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한 편의 여러 생각 · 3
-즐거운 오독誤讀
진경환(한국전통문화학교 교양과정부 교수)
상황이 바뀌었지만 무언가 고착이 되어 풀릴 길 없는 사태를 은유적으로 드러낼 때 흔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한다. 봄은 왔건만 도대체가 봄 같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당 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가 지은 다음 시의 한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겠냐마는(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春來不似春)
허리띠가 느슨해진 건(自然衣帶緩)
날씬한 허리 만들고 싶어서는 아니지(非是爲腰身)
이 시는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명에 따라 흉노왕 호한야(胡韓邪)에게 시집을 가야만 했던 궁녀 왕소군(王昭君)의 원망을 노래한 것이다. 봄이 불가항력의 운명과 결부되면 햇볕조차 속절없이 눈물겨워지는 것은 고금이 따로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시의 첫 구절을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겠냐마는”이라고 옮겼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훗날 왕소군이 죽어 흉노 땅에 묻혔는데, 한겨울에도 푸른 풀이 무성했다 하여 그 무덤을 ‘푸른 무덤’, 곧 ‘청총(靑冢)’이라 했다는 고사에 비추어 보면, 이 해석이 좀더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으니”라고 한들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화초가 없다’는 말은, ‘북쪽 오랑캐의 땅은 날씨가 추워 아름다운 화초를 찾아 볼 수 없다’는 직접적인 언술일 수도 있지만, ‘그곳이 너무나 싫어서 눈에 화초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의미로도 변주될 수 있다. 요컨대 ‘없겠냐마는’과 ‘없으니’ 중 어느 것이 좀더 그럴듯한지가 문제될 뿐,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치 않은 것이다.
이렇듯 애매하고도 모호한 시 읽기가 가능한 것이 한시다. 한시에서 애매와 모호는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연전에 어느 학자가 ‘즐거운 오독’이라고 한, 이러한 사례 둘을 더 살펴보자.(정민, 『한시미학산책』, 솔, 1996, 110~113면.)
먼저 “늙은 몸 지친 말 방죽은 길어(老臣倦馬河提永) / 느릅나무 지나가자 회나무 그림자라(踏盡黃楡綠槐影)”는 소동파의 시다. 끝없이 이어지는 방죽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그네의 몸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광경이 그려진다. 그런데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것은 해인가, 달인가? 사실 무엔들 상관이 있겠는가. 해라면 이 생각, 달이라면 저 상념, 이리저리 운산(運算)을 해보면 그만인 것이다.
다음 “빗소리 들으며 밤새 추위에 떨었는데(聽雨寒更盡) / 문을 여니 수북한 낙엽(開門落葉深)”이라는 무상가인(無可上人)의 시다. 그런데 시인이 밤새 들었던 것은 빗소리였던가? ‘청우(聽雨)’라 했으니, 늦가을 밤새도록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그로 인해 나뭇잎이 하염없이 휘날려 떨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바람에 휘날려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떨어져 소리 내는 것이 어디 비뿐이겠는가.
자, 재능 있는 시인들이여,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참고로 어느 분은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 하나 /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왜 없겠는가 /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마는 /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는 게로군”이라고 옮긴 바 있다.(‘胡’는 ‘오랑캐’뿐 아니라 ‘어찌’라는 부사로도 쓰인다.) 괜찮은가?
▣ 진경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저서로는 『고전의 타작』등 다수.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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