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생애 및 작품세계
■ 의식의 흐름意識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1910년에서 1920년대에 걸쳐 영국문학에 있어서 소설의 실험적 방법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1884에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사고의 흐름stream of thought이라 하였다. 1892년부터 의식意識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고 하였다.
개인의 의식에 감각․상념․기억․연상 등이 계속적으로 흐르는 것을 말한다. 문학에 이용하여 큰 효과를 거둔 의식의 흐름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의식의 흐름의 방법을 에두아르 자르댕의 월계수는 베이었다(1888)에서 배웠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1922)에서 의식의 흐름을 철저하게 추구하였다. 일인칭一人稱에 의한 내면의 독백으로 주인공의 성격전체를 알아 수 있도록 기분이나 감정 등이 리듬과 패턴에 따라 표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부인(1925)은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받아 의식의 흐름을 추구하여 성공했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극적 구성을 가진 파도(1931)는 내면의 독백에 의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시대의 여류작가 D. 리처드슨의 연작連作은 역시 의식意識의 흐름의 수법이었다. 그 후 미국의 작가 D. 파소스, 어네스트 헤밍웨이, S. 앤더슨, 포크너, T. 울프 등도 의식意識의 흐름을 활용하고 있다. 시인으로는 T. S. 엘리엇을 비롯하여 G. 스타인, 윌리엄스, 연극에서 E. G. 오닐, A. 밀러 등이 부분적으로 응용했다.
■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Joyce의 프로필
1882년 더불린Dublin 출생
1898년 유니버스티 칼리지에 입학
1900년 시와 희곡을 썼으며 입센의 새로운 드라마라는 평론을 발표
1902년 유니버스티 칼리지를 졸업
1914년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출간. 율리시즈Ulysses 집필시작
1916년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n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을 출판
1918년 리틀리뷰에 율리시즈Ulysses을 연재
1922년 율리시즈Ulysses가 파리에서 출간
1934년 율리시즈Ulysses가 뉴욕에서 출간
1936년 율리시즈Ulysses가 런던에서 출간, 시선집Collected poems이 뉴욕에서 출간
1939년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s Wake가 런던에서 출간
1941년 취리히에서 작고
■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Joyce 1882.2.2~1941.1.13
일찍이 제임스 조이스는 천재로 인정받았다. 인류에게 절연 당한 불운한 천재이다. 그렇게 많은 불만과 비난을 불러일으킨 작가도 흔치 않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제임스 조이스를 외설적이고 미친 작가라고 생각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율리시스의 판금을 마지막에 풀었다. 영국사람들에게 그는 괴짜이자 아일랜드 작가였다. 가장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미국사람들에게 그는 대단히 실험작가이며 너무나 냉정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20년 동안 프랑스에서 살았다. 프랑스사람들이 보기에 문인이라고 불리기에 세련된 합리주의가 아니었다. 이러한 조건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로서 제임스 조이스의 지위는 위협을 받았다. 그는 분명히 그에게 훨씬 미치는 못한 작가들보다 더 공격을 받았다. 현대시라면 엘리엇, 현대미술이라면 피카소처럼 현대소설이라면 제임스 조이스이다. 오늘날까지 현대예술에 피카소가 있듯이 제임스 조이스도 최고의 존경받는 예술가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제임스 조이스를 따라잡으려 쫓아간다. 또한 해설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율리시스 등 작품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의 인생으로 들어가서 사건과 창작의 복잡하게 뒤엉킨 양상을 보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의 인생은 현재의 관심을 지배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예술의 원칙이 된다는 점에서 일반 사람들의 삶과 달랐다. 제임스 조이스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소멸되도록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형성했던 체험을 재구성한다. 그는 포로인 동시에 해방자이다. 체험을 재형성하는 과정은 그의 인생의 일부이자 잠드는 것과 같은 되풀이되는 시간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체로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순간들의 행적은 뚜렷한 순간의 흔적과 더불어 축적된다. 사소한 사건들도 그 의미를 나타내기 시작하고 특징들은 되풀이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을 나쁘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쁘게 말한 사람들은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은 살아있는 생물체이기라도 한 듯 힘들여 손에 넣었다 싶으면 어느 새 빠져나가 저 만치서 혼잡스럽게 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신비함을 추구하는 탈현실적인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미로를 헤쳐나가더라도 우리가 찾는 출구가 아닌 체험하지 못한 더 많은 미로迷路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중세의 수사修士가 꼼꼼히 필사筆寫한 듯한 작품은 아주 논리적이다. 더러 현학적인 부분도 보이지만 일상생활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실험적이면서 서구의 전통문학의 맥락을 잇고 있었다. 다층적이고 상충적인 변화무쌍한 작품은 미궁迷宮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경이로움에 희열을 맛보게 된다. 우리에게 완전한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탐험을 촉구한다. 그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의 주제는 국가, 종교, 언어言語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국교 카톨릭교, 작가의 표현수단인 언어言語이다. 이것을 ‘세 개의 덫’이라고 말했다. 이 세 주제를 중심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삶의 체험과 문학이 있다.
젊은 시절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에서 살았던 제임스 조이스에게 더불린의 체험은 역사의 악몽惡夢이었으며 또한 작품의 토양土壤이었다. 아일랜드섬島 동쪽 해안 아이리시바다海와 더블린만灣 앞쪽 리피강江 하구河口에 더블린Dublin이 있다. 아일랜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교통은 철도와 로열운하運河, 그랜드운하運河 등으로 연결되었다. 20세기 문학에 커다란 변혁을 이룩한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에서 출생했다. 예수회會 계통系統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리스, 라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각국어各國語을 능숙能熟했다. 일찍부터 입센, 셰익스피어, 단테, 엘리자베스 왕조시인, 플로베르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T. 아퀴나스, 비코 등의 철학을 섭렵涉獵하였다. 아일랜드의 문예부흥 기운에 반발하여 학교 졸업과 동시에 파리로 갔었다. 1904년에 벌리츠 학원의 영어교사로 러시아의 폴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등지에서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취리히로 피난했다. 1920년부터 파리로 옮겨 새로운 문학의 핵심적 존재가 되었다. 주변에 여러 나라의 시인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침입을 받자 다시 취리히로 가서 병으로 죽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고향 더블린을 버리고 37년간동안 망명자亡命者로 유럽을 방랑하였다. 빈곤과 고독 속에서 눈병에 시달리면서 남과 다른 새로운 문학작품을 집필하였다. 작품의 대부분은 아일랜드, 더블린, 더블린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한때 신문발행과 영화관 경영을 계획했었으나 둘 다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7년 고전적古典的 연애시戀愛詩를 모은 시집詩集 실내악室內樂Chamber Music을 발표했다. 1914년에 단편집短篇集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을 출간하였다. 이미 1905년 이전 탈고脫稿로 몇 편을 발표했었다. 그 후 1914에서 1916년까지 에고이스지誌에 연재된 자서전적自敍傳的 소설小說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1917)은 의식意識의 흐름에 의한 따른 심리묘사心理描寫로 주목注目받았다. 이어서 3막의 희곡戱曲 유인流人(1918)을 간행했다. 1918년부터 율리시스Ulysses(1922) 일부를 미국의 잡지雜誌 리틀리뷰에 발표하였으나 사회풍기社會風紀에 유해有害하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제임스 조이스의 존재가 세계에 알려졌다.
1922년 파리에서 대본업자貸本業者 미국인 여성 실비아 비치의 희생적 노력으로 율리시스가 간행되었다. 율리시스Ulysses의 간행으로 문학적 명승은 더욱 높아졌으며 그의 작품은 독일어獨逸語와 프랑스어語로 번역되었다. 또한 수많은 연구해설서硏究解說書가 출간되었다. 한국판韓國版 연구해설서는 율리시스Ulysses주역본註譯本으로 범우사(1988년)에서 출간되었다. 마지막 작품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1939)는 진일보한 실험적 작품으로서 율리시스Ulysses에서 사용된 의식意識의 흐름의 수법이 구사되었다. 오늘날의 소설은 매스컴에 용해되어 있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는 대중성을 거부할 수 있었던 최후의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인이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언어와 문학을 공부하며 광범위하게 책冊을 읽었다. 19세기 말에 출간된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그가 읽지 않은 작품은 거의 없다. 아버지 존 조이스는 집에 빵이 있건 없건 책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었다. 그의 독서讀書는 다양성多樣性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은 하찮은 서정시에서 방대한 백과사전百科辭典으로 끝난다. 유아기에서 노년, 탄생에서 죽음,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에서부터 문을 열지 않으려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풍경을 관찰한다. 그는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쾌활, 침울, 신뢰, 의심, 사랑, 혐오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그는 호메로스와 그다지 닮지 않았다. 그러나 율리시스Ulysses에서 블룸의 배후背後에 호메로스의 신화神話가 떠돌면서 작품의 흐름을 끊임없이 바꾸어 놓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좀더 기본적인 유사함은 사물事物을 통해서 언어言語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언어言語를 통해서 사물事物에 이른다. 하찮은 도시인都市人에게 영웅의 무게를 실어준 것은 제임스 조이스가 처음이었다. 그는 인간의 최선의 품성品性을 흠집 없이 간직하고 이를 전달하도록 선택된 겸손한 인간人間이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성깔이 있는 작가였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어딘지 토라져 있다. 어처구니없는 젊은이, 수동적受動的인 어른, 술주정꾼 노인老人 등이었다. 이들을 좋아하기는 힘들고 존경尊敬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는 이들을 좋아하고 존경尊敬하고 싶었다. 우리는 자신의 허식虛飾이라는 자애물障碍物을 뛰어넘음으로써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의 주인공主人公들을 좋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정복偉大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그를 정복偉大해주기를 요구했었다. 그는 스스로 중산층中産層 계급階級의 인간人間으로써 낭비벽浪費癖과 음주벽飮酒癖이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했었다. 그의 작품을 가득 채운 이름 없는 웨이터, 제단사裁斷師, 과일장수, 호텔짐꾼, 관리인, 은행원 등 거의 무명無名의 인간人間인 도시인都市人들에게서 끌어 모은 수천 개의 어구語句에 존재한다.
자신이 말했듯이 처음 악동惡童으로 출발해서 마지막에 괴짜 노인老人으로 끝난다. 돈에 대한 무관심無關心과 알코올에 대한 관심關心과 위험威嚴이나 기품氣品이 결여된 그 밖의 행동行動 등 비난받아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묻는 질문質問에 대답해야 한다. 누가 훌륭한 인간人間인가 라는 질문質問에 대하여 말이다. 그의 작품의 위대偉大함에 대한 새로운 개념槪念이 내포內包되어 있다. 그것은 광채光彩를 말하는 위대偉大함이 아니다. 때때로 언어言語나 행동行動의 표면表面에 도달하려고 깊이 잠복潛伏해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偉大함이다. 그의 생애에서 그와 같은 위대偉大함을 발견할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편협偏狹하고 별나고 무책임無責任하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包容하고 무정無情하고 당당한 것이 바로 제임스 조이스의 위대偉大함이다. 알수록 난해難解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치價値 있는 위대偉大함이다.
■ 작품세계
*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14에서 1916년까지 에고이스트지誌에 연재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肖像을 1916년에 간행하였다. 자전적自傳的인 요소가 있으나 단순한 자전소설自傳小說은 아니며 5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小說은 장마다 문체文體가 조금씩 달라진다. 의식意識의 흐름의 수법手法으로 쓴 심리묘사心理描寫가 작품 전체를 일관一貫한다. 주인공主人公 스티븐 데덜러스의 유년기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자아형성自我形成을 부드럽고 섬세纖細하게 묘사描寫하였다. 제 5장에서 조국祖國과 종교宗敎와 가정家庭을 부정否定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식式 예술론藝術論이 대화對話 가운데 펼쳐진다. 그 뒤에 나온 대표작代表作 율리시스Ulysses의 전초적前哨的 역할役割을 하였다.
스티븐 데딜러스는 가정家庭과 모국母國과 교회敎會를 더 이상 섬기지 않겠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신적 자유自由의 선언宣言이었다. 자신을 구속拘束하는 세 가지의 덫 곧 민족주의民族主義, 언어言語, 종교宗敎를 벗어나려는 시도試圖였다. 당시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아일랜드 작가들은 강한 민족주의民族主義 성향이 깊었다. 예이츠 같은 작가들은 영국과 구별되는 아일랜드 고유의 정신을 정립하려 했다. 아일랜드의 고어古語인 게일어語를 부활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제임스 조이스는 과거 지향적이기보다도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태도를 가졌다. 제임스 조이스에게 아일랜드의 정신은 과거가 아닌 미래未來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미학美學은 신학神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스티븐 데딜러스의 미학의 이론은 신학神學의 파편들을 모아 다시 짜 맞춘 것과 같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神學을 자신의 예술藝術에 접목接木시켜 독특한 미학이론美學理論을 만들었다. 미학美學의 이론理論이 종교宗敎가 아니라 예술藝術이라는 점이 순교자殉敎者의 삶이다. 예술가藝術家에 대한 이미지image는 신神과 같은 창조자創造者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수와 같은 순교자殉敎者인 것이다. 스티븐 데딜러스는 암시적으로 순교자殉敎者와 구원자의 역할을 번갈아 가며 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모국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포부는 메시아 같은 인상마저 준다. 카톨릭이라는 종교宗敎를 포기하고 예술藝術을 신앙으로 삼았다.
제임스 조이스는 국가國家, 언어言語, 종교宗敎 이 세 가지의 덫을 극복하려고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으로 갔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덫이 아이러니컬하게 그의 작품의 주제主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숙成熟의 기반基盤이 되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에 대한 기억을 작품 속에 반복하여 다룸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재현再現해 냈다. 아일랜드의 역사歷史쓰기를 평생 반복함으로써 조국의 양심良心, 곧 아일랜드의 정신精神을 새롭게 창조했다. 결국 의식의 뿌리인 아일랜드는 제임스 조이스를 통해서 유럽적인 영양을 받아 서구 문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는 종교적으로 로마, 그리고 정치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어린 시절 정치적 혼란과 논란이 난무하는 사회로부터 성장하면서 두 가지 문제問題가 깊이 각인되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크리스마스 정찬正餐 중에 벌어진 어른들의 언쟁言爭은 이를 잘 반영한다. 조이스는 정신적 또는 사회적인 식민지상태植民地狀態의 이일랜드를 비통悲痛해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아일랜드 사람들의 대처 방식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核心인 사랑, 그리고 인간의 화합和合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어른들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언쟁言爭 속에서 힘없이 무너진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편협성과 배신이 영웅적인 주인공主人公을 통해서 어떻게 무너지게 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 더블린사람들Dubliners
1914년 런던에서 단편집으로 출판되었다. 1905년경 제임스 조이스가 23세 때에 이미 완성하였으나 출판사와의 분쟁으로 출판이 늦어졌다. 수록된 작품은 모두 15편으로 더블린의 환경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감정, 지성, 종교, 정치에 있어서의 마비상태를 관찰하고 자연주의적인 필치로 묘사하였다. 그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죽은 사람이 손꼽힌다. 그 마지막 부분에서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시도되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젊었을 때 쓴 습작이나 20대에 쓴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등장 인물들은 마치 어떤 힘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는 양 한결같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한다. 이 힘이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희생자가 된다. 이 도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마비’ 된 자들로 ‘삶의 잔치에서 쫓겨난 자’라고 불렸다. 이일랜드 교회는 도덕성을 내세워 정치에 개입하여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아일랜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조이스가 아일랜드에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는 문화에 대하여 전적으로 현대적이고 실용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이상적이거나 고답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철저하게 일상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더블린 사람들을 포함한 15편의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 자매들에서 의도적으로 시작부문에 두었다. 여기에서 늙고 마비되고 정신적으로 불구자와 같은 신부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교회는 더블린 사람들의 일상과 정신에 깊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 모든 단편에서 교회건물, 예배와 같은 종교의식, 기도시, 카톨릭 종교의식, 등장인물들의 신앙심, 그리고 이들의 카톨릭 도덕관이 나타나 있다. 첫 번째 스토리에서 본 신부의 마비증세를 시작으로 하여 다른 모두가 정신적 마비증세를 보인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가 갖고 있는 힘이 아일랜드의 마비를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교회는 정치, 교육 ,문화 등 이일랜드 사람들의 삶의 전번에 걸쳐 아일랜드 사람들의 정신을 관장한다고 파악했다.
* 율리시스Ulysses
율리시스의 공간은 제임스 조이스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이다.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일어난 사건을 734면에 걸쳐 서술하였다. 중요한 등장인물은 세 사람이다. 유대계의 광고업자 레오폴드 블룸과 그의 부인 마리온과 학생이며 시인 기질이 있는 스티븐 데딜러스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성은 호메로스의 오댓세이Odyssey를 모방하였다. 오댓세이Odyssey의 형식을 빌려 그리스 영웅담에 나오는 인물과 에피소드가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에피소드와 비교되어 있다. 블룸은 오디세우스, 마리온은 페넬로페, 데딜러스는 텔레마코스에 해당한다. 또한 오댓세이Odyssey와 마찬가지로 모두 18에피소드의 결합으로 구성하였다. 각 에피소드도 오댓세이Odyssey와 대조되게 하였다.
1918년에서 1920년까지 뉴욕의 문예잡지文藝雜誌 리틀 리뷰Little Revie에 연재 중 게재금지揭載禁止를 당했다. 그러나 1922년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출판하였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Ulysses에서 의식意識의 흐름과 내면의 독백을 활용하였다. 신문의 제목, 음악적 요소, 영화․연극 중의 대화, 고전작품의 패러디 등을 종합적으로 채택한 작품이다. 종래의 소설 형식을 근본적으로 뒤엎은 획기적인 작품으로서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1904년 6월 16일은 조이스의 팬들이 블룸의 날Bloomsday로 정하여 기념하는 날이다. 율리시스Ulysses의 솔직한 묘사를 외설과 부도덕이라고 했다.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발행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어, 독일어 등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얼마 후에 유럽과 미국에 끼친 영향이 컸고 율리시스에 대한 연구서적도 많다. 1967년 마침내 영국에서 영화화되었다. 1968년에 정음사正音社에서 한국 최초로 율리시스Ulysses가 간행되었었다.
율리시스Ulysses에서 그리스의 신화神話와 아일랜드의 현대사회現代社會를 접목接木시켰다. 왜 오딧세이Odyssey를 차용했는가에 대해서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재현함으로써 이것을 이상화하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접근방식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발상이다. 율리시스Ulysses에서 더블린은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비하여 더 적나라한 방법을 썼다. 더블린에 대한 자로 잰 듯한 정확한 묘사와 실제인물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 그리고 그 곳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소재를 삼은 율리시스는 아일랜드의 현대문화사이다. 이 지구상에서 더불린이 갑자기 사라질 경우 더불린을 재건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묘사를 했다. 율리시스Ulysses는 세계의 역사이며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시간과 강과 산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아일랜드를 사랑했으며 민족의 양심을 재창조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천재성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 있다. 현대문학에 대한 기여 또한 언어를 통한 문학기법이다.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 만큼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그 이상의 언어를 통한 기교를 볼 수 없다. 평생 언어에 젖어서 살았다. 또한 언어는 더 이상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도구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언어는 리얼리티를 창출하는 주체적인 기능을 가진다. 율리시스는 전통적인 언어구사를 뛰어넘어 언어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순을 문법과는 다르게 재배치하거나 단어의 철자를 자유자제로 고쳐 쓰고 합성어를 만들고 통상적인 구문을 바꾸었다. 언어는 명백한 의미만을 전달하는 단순한 배치가 아니며 언어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조성하고 조종해 가는가를 보여주었다. 가장 큰 발견은 언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자생력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어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언어실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서 말했던 민족주의와 카톨릭교가 표방하는 인식의 틀에 대한 저항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렇듯 언어와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이 직결되어 있음을 알았을 때 언어의 해방은 곧 인식의 해방을 뜻한다. 또한 리얼리티의 허구성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언어를 통해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의 폭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가 없다면 리얼리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법자의 언어 곧 통상적인 언어를 깬다 말은 현재까지 우리에게 익숙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래서 진리라고 생각하는 인식과 통념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세 가지의 덫 가운데 하나인 언어의 덫은 언어 속에 갇힌 인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법자의 언어는 안식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의 지평을 넓혀 주고 이로써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 또한 넓힐 수 있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교회와 모국에 봉사할 것을 거부하고 예술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이 언어의 마력을 알았으며 이 마력의 힘으로 아일랜드의 양심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언어와 문학형식의 혁신적인 실험자로서 예술적인 삶을 살았다. 문학작품이란 인간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난해한 작가라 할지라도 그 난해함을 극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특유한 문학적 구조의 예술체험을 하게 된다.
*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
제임스 조이스의 마지막 작품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는 언어가 영어이다. 그러나 다른 외국어가 많이 섞여 있다. 또한 사용된 대부분의 영어는 대부분 해체되어 단어의 원래의 모양을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 작품에서 언어는 전혀 투명하지 않고 애매 모호하며 극히 불안정한 존재이다. 유동적인 언어는 마치 생명체처럼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언어들은 그 자체로써 언어가 지닌 어떤 자성으로 인하여 자신들끼리 뭉치며 나뉘며 역동적力動的으로 작용하여 다양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작용으로 인하여 때로는 지극히 순수한 제임스 조이스적的인 언어의 유희遊戱를 볼 수 있다. 가장 많이 쓰는 기법은 한 단어를 두고 이중적二重的이거나 다중적多重的인 의미意味를 암시暗示한다. 가령 동음이의同音異義를 사용한 익살pun이라고 할 수 있다.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에서 가장 큰 발견은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이 작품에서 자생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어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언어를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보다는 언어의 속물적 속성을 더 고려하게 한다. 언어를 어떤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의미의 구현체로 보기보다는 언어의 소리에 주시하게 되는데 대체로 소리 위주로 쓰여졌다. 이 작품에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해학과 풍자, 그리고 독특한 언어기법으로 전대미문이라 할 수 있는 글쟁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의 쉠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티븐 데딜리스와는 판이하다. 스티븐 데딜리스는 자신감이 넘쳐 조국의 양심을 창조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태양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이카루스처럼 신화적이고 영영적인 이미지를 구현했었다.
그러나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의 문사 쉠은 무척 왜소한 겁쟁이로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남의 글이나 모방하는 표절자剽竊者로 묘사描寫된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모든 언어들을 수집하고 적어둔다. 그래서 썩은 고기에 코를 킁킁대는 조숙한 자라든지, 무덤을 파는 자라든지, 선량한 언어의 가슴속에 악마의 둥지를 트는 자라고 심한 비난을 받는다. 쉠에게서 스티븐 데딜리스가 지녔던 추상적이며 고양된 정신세계를 찾아볼 수 없다.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에서 언어는 더 이상 정신적인 영역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피네건스 웨이크Finneganꡑs Wake는 전체적으로 언어의 물질적 속성을 부각시킨 텍스트이다. 1부 7장에서 언어의 속성은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여성언어는 강물의 흐름에 비유되는데 언어가 지닌 리듬과 시의 음율을 살려서 리듬감感 있는 물소리처럼 들리게 한다. 이렇게 언어로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구현해 냈다. 또한 물질적인 특성을 살려서 단어로 하여금 어떠한 의미에 제한되는 것을 거부한다. 언어는 다양한 의미를 산출하게 되며 이것은 리얼리티에 대한 어떠한 관점이 허용되지 않는다. 언어와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이 직결되었음을 알았을 때 언어의 해방은 곧 인식의 해방을 뜻한다. 언어가 없다면 리얼리티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통사적인 언어를 깬다는 것은 통념을 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조국과 교회를 거부하고 예술에 헌신했던 것도 언어의 마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마력의 힘으로 아일랜드의 양심을 창조할 수 있었다.
출처 / 시와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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