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파한 폴레 하주 다리에서 / p r a h a
시인의 적敵, 시의 적敵
서준섭
한때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건설하려 했던 국가의 적은 시인이었다. 엄격한 계급사회의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열려진 사회를 꿈꾸는 시인들은 시대의 반역자고 이단아이기에 추방되어야 할 존재였다 . 그리고 이제 이 땅에 살아남은 시인들은 최소한 정치권력자보다는 존중받으며, 그들의 시는 우리의 삶이 던져진 모든 곳에서 최고의 가치와 아름다운 선율로 낭송되며 울려 퍼지고 있다. 하지만 시인들은 여전히 이 세상의 고독 속에 두려워하고, 분개하며 홀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수많은 시인(시)의 적들이 그들의 삶 안과 밖에 은밀히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인세계》 가을호 기획특집으로 마련된 <시인의 적敵 , 시의 적敵>은 쉽게 발각되지 않은 채 ‘시’라는 자유지自由地를 침탈하는 숨은 적들을 짚어내 보고자 한다. 우리 시의 적을 밝히기 위해 시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30명의 시인들이 자신들의 바로 앞에 있는 적들이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드러난 시인의 적, 시의 적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 편집자
이근배
불, 불, 불 不 不 不…
나는 시가 무섭다. 내 시가 무섭다. 나의 시는 나의 시뿐 아니라 내 생애를 통틀어 물리칠 수 없는 숙적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싸움터에 나가려면 적을 잘 알고 내가 맞설 수 있는가를 먼저 점검했어야 했는데 나는 글자에 눈도 뜨지 못한 하룻강아지가 시라는 호랑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잡겠다고 덤벼든 꼴이다.
그러다가 지금은 시란 놈이 내가 잡기는커녕 눈만 흘겨도 까무러칠 수밖에 없는 무서운 호랑이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시랍시고 써놓은 글자들이고 시가 아닌 것을 여기저기 활자로 박아냈으니 그것들이 눈을 부릅뜨고 시를 욕되게 한 나를 꾸짖고 곤장을 치려 드는 것을 어쩌랴.
남들은 금싸라기 같은 벼농사를 거두는데 나는 쭉정이를 알곡이라고 내놓은 꼴이 되었다. 쭉정이로 어찌 밥을 짓겠으며 씨앗으로 싹을 틔울 수 있으랴. 저 추사秋史는 “젊은 날 쓴 글들을 두 번이나 태웠다〔少日著述者焚之再〕”고 술회했다. 불쏘시개감도 못 되는 내 글들을 태우지도 못했으니 나는 도망갈 틈도 없게 되었다.
내 시의 적은 그 몹쓸 불不자들이다, 공부가 모자라고〔不學〕 재주가 미치지 못하고〔不及〕 글이 되지 못하고〔不文〕……, 어디 이것뿐이랴 不 不 不 不…… , 시가 아닌 내 시가 불귀신이 되어 꿈자리에서도 나를 덮친다.
김종해
사회적 무관심과 문단의 섹트주의
시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오독誤讀은 시의 토양을 황폐케 한다. 더구나 좋은 시인들의 좋은 시에 잘못된 등가를 매기는 비평가들의 편향적인 시각은 우리 시를 병들게 한다. 이념과 사상으로 무리짓거나 작당하여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 있는’ 시인을 띄우는 문학 파벌과 섹트주의도 우리 현대시사에서 흔하게 보아왔다. 개성과 기량을 갖추고 등장한 신세대 시인들은 철옹성 같은 이 문단의 섹트주의에 좌절하거나 눈치마저 보고 있다. 당당한 시인으로서의 행보가 자리를 잡기까지 이들이 뛰어넘을 장애는 시인들 모두에게 벽이며 적이다.
우리 문학의 익숙한 구조처럼 굳어진, 편파적이고 편향적인 파벌과 작당은 세계문학에서 한참 낙후된 오늘날 우리 문학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천양희
동어반복은 나를 고갈시킨다
고통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말을 허리띠처럼 조여매고 살면서도 그것으로 몸과 마음이 엇갈려 병病이 날 땐 성장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무력해진다. 가난이나 고독, 고뇌, 고통까지도 이길 힘이 없으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왔고, 문학에 대한 주저와 나약함을 극복해야 그 세계에 있는 무엇엔가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도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럴 땐 글을 쓸 수도 없고 일과처럼 되어 있는 산책도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생각도, 어떤 발견도 할 수 없이 하루하루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동어반복은 시에 변화도 변모도 없게 하는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이처럼 동어반복은 나를 고갈에 시달리게 한다. 어느 평자가 말한 소재의 고갈, 영감의 고갈, 표현의 고갈, 소리의 고갈이 나를 짓누른다. 그 짓누름이 시인에게 꼭 있어야 할 자발적 소외와 지독한 고독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것 못지 않게 나를 현실적으로 두렵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다. 시를 돈으로 생각한 적은 없지만 시로써 밥 먹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끔 한다. 그리고 또 이것보다 더한 시인의 적은 남의 시를 깊이 읽지도 못하고 직시直視도 없이 함부로 비판하는 자들의 오만방자한 태도다. 진정한 비판이란 당사자를 화나게 하지 않고 부끄럽게 하는 것이며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내가 시를 쓰고, 시인으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죄없는 일이 시쓰는 일이고 가장 죄없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말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유안진
바쁨과 타성
시인의 적敵은 바쁨이고 시의 적敵은 타성惰性이다.
시 외의 잡일로 바쁘다는 것은 상상하고 또 상상하고, 기발하고 엉뚱해질 수 있는 심심한 시간을 훼방받는 것이다. 이럴려고 조퇴早退한 건 아닌데! 시인에게는 시 외의 모든 일은 무조건 잡무雜務. 그래서 자꾸 투정한다. 제발 시인들 가만 놔둬 달라고. 무존재로 느껴지도록, 살과 뼈가 저리도록 서럽고 외롭도록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쓰던 대로 그냥 쓴다는 타성惰性이야말로 시의 적만이 아니라 모든 창작의 적이다. 평생 한 우물 파기는 창작 아닌 기술일 뿐. 끊임없는 모험과 변신에 거듭 변신을 시도하는 무모한 열정으로 시집마다 새로움을 보여줘야 한다. 시도하고 거듭 시도하다가 비록 망쳐버리고 말지라도.
문정희
내 시의 적은 무엇인가 ; 겁
“당신의 문학의 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겁’이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 나는 좀 겁이 많다.
줄광대가 줄을 탈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것처럼 나는 시라는 외줄 위에서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생명이다.
하지만 생이란 그 전부를 줄 위에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당연히 현실 속에서 나는 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하지만 겁쟁이인 나라고 하더라도 땅 위에서 우글거리는 저 많은 적들이 기실은 적이 아니라 곧 나의 문학을 키우는 기름진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창조력의 쇠퇴, 열정의 고갈 외에 본질적으로 시의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쓰고 또 쓴다. 그것이 전부임에랴.
조정권
시인은 시로써 복수의 꿈을 꾼다
문예진흥원 자료관장으로 있을 때다. 신입 사서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었다.
“전 시집 같은 거 읽지 않습니다.” 이유를 묻자, “시가 마음을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경멸투의 대답을 들었다. 내가 살아온 주변에는 이런 ‘반시자反詩者’ 혹은 ‘시맹자詩盲者’들이 도처에 있었다. 이들이 모두 지식인이었음을 감안할 때 독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시의 잘못도 크다. 우리는 그들이 혐오하고 경멸하고 있는 시에 대한 마음까지도 시로 만들었어야 했다. 시인의 적은 시인일 수 있다. 무명시인 시절 때 겪었던 일이다. 어느 중진급 대가의 시전집이 산문전집과 함께 발간되었는데 그 속에 실은 화보사진을 보다가 내 자신의 부고 소식을 받은 느낌을 받았다. 시인을 중심으로 왼쪽 끝에 서 있었던 내 모습이 오려진 채 나와 있었다. 그 사진은 수십 년이 지나 그 원로시인이 작고 직전에 나온 전집에서도 여전히 나는 가위로 오려진 채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자신 옆에 생존할 이유나 권리를 부정하듯. 시인의 적은 선배들이다. 선배들은 겁을 준다. 그래서 내 오랜 세월 마음 속에선 1인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시인은 시로써 복수의 꿈을 꾼다.
신달자
시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산만한 생활이다. 시에 집중하는 시간보다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은 시인에게 적敵일 수밖에 없다.
밥벌이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입이 먼저라는 말이다. 생활이 우선이라는 약빠른 생각이 시를 자꾸만 멀리하게 만든다. 멀리하다 보면 그 공백이 두렵다. 시는 시에게 눌러앉아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무서운 고립의 지루한 집착 안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책도 그때 맛있게 읽게 될 것이다.
더러 시인은 먹을 때도 달릴 때도 잠을 잘 때도 시적 긴장이 가동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24시간 시가 시인의 몸 속에서 흐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만에, 내가 알기로 시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붙잡고 늘어지고 싸우고 터지면서 한 올 비단을 짜는 일일 것이다. 내 경우 먹고 살자고 여기저기 부르는 곳 다 가고 허겁지겁 다 가고 체면도 차리고 외로움에 벌벌 떨고 그래서 그렇게 싸다니다 보면 덜컥 겁이 나고 그런 몰골로 일생 한 편의 시를 남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한 생활, 시간을 짓무르게 하는 집중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시인이다. 산만한 생활은 시작詩作의 시간을 금간 항아리의 물처럼 새어 나가게 하지 않겠는가. 물론 둔하기 짝이 없는 내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장석주
나태와 돈
내 시의 적은 나태와 돈이다. 나태는 생활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그러나 시는 한 점의 나태를 용납하지 않는다. 시마詩魔는 항상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오늘의 모든 것을 원한다. 내가 가진 시간과 고통과 지복, 그리고 내가 앓는 병病들, 그 모두를 내줘야만 겨우 시 몇 점을 건져낼 수 있다. 이 시마詩魔의 신전에는 현존의 모든 것, 경험과 해석과 직관 모두를 바쳐야만 한다. 나태는 현존의 일부를 뒤로 빼돌리는 짓이다. 시마詩魔는 찢어진 경험의 일부, 찢어진 해석의 일부, 찢어진 직관의 일부를 받지 않는다. 항상 온전한 것만을 요구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 안에 거대하게 웅크린 나태와 싸우는 것이다. 나태에 굴복할 때 시는 없다. 나태를 넘어설 때 비로소 시는 온다. 그 다음 시의 적은 돈이다. 나는 생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구차한 살림을 꾸리는 데도 크고 작은 돈이 들어간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잡문에 매달리고, 강의를 준비하고, 방송사를 왔다갔다하는 동안에 시는 멀어진다. 나는 시와 생활, 본질과 비본질, 마음과 욕망, 도약과 추락 사이에서 찢긴다. 그러나 밥 먹고 새끼를 키우고 돈을 버는 생활이 시보다 덜 숭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는 그것들 속에 있고,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돈을 버는 생활은 곧 시로 도약하기 위한 받침대다. 생활을 외면하고 좋은 시는 나오지 않는다. 시의 적은 곧 시의 동지인 것이다.
박남철
공자의 생활난
시인의 적敵은 ‘공자의 생활난’이다. 시인의 적은 시의 적이기도 한 것이며. 시인은, ‘공자의 생활난’을 이겨내보고자 천하를 철환하기도 했었다. 마치 ‘상갓집의 개’처럼. 나도 이 세계적인 경기 빙하 속에서, ‘공자의 생활난’을 이겨내보고자, 마치 ‘상갓집의 개’처럼, 비록 어느 상갓집의 논두렁 밑이라 할지라도 한번 뒤집어엎어 보고 싶기도 하다는 것이, 요즘의, 마치 ‘미네르바Minerva의 부엉이’ 같은, 솔직한 내 심경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의 생활난’은 시인 김수영이의, 아니 공자적 김수영이, 또는 김수영적 공자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求하였으나 /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 국수―이태리어伊太利語로는 마카로니라고 /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事物과 사물事物의 생리生理와 / 사물事物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 사물事物의 우매愚昧와 사물事物의 명석성明晳性을 //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전문
하여, 문제는, 나의 이 문제의 결론은, 이 시인의 적과 시의 적의 문제의 결론은, 저 하고많기도 한 잘난 ‘김수영론’들 속에서, 저 「공자의 생활난」이, 혹은 「공자의 생활난」 속의 저 ‘작란’과 ‘반란성’들이,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제2장에서의 “유자가 말하였다. 그 사람 됨됨이가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들에게 공손하면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 아니하다.〔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라는 대목과의 고통스런 충돌인 것으로 본 논문을 나는 아직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재무
내가 나를 상대로 치르는 싸움
내가 나로부터 멀어져 더 이상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질수록 시도 멀어져 간다. 내가 나의 기원인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단히 내 안에 자리한 적들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내가 나를 상대로 치르는 이 싸움은 타자 혹은 세계와의 싸움보다 훨씬 더 험하고 지난한 일이다. 내 시의 적은 바로 본래청정으로부터 멀어진 현재의 ‘나’다.
또 한 가지는 생활이다. 나는 생활에서 많은 시를 구하기도 하지만 강퍅한 생활이 시를 억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날의 구차한 생활세계는 나에게 깊이 있는 사유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유를 숙성, 발효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으나 생활이 노여워할까 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간단없는 생활의 억압, 생활의 긴장, 생활의 숙제, 생활의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나는 죽음 이후에나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황인숙
하찮은 것에 시간 탕진하기
글쎄…… 우선 떠오르는 게 인터넷이다. 지난 2년 남짓 인터넷 고양이 동호 카페에 푹 빠져 지냈다. 심신 멀쩡한 시간을 죄 그 카페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멀쩡할 시간이 온데간데없어졌다. 뭔 시간이 그리 술술 가는지…… 너무 피곤해서 혼절할 지경이 돼서야 간신히 로그아웃을 하고 폭 쓰러져 잤다. 그리 살다 보니 그 좋아하는 헬스장도 걸핏하면 안 가고, 그 좋아하던 미드도 볼 생각이 안 나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세수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내내 우적우적 뭔가를 씹어 삼키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과 기력을 탕진했다. 시가 깃들일 여건이 당최 아니었다. 시를 대면할 물리적 시간 자체가 나지 않은 건 물론이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카페 소식으로 뇌세포들이 퉁퉁 부어 시를 포맷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2차 감염이랄까, 이게 위험한 건데, 내가 꿈에도 되고 싶은 부자 상속녀도 아닌데 이 모양으로 살았으니 경제상황 또한 극악무도해졌다.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할 때는 거의 돈 생각이다. 대체 이게 시인의 머릿속이란 말인가? 쩝……
하이쿠 시인 타네다 산토카는 오직 시에 정진하자고 가족을 버려두고 동경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5년여 시 한 줄 못 쓰고 파락호로 지냈다. 몸은 가족을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가족과 재회하고 사람답게 살 만하게 갱생하자마자, 그는 진짜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아예 출가를 했다. 사람 구실을 하고 살면서는 시를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게 될 때까지 유랑걸식을 했다. 시를 써서 행복해하면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 시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 시처럼 질투가 많은 애인은 없다지. 유일한, 그게 불가능하다면 제1의 자리에 시를 두어야 하는데……
정일근
나의 적은 동시대 시인들 속에 있다
나의 적은 시인이다. 습작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적대적 관계를 가지게 하는 것은 동시대의 시인이다.
내게 시인이란 적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적들 중에서 내게 가장 무서운 적은 ‘나를 절망시키도록 뛰어난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 적은 나를 단숨에 굴복시켜 나를 스스로 무릎 꿇게 한다.
싸워보지도 못한 채 백기를 들게 하는 나의 적. 너무 쉽게 나를 무장해제시켜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나의 적. 포로도 행복한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나의 적. 영원히 적의를 잃게 만들어 버리는 나의 적. 그리하여 자신을 추종하게 하는 나의 적.
젊은 시인이었을 때는 선배시인들 중에 그 적들이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후배시인들 중에 그 적들이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시간에도 나의 적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라도 긴장을 놓으면 이내 나를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릴 나의 새로운 적들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최영철
부지런
게으름과 나태는 인간에게 오랫동안 배척당해온 적에 속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다정한 동지에 속한다. 대부분 게으름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게으름의 용도는 다양하다. 위급한 상황을 막아주는 힘은 부지런이 아닌 그 반대쪽의 게으름일 경우가 많다. 크고 작은 분쟁들, 국가와 집단과 개인 간의 문제는 부지런한 대처가 아니라 게으른 방관에 의해 무마된다. 인류 역사의 불행한 국면들은 그것이 야기한 파국이기도 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끼리 사소한 시비로 살인에까지 이르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잠시만 게을렀으면 무사할 일이었다. 알콩달콩 재밌게 지내던 연인들이 한순간에 갈라서는 것도 부지런이 화근이다. 따지고 캐묻고 야단치는 걸 조금만 더 게으르게 했더라면 그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으리라. 부지런하게 하루를 움직이고 나면 나는 민물에서 바다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금방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민다. 맹렬하게 살 팔자가 도무지 아닌 모양이다. 한때 소설을 써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것도 원고지 100장을 부지런히 써나갈 지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저 먼 고지, 그래서 나의 적이 되고 만 부지런.
송재학
나의 내부의 허술한 약속어음
시쓰기의 가장 두려운 적은 자신이 아닐까. 목요일이나 금요일부터 시작하는 “다음 주부터 다시 새로운 글쓰기가 시작될 거야”라는 스스로의 다짐은 늘 빗나가게 마련이다. 그 약속을 그나마 실행시켜주는 건 자극적인 외부이고 나의 내부는 허술한 약속어음처럼 상투적이기 마련이다. 왜 그럴까. 왜 나의 내부는 나의 글쓰기를 떠받치지 못하는걸까.
따져보자면 나의 내부는 늘 변동하는 전선戰線이기 때문이다. 엷은 귀는 사물을 정확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굳센 금강의 마음은 내 속에는 결코 자리잡지 못한다. 내 속에 들어온 사물들은 늘 지리멸렬하니 글쓰기는 난삽하게 마련이고 그게 글쓰기를 지연시키고 있다. 외부의 사물들과 나 사이에서 역시 불안한 진동은 내가 먼저이다. 내가 눈싸움에 지고 있다. 게으름과 글쓰기의 회의와 재능에의 끝모를 자학은 사물들이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그게 늘 나를 괴롭힌다. 그렇다고 텍스트에 대한 질투라도 없으면 마음 편하련만 이건 어디서 숨었다 불쑥 나타나는지 늘 한 움큼이다. 글쓰기의 지난함이여.
김영승
적은 곧 나의 친구, 나의 시
시의 적? 없다. 수학에 적이 있냐? ‘불타는 기하학’(파스칼, 『팡세』)인 그 시에 무슨 적이 있으랴? 인자무적? 능언能言한 성성猩猩*의 목후이관沐?而冠의 능언일 뿐이다. 시인의 적? 열린 사회와 그의 적들 같은 적도 없고 닫힌 사회와 그의 친구들 같은 적도 친구도 없다. 내가 열거나 내가 닫을 뿐인 그 사회라는 것도 적이었는데 곧 친구다. 원고청탁서에 열거된 적들이 적들이어야지 시가, 시인이 무적함대든지 아느냐 그 이름의 무적의 사나이 세운 공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이 되든지 할 텐데 그러한 현상들은 다 고해라는 이 화엄한 사바세계라는 청정 대도량에 주어진 ‘기쁨의 환영幻影’**들이다. 무지와 폭력과 야만은 늘 있었던 것이기에 나는 그냥 나의 위대한 은총이고 축복으로서의 운명이겠거니 하며 산다. 소크라테스처럼 모든 죄악은 무지의 소치다 정말이다 어쩌구 하지도 않고 예수처럼 잘났달까봐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어쩌구 하지도 않는다. 나는 늘 그러면 그러나 보다 한다. 인간의 집단이 함수하는 그 모든 마녀사냥, 개인사 및 가족사적인 문제 등등도 “저희가 나의 소시少時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구약성서 시편 129 : 2)를 떠올리며 그저 그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기를 원했던 적도 있으나 그야말로 짧았던 소싯적의 생각일 뿐이다. 그렇다면 적은 어디에? 나의 시는 가끔 그 적의 보물찾기 놀이를 하기도 하니 나는 내가 지향하는 바 ‘정신의 최강자’다. 그러면 됐다. 그 적을 나는 가끔 온 세상 어린이들 같은 천사들의 그 천사 같은 미소 속에서 찾기도 한다. 누가 나의 적이 되어 다오. 그러면 곧 친구가 될 테니. 그러면 곧 나의 시가 될 테니. 적은 없다.
* 鸚鵡能言不離飛鳥 猩猩能言不離禽獸―禮記
** W. Wordsworth, She Was A Phantom Of Delight
허혜정
적에 대한 묵상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놈들의 위선을 묵상하는 저녁, 단전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분노를 천천히 호흡으로 다스리는 이 정신수양의 시간. 하찮은 문예지가 판치는 나라의 말짜로 남아 있는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더럽게 운이 좋아 낡고 따분한 신작을 줄줄이 쏟아놓는 자칭 시인이라는 녀석들. 운명 때문에 틀어졌다는 사랑타령에 지친, 80년대의 액션포엠을 쓰던 녀석(지금은 생태시로 옮겨가는 녀석). 저항했다는 세상에 도대체 저항적이지 않은 시를 쓰며 단호히 생존의 무협지대를 누비는 녀석. 90년대 데쓰포엠으로 한몫 잡고서도 알 만한 권력자들이 와야만 양주를 푸는 얄팍한 녀석. 신문기자가 온다면 일어서다가도 주저앉는 녀석들. 결국 일간지에 한 꼭지 얻어 쓰고 거드럭대는 녀석들. 진짜 거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심한 평론가를 보디가드로 고용한 비겁한 녀석. 툭하면 상장을 성적표처럼 챙기며 질투를 자극하는 녀석들. 당신의 글을 잘 읽었다고 머리통을 숙여야 할 핏물이 솟구치는 세상쯤은 시를 쓰기 위해 참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독히도 가치 없는 시를 쓴답시고 내 언어의 오두막에 쳐들어와 서까래를 표절해간 녀석 (너를 오늘 죽일까 내일 죽일까 고민 중이다) 오랜만에 호프집의 휴식을 즐기는 나를 도토리라 부르며 내 기분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녀석. (이따 나의 시에서 보자!) 고이 다리를 꼬고 앉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헛소리를 견디던 나는 싸늘한 우울증을 막소주로 날리고 고독하고 쓰라리게 걷는다. 대낮에는 가죽소파에서 졸고 새벽에야 침대로 기어든다. 일어나자마자 간밤에 썼던 글을 첫줄부터 다시 뜯어고친다. 종잇장을 베고 자고 프린터에 눈물을 쏟으며 파멸한 사회가 키워낸 이상성격자의 세계를 읽는다. 처자식을 팽개치고 돈벌기도 거부했던 부랑배의 시대를 탐구한다.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지만 자꾸만 문예지에서 마주쳐야 하는 녀석들. 적들을 단숨에 짓이길 수도 있는, 진짜로 가치 있는 시의 가치를 모르는 녀석들. 특별히 내 이름을 잊어버린 녀석들 (너희는 영원히 내 시 속에 무명씨로 남는다) 고요히 놈들의 문장의 갈빗대를 부러뜨려 망각의 지하실에 처박아둘 수도 있지만, 제딴엔 시인이라는 녀석들을 위해 검도선수가 눌러쓴 투구처럼 점잖은 종이가면을 선택한다. 이렇게 검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갑자기 몸을 돌려 급소를 날려줄 수도 있지만, 단단히 두 손목에 힘을 주고 단번에 목검을 내리칠 수 있지만, 날렵한 펜대로 머리통을 두들겨대고 싶지만, 그럴 가치도 없는 녀석들을 모든 힘을 다해 비웃고 있는 나는, 모든 걸 독방에서 한방에 끝내버릴, 엄청나게 나쁜 펜을 움켜쥔 게 문제인 나는, 적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내게 파멸을 줄지라도 절대로 너희를 문학사에서만은 보고 싶지 않다!
황학주
내 시의 적은 사랑이다
어떤 이들은 시가 안 되면 연애를 하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어도 좋다. 그러면 시가 좋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시원찮으면 시도 못 쓰는 종류다. 사랑이 시원찮을 때 내 시는 비명이 되거나 헤어 나올 길 없는 비문非文 사이에서 버려진 자의 비문碑文처럼 헤매었다.
사랑과 세상과의 불협화음이 미덕이 될 수 있는 젊음의 시절이 지나간 지 오래, 나는 이제 협화음의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충분히 아팠고 아픈 것이 약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반목하는 세상을 사랑 쪽으로 이끌기 위해 내 시는 몸을 푼다. 주인은 응당 사랑이다. 내 시는 사랑에 예속된다.
그러니 내 시의 적은 사랑이다. 최선은 사랑이고, 시는 차선이다. 나는 이 선택에 후회가 없다.
정끝별
야만과 거만을 숭배하는
김수영의 산문, 「이 거룩한 속물들」을 읽는다.
덴 데서 또 덴다.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도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너, 비루한 속물 아니냐?
체크남방 차림의 김수영이 오른쪽으로 기우뚱 부라리듯 쳐다본다.
읽다 보니, 가일층 가관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이면 지옥이다.”
너희들, 야만과 거만을 숭배하는 뻔뻔스런 부류들 아니냐?
런닝구 바람의 김수영이 오른 턱을 괸 채 연민스레 쳐다본다.
그리고, 내가 침묵하는 이유!
나와 내 등속들이 뻘쭘히 서로를 바라보는 이유!
이윤학
내 시의 문제는 조바심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어느새 내 시의 틀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동안 나를 베끼면서 살아온 날들이 얼마였나? 자책하기에 이르렀지요.
시의 틀에 갇혀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얼마간만이라도 동화에서 시를 써보자 다짐했지요. 동화든 여타의 산문이든 거기서 자유롭게 시를 써보자, 그런 다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은 틀을 깨고 나오자. 그런데 내 시의 문제는 조바심에 있었습니다. 당장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안의 이미지와 진득한 사귐을 방해하는 조바심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여유가 없었지요. 언제나 나를 몰아붙였고 그래야만 조금 안심이 되었지요.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전에 한 권의 시집 원고를 갖고 있어야 안심이 되었지요.
이제는 시에 대한 조바심을 몰아내고 시를 쓰던 습관을 버려야겠지요. 그리고 나에게 절실한 이미지를 몸에 들여놓고 살아야겠지요.
이선영
0도 이하의 저체온증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바 ‘글쓰기의 0도(度·degree)’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시의 적敵은 나타난다. 그 0도란 항온 동물로서의 내가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존재의 체온, 삶의 체온이기도 하다. 그 체온이 37.5도를 넘을 때 나는 위험해지고, 그 체온이 0도 이하로 내려갈 때 또한 나는 위험해진다. 사랑, 욕망, 쾌락, 향락, 안락 등은 나로 하여금 37.5도 능선을 넘나들게 하고 비관, 절망, 회한, 낙담, 염오 등은 나를 0도 이하의 부엉이 바위로 밀어낸다. 노무현의 죽음은 더 이상 존재의 0도를 지켜낼 수 없는 자의 혹독한 저체온증이다. 그는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0도 이하란 그런 무너짐이다. 시인은 인간이지만, 단 시집 속에서만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종이 인간 아닐까. 그 외 그의 인간은 잉여인. 물론, 아쉽게도 나는 아직 이런 ‘종이 인간’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박정대
진부, 나의 적 나의 사랑
사랑의 증세는 멋진 무질서의 추구에서 온다. 사랑의 욕망이 관통한 자리엔 소요하는 침묵과 상처의 폐허로 가득하다. 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깊어지는 것이다. 침묵의 소요로 발성하며 상처의 폐허로 건설한다. 타자의 열망과 고통이 타액처럼 내 영혼의 심장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관류하며 나를 건설하려 한다. 나는 저항하며 동시에 사랑한다. 나는 무너지며 동시에 건설한다. 나는 멸망하며 매순간 탄생한다.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또 다른 생이 발생한다. 멋진 무질서의 신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멋진 무질서의 신세계를 발견한 순간 그와 그녀는 그곳을 떠난다. 왜냐하면 매순간 또 다른 생을 꿈꾸는 자들이 시인이며 그와 그녀의 언어가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의 적, 시의 적이란 기실 없다. 만약에 그런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영혼의 추동력을 상실한 진부한 우리의 일상일 테니까. 진부는 강원도에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도 있다. 어쩌면 진부는 진부를 벗어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진부에 당도하기 위해 진부를 벗어나 진부로 향한다. 거기엔 꿈꾸는 영혼들의 게르가 있으니까. 멋진 무질서의 신세계가 있으니까.
조말선
나의 시, 내가 가장 무서운 적
원고를 쓰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벌써 마감일을 넘겨버렸다. 너무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글로 확인한다는 수고로움 때문이 아니라 낯익음이 싫었던 것이다. 나는 이념 때문에 절필할 위인도 못되고 시 때문에 다른 나머지를 희생시킬 강단도 없기에 애꿎은 ‘나’를 멱살잡다가 얼르다가 세월을 끌고 왔다. 하염없는 무기력과 나태를 못이긴 것도 나였고 환멸을 못이긴 것도 나였고 때때로 닥친 현실적인 고난을 못이긴 것도 나였고 내 시의 꼴이 어떤지 알면서도 그 꼴을 벗어던지지 못한 것도 나였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몹시 낯익다. 그런데 이 낯익은 고백이 이 낯익은 반성이 낯설다.
신용목
지독한 무전략과 무기력이 나의 적
나는 시에 대해 어떠한 전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나는 삶에 대해 어떠한 전략도 가지지 못했다. 영원히 유예되는 미래를 볼모로 현재의 모든 가능성을 착취하는 것―그것은 권력과 자본이 살포한 불안감의 전능이거나 권력과 자본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교시일 뿐. 권력과 자본의 어떠한 계명도 우리의 삶을 갱신시켜 주지는 않는다. 다만 미학은 상식의 지평에서 상식 너머의 것을 추구하는 것. 그러나 나는 저 몰상식의 나락에게 ‘추구’를 소매치기당하고 말았다. 가족에게 핀잔을 들을 때도 고용주에게 굽신거릴 때도 심지어 한 끼 밥을 먹고 한 정거장 버스를 탈 때에도 나는 몰상식의 위력 앞에서 탈출을 꿈꾸는 비굴한 노예가 된다. 경제 불안, 전쟁 불안, 정세 불안을 조장하고 부추기며, 되려 불감증을 닦달하는 저들의 예수는 강남에 산다. (곧 흰 수의를 입고 최음제를 팔러 올지도 모른다.) 저 영달의 신앙 앞에서 기꺼이 사탄이 되고프나, 제기랄! 그럴 재주도 없는, 어쩌면 지독한 무전략과 무기력이 나의 적敵이다. 아니, 어쩌면 지독한 무전략과 무기력이 나의 전략이고 기력인지도 모르겠다. 신문 쪼가리나 붙들고 분노하고 있으므로, 아니 그것만으로도, 한때 제법인 딴따라였던 한 국무위원의 의심처럼, 아무래도 나는 미학에 세뇌당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은영
괴로운 것은 적이 움직이기 때문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 구름, 우물, 별, 파시즘, 죽음, 포즈, 사랑하는 친구들, 아는 남자들, ‘용산’이라는 고유명사, 온갖 악법들, 앓고 있는 병과 이름만 아는 병, 처방전과 약들, 시와 시인들. 쓰레기와 분비물, 감상, 유머, 분노, 그리고 지금 눈앞의 유리컵들과 빨간 고무장갑 한 짝. 이 부질없는 나열들. 마음이 가는 데 몸이 가지 못하는 슬픔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시의 적이 될 때가 있다. 어떤 날엔 시에 대한 가장 순결한 열정 때문에 시가 부패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 이 순간엔 무엇이 시의 적이지? 괴로운 것은 적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적을 따라 부단히 움직여야 하는데 정신도 감각도 자꾸만 느려진다. 피로 때문에, 확신에 대한 열망 때문에. 피로감들 혹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절대적 확신이 시인의 유일한 적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길상호
조급함과 나태함 사이
나에게는 시상이 머리를 스치고 갈 때마다 그 자리에서 내용을 완성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은 원하는 모양과 색채를 지닌 시로 완성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뭔가 부족해서 아쉬운, 또는 원래의 시상과는 아예 다른 모습의 시만 남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급한 마음은 나를 줄담배를 피워 물고 책상 앞에 앉아 있게 했다. 바로 잡지 않으면 영영 떠나버릴 것 같은 기분에 다른 일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에서도 익지 않고 머리에서도 풋내가 나는 시들을 손에서 털어내고 나면 남는 건 허무함뿐, 나는 이제 시에 대해 여유를 갖기로 했다.
그런데 여유로움은 쉽게 나태함으로 변질되곤 했다. 강렬하게 머리를 치고 간 시상도 무감각한 생활에 묻혀 어느새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음에 또 생각이 나겠지, 미뤄둔 생각들은 책상 앞에 앉아도 담배연기와 함께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글자를 남기지 못한 시상들과 이별을 고하면서 나는 또 무기력해졌다. 얼마 전에야 조급함과 나태함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시가 있을 가장 적당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직도 난 한쪽으로 기울기 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필요한 조율사의 손가락을 지니지 못했다.
최금진
안개가 나를 삼킨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안개가 낀다. 안개를 마주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안개는 조용히 눈앞을 지나다니고 익숙한 사물들을, 관념들을, 이미지들을 덮어버린다. 안개는 움직이는 백지다. 나는 뭔가를 쓰려고 하지만 한 마디도 적을 수가 없다. 안개가 내미는 종이는 허공에 가깝다. 또한 안개는 두루마리 화장지다. 축축하게 젖은 나를 사물에서 관념에서 자꾸 닦아 낸다. 나는 자꾸 닦여져 마침내 맹목에 가까워질 뿐이다. 나는 안개를 마주보고 있지만 안개의 내부나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알지 못한다.
안개 속에서 나는 온전히 혼자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 적이 있다. 적은 안개를 몰고 와서 나를 지운다, 내 시를 지운다. 먹고 사는 생계의 문제, 반복되는 자기복제, 무기력과 게으름, 사람과 사람과의 복잡한 일들. 이 모든 타락한 입 속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나를 삼킨다. 나이가 한두 살 더 늘어갈수록 어딘가는 자꾸 지워지고 뭉개진다. 어떨 때는 내 이름조차도 안 떠오른다. 안개 때문이다. 내 방에, 내 눈에, 아침마다 저녁마다 안개가 낀다.
고영민
내 시의 적은 ‘나〔我〕’
나는 시를 쓴다기보다는 받아낸다는 생각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시를 수신하는 일종의 안테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에 따라 시를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마치 라디오나 TV의 수신 안테나의 주파수가 맞으면 음악이 들리거나 영상이 보이고,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칙칙”거리고 영상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매한가지다. 나는 우주의 어떤 영혼이 나를 택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안테나, 즉 수신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나한테 머물 필요성을 잃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하여 나는, 나를 찾아온 고귀한 영혼들을 잘 모셔야 하며, 그 방법은 내 의식의 집을 소중히 다루고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어떤 영혼들로 인해 자신이 충만해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상태가 되면 시가 써지고, 그렇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 너무도 정확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떤 거짓과 타락으로 마음이 망가져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나는 몇 날 며칠 반성을 하며, 시혼詩魂을 다시 부른다.
김경주
적보다 먼저 예의를
명퇴로 퇴임 후 아버지에겐 새로운 즐거움이 하나 생기셨나 보다. 로또 복권을 사는 일이다. 시집간 둘째에게 들었는데 아버지는 숫자를 고르시느라 밤을 새운 적도 있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자동’으로 당첨된 로또기금은 요행이라고 생각하시고 직접 숫자를 고르는 ‘수동’은 노동이라고 생각하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로또의 숫자를 분석하고 조립하고 숫자를 중얼거리고 하실 때마다 환멸이 나신다고 한다. 아버지는 우리 삼형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경비실에서 근무하신다. 아버지는 지금 거기 아이들에게 경비할아버지로 불리신다. 아버지에게 토요일 저녁은 복권당첨이 된 사실을 확인하는 누군가의 표정을 상상하는 날이고, 당첨이 되면 어떻게 그 돈을 써야 할지 자신이 미리 꼼꼼하게 기록해둔 노트를 펼쳐보는 날이다. 노트의 구석엔 내 이름도 있다고 한다. 나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경비실을 들르곤 하는데 가끔 그 노트에서 내 이름이 차지하는 몫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아버지는 매주 어떤 숫자를 자식처럼 기르시고 아끼신다. 그 숫자가 품고 있는 비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의 긴장엔 아주 다양한 비밀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비밀에 한방이란 없다. 안간힘을 다해 비밀에 중독되기로 한 이상, 타인의 수에도 먼저 적보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장인수
세상 위의 장애물
‘지금 살고 있다’와 ‘지금 쓸 수 있다’ 사이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시인은 역동적인 생활 방식을 통해 만난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해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에 시를 써야만 한다. 보통 사람의 생활에 무한정 젖어들면서도 시인임을 뜨겁게 자각하는 냉철한 시인의 모습을 수없이 오가야 한다. 이 둘 사이는 계산된 것이 아니다.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폭주하는 업무의 연속은 차분한 사색과 고뇌의 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 생활을 탓하랴. 생활을 탓하면 시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육체적 건강을 잃는 것은 고욕이다. 육신이 건강해야 정신이 맑고, 정신이 맑아야 시심이 살아 있다. 누군가는 육체적 고통이 절실한 시의 육즙이 된다고 하지만 내 경우는 어찌 정반대인가. 몸이 아프니까 시가 시들하다. 몸이 아프니 푸념이 앞서고, 의지가 박약해지고, 견성見性이 무디고, 감각도 흐릿하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미친 야성野性이여! 나에게 오라. 천진天眞이여! 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의 정신이여! ‘지금 살고 있다’와 ‘지금 쓸 수 있다’ 사이를 팽팽하게 날아가라!
박후기
‘적과의 동침’을 끝낼 수 없을지라도
시인의 적, 이를테면 경제적 곤궁이나 비극적 개인사, 역사적 사건과 그로 인해 비롯된 인간에 대한 억압 등은 시의 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시를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들)을 사랑한다. 아니, 사랑해야 한다. 나의 연애가 불온한 것은 그것이 적(들)과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적이 있다’는 흔한 말 한 줄 더 보태는 것이 아주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적의敵意는 온전히 시가 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알기에 애써 적의를 숨기며 시를 쓴다. 그러나 자존심마저 발가벗기며 시를 쓰진 않겠다는 것이, ‘적과의 동침’을 좀처럼 끝낼 수 없을지라도 영혼을 화대로 지급하진 말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총론>
경계境界에서의 창조 - 특집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서 준 섭
‘시인의 적, 시의 적'에 대하여
‘시인의 적, 시의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에 대한 논의를 하기 전에 먼저 현역시인 30명의 글에 나타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 ‘시인의 적’: 창작의 여유와 시적 영감을 위협하는 일상적인 삶(질병, 삶의 고달픔, 일, 경제적 삶의 해결, 바쁨 등). 일부 동료 시인(시인을 괴롭히는 ‘거룩한 속물’), 시단의 풍토(섹트주의), 사회적 분위기(재미없는 정치 풍토), ‘맞수’라 할 만한 시인(자신의 존재를 무시한 일부 선배시인, 뛰어난 시를 쓰는 후배시인)
2) ‘시의 적’: 창작에서의 타성惰性, 동어 반복. 시인으로서의 ‘겁’(두려움)
이 내용을 보면 몇 가지 특성이 발견된다. 우선 시인들이 생각하는 적은 시인에 따라 다른데, 이것은 시인의 삶의 다양성과 개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많은 시인들이 공통적인 ‘시인의 적’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들의 경제적 생활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특히 현대시인이 처한 경제적 생활의 곤경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적 분위기를 말하고 있는 시인은 소수지만 그 의미는 가벼운 것이 아닐 것이다. 끝으로 ‘시의 적’은 바로 창작에서의 타성, 동어 반복이라는 데 많은 시인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것은 상투성을 극복한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시인 모두의 욕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그 욕망이 성공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시인들의 현실적 곤경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다시 두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시인들은 시적이지 못한 나날의 생활 때문에 창작에 전념하기 어렵거나, 여러 가지 생활의 압박 속에서 시를 쓰고 있다. 2) 시인들은 상투성이 시의 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가 과연 그런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요컨대, 생활인으로서의 ‘나’와 시인으로서 ‘나’의 이상 사이에서 곤경에 처할 때가 많다는 뜻이다. 이들 중에는, ‘시의 적은 없다’고 말한 시인도 있고, 창작의 맞수나 선의의 경쟁자를 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시인들이 말하는 ‘적’은 비유적 의미의 적이다. 사전적 의미의 적과는 다르다.
시인은, 삶의 새로운 이미지, 감각, 새로운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언어 예술가이다. 만약 그가 검객(투사)이라면 언어의 검객이다. ‘적’이라는 제목의 세 편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 김수영의 시도 그런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적이란 말은 보통 힘, 재주, 능력 등을 전제하는 말로서, 힘(재주, 능력)이 서로 비슷한 경우(맞수)에 사용된다. 상대방의 힘이 위협적이어서 상대할만 할 때 진짜 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적이라 하기 어렵다. 김수영의 시는 시인의 적을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
―― 김수영, 「적(1)」 전문
이 시에 나타는 적은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시의 화자는 여러 가지 적을 거론하면서 그 대처 방안을 말하고, “태평으로 지낸다”고 마무리짓는다. 김수영의 적은, 다른 시에서 “더운 날/ (…) 해면海綿같다/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문어발같다”로 표현되기도 한다.
뒤이어지는 이 시의 다음 부분에서 그 적은 “더운 날/ 적을 운산運算하고 있으면/ 아무데에도 적은 없고//(…)// 순사와 땅주인에서부터 과속을 범하는 운전수에까지/ 나의 적은 아직도 늘비하지만/ 어제의 적은 없고/ 더운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 더워진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적」) 와 같이 변주된다. 그 ‘적’은, 삶의 평화를 위협하는 주변의 일상적 인물이나 사건(일)과 같은, 좀더 구체적인 실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김수영이 적을 주제로 한 세 편의 시를 썼다는 사실은, 그가 그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날카로운 자의식의 시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시인들이 말하는 적은 김수영의 경우처럼 창작의 직접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경계’에서의 창조
1) ‘시인=생활인’의 곤경
‘시인의 적’, ‘시의 적’은 서로 긴밀하게 이어진 문제로서, 여러 가지 논의가 가능한 사안이다. 논의의 편의상 우선 ‘시인의 적’ 문제를 따로 분리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시인 자신을 위협하고 괴롭히는 적과 비슷한 예술가의 나날의 생활 문제는 개인적이자 사회적 문제이다. 이것은 시인들의 생활이, 현대 생활의 반복적인 일상성, 조화를 잃어버린 사회생활,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기계적 인간-시간’ 속에서 영위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회학자들이 거론하는, ‘부서진 전체성, 관리되는 사회, 목적-수단 합리주의, 인간의 도구화, 갖가지 권력 속의 개인, 삶의 파편화’등의 문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대사회-생활은 점점 시적인 것과 멀어져 가고 있다. 따라서 시인들이 생활 때문에 위협당하고 곤경에 처하고 있다는 말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경제적인 문제 해결과는 동떨어진 직업이다. 게다가 오늘날 언어를 사용하는 시는, 오감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대중문화, 영상문화의 위력 앞에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시 독자의 수는 대중문화 소비자 수보다 적은 편이다. 그 속에서의 시인의 위치, 그 상대적 곤경은 조금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있다. 생활의 어려움 속에 놓여 있는 시인들에게서 좋은 시가 나오기 어렵지 않은가. 독장의 입장에서 볼 때, 최근 들어 일상성의 시가 눈이 띄게 늘어나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는 첼리스트 요요마(Yo-Yo-Ma)와의 공동작업의 결실을 담은 새 앨범을 내놓았다. 이 유명한 이태리 영화 음악가 모리꼬네는, ‘수많은 걸작을 작곡하게 된 동기’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돈에 쪼들리며 살았던 생활 때문’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지만, 이것은 경제적 곤경이 창작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예이다. 그러나 시인은 아무리 일해도 영화 음악가만큼 큰 돈을 벌기 어렵다.
2) ‘경계’에서의 창조
이 특집은 첫째 오늘날 시인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창작의 조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앞에서 개관해본 문제가 그것이다. 둘째 각자 나름의 독특한 경계에서의 삶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곤경 없는 삶은 생각하기 어렵다. 시인의 창작 행위는 삶의 이 갖가지 ‘경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경계가 바로 시적 창조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경계’에서의 시적 창조 문제를 좀더 생각해보자. 삶의 경계에는 역경과 순경이 있다. 이 특집은 역경, 그 중에서도 적(위협적인 것, 부정적인 것)에 대한 것이지만, 질문에 답한 시인들에게 꼭 적만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친구, 행복, 기쁨, 보물’ 등도 있을 것이다. 적이란 것도 변한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하는 삶의 여러 계기를 경계(삶의 여러 순간, 계기)라고 한다면, 창작은 그 경계선에서 이루어진다.
두보는 안록산의 난을 피해 중국을 떠돌며 여러 편의 시를 썼고, 백석은 만주를 떠돌며 그의 생애의 대표작을 썼다(「북방에서」, 「흰 바람 벽이 있어」 등). 이육사는 ‘광야’에서 한 편의 시를 얻었다(“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노래의 씨를 뿌려라…”). 한때 ‘증언의 시’들이 유행하던 시대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어려웠던 때의 시인은 이 증언으로 시를 창작했다(김지하, 고은, 신경림 등). 그러나 지금은 그 시대와 다른, 일상성의 시대, 대중문화의 시대, 세계화 시대이다. 「긍정적인 밥」을 썼던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꽃」)고 노래했다.
삶의 여러 경계, 시적 사건의 순간을 시로 썼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해본다.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차 떨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 정현종, 「낮술」 부분
한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
어두운 화면
흐린 일생 위에서.
(중략)
피하고 싶은 자는
그것을 복수심이라 일컬으며
채널을 돌려버리면 된다.
그리고 밥상머리에서 입안에 든
밥알 오래오래 씹고 있어라.
―― 최승자, 「슬로우 비디오」 부분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중략)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부분
말하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
시인들의 답변에는 시인(시)이 보고 느낀 ‘적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시인들이 알고도 말하지 않은 잠재적인 적들도 있는 것 같다. 삼라만상은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질 들뢰즈는, ‘현실적인 것(the actual)’ 안에는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 있고, 잠재적인 것은 다시 현실적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삶이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라면, 죽음은 그 반대이다.
이를 ‘보이는 것(적)과 보이지 않는 것(적)’으로 바꾸어 놓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즉 적에는 보이는 적과 그렇지 않은 적이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남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깊이(은폐된 것)이다. 오늘날, 시단에는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시인(시)의 잠재적인 위협 요소가 세 가지쯤 있다고 생각된다.
1) 독자의 불확실성
오늘날은 시인들이 누구를 위해 쓸 것인지가 불확실한 시대이다. 독자의 불확실성은 보이지 않는 시의 중요한 위협 요소이다. 이 문제는 대중문화 속의 시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건가’등에 대해 스스로 묻고 그 대답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현대 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호소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 작가들은 각자 이 문제를 한번쯤 숙고해야할 처지에 있지 않을까. 일상성의 증대, 독자의 불확실성 속에서의 시의 좌표는 그만큼 불확실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특집의 궁극적 취지의 하나가 현대시의 난관을 재인식하면서 그 난관 타개를 함께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면, 시를 둘러싼 이 불확실성은 모두가 인식해야 할 사안이다. 이 문제는 시인뿐만 아니라 여러 독자, 평론가들이 함께 고심해야 할 현안이다.
제일 피곤할 때 적敵에 대한다
바위의 아량이다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긴다
신神의 아량이다
(…)
시는 쨍쨍한 날씨에 청랑한 들에
환락의 개울가에 바늘돋친 숲에
버려진 우산
망각의 상기想起다
성인聖人은 처妻를 적으로 삼았다
이 한국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여사는 처와 처들을 본다
오 결별의 신호여
이조시대의 장안에 깔린 개왓장 수만큼
나는 많은 것을 버렸다
그리고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흐린 날에는 연극은 없다
모든 게 쉰다
쉬지 않는 것은 처와 처들뿐이다
―― 김수영, 「적(2)」 부분
김수영은 눈앞의 ‘적’을 거듭 사유한 시를 쓰면서 ‘시’란 무엇인지 재사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후의 시에 등장하는 저 ‘사랑의 테마’를 발견한다(「사랑의 변주곡」). 곤경은 새로운 시를 여는, 창조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시의 창조적 진화 없이 시독자를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 시인의 강적, ‘작품의 새로운 경지’
‘일상성(생활)과 상투성’의 문제는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다. 시인들의 발언 중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시의 적은 그 몹쓸 불不자들이다. 공부가 모자라고〔不學〕 재주가 미치지 못하고〔不及〕 글이 되지 못하고〔不文〕…… 어디 이것뿐이랴, 不 不 不 不……, 시가 아닌 내 시가 (…) 나를 덮친다”(이근배). 겸손의 말이지만 시의 진경進境/眞境을 생각할 때 거듭 공감할 만한 대목이다. “나는 겁이 좀 많다. 줄광대가 줄을 탈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것처럼 나는 시라는 외줄 위에서 가장 자유롭고 편한 생명이다. 하지만 생이란 그 전부를 줄 위에서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창조력의 쇠퇴, 열정의 고갈 외에 본질적으로 시의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문정희). 뒤의 인용에서의 ‘창조력, 열정’이라는 단어는 주목할 만한 단어이다. 이 두 시인의 발언은 모두 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창조의 새 경지 열기―이 문제는 동서 고금의 모든 예술가들이 고투했던 오랜 화두이다. 시의 진짜 강적은 시인의 ‘작품 전체-상투성’의 동시적 극복 문제가 아닐까. 시인들을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진짜 강적이 있다면, 바로 창조적 도약의 문제―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문제는 문인 모두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김수영의 경우 그가 직면했던 ‘진짜 강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하이데거의 릴케론이었고, 시의 새로운 경지 개척의 문제였다(「반시론」, 1968 참조). 사랑의 테마는 이에 이르는 그 중간역이었다. 그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릴케의 시(「올페우스에게 바치는 송가」, 제3장)를 연구했다.
“노래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배워라/그대의 격한 노래를 잊어버리는 법을”,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가 정독한 릴케의 시구이다. 하이데거는 릴케를 ‘죽음’을 해결한 자유로운 시인, 가난한 시대의 무비호적無庇護的 모험자, 존재의 환한 개명〔開明,열림〕 속에서 자유롭게 노래하는 가장 참다운 시인의 하나로 보았다(하이데거, 「가난한 시대의 시인」 참조). 김수영의 마지막 작업은 모두 이 문제와 관련된 시인의 새로운 진짜 적(강적)과의 싸움이었다. 김수영의 마지막 싸움의 결과는 무엇인가? 시인들이 그의 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시인의 보이지 않는 진짜 강적은 시인(시) 자체의 진경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적을 말하는 시인보다도 그 적과 필사의 싸움을 벌이는 시인들을 많이 보고 싶다. 이것은 이 글의 주제를 넘어선, 독자의 주제넘은 생각일까?
3) ‘보이지 않는 적’, 시간
시인이 말하지 않은 세 번째 적은 바로 저 무심하고 순간적인 ‘현대적인 시간’이다. 이와 관련해 보들레르의 시 「적수」을 읽어 보자.
현대적인 시간은 순간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 시간은 시인이 기대한 창조적 결실을 풍성하게도 하지만 빈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게 시간의 힘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이 애써 가꾸어 온 ‘시의 정원에서 거둔, 몇 개의 열매’를 말하면서, 스스로 경험하는, 현대적 시간성의 아이러니를 통열하게 고백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예상(기대)과 다른 자신의 시간성을 ‘적’이라고 명명하면서 거기서 어떤 새 출발을 기약하고자 한다. 이 적은 김수영의 ‘적’과는 다른 차원의, 현대적 시간―그 아이러니와 관련되어 있다. 시간이 ‘적으로서의 시간’인 것은 특히 보들레르 자신의 격렬하고 다분히 퇴폐적이었던 일상 생활(‘폭풍우로서의 청춘’)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현대시인의 시간이 지닌 본질적인 아이러니에 더 역점을 두고 읽고자 한다(시인(시)의 모든 적들―생활의 힘듦, 상투성―도 모두 이 막강한 힘의 시간 속에서 제기된 것이다). 시적 결실이란 대체로 언제나 시인의 노력, 기대에 비해 부족한, 예상과 상반되는 어떤 것이다. 강력한 힘을 지닌 시간은 누군가의 노력, 기대에는 전혀 관심없이 그저 흘러갈 뿐이고, 그 속의 시인은 순식간에 늙어 간다. 보들레르는 이 막강한 적에 대해 이렇게 쓴다.
내 청춘은 오직 어두운 폭풍우
여기저기 밝은 햇살이 비치었었고
천둥과 비바람이 사정없이 휩쓸어
내 정원에 남은 저 빨간 열매 몇 개
이제 나 사상의 가을에 다가섰으니
삽과 쇠갈고리를 쥐어야겠다
무덤처럼 커다란 물구덩이
홍수난 대지를 새로 갈기 위하여
하지만 그 누가 알랴
내가 꿈꾸는 새 꽃들이
갯벌처럼 씻겨진 이 흙 속에서
생기줄 신비한 양식 찾아낼는지를?
――오, 이 고뇌여!
시간은 생명을 좀먹고
우리의 심장을 갉아먹는 이 엉큼한 적수는
인간이 잃어가는 피로써 자라며 살쪄 간다.
―― 보들레르, 「적수」(김인환 역)
시인을 둘러싼 현대의 시간은, 이처럼 아이러니의 시간이다. 그리고 현대성은 그 안에 늘 빛과 폭풍우, 기대와 배반, 가능성과 위기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보들레르가 적이라 명명한 이 ‘흘러가는 무심한 시간’이야말로 시인들이 말하지 않은 또 하나의 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시인을 위협하는 이 “엉큼한 적수는 인간의 잃어가는 피로써 자라며 살쪄 간다.”
보들레르는 모든 시인의 창조가 이 시간과의 유한한 치열한 싸움이란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고 있다. 그렇다, 시간은 보이지 않는 모두의 강력한 적이다. 시간이 친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너무 멀리 나온 것 같다. 주제로 돌아가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모든 시인(시)의 적들은 적인 동시에 시인의 친구이기도 하다. 이 점을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시인 자신이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리라.
이번 특집은, 오늘날의 시인의 적과 시의 적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현대시를 둘러싼 불확실성 문제, 창작의 새로운 경지, 현대적인 시간성 등의 몇 가지 문제를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인들이 본 현대시의 제문제를 다루는, 시인들이 직접 참여하는 생산적인 담론의 자리가 앞으로도 계속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서준섭
1982년 《심상》지에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장시의 문제」를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 시작.
평론집 『감각의 뒤편』 『문학 극장』 『생성과 차이』 등 다수가 있음.
현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출처 / 문화저널 21 - 계간 시인세계 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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