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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생애 및 작품세계

by 丹野 2012. 1. 5.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생애 및 작품세계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프로필

1883년 7월 3일 체코 프라하 출생
1889년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여동생 엘리Elli 출생
- 카프카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부모의 사업을 위해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님
1901년 고등학교 졸업 시험 통과 프라하 대학에 입학
1902년 10월 평생의 친구 막스 브로트를 처음 알게 됨
1903년 드레스텐 근교의 라만 박사 요양소에서 요양휴가
1904년 『어느 투쟁의 기록』 집필
1906년 주크만텔의 루드비히 박사 요양소에서 생애 최초의 여인을 만나게 되지만 유부녀였다는 사실 이외에는 카프카가 침묵으로 알려진 바가 없음. 8월 프라하 대학 법학박사 학위
1907년 7월 보험회사 입사
1908년 7월 노동자 재해 보험국으로 직장을 옮김
1910년 일기를 쓰기 시작함
1912년 8월 펠리체 바우어, 첫 만남. 『선고』, 『실종자』,『변신』을 완성.
1914년 6월 펠리체와의 약혼. 7월 약혼의 파기.『유형지에서』 집필
1915년 1월 펠리체와의 재회
1917년 7월 펠리체와의 2차 약혼(8월 각혈). 12월 2차 약혼파기
1919년 초 율리에 보리체크와의 만남. 5월 율리에와의 약혼
1920년 여름 율리에와의 약혼 파기
1920년 4월 밀레나와의 편지왕래(사랑으로 발전하여 1923년까지 계속)
1922년 노동자 재해 보험국 퇴직. 『성』 집필.
1923년 7월 도라 디아만트와의 사귐. 9월 도라와 동거(베를린)
1924년 4월 키를링 요양소에 입원
1924년 6월 3일 임종(도라, 클로프슈토크 임종을 지킴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이야기

초현실적, 환상적 소재를 구사하여 몇 중으로 소외된 현대인들의 절망, 좌절, 불안, 공포를 냉철히 정관하면서 그것을 리얼하고 실감나게 묘사한 20세기 최대의 소설가이다. 그는 생전에 극히 제한된 일부에게 인정되다가 사후 그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Max Brod, 표현주의 작가이다)에 의해 유고(遺稿)가 발표되자 실존주의의 유행과 발맞추어 실존주의 문학의 원류로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어권이 아닌 프랑스, 영국, 미국 등지의 외국에서 문제가 되고 높이 평가되어 그의 문명이 일약 세계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다가 역수입이 되어 독일에서 정당한 평가받아 신진작가들에게 크게 어필 되었다. 지금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온 세계에서 무수한 카프카 관계의 연구서가 출판되고 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당시는 오스트리아와 헝거리 제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유태인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생활력이 강하고 아집이 세고 이해심이 부족하고 사나운 면이 있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학구적인 가계 출신으로서 선량하고 마음씨 고운 부드러운 여성이었다. 카프카는 아버지에 대해서 평생동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열등감을 가졌었다. 독일어로 초, 중 교육을 마친 다음 프라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다. 이 시대에 그는 친구인 막스 브로트를 알게 되었고, 문학에 심취되어 창작을 시작하였다. 막스 브로트와의 친교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고 우울했던 카프카를 문단에 끌어들였고, 카프카 사후(死後)에 유고(遺稿)를 발굴하고 지켜 전집을 출판하게 된다.

졸업 후에는 노동자 재해보험국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막스 브로트의 권유로 단편 『관찰 Betrachtung, 1912』, 『화부 Der Heizer, 1913』, 『판결 Das Urteil, 1916』 등을 발표하고, 이어 『변신 Verwandlung, 1916』을 발표하여 무질(Robert Musil), 슈테른하임(Carl Sternheim) 등의 일부 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가 폐병을 앓게 되었고, 1차 대전 중의 궁핍한 생활 때문에 병이 악화되어 1917년에 휴직하고 요양생활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많은 단편을 썼고, 그리고 파스칼(Blaise Pascal), 키에르케고르 (Soren Kierkegaard)를 숙독했다. 그 후 몇 번 연애를 했으나 병상의 악화로 1922년에 작품 『성 Das Schlo』을 집필하면서 퇴직하고 창작에 전념했다. 다음해 여행지에서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베를린(Berlin) 교외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비로소 수개월 동안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위압에서 벗어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병상이 악화되어 빈(Wien) 교외의 요양소에서 죽었다.

카프카의 짧은 생애에서 중요한 점은 프라하에서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나 독일어로 교육을 받은 서방적 유대인이었다는 카프카의 위치이다. 서방적 유대인은 동방적 유대인처럼 절망적 가난에 허덕이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대교에서 혐오하는 유럽의 개인주의 영향 아래 있었다. 소수의 독일인이 지배하던 프라하에서 유대인은 경시되었다. 그 당시 민족 해방을 주장하던 체코인들도 독일 교육을 받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또한 노동자 재해보험협회의 직원으로서 시민 계급도 아니었고 상인의 아들로써 노동자 계급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카프카는 조국이라든가 공동 사회라는 관념보다는 이방인, 국외자라는 관념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는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의 작품은 평범한 일상적 경험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문학

카프카의 문학은 독자(獨自)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카프카의 작품은 가운데 부분이 공백인 채 남겨진 그림과 같다는 점이다. 무엇 하나 해결되지도 못하고, 모두가 좌절로 끝나버린 문학이 어떻게 가운데 부분을 그릴 수 있겠는가. 최대의 장편소설 "성"이 끝내 미완성으로 끝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막스 브로트는 "성"의 초판(현행판 제18장 중간까지)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브로트가 이 소설은 어떻게 끝나느냐고 묻자 카프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측량사 K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만족을 얻는다. 그는 싸움의 손을 멈추지 않지만 마침내 힘이 다해 죽는다. 임종의 자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왔을 때 마침 성에서 마을에 살고 싶다는 K의 법적 요구는 인가되지 않으나 어떤 종류의 부수적 사정을 참작하여 마을에서 살며 일할 것을 허가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라고. 브로트의 보고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카프카에 있어 그러한 소설적 대단원은 자기 기만이었으리라고 믿는다. "성"을 읽는 모든 독자는 이 소설에 결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니 결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이러한 결여성이야 말로 카프카 문학의 본질이다. 그의 작품이 독자의 갖가지 해석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해석을 강요하는 것도 이 결여성 때문이다. 카프카의 생애는 약간의 연애 사건을 제외하면 겉으로는 아무런 파란도 없는 평범한 일생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불행한 별 아래 태어난 고뇌의 41년이었다.

"나는 멋진 상처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나오는 몸치장의 전부였다." 고 말한 단편 "시골의사"속의 말은 그대로 카프카 자신에게 들어맞는다. 문학도 결국 이 쓰라린 상처를 낫게 하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이 나찌스의 손에 불태워지기 전에 그 자신이 그 소각을 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상처는 깊이 시대의 상흔(傷痕)과 이어지고 있다. "나는 자기 시대의 부정적인 면을 힘차게 끌어안고 말았다. 어쨌든 자기의 시대는 자기에게 가장 친근한 것이고 내게 이 시대의 싸울 권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그것을 대표할 권리는 있다. 나는 약간의 긍정면에 또 긍정으로 옮길 만한 극단적인 부정면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키에르케고르 같이 이미 쇠약해져 가는 그리스도교에 인도되어 온 것도 아니고 시오니스트들처럼 시대의 바람에 펄럭이는 유대교의 기도에 매달려 온 것도 아니다. 나는 종말이든가 아니면 발단(發端)이다."

이것은 유고(遺稿)에서 발견된 카프카 수기의 일절이다. 실로 그는 시대의 부정면을 대표하는 것에 -"시골의사"처럼 자기의 몸으로 환자(시대)의 상처 구멍의 바람막이가 되는데- 평생을 바친 작가였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 그는 근면한 세일즈맨으로서 한 집안의 경제적 기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의 선량한 뇌리에 문득 "식구들만 아니라면 이런 일은 이제 집어치웠으면"하는 상념이 번득이자 단순히 그것만으로 갈색 벌레로 변신돼 버린다. 고레고리는 가정의 어진 아들이며 사회의 모범적 시민이었는데 이것은 그의 존재가 가족을 위한, 사회를 위한 존재이고,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 "자신에 관계하는 바의 관계"이어야 하는 그가 자기 이외의 것에 관계하는 바의 관계에 떨어져 버리고 있었다는 것. 자기 본래성에서 하이데거의 소위 "세상인(Das Mann)"의 세계에 퇴락(頹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제까지 고레고르는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인간의 본래성을 포기함으로써 "세계"의 모범적 시민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악마의 유혹 때문이었는지 그는 이 퇴락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본래성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카프카가 다른 작품에서 되풀이하여 그렸듯 현대사회는 그 경제적 기구(機構)의 불가피한 귀결(歸結)로서 인간을 이른바 마르크스가 말한 "자기 소외(疎外)"의 상태로 빠뜨렸다. 즉 인간을 사회라는 거대한 메카니즘 속의 한낱 톱니바퀴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철저하게 기능화하고, 추상화하고, 비인간화시켜 버렸다. 인간이란 이미 한 개의 톱니바퀴 직업이라는 형태로 떠맡겨진 하나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아들의 변신 뒤에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집에서 은행 사환의 제복을 입은 채 밤마다 거실 의자에 기대앉아 잔다. 돼지처럼 잠에 취한 금단추의 제복을 입은, 아니 제복 속에 갇혀진 이 추악한 살덩어리. 이것이 바로 자기 소외의 현대인의 모습. 직업이 삼켜 버린 인간의 모습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는 "내 집"에서, 사복(私服)을 입은 그 자신이고 사인(私人)이며 인간일 것을 허락 받지 못한다. 잠에 빠졌을 때도 그는 은행 사환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이런 직업적 기능이 아닌 것은, 적어도 "이고자" 않는 것은 언제나 주인공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주인공은 사회에서 쫓겨나고 세계에 소속되지 못한다는 비극을 부른다. 그레고르 잠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벌레"란, 자신에 눈뜸으로써 직업이 유일한 존재형식이 라는 사회의 율법을 어긴 인간이 벌레처럼 쓸려 가는 "유형지"인 것이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지점(地點)에서, 이 "유형지"의 제로 지점에서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애급의 땅. 그 노예의 집에서 어떻게 탈출하고 어떻게 존재의 수치(數値)를 획득하는 것일까. 카프카의 모든 작품은 이 중심 테마를 에워싸고 펼쳐지는 하나의 "출애급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내세(來世)와 부활이 없는 좌절(挫折)로 끝나는 "출애급기"인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좌절로 끝나는 것일까. 이방인으로서는 세계에 소속되는 조건인 율법에 다가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 세계의 주민에게는 분명한 약속이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전혀 모르는 불가해(不可解)한 규칙의 체계로 비친다. 더구나 이 규칙은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은 강제 명령으로 보인다.

카프카의 작품에 자주 나오는 꽤 까다로운 관료기관 - 가령 "심판"의 재판소나 "성"의 사무국 등 - 의 의미가 밝혀진다. 그것은 이방인의 눈에 강제 명령 체계로 비쳐진 세계 율법의 모습이다. 이방인은 합리적 이해라는 길을 통해 율법에다가 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 통용되는 습관적 약속인 율법은 결코 합리적인 보편 타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의 합리주의"는 그것을 불합리한 체계로 볼 수밖에 없다. 즉 합리적 이해가 정확하게 되고 철저하게 되면 될수록 율법은 그에게서 멀어진다. 마치 현미경으로 대상을 붙잡을 때 확대율이 커져서 관찰이 정확하게 되면 될수록 대상의 현실감이 기묘하게 엷어져 가는 것처럼 영원한 도착 존재인 이방인은 마침내 자기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의 죄를 찾아 헤맨다. 다시 말해 벌(세계에 소속하지 못했다는)이 먼저 있고 그 뒤를 죄가 따르는 것이다.

"심판"은 죄가 벌의 뒤를 쫓는 이야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요제프 K는 갖은 수단을 써서 자기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죄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데서 죄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율법을. 규범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실로 규범을 모른다는 그것이 그의 "원죄"였다. 프란쯔라는 인물이 그 동료에게 말하는 "여봐 윌리엄. 그는 규범을 모른다고 자백한 주제에 죄가 없다니. 흥" 이라는 말속에 이방인의 비극의 전부가 나타나 있다. 카프카의 에로티스즘을 보면 "심판"에서, "성"에서 주인공과 여인의 관계는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마디 없이 처음부터 성적행위가 시작된다. "죄와 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보통 남녀 관계가 거치는 순서와는 정반대의 길을 밟는다. 도대체 이와 같은 관계는 어떤 뜻을 가지는 것일까. 인간과 인간의 결합은 중세에 있어서는 신과 교회에 의해 굳게 맺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는 신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결합 관계를 허물어뜨렸다. 근대 시민 사회는 계약으로 성립되는 사회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계약은 인간의 참다운 결합을 낳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남겨진 유일한 결합 수단으로 에로스(性愛)가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19세기를 절정으로 하는 근대 문학이 모두 연애 문학인 까닭도 이 점에 있다.

카프카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이런 근대적 에로티시즘의 마지막의. 그리고 가장 철저한 형태이다. 게다가 여기서도 여성은 철저하게 단순한 기능(機能)으로만 그려져 있다. 여성의 기능은 이른바 "관계한다"는 표현에 나타나 있듯이 "관계" 그 자체이다. 이방인은 여성과 관계함으로써 비록 덧없는 성적 결합의 순간만이라도 세계와의 관계를 얻고자 한다. "그는 아르키메데스의 일점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스스로 이익에 반대되게 이용했다. 틀림없이 그런 조건 아래서밖에 그것을 찾아낼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작품세계

* 단식 수도자 Ein Hungerkunstler 1912, 1922

이것은 관중에게 자신의 단식술을 보여주는 광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관중들은 관심은 처음에는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밤에도 구경꾼이 몰려든다. 40일 후 흥행주는 단식 수도자에게 다시 음식을 조금 먹을 것을 설득한다. 그리고 관중들과 함께 단식의 성공적인 완료를 즐기는 작은 축제를 벌인다. 그러나 몇 년 후 카프카의 작품이 늘 그렇듯이 상황이 급변한다. 단식가에 대한 관중의 흥미는 점점 줄어들어 이 사람은 어느 곡마단에 취직을 하게 되고 여기서 동물우리 옆방 하나를 배정 받는다. 얼마 후 관리인이 이 광대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단식일을 기록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계속 단식을 한다. 죽이 직전에 그는 자신이 광적으로 단식할 이유를 털어놓는다. 즉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빈 우리는 젊고 싱싱한 표범으로 채워진다.

이 작품은 세계 속에서의 예술의 문제 또는 수도자의 존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로서는 이 당시 결핵의 발병과 세 번째의 파혼, 아버지와의 위기, 밀레나와의 체험 등 다양한 삶의 고통을 겪고 나서 죽음을 예감하던 시기였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예술적 삶에 대한 자기확인을 『단식 수도자』로 표현한 것이다. 대체로 그의 말년의 분위기는 절망이라든가 비극성, 문학적 생산이나 외부사회에서의 궁극적인 좌절감 등이 구조를 이룬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작품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단식은 예술의 허구적 변형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이 늘 문학적 생산에 회의를 느꼈고 외부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는 내면세계의 문학을 고집한 것처럼 주인공의 단식술도 동일한 특성을 보여준다. 우선 그것은 무엇을 완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굶는 비생산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과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먹지 못하는 무능력,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창살 속의 좁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부자유, 바로 이것이 단식 수도자가 그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가치이다.

그 자신만이 갖추고 있는 이러한 단식술은 시초에는 많은 관중이 몰려듦으로써 수도자의 내면적 세계가 사회와 커뮤티케이션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늘 재미를 찾는 관중의 일시적인 변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점점 줄어들어 나중에는 곡마단으로 쫓겨가고 거기서도 관중의 흥미는 동물들에게로 향하게 되어 결국 무관심 속에 죽는 것이다. 즉, 수도자의 궁극적인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다음에 보듯이 그가 스스로 좋아서 하는 단식의 이유를 관중과 흥행주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0일이 된 지금에 왜 단식을 중단해야 하는가. 앞으로 얼마든지 더 견뎌낼 수 있는데, 왜 지금 그만둬야 한단 말인가. 좀더 계속하려는 단식의 영광을 왜 박탈하겠다는 건가. 한번은 어떤 인정 많은 사람이 나타나 광대가 우울해 하는 원인은 아마 단식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하려 했다. 그때는 마침 단식이 절정을 향해 가는 때였다. 수도자는 그 설명에 갑자기 화를 내며 야수처럼 우리의 창살을 요란하게 흔들어 구경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벌써 흥행주가 즐겨 쓰는 해결책이 있었다. 흥행주는 관중 앞에 나가서 수도자를 위해 변명을 하는 것이었다. "배불리 먹는 여러분께서는 아마 이해하기 곤란하겠지만 단식을 하던 사람이 성을 내기가 쉽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신다면 광대의 난폭한 행위를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단식 수도자 자신이 스스로 만족을 찾아 선택한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단식에 대해 그 자신만이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관객이라고 할 수 있다. 40일이라고 하는 한계가 흥행주가 최대의 흥행효과를 위해 임의로 정한 기한이지 단식가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더우이 그는 40일이 경과하면 관중들 앞에서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새로운 단식에 도전한다는 우스꽝스런 의식을 위해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식사를 해야 한다. 그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관중 중에 누구도 없고, 둘도 없는 동료인 흥행주도 모른다. 그 결과 그는 항상 서글픈 심정이고, 그의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기에 더 우울해지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의 단식은 구미에 맞는 제대로 된 음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음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삶을 지탱해 갈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작가적 환경으로 다시 눈을 돌릴 때 자신의 문학적 삶이 외부세계의 생존과는 양립될 수 없다는 카프카의 자기인식과 유사하다. 공동체와의 소통의 수단으로, 동시에 영위되지 못한 삶의 대체물로서 그의 문학은 아버지에게 끝까지 수용되지 못했고, 꿈 같은 내면의 기록이 사회에 이해되리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유고를 파기해 달라는 유언도 나온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 세상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주인공의 인식은 세계와 대치된 가운데 자신의 카프카의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가 앓은 후두결핵은 실제로 그에게 아사선고를 내린 방이다. 그가 키얼링의 요양소에 있을 때 『단식 수도자』의 교정을 봤다는 사실은 수도자의 소외를 단식이라는 형태로 허구화시켰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카프카의 말년, 요양소에서 도라 디아만트와 더불어 그에게 헌신적 도움을 준 로버트 클로크슈토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증언은 이 작품에 임하는 작가의 필사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이 무렵의 카프카의 육체적인 상태나, 말 그대로 굶어 죽은 전반적인 상황은 정말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는 교정을 끝냈는데, 이것은 끔찍한 정도의 정신적인 긴장을 주는 작업으로서 감동적인 정신과의 재회였다. 이때 그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카프카에게서 이런 식의 감정표현을 경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늘 초인간적인 극기의 힘을 지녔던 것이다. 이 같은 증언은 『단식 수도자』에 스며 있는 작가의 강한 자기투영을 직감케 해준다. 그는 그로테스크한 아이러니의 수단을 자신의 예술성에 의문을 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의 젊은 표범의 모습은 외부세계의 삶이 최후의 승리를 차지한다는 다른 작품들의 자취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표범은 활동적인 사회적 삶의 요구를 대표하고 있다. 단식술을 지닌 수도자는 표범에 맞서 주장할 수 있는 바가 없다. 표범은 '아무리 우둔한 인간이라도 밝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즐비한 이빨 사이에라도 자유가 숨겨져 있는 듯한' 동시에 '생에 대한 환희가 목구멍으로부터 강한 열기를 내뿜는' 그 자태로부터 관객들의 환호를 살 만한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정상적인 삶의 요구가 자기 파괴적인 단식수도자 앞에서 무제한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관객의 반응을 전적으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이들 집단은 다른 한편으로 비정하고 만족만 추구하는 것으로 천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어느 쪽이 정당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예술과 활력적 삶의 요구 사이에서 카프카는 분명한 결정을 유보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언어기능을 상실한 『변신 Die Verwandlung』의 그레고르처럼 외부환경과 전혀 소통되지 못하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예술에 대한 유일한 관객으로서 존재하는 단식가는 소외된 개체의 숙명을 조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와의 고통이 단절된 가운데 그 사회와 투쟁해야 하는 소외된 개체의 실존은 출구부재의 숙명적 순환으로 암시된다 할 것이다.


* 변신 Die Verwandlung, 1912)

이 작품은 『선고』와 달리 여러 차례 개작을 거듭한 끝에 완성된 것이고, 작가 자신도 "읽어줄 수 없는" 결말이라는 말로 은연중 불만을 내비치고 있기도 하지만 유언에서 폐기 제외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애착을 느낀 것도 같다. 젊은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칙한 벌레로 변신한 것을 발견했다. 출근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가족들은 문을 두드리고 회사의 지배인은 왜 그레고르가 출근하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온다. 불쾌해진 그는 그레고르의 수상쩍은 행동을 회사문제와 연관시켜 의심하고는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레고르는 안으로 잠긴 문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 후 힘들여 문을 열고 나간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지배인은 혼비백산해 도망치고 부모는 충격을 받고 당황해 한다. 아버지는 위협적인 동작으로 벌레를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는데, 이때 그레고르는 큰 충격으로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린다.

주인공은 문틈으로 가족들을 관찰한다. 그의 모습에 질린 누이동생은 공포를 느끼며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지만 그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2주일 후 어머니가 그의 방 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벌레의 형상에 놀라 실신하고 만다. 한번은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 가자 아버지는 분노한 나머지 벌레에게 사과를 던져 심한 사어를 입힌다. 그레고르가 더 이 상 부양의 능력이 없자 가족들은 스스로 생활대책을 강구한다. 아버지는 은행에 일자리를 마련하고 방을 하나 비워 하숙인을 받아들인다. 어느 날 저녁 누이동생이 저녁식사 후에 하숙인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 음악에 이끌린 주인공은 거실로 기어 들어간다. 하숙인들은 벌레의 출현에 깜짝 놀라며 하숙을 해약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누이동생은 벌레를 더 이상 오빠로 간주할 수 없다며 벌레를 없앨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하다. 주인공은 힘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죽는다. 하녀가 벌레의 시체를 치우고 한결 가벼워진 가족은 행복한 기분으로 휴일에 소풍을 간다.

그레고르 잠자의 운명은 이 작품에 앞서 1970년에 완성된『시골에서 결혼 준비』에 나오는 라반의 꿈을 기억나게 해 준다. 라반은 여기서 자신의 옷을 입은 육체를 보내 세상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신 자신은 벌레의 형상으로 남아 침대에서 쉬고자 하는데, 바로 순수자아의 의지와 달리 외부세계에 불과한 벌레 같은 존재라는 자의식이 두 작품에 공통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독자도 변신의 이유를 모른다. 다 만, 육체와 달리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유지하는 그레고르의 사고를 통해 전반적인 삶의 환경이 드러나는 가운데 어렴풋이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삶은 비참한 것이고, 또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불만이 있음이 밝혀진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낯선 상황의 발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원인분석을 해 보는데, 그의 일상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늘 반기지도 않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세일즈맨이다. 나는 왜 하필이면 이런 힘든 직업을 택했을까? 날이면 날마다 출장을 다녀야 한다. 본점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업무상의 긴장감이 훨씬 심하다. 그밖에 여행의 괴로움, 열차시간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하고 조잡한 식사, 항상 바뀌어 결코 지속되지도 못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다.

그레고르의 하루하루가 늘 피곤하고 불안에 쫓기는 것임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숙고로 인해 밝혀진다. 게다가 그는 가족에 대한 부양자로서 가족은 선량한 그를 이용하는 생활구조이다. 이러한 일상에서 변신은 그레고르로 하여금 억눌러 온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계기라는 측면이 있다. 그는 사회 속에서의 온갖 인간관계에서 탈피함으로써 자신에게 늘 긴장된 업무를 강요하는 사회권력에 맞서고, 직장상사와 아버지에게 맞선다는 은밀한 소망을 간직해 왔는데, 이것은 변신을 통해 그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외부세계에 대 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도전적인 잠재의식으로서 변신은 그레고르에게 노예 같은 생활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역할은 뒤바뀌어 가족은 생활전선에 나가야 하고 그는 기생적인 생존방식으로 쉬는 위치에 놓인다고 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가족은 그를 없어져 야 할 무용지물이라고 여기게 된다. 가족의 입장은 사실상의 사형선고라고 볼 수도 있을 누이동생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대변되고 있다. "내쫓아야 해요" 누이동생이 외쳤다. "그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그 레고르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누이동생은 지금까지 그레고르가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한 인물이고,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후원으로 음악학교에 진학시키려는 계획까지 갖고 있었는데 그녀로부터 가장 차갑게 따돌림당하는 현실이 노출된다. 전반적인 상황을 검토해 본 그레고르는 자신의 기생적 존재방식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들을 원망함이 없이 화해의 감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과 공격으로 생긴 상처가 점차 확대된 외부적인 요인도 없지 않지만, 죽음은 그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인상이 강하다. 그 레고르가 죽는 대목에서는 평화적 분위기마저 감돈다. 또한 마음이 느긋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전신이 아팠지만 아픈 것이 점점 가라앉아 머지않아서 완전히 가라앉고 결국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오래 전에 등 에 박혀 썩은 사과는 부드러운 먼지에 싸여 느끼지 않게 되었다. 수없는 동정과 애정을 갖고 그는 가족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누이동생의 의견보다 훨씬 더 절실했을 것이다. 교회의 탑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그처럼 허전하고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가 자기도 모르게 수그러지고 콧구멍으로부터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나왔다.

죽음에 대한 그레고르의 동의는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 야기된 자신의 고립의 의지와 저항의 소망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카프카의 자아분열이라는 공식에 대입해 보면, 외부사회에서 지치고 소외된 일상적 삶을 도피하는 방법으로서 의 변신은 실패한 것이고, 죽음과 타협함으로써 순수영역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타나토스의 욕망이 발동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신이라는 가상의 전제 앞에서 가족도 유죄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비인간적인 속성 은 이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아들의 변신을 계기로 그 비천한 본질이 폭로되며, 벌레를 치 운 후 딸의 젊은 육체에서 미래의 희망을 기대하며 소풍을 떠나는 결말은 벌레의 비인간적 인 육체에 못지 않게 비인간적인 존재방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변신이라는 환상적 설정을 놓고 이것이 외형의 사건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 면의 심리묘사'라는 해석도 있고, 병든 주인공의 망상으로서 '꿈으로 왜곡된 고독'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카프카의 모든 작품은 꿈의 묘사이고, 내면의 심리나 망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카프카 의 환상적 모티프를 두고 '반동화(反童話)'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마법의 주문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인 반면, 동화와 달리 끝까지 이 마법에서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적된 주장이다. 문제는 불가사의 리얼리티를 찾아내기 위해 동원하는 카프카 고유의 묘사 수 단, 즉 현실적 언어와 환상적 형상을 합성시켜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려는 형상화의 스타일이다. 변신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경쟁사회에서 쫓기고 소외된 생존방식이 각성되는 것이고, 인간 내면의 비인간적인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동시에 작품의 말미에서 더 이상 아버지나 어머니, 누이동생이 아니라 잠자씨, 잠자부인, 잠자양으로 표현되는 가족의 움직 임은 외부세계의 생존방식으로서의 삶이 궁극적인 승리를 차지한다는 강한 암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선고 Das Urteil, 1912

이 단편은 1912년에 완성되고 1913년에 발표되었는데, 카프카의 일기에 따르면 9월 22일 밤 10시부터 23일 새벽 6시에 걸쳐 단숨에 쓰여졌다고 한다. 앉아 있는 동안 뻣뻣해진 다리를 책상에서 빼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브로트에게 보내는 유서를 통해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작가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이' 마음에 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게오르크 벤데만은 젊은 상인으로서 3년 전부터 러시아에서 거주하고 있는 친구에 게 편지를 통해 자신이 유복한 집안의 딸인 프리다 브란덴펠트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 한다. 이어 편지 내용을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분명치 않은 비난 을 퍼붓는다. 아버지를 염려하는 게오르크는 그를 침대로 옮기고 이불을 덮어 준다. 이때 아버지는 거대한 형상을 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게오르크가 자 신과 멀리 떨어진 친구를 져버렸다는 일종의 논죄를 한다. 프리다와의 약혼이 자신과 죽은 어머니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이어 아버지는 아들에게 익사하라는 선고를 내린다. 게오르크는 비틀거리며 집을 나와 강으로 달려가서 물 속으로 뛰어든다. 일기에 의하면 이 글을 쓰면서 카프카는 브로트의 『아놀트 베어』, 또 자신이 이전에 일 기에 초고를 기록해 놓은 『도시의 세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 작품의 소재 원천을 밝힌 셈이다. 특히, 1911년에 기록된 『도시의 세계』는 『선고』를 집필하게 한 동기를 주는 듯한 줄거리로 되어 있다. 즉 주인공 오스카는 방탕한 생활로 부모를 서서히 파멸시킨다는 비난을 아버지로부터 받는데, 이것을 일종의 살인고발로 간주한다면 『선고』에서 아들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익사선고는 인과응보의 성격을 지닌다는 풀이도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이듬해인 1913년 일기에는 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 중요한 단서가 될 표현이 나온다. 내 경우에 대한 『선고』의 결과들, 이 이야기는 간접적으로 그녀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약혼녀 때문에 파멸한다. 여기서 그녀라는 것은 이 소설이 헌정된 펠리체 바우어를 말한다. 이 부분의 일기를 쓴 시점은 결혼을 놓고 상당한 고민을 거듭하던 때로서 펠리체와의 약혼, 혹은 결혼에 대해 작가 특유의 양가치적인 평가나 망설임의 고백이 소설로 형상화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 속의 약혼녀 프리다 브란덴펠트가 펠리체 바우어와 똑같은 F. B.의 두 음을 지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독자가 느끼는 최대의 의문은 게오르크 벤데만이 실제로 자신의 죄를 시인할 수 없다면 도대체 왜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자살하느냐 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대체로 서술시점의 기준이 되는 게오르크와 러시아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친구와 의 관계에서 그 해답을 읽어내고자 한다. 게오르크는 사업의 수완이 있고 사회에 적응력이 있는 성공한 인간인 데 비해 멀리 러시아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친구는 곤궁하고 병이 들었으며, 사업적인 성공도 모르고 게오르크의 결혼을 부러워하는 존재이다. 게다가 금욕적으로 살아가는 독신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친구의 정체를 좀더 가까이 관찰해 보도록 하자.

그는 집안살림에 불만을 품고 몇 해 전에 러시아로 가버린 그 친구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떤 사업을 경영해 처음에는 괜찮았던 모양이었으나, 수년 전부터 그의 귀향은 점점 드물어졌고 그때마다 고충을 털어놓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업이 기울어진 것 같았다. 이 친구는 쓸데없이 외국에서 죽도록 고생만 했고, 어린 시절부터 낯익은 그 얼굴에 이채로운 수염만이 거칠었으나 누린 안색은 무슨 병에라도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하는 폼으로 보아 그는 동향 사람들인 그 지방의 독일 사람들과 별로 연락도 없었다. 게 다가 토착민과의 접촉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는 결정적으로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확 실히 길을 잘못 든 사람, 누구나 동정은 하면서도 도와줄 수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도대체 뭐라고 편지를 쓴단 말인가. 친구의 묘사를 다소 길게 인용한 것은 이 인물이 본 작품의 해석에 열쇠가 되는 역할이라 고 보기 때문이다. 동시에 게오르크의 시점에서 보는 친구의 모습 역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문학을 지향하는 작가의 형상과 동일하다. 카프카 자신도 문학 작업에 확신을 갖지 못했듯이 이 친구는 '사업이 기울었고', '병에 걸린' 모습이며, 그가 고독한 환경에 있는 것과 같이 '접촉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고, 무엇보다 '독신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문학이 쓸쓸한 작업이듯이 그 친구 역시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쓸쓸히 생활하고 있다.

이 같은 친구의 존재와 시민적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게오르크의 관계는 결혼과 문학을 놓고 번민을 거듭한 작가의 두 가지 존재방식이 투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결혼은 외부세계적 삶의 형태이면서 따뜻하고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는 데 비해 문학의 길은 쓸쓸하고 곤궁한 독신자적인 삶의 방식인 것이다. 다만 문제는 두 가지 존재방식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인데, 익사선고를 통해 게오르크를 죽임으로써 외부세계 지향의 자아를 단죄하는 자의식이 엿보인다 할 것이다. 동시에 고독하고 곤궁한 독신자의 삶이지만 순수자인 친구는 살아남는다. 여기서 게오르크의 아버지는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와는 반대의 역할을 한다. 즉, 헤르만 카프카는 실제로 문학에 늘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여기서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친구를 지지하고 나중 에는 그 친구의 대리인 역할을 자처하기까지 함으로써 내면세계의 가치를 대변해 주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한편 게오르크가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행위는 아버지를 죽이려는 무의식적인 제스쳐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럼으로써 계획된 프리다와의 결혼을 성취하고 동시에 아버지의 지위로 올라서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친구를 지지하고 대변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보았을 때, 순수자아를 억누르고 일상적인 시민적 삶의 욕구를 성취하려는 분열된 자아의 의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게오르크 아버지의 형상화를 통해 평소 자신이 바라던 아버지 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항상 문학작업을 통해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게오르크의 존재방식을 향한 것이다. 게오르크의 아버지가 내리는 익사선고는 게오르크와 동시 에 시민적 존재방식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게오르크가 순순히 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 버지 및 작가적 존재인 친구와의 결속을 염원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분열된 자아로 보이는 친구와 달리 안정적 시민적 삶에 안주함으로써 고유한 본래의 소망을 벗어난 것에 자책하여 아버지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다. 시민적 존재에 대한 사형선고, 이것이 바로 펠리체와 결혼을 놓고 고민을 거듭한 작가가 예술적 소망을 통해 내리는 내면적 결정이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쳐졌고, 게오르크의 약혼녀 프리다 브란덴펠트가 바우어의 모델이라는 배경을 생각할 때 주인공에게 내려지는 익사선고는 펠리체와의 결혼에 대한 순 수자아의 단죄라는 해석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선고를 통해 러시아에 있는 또하나의 자아는 결혼으로 인해 예술적 존재가 침해받을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작가가 마 음에 들어한 전기적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선고』야말로 카프카의 문학적 명제를 가 장 핵심적으로 요약한 단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예술적 삶이 외부 세계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의 소외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의 에센스이기 때문이다.


* 성 Das Schlo, 1922

1926년 막스 브로트에 의해 발표된 이 소설은 『실종자』,『소송 Der Proze』과 더불어 흔히 '고독의 3부작'으로 불리우는 장편으로서 형식적으로는 미완성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완성작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겨울밤에 K.는 성에 소속된 한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의 여관에서 그는 베스트베스트 백작이 직접 자기를 측량기사로 초빙했다고 주장한다. 이튿날 아침 K.는 성으로 가려고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여관으로 돌아와 두 명의 조수를 만난다. 이어 전령인 바르나바스가 클람이라는 고관이 서명한 편지를 가지고 온다. 내용은 성 당국에서 그를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저녁 K.는 술집에서 프리다라는 여자를 만나는데 프리다는 클람의 애인으로서 K.에게 몸을 바친다. 이튿날 두 사람은 K.의 방에서 잠을 자며 보낸다.

도착한 지 사흘 후 마을의 면장을 만난 K.는 마을에서는 측량기사가 필요 없지만 학교의 사환으로 일하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말을 듣는다. 나흘 째 되는 날 K.는 술집에서 클람을 기다리다 소용이 없자 그에게 서면으로 만나자는 요청을 한다. 그리고 밤에는 학교에서 프리다와 함께 보낸다. 교사들과 논쟁을 벌인 다음 그는 두 조수를 해고시키고 바르나바스 집을 방문한다. 바르나바스의 누이인 올가는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녀의 동생인 아말리아가 성의 관리로부터 외설적인 제안을 받고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프리다는 K.가 배척받는 집안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그와 헤어지고 술집으로 돌아간다.

성의 서기인 에어랑거에게 가려던 K.는 문을 잘못 알고 뷔르겔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이 사람은 그가 채용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K.는 극심한 피곤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놓치고 만다. 에어랑거는 잠이 든 K.를 깨우고 클람을 생각해서 프리다를 놓아주라고 명령한다. 다음날 아침 K.는 하인들이 담당관리들에게 서류를 분배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목격한다. K.는 다음날까지 오랫동안 잠을 자고 하녀 페피는 자기 방에서 K.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 여기서 이 소설은 중단된다.

작품은 여기서 미완으로 끝나지만 카프카가 죽기 전에 대화를 통해 그의 작품 구상을 전해들은 브로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주인공 K.가 기력이 다하여 죽어갈 때, 성 당국으로부터 "마을에 거주하겠다는 K.의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 사정을 참작하여 그곳에 살면서 일하도록 해주겠다"는 내용이 전달되고, K.는 이 통지를 받은 다음 죽는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되는 흐름은 성의 신비스럽고 어두운 정체이다. K.가 아무리 백방으로 그곳에 도달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번번이 허사로 끝날 뿐이다. 이 같은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성은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K.의 시야에 전개되는 성과 마을의 모습은 마치 그와의 사이에 놓인 다리를 경계로 현실세계와 비현실의 세계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마을은 눈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성조차도 어두움과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때문에 커다란 성이 있음을 알려 주는 엷은 빛의 등불조차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K.는 한참동안 대로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희뿌연 허공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상은 그대로 현실화되어 나무다리를 통과해 건너간 마을에서 성의 정체를 밝히려고 K.의 노력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또한 동시에 성은 마을에서 움직이는 K.의 움직임이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통제할 정도의 차가운 객관적 현실로 그를 짓누르기도 한다. 『소송』에서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요제프 K.의 운명을 좌우하는 최고재판소처럼 성은 K.의 세계에서 도달 불가능한 초현실적 영역인 동시에 객관적인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작품 서두에는 작가적인 배경과 관련해 성이 상징하는 바를 암시해 주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 K.는 도착 이튿날 성을 관찰하는데 그것의 중심부에 있는 첨탑 둘레의 흉벽은 다음가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발코니 모양으로 생긴 의 끝에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흉벽이 달려 있어서 이것이 겁을 먹거나 또는 버릇없는 어린애 손으로 그려진 것 같이 불확실하고도 불규칙적으로 부서지듯이 맑은 하늘에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법의 제재에 의하여 집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떨어져 잇는 방에 갇혀서 우울해 하는 거주자가 자기의 몸을 밝은 세상에 내놓기 위하여 지붕을 뚫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모습과도 같았다. 첨탑 주위의 '겁을 먹은' 어린애라는 표현이나 '우울해 하는 거주자', '구석진 방의 거주자' 등의 의인화는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를 상기시켜 준다.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관료의 세계라고 할 성은 확실히 헤르만 카프카의 권위적인 이미지와 유사하다. 심지어 벤야민 같은 사람은 성이 아버지의 형상일 뿐 아니라 부패한 아버지 세계의 상징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개인적인 체험의 형상화가 아니다. 카프카에게 있어 부자갈등의 모티프는 세계의 원칙으로 화해 거대한 부권지배의 체계나 불합리한 권력기구에 대한 체험으로 확장되는 특성을 갖는다. 비록 개인적 모델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이것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인을 지배하는 권력 메카니즘의 본질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소설은 개인적 갈등을 초월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후세대의 인류에게 세계의 숨겨진 모습을 체험하는 감동을 주는 것이다.

성은 K.와 마을 주민들에게 내외적으로 종속시켜 이들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전체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성 주인인 백작의 허락 없이는 마을에 머물 수도 없고, 모든 것은 서의 소유이며 일상의 삶을 지배하면서도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특성은 바르나바스 가족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관리의 추악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삶을 묵묵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은 부패성과 동시에 불투명한 속성으로 K.를 압도한다. 마을에서 성으로 가는 길은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닌 형태로 K.를 지치게 한다. 마을에서도 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의 특성은 고관인 클람을 통해 가장 명시적으로 노출된다. 그는 천변만화 하는 프로테우스적 존재라고 엠리히도 지적했지만 마을에 올 때와 갈 때가 다르고 맥주를 마시기 전과 마시고 난 후가 다르며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혼자 있을 때와 대화중일 때가 다른 변화무쌍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올가는 말한다. K.는 클람의 전 애인인 프리다와 정사를 벌이는데 클람의 세력은 공사에 구분이 없어서 K.의 침실에까지 그의 세력을 미치는 초월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마을사람들과도 면담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술집 여주인의 말은 그와의 면담을 원하는 K.의 의지를 좌절시키기에 족한 것이다. 클람의 존재는 K.에게 불운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바르나바스를 통해 편지를 보냄으로써 늘 K.를 감시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클람의 정체는 술집 여주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K.와는 불가분의 숙명적 관계임이 드러난다. 클람이 없었더라면 당신이 불행해지는 일도 없었으며 일이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아서 우두커니 서 있지 않아도 됐고, 또한 클람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인생에 관해서 전혀 무관심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모든 것을 보아도 충분히 클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당신은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또한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클람은 당신의 병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불행해지는 일"이란 말을 술집 여주인의 견해로서 이 같은 그녀의 주장은 클람의 애인 프리다와 결혼하려는 K.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성 당국과 접촉하려는 최대의 목표 앞에서 여자에게 관심을 돌리는 K.의 행위에서는 에로스적 욕망 속에서 자기파괴를 실현하는 카프카 인물들의 특성이 반복되고 있다. 동시에 프리다를 이용해 성에 접근하려는 의도를 보임으로써 애정과는 무관하게 여자를 물화 시키는 자세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투명하면서도 일체의 삶을 지배하는 성의 모습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클람의 분위기를 통해 전달된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것은 K.에게도 적용되는 특징이다. 그는 성을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영역으로 인식하면서도 나는 투쟁하기 위해 여기 왔다고 말함으로써 성을 투쟁 대상인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성』의 전편을 통해 성과 접촉하여 측량사로서 채용되려는 끈질긴 의지를 보이는 동시에 그는 이미 3장에서 프리다를 안 직후 그녀에게 "클람을 버리고 내 애인이 되어주시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몰려오는 적 앞에 노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여자는 적과의 투쟁을 위한 선전포고의 기능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권력자 클람으로부터 프리다를 탈취함으로써 에로스를 투쟁의 방편으로 누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K.의 투쟁이 지닌 이중성은 성에 도달하려는 열망 외에 성에 종속되지 않고 항상 자유인으로 있기를 원하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성』의 몽상적 흐름을 본 독자가 느끼는 의문은 도대체 성은 실체로 존재하는 대상인가, K.는 정말 측량기사로 초대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성의 정체는 K.가 접하는 여러 가지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호한 본질을 보여준다. K. 자신의 체험이나 그 체험에 대한 해석, 다른 쪽의 정보나 이에 대한 해석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일례로 클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면장에 의해 당신이 채용되었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그 가치가 의문시되고, 이런 견해는 다시 술집 여주인에 의해 무시된다. 더구나 K.는 뭐든지 오해하는 버릇을 지닌 인물임으로 그의 시각으로 독자에게 비쳐지는 성의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K.가 측량기사로 초대되었다는 증거도 그 자신의 주장 외에는 분명하지 않다. 과거부터 같이 일하던 그의 조수들이 클람으로부터 파견된 것이 틀림없다는 프리다의 주장에 K.가 반박하지 못하는 것도 서에 대한 K.의 이중적인 태도와 더불어 성의 초월적인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텍스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볼 때 성은 K.의 자의식의 반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부친 콤플렉스에서 각인된 작가의 동경과 불안의 산물로 여겨진다. 동시에 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형상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성에 대한 K.의 투쟁이 개인의 소외를 강요하는 외부세계에서 자유로운 존재의 가능성 여부를 진단한 것이라면 성의 기형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비밀을 찾는 K.의 시도도 좌절된다는 작품구조는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비관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 소송 Der Proze, 1915

카프카는 펠리체와 파혼하고 난 직후에『소송 Der Proze』의 집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그의 사후인 1925년에 가서 막스 브로트에 의해 발표된 장편이다. 은행지배인 유제프 K.는 30회 생일날 아침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체포당한다. 체포는 되었지만 일상생활은 계속 이어가는 형태였다. 그는 체포 시에 방이 어지렵혀진 것을 옆방의 뷔르스트너 양에게 사과하며 공격적인 애무를 한다. 그러나 법정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법정에 가서는 자신을 보호하며 법정을 마음껏 야유한다. 법정은 온갖 불투명한 것 투성이어서 몇 시에 오라는 것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막상 찾아가 보아도 어둡고 답답한 것이 마치 미로와 같다. 그는 체포당국과 접촉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패하고 만다. 또한 소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법정에 관계되는 여인들, 법정소속 화가, 변호사, 교도신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31회생일 전날 밤에 찾아온 처형관에게 채석장으로 끌려가 아무런 절차도 없이 살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제기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요제프 K.는 유죄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죄를 부인한다. 오히려 법정에 가서는 "죄는 이 조직과 고관들에게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죄를 부인하면 할 수록 그는 죄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시인하는 길만이 소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즉 부인유죄, 시인무죄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이다. 여기서 법정세계의 인물들 중 누구에 의해서도 유죄의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오직 주인공 자신의 법에 대한 '무지'와 '죄의 부인'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그가 유죄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는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동정하던 감시인들을 '개'라고 칭하며, 어머니를 벌써 몇 년째 찾아보지도 않았고, 직장으로 찾아온 사촌 여동생도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송을 위해 뇌물로 매수를 하려는 의도까지 갖고 있다.

하지만 의식 속의 행동과는 달리 무의식적인 반응에서는 죄를 부인하지 못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는 아는 검사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기피하고, 검사와의 요트놀이도 거절하며, 마지막 장에서 처형관들이 방문할 때는 미리 예고도 없었는 데도 기다린 듯이 검은 예복을 입고 대기하는 형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일기에서 『실종자』의 카를 로스만을 '무죄인'이라고 표현한 데 비해 요제프 K.는 '유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펠리체와의 약혼 직후 쓰여졌고 카프카가 파혼에 대해 죄의식을 느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요제프 K.가 31회생일 전날 파혼을 결심하며 파혼이 이루어진 베를린의 호텔방을 '법정'이라고까지 표현한 바 있다. 요컨대 순수세계를 지키기 위해 결혼을 포기했지만 이것은 동시에 외부세계에 대한, 즉 소속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죄의식을 낳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 자신이 언급하는 요제프 K.의 '유죄', 작품 내에서 거론되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죄가 자아의 분열에 의한 내면의 반영에 기인한다고 할 때, 관심은 그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법정의 정체로 향하게 된다. 우선 법정은 정체가 불투명하고, 확인되는 면모는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K.를 감시하는 감시인들은 그의 밥을 먹어치우고 내의를 훔쳤다는 이유로 태형을 당하며, K.가 확인한 법전은 포르노 사진첩으로 밝혀진다. 또 피고인 K.자신의 집무실보다 훨씬 초라한 판사의 방은 어두컴컴한 지붕 밑의 다락방에 위치해 있고, 변화사의 방은 이보다 더 비참해서 바다그이 구멍으로 사람의 발이 빠지면 아래층의 천정으로 그 발이 보일 정도이다. 카프카가 이 작품을 쓴 후에 친구들 앞에서 1장을 낭독했을 때, 모두들 웃음을 참지 못했으며 카프카 자신도 너무 웃어서 낭독을 계속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브로트의 증언을 보면 『소송』에서의 희극성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문제는 이 희극성이 웃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카프카에게서의 희극성은 '검은 유머'라는 지적대로 갑자기 웃음을 정지시키고 싸늘한 침묵이나 잔인한 공포를 유발하는데, 법정세계 역시 우스꽝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시종 숨막힐 정도로 피고를 조여 오는 잔인한 본질을 노출한다. 피고에게 재판시기나 장소도 알려 주지 않는 불친절 외에도 현기증을 안겨 주며, 결정적인 권한이 있는 최고 재판소는 일체의 접근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이런 법정에서 피고가 느끼는 것은 '배멀리'와 도저히 빠져 나갈 길이 없다는 축구부재의 확인이다.

그러므로'검은 유머'는 웃음이 아니라 웃음을 차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변신 Die Verwand lung』에서 지배인이 도망치는 꼴은 우습고 권력층이라는 점에서 후련하기까지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그레고르와 그의 수입에 의존하는 가족의 미래가 암담해지는 것처럼 법정의 특성 하나하나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끔찍한 속성을 보여준다. "카프카에서의 유머는 웃어야 할 지 진지하게 있어야 할 지 모르게 한다"는 엠리히(Wihelm Emrich)의 주장대로 법정의 모습은 끔찍하다는 점에서 희극성이 부인된다. 그렇다고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외관에서 비극성이 부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K.를 체포하는 법정당국의 정체는 불투명한 가운데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죄를 다룰 자격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외관을 지니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권력과 잔인함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접근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피고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K.가 아무리 시도를 해봐도 대화는 커뮤티케이션이 아니라 그것의 단절에 기여할 뿐이다.

출구부재의 환경은 법정뿐만 아니라 K.자신의 내면에서도 기인하고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을 체포한 당국과 투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국에 도움을 받으려고 함으로써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의식적으로는 무죄라고 주장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죄인처럼 행동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에서 그의 윤리상의 죄가 드러나는 사실을 볼 때, 정상을 벗어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법정 역시 실제의 법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사회 속에 투영된, 자신의 생존방식을 보는 K.의 자의식의 반영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출구부재의 환경은 법정이 지닌 냉혹함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에서도 불기피한 일면이 있는 것이다.

윤리적 죄는 K.의 퍼스낼리티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카프카는 아포리즘에서 인간의 으뜸가는 죄를 '성급함'과 '태만'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K.가 법정과 투쟁하면서 보여주는 모습에서는 부단히 성급한 태도와 태만한 자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법정을 자기 추측대로 찾아가는 것이나 변호사와 해약, 소송이 진행되는데도 여자들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 은행장 대리와의 관계, 상인 블로크를 대하는 태도, 모친에 대한 냉담 등 그의 모든 관행은 카프카 자신이 말한 으뜸가는 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 사회에 보여준 성급함은 바로 그 사회에 의해 모든 재판절차가 무시된 채 그를 처형하는 성급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본 작품의 해석을 둘러싼 핵심은 여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그는 시종일관 여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데, 카프카의 모든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진정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충동적이다. 물론 창녀의 속성을 지닌 여자들 쪽에서 유혹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의 성애는 공격적이며 독신자답게 결혼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자들로부터 성적충동을 받고 벌이는 성애 외에 그가 여자들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은 애정이 아니라 소송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것들이다. 뷔르스터너양이나 레니와의 관계도 그녀들이 소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설 때는 주저 없이 버리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K.의 성애는 애정과는 유리된 탈인간화이고, 여자를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 물화 시키는 속성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법정사환의 부인을 빼앗겼을 때는 법정과의 투쟁에서 맞이한 '최초의 명백한 패배'로 인식하는 데서 이런 자취는 발견된다.

K.의 성애에는 육체의 소멸을 암시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가령 엠리히는 뷔르스트너양의 '식도'에 키스한 K.가 식도를 잡힌 채 칼을 맞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다음은 K.가 1장에서 뷔르스트너양과 연출하는 성애장면과 10장에서 처형되는 장면이다. "알았어요, 가요"하고 K.는 말하더니 뒤따라가서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그녀의 입과 얼굴에다 마구 키스를 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른 짐승이 마침내 발견한 샘물에 혀를 빼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식도 부위의 목에다 키스를 하고 오랫동안 입술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한 남자의 손이 K.의 식도를 누르는 동안 다른 사람은 그의 가슴 깊숙이 칼을 꽂고 두 번 회전시켰다.

식도에 키스를 한 K.의 식도가 집행관의 손에 눌리는 체스쳐를 통해 이미 K.의 성애는 죽음과 소송에서의 파멸을 예고해 준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성애와 죽음의 혼합은 삶을 향유하려는 성욕과 이 외부적 삶의 형태에 대한 반대성향, 즉 죽음의 욕망, 두 방향에 대한 분리된 자아의 흔들림이라고 여겨진다. 환언하면 이것은 에로스로 표현되는 외부사회 지향의 자아와 타나토스를 지향하는 순수세계의 자아로 분열된 나머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두 방향을 동시에 추구하다 좌절하는 카프카적 양가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K.는 또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양방향을 쫓다 하나도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뷔르스트너양과 만나고 온 뒤 '만족했지만 좀더 만족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법정사환의 부인과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그녀를 빼앗기로 만다. 삶과 죽음의 양방향의 자아를 쫓는 K.는 죽음에서도 만족할 만한 성취감을 맛보지 못한다. 우선 체포된 직후 갑자기 그는 자살 가능성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며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는 집행관들을 끌다시피 하고, 심지어 처형 직전에도 자살의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 장면은 생과 사의 앰비벨런스를 가장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K.는 자기 머리 위에서 칼이 오고갈 때 그것을 빼앗아 들고 자기 가슴을 찔러 버리는 것이 자기 의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K.는 그런 짓은 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목을 돌리며 주위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확인되듯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끼는 자살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 의식 속의 의도는 발동되지 못하고 무의식적인 행위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살이 의무라는 의식 속의 자각은 죽음 직전까지 '자유스럽게 목을 돌려 주위를 살피는' 무의식적인 삶의 애착으로 분열되어 나타난다. 죽음 역시 동경의 대상이지만 성취되지는 못한다. 죽음은 K.의 내면세계에서 소망되지만 동시에 처형될 때까지 자아에 의해 끝까지 수용되지 않는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다. 소송의 전과정을 통해 죽음과 더 친숙한 태도를 취하지만, 죽음으로써 추구부재의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은 보여주지 못한다. 소송에서 K.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를 유일한 길은 화가 티토렐리의 제안에서 감지된다. 그는 소송문제를 조언해 주는데 있어 가장 사실적인 논리를 지니고 있어 열쇠가 되는 핵심적 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가 K.에게 열거하는 방법은 진정한 무제선고, 형식상의 무죄선고, 그리고 지연작전 세 가지가 있는데, 진정한 무죄선고는 일단 배제된다. 이것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최고재판소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형식상의 무죄선고는 별다른 수고가 필요 없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시적인 무죄선고일 뿐이다. 즉 무죄가 되면 다시 체포되고, 다시 무죄가 되고 또 체포되고 하는 식으로 끝없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끝없이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지프스의 형상을 닮고 고달프고 긴장된 방법이지만 악순환이 계속되는 동안 삶은 이어지는 결정적 장점이 있다. 바로 이것이 요제프 K.에게 주어진 유일한 출구하고 보여진다.

지연작전은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고 늘 긴장 속에서 피곤하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앞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유죄선고를 막아주지만 동시에 진정한 무죄선고도 저지한다는 데 핵심이 있다 할 것이다. 이 두가지 가능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은행지배인으로서의 K.가 몸담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경쟁적인 생존형태로서 자유를 포기한 종속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K.는 티톨렐리가 제시한 방법을 진정한 무죄선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나 진정한 무죄선고가 불가능하듯이, 이런 형태 외의 존재방식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긴장되고 피곤하며 종속적이지만 삶을 지탱해 주는 가능한 생존방식과 타협을 거부하고 불가능한 방법을 고집하다 좌절한다는 점에서 그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소송』의 전체적인 구조는 고유한 '존재'를 지향하는 순수자아와 '소속'을 지향하는 사회적 존재의 갈등을 다루는 카프카의 문학적 명제를 예시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법을 필요로 하면서 그 법 때문에 파멸하는 『법 앞에서 』의 시골사람 같이 요제프 K.는 소송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 살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그 세계에 의해 처형된다. 다시말해 그는 이 세계와 더불어 생존할 수도, 이 세계를 떠나서 생존할 수도 없는 것이다.


* 시골의사 Ein Landarzt, 1917)

밤의 종소리를 듣고 나이 든 시골의사는 중환자에게 불려간다. 그곳까지 가기 위해 그는 마차를 끌 새 말 한 마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그의 말이 과로로 인해 죽었기 때문이다. 하녀는 동네사람들에게 말을 빌리려고 하지만 눈보라가 치는 밤에 말을 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돼지우리에서 튼튼한 말 두 마리가 나타난다. 이어 낯선 마부가 말을 마차에 메고는 마차를 출발시킨다. 의사는 짐승 같은 마부에게 하녀 로자를 맡기는 것이 싫어서 가기를 거절하지만 이미 마차는 환자의 집에 도착해 있다.

처음에 보니 환자는 전혀 아픈 게 아니다. 그러나 말들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있을 때 다시 확인하니 환자인 소년의 엉덩이에는 치료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다. 환자의 집에서도 의사는 로자에 대한 격정을 멈출 수가 없다. 이번에는 의사 자신이 환자가 되어 소년의 옆에 눕혀진다. 소년의 부모와 누이가 이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학교 합창대의 이상한 노래가 들려 온다. 소년은 의사의 무능을 비난한다. 주변 상황이 위협적으로 변함에 따라 의사는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못한 채 서둘러 마차에 오른다. 그러나 말들이 올 때와는 달리 천천히 마차를 끄는 가운데 합창대의 노랫소리가 뒤를 따른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 내리는 한밤의 벌판에서 헤맨다.

이 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기적인 배경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우선 일인칭 화자로 나오는 시골의사는 트리쉬에서 실제로 시골의사로 있었던 카프카의 외삼촌 지그프리트 뢰비의 특징을 지녔다는 점이다. 앞에서 간단히 소개된 대로 그는 카프카가 가장 따르는 삼촌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쓰여진 1917년에는 펠리체와의 두 번째 약혼이 있었고, 8월에는 결핵으로 인한 최초의 각혈이 있었다. 12월에 들어서 카프카는 재차 파혼을 하게 된다.

시골의사에게는 대치된 두 영역이 존재한다. 하나는 하녀 로자와 독신자로 살아가는 의사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눈보라가 치는 먼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환자의 집이다. 여기서 밤에 그를 호출하는 종소리는 작가인 카프카 본래의 자아인 작가적 존재로부터의 부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사의 본분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고 카프카는 문학에서 자신의 본래 사명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 사이의 갈등이라는 중심 테마가 여전히 카프카를 괴롭히던 이 무렵은 결혼에 대한 갈등이 각혈로 인해 한층 더 심화된 시기이고, 이런 정신적 배경이 시골의사가 움직이는 공간에 투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독신자로 하녀와 살아가는 공간은 소외된 영역이다. 의사는 아무에게서도 말을 빌릴 수 없는 동네에서 고립된 채 하녀인 로자의 소중함도 모르며 살아왔다.

그런데 로자에 대한 인식은 짐승 같은 마부가 등장함으로써 새롭게 그를 괴롭힌다. 환자에게 가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면전에서 하녀를 덥석 끌어안고 얼굴을 갖다 대는 마부 때문에 그는 출발을 포기하려고 한다. 거기에 가는 대가로서 하녀를 헐값에 넘겨주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자와 자기의 문학적 존재의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약혼을 포기하지 못하는 작가의식과 동일하다. 약혼자와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듯이 작품 끝까지 의사는 로자에 대한 걱정을 금하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대가는 관능적 삶의 포기이지만, 평생 여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로자에게 집착하다가 두 영역의 중간지대에서 실종되고 마는 것이다. 로자가 마부를 피해 문을 모조리 걸어 잠그고 실내로 숨은 뒤 환자의 집으로 향하는 그 순간에 의사의 귀에 들리는 것은 마부의 습격으로 산산히 부서지는 문소리이다. 자신의 본분을 찾으러 가는 그 순간에도 에로스적인 삶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그를 환자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말들은 비지상적인 것들이다. 그 자신의 말이 죽은 것은 문학적 영감이 죽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는데 미지의 영감의 힘이 등장하여 그를 본래의 자아와 만나게 해준다. 따라서 환자는 의사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녀와 살아온 의사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껍데기 자아라면 환자는 본래의 자아이다. 이것은 그가 환자 곁에 누운 뒤 들리는 목소리를 통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알겠느냐?" 나의 귓속에다 대고 소곤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나는 너를 별로 믿지 않는다. 너도 또한 네 발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엔가 내던져졌을 뿐이다. 도와주는 대신에 너는 나의 죽음의 자리를 좁게만 해주고 있다."

이것은 분열된 두 자아의 관계에서 이해할 때 자아 내면의 독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본래의 자아로 귀환한 뒤에도 자신을 하녀를 약탈당한 의사로 규정하는 등, 끊임없이 로자를 돌아보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순수자아인 환자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는 핀잔을 듣는다고 볼 수 있다. 환자와 로자는 상호 대치된 영역의 상징들이다. 작가적 부름이라 할 환자치료 때문에 로자와의 관계가 방해받는다면 순수자아인 환자는 로자에 대한 의사의 집착 때문에 방해받는다. 환자의 상처가 장미빛이라는 것은 로자로 대표되는 에로스적 삶이 작가적 존재를 방해한다는 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카프카의 발병이 약혼을 종국적으로 포기하게 하듯이 의사는 환자의 병 때문에 로자와 궁극적으로 이별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로자를 계속 돌아보게 되는 것은 환자의 흔들리는 태도에도 기인한다. 소년은 "죽게 내버려둬라"고 하다가 다시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의사의 눈에도 환자는 건강한 것으로 보였다가 다시 커다란 상처가 발견되기도 한다. 작가적 삶과 지상적 존재의 사이에서 여자문제가 카프카를 시종 괴롭혔듯이 환자의 상처에 대한 판단도 계속 흔들린다. 심지어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제 로자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소년이 죽고 싶다고 한 말은 옳고 타당했다. 나 역시 죽고 싶다. 끝없는 겨울, 여기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내 말은 죽어 버렸고 마을에서는 말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밤의 종소리의 도움을 빌어온 지방이 나를 괴롭혀 왔는데, 이제는 로자조차 희생시켜야 했다. 여러 해 동안 내게서 주의조차 듣지 않은 그 처녀, 나의 집에서 살아온 그 아름다운 처녀를 - 이 희생은 너무 크다. 최선의 의지로서도 로자를 나에게 들려줄 수 없는 이 가족들 .

로자에 대한 걱정은 본래의 영역에서 다시 사회적 삶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영역의 대표자인 의사와 환자는 갈등의 구조에서 너무 지쳐 둘 다 죽고 싶어한다. 또한 환자의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로서의 그는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 그러니 '무엇을 한단 말인가?'라는 자문이 생기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본문을 찾아왔지만 그로서도 치료는 불가능했고 대신 로자만 마부에게 빼앗겼다. 그것은 '너무 큰' 희생이다.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흔들린 결과는 어느 곳에도 소속하지 못하고 한겨울의 무주공간에서 떠도는 운명으로 결말지어진다. 의사를 각성시켜 주는 계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미지의 것들이다. 가령 "그 자의 옷을 벗기라, 그러면 나으리니,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를 죽이라"고 노래하는 합창대와 비지상적인 말들이다. 이것들을 통해 자신의 본래영역에 돌아왔지만 자신의 의술도 잃었고 로자도 잃어버린 운명만 확인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집에 갈 수 없다. 꽃 피어나는 나의 찬란한 의술은 사라져 버렸다. 발가숭이로 이 불행한 시대의 혹한에 몸을 내맡겼다. 현세의 마차와 비현세의 말을 몰아 이 늙은 사나이 나는 빙빙 돌고 있다. 속았구나, 속았구나. 한번 밤 종소리가 울린 것을 따르다니. 다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 불행한 시대의 혹한"이라는 표현은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를 일깨워 주는 분위기를 담고 있다. 본분으로서의 의사의 옷을 벗긴 그는 벌거벗은 채 의사 역할도 끝난 늙은이로서 빙빙 도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어느 세계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그는 두 세계의 중간지대를 빙빙 돌며 한겨울의 혹한을 견뎌야 하는 운명에 빠진 것이다. 작가적 세계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 그것 때문에 일상의 삶을 포기했지만 스스로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결정은 늙은이로서는 그대로 종국적인 성격을 갖기에 돌이킬 수 없다는 인식이 그를 덮치는 것이다. 결국 두 개의 자아에 대한 양방향의 집착은 동일성을 상실하는 불행한 시대를 인식시켜 주고 그 결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혹한의 추위를 안겨준 채 무주공간에서 떨게 하는 비극적 운명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1914

어느 탐험 여행가가 유형지를 방문했다. 여기서 근무하는 장교는 자신이 긍지를 갖고 능숙하게 다루는 처형기계로 어느 죄수의 처형을 보여주려고 한다.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처형관인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기계의 우수하고 완벽한 성능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죄수는 야간보초 중 잠이 든 것과 상관에게 들켰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죄목이었다. 기계를 다루는 장교는 어떤 범죄건 확실하기 때문에 조사나 심문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죄수로 끌려온 사병에게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처형기계는 죄수의 몸에 그가 위반한 죄목을 바늘로 기록하고 몸에서 흐르는 피를 닦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12시간이 지나면 죄수는 죽어서 구덩이로 던져지게 되어 있다. 이런 처형제도는 전임 사령관이 애착을 갖고 실시하던 것인데, 그가 죽고 신임사령관이 부임한 이후에는 논란거리여서 장교는 탐험가에게 이 제도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탐험가는 거절한다. 탐험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장교는 죄수를 석방하고 자신이 직접 기계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런데 기계는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않는다. 장교는 고문하는 대신 죽여 버리는 것이다.

이 단편의 주제는 비인간적인 권력제도가 갖는 정의의 극단적인 왜곡으로 보인다. 권력 자신의 전체주의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고집하거나 사이비 종교적인 광신적 수단에 의존하는 맹종성, 맹목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치국가의 모든 사법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법, 사법, 집행 등 모든 것이 기계를 담당하는 장교의 한 손아귀에 들어 있다. 또한 피고의 죄는 처음부터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장교가 말하듯 '어떤 범되건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의 처형은 이미 범죄 자체와는 무관하다. 장교가 내리는 판결은 완전무결하고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죽은 전임사령관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장교는 한계를 모르는 권력에 종속되어 왜곡된 정의의 이념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이다. 그의 맹종은 스스로 처형기계에 누워 희생될 만큼 광적인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판결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할 기계는 예기치 못한 불완전한 작동을 보여준다. 법제도의 충실한 수호자이며 신봉자인 장교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믿음이 미혹이고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소송 Der Proze』의 요제프 K.와 장교는 법에 대한 전도된 관계를 보여주는 일면이 있다. 즉 K.가 법에 의해 '무지한' 결과로 죽는 데 비해 장교는 법을 신봉하면서 수호하는 법의 종사자로 희생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법 앞에서』의 시골사람이 좀더 확실한 대비가 되고 있다. 그가 법을 구경하기 위해, 법의 내부를 보기 위해 평생 기다리다 죽는다면, 장교는 평생 법을 지키고 법대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왜곡된 정의가 스스로 지양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자기 미망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법의 정신을 오해하여 정의의 왜곡된 제도에 맹종하다가 그 제도 자체가 허물어지는 의미인 것이다. 장교가 상징하는 왜곡된 정의는 무의미하고 허망한 종말을 통해 그 실체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그의 '살아 있을 때 그대로의' 죽은 모습은 그처럼 그가 확언하던 구원의 징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문학적 자기처단의 기록으로 보는 브로트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장교의 죽음은 외부세계에 종속되어 집착한 카프카의 자기처단이라는 형상으로 비유된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복종하는 제도를 따르다가 그 제도에 의해 파멸하는 장교는 이부세계를 지향하는 자아의 절망적인 최후를 암시해 준다. 그가 구원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 표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탐험가의 역할은 예술을 지향하는 자아의 한 변형으로 보여진다. 예술가가 과학자의 얼굴로 등장했다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면, 이 사람이 유형지의 비인간성과 잘못된 법제도에 반대하면서도 간여하지 않는 태도에서 우리는 유형지처럼 소외와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외부사회로 향하려는 자아를 적극 제지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느낄 수 있다.

탐험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낯선 사정에 결정적인 간섭을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탐험가는 이 유형지의 주민도, 유형지를 통치하는 국가의 국민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사형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거나 그걸 방해하려고 한다면 너는 외국인이니 까 잠자코 있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거기에 더 이상 답변할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생각이 막혀 버렸다. 견문을 넓히려고 여행을 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의 재판제도를 개혁하겠다는 당치도 않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곳의 여러 가지 사정은 역시 호기심을 끄는 것이었다. 재판수속이 부당하며 사형집행이 비인도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자신만의 주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죄수는 사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이며, 동족도 아니거니와 동정할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서술시점의 기준이 되는 탐험가의 태도는 확실히 방관적이다. 재판수속이 부당하며 사형집행이 비인도적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유형지의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연의 진리와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탐험가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장교의 확신이 옳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죽은 얼굴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지만, 탐험가는 유형지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적어도 옳지 않다고 말할 과학자의 진실에 대한 용기마저도 결여한 채 서둘러 섬을 떠난다. 더구나 기계담당 사병과 풀려난 죄수가 함께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는데도 이들을 유형지에 두고 가버린다.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태도에서 장교와 탐험가는 대조적이다. 잘못된 믿음이지만 장교는 강한 추진력을 갖고 확고부동한 자세인 데 비해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진할 용기를 탐험가는 갖고 있지 못하다. 끝까지 관찰자로 남을 뿐이다.

탐험가가 카프카의 예술적 자아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그것은 외부세계에 대한 강한 부정의 의지를 못 가진 방관자의 우유부단한 태도이다. 즉 어느 하나의 세계에 소속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양가치적 자아의 소산이라고 보여진다. 이 세계가 모순된 제도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에서의 정의가 왜곡되었으며 곳곳에서 비인간적인 잔인함이 드러나 있고 이런 잔인한 세계의 제도를 추종한 결과가 허무한 파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항할 엄두를 못 낼 뿐 아니라, 세계를 진실하게 개선할 예술가로서의 의무마저 포기하는 연약한 의지의 형상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 작품이 살인기구의 기능을 통해 전쟁을 풍자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나치즘의 강제수용소를 예언한 것이라는 풀이도 있지만, 이것이 『소송』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예술과 삶이라는 분열적 위기를 한참 겪는 시점에 쓰여졌다는 배경을 생각하면 장교와 탐험가라는 대조적인 인물이 한 공간에서 연출되는 묘사를 볼 때, 내외 세계의 분열적 관점에서 보는 견해가 보다 설득력 있어 보인다. 특히 법과 제도의 무거운 주제가 일단락된 뒤 탐험가가 유형지를 떠나기 전의 묘사가 일상의 진부한 찌꺼기들을 보여줌으로써, 카프카에게 되풀이하여 나타나듯이 최후의 승리는 외부사회의 삶이 차지한다는 결말구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Ein Bericht fur eine Akademie, 1917

1917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편은 E. T. A 호프만의 『개 베르간차의 최근 운명에 관한 보고』와 빌헬름 하우프의 『젊은 영국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연극으로도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국내에서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장기 흥행에 성공한 추송웅의 모노드라마『빨간 피터의 고백』은 바로 이것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변신』과는 반대로 여기서는 동물의 인간화가 다루어지고 있다.

인간화된 원숭이 빨간 피터는 학자들의 모임에서 요구한 바에 따라 원숭이로서의 전생(前生)과 자신의 인간화에 대해 강연을 한다. 그는 인습적인 아카데미의 정중한 어법을 노련하게 구사하며 대단한 능변으로 이 과제를 완주한다. 그는 자기도취로 가득 차 있고 힘겹게 도달한 신분에 대단한 긍지를 보인다. 다른 작품과는 달리 여기서는 카프카와 주인공의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원숭이 빨간 피터는 교양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이고, 일종의 벼락 출세를 한 입장에서 과잉 적응을 한 시각으로 자신의 체험을 언급하기 때문에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요컨대 그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기과거를 회고하면서 동물상태로 있을 때의 자유를 과대평가하는데 사실 그의 기억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사냥꾼들에게 포획되어 배에 실린 시점이다.

현재의 피터의 지위는 무대 위에서의 쇼 공연가인데 이것 역시 그에게 진정한 자유의 상태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에 갇힌 고통스러운 삶이 그에게 이런 상태를 '출구'로서 강요한 결과이다. 그가 포획되어 실려온 배는 그에게 '생애 처음으로 출구 없는' 상황을 안겨 주었고, 그는 '출구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원숭이로 남기를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출구'라는 것은 자기실현의 길이 아니라 강요된 적응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귀향』이나 『시골의사 Ein Landarzt』, 『성 Das Schlo』 등에 나타나듯, 카프카의 많은 주인공들이 부닥치는 잘못된 도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숭이가 아니지만 진정한 인간도 아니다. 대용품으로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잡종일 뿐이다.

그것은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낮에는 쇼 무대에서 공연을 하지만 밤에는 침팬지와 동침함으로써 동물의 본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어설픈 인간화는 이 작품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조롱이라는 유력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동시에 문명이라는 애매한 표현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나 불안전성을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빨간 피터가 인간세계로 진입했다는 증거들은 대체로 외형적인 것들이다. 침뱉기라든가 악수, 소주 마시기 등의 인간적인 관습들은 그가 인간세계의 일원임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화의 표피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즉 이것은 자기를 과시하는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인간의 자유는 철봉곡예사의 운동의 자유로 야유되기도 한다. 즉 극히 좁은 공간에서의 단조로운 반복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 으른바 인간의 자유가 지닌 한계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빨간 피터가 인간화 과정의 교육을 위해 많은 선생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인습을 풍자한 것으로 보여진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드물게 작가와 주인공의 동일성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본서의 테마인 내외세계의 분열로 접근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연구된 해석 중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몇 가지만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1. 정신분석학적인 연구에서는 술을 마신다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원숭이가 인간세계로 수용되는 것을 작가가 성인 남자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에 비유한다. 빨간 피터는 포획시에 총 두 방을 맞는데, 한 방은 음부 부위에 상처를 주고 이것은 카프카의 거세공포로 풀이된다. 우리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고통은 카프카의 성적궁핍으로 여겨진다. 카프카는 아동기 체험의 여파로 성적억압의 고통을 당한 바 있는데 원숭이가 완전한 인간이 못 되었다는 것은 정상적인 욕구 분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2. 이 단편은 개종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려는 유대인의 동화 노력에 대한 풍자이다.
3. 인간과는 별개의 종(種)에 소속된 것처럼 보는 카프카 자신의 체험과 자신의 성향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묘사된 것이다.
4. 인간의 사회화를 풍자한 것이다. 성공적인 순화과정은 빨간 피터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공연예술가로 부상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 관련 인물들


* 아버지 - 헤르만 카프카

카프카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 받는 카프카의 아버지는 확실히 저항을 허용치 않는 집안의 독재자였던 듯하다. 몸집이 크고 기운찬 그는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했고, 그 점을 크나큰 긍지로 여겼다. 그는 젊은 시절 시골에서 감내했던 고생을 자주 회상했다. 당시 그는 남부 보헤미아의 푸주한이었던 부친의 집에서 살았다. 부친이나 조부, 장인과 마찬가지로 헤르만 카프카는 섬세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마음대로 '모욕, 중상, 폄하하는'말들을 내뱉었다. 안락의자에 앉아서 '세계를 지배'했으며, 만사를 판정했고, 경우에 따라 체크인, 독일인, 유태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마치 그는 '그 권리가 성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아에 기초하고 있는 독재자'와 같았다. 그가 율리에 뢰비와 결혼해 프라하의 셀레트나 거리에 새 상점을 연 1년 뒤 첫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프란츠이다(프란츠라는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 상점의 간판에는 카프카(체크어로 까마귀)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소매상점은 곧 도매상점으로 발전했다. 수 차례의 이사 끝에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 킨스키궁에 자리잡는데, 이는 그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 어머니 - 율리에 뢰비

율리에 뢰비는 살림이 넉넉한 상인(나사공장과 맥주 양조장을 소유함)의 딸이었다. 카프카의 친할아버지가 체크어 밖에 못하는 거친 푸주한으로 시골에서 옹색하게 살았던 반면, 율리에 뢰비의 가계에는 학문이 높은 저명한 랍비나 거상이 여럿 있다. 하지만 그중 광인이나 자살한 사람도 있다.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카프카의 어머니는 남편을 아주 어려워하는 듯한 태도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카프카에 이어 낳은 두 아이가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아버지의 금기사항을 몰래 아들에게 허락했으며, 아들을 남편으로부터 보호했다. 하지만 이러한 처방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아버지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강박관념에 줄곧 시달리던 카프카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사냥의 몰이꾼 역할을 즐겼다'라고 쓰고 있다. 또 그녀가 어떠한 방패막이도 되어주지 못했던 듯, 이렇게도 썼다. "그녀의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헌신 덕분에 아버지는 마침내 아이들과의 갈등에서 독자적인 정신적 권력을 표상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일을 했다.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달라고 원하는 일 없이, 당연한 것처럼 즐거워하거나 슬퍼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시끄러웠다. 누군가가 슬퍼할 때 그녀는 친절을 베풀었다. 내가 늘 어머니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고, 또 그녀가 당연히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 카프카의 일기. 1911년 10월 24일 -

* 여동생들

어린 카프카는 부모를 자주 볼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한 것으로 보인다. 가게일에 매달려 있던 그의 부모는 집에 돌아올 즈음이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최초의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너무 오랫동안 유모, 하녀, 심술궂은 식모, 슬픈 가정부와 다투었다.'고 말했다. 복잡다단한 카프카의 어린 시절이 금방 지나간 것은 아니다. 여동생 엘리와 발리가 그와 6년, 7년 차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오틀라가 태어났다. 이 소녀들은 그가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특히 둘째인 발리가 그랬다. 그러나 카프카는 그 책임을 그의 방이 '온 아파트의 소음이 몰려드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훗날 여동생들이 결혼해 집을 떠났을 때 카프카는 그들의 집을 전전하며 은둔생활을 했다. 특히 나이 차이가 많은데도 퍽 가까웠던 막내 오틀라의 집에 자주 머물렀다.

헤르만과 율리에 카프카의 세 아들 중 살아남은 이는 첫째인 프란츠밖에 없다. 1885년 9월에 태어난 게오르크는 태어난 지 1년 6개월만에 홍역에 걸려 사망했다. 또 1887년 9월에 태어난 하인리히는 중이염에 걸려 이듬해 봄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4세가 된 프란츠는 곰인형하고 놀았다. 여동생들은 뒤늦게 태어났다. 가브리엘(엘리)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둔하고 겁이 많으며 침울하고 지나치게 비천하며 심술궂고 개으르고 탐욕스럽고 인색'했다. 한편 발레리(발리)는 아버지에게 절대 복종했으며, 오틀라만이 항상 아버지와 맞섰다.

* 막스 브로트

프라하 출생. 1939년 나치스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탈출하여 망명하였다. 전쟁 후에는 유대인들의 조국인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신흥도시 텔아비브 야파의 하비마 극장을 주재하면서 유럽 각지에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운동가)로서의 이상주의적 문화활동을 적극적으로 폈다.

주요작품으로 3부작인 역사소설 《신(神)에 이르는 티코 브라헤의 길 Tycho Brahes Weg zu Gott》(1916) 《유대인의 왕 레우베니 F犧rst den Juden》(1925) 《포로의 갈릴레이 Reubeni Galilei Gefangenschaft》(1948)와 소설 《동경의 여성 Die Frau, nach der man sich sehnt》(1927) 등이 있고, 종교논문 《이교(異敎), 그리스도교, 유대교》(1921) 《차안(此岸)과 피안(彼岸)》(1946)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브로트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그가 그의 고향 친구였던 카프카의 유고(遺稿)를 정리 발표한 편집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카프카전(傳)》(1937) 《카프카론》 등은 카프카 연구를 위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카프카의 여인들
- 펠리체 바우어, 밀레나 예젠스카, 도라 디아만트

1912년 9월 <선고>를 집필한 뒤 카프카에게 왕성한 창작시기가 시작된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펠리체 바우어에 대한 '편지홍수'가 시작된다. 처음 3개월 동안에 1백 통이 넘는 편지와 다음 8개월 동안에 2백 통이 넘는 편지를 쓴다. 1910년에서 1923년까지 쓰여진 그의 일기도 거의 대부분 1911년과 1912년에 쓰여진 것이다. 1913년 초 카프카는 베를린으로 펠리체 바우어를 두 차례 방문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그의 창작과 삶(결혼)과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카프카에게 수많은 편지는 그의 창작을 부추기는 동기가 되었다. 부활절 휴가에 카프카는 처음으로 베를린의 펠리체를 방문했고, 성령강림절 때의 두 번째 방문시에는 그녀의 가족을 소개받았다. 그 이후 그는 펠리체의 부친을 통하여 청혼할까도 깊이 생각했으나 그 결론은 회의적이었다. 카프카는 펠리체의 부친에게 두 번째로 보낼 편지(실제로는 발송하지 않았음)의 초안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의 직장은 저로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직장은 유일한 욕망이자 유일한 직업인 문학에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고 문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와 결합을 한다면 제가 짐작할 수 있는 한 따님께서 불행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외부 사정뿐만 아니라, 저의 본래의 본성이 폐쇄적이고 말이 없고 사교성이 없는 불청객입니다. 저는 가정에서 선량하고 친절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남 이상으로 서먹서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으로 제가 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의 직장이 저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F. 카프카, <일기 1910~1923>)

첫 번째 편지의 청혼에 대한 펠리체 부친의 긍정적인 회신을 받은 카프카는 오히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난다. 분명한 태도로 요구 당한 이때의 심정을 카프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에 매여 있는 기분'이었다고 후일에 술회하고 있다. 펠리체와 최초의 결렬은 카프카가 그 이후의 생애에서 자주 보여 주게 되는 유사한 결의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냐 '문학'이냐 하는 선택에서 그는 물론 단순한 외형상의 선택에 지나지 않았지만 언제나 문학 쪽으로 기울었다. 카프카는 비엔나로의 여행 덕으로 이 최초의 힘든 상황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동료들과 공무여행을 마친 다음 그는 계속해서(9월 중순) 리봐로 향한다. 그곳에서 머문 몇 주 동안에 스위스 여인을 알게 된다. 8년 전 쭈크만텔에서 체험 후에 두 번째로 경험하는 '사랑하는 여성과의 달콤한 관계'였다. 이 만남에 대한 일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자신에 대한 것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그녀의 엄명'을 카프카는 굳게 지킨 것이다. 이 때의 체험이 <시골에서의 혼례준비>와 <사냥꾼 그락쿠스>에 반영되어 있다. 펠리체의 친구인 그레테 블로흐와 작가 에른스트 바이스의 중재로 펠리체에 대한 새로운 접촉이 시도된다. 1914년 3월 카프카는 베를린으로 펠리체를 방문하여 비공식적인 약혼을 선언하고 6월 1일 오순절 휴가에는 양친들의 입회 하에 공식적인 약혼식을 올린다. 그는 이 때의 결단의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난 여름의 펠리체와 결렬은 나의 창작활동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저작활동이 결혼으로 위협 당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중의 절망감(저작활동에 대한 희망이 충족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여)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F가 점점 멀리 나에게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이고. (F. 카프카 <일기 1910~1923>)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무능력이 그러나 막상 약혼에 의해서 해소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범인처럼 묶여서 쇠사슬에 매여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것처럼' 자신을 느꼈다. 6주가 지난 뒤에(7월 12일) 그는 약혼을 파혼하고 '범죄자로서 구속되어 있는 기분'에서 벗어난다. 펠리체와 체험이 <소송> 집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1914년 8월 카프카는 <소송>을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 요제프 K는 31세의 생일 전날 밤에 처형당한다. 31세의 전날 밤에 카프카는 펠리체와 약혼을 파기하기 위하여 베를린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 때의 카프카의 창작열은 다시 불이 붙는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써 나간다. 2개월 사이에 <소송>의 여러 개의 장(章)이 쓰여진다. 10월 초에 그는 '이 소설의 진행을 위해서'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는다. 3일이 지나자 그는 <소송>의 집필을 중단하고 <실종자>의 마지막 장과 <유형지에서>를 집필한다. 1915년 1월 카프카는 펠리체와 다시 만나게 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1916년 7월 카프카는 마리엔바트에서 펠리체와 함께 10일간의 휴가를 보낸다.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전쟁이 끝난 다음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카프카는 전쟁이 발발한 뒤 군에 입대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다. 그러나 신체쇠약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17년 7월 초 펠리체가 프라하로 와서 두 번째의 약혼이 이루 어진다. 이번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해서 작가로서 살아가려고 결심한다. 7월 중순 그는 펠리체와 그녀의 누이동생 에르나와 함께 부다페스트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에서 돌아와 각혈을 하게 된다. 8월 초였다.

카프카는 5년 동안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진단은 폐결핵이었다. 카프카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결혼의 시도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을 수가 있고, 일체의 의무 즉 직장에 대한 의무, 결혼의 의무, 양친에 대한 의무 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병가와 사무실 근무가 교차되는 시기가 시작된다. 1922년 퇴직하게 될 때까지 5년간 병가가 끝나면 직장근무를 요구받는 그런 생활이 이어진다. 1917년 9월 그는 8개월의 병가를 얻어 북부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 취라우로 떠난다. 그 곳에서는 오틀라가 시숙의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카프카에게 취라우에서 수개월은 펠리체, 직장, 프라하, 부친 등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오틀라가 그것을 도왔다. 오틀라는 카프카가 브로트와 밀레나와 함께 비밀을 갖지 않은 유일한 사이였다. 카프카는 이곳에서 <성>을 착상하였고, 109편에 이르는 아포리즘과 <일상의 혼란> 등 여러 비유를 완성하였다. 그의 임종까지의 희망이었던 팔레스타인 여행을 위하여 그는 히브리어도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12월 말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펠리체와 결정적인 파혼을 한다. 그러나 펠리체와의 결혼을 잘 선택한 것으로 생각했던 아버지는 이 파혼에 반대하였다. 이것이 아버지와의 대립의 발단이었다. 2년 후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그 대립은 절정에 이른다. 1918년 11월 카프카는 4개월의 병가를 얻어 엘베 강가 슐레젠의 슈트들 여관에 머문다. 이 여관에서 체코 소녀 율리에 보리체크를 알게 된다. 프라하 제화공의 딸 율리에와 사귄 지 반년 뒤에 그는 그녀와 약혼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세 번째 약혼도 실패로 끝난다. 카프카가 만난 여인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별첨


*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있어서 희망과 부조리
-카뮈가 1943년 <아르바레트>誌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에 관한 비평

카프카의 모든 예술은 독자로 하여금 반드시 다시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작품의 결말이나 그 결말의 결여는 설명을 암시해준다. 분명히 말해서 이 설명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근거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 이중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에 있어서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상징이라는 것도 항상 일반적인 것 안에 있으며, 그리고 그 해석이 아무리 명확하더라도 예술가는 거기에 움직임만을 되돌려줄 수 있을 뿐이다.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상징적인 작품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상징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항상 앞지르며 또한 의식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실제로 말하게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상징을 파악하는 보다 확실한 방법은 이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선입감 없는 정신으로 작품을 시작하는 것이고 또한 그 은밀한 흐름을 추구하지 않는 것 등이다. 특히 카프카에 있어서는 그의 수법에 동의하고 외양을 통하여 연극에 형태를 통하여 소설에 접근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리고 초연한 독자에게 그것은 결코 표명되지 않은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하며 두려워하는 인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불안스러운 모험이다. <심판>에서 요제프 K는 고소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무엇 때문에 고소를 당하였는지 모른다. 물론 그는 자기 변호를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른다. 변호사들은 그의 소송이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사랑하고 먹고 또는 신문을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법정은 매우 어둡다. 그는 대수로운 일은 모른다. 단지 그가 유죄를 선고받았다고 생각할 뿐,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는 거의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가끔 의문을 품어보지만 계속 살아간다.

한참 후에 정장을 한 공손한 두 신사가 그를 찾아와서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권유한다. 그들은 최대로 정중하게 그를 절망의 교외(郊外)로 데리고 가서는 돌 위에 머리를 짓찧어 죽인다. 죽기 전에 그 수형자는 `개같이'란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다. 가장 감각적인 특성이 마침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야기 속에서 상징에 대하여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았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범주다. 일어나는 일이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작중 인물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다른 작품들도(물론 훨씬 드문 일이지만) 있다.

기발하기는 하나 명백한 역설로서 작중 인물의 모험이 기이하면 기이할수록 이야기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즉 자연스럽다는 것은 인간의 생의 이상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 인간의 단순성과의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거리에 비례된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이 카프카의 자연스러움인 것 같다. 그리고 정확하게 <심판>이 말하고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느낀다. 사람들은 인간 조건의 이미지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단순하면서 동시에 복잡하다. 나는 이 소설의 의미가 카프카에 있어서는 아주 특수하고 개인적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어떤 점에서, 그가 고백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관해서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그는 살고 있으며,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소설의 첫 페이지에서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고치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놀랍지 않다는 일에 대해서 그는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부조리한 작품의 첫 징후를 알아보는 것은 바로 이 모순에서다. 지성은 구상 속에 그의 정신적 비극을 투영한다. 그리고 다만 공허를 표현할 능력을 색채에 부여하고, 영원한 야망을 번역할 힘을 나날의 행동에 주는 영속적인 역설에 의해서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城>은 아마도 행동 속의 신학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은총을 추구하는 영혼의 개인적 모험과, 이 세상의 온갖 사물 속에서 그들의 장엄한 비밀, 그리고 여인들에게서 그들 안에 잠들어 있는 신의 징후를 구하는 한 인간의 개인적 모험이다. <변신變身>도 제 차례가 되어 명찰의 윤리학의 무서운 판화를 확실히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스스로 짐승이 되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쉽게 경험하는 그 한량없는 경악의 소산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비밀은 바로 이 근본적인 모호함에 있다. 자연스러운 것과 이상한 것, 개인과 보편, 비극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부조리와 논리, 이런 것들 사이의 영원한 평형은 그의 전 작품을 통하여 나타나며, 또한 그의 작품에 공명과 동시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부조리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역설을 일일이 열거해야만 하고 이 모순을 강화해야만 한다.
정말이지 상징은 두 개의 면, 관념과 감각의 두 세계, 그리고 양자 사이의 교감에 대한 사전처럼 생각된다. 만들어내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이 용어사전이다. 그러나 면전에 있는 두 개의 세계를 의식한다는 것은 그들의 은밀스러운 관계의 노상에 위치하는 것이 된다. 카프카에 있어서 이 두 세계는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생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자연적인 불안의 세계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는 노상(路上)에 있다"라는 니체의 말의 끝없는 활용을 보는 것 같다.

인간 조건, 그것은 모든 문학의 흔해빠진 주제지만 거기에는 근원적인 부조리와 동시에 집요한 위대함이 있다. 그 두 가지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일치한다. 거듭 말하면, 두 가지 모두는 우리의 영혼의 무절제와 육체의 소멸하는 기쁨을 분리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절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부조리, 그것은 그토록 터무니없이 육체를 초월하는 것이 바로 그 육체의 영혼이라는 데 있다. 이 부조리를 나타내고자 원하는 사람은 대응하는 대조의 일 속에서 부조리에 삶을 부여해야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카프카는 일상적인 것에 비극을, 그리고 논리로써 부조리를 표현한다.
배우는 그가 과장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면 할수록 비극적인 인물에게 힘을 더 주게 된다. 만일 그가 조심성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불러일으키는 혐오는 터무니없이 클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그리스의 비극은 많은 교훈을 가지고 있다. 비극 작품에서의 운명은 항상 논리와 자연스러움의 모습 아래서 더 한층 절감하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예고되어 있다. 그가 살인과 근친상간을 범하게 되리라는 것은 초자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극의 모든 노력은 연역에서 연역으로 주인공의 불행을 성취시켜나가는 논리적 체계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 보통이 아닌 운명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다지 무섭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음 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필연성이 사회, 국가 친근감이라는 일상 생활의 범위 안에서 우리에게 입증된다. 그때는 공포가 인정되는 것이다. 인간을 뒤흔들고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그에게 하게 하는 이 반항 속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절망적 확실성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 7. 3. - 1924. 6. 3.
- 자본주의의 우울과 세기의 광기에 시들고 만 조셉 K.

카프카(Kafka)라는 성(性)은 체코어로 '검은 까마귀'라는 뜻이라고 한다. 카프카는 유서를 통해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을 출판하지 말고 소각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했다. 만약 이때 브로트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카프카라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몇몇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 출판되기는 했지만 워낙 소량이 인쇄되었고 그나마 판매율이 저조했던 탓에 초판이 출판된 후에도 수년 동안 시중 서점에서 초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서를 읽은 후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하네, 카프카!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네." 체코의 수도 프라하 출생. 부유한 유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폐결핵으로 41세의 생애를 마쳤다.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카프카 문학의 독자적인 세계도, 그가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프라하의 유태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환경의 소산이다.

1906년 6월 18일 프라하 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 카프카는 어차피 글을 쓰는데 지장만 없다면 어떤 직업을 갖던지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부모가 원하는 법과를 졸업했다. 고전적인 포즈를 취한 프란츠 카프카 -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근무하게 된 카프카는 노동자들의 실상을 살펴보게 되면서 고교 시절부터 간직해온 사회, 정치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클라우스 바겐바흐는 카프카를 서민대중편에 선 그 당시 유일의 작가라고 지적하고 있다. 1920 - 1921년의 프라하광장의 카프카 - 카프카의 친구이자 작가이고, <밀레나에의 편지>의 초간본 편집인인 빌리 하스는 "프라하에서 태어나지 않고 프라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자는 카프카의 문학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막내 여동생 오틀라(Ottla)와 그의 남편 -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엘리(Elli), 발리(Valli), 그리고 오틀라(Ottla). 카프카는 그 중에서도 특히 오틀라와는 비밀이 없을 정도로 가까왔다. 그러나 이 세 자매는 제2차 대전 중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되고 만다. 카프카는 20세기의 광기를 미리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유산 상속인으로 엘리의 딸 마리안네 쉬타이너와 오틀라의 딸 파트코바만 생존했다.프란츠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1914) -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여인이었다. 도라 디아만트(Dora Dymant)는 프란츠 카프카 최후의 여인이었다. 1923년부터 사귀기 시작한 그들은 한때 베를린에서 동거했고, 1924년 카프카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 몰락하는 제국의 수도, 프라하의 이방인

프란츠 카프카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에 소속된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1883년 7월 3일 태어났다. 이 무렵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제국에서는 1848년 프란츠 요세프1세에 의해 이른바 '유태인 해방령'이란 것이 내려져 도시로의 유태인 이주에 대한 제약이 풀리고 난 얼마 뒤였다. 해방령 이전까지 유태인은 '유태인령'이란 법령에 의해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도시마다 유태인 거주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과 어머니 율리에 뢰비는 해방령을 전후해 프라하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었다. 그들의 부모는 열심히 일하여 프라하 상류사회에 갓 진입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이들 부부에게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 헤르만의 가계(家系)는 푸줏간을 했었고, 어머니 뢰비의 가계는 양조장을 했는데 어머니쪽 집안에는 탈무드 학자를 비롯한 의사 등의 직종에 진출한 비교적 지식인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평생을 두고 자신의 아버지와 갈등까지는 아니더라도 긴장 관계 아래 놓여 있었다. 학자들에 따라 해석은 조금씩 틀리지만 클라우스 바겐바하는 카프카 가(家)의 정신적 유산으로 건강, 강인함, 지구력, 언변술 등 생활력과 사업욕과 정복욕 등을 들고 있으며, 반면에 뢰비 가의 유산으로는 고집, 민감성, 불안감, 정의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 자신은 부계 혈통으로 상징되는 성격들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을 갖지 않았다. 그의 꿈. 문학을 한다는 그의 긍정적인 소망들은 늘 아버지로 상징되는 현실에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적인 요소가 매우 짙은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카프카는 "아버지와 저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말하면 저는 카프카의 가계이지만 어미니쪽인 뢰비가의 사람입니다. 카프카 일족의 생활욕, 사업욕, 정복욕에 의해서가 아니고, 뢰비가 특유의 민감성에 의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라고 쓰고 있다. 실제로 카프카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고,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사업가. 아버지 헤르만의 눈에는 틀림없이 아들 프란츠가 몽상가로 비췄을 것이다. 어린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지독한 일벌레에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사업의 성공에만 몰입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카프카는 어려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다섯 차례나 이사를 하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사업 성공에 따라 점점더 도심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과정이긴 했지만 카프카에게는 불안을 돋우는 일에 불과했다.

카프카의 어머니조차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어린 카프는 유모, 보모, 식모, 가정교사 등 줄곧 남의 손에 의해 키워졌고, 그의 나이 두 살 때, 그리고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마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어린 카프카는 늘 혼자였다. 이런 카프카에게 동생들이 생긴 것은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인 1889년 여동생 엘리(Elli)가, 또 1년 뒤에는 발리(Valli)가,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오틀라(Ottla)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세 자매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의 광기에 희생당하고 만다. 그들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다.(다만 엘리의 딸 마리안네 쉬타이너와 오틀라의 딸 파트코바만이 살아남았다.) 제국의 변방에서 다시 또 변방인이었던 유태인으로 자수성가하여 프라하의 상류 사회에 막 편입된 사람답게 헤르만 카프카는 장남 프란츠를 잘 교육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문학이나 예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였던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독일어 학교에 프란츠를 입학시킨다.(우리가 영어를 죽어라 배우는 것처럼 당시 프라하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지배어였던 독일어를 배워야만 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유태인답게 자신이 고생스럽게 살아온 시절을 보상받고, 신분상승을 위해 아들을 자기 자신의 인생설계에 맞게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분상승을 위래 독일어 교육을 받아 관료사회에 자식을 진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열망이 강한데 반해서 아들은 섬세하고, 내성적인 존재였던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였다. 어린 아들이 밤중에 물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모습에, 아버지는 나무라다 못해 내복만 입은 카프카를 추운 발코니 밖으로 내쫓고, 문을 잠가 버리기 까지 했다.

* 학교에 간 프란츠 카프카

프라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에서 비엔나, 부다페스트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화가 에곤 실레를 생각해보면 이 무렵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이 처해있던 대내외적 현실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민족 구성이 가장 복잡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 대제국은 오래 전부터 복잡한 민족구성과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치 체제로 인해(나폴레옹 혁명의 반동으로 발생한 보수반동적인 메테르니히의 비인 체제 역시 오스트리아가 중심이었던 점에 주목하시라.)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891년의 보헤미아 박람회를 계기로 체코인의 민족의식이 점차 싹트면서 합스부르크 왕조에 저항하자 비엔나의 제국 정부는이에 대해 강권으로 맞서게 된다. 이런 저항과 탄압은 그후로도 약 30년간 지속되었고,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국 정부는 유태인을 탄압하여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4년제 기초학교를 마친 프란츠를 바라보는 아버지 헤르만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아들 프란츠에게서는 상인으로서의 기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프란츠를 실업학교로 진학시키는 대신 인문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도록 했다. 당시 체코는 국립대학도 독일어 프라하 대학과 체코어 프라하 대학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일곱 개 독일어 중고등학교 중에서 황실 및 왕실 부설 중고등학교(프라하 구시가지에 위치)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평생을 두고 교유하는 몇 명의 중요한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카프카에게 사회주의적 지식을 전수해준 루돌프 일로비, 시오니스트 후고 베르크만, 훗날 노동자재해보험국에 카프카를 추천해 준 보험국 사장의 아들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그리고 오스카 폴락이 그들이었다.

특히 오스카 폴락은 매우 조숙하였기 때문에 카프카의 예술과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외부 세계와 단절하며 살았던 카프카와 세상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독일어 프라하 대학으로 진학한 카프카는 주로 문학과 예술사 강의를 들었으나 전공은 법학으로 결정지었다. 부모와 가족의 기대를 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글쓰는 작업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시작되었다. 왜 글을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은 이 무렵에 이미 무르익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 폴락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그마한 틈도 없이 반복해서 높이높이 구축되어, 망원경을 사용해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쌓아 올려진 그런 인생을 바라보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네. ... 우리가 읽은 책이, 우리들이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우리를 괴롭히는 불행이라든가 자기 자신보다도 더욱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든가, 아니면 자살이라든가 또는 우리의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나서 숲속에 버림을 당하는 경우라든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과 같은 그러한 영향을 주는 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세.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 (F. 카프카, <서간집>, 1904년 1월 27일)

* 카프카를 둘러싼 시대 상황과 막스 브로트

대학 시절 카프카는 독서 및 연설 서클인 독일 대학생 강연 낭독회가 개최하는 강연과 시인의 낭독회에 즐겨 참여하곤 했다. 그는 1902년 10월 낭독회 자리에서 막스 브로트를 처음 만나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 동생 테오가 있었다면(형 고흐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가 죽은 뒤엔 테오의 부인이 빈센트의 유작들을 관리했는데 그녀 역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고흐의 작품들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막스 브로트가 있었다. 브로트는 카프카의 친구이자, 충고자였다. 자신의 사후 모든 작품을 불태워 없애달라는(그의 이런 소망은 나중에 히틀러에 의해 일부는 이루어진 했지만) 부탁을 거절한 사람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애독자라면 누구라도 막스 브로트에게 빚을 진 셈이다.

카프카는 1906년 6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은 긴급조치에 의한 강압정치를 더욱 강화해나간다. 레이몽 아롱은 "열강은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무언가를 행하고, 생산하고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려면 아직도 8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유럽 열강은 이미 전란의 징조들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를, 대내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병행하여 내부의 저항을 무마하려 들었다. 이미 '늙고 병든' 유럽은 영토 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억누르려 했고, 그 늙고 병든 유럽의 열강 중에서도 오스트리아와헝가리 왕국은 특히 노쇠해 있었다. 제국의 여러 곳에서 보통, 평등선거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1905년 11월에는 사회민주당원 20만 명의 데모, 공화정치 실현당의 비 국수주의적 저항, 노이만 등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적 국제 그룹의 저항 등 다양한 정치적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도 1913년 전쟁 발발 직전에는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잠잠해지고 만다.

카프카의 친구이자 <밀레나에의 편지>의 초간본 편집인인 작가 빌리 하스는 카프카의 문학에 대해서 "프라하에서 태어나지 않고 프라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자는 카프카의 문학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의 이면에는 카프카를 둘러싸고 있던 이중삼중의 억압이 프라하라는 도시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35살 까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의 시민이었고, 그 이후로는 체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이었고, 체코 사람이면서도 아버지의 요구로 그가 배운 모든 교육을 독일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비록 카프카가 평생 독일어 교육을 받고, 독일어로 작품을 쓰기는 했으나 그가 소설에서 사용하는 독일어의 어휘가 풍부하다거나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가족, 시대의 억압은 그를 내면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태인들로부터는 시오니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카프카는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를 혐오했고, 억압없는 이상사회를 꿈꿨다. 그는 노동계급의 권익 향상을 위한 성명서를 만들고, 아나키즘의 원조인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었고, 사회주의 서클에서 활동했다.

* 노동자 재해 보험국 직원이 된 카프카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카프카는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서 각각 6개월 간의 법관 수습기간을 마쳤지만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반 보험회사에 입사한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근무는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이었던 카프카에게는 매우 고된 것이었고, 그는 소설을 쓸 시간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1908년 노동자 재해 보험국 에 입사한다. 카프카는 1922년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할 때까지 14년간 이곳에서 근무한다. 원래 이 보험국은 사회보장법의 공포에 따라 설치된 반관반민의 기관으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험 업무를 진행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카프카가 주로 맡았던 임무는 기업의 이의제기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거나 노동자 재해 보험국의 일을 홍보하는 선전문을 작성하거나, 법률가로 법정에 출두하여 보험국을 변호하는 일, 라이헨베르크의 북부 공업지대의 공장들에 대한 감독 출장 등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카프카가 이곳 보험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근무한 까닭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는 보람과 함께 근무조건(오후 2시 퇴근)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글을 쓸 시간을 얻기 위해 엄격한 자기절제의 생애를 보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보험국의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한 시간의 산책을 하고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런 다음 밤 11시경에 쓰기 시작해서 새벽 2시나 3시 혹은 좀더 늦게까지 썼다. 이 무렵 유럽의 자본주의는 식민지의 안정적인 시장과 착취를 통해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지만 노동환경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카프카는 공무출장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의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는 시위운동에도 참가하고, 사회혁명가의 집회 믈라디찌 클럽 에도 참가하였다. 클라우스 바겐바흐는 카프카를 서민대중 편에 선 그 당시 유일의 작가라고 지적하고 있다.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이후 줄곧 내리막 길을 걸어왔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은 붕괴됐고, 프라하는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카프카는 이런 시대의 변화를 프라하라는 도시 안에서 고스란히 경험한다. 신생 독립국의 수도답게 프라하의 거리는 활기차 있건만 이를 바라보는 프란츠 카프카의 마음은 그리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새로이 건설된 시가를 거닐고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 우리의 시선은 불안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서 옛날의 비참한 골목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생시설의 보급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은 불건강한 구 유태인 거주지역은 우리 주위의 위생적인 신시가에 비해서 훨씬 현실적입니다.(G.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 문학과 현실, 창작과 사랑 사이에 선 카프카

카프카의 일생은 혼돈과 방황의 흔적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작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고, 그에게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림자는 짙었다. 그러나 프란츠 카프카는 1912년 그토록 말많고 우여곡절 많은 연애의 시작 펠리체 바우어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처음 펠리체를 만난 카프카는 1917년까지 무려 500여통에 이르는 편지 왕래를 시작했다. 그는 펠리체를 만난 처음 3개월 동안에만 100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만남을 통해 창작의 의욕을 북돋우게 되었는지 여러 편의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이 해 여름 카프카는 바이마르를 일주일간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이때 괴테와 실러같은 작가들의 흔적을 찾는데 주력했다. 한편 그의 친구 브로트는 로볼트 출판사를 방문하여 카프카의 단행본 출판에 대하여 협의했다. 브로트를 아끼던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브로트에게 언제 작품을 출판할 것인지 물었는데, 브로트는 자신의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보다 굉장한 작가를 발견했다며 카프카를 추천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쨌든 카프카의 첫 작품집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로볼트 출판사에서 800권 한정판으로 간행된다.

이후 몇 차례 더 카프카는 로볼트 출판사(이후에는 쿠르트 볼프 출판사란 이름으로 바뀐다.)에서 내는 잡지와 단행본으로 작품을 발표하지만 대중들로부터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1913년에 <화부>, 1915년에 <변신>, 1916년에 <선고> 등이 그것인데 카프카의 거의 모든 저작이 1천 내지 2천 부 정도 인쇄되었고,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팔리지 않았던 것 같다. <관찰>은 8백 권이 인쇄되었는데, 10여 년 후에도 언제나 구매가 가능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펠리체 바우어를 알게 된 카프카는 그녀와의 무수한 편지 왕래 속에 창작 의욕을 부추기게 되었지만 동시에 결혼이란 현실(어쩌면 카프카에게 결혼이란 그가 부모를 통해 학습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사이에서 갈등했다. 부활절 휴가를 맞아 카프카는 처음으로 베를린의 펠리체를 방문했고, 성령강림절 때의 두 번째 방문시에는 그녀의 가족을 소개받았다. 그 이후 카프카는 펠리체의 부친을 통하여 청혼할까도 생각했으나 결국 펠리체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만다.

저의 직장은 저로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직장은 유일한 욕망이자 유일한 직업인 문학에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고 문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와 결합을 한다면 제가 짐작할 수 있는 한 따님께서 불행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외부 사정뿐만 아니라, 저의 본래의 본성이 폐쇄적이고 말이 없고 사교성이 없는 불청객입니다. 저는 가정에서 선량하고 친절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남 이상으로 서먹서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으로 제가 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의 직장이 저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F. 카프카, <일기 1910~1923>)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펠리체의 아버지는 카프카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펠리체가 다가서면 카프카는 한 발 물러나고 펠리체가 물러나면 카프카가 다가서는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카프카는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의 여인에게 잠시 빠지기도 하고, 펠리체와 비공식, 공식 약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카프카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기력하고 무능하단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유능한 일중독자 아버지 헤르만과 스스로를 비교한 까닭에서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이나 결혼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일반적인 판타지적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는 펠리체와의 결혼을 족쇄로 여겼다. 그는 펠리체와의 약혼 6주만에 이를 파기했다. 그는 1917년 7월 펠리체와 다시 약혼을 하지만 자신이 폐결핵에 걸렸다는 것을 알자 펠리체와 다시 파혼한다.

* 점증하는 시대의 어둠 속에 소멸해 가는 영혼

시대와 함께 유행하는 병도 달라진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창궐하던 매독이 주춤하면서 널리 퍼진 병이 폐결핵이었다. 이는 급속한 산업혁명과 공업화로 인해 도시의 대기에 많은 공해물질이 널리 퍼지고, 공업용, 가정용 연료로 석탄을 많이 사용하던 당시의 환경에선 흔한 병이었다. 카프카는 5년 동안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각혈이 시작되자 병원에서 내린 진단 결과는 폐결핵이었다. 죽을 병에 걸린 카프카는 발병 사실을 오히려 홀가분하게 맞이했다. 그는 이제 한 사람의 성인으로 그에게 부과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었다. 그는 1922년 노동자재해보험국을 완전히 퇴직하게 될 때까지 병가와 직장 근무를 반복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1917년 9월 카프카는 동생 오틀라가 운영하는 농장이 있는 취라우로 떠나갔다. 카프카는 취라우에서의 생활을 통해 약혼녀 펠리체, 직장, 프라하, 부친 등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일상의 세계와 단절하고자 했다. 동생 오틀라는 카프카의 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카프카와 그의 작업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고 협조해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은 펠리체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려는 카프카의 결정에 반대했다. 부자간의 대립은 카프카의 파혼 문제를 놓고 극에 다다랐다. 결국 카프카는 펠리체와 결별했다.

펠리체와 헤어진 카프카는 체코인 여성 밀레나와의 교류를 시작한다. 활달하고 개방적인 여성이었던 기혼녀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적극적이었지만 카프카는 밀레나에게서도 멀어져 갔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자신의 일기와 작품을 맡기는 등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긴 했지만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그녀와의 이질성 등으로 인해 결코 맺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레나와 헤어진 카프카는 그 상처를 잊기 위해서인지 창작에 더욱 몰두했다. 밀레나는 카프카를 적극적으로 잡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 두 사람은 결별하는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했다. 훗날 밀레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당하지만 카프카가 맡긴 작품과 편지들은 우여곡절 끝에 빌리 하스에게 넘어간다. 빌리 하스는 독일 패전 이후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여 이를 <밀레나에의 편지>란 제목으로 출판한다.

건강이 더욱 악화된 1922년 카프카는 노동자재배보험국을 영구 퇴직하고 여동생 엘리와 함께 발트해의 뮈리츠에서 휴가를 보낸다. 그는 이 곳에서 그의 마지막 생애를 함께 할 여인을 만나게 되는 데 그가 바로 도라 디아만트였다. 그녀의 이때 나이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도라에게 흠뻑 빠진 카프카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의 살인적인 인플레에도 불구하고 매우 행복해 했다. 카프카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이때 유일하게 주위의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프라하를 떠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정을 꾸몄다. 이 때에도 역시 카프카는 많은 작품을 집필했는데 대개는 카프카의 요청으로 도라가 소각하였고, 나머지는 훗날 비밀경찰에 의해 압수되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도라와의 생활은 행복한 것이었지만 이 시기 카프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독일의 인플레이션과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영양부족에 시달렸던 것이 그의 병세를 치명적인 것으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 우리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아쉬워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 지상의 고통에서 구원되어 우리 종족의 무수한 영웅들 속으로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 더욱더 강화된 구원을 받아, 역사를 등한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서 잊혀질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외가쪽 친척들에 의해 다시 프라하로 옮겨진 카프카는 요양을 위해 비엔나 근교의 뷔너발트 요양소로 옮겨졌고, 다시 비엔나 대학 부속병원으로, 그리고 1924년 4월 말경에는 키에를링의 호프만 박사의 요양소로 옮겨졌다. 도라는 그의 곁을 밤낮으로 지키며 그를 간호했지만 1924년 6월 3일 자신의 41세 생일을 맞이하기 불과 한 달 전에 세상을 등졌다. 그는 6월 10일 프라하의 신 유태인 묘지에 묻혔다.

* 카프카와 실존주의 문학

하마터면 잊혀질 뻔했던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 보존하여 후세까지 이어지게 해준 가장 큰 공헌은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사르트르와 까뮈였다. 많은 작가들이 부인하는 일이고 실제로 독자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한 작품과 작가의 생애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 문제는 카프카에게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러나 작가의 삶과 작품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사르트르와 까뮈를 비롯한 실존주의 작가는 물론이요, 그의 작품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카프카에게서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존재의 불안을 발견하였다. 그는 현대라는 새롭게 시작되는 시대의 불안과 그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게 될 실존적 체험을 극한까지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 <변신> 에서 한 젊은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난 자신이 한 마리의 흉칙한 벌레로 변신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회사의 지배인은 그레고르가 왜 출근하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오지만 벌레로 변해있는 그레고르를 보고 그의 이런 변모가 회사문제와 관련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안으로 혹은 밖으로 잠긴 문을 통해 나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상사는 당신이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의심조차 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간단히 전화 한 통을 해보거나 그도 아니면 E-Mail을 한 통을 띄워놓고 당신을 잊을 지도 모른다. 영화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이런 카프카적인 불안을 <비디오 드롬> 같은 작품을 통해, 스티븐 소더버그는 영화 <카프카>를 통해 카프카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노동자를 억압하는 권력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성(城)>에 등장하는 조셉. K와 성의 관계는 우리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상징할 수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흔들 수 있는 국가 권력, 아니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심연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카프카의 가장 큰 매력은 그를 어느 한 부류로 구분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온다. 그는 절망과 희망을 씨줄과 날줄로 해서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을 고독하게 변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까닭은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여전하다는 것,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인간 소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고, 자본주의의 익명성에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형제 모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줌의 재와 비누로 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그의 작품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남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 참고 도서


* 카프카 엿보기/ 홍영철 엮음/ 선일문화사/ 1997년
홍영철 시인이 엮은 카프카의 아포리즘과 편지, 일기, 간단한 전기를 담고 있다. 오늘날 카프카의 작품은 그럭저럭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한때는 많은 부수가 판매되기도 했으나 그의 생전에는 정말 잘 팔리지 않는 작가였다. 이 책의 번역상태는 썩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 카프카문학 연구/ 박환덕/ 범우사/ 1994년
국내의 카프카 연구는 상당 부분 박환덕 교수에게 빚지고 있는 것들이다. 이 책은 그가 오랫동안 번역해 온 범우사판 카프카 전집에 대한 일종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 번역

예술과 사회 - 저자 ; Arnold Hauser 홍성사 1981
독일 피난민들의 대화 - 작가 ;J.W. von Goethe 민음사 1997 출간예정
프란츠 카프카 생애-작품-영향 (공역) - 저자 ; Hartmut Muller 솔 출판사 1997 출간예정
실종자 - 작가 ; Franz Kafka 솔 출판사 1998

* 논문

비교문학의 모색 : 카프카와 이상문학 - 문학사상 56. 문학사상사 1977
카프카 문학세계의 사회학적 분석 - 카프카연구 1집 한국카프카학회 1984
프란츠 카프카와 엘리아스 카네티와의 비교연구 - 어문연구 9집 경북대어학연구소 1984
프란츠 카프카와 道思想 - 교육대학원논문집 17집 경북대 1985
카프카의 비극은 프라하적 현상인가 - 외국문학 제 33호 1992
카프카문학의 새로운 해석과 수용의 가능성 - 人文科學 제 8집 (경북대 인문과학연구소) 1992
프란츠 카프카의 수용현상 (1) - 카프카연구 제 4집 (한국카프카협회) 1994
프란츠 카프카의에 있어서 환상적인 것 그리고 환상적 리얼리즘 - 人文科學 10집 1994년
카프카-프라그멘테 소고 - 카프카연구 제 5 집 (한국카프카학회 ) 1996년
괴테의 작품 '독일 피난민들의 대화'의 단편소설적 형식 연구 - 독일 어문학 제 7집 1998년


 

출처 / 시와 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