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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생애 및 작품세계

by 丹野 2012. 1. 5.

 

 

 

알베르 카뮈의 생애 및 작품세계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프로필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몽도비 출생
1926년 지드의 사전꾼들, 지상의 양식. 말로의 서양의 유혹, 정복자, 왕도 탐독
1928년 1930년까지 알제대학 축구팀 골키퍼
1930년 문과반에서 장 그리니에 선생을 만나다
1932년 잡지 쉬드sud에 4편의 글 발표
1933년 말로의 인간조건, 푸르스트의 작품 탐독
1938년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의 황혼. 키에르케고르의 절망론 탐독
1940년 이방인 탈고
1942년 이방인 출간
1943년 시지프의 신화 출간
1944년 사르트르와 만남
1946년 페스트 탈고, 전투지誌 편집장에서 물러나 창작활동에 전념
1947년 페스트 출간
1951년 반항적 인간 출간
1957년 10월 17일 노벨문학상 수상
1960년 1월 4일 몽트로 근교 빌블르뱅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이야기

알베르 카뮈에 있어 아침이슬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아침이슬의 이미지는 물이다. 공기의 물이다. 물기가 밤의 한기寒氣를 만나서 이슬이 된다. 이처럼 이슬은 밤사이에 만들어진다. 이 아침이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아침의 태양이 있어야 한다. 이슬은 밤과 낮이 만나는 경계에 있다. 어둠과 빛太陽이 만나는 경계선 위에 있다. 그러나 태양 빛은 이슬을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사라지게도 한다. 이슬은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 있다.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가 좁으면 좁을수록 이슬은 더욱 찬란하다.

이처럼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상의 있는 아침이슬의 이미지는 시간적인 의미이다. 또한 아침이슬은 이 세상에서 일정한 부피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존재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슬 이미지가 갖는 공간적 의미가 될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를 넘나드는 경계선상에 있는 아침이슬은 이처럼 양극단의 것을 한 몸에 안고 있다. 이처럼 이율배반으로 보이는 아침이슬을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신앙 그리고 예술의 원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율배반과도 같은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태도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예술이라는 수단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세상에서 가장 젊고 가장 싱싱한 것이 이슬이다. 그 가운데서 특히 타파사의 돌 위에 맺힌 이슬이다. 고대의 로마 폐허도시 타파사가 주는 울림은 감수성이 많은 작가를 담금질했을 것이다. 이슬은 대기의 진수를 뽑아내어 그 변화의 상태를 그 변화 중의 정지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슬은 고정이 아니면서 고정이며 변화 중의 한 상태에 불과하다. 타파사의 폐허에서 인간은 유한하다는 사실에 대한 또 하나의 살아있는 증거였을 것이다. 타파사의 돌 위에 맺힌 아침이슬은 알베르 카뮈의 영원한 고향이었다.

아침이슬은 언제나 알베르 카뮈의 대조기법에 의해서 아주 오래된 폐허의 땅 타파사의 돌 위에 응고하여 맺힌다. 이 때의 돌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돌이다. 아침이슬 이미지의 시간적 또는 공간적 의미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여기에서 알베르 카뮈가 말하려 하는 이슬이 맺히는 돌 이미지에 대한 정확한 내력을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알베르 카뮈의 예술은 정지停止와 합체合體에 있다. 모든 충일함과 위대함은 정지에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어떤 제한을 통해 고정시킬 때에만 어떤 동작이나 예술작품의 충만함이 실현된다.

다시 말해 예술의 진수는 정지와 한 몸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이다. 이것은 돌의 이미지이다. 바로 행복한 죽음, 곧 행복한 삶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와서 하나의 돌이 디는 것이다. 출발점으로 돌아와 물이 된다는 거이다. 우리의 상상력에서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구절과 함께 흙의 응고된 형태가 돌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이슬이 맺혀 있는 타파사가 바로 이런 돌로 되어 있는 폐허이다. 돌은 무엇보다도 그 내적 응집력과 부동성에서 불변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덧없는 시간을 건너뛰고 온갖 변전을 초월한다.

돌은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는 덧없고 무상한 역사와는 상관이 없다. 정지와 한 몸의 예술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돌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돌은 예술이다. 아름답다. 그리고 예술이기에 구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돌이 있는 풍경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준다. 또한 그 속에 구원이 담겨 있는 세계의 풍경이 펼쳐진다. 돌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정지해 있으나 많은 행동을 담고 있다. 인간보다 영속하는 자연물, 그 가운데서 정지하여 한 몸으로 응축되어 잇는 돌, 거기에다 온기까지 간직하고 있는 돌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뛰어들어 안겨서 비비고 한 몸으로 변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체온을 가진 인격체의 돌을 말한다. 자연의 유혹은 마침내 돌과 한 몸이 되고 싶어했던 유혹을 자신 스스로 무화無化시키고자 하는 충동으로 변화시킨다. 꿈쩍도 않고 제자리에 버티고 있는 영원한 정지인 돌은 온갖 풍파를 견디어낼 때 더욱 위엄을 떨치며 시샘을 재촉한다. 신들도 부러워하게 된다. 돌로 변하고 싶은 욕망은 인간으로써 당연한 욕망인지 모른다. 신도 부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인간으로서 이러한 존재론적인 변화에 앞서서 공간적인 변화부터 선행해야 할 것이다. 돌을 향해 접근한다는 공간이동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평범한 돌이 되어 기쁨에 젖어 움직이지 않는 세계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돌이 되었기에 행복하고 행복하기에 기쁨에 젖는다. 그러나 돌=행복만은 아니 것 같다. 돌이 되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돌로 되돌아왔기에 행복한 것이다. 되돌아온다는 것은 통일을 찾기 위한 필연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돌의 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부동세계의 진실, 곧 움직이지 않는 세계의 진실은 바로 돌이다. 돌은 정지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돌은 시간적 의미의 정지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의미의 부동이며 한 몸이다. 이런 의미가 있는 돌 위에 맺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있는 아침이슬은 예술과 삶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돌 위에 맺힌 아침이슬과 신앙과 삶의 원칙 사이에는 아무런 비약도 없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스무 살 때 작가가 죽으면 그의 작품의 중요성이 과장되는 것처럼 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위상도 과대평가 받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과소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알베르 카뮈에 있어 40대의 지평은 부조리였다. 그리고 50대의 지평은 반항이었다. 세련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가 득세하고 있던 프랑스의 환경에서 사상가이자 모랄리스트인 그가 고립되어 있었다. 알베르 카뮈는 환상은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부조리와 반항의 정신에 대해 전투적인 태도마저 거부한 것은 아니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 혁명이래 등장한 수많은 혁명가와 예술가․철학자․ 정치가들의 사상과 행동을 검토 분석한 끝에 형이상학적 반항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혁명운동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반항정신에는 스스로 절도節度를 지킬 줄 아는 '긍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唯物史觀을 비판하고, 점진적 중용中庸의 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반항적 인간의 '중용'과 '균형'을 말하고, 결론적으로 절도와 사랑이 주축이 되어 니힐리즘의 암흑을 밝히는 밝고 찬란한 '정오의 사상', '태양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알베르 카뮈의 예술에 관한 생각은 반항적 인간 가운데서 반항과 예술에 잘 나타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1942)에서 모든 가치를 부정한 부조리의 철학을 다루었다. 그리고 반항이라는 개념과 정치적․역사적 혁명을 대비시켜 반항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또한 새로운 가치를 탐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는 혁명적 논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과 친親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 격렬한 논쟁을 야기 시켰다. 특히 혁명과업의 수행을 강력히 주장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알베르 카뮈 사이에 전개된 1952년의 논쟁은 두 사람의 10년 우정에 파탄을 가져올 만큼 격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부조리의 가운데서 정의와 인간성을 찾으려 했던 휴머니스트이다. '부조리'와 '반항'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몬도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다. 스페인계係 어머니는 귀와 입이 부자유스러운 문맹文盲이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일차대전에서 전사하여 외조모 댁으로 옮겨가 가난한 거리에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와 아랍어가 뒤섞인 저자의 방언으로 말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고학으로 학업을 계속한 그는 알제 대학 철학과에서 그리스 철학을 전공했다. 이 때 쟝 그루니예 교수를 만나 철학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7년 결핵으로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하고 저널리스트로 전향했다. 그리고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비판적인 르포와 논설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카뮈는 프랑스 사상계와 문학계를 대표할만한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르네 샤르 등과 교유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신이 사라진 부조리한 시대의 자유와 반항의 가능성을 독특한 소외자의 시선으로 소설 이방인(1942)을 파리에서 썼다.

또 부조리한 주인공의 원형적 인물인 시지프를 탐색한 유려하고 사려 깊은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1943)를 출판하여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다. 이어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그 악성과 부조리함을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한 소설 페스트(1947)로 문학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마르크시즘과 니힐리즘에 반대하며 제3의 부정정신을 옹호하는 평론 반항적 인간(1951)을 발표하여 사르트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잠시 침묵했던 카뮈는 전락(1956)과 추방과 왕국(1957)을 발표하여 존재를 확인시켜주었다. 1957년에 그의 전 작품을 대상으로 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했다. 그 막바지에서 1960년 1월 4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카뮈는 20세기 전반기의 불안과 절망의 세대에 살면서 자연과 인간을 조화시키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균형을 발견하고, 부조리의 가운데서 정의와 인간성을 찾으려 했던 휴머니스트로서 세기적인 작가였다.


■ 작품세계

* 표리表裏 안과 겉 1937

대학시절에 연극에 흥미를 가지고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초기작품 표리表裏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민과 존재의 부조리성不條理性 문제 등이 서정적인 에세이로 서술하였다. 이때 이미 아름다운 산문으로 시인의 자질이 뚜렷이 보였다. 아래는 로제키요가 쓴 표리表裏 에 대한 해설이다.

․대지와 감각의 세계

카뮈는 1932년에서 1933까지 문과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오랑에서 온 앙드레 블라미슈, 클로드 드 프레맹빌을 입시 준비반에서 만났다. 그 문과반에서 장 그르니에의 지도를 받고 있던 에드몽 샤를로를 알게 된다. 장 드 메종쉘, 미켈, 브니스티 등을 포함하게 되는 그룹은 사상, 정치, 문학 및 예술 일반에 대하여 정열적인 관심을 쏟는다. 그의 프랑스어 및 라틴어 교수였던 폴 마티외는 프랑스어 작문 숙제 속에서까지 정신 없이 철학을 몰두하던 특수학교학생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시절 니체는 그에게 법이었고 예언자였다. 그는 모든 화제와 상관없이 니체를 인용했다. 그는 중급정도의 라틴어 실력을 가졌는데 초급 그리스어 강의를 들었다. 그의 그리스 문화에 대한 교양은 피상이었다. 그러나 몰래 엿본 천국과도 같은 그리스는 그의 눈에 훨씬 큰 위력을 행사했다. 그 무렵에 카뮈는 성서,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바르뷔스, 라 누벨 르뷔 프랑세즈나 유럽 같은 잡지를 읽었다고 막스-폴 푸셰가 말했다. 그리고 장 그르니에, 또 신비주의자들의 책, 우파니샤드 등도 읽었다. 클로드 드 프레맹빌의 말에 따르면 민중주의 문학이 그의 관심을 끌었고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폐결핵 환자인 케서린 맨스필드의 일기에 흥미를 가졌다.

그의 건강 상태는 호전되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한동안 빠져 있었던 그 음울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44년에 그는 기 뒤뮈르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그런 종류의 여행에서 돌아오는 데 12년이나 걸렸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아주 낫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처음엔 내게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연소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연소해버렸기 때문에 낫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까딱하다가 나를 완전히 노예로 만들어버릴 이 몸뚱이를 부려먹기 위해서 매일같이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친구들이 확인하는 바와 같이 카뮈는 회복기의 모든 제약을 포기해버리고서 삶을 한 입 가득 깨물었다. 그는 태양과 바다로 돌아갔다. 아마도 그 무렵에 지중해의 신화가 그 윤곽을 갖추게 된 것 같다.

그는 그냥 무심히 맛보았던 쾌락을 재발견하게 된다. 또 다른 밀도가 실린 쾌락이었다. 그때 그는 발레리의 영향을 받아 지중해에 바치는 저 은총의 노래로 고대에 바치는 청춘의 찬가를 쓴 것이다. 그리스적인 것이 아니라 라틴적인 노래는 장 드 메종쇨 덕분에 입수한 것이다. 물론 대단한 것이 못 되는 이 시행들은 고통을 이기고 얻은 정일감, 자연스러운 무심 속에서의 영원, 빛 속에서 찾아오는 진정된 죽음의 확신을 말해주고 있다. 벌써부터 시지프는 행복해진 자신을 상상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33년 말이나 1934 년 초에 시몬 이에에게 보낸 편지에 벌써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표리, 특히 결혼과 아주 가깝다. "우리가 꿈꾸었던 봄에 버금가는 것은 오직 저 끔찍스러운 죽음뿐임을 상기시켜주는 산사나무꽃들 아래 탁자는 접힌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찬미나 우리의 범신론 속에서 통일성을 향하여, 또는 복합성을 향하여 걸어가리니. 사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대답은 우리를 신과 세계에 대립시켜놓을 싸늘한 침묵일 뿐이다. 우리는 신을 정복하기 위하여 엄청나게 많은 연민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으리라. 젖은 하늘과 아침의 초원 저 뒤에 향기와 꽃 저 뒤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인가. 그 모든 흥미로운 신비에 대하여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믿는 자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향기와 꽃 저 뒤에 있는 그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바로 향기요 꽃이다. 겉모습을 나는 믿는다".

여기서 해석자는 일체의 불확실한 결론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부정할 수 있는 법이다. 한 통의 편지가 증언하는 내용이란 더없이 불안정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젊은 알베르 카뮈가 발전해 가는 한 단계와 만나는 것 같다. 죽음의 고정관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라질 성질의 것인가, 비니가 그랬듯이 그가 말없는 하늘을 향하여 던지는 질문은 그 비장함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카뮈는 충만한 순결성의 시절, 그리고 젊은이다운 정 열에 들뜬 고뇌의 시절을 지나고 난 다음 대지와 감각의 세계, 사물들과 존재들, 현재와 겉모습에 굳건히 발 딛고 선 것 같아 보인다. 신비가 걷혀서 아니라 세계의 모든 비극성은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 하늘의 침묵 속에 있다기보다 향기와 사랑의 연약함 속에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절망과 삶에 대한 사랑

카뮈는 사회적 경력이나 짐짓 꾸미는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혼란을 물리치는 부류의 인물이 아니다. 물론 그는 학업을 계속한다. 1933년 11월, 윤리 및 사회학 시험 통과, 1934년 6월, 심리학 통과, 그러나 고전문학 과목은 실패했다가 11월에 만회, 1935년 6월, 일반철학 및 역사철학 통과, 1936년 5월, 고등연구학위논문D.E.S 학위 취득한다. 그와 동시에 1934년 6월 16일에는 남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시몬 이에와 결혼을 했다. 2년 전 막스-폴 푸셰의 집에서 만난 여자였다. 그는 장 그르니에와 샤를로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드라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다소 외따로 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문득 친구들의 세계로 그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그 존재가 잘 느껴질 만큼 정치 활동에 끼어 들었고 문학적 토론에 그의 아이러니가 깃들인 자신감과 친절한 태도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작가로서 소명의식도 확고해졌다. 시몬 이에를 위하여 쓴 동화들 속에서까지 그 같은 소명의식을 규정해 보이고 있다. "기다림의 끈질길 우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지금은 새로운 세계들을 창조할 때다. 동화는 거짓을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말라. 그렇게 말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곧 허공에 천천히 떠올라 일상의 도도함보다 더 진실 된 그것 나름의 현실적 삶을 살러 간다. 동화를 지은 이야기꾼에게는 오직 주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았다는 씁쓸한 맛이 남는다 .

문학적 창조의 상징인 이 동화들은 우리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므로 요정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가장 공감이 가고 우리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요정들은 오직 그 이름이 요정과 관계를 가진 것들이다. 내가 그렇기를 바라는 바처럼 연약하고 불행하며 불안에 관심이 많은 요정들이다. 어린 아이의 침묵인 요정들이다. 나의 유일하게 진실 되고 유일하게 위대한 현실들을 나는 나 스스로를 잊고 싶다. 왜냐하면 나 역시 기다리고 모색하고 희망하면서 발견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진실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나는 큰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희망이 뿌려진 메마른 길을 좋아한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는 길의 먼지, 험한 구렁 등 온갖 도취의 기회가 다 있는 것이다.

고통의 행복, 구속의 긍지, 어린아이의 침묵인 나의 현실들이여, 요정들이여." 그리고 좀 뒤에 "어린아이는 그의 젊음이 진실임을, 체념의 관능을 맛보려면 빨리 그 젊음을 잃어버려야 함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저 심심풀이로 쓴 어떤 텍스트에서 추려낸 이 몇 줄은 그가 같은 시기에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표리의 첫 핵심을 이루게 될 가난한 거리의 목소리의 머리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부인이 감사하게 내게 맡겨준 원고는 바로 그러한 느낌을 확신하게 만든다.

1934년 11월에 그 가난한 거리의 목소리가 첫 번째 형태로 쓰여졌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은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첫째 "우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여자의 목소리다." ­긍정과 부정사이 참조. 둘째 "다음으로 죽기 위하여 태어난 남자의 목소리다."­아이러니 제 2부 참조. 셋째 "그리고 음악에 의하여 강조된 목소리다."­미발표. 넷째 "그 다음으로 영화관에 가느라고 그냥 남겨두고 가는 병든 자의 목소리다."­아이러니 제 1부 참조. 다섯째 "인간들은 장차 다가올 노쇠라는 바탕 위에 집을 짓는다."­미발표. 이 가난한 거리의 목소리는 분명 카뮈의 눈에 벨쿠르 거리의 삶에 대한 증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와 이웃과 지기들의 삶 말이다. 그것은 벌써부터 이중, 삼중의 차원에서의 연구다. 어머니의 가난은 물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헐벗음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실감되는 무력감과 각종의 불구와 더불어 커지는 정신적 비참함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하여 가난은 결국에 가서 인간 조건의 한계와 대면하게 된 인간의 정신적 비참함을 나타낸다.

카뮈가 막스-폴 푸셰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우리들 각자는 저마다 최대한의 삶과 경험을 쌓아가지만 그것도 그 경험이 무용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느끼게 될 때까지 뿐이네. 그런 느낌은 또한 그런 경험의 가장 심오한 표현이라는 점 이외에 자네의 편지에 대답할 아무런 말도 찾을 길이 없네. 그러니 경험이란 하나의 실패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지. 우리들의 하잘것없는 인격들의 유일한 흥미는 우리가 삶에 그냥 바쳐야 할 존재라는 그 증언 속에 담겨 있다네. 사람들은 그걸 말하고는 가버리지. 그게 바로 단순성이라는 것이지. 티파사 호텔의 주인이 말했듯이 `우리가 죽어도 우리 이야기를 하는 사람 하나 없을 거야 그뿐 이야. 자네는 폐결핵 요양원에서, 또 누구는 파리에서, 나 자신은 이드라 공원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조건이 절망적이라는 너무 나도 뻔하고 너무나도 간단한 진실을 절망적인 공식과 탐구로 은폐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네. 그렇다고 해서 비관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네. 사랑과 예술과 특히 종교가 있으니까. 파르테논의 하늘을 웃으면서 받아들이는 태도도 있으니까.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시간을 보내도록 도와주는 귀중한 노리갯감이 되어주는 것이지.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자네는 내게 내 경험권을 형성하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하네. 많은 경우 자네의 삶의 사건들은 내게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다네. 사실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보다도 그 점이라네."

카뮈가 표리에서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바로 그의 경험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경험이란 그 경험 자체가 실패하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런 교훈도 이끌어낼 것이 없는 그런 경험이다. 실패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랑, 예술, 종교, 그것도 아니라면 남을 지배하거나 쇼를 하는 이것, 역시 자기를 내세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아이러니의 제 3부에 나오는 할머니를 보라. 쾌감 따위의 소일거리를 찾는 육체와 정신의 실패를 뜻한다. 가난, 병, 고독은 그런 종류의 오락이 지닌 헛된 성질을 깨뜨려버리고 만다. 인간은 극단적으로 한구석에 몰리게 되면 `자신의 영혼을 의식'하게 된다. 카뮈가 쓴 이런 모든 글들에 여기 `버림받은 가난' 속에, `아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느끼는 기묘한 감정'에, 이 헐벗음의 세계 속에, 이 세계의 모든 비참함과 부를 담고 있는 하나의 축소판 사회인 양 자신 속으로 문을 닫은 채 사회 속의 섬을 이루고 있는, 유일하다고는 못해도 매우 희귀한 이 세계 속에 진정한 삶이 존재한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이 거기에 있다 해도 그 삶을 사는 어린아이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그의 전 작품에 지배적으로 깔리게 될 향수와 더불어 비로소 그 삶을 발견한다.

그가 자신의 왕국을 발견하자면 적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와 동지에 그는 그 순간부터 삶에 대하는 그의 반응을 요약해 보이게 되는 적지와 왕국 사이의 저 변증법을 구체적으로 육체적으로 규정한다. 그는 어머니와 아들이 도달하는 침묵 속에서조차도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타인의 존재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납으로 만든 그리스도상과 대면한 채 홀로 남은 늙은 여인을 위해서도, `달'에 취한 키 작은 노인을 위해서도 자기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다. 장 그르니에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것 자체로 폐쇄되어 있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섬들과 같은 존재다. 저 빛 한복판에서 늙어 가는 것과 죽음은 모든 인간을 막다른 구석으로 밀어붙인다. 생활의 어려움과 병도 마찬가지다.

카뮈는 두 가지를 다 경험했다. 아직 학생이었을 때 그는 자질구레한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해야만 했다. 내가 발견한 어떤 메모에다 그는 전차 한 번 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하여 아침 6시에 걸어서 떠났다고 적어놓았다. 그는 시청에서 일하기도 했고 <에코 달제>지에다 미술비평을 싣기도 했으며 수많은 개인 교수를 했다. 그러나 금전적인 곤란도 질병도 그를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넣지는 못했다. 거기다 한 걸음 나아가서 `낯설어지기'가 또한 필요했다." 여행의 귀중한 값은 두려움이다. 어떤 순간 우리들의 고장으로부터, 우리들의 언어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또한 오랜 습관의 피난처로 되돌아가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엄습한다. 그래서 프랑스말로 된 신문 한 장은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팔꿈치를 부딪치며 만나고 싶어지는 카페에서의 그런 저녁 시간은 또한 어떠한가. 그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가장 분명한 몫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열에 들떠 있지만 동시에 구멍투성이가 된다.

조그만 충격에 우리는 존재의 바닥까지 흔들린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은 교양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센스, 즉 영원에 대한 센스의 교훈이 곧 교양이라면 말이다." 1935년 여름에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발레아르 섬으로 여행을 하면서 그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 버리는" 그 두려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 자체가 "저마다의 존재에, 저마다의 사물에 그것 나름의 기적과도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 저 끈적거리는 여자, 저 산더미 같고 끔찍한 살덩이가 열광적이 되고 거의 아름다울 정도가 되며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눈물 맛을 지니게 되는 어떤 영문모를 삶의 상징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제 카뮈에게는 바닥에까지 이르는 고독의 경험이 남아 있었다.

1936년 여름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친구인 부르주아와 아내 시몬 이에와 같이 하게 될 프라하 여행은 그에게 느긋한 휴식을 가져가 주기는커녕 혼란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린츠에서 그는 각혈을 했다. 아내와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끝장나버렸다. 그는 혼자서 돈 한푼 없이 떠났다. 그는 수중에 무일푼인 상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고장 프라하에서 이제는 숱한 닻줄들이 끊어져버렸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채 나흘을 보냈다. 팔마에서 그랬듯이 여기서 그는 옆방에 죽어 있는 사람과 대면한 `이방인'이었다. 영원히 중앙 유럽은 그에게 유적의 고장으로, 반 지중해의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카뮈가 삶의 사랑을 쓴 것은 1936년이고 영혼 속의 죽음을 완성한 것은 1937년이다. 그런데 왜 그 텍스트들의 순서를 바꾸어놓은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물의 겉이 바로 그 안쪽에서부터 나오도록 붕괴가 있고 난 후 거기에서 생겨난 삶의 기적이 뒤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시간적 순서로 보면 프라하는 팔마 다음이다. 그러나 카뮈의 정신적 순서로 보면 프라하의 붕괴 뒤에 삶의 사랑이 예고하는 생명의 광란과 관능적인 맹렬함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묻힐 무덤을 미리 구입해둔 독특한 노파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지었다.

사라져버리는 시간을 민첩한 포착으로 보상하고 싶은 그의 의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잘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종류의 가난, 곧 육체적 가난과 영혼의 가난의 세계를 두루 섭렵하는 그 순례의 끝에 이르러 그는 어른이 되기를, 순간 속에서 영원에 이르기를 선택한다. 세상에는 부조리도 있고 태양도 있다. 1936년 1월 이드라 공원에서 그는 벌써 이렇게 썼다. "내가 나에게 도달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저 빛 한복판에서이다." 프라하보다 먼저 쓴 이 대목을 그는 자기 에세이 이 결론의 자리에 배치한다. 부조리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명철한 의식을 지탱해야 고 "마치 어떠 어떠한 것처럼"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스물 세 살 된 한 청년의 모든 지혜, 그가 일생동안 기억하게 될 교훈이다.

어떤 서문을 위한 초안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카뮈는 그것을 벌써부터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 소개된 모양 그대로는 이 에세이들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그 윤곽이 불분명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것은 편의상 형식을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충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들을 그것의 참된 모습 그대로, 곧 에세이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단 한가지는 글의 전개와 발전을 따라가 보아달라는 것이다. 처음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거기에서 은연 중의 어떤 전개 방식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방식이 곧 이 책의 통일성이다. 또 이런 변명이 헛된 것이라고 여기지지 않는다면 나는 그 방식이 곧 이 글들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장 드 메종쇨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독자는 이 책이 출판된 직후 카뮈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곧 에세이 다음에 예술의 탐색이 뒤따른 것이다. 억제된 고뇌 다음에 <결혼>의 관능적 개화가 따른다. 그러나 여전히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며 그것은 그 부조리를 치유하고자 하는, 아니 적어도 그것과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의 반격을 받는다.

이야기에서 명상으로 그리고 끝으로 표리를 집필하는 데 있어서 카뮈는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이야기에서 명상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지적해두자. 이야기의 의미를 확대시켜주는 대부분의 반성적 대목들은 처음 글을 쓰면서 곧장 나타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부분적으로 그런 반성적 대목들은 처음 보기에는 산만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 텍스트들 전체에 심오한 통일성을 부여하겠다는 욕구 때문에 추가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마지막 텍스트의 경우 특히 명백하다. 긍정과 부정사이의 마지막 문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최근의 원고들은 불완전하게 여러 장의 원고가 한데 묶이지 않은 낱장 상태여서 텍스트들 전체에 대하여 자신 있게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표리의 서문은 매우 유난스럽게 정성을 쏟아서 쓴 글이다. 1949년이래 카뮈는 그 서문을 쓸 생각을 했고 그의 첫 저서가 지닌 풍부함의 핵심인 그 같은 사랑의 형태를 장차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되찾게 되기를 꿈꾸었다. 그의 병, 그리고 그 병의 씁쓸하지만 떳떳한 결실인 "저 마음의 자유, 인간적인 이해관계에 대하여 유지하게 되는 저 가벼운 거리감"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는 1951년 3월에 다시 그 서문에 손을 댄다. 몇 페이지 더 뒤에서 그는 같은 목적으로 "그 시대 사람들 나름으로 볼테르주의자였던 삼촌", 즉 아코 삼촌의 추억을 상기시킨다. "그는 인간들 일반, 특히 그의 부르주아 고객에 대하여 가장 싸늘한 멸시를 나타냈다. 풍자와 맹렬한 비난에서 그는 재기 발랄했다. 그에겐 또 성질도 있어서 나는 그와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가 죽고 없는 지금 파리에서 그를 생각할 때면 그가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서문의 결정적인 텍스트가 언제 쓰여졌는지 알지 못한다.

카뮈가 내게 타이프로 친 상태로 그 글을 읽어주었던 1954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1953년 10월 30일 르네 샤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쓸 때 그는 아마도 서문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만 언젠가 그 시절과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 어른이 되는 일을 당한다는 것, 그리고 때로 어른들에게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우연의 일치로군요. 나는 최근에 알제와 내 어린 시절 생각을 했답니다. 나는 먼지투성이의 거리와 더러운 모래사장에서 자랐습니다. 우리는 수영을 하곤 했습니다. 조금 더 멀리 가면 깨끗한 바다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삶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나는 마음 깊이 행복했습니다.


* 결혼, 여름 1938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의 사랑, 폐허와 봄의 결혼, 그토록 오래 전부터 땅과 바다가 입술과 입술을 마주하고 열망하던 포옹, 이 세계와의 결혼 하룻날의 나른한 행복으로 묘사되는 인간과 대지의 결혼과 인간과 대지의 저 연인 사이와 같은 공감, 대지와 아름다움의 축제 속으로 들어가는 인간의 기쁨이라는 결혼의 노래는 여러 가지 원소들의 결합을 기리는 교향곡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의 결혼 축가를 부각시키고 있다.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인 동시에 이성으로 맺어진 결혼이다. 이 세계의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덧없는 행복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죽어 없어지게 마련이라는 운명의 억압을 느끼면서도 유지하는 명증明證한 정신이다. 명증성明證性이야 말로 결혼에서는 열쇠가 되는 말이며 부적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에 힘입어 축제는 구도로, 공감은 인식으로 관능은 의지로 심화된다. "슈뉴아 언덕의 저 단단한 등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가슴은 어떤 이상한 확신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이것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의 힘과 능력을 모두 바쳐야 한다. 그네들의 모든 처세술 따위에 못지 않은 저 어려운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깨우쳐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현존한다. 저 끔찍한 공포와 침묵 사이에서 어떤 희망 없는 죽음을 의식하고 있는 확신을 말해줄 정확한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명증明證한 의식을 흑한까지 밀고 나가서 나의 모든 아낌없는 질투와 공포와 더불어 나의 종말을 응시하고 싶다. 텍스트 전편에 걸쳐서 하나의 경험을 요약하고 하나의 교훈을 규정하는 공식들이 속출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혼행진과 장례행진이라는 두 가지 테마가 지닌 동음조同音調를 짚어 보이는 마지막 공식. 오래오래 지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반드시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자신의 운명이라는 이중의 의식 이외에 인간을 그의 삶에 이어주는 더 온당한 통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바다와 태양의 환희, 가난과 병의 교훈 등 카뮈의 감동은 끊임없이 그의 경험들로부터 생겨난다. 그렇지만 그가 문화에서 얻은 지혜는 그로 하여금 그 넘치도록 많은 것들 가운데서 선택하도록 만든다. 그가 지드를 본받아 순간의 맛 속에서 쾌락의 만족을 구할 경우에도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그 욕망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라고 하는 나다니엘의 권유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것은 의식의 반反자연적인 지나침이라는 것이다. 그는 몽테를랑에게 알제리에 대한 능란한 크로키들의 신랄하면서도 다감한 맛을 음미한다. 그의 욕망의 셈, 무용한 봉사를 쓴 그의 작가처럼 안락安樂에 대한 증오와 쾌락에의 열광을 영웅적인 스타일로 승격시킨다. 그렇지만 그는 인생을 거는 어려운 도박에서 몽테를랑처럼 용케 궁지를 빠져 나오는 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니체에 대한 그의 빚은 광범하고 다양하다. 특히 그 대상은 대지에 대한 변함 없는 충실성이다. 이것은 신이 죽고 난 후 짜라투스트라의 복음의 바탕을 이룬다.

우리들 앞에 놓인 대지여. 해방과 영교의 땅이여. 우리의 포로메테우스적 노력에 약속된 땅이여. 이는 이제부터 우리들에게 너의 아름다움이다. 너 위에 우리에게 멍에 씌울 하늘이 없고 우리의 비상을 막을 영원한 법칙이 없다. 너의 위에 해가 떠오르리라. 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화해의 해가 인간과 자연이 결혼식을 올리는 그 날이다. 그러나 카뮈는 영원회귀의 묵시록과 초인에 대한 비인간적 숭배는 거부한다. 그 자신 1959년 <섬>에 부친 서문에서 장 그르니에가 자기에게 끼친 영향을 인정했다.

그러나 스승이 한 말을 옮겨 적은 대목이 어디인지 여기서 정확하게 지적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카뮈가 사실과 생각이다. 그리고 이미지와 리듬을 길어낸 스승의 글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르니에가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소명을 분석하면서 <리바주>지의 소개 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표현으로 복음서의 잠언 곧 결혼식은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이 그만한 자격이 없다. 네거리로 나가 그곳으로 올 모든 사람들을 결혼식에 오라고 부르라(마태복음 22장) 를 인용할 때 그는 카뮈의 관능적 몽상에 윤리적 방향성의 힌트를 준 것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텍스트들을 카뮈는 언제 집필하여 언제 발간했는가. 1945년 판에서 책머리에 붙인 편집자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 있다. 이 초기에세이들은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쓴 것으로 그 후 적은 부수의 한정판이 1938년 알제에서 간행되었다. 1936년에 이미 그 윤곽이 잡혔던 몇 가지 생각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글들은 1937년과 1938년에 집필되었다. 과연 표리와 결혼사이의 실질적인 간격이 1년이 아니라 2년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시간적인 차이가 어조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1935년에서 1939년 사이의 시기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카뮈의 생애 상의 두 가지 국면을 분간할 수 있다. 그 둘을 이어주는 고리는 결혼이 태어나게 된 기후의 환경을 갖춘 1937년 중반이다. 그 시기의 전반기는 정치적으로, 대학 쪽 진로 면으로 부부생활의 면으로 갖가지 실망의 연속이다. 후반기에 물질적, 정신적 독립을 기어코 얻어내고 작가로서 실질적인 직업을 실천에 옮기며 어떤 철학적 세계관을 따져가면서 적용하게 된다.

이리하여 표리가 우리의 몫을 비참함과 고독이라고 말할 때 결혼은 우리가 비탄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지극히 단순한 기쁨에도 비견할 수 없는 보상의 위력을 부여한다고 응수한다. 티파사에서 결혼과 제밀라의 바람은 꿈인가 싶은 감각들과 접촉에서 의식이 날카로워지는 특이한 장소들과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다. 편견, 습관, 추상에서 벗어나 고통스러운 동시에 관능적인 계시를 통하여 삶은 그 나름의 진실과 값이 있음을 발견해낸다. 알제의 여름은 죽음에 오불관언이 됨으로써 신화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전형적인 인간 집단의 형태를 그려 보인다.

사막은 충만함으로 인도하는 여러 가지 길들이 역설적으로 서로 만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풍요와 헐벗음은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또 영원한 가운데 저의 찬란함을 과시하는 풍경을 앞에 둔 인간이 자신의 덧없음 속에서 스스로 위대함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서 결혼은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죄스러운 환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필연적으로 죽게 마련인 운명에 대한 명철한 동의라는 바탕 위에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기회와 으뜸가는 의무를 설정한다.

카뮈는 여름을 태양의 에세이 전통 속에 위치시켰다. 그 에세이들은 어느 의미에서 천진 무구의 소명을 상기시켜준다. 정오의 사상의 결실인 이 글들은 반항적 인간을 연장하고 그것과 균형관계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사르트르와의 고통스러운 논쟁을 치르고 난 후 이 글들은 유머와 아이러니에도 한몫을 할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 여름은 지중해와 관련된 텍스트들이다. 오랑과 알제는 미노타우로스, 과거가 없는 도시들을 위한 간단한 안내의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다. 편도나무들은 전쟁이 한창인 시절의 콩쉴 계곡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헬레네의 유랑은 암시적 간과법을 통해서 그리스를 노래하고 티파사에 돌아오다는 폐허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적인 철조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를 결혼의 아름답던 시절로 다시 데려가 준다. 가장 가까운 바다로 말하자 열에 들뜬 듯한 시적 문체로 카뮈가 항상 몸담고 살고 싶어했던 어떤 환경을 재구성시켜준다.

이 텍스트들 하나하나는 결국 카뮈의 생각으로 예술가의 모럴리스트를 하나가 되게 해주는 신화의 기법에 충실하고 있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글들이 각기 다른 시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어떤 공통점을 갖기는 어려웠다. 1939년에 쓰기 시작한 미노타우로스는 역사를 완전히 관심 밖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편도나무들은 패전 직후 역사에다가 그에 걸 맞는 중요성을 회복시켜주려고 노력한다. 명부의 프로메테우스는 수십 년이래 유럽이 빠져들어 몸부림치고 있는 폭력의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어느 면에서 반항적 인간을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

정의의 사람들을 쓰고 있을 때 카뮈는 알제리 여행을 하는 기회에 알제의 여름에서 본 자연의 쾌락을 다시 맛보는 기분 전환을 가져보고자 했다. 그 절실하게 과거가 없는 도시들을 위한 간단한 안내다. 헬레네의 유랑은 해묵은 하나의 꿈, 곧 아주 뒤에야 성취한 그리스 여행의 꿈을 다시 다룬다. 그리고 학위논문에서 거론했던 문제를 기독교와 헬레니즘의 관계와 연결시켜준다. 수수께끼는 기삿거리 찾기에 혈안이 된 신문기자들이 지칠 줄 몰라했다.

그러나 한 번도 속시원하게 만족시켜주니 못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갖가지 신화들을 깨뜨리고자 공격한다. 그러나 별로 큰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티파사에 돌아오다는 반항적 인간을 에워싼 그 고달픈 모험 직후에 자신의 원천으로 찾아가는 순례여행과 같은 것이다. 비교적 실망이 크다. 끝으로 가장 가까운 바다는 북아메리카 여행을 열에 들뜬 상태로 상기한다.


* 이방인異邦人 Lꡑtranger 1942

주인공 뫼르소는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사는 평범한 하급 샐러리맨이다.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이었다. 해수욕장에 여자 친구인 마리와 함께 가서 노닥거리다가 희극 영화를 보면서 배꼽을 쥔다. 밤에 마리와 정사情事를 가진다. 며칠 지난 일요일에 우연히 불량배의 싸움에 휘말린다. 동료 레이몽을 다치게 한 아라비아인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권총으로 사살한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하고 속죄의 기도도 거부한다.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도 행복하다고 공언한다. 처형되는 날은 많은 군중이 밀려들 것을 기대하며 이 수기手記는 끝난다.

뫼르소는 언제나 현재의 욕망에 강하게 지배되어 이해타산도 없이 행동에 몰입하는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순진하고 자신에게 정직한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부조리不條理한 인간의 전형典型, 즉 인간 존재의 무상성無償性을 자각한 인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한 의식이 그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알제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무책임한 청년들과 공통된 점이 많다. 그러나 뫼르소를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비극적 인간상人間像'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은 카뮈의 작가적 역량이라고 반소설작가反小說作家 로브그리예가 말했다. 카뮈 자신이 영어판英語版 서문에서 뫼르소는 현대에 있어 유일한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부조리를 각성한 자이다. 현대인인의 눈에도 뫼르소는 무정하고, 패륜적인 살인범으로 밖에 비춰질 수 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주 태연했다. 더군다나 모친의 주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셨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음날 한 여자와 동침을 하고 희극적인 영화를 본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세상사람들이 모친의 죽음에 대해선 슬퍼한다. 그래서 숙연한 마음을 갖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마음은 일지 않는다.

더욱 터무니없는 일은 그가 태양 빛의 강렬함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데 있다. 비록 그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뫼르소는 두려움 때문에 살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날 따라 뜨거운 태양이 싫었기 때문에 살인을 한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가 보여준 비도덕성과 다섯 방의 총을 쏘아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폭력성, 그리고 끝내 회개를 거부하고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이단성 때문에 결국 이 무정한 살인범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그는 잔혹한 살인범으로 낙인찍힌다. 그것을 위해 검사는 그의 행적 하나 하나에 나타난 무정함을 여실히 밝혀낸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일, 커피를 마신 일, 담배를 피운 일, 여자와 놀아난 일, 희극적인 영화를 본일, 이 모든 일 하나하나는 그의 잔인함을 증명하는 명백한 사례가 되었고, 그렇게 잔혹한 인간은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살인을 하고, 그리고 이미 죽은 자의 몸에 4발의 총알을 더 박아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완벽해 보인다.

뫼르소는 그 판결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세상이 그에게 거짓을 강요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뫼르소는 정직한 인물이다. 오랜 시간의 단절로 인해 어머니와 뫼르소의 관계는 그렇게 친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이 사실 그 자신에겐 별다른 슬픔을 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의 통념에 따라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해야 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정말로 거짓이며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믿고 있다. 그는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정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그에게 거짓을 요구한다. 그가 느끼지 못하는 죄에 대해 참회를 요구한다. 법정에서 뫼르소가 밝힌 살인동기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거짓을 강요하는 것인가. 정말 부조리한 것은 뫼르소인가. 세계인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 사회의 양식과 법률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은 그 사회 속에서 올바른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아닌 사회의 대리인의 역할에 만족한다.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서 이 사회의 부조리를 바라본다. 카뮈는 반항은 부조리의 응시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것은 뫼르소의 정직함이다.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한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신부의 멱살을 치켜든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왜냐하면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크면 클수록 뫼르소는 자신의 확신, 즉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 찼다는 믿음을 더 명백히 증명해 보일 수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시지프의 신화神話 1942

부제에 있듯이 부조리不條理에 관한 시론詩論이며 소설 이방인異邦人과 짝을 이룬다. 시지프는 그리스신화의 인물인데 신들에게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져서 시지프는 영원토록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 안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보았다.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자각하면서 이 부조리에 대하여 반항을 기도하는 인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간의 운명에 비참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데 그의 독자성이 있다. 시지프의 신화는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방인은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써 펼쳐 보였다. 그러나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였다.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가 ‘존재의 이유’가 철학의 핵심이라고 선언한 책이다. 자살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모든 철학적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물질과 정신의 관계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가볍다거나 무겁다고 생각하기 전에 시지프가 제시한 역설적인 해답은 ‘인생은 헛수고’라는 사실에 있다. 무거운 바위를 힘겹게 높은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똑같은 노고勞苦를 운명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그리스신화 속의 저주받은 영웅 시지프 그리스어 시시포스, 인생은 결국 시지프의 도로徒勞에 불과하며 삶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의미도 목적도 없다.

카뮈의 해답은 부조리不條理에서 출발한다. 삶은 부조리하다. 정해진 목적에 따르는 질서정연한 논리가 삶의 본질이 아니다. 정통적으로 종교적 신앙이나 이데올로기가 목적과 논리를 제공했다. 현대에 유전자에서 삶의 본질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실존적인 삶은 부조리와 혼돈, 공허 위에 서 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운명적인 부조리 속에서 실존내부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순간의 결단과 고뇌와 실천으로 주조된다.

고대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삶의 공공성이 훼손됐을 때 종종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 가치를 실현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생사를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세네카의 말처럼 필연 속에서 사는 것은 운명이다. 그러나 삶은 필연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죄가 된다. 동양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카뮈는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선택권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찾아주었다. 우리는 도대체 왜 사는가. 실존주의는 지나간 사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삶의 부조리가 지속되는 한 ‘실존적 고뇌의 가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 오해誤解 1944 戱曲

카뮈의 두 번째 3막 희곡이다. 1944년에 초연初演했다. 체코의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딸 마르타가 경영하고 있는 여인숙이 있다. 두 사람은 돈이 많은 숙박객이 들면 수면제를 먹인 후 죽여 버리고 가지고 있는 돈을 빼앗아 버린다. 바다와 태양을 그리는 마르타는 남쪽으로 이사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거기에 20년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온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놀라게 해주려고 신분을 밝히지 않고 투숙한다. 그녀들은 계획대로 그를 죽였다. 그러나 아들인 줄 알고 난 다음 자기들도 자살해 버린다. 그리스 비극의 숙명을 밑바닥에 깔고 신의 부재不在와 인간의 낙원 추방을 그린 걸작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의 어려움을 역설했다.


* 칼리굴라Caligula 1945 戱曲

4막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난 다음 6년이 지나서 1945년 G. 필립의 주연으로 초연하였다. 칼리굴라는 병사兵士에게 붙인 별명이다. 로마황제 칼리굴라를 희곡의 병사로 패러디 했다. 로마황제는 부적절한 관계關係에 있던 누이동생이 죽자 성격이 걷잡을 수 없게 포악해졌다. 이 때 로마제국의 죄 없는 자들을 수도 없이 처형했다. 그리고 신하臣下의 아내를 잠자리에 끌어들이는 등 인륜人倫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저질은 폭군이었다.

이 희곡戱曲에서 병사兵士 칼리굴라는 달月을 손에 넣겠다고 날뛴다. 이것은 불가능은 없다는 잘못된 자신과잉自信過剩이 낳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는 끝내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하고 암살된다. 인생의 부조리를 깨닫고 반항反抗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반항反抗은 도리어 남을 다치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재난을 초래한다는 비극悲劇을 그렸다. 이방異邦人, 시지프의 신화神話와 공통된 사상이 이 작품에 흐르고 있다.

1930년대에 까뮈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자라난 사람들과 자신의 친구들 사이의 현저한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1930년대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란 무력한 것이며 휴머니즘은 무가치하고 개인주의는 퇴폐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이상들을 악마처럼 여기는 새로운 운동들에로 이끌려지고 있었다. 그런 운동들은 환상적인 이데올로기적 계획들을 가진 정치적 운동의 극단에 위치한 독재자들에 의하여 이끌려지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다는 허풍을 떨었고 히틀러는 천년을 지속할 "아리안" 제국을 약속했다. 스탈린은 그가 행하는 숙청들이 공산주의 낙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설득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수천만의 사람들이 그런 유토피아의 목표를 위하여 더욱 참혹한 전쟁과 손실을 겪어야 했다.

1930년대에는 새로운 정서가 대두하였다. 난폭함이 거의 미학적 성질을 띄게 되었다. "굳셈"이 자비를 대체하였고 "현실주의"가 동정을, "행동"이 대화를, "결단"이 타협을, 엘리트주의가 호혜주의를 대체하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토마스 만, 외된 폰 호르바트, 에른스트 쥰거, 앙드레 말로, 일리아 에렌버그 등 많은 정치적 관점이 각기 다른 작가들은 젊은 세대의 이런 새로운 정서를 언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의 까뮈 주석가註釋家들에 의하여 거의 무시되어왔다. 그러나 그 시대와 칼리굴라 같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사실이 무척 중요하다.

카뮈는 정치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때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1935년에 설립한Theatre du Travail는 그에게 일종의 공동조직의 개념을 주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한 후 극단의 이름을Theatre du l'Equipe로 바꾸었다. 장 폴 시카르와 마르그리트 도브렌 등이 멤버였다. 프로그램들에 고전과 실험적 작품과 정치적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설립자들이 각기 제 갈 길로 갔다. 카뮈는 여전히 연극에 흥미를 지닌 채 남아 있었다. 그는 1938년에서 1949년까지 자신이 직접 작품을 썼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각색하였다. 그는 초기에 많은 역들을 연기했다. 나중에 연출도 하였다. 샤를르 드골 장군 밑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말로는 1959년에 까뮈에게 코메디 프랑세즈의 운영을 맡을 것을 제안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카뮈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카뮈는 25세이던 1938년에 칼리굴라를 완성했다. 이 극은 수에토니우스기원 후 69­140의 로마황제 칼리굴라기원 후 12­41의 묘사에 근거한 것이다. 수에토니우스는 그르니에의 강의에 의해 카뮈에게 소개되었었다. 이 작품은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그 폭군의 기행을 다루고 있다. 1945년에 이 작품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 지시하는 바와 의미들을 알고 있었다. 이 작품은 독재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그 독재자의 변덕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추상적 이상의 이름으로 구체적인 개인들을 희생시키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가 후에 가하는 비판을 예고하고 있으며 올바른 길을 벗어난 수단에 대하여 치르는 대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단순히 "부조리"를 받아들인다.

그 의미에 따라 행동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극은 칼리굴라가 왕위에 오른 후의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젊은 왕은 그의 궁정에서 존경받고 있다. 그는 계교를 꾸미는 아첨꾼으로서 그가 하는 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히틀러와 나치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보수적 엘리트들을 기억나게 한다. "정확하게 우리가 원했던 황제입니다. 양심적이고, 경험이 없고." 그가 사랑했던 누이 드루실라의 죽음 후에 황제는 변화한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이며 "인간은 죽으며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는 냉소와 "불가능에의 욕구"로 가득 찬다. 그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경험한다. 그 결과로 사람들을 자기가 인식하는 대로 진실의 빛 속에 살게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생각들이 그 논리적 결과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권력을 이용할 것이다. 그는 모든 가치들을 동일한 지위에 놓고 인간존재가 우연적이며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유죄냐 무죄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황제는 그의 신하들에게, "사람은 아무런 잘못 없을지라도 죽을 수 있다"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칼리굴라는 혁명가이다. 인생을 바꾸기를 원하는 묵시적 허무주의자이다. 그는 전통과 과거와 연관된 모든 것을 금지하려고 한다. 그는 신들을 모독하고 귀족들에게 굴욕을 주었다. 자신이 세운 공창公娼을 이용한 횟수가 잦을수록 국가에 공을 쌓는 것이 되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칼리굴라가 친절과 형벌을 베풀 때 일관성이란 없다. 상식은 더 이상 삶을 이끄는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 나는 우리의 이 시대가 위대한 선물이 되도록 할 테다. 평등의 선물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같아질 때나 불가능이 땅으로 내려오고 내가 달을 손에 넣을 때, 곧 그때 아마 나는 변모하고 세계는 쇄신될 것이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죽지 않고 마침내 행복하게 될 것이다. 칼리굴라는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불가능이 가능이 되도록 하려 한다. 새 세계를 이룩하겠다는 그의 꿈 앞에서 인간의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다. 칼리굴라는 무제한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권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한다. 모든 한계가 무너진다. "생명이 나의 것인 한 내 자유에 경계선이 없다." 이 부조리는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현실의 조건으로 변형된다.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의미라는 것은 세상에서 제거된다. 이것이 전통주의자 귀족계급의 잔여세력 뿐만 아니라 바로 칼리굴라의 친구였던 스키피오와 케레아가 저항을 하게되는 이유가 된다. 이들은 문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의 힘을 보다 높고 치명적인 정열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신성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합니다. 사실 무제한의 권력을 가진 사람을 로마가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를 무가치하게 간주하면서 그런 권력을 무제한으로 행사하는 사람은 그가 처음입니다. 그게 내가 칼리굴라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점입니다. 생명을 잃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때가 오면 나는 생명을 포기할 용기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존재의 이유가 없다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살아야할 어떤 이유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전체주의가 칼리굴라로 의인화되고 있다. 그리고 카뮈는 그 연극 안에서 왜 자신이 그것에 대항하여야만 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누구라도 일시적인 기분에 의하여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상황, "가장 터무니없는 공상이 언제라도 현실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항하여야만 한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조차도 "무언가를 거부하기 위해서 그것을 모욕해야 하고 타인들의 믿을 권리를 박탈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증오한다. 칼리굴라는 1930년대 동안 유행하던 태도들과 가치, 곧 냉소주의, 오만, 엘리트주의, 그리고 낙원주의의 허무주의적 형태 을 나타내고 있다. 카뮈에 의하면, 그런 가치들과 행위는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은 단지 칼리굴라나 히틀러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아마 스탈린을 포함하여 그 어느 독재자에게라도 향해진다. 그러한 저항은 계속되어져야만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로마 황제로 표현되는 악은 세상의 일부로서 근절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스트에서 되풀이되었던 이 부분은 칼리굴라가 극의 마지막 대사를 말할 때 명백해진다. "나는 살아있다."

칼리굴라는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험을 훌륭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희곡의 약점은 카뮈가 파시즘을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려는 의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비록 그 두 체제가 일어난 사회경제적 여건 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않다. 두 체제의 정치적 구조는 매우 흡사하다. 1930년대의 상징으로 채택된 로마에서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가 특정의 무리들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매력이나 전체주의를 승리로 이끈 다양한 사회적 영향력의 매력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메시지를 이해했다. 카뮈는 삶의 무의미성에 의해 정당화된 윤리적 상대주의의 정치적 결과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 안에서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했던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전체주의적 체제라고 이해했던 것 뒤에 있다. 그리고 진정한 개인들의 수난과 개인적 결정들을 보여주었다.

이 희곡은 그 극적 효과가 강하고 인물들은 다중의 차원을 가진다. 이 작품의 문제점들은 그 철학적인 중심 전제들에서 비롯된다. 카뮈는 칼리굴라에 대한 저항을 존재의 부조리성을 감수하는 것에 대한 거절과 동일시하기를 원했다. 사실 파시즘과 공산주의도 역시 만연하던 무의미성과 상대주의와 싸우려 하였다. 집단적 증오와 권력의 독재적 사용에 대항하기 위하여 부조리를 삶의 조건으로서 심각하게 꼭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자유주의, 종교적 가치, 맑시즘에 대한 단순한 열심도 정치적 저항의 동기가 될 수 있다. 비록 칼리굴라가 부조리의 정치적 결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최초의 카뮈의 작품일지라도 말이다. 그 형이상학적 전제들은 아이러니컬하게 전체주의 혹은 그것에 대한 저항을 밝히는데 필수적이지는 않다.


*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1945 書簡文

전시 중에 썼던 4편의 서간형식의 독일인론獨逸人論으로서 편협한 애국심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 페스트 La Peste 1947

페스트는 그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었다. 이것은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암시하면서 페스트의 유행과 싸우는 선의善意의 사람들의 행동을 단순 명쾌한 문체와 힘찬 필치로써 그렸다. 고전적 정제미整齊美가 넘치는 문체와 인간의 아름다운 연대성連帶性 및 우애를 주제가로 한 내용이 많은 공감을 샀다. 이 작품으로 1947년도 비평가상을 탔으며 1960년까지 65만 부가 팔렸다.

알제리의 해변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발생하였다. 완전히 폐쇄된 이 도시에서 주민들이 페스트에 도전한다는 이야기이다. 인생에 대해서 방관자이면서 기승을 부리는 페스트에 대해서는 일종의 적의敵意를 품는다. 주민들의 투쟁을 조직화하는 지식인 타르와 그에게 협력하는 의사 뤼가 중심이 된다. 애인이 기다리는 파리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신문기자와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지 않는 하느님에게 절망하면서 기도하는 신부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페스트는 분명히 프랑스를 전쟁으로 휩쓸어 넣은 나치스 침략의 상징이다. 따라서 페스트의 종언은 파리의 해방을 의미한다. 페스트가 끝난 것은 반드시 주민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자연현상이었다는 결말이다. 카뮈가 프랑스 민중의 저항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던 증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세계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은 지성에 뿌리박은 연대連帶에 의해 행복을 얻는다는 그의 철학이 이 작품에 잘 나타나고 있다.


* 계엄령 1948

계엄령은 페스트의 주제를 극화한 것이다. 시사평론을 쓰면서 연극을 상연하여 청년층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를 실존주의자로 보는 세상 사람들과 매스컴에 대해서는 항상 그것을 부정했다. 그는ꡒ실존주의가 끝난 데서부터 나는 출발하고 있다ꡓ라고 말했다.


*정의正義의 사람들1949

정의의 사람들은 제정 러시아 혁명당원의 행동을 주제로 한 에세이이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역사적, 예술적 반항의 역사를 서술했다.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반대하며 점진적으로 차츰 고쳐 가는 중용의 방법을 주장한다.


*반항적 인간1951

반항적 인간을 둘러싸고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여 10년 가까이 맺어온 우정에 파탄이 갔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아래는 로제키요가 쓴 반항적 인간의 해설이다.

카뮈는 언제나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초점을 재조정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경우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전히 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은 형이상학과 윤리의 범주 속에 든다. 부조리와 반항은 그에게 있어 동시적인 것이다. 그가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던 날 부조리의 감정이 태어났다. 동시에 그 무의미에 대해 항거하는 반항이 태어났다. 병이 들자 그는 스스로가 파멸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온 생명의 힘으로 죽음의 위협에 항의한다. 그는 병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이후 그의 온 삶은 오직 생명의 힘과 죽음의 힘, 피로와 창조의지, 불꽃과 잿더미 사이의 기나긴 싸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 사는가. 표리I'Envers et I'Endroit로부터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질문이 그의 전작품 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헐벗음과 몰이해와 고독 속에서 왜 사는가. 그러나 대답은 질문 그 자체 속에 있다. 카뮈는 결코 이렇게 자문해본 적이 없다. 계속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상태대로의 세계에서 자살해야 하는가. 이렇게 자문해 본 적도 없다. 왜 계속 살아왔던가. 사실은 이렇다. 아무튼 그는 살고 또 살기를 좋아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가 존명存命할 이유를 계속 찾아가면서 동시에 풀어야 할 신비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 부조리의 감정이란 삶의 온갖 어려움을 요약하고 있고, 반항이란 그 삶의 한계에 항의하고 있다. 요컨대 표면 없는 이면이란 없는 것이다.


* 부조리와 반항

부조리가 존재하는 곳 그 어디든 그 곁에 반항이 존재한다. 공산당 가입행위, 노동극단 활동, 문화원 활동 등의 반항, 또는 시디 벨 아베의 요직거부라는 반항, 재판부의 불합리성 보고라는 반항 등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 창조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벌써 사회적 투쟁에 버금가는 하나의 반항행위가 아닐까. 카뮈는 오당Hodent 과 아랍인 족장 엘 오크비El Okby가 당하는 불의, 프랑스 내에서 북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불의, 그리고 알제리의 카빌리 지방에서 행해지는 불의 등을 고발한다. 그는 시행령, 검열, 전쟁이라는 수단, 그리고 전반적인 소시민화 등을 비난한다. 칼리굴라Caligula는 죽음, 질병, 가난, 그리고 온갖 형태의 지혜 혹은 동의에 대한 기나긴 분개의 외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반항은 절대에 지나친 탓에 경련 속에서 소멸하고 만다. 그리하여 예술가 케레이는 단검을 쥐고 이제 폭군이 된 그 반항자反抗者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를 배반하는 반항에 의해 카뮈가 뜻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니었을까. 카뮈는 그래도 역시 칼라굴라를 부정의 계열 작품들 속에 넣는다. 스톡홀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렇습니다. 제가 제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이미 하나의 명확한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부정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세 가지 형태 아래에 말이죠. 소설적인 것으로는 이방인, 희곡적인 것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 사상적인 것으로는 시지프의 신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부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란 말이죠.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그것은 제게 있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같은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사실 저는 인간이란 부정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이마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점을 시지프의 신화의 서문에서 예고해 둔바 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예의 그 세 가지 형태 아래에 긍정적인 것을 계획했습니다. 소설적인 것으로는 페스트, 희곡적인 것으로 계엄령과 정의의 사람들, 사상적인 것으로 반항적 인간을 말한다. 그리고 저는 벌써 사랑이라는 주제 아래에 세 번 째 고리를 예감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막 착수한 계획입니다." 이러한 설명이 부분적으로 정확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설명은 그래도 역시 시대의 질곡을 겪게 된다. 실제로 카뮈는 부조리 계열의 작품고리에 수정을 가할 필요를 느꼈을 때에 그 고리의 의미를 명확히 인식했었다. 언론과 독자들은 이 첫 삼부작에 염세주의의 명성을 부여했는데 이 염세주의의 명성은 그 자신마저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여러 사건의 영향으로 그가 본의 아니게 부조리를 특화했듯 반항을 특화하도록 몰고 갔던 것이다.

다른 어떤 책보다 더 시지프의 신화가 이러한 변질에 대해 책임이 있다. 전쟁의 와중에 출판되어 전통가치를 상실한 채 어찌할 바 모르던 젊은이들에 의해 탐독된 이 책은 무의미의 개론서처럼 되어버렸다. 1940년의 대붕괴가 이미 이 가치들을 휩쓸어가 버렸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그 역사적 문맥으로부터 격리시켰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은 지중해를 넘지 못했고 칼리굴라는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버렸다. 카뮈는 오랜 세월 동안 부조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 포콩Louis Faucon 이 지적하듯 시지프의 신화는 하나의 건축물을 준비한다. 체계적으로, 그리고 정열적으로 시지프의 신화는 미래의 건축을 위하여 청소했다. 카뮈는 이론적으로 볼 때 죽든지 아니면 삶의 이유를 제시하든지 하는 양자택일까지 밀고 갔다. 그가 파도가 높은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태우고 광풍을 맞았다. 바로 그 위협받는 행복 속에서 더 잘 항해하기 위한 것이다. 자살의 거부를 정당화하는 카뮈의 추론은 분명 하나의 추론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의 귀납적 정당화이다. 자살을 자살로 이끄는 치명적 논리에 맞서 그는 오직 하나의 집요한 열정, 하나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모험을 내세웠다.

그의 피에르 보넬에게 보내는 편지는 극히 명쾌하다. 시지프의 신화는 하나의 서문이요, 하나의 원점이다. 카뮈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모든 서문은 그 안에 스스로의 결론을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원점을 고정시킨다는 것, 그것은 이미 하나의 가치체계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인식했듯 부조리의 분석이란 곧 부조리의 거부이다. 부조리의 분석은 혼란한 것에 형태를 준다. 어둠 속에 어떤 빛을 던지고 윤곽 없는 체험에 체계를 준다. 표현이란 부조리에 대한 투쟁이다. 그것이 침묵과 몰이해를 깨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존재 자체에 의해, 그리고 그 속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방식에 의해 시지프의 신화는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반항의 작품이다. 두 작품은 타인들에게 어떤 진실을 전하려 든다.

카뮈는 1954년 한 초고에서 이방인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 어휘로써 정의했다. "이방인은 현실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거기서 나는 차라리 일상적 열기의 육체 속에 구현된 한 신화, 그러나 뿌리뽑힌 한 신화를 볼 것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배덕자의 한 새로운 전형을 보고자 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정면으로 공격받는 것,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공산주의이며 나치즘이다. 동시에 부르조아적인 세계, 한마디로 동시대의 암인 소송 당한 세계이다. 뫼르소에 관한 그의 존재 내부의 긍정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죽음마저 불사하는 거짓에의 거부이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다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뫼르소는 판사의 편이나 사회적 법률의 편이나 관례적 감정의 편이 아니다.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돌처럼 바람처럼 태양 아래의 바다처럼 존재할 뿐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런 관점 아래에서 그 책을 독서한다면 여러분들은 거기서 일종의 진실의 도덕과 세계의 환희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컬하면서 비극적인 열광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그것은 어둠, 표현주의의 희화, 혹은 절망적 빛을 동시에 몰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석은 미국판 서문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초판이후 약 1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 힘입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시지프의 신화에 대한 침착한 독서가 남길 수 있는 인상을 확실하게 한다. 카뮈는 여기서 세계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와 인간과의 즉각적인 관계 속에서 세계를 묘사할 따름이다. 그는 자신의 무대를 장치한 셈이다. 이제 극을 연기할 일이 남아 있다. 이 비극은 형이상학적 부조리와 인간적 반항간의 대결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왜 그가 지금 있는 이대로의 연극에 열중하여 자기 몫을 성실히 연기하면 안 된단 말인가.


* 전락 La Chute 轉落1956

깊은 내성內省에서 우러나온 어두우면서 순수한 반짝임을 지닌 걸작으로 사르트르가 절찬하였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정치참여에서 정관주의靜觀主義로 처신을 바꾼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침묵의 배후에 영혼의 격렬한 갈등과 고뇌가 없었다. 1957년 노벨 문학상文學賞을 받고 나서 최초의 본격적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의 술집에서 전직 변호사 클레망스라는 사나이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화자話者인 클레망스는 과거 한 여인이 센 강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을 보고도 방관한 이후 자신의 명성과 덕행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나를 깨닫는다. 세상에서 진정한 결백과 정의 등은 모두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정신적 범죄자라고 말하는 클레망스는 상대방의 위선을 깨닫게 하고 죄인으로서의 연대감을 일으키려고 한다. 인간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원죄의식을 통한 실존의 철학을 보여 준다.

 

 

출처 / 시와 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