차지할 위상과 방향을 소위 제 3세계 혹은 비동맹 -비록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이름붙여지지는 않았었지만- 이라고 보고 라틴아메리카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지니고 있는 국제적 안목과 높은 통찰력이 주목된다.


6. 맺 음 말

지금까지 우리는 바랑끼야 그룹의 형성기부터 그들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저널리즘 활동을 통해서, 그들이 콜롬비아 해안문학의 전통적 특성인 개방적 시각으로 외국의 문학 경향을 국내 문학계에 빠르게 도입, 전파함으로써 콜롬비아 신소설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또한 당시까지 국내 문단에 팽배해있던 자기만족감과 안일한 창작 태도에 경종을 울리면서 보다 경쟁력있는 작품 생산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랑끼야 그룹의 문학관에 있어서 한 가지 오류를 지적할 수 있겠다. 즉 그들은 예술과 이데올로기 측면에 있어서 국내의 변화 가능성을 지나치게 불신한 나머지, 내륙문학의 위상을 필요 이상으로 간과하거나 무시한 측면이 있으며, 그런 연유로 오브레곤, 쎄뻬다 사무디오, 마르께스 등이 이러한 변화의 임무를 수행하는 대표자로 자임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이들이 콜롬비아의 신소설 형성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호세 에우스따시오 리베라, 호세 레스뜨레뽀 하라미요, 에두아르도 살라메아 보르다, 뽀르피리오 바르바 하꼽, 마누엘 메히야 바예호, 까바예로 깔데론 등 보고타와 안띠오끼아 지방을 중심으로 할동한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의 작품 또한 현대적 기법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륙문학의 위상을 폄하한 이유로는 아마도 지방색과 향토성이 너무 강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도시를 테마로 삼는 것만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길이라는 그릇된 인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이 기대했던 작품은 후안 룰포류가 아니라 보르헤스나 꼬르따사르류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토착성을 바탕으로 보편성을 창조하는 것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문학적 개념으로 보면 그들의 판단은 너무 편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시간이 흐른 후에 그룹 동인들이 지은 작품을 살펴보면 당시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그들 중에서 가장 도시적이라고 일컬었던 쎄뻬다 사무디오는 그의 작품 『저택』에서 -비록 현대적 서술기법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정작 테마로 잡은 것은 도시가 아닌 농촌으로서 바나나농장의 파업 사태를 다루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마르께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도시문학 개념에의 지나친 경도를 제외한다면, 이미 1950년 경에 붐 소설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적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바랑끼야 그룹이 콜롬비아의 문학사적 측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는 매우 큰 것이다. 또한 콜롬비아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붐 소설을 대표하는 『백년동안의 고독』이 바로 바랑끼야 그룹의 일원이었던 마르께스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바랑끼야 그룹이 지녀왔던 문학정신이 실천적으로 발현된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어쨋든 콜롬비아에서의 붐 소설 경향이 바랑끼야에서 처음 폭발한 것이 아니고 여러 지역에서 거의 같은 시점에 폭발한 것이라 할 지라도, 이러한 결과를 맺기까지 40년대를 세계와 함께 호흡하며 꾸준한 문학적 열정을 보여주었던 바랑끼야 그룹이 끼친 공헌의 지대함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시와 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