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인의 詩창작교실·17】
당신도 좋은 詩를 쓸 수 있다
임 보 (시인·전 충북대 교수)
[제48신]
사무사思無邪
로메다 님,
오늘은 공자의 저 유명한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무사思無邪’는 시를 논하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는 너무
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논어』위정편爲政篇에 수록되어 있는 공자의 전후
말씀은 이러합니다.
‘시 삼백 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
(詩三百一言而蔽之曰思無邪)’
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시 삼백은 곧『시경詩經』을 이름이고,『 시경』속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정확히는 305편)은 다 ‘거짓됨이 없이 바르다’는 뜻으
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시경』은 공자에 의해 편
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은대殷代로부터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에 이르기까지 전해오는 3천여 수
의 민요들 가운데서 공자가 선별하여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라고 합니
다. 그러니까 대략 멀리는 BC 10세기로부터 가까이는 BC 5세기까지의 작
품들이 수록된 셈입니다. 수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수천 수의 민요들
을 놓고 도대체 공자는 어떤 기준으로 작품들을 선별했을까요?
‘思無邪’는 바로 그 선별의 기준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천 수의 노래들 가운데는 본능적인 욕정을 노래하는 수준미달의 음탕한
것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남을 미워하고 비방하는 투기 어린 노래도 없
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공자는 그러한 노래들은 다 제쳐놓고 건실하고
고상한 ‘思無邪’의 노래들만 골라잡았을 것입니다. 공리적인 세계관을 지
니고 있었던 공자로서는 그럴 만도 한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당시 세상
에 횡행하는 노래들이 너무 난잡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두다가는 백성
들의 정서가 크게 문란해질 것을 염려하여 공자는 이를 순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노래들만 선별하여
엮어낸 것이『시경』일 것입니다. 그렇다면『시경』의 편찬은 속된 노래들의
숙청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양의 플라톤과는 달리 공자는 시의 공리성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시의 효용에 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양화편陽貨篇>의 ‘흥관군원興觀群怨’의 설입니다.
小子何莫學夫詩詩可以興可以觀可以群可以怨邇之事父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그대들은 왜 시를 배우려하지 않는가. 시는 감흥을 자아내게 하고, 사물
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여럿이 함께 어울릴 수 있게도 하고, 또한 마
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게도 한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
을 섬기는 일이며 또한 금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도 한다.)
‘흥興’은 감성적感性的인 정서, ‘관觀’은 이지적理智的인 관찰력, ‘군群’은
사회성 곧 詩나 시회詩會를 통한 교유성交遊性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
怨’을 어떤 이들은 치자治者의 실정失政에 대한 원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
데, 그렇게 국한된 의미로 한정하기보다는 마음속에 맺힌 불만스러움을 시
로 푸는 비판 의식쯤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뒤에 덧붙인
말들은 충효의 도덕성과 사물에 대한 지식을 익힐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
됩니다.
말하자면 공자는 시를 인품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 같
습니다. 공자의 이러한 시관은 비록 수천 년 전의 생각이지만 오늘의 효용
론적 입장의 문학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매달 많은 문예지들과 동인지들을 통해 수천 편의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시단의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니 그들이 매월 한 편씩만
만들어 내도 그만한 작품이 생산되기에 충분합니다. 좋은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문
제의 심각성은 적지 않습니다. 오늘의 자유시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규제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비문非文도 시로 행세하는 곤란
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시의 무정부상태라고나 할까요. 시
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시라는 이름으로 쓴 글은 다 시라고 불러
줘야만 되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시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게 되었습니다.
가장 정련된 문학의 양식으로 신성시되던 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
시단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작품을 분별코자 하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가. 해마다 화사집들을 묶어 내는 풍조가 일고 있습니다. 문학단체들
이 그들의 구성원 중심으로 엮어 내기도 하고, 잡지사나 출판사가 ‘올해의
좋은 시’ 혹은 ‘몇 년도의 대표작’이라는 이름을 매달아 작품집을 편찬해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편집자들이 작품을 선정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별하
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작품을 보는 안목은 극히 주관적이어서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기준
이라 할지라도 공자의 ‘思無邪’처럼 설득력을 지닐 수만 있다면 세상의 호
응을 얻지 못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문학의 양식樣式을 소중히 여기는 입장에서는 고전주의자의 편에 섭
니다. 시는 절제의 문학입니다. 자유시는 양식의 방임이 아니라 매 작품마
다 그 작품의 내용에 가장 적합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규제의 문학으
로 보아야 합니다. 정형시보다 자유시가 더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 작품의 내용을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효용론자의 편에 섭니다. 작품
의 언술이 윤리적인 가치를 지니든, 미적인 가치를 지니든 간에 독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독자의 심성을 정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어지럽히는 작품이 있다면 이는 존재의의를 상실한 공해물이
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에 공자가 다시 있어 어지러운 이 시단을 한탄하면서 새로운 시경을
엮는다면 어떤 기준으로 작품들을 선별할지 궁금합니다. 역시 사무사思無
邪, 사무사事無私라고 호통을 칠 것만 같습니다.
로메다 님,
세상을 보다 밝고 맑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많이 쓰시기 바랍
니다.
[제49신]
시인의 세 시각
로메다 님,
시의 하류 장르를 어떻게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아직
진지하게 논의된 것 같지 않습니다. 문학개론서에서는 통상적으로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일찍이 아
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도되었던 것이기는 합니다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서사시는 소설, 극시는 희곡이라는 새로운 상위 장르로 발전 분화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시는 서정시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포괄된다고 주장하
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론이 아니더라도 서정시 서사시 극시의 구분은 그 구분의 기준
점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에서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서정시는 화자의
감정 곧 서정성이 기준이 된다면, 서사시는 소재의 특성이 관건이 되고, 극
시는 표현의 양식이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모든 분류나 구분은 동일한 기준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객관적
의미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작품의 배경을 기준으로 농촌시 어촌
시 도시시 등으로 구분한다든지, 다루어진 소재를 중심으로 인물시 동물시
식물시 무생물시 등으로 구분한다면 이는 일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한 설득
력 있는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인이 세계를 바라다보는 시각視角을 기준으로 하여 시를 몇 가
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는 얘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나는 삶 즉 생명 작용을 객체의 주체화 현상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곧 생명체는 생명체 밖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생명체 내부로 끌어들여
자아화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얼마나 열심히 그의 몸 밖에 존재하는 여
러 가지 요소들을 그의 체내로 끌어들이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뿌리
로는 땅속의 수분과 영양소를 잎으로는 대기 중의 공기와 태양의 빛을 끊
임없이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세계의 자아화를 실현하고 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세계의 자아화를 통해 그의 체내에 세계성의
축적을 꾀합니다. 생명체에 있어서 모든 사물은 정복의 대상입니다. 생명
체가 지닌 모든 감각기관들은 자아화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한 탐색용
레이더들입니다.
생명체의 본능적인 행위들은 주체화 즉 자아확대를 위한 욕망의 실현에
근거합니다.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도 이러한 자아확대의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정치 활동은 타자의 자아화, 경제 활동은 물질의 자아화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언술행위 역시 자아확대를 위한 욕망의 표
현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글입니다. 그 기술적인 표현
장치에 따라 시, 소설, 희곡 등의 장르가 구분됩니다. 나는 시가 될 수 있도
록 하는 기술적인 표현 곧 시적 장치를 은폐지향성, 과장지향성 그리고 심
미지향성 등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시적 장치에 관해
거론코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만 접어 두기로 하고 대상의 자아화에 대
한 문제로 다시 되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행위 역시 다른 생명 활동과 마찬가지로 대상 곧 객체의 주체화 작
용 -자아확대- 궁극적으로는 욕망의 성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사물들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다보듯 시인 역시 사물을 성취의
대상으로 바라다봅니다. 그런데 시인이 대상을 바라다보는 자세 곧 시각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의 시각은 시인이 대상을 현실적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다보는 경우이고
둘째는 절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다보는 경우이고
셋째는 초월적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다보는 경우입니다.
나는 이들을 지상적地上的시각, 수평적水平的시각, 그리고 천상적天上的
시각이라고 부릅니다.
로메다 님,
다음번에는 이 세 가지 시각에 의해 생산된 작품들을 놓고 얘기해 보도
록 하겠습니다.
[제50신]
지상적 시각의 시
로메다 님,
지상적 시각이란 시인이 현실적 가치관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다보는 시
각입니다. 시인이 대상과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설정하는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상이 시인의 현실적인 삶에 얼마만큼 유용한가 혹은 유해한가를
따지는 자세입니다. 그리하여 유용하다고 판단되면 대상을 우호적이고 긍
정적인 자세로 수용하고, 유해하다고 판단되면 대상을 적대적이고 부정적
인 자세로 거부하게 됩니다.
한편 이와는 달리 대상을 비판적인 자세로 수용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대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시를 보도록 하십시다.
가) 긍정적인 자세(=화해의 시)
대상 곧 객체가 주체의 욕망 성취에 기여한다고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이때 주체와 객체의 융화가 이루어지며 성취감과 함께 주체의 심리적인 만
족- 곧 화평에 이르게 됩니다. 대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화해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예시1]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정구軟式庭球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 김종길「춘니春泥」전문
[예시1]에 등장한 대상들은 다 시적 화자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고 있
는 정감어린 것들입니다. 크림 빛 대학 건물, 파릇한 보리밭, 연식정구의
경쾌한 공 소리, 여학생들의 즐거운 재잘거림-이 모든 것들이 화자와 화해
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숨이 찬 언덕길조차도 화자에게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의 대상으로 설정되고 있습니다. 아니, 신발에 자꾸 달라붙는
진흙조차도 여기서는 귀찮은 대상이 아닙니다. 시의 제목을 <춘니春泥>로
잡은 시인의 애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어떠한 불화나 알력도 없습니다. 대상과의 화평만이 있을 뿐
입니다.
나) 부정적인 자세(=갈등의 시)
‘갈등의 시’는 객체와 주체의 불화에서 빚어집니다. 객체[세계]가 주체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정복할 수 없는 막강한 대상이거나 주체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혐오의 대상일 경우에 갈등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객체가 주체
를 압도하거나 장애물로 인식될 경우 갈등이 형성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다시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객체에 눌려 자아가 위축되는 경우와
객체에 맞서 자아가 반발하는 경우입니다.
ㄱ) 위축의 시
객체와의 갈등 관계에서 자아성취가 실현되지 못한 경우 비관적 염세적
인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예시2]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天下에 많은 할 말이, 천상天上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 박재삼「밤바다에서」전문
[예시2] 속에 등장한 주 대상은 ‘누님’입니다. 누님은 시적 화자가 성취
하고자 하는 목적물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주체[화자 혹은 시인]가 접근
하기에는 너무 먼 슬픔 속에 잠겨 있습니다. 누님은 지금 내 존재 같은 것
엔 전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달빛[누님]이나 받아 반짝이
는 밤물결[나]처럼 수동적이고 비극적인 자세로 위축되어 울고 있는 것입
니다. 난관을 극복하여 소망을 실현시켜 보겠다는 의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화자가 체념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기원祈願을 통해 객체의 위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ㄴ) 반발의 시
적극적인 성격의 주체인 경우는 객체와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적
인 혹은 선동적인 자세로 반발합니다.
[예시3]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美國人과 蘇聯人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寂寞이 오듯이
革命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革命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夕陽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같기도 한 것이니
- 김수영「가다오 나가다오」부분
[예시4]
내 사랑하는 아우들아 이 나라의 호국의 함성들아
우리는 이긴다.
일찍이 불의와 사악이 망하지 않은 역사를
본 적이 있느냐
늬들 뒤에는 혈육을 같이 나눈 우리들이 있고
이상을 함께하는 만방의 깃발이 뭉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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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고 돌아오라 이기고 돌아오라
우리들 가슴을 벌리고 기다린다.
하늘이 보내시는 너, 구국의 천사들.
- 조지훈「이기고 돌아오라」부분
[예시3]에서의 갈등의 대상은 미국인과 소련인 곧 막강한 국력을 지닌 강
대국들입니다. 화자는 이들로 말미암아 국토가 침탈을 당했다는 피해의식
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축출하고자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
다. ‘이유는 없다’고 말하지만 이유 같은 것은 새삼스럽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역설적인 표현일 수 있습니다. 서릿발 돋은 저항적인 절규인 것입
니다.
[예시4]는 갈등의 대상이 전쟁[敵]입니다. 주체는 그의 공조자인 병사들
을 일선으로 출정시키며 선동적으로 사기를 고무시키고 있습니다.
앞에 제시한 저항과 선동 이외에도 결의決意, 고발告發, 격려激勵등의 성
향을 지닌 작품들도 반발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 비판적인 자세(=풍자의 시)
‘갈등의 시’는 객체가 주체를 제압하는 경우에 생산된 것이라고 한다면
‘풍자의 시’는 주체가 객체를 제압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가 대상 위에 군림하여 이를 비판하거나 꼬집습니다.
[예시5]
카드 섹션을 벌이는 스탠드의 군중처럼
스크럼을 짜고
어깨에 어깨를 메고
등으로 온 힘을 받는 축대의
돌들은
자신이 받드는 전각을
한 개의 우주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모른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덧없이
허물어지는가를,
얼마나 덧없이
그 화려한 카드 섹션이 사라지는가는
축제 뒤에 흩어지는 군중을
쓸쓸히 지켜보는 자만이 안다.
한 발 재겨디딜 틈도 없는 벼랑에서
온몸으로 받치고 선 축대의 돌들이여,
계곡물에 뒹구는 바위들을 보아라.
돌은 홀로 있음으로
돌인 것이다.
- 오세영「홀로 견디는 돌」전문
사물의 존재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체가 지닌 특성 곧 개성을 통
해 다른 사물과의 변별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
늘의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개성의 존중이 아닙니다. 개체는 어떤 제
도나 목적을 위해 획일화, 조직화 혹은 규범화되고 말았습니다. [예시5]에
서 시적 화자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개성을 말살하고
있는 제반 문화 양상입니다. 시인[주체]은 이처럼 부조리한 문화 구조[객체]
를 초연한 자세로 바라다보면서 비평을 가하고 있습니다. 주체가 객체를
제압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작품이 풍자적이거나
교훈적인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로메다 님,
다음번에는 수평적 시각의 작품에 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 《우리詩》7월호에서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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