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한 편의 여러 생각 · 2
- 김시습의 「고풍古風」
진경환(한국전통문화학교 교양과정부 교수)
중니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仲尼亦何人
재재거리며 동으로 북으로 유세하였나 喃喃說東北
그 누가 그대의 말 들어줄 텐가 阿誰聽爾言
죽은 뒤 한 구덩이 메웠을 뿐인 걸 空塡一丘壑
모니는 또 어찌된 사람이기에 牟尼亦何人
천만 마디 많은 말 떠들고 다녔나 吧吧千萬說
공연히 열두 불경 설법했지만 空演十二部
죽어서는 마른 재 되어 버렸지 死化爲枯灰
평생 부질없이 말 많기보다는 平生謾多事
차라리 일없이 사는 게 좋지 不如無事哉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고풍(古風)」중 한 수이다. 내가 보기에 이 시야말로 김시습의 내면과 실존을 적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중니’는 물론 공자의 이름이고, ‘모니’는 석가모니를 말한다. 유교와 불교의 창시자들이다. 공자를 ‘중니’라 하고 석가를 ‘모니’라 하여 짝을 맞춘 후, 각각 재잘거린다는 의미의 ‘남남’, ‘파파’를 나란히 쓴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김시습은 무엇을 노린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보자. 지배적인 혹은 중심적인 이념 · 가치체계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냉소를 보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냉소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주체의 지향성이 분명히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김시습이 보인 냉소의 지향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획일화에 저항하는 일종의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현실을 일종의 ‘중심 없는 심급들의 체계와 그것들 간의 갈등 관계’로 이해․파악하자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독단적이 되기를 거부하고 균형 잡힌 시야를 확보하여 인생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 이른바 최종심급으로서의 ‘단일한 중심’을 거부․비판하려는 의식 태도 혹은 지향을 취하겠다는 표명이다.
김시습은 지배적인 이념으로 행세해 온 유학과 불교 그리고 그것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하나의’ 중심을 세워 그것을 차지하려는 모든 사유가 실체적 본질을 지시하지 않는 사회적 구성물 혹은 권력 행사의 방편일 뿐임을 주장하면서, 중심을 해체하기 위한 ‘탈주’를 시도하였다. 일종의 천재적 광기로 볼 수 있는 그의 여러 파격적 언행과 기행들은 이러한 탈중심의 기획을 그 배면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에 유행하는 들뢰지안들의 용어를 사용해 보았지만, 김시습이 보인 불락양변의 태도는 문학적으로 보면 일종의 반어(反語, irony)이다. 반어야말로 현대문학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한다면, 김시습의 시는 이제 새롭게 읽혀져야 마땅할 것이다.
▣ 진경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저서로는 『고전의 타작』등 다수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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