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합루(宙合樓)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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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장 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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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로 후원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창덕궁(昌德宮)이다. 그 창덕궁의 후원에서도 가장 빛나는 대목은 부용지(芙蓉池) 연못을 둘러싼 풍광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창덕궁을 찾아갈 때마다 언제나 이곳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번듯한 이층 누각이 위엄있고 자애롭게 남쪽을 굽어보고, 남쪽에서는 작아서 아담하지만 귀품있는 수정(水亭)이 두 팔을 연못 속에 잠그고서 공손하게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마치 임금과 신하가 마주 하여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북쪽의 이층 누각은 주합루(宙合樓)요 규장각(奎章閣)이 들어 있던 건물이다. 정조임금은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주합루를 세우고, 임금의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등을 간직하도록 하였고, 이곳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학자들을 양성하고 학문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던 곳이다. 부용지 연못을 돌아 주합루에 오르려면 ‘어수문’(魚水門)이라는 대문이 있다. ‘어수’라는 말은 유비가 제갈량을 너무 친애하는 것을 보고 관우와 장비가 좋아하지 않자, 유비가 이들을 타이르면서 “나에게 제갈량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데서 유래한다. 현명하고 유능한 신하 없이는 임금 자신이 존립할 수 없으니, 임금으로서는 신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잘 선택해서 써야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 보인다. |
부용당에 군자는 간 곳 없고 바람만 쓸쓸해 |
그래서 어수문 앞에 연못이 있다는 것이 너무 잘 어울린다. 정조는 이 연못에 비단 돛을 단 채색한 배를 띄우고 꽃을 감상하거나 고기를 낚기도 하였다 한다. 연못 이름은 부용지요, 부용은 연꽃이다. 송나라 주렴계(周濂溪)는 연꽃을 사랑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지었는데, “연꽃은 꽃 중에 군자다”하였으니, 연꽃은 군자의 상징이라 할만하다. 연못에 청초하고 향기가 은은한 연꽃이 가득 피어나듯이 신하들에 소인배가 아니라 군자들이 모여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용지’라 이름붙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부용정 정자는 연못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가 우뚝하게 피어오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임금을 도와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어진 재상의 모습일 것 같기도 하다. ‘규장각’이란 명칭은 숙종이 정해놓았던 것이고 편액까지 어필로 써두었던 것이지만, ‘주합루’의 명칭은 정조가 정한 것이고 편액도 정조의 어필이다. 그런데 ‘주합루’는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세손(世孫)시절부터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정조가 세손시절 자신이 연구하며 노닐던 곳을 ‘주합루’라 이름붙이고, 강학하던 곳을 ‘홍재’(弘齋)라 이름 붙이자, 세손의 우빈객(右賓客)이었던 서명응(徐命膺)은 세손을 위해 「주합루기」(宙合樓記)와 「홍재기」(弘齋記)를 짓고서 그 뜻을 사(詞)와 시(詩)로 읊기도 하였다. 정조의 세손시절 주합루가 어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위에 오른 뒤에 곧 바로 주합루를 세웠던 사실을 보면 정조가 ‘주합’이라는 명칭에 오랜 기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
임금의 덕은 무엇보다 포용력이 최선 |
그런데 ‘주합’이라는 말은 『관자』(管子) ‘주합’(宙合)편에서 나온 말이다. 『관자』에서는 ‘주합’의 뜻을 풀이하여, “위로는 하늘의 위로 통하고, 아래로는 땅의 아래까지 내려가며, 밖으로는 사해의 바깥까지 나가, 천지를 둘러싸서 하나의 보따리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라 하였다. 만물은 천지 속에 들어 있고 천지는 ‘주합’ 속에 들어 있다고 하니, ‘주합’이란 천지와 만물을 모두 싸안고 있는 우주를 말하는 것이다. 정조가 세손시절 자신이 독서하고 사색하던 곳이나 왕위에 오른 뒤에 임금의 초상과 글과 글씨를 간직하고 학자들이 연구하는 건물에 ‘주합루’라 이름 붙였던 데는 깊은 뜻이 간직되어 있는 것 같다. 온갖 다양한 이해와 주장들이 부딪치는 현실 앞에 선 통치자로서, 마치 온갖 소리를 절제하고 조화시켜 아름다운 음악으로 이루어내는 지휘자처럼, 모든 것을 두루 포용하여 조화로운 세상을 이끌어내겠다는 큰 뜻을 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임금이 온갖 소리의 악기를 조절하여 음악을 이루어내면, 신하는 온갖 맛의 자료로 음식을 만들어 낸다”는 『관자』의 말을 음미하면서, 통치자로서 임금의 덕은 무엇보다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포용력을 발휘하는데 있음을 절실히 확인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이 점에서 선왕인 영조의 정치철학은 당쟁의 갈등을 잠재워 화해시키는 ‘탕평’(蕩平)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정조의 통치철학은 한 걸음 나가 더욱 적극적으로 모든 대립을 감싸서 하나로 조화롭게 통합하겠다는 ‘주합’(宙合)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조의 꿈은 우주적 통합을 실현하는 이상사회였지만, 현실에서 신하들은 여전히 붕새의 큰 뜻을 모르는 참새의 아집(我執)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당파적 이해에 매달려 있었으니, 창덕궁 주합루에서 내다보면 부용지에는 향기로운 연꽃이 제대로 피어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착잡한 생각이 부용정과 어수문 사이를 오랫동안 방황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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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산연구소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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