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보의 알기 쉬운 詩창작교실·연재 14회 ■
당신도 좋은 詩를 쓸 수 있다
임 보 (시인·전 충북대 교수)
[제39신] ‘배제의 시’와‘포괄의 시’ 로메다 님, 우리가 무엇을 만들 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재료를 놓고 그것을 깎아내며 만드는 방법과 이와는 달리 여러 재 료들을 붙여가며 만드는 방법입니다. 앞의 것을 ‘배제’의 방식, 뒤의 것을 ‘포괄’의 방식이라고 부릅시다. 큰 얼음덩이를 쪼아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얼음 조각彫刻은 배제의 방식이고, 눈덩이들을 모아 붙여가며 눈사람을 만드는 것은 포괄의 방식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시를 만드는 행위도 앞의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다 제거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겨두 는 배제의 방법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끌어 모아 종합하는 포괄의 방법입니다. 다음의 글을 읽으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리차즈(I.A.Richards)는 시의 구조적 특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곧 배제의 시(exclusive poetry)와 포괄의 시(inclusive poetry)의 이론이다. 전자는 시를 만들고 있는 이미지[체험 내용]들이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구조다. 따라서 조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없는 이미지들은 제외된다. 이지 적인 고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후자는 모순 충돌을 일으키는 복잡다단한 체험들을 포괄 수 용하는 구조다. 용광로에 잡다한 광석들을 넣고 쇠붙이를 녹이는 행위와 유 사하다. 논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낭만주의적 성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삭제의 원리가 지배하는 조각彫刻에 비유된다면 후자는 종합의 원 리가 지배하는 소조塑造에 비유될 수 있다. 전자는 구심적求心的인 폐쇄성을 지닌 데 반하여 후자는 원심적遠心的인 개방성에 기운다. 리차즈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바 람직한 시의 구조로 생각했다. 현대인의 잡다한 체험을 수용하기에 보다 적 절한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때문이리라. 실제의 작품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仙桃山(선도산) 水晶(수정)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 박목월「牡丹餘情(모란여정)」
4연 6행으로 되어 있지만 전체가 16음보에 지나지 않는 네 마디의 짧은 시다. 이 작품의 의미 구조는 간결하다. 늦은 봄 어느 석양, 강을 건너 선도산 그늘 밑으로 사라져 가는 한 나그 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선택된 이미지[대상]들이 단순 간결하다. 만일 실 제의 정경을 영상에 담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물들이 화면에 담길 것인가. 강과 산 주변에 있는 논밭이며 나무며 물새며 바위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물들이 화면을 메울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이런 잡다한 것들이 다 지워지고 없다. 하나의 인 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단순한 환유로 대신한다. 성별, 신장, 연령, 얼굴 생김새 등 그 인물의 특징에 관한 기술이 다 생략되 고 없다. 계절적인 배경을 제시하면서도 봄의 많은 속성 가운데서 ‘모란꽃 이우는’하나만으로 암시하고 만다. 이 작품을 엮고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는 모란꽃, 해으름, 선도산, 청모시 이 네 가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요체가 되는 것은 ‘청모시’다.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나그네(청모시)는 고결한 선비다. 그 고결함을 시 인은 무명이나 명주가 아닌 모시에 담았다. 특히 모시에 ‘청’의 색채를 가 함으로써 그 순결도를 높이고 있다. 그 모시옷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부 분인 옷고름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다 지웠다. 그러나 그 옷고름 속에 나 그네의 품위와 유연한 동작까지를 담고 있지 않은가. 도포자락을 바람에 날 리면서 유유히 걷고 있는 한 선비의 고고한 자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선비를 상실감에 젖은 비극적인 존재로 그리고자 한 다. 그래서 낙화落花와 낙조落照라는 소멸의 시간을 배경으로 설정한 것이다. 석양을 등지고 떠나가는 나그네-그는 어쩌면 시대가 거부하는 에트랑제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를 불행한 방랑자로 방치하지 않고 시련을 거쳐서 이상향에 이르도록 한다. 강[시련]을 건너 仙桃山[이상향]에 접하는 구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시인은 주인공[청모시]이 자연[수 정그늘]과의 합일 속에서 화평[보라빛]에 이르는 정황을 색채로 암시해 보 이고 있다. 몇 개의 단순한 이미지들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구조지만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른다. 또 다음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발톱의 상채기와 퉁숫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 - 서정주「西風賦(서풍부)」 서풍 속에 들어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식물[오갈피, 향나무]과
북[방구]과 춤[상모] 그리고 동물[화냥 노루]과 통소, 맹인과 관음, 정신병과 징역 시간 등 서로 모순 충돌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선과 악, 본능과 억제…. 이러한 다양하고 잡다한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여 많은 의미망들을 형성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망들은 어떤 조화나 통일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의도하고 있는 구조는 단순이 아니라 혼잡이며, 균제均齊가 아니 라 무질서다. ‘서풍’은 외적인 어떤 정황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내면에서 회오리치는 ‘바람’인 것처럼 보인다. 본능적인 욕망(id)과 의지(ego)의 갈등 속에 사로 잡혀 있는 심리적 혼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작품이 율격적인 가락에 실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난삽했겠는가. 포괄의 시는 복잡다단한 체험 내용을 보다 리얼하게 나타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의 기능은 결코 세계의 반영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반영의 기능만을 문제 삼는다면 시는 언제나 영상예술이나 산문문학의 아 류에 머물고 말 것이 아닌가. 시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보고문이 아니다. 꿈 곧 소망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시인의 이상향이 아닌 한 시는 늘 현실과는 다르게 마련이다. 나는 내 꿈의 집을 짓는 데 ‘삭제削除의 보도寶刀’를 즐겨 사용한다. 세상 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생리적으로도 나는 불리는 것보다는 줄이는 쪽이 편하다. 그 래서 나는 내 시의 본적을 배제의 편에 둔다. - 「배제排除의 시와 포괄包括의 시」『엄살의 시학』pp.121~124 로메다 님, 나는 앞의 글에서 포괄의 시를 지향하는 리차즈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고 배제의 시를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체질과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삶도 그렇지 않던가요? 어떤 승려는 소유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족도 가구도 다 버리고 한 벌의 승복과 바리만으로도 평온하게 살아가는 가 하면, 어떤 수집가는 수만 가지를 모아놓고도 만족치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그 성취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 개성에 따라 한 시인의 시작詩作태도가 ‘배제’와 ‘포괄’ 중, 어느 한 편 에 기울어질 수는 있겠지만 어느 하나에 고정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루고 자 하는 소재의 성격에 따라, 또한 쓰고자 하는 시의 성향에 따라 효율적인 방법이 한결같을 수 없을 테니까요. 로메다 님, 두 가지 방법을 익히면서 어느 쪽이 체질에 더 맞는가 판단해 보십시오. 또한 특정한 소재를 놓고 두 방법을 함께 시험해 보면서 어느 쪽이 더 효율 적인가도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건필을 빕니다. [제40신] 안드로메다 로메다 님, 대학의 문에 들어서게 된 것을 축하해 마지않습니다. 별로 유명한 대학이 아니어서 크게 자랑할 것 없다고 겸손해 합니다만 원하는 학과에 지원해서 합격의 판정을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문과 대신 천문학과를 선택했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학문의 우열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인문학 가운데서 가장 심오한 것은 철학이고, 자연과학 가운데서 가장 원대한 것은 천문학이지 않습니까? 나는 문과에 다녔습니다만 대학 시절 천문학 강의를 자주 들었습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자리한 인근에 당시 천체우주관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자주 찾아가 별자리들을 바라보며 광활한 우주 속에 묻히곤 했습니 다. 만일 내게 새로운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로메 다 님처럼 천문학을 택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몇 억 광년으로도 잴 수 없 는 광막한 우주 공간에 눈길을 돌리면 이 작은 지상에서 앞을 다투며 살아 가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깨닫게 되지요. 로메다 님, 안드로메다 성좌를 좋아한다고요? 그래서 닉네임을 로메다라고 했군요. 일찌감치 별을 좋아했으니 천문학과를 선택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로 보입니다. 안드로메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아닙니까? 이디오피아 왕 세페우스와 카시오페이아 사이에 태어난 미녀 공주지요. 해신海神에게 바치기 위해 바위에 결박되어 있는 그녀를 영웅 페르세우스가 구해내서 그의 아내로 삼는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재 미있는 것은 이 신화 속에 등장한 인물들이 죽은 뒤에 별들이 된다는 거지 요. 그러니 안드로메다 성좌는 공주님 별이군요. 백과사전을 살펴보았더니 안드로메다 성좌 부근에 안드로메다 은하도 있더군요. 타원형의 안드로메다 은하는 약 20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데, 지름은 약 10만 광년, 밝기는 태양의 약 100억 배라고 기록되어 있군요. 초속 30만 ㎞의 빛이 1년 동안 달리는 거리가 1광년인데, 200만 광년이 면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인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안드로메 다 은하가 우리가 속해 있는 ‘우리 은하계’ 에 그래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은하라고 하는군요. 그런 은하들이 수십 개 모여 은하군銀河群을 이루기도 하고 또한 수백 수 천 개의 은하들이 모여 은하단銀河團을 이루기도 한다고 하니, 이 우주가 얼 마나 광막한 것인지 참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런가 하면 로메다 님,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세한 세계도 신비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몇 십만 배로 확대된 전자현미경의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눈썹털 하나가 광막한 대륙처럼 보였습니다. 그 런데 놀랍게도 그 작은 눈썹털에 수많은 생명체들이 꿈틀거리며 살고 있었 습니다. 딱정벌레처럼 머리와 발과 더듬이를 정교히 달고 있었습니다. 해 설자의 얘기론, 우리가 샤워를 한번 할 때마다 우리 몸에 기생하고 있는 수 억만 마리의 미생물들이 씻겨 내려간다고 합니다. 우리의 샤워는 그들에게 노아의 홍수보다 무서운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녀석들을 보면서, 우 리도 어쩌면 어떤 큰 분의 눈썹 끝에 매달려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쓴 것이「무진사설조無盡辭說調」라는 산문시인데, 졸시집『산방동 동山房動動』(한국문학사, 1984)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어제는
내 친구인 미생물학 교수가 전자현미경 얘기를 했는데, 몇 십만 배로 늘릴 수 있다는 그 전자현미경을 통해 인체人體를 관찰하면, 우리의 눈 주위에 박힌 눈썹털 하나에도 수십만 개의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는데,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딱정벌레들처럼 발과 머리와 몸통의 형체를 제대로 갖춘 의젓한 생명체로 살아가고 있다는데, 오늘은 내 친구인 천문학 교수가 망원경 얘기를 하는데, 은하계 속에는 수많은 태양계들이 널려 있다는데, 별과 별 사이는 몇 십만 광년光年이나 되는 것도 있고, 아니 어떤 항성恒星에서 출발한 빛은 아직도 이 지상에 도달되지 않은 것도 있는데, 이 우주의 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어느 분의 눈썹털 속에 들어앉아 보채는 것인지, 인간들이 그 가녀린 지혜를 얽어 로케트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도 하여 달도 화성도 휘어잡아 보는 것은, 어느 한 눈썹 속의 딱정벌레가 옆 눈썹으로 건너뛰는 일처럼 우습고 우스운 일이 어서 철학을 하는 내 친구 하나는 그저 술잔 속이나 들여다보면서 그 시리고 시린 마음을 달래기도 하는데, 일전日前에는 영혼을 볼 수 있다는 어느 심령학자가 사후死後의 얘기를 하는데, 장차 우리가 돌아갈 곳은 시간도 공간도 아닌, 밝은 자는 밝음 속에서, 어두운 자는 어두움 속에서 영원히 스며 흐르는-, 영혼 본연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조금은 덜 허허로운 얘기를 하기는 하는데, 허나 내 육안肉眼으로 보면 알맞게 부푼 저 산과 들판, 곱게 자란 초목, 훈훈한 바람, 저 빛깔 고운 과일, 내 가족들의 따스한 체온…… 어떤 분이 이 지상에 내 마음 오래 매어 두려 베푸신 풍성한 환영幻影임을 내 모르는 바 아니로되, 이 한 꿈 더디 깨기를 바라는 것은, 이 한 꿈 더디 깨기를 바라는 것은……. - 졸시「무진사설조無盡辭說調」전문 로메다 님, 시가 너무 길어 읽기에 지루했을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제목에‘사설’이 라는 말을 썼던 것 같습니다. 별로 대단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배경이 자못 허허롭지요? 이 광막하기 그지없는 세계에 대한 ‘허허로움’을 노래한 것입 니다. 어쩌면 그런 허정虛情(속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심경)에서 시는 싹이 트는 것도 같습니다. 마음속에 맑은 허정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가능한 한 그 허정을 키우십 시오.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야의 폭을 보다 넓고 깊게 가질수록 허정은 점 점 자랄 것입니다. 작은 웅덩이에서는 큰 고기가 자랄 수 없습니다. 고래를 기르는 것은 좁 고 얕은 민물이 아니라 넓고 깊은 대양입니다. 큰 시를 낳기 위해서는 원대 한 세계를 품고 있어야 합니다. 로메다 님, 아니, 안드로메다 님, 빛나는 별로 광활한 우주를 유영遊泳하면서 마음을 크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광활한 마음의 바다에 거대한 시의 물고 기가 자라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천문학도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제41신] 시는 詩가 아니다 로메다 님, 오늘은 ‘시’라는 글에 관해서 잠시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시’라는 글은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시(poetry)’라는 글과 같지 않고, 또한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詩 (시)’라는 글하고도 다릅니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민족마다 다른 언어와 다른 관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생산된 문화들은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주식主食은 밥이지만 서양인의 주식은 빵이지 않습니까? 우 리 민족의 의상인 한복과 서양인의 양복이 다르지 않습니까? 술도 서양의 위스키와 중국의 백주 그리고 우리의 소주가 얼마나 다릅니까? 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는 중국의 ‘詩’나 서양의 ‘poetry’와는 같 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같은 글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 는데 이는 착각입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면서 기존의 우리 생각을 반성해 보도록 하십시다 신체시를 한국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잡는다면 한국 현대시의 역사도 어
느덧 한 세기를 기록하게 된다. 특히 1920년대 이후부터는 수많은 시인들의 등장과 함께 많은 작품들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1930년대부터서는 질적으 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 적지 않게 창작되었다. 그리하여 21세기 초 오늘의 한국시단은 거의 세계적 수준에 육박하는 성장을 했다고 자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시를 들여다보면 마치 남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은 개운치 않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회의 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현대시가 외래시 특히 서구시의 영향 아래서 출발 성장해 온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기는 하나 오늘의 우리 시가 곧 서구시와 같다는 생 각을 가진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어느 민족의 문화이건 그 문화는 여러 주변 이문화異文化와의 융화의 소산이다. 그러나 A라는 어느 한 문화가 B라는 다른 한 문화에 종속적으로 예속된다고 할지라도 A+B와 B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두 문화의 개성은 계속 살아남기 마련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시는 고대로부터 중국 한시漢詩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 왔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는 향가鄕歌도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 것은 문자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우리의 전통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민요나 가사의 가락에 실려서 구전되는 것으로 빈약하게 그 명맥을 이어 왔고 본격적인 시문학은 한시의 형태로 발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한글이 창제되 면서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가 자리를 잡게 되고 가사문학의 발흥을 맞기는 했지만 그동안 길들었던 한문문학의 영향권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 았다. 그리하여 19세기말까지 우리 시를 주도해 온 것은 한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한시는 중국의 한시와는 다른 우리의 한시문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아무튼 시란 무엇인가 하는 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큰 줄기만 따져보 더라도 다음과 같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유의 시 -------┐ │-------- 시(1)---┐ 한시(詩) -------┘ │----시(2) 서구시(POETRY) -------------------┘ 그런데 시(1)에서는 한시가 주도를 하게 되고, 다시 시(2)에서는 서구시가 주도를 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날 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서구시 내지는 한시에 기울어 있는 셈이다. 우리 고유의 것보다는 외래의 것들에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썩 마음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남의 좋은 것들을 그 만큼 많이 우리 것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면 굳이 나빠할 것도 없다. 아니 어 쩌면 우리는 한시가 지니고 있는 깊이 있는 동양 정신과 서구시가 지니고 있는 감각적인 표현 기법을 아우르고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통합을 우리의 현대시 속에서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시는 한시나 서구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를 논하면서 한시나 서구시의 이론을 절대적인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온당치가 못하다. 우리 시에서의 한시성이나 서구성은 이미 그들의 것이 아 니다.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는 격으로 우리가 받아들인 외래적인 것들은 이미 우리 체질화되어 있다. 중국의 면 음식이 이 땅에 들어와서 짜 장면이라는 우리 특유의 음식이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 현대시는 한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러한 특성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가야 하리라. 우리 시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 곧 우리 시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시에 대한 이론 정립이 필요한 시기에 와 있다. 그리하여 나아가서는 우리 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이 실현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현대시는 극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나 드러내고자 하는 생각이나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그러니 시인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제 멋대로 드러내 놓아도 시라고 불러주어야만 되는 시인 천국(?)이 된 셈이다. 세상에 시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는 것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너도나도 시인이 되겠 다는 사람들로 거리는 넘치고 시인을 팔아 수지를 맞추는 장사치들이 북적 대고 있는 실정이다. 시를 자유방임의 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시는 어떠한 글보다도 가장 절제를 필요로 하는 글이다. 아무런 생각이나 시로 쓴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좋은 시는 격이 높은 생각을 담고 있다. 나는 그것을 시 정신이라 부른다. 아무렇게나 표현해도 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보통의 글에서와는 달리 시답게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나는 이를 시적 장치라고 부른다. 시는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의 격 과 멋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곧 산문과는 달리 시가 시로 불리어질 수 있는 소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시정신과 시적 장치란 어떤 것인가? 그것을 따지고 찾는 일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곧 우리 시 이론을 세우는 일이며 우리 시의 정체성을 설정하는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 詩≠시≠poetry」『엄살의시학』pp.13~16 로메다 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시’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풍토, 우리의 체질, 우리의 정서에 잘 어울리는 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 리 조상들이 이 땅의 흙과 물과 영혼을 잘 빚어 자랑스런 고려청자를 구워 냈듯이 우리는 세상의 어떤 시들과도 다른 우리만의 아름다운 ‘한국시’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맹목적인 모방이나 추종처럼 어리석은 행위는 없습니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풍조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미국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한다고 해서 우리가 추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 육류를 많이 섭취해서 비만해진 서 구인들에게 맞는 이상적인 식단食單이 평소 채소를 즐겨 먹는 우리에게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체질에 맞는 우리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 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입니다. 로메다 님,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젊은이들이 깨닫고 실천에 옮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일의 우리 시, 더 나아가서 우리 문화는 바로 그런 의지를 가진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건투를 바랍니다. ─월간 《우리詩》5월호에서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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