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한 편의 여러 생각·4
- 어머니와 연蓮
진경환(한국전통문화학교 교양과정부 교수)
맑은 새벽 목욕을 겨우 마치고 淸晨纔罷浴
거울 앞에 앉아서 힘겨워 하네 臨鏡力不持
천연스레 한없이 고운 그 모습 天然無限美
단장하지 않았을 때 더욱 어여뻐 摠在未粧時
이 시를 읽으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홀로 사시다가 졸지에 가신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들이 그렇듯, 단정하고 깔끔하신 분이었다. 아침에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지만 대답이 없다. 내 딴에는 걱정을 한답시고 초인종과 핸드폰을 열이 나게 울린다. 한참 후에야 어머니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린 채 미안한 얼굴로 내 신경질을 받으신다. 그리고는 “머리를 며칠 못 감았더니...”하면서, 거울 앞에 앉아 천천히 머리를 빗으신다. 자그마한 어깨 위에 걸친 분홍빛 수건 위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어머니 손길에는 힘이 없다. 이부자리에는 화투짝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새벽에 잠에서 깨어 재수를 점쳐보면서 다섯 자식들 하나하나 걱정하셨음에 틀림없다. 머리맡에는 갈아입으실 내의가 얌전히 정리되어 있다. “오늘은 뭐 하실 거에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나는 노인정에서 재미있게 논다.” 조용히 문이 닫히면, 어깨 아픈, 키 작은 어머니가 힘겹게 옷을 갈아입으시는 것이다. 가끔 화장을 하실 때도 있지만, 대개는 맨 얼굴이시다. 축 쳐진 볼살, 틀니를 빼면 낯설고 무서워 바라보기 민망한 입, 검버섯이 자꾸 늘어나던 얼굴. 그러나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답던 그 모습. 이 시는 내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 때 사람 최해(崔瀣; 1287~1340)가 지은 이 시는 ‘풍하風荷’, 곧 ‘바람 속 연蓮’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제목을 보지 않으면, 이 시가 연을 노래하고 있는지 도대체 감을 잡기 어렵다. 깨끗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자태와 체취를 진진하게 상상해 보다가, 문득 제목을 보고는 이것이 연을 노래한 것임을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속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제목과 내용 사이에 의도적인 단층을 둠으로써 시의 함축이 그만큼 유장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시에서 목욕을 마친 후 정갈한 모습이 무한히 아름답다 했으니, 이 시는 미인을 그리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물기 머금은 따스한 살결과 촉촉한 머릿결, 그리고 목욕 후의 나른한 피로감이 어찌 젊은 여인네에게서만 느껴지는 것이겠는가.
이 시는 다음 시와 견주어 볼 때 내게는 훨씬 더 다정히 다가온다. 이제 읽어 볼 시의 제목도 ‘풍하風荷’다. 조선 초 대표적인 문인 학자였던 권근(權近; 1352~1409)이 지었다.
서로 기대어 우뚝 하더니 亭亭相倚竝
저절로 밀려서 하늘거리네 嫋嫋自推移
지조가 없다고 이르지 말라 莫噵無持操
머리는 흔들지만 간사한 짓 아니니 掉頭非詭隨
단적으로 말해 이 시는 서술적이면서 이념적이다. 앞의 두 줄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연을, 글자 그대로 기술하고descrive 있고, 뒤의 두 줄에는 매우 정치적인 관념을 투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별무 재미다. 이렇게 보면, 시는 무엇보다도 정겨워야 할 것이다. 신경질을 부리든, 욕을 해대든, 한숨을 쉬든, 어쨌든 정겨운 것이 낫다. 정겹다는 것은 대상에 관심을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의 시가 불온해지지 않고 그래서 재미없어 질 때, 주위를 정겹게 바라보는 것이 좋다. 물론 그 시선과 형상은 정겹지 않아도 무방하다.
▣ 진경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저서로는 『고전의 타작』등 다수.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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