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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12회] '무의미 시'란 무엇인가 外

by 丹野 2011. 1. 1.

 

임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12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제33신]

‘무의미 시’란 무엇인가

 

  로메다 님,

  오늘은 김춘수 시인의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작업했던 소위‘무의미 시’

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무의미 시라고 하면 마치 의미가 없는 시인 것처럼 이해되기 쉬운데 그

렇진 않습니다. 그림과 비교하면서 시를 설명하는 다음의 내 글을 우선 읽

고 이해해 보도록 하십시다.

 

  세상 만물이 다 그렇지만 시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간

다. 신라의 향가와 오늘의 현대시는 그야말로 천양의 차이가 있다. 아니

1920년대의 시와 1930년대의 시가 같지 않다. 동일한 시대에서도 또한 지

역에 따라 한결 같지 않다. 동양의 시와 서양의 시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같은 서구라도 영국의 시와 독일의 시가 또한 다르다.

  같은 종의 생명체도 풍토에 따라서 그 생김새와 성질이 서로 다르듯 시

도 그것이 뿌리박고 자라난 역사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며 또한 끊임없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미술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애초 그림은 사물의 모방에서 출발

한 것이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실물처럼 그럴 듯하게 그린 그림이 훌륭

한 그림으로 평가받았다. 솔거率居의「노송도老松圖」가 그렇고, 미켈란젤로

나 L.다빈치의 그림들이 또한 그렇다. 그런데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예술성을 화가의 사생력寫生力에서가 아니

라 작가의 감성과 개성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인상파가 등장하고

세잔, 고흐, 고갱 등의 거장들을 낳게 된다. 그 뒤 미술은 대상을 극도로 단

순화하려는 추상화, 평면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입체화, 지상적地上的

질서와 일상적日常的논리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 그림 등을 거쳐 드디어

는 대상 자체를 거부하는 비구상화非具象畵에 이르게 된다. 비구상화는 대상

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그리고 싶은 선을 그리고,

칠하고 싶은 색을 칠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무엇을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그렸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비구상화가

들은 자기들의 작업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창조라고 말한다.

 

  우리의 시문학도 미술과 비슷한 경로를 밟으면서 발전해 왔다. 이성理性

이 주도한 고전주의로부터 감성感性과 개성個性을 존중한 낭만주의,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던 상징주의 등을 거쳐 초현실주의에 이른다. 한 마

디로 초현실주의란 심층심리를 대상으로 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

실주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이 뒤엉켜 있는 심층심리

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

똥(A. Breton)은 시 쓰는 방법으로 ‘자동기술법’을 제시했다. 아무런 구상

構想과 퇴고推敲도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언어로 옮겨 놓

는 기법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지상적 논리도 일상적 질서도, 어법도 무시

된다. 

 

  현대시에서도 미술의 비구상화와 같은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 시도 비

구상화처럼 대상을 떠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언어 구조를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에서의 선이나 색채와는 달리 시의 매체인 언어

는 원초적으로 의미를 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의미를 벗어난 언

어 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독일의 구체시(具體詩,

konkrete poesie)가 시도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얀

들(E. Jandle)은 언어로부터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서 알파벳을 무의미하게

흩어놓는다든지, 하나의 동일한 단어만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든지, 의미

가 없는 전치사들만을 이어놓는다든지 등등의 실험을 한 바 있다. 1930년

대 이상李箱의 작품에서도 문자를 뒤집어 놓는 등 이와 유사한 시도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의 이러한 시도들은 비구상화와 같은 순수한 무의미 세계

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낼 수는 없었다. 여기에 언어 예술의 한계가 있다.

 

  시가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대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대상 깨뜨리기’를 시도한다. 그렇

게 해서 시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이것이 곧 ‘무의미의 시’라는

것이다.

 

  무의미 시의 대부代父인 김춘수金春洙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연상의 기

법을 원용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늘어놓는데 그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여 일상적 의미를 형성하려고 하면 의도적으로 그

것들을 처단한다.

  다음「처용단장處容斷章」의 한 부분을 보도록 하자.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軍艦(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죽은 다음에도 물새는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

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이 시에 나타난 시간적인 배경은 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 속의 겨울은 눈이 내리는 일상적 겨울이 아니라 비가

오는 겨울로 설정되어 있다. 즉 ‘겨울+눈’이라는 일상성을 ‘겨울+비’라는

낯선 정황으로 바꾸어 놓는다. 바다 역시 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

물인데 여기서의 바다는 물이 없는 바다다. 즉 일상적 바다에서 물을 제거

한 낯선 공간이다. 거기 물 없는 바다에 주저앉은 군함과 죽은 물새를 등장

시킨다. 그리고 죽은 물새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다시 살리고 있다. 죽음과

삶의 간격을 뭉개버린 즉 생사生死가 공존하는 곳이다. 더더욱 기상천외의

구조는 죽은 바다가 한 사나이의 한쪽 손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대상의 파괴와 대상들의 낯선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 이 작품 속에서만

존재한다. 순수한 창조적인 세계다. 그러니까 무의미의 시는 아무런 의미

가 없는 시가 아니라 일상적인 논리와 의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다. 시를 무의미한 말놀이로 생각한다.

 

 

  시는 계속 변모해 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의 틀을 거부하는 해체시 혹은

포스트모던의 시들이 여러 가지 실험들을 계속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기존

의 것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도는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건실하고 긍정적인 것일 때 그것은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는 요소로 기여하

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폐습을 조장하는 공해물(公害物)로 남게 되고

만다.

                      -「 무의미(無意味)의시」『엄살의시학』pp.105~108

 

 

  로메다 님,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의미의 시란 ‘자유를 추구한 시’라고도 할 수 있

습니다. 대상으로부터의 자유, 이념으로부터의 자유, 세계로부터의 자유….

  내 개인적으로는 ‘무의미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지나쳐서 ‘방종’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사물과 세

계를 만신창이로 파괴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낯선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 ‘자유’는 세계에 대한 부정- 곧

허무정신에 닿아 있습니다.

 

  내 개인적인 기호와는 상관없이 김춘수 시인이 시도했던 무의미 시의 작

업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시사詩

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무의미 시를 마치 시의 전범典範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일입니다. 무의미

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김춘수 시인만을 맹종한 나머지 그의

시풍을 잘못 모방하는 아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시는 비논리

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써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가 우리 시단

에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해체시의 시도는 이상李箱한 사람으로 충분하듯이, 무의미 시 역시 김춘

수 한 사람만으로 족합니다. 그를 흉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로메다 님,

  누구의 모방이 아닌 자신만의 시풍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운을

빕니다.

 

 

 

 

[제34신]

시의 행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로메다 님,

  오늘은 시의 행에 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원래 운문에서 행을 나

눈 것은 운율 때문이었습니다. 시행은 율동적으로 읽히게 하기 위한 소리

의 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정형시는 행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

틀에 맞추어 행을 배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형시의 형태가 무너지고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작품마다 시행을 자의적으로 배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배열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배열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행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누어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발표된 어떤 시들은 시행의 분할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것도 같습니다. 말하자면 질서를 잃은 자유방임의 상태라고나 할

까요?

  시의 분행分行이 정말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시행에 관한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지요.

 

  산문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단위는 문장(sentence)이다. 곧 문장들

이 하나 둘 쌓이고 쌓여 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들이 발전하여 한 편의 글

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시詩인 경우는 산문과는 달리 그 기본이 되는 단위가 시행詩行이

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행이 모여 연聯을 이루고 연이 발전하여 한 편

의 시를 만들게 된다.

  정형시인 경우는 그 정형적인 틀에 좇아 규칙적으로 행이 설정된다. 한

시漢詩의 절구絶句나 율시律詩경우는 한 행이 5자와 7자로 고정된 틀을 지니

고 있고 평시조平時調인 경우는 한 행[章]이 4음보의 율격律格에 담기도록 되

어 있다. 그래서 정형시의 시행은 정해진 틀에 맞추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정형시에서 행을 결정하는 틀(형식)은 무엇이 주도를 하고 있는가? 그것

은 압운押韻과 율격律格곧 운율韻律이다. 이 근저에는 언어에 가락을 실어

흥겹고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심미지향적인 인간의 욕망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형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시

행의 설정에 큰 혼란이 야기되기 시작한다. 극단적인 형식의 자유를 추구

한 나머지 자유시는 운율의 간섭으로부터도 해방되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서 시행은 어떠한 규제도 받지 않는 자유방임의 말토막처럼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현대 자유시에서의 시행은 어떤 개연성에 의해 분할되는 것이 아

니라, 시인이 제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끊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

는 그런 난삽한 상황에 접어들고 만 것도 같다.

 

  정말 시행은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일반적인 산문도 분행하여 배열하면 시적 효과가 발생한다. 다음 산문을

분행하여 보기로 한다.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가)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나)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다)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라)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마)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가)의 경우는 각 행이 3음보의 대등한 운율을 갖게 되며, ‘산사’와‘석

탑’이라는 행중심의 의미 단위로 분할된다.

  (나)에서는 각 행이 1, 2, 3음보의 점층적 구조가 형성되고, ‘그’ ‘산사’

‘석탑’으로 의미의 3등 분할이 이루어진다.

  (다)는 1음보와 2음보가 교체 반복되는 대조적 운율구조이다. 특히 1, 3

행의 말음末音이 ㄴ이고 2, 4행의 두음頭音이 ㅅ이어서 압운적押韻的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라)는 2음보와 1음보의 교체 반복이면서, 의미로 따져본다면 대상과 동

작을 중심으로 각각 대등하게 분할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의 경우는 2행과 3행의 경계가 문제인데 수식어 ‘낡은’과 피수식어

‘석탑’을 분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운율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라

든지 아니면 다른 심리적인 어떤 갈등을 나타내는 경우에 이러한 분할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적절한 이유가 없다면 유기적 관계에 놓

인 수식어과 피수식어 사이를 행의 경계로 설정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다. (요사이 항간의 시들 가운데 이러한 경향이 유행처럼 떠돌고 있다)

 

  위의 예를 통해 우리는 행의 배치에 따라 운율의 형태가 부여되고 의미

의 분할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앞에서 자유시는

운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운율은 정

형시가 지니고 있는 틀에 박힌 정형률을 의미한다. 잘못 이해해서 자유시

가 모든 운율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분행分行배열을 한 이상 시는 운율에 실리게 된다.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운율은 떨쳐 버릴 수 없는 그림자처럼 시행에 따라 붙는다. 그러니 시

인이 행을 설정하는 일은 행마다에 개성적인 운율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시는 형식으로부터는 자유스러워졌지만 정형시를 만

들 때보다도 오히려 더 무겁고 어려운 창조정신과 성실성을 필요로 한다.

 

  시행을 아무렇게나 나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그런 시가 있다면

그것은 누더기 같은 운율을 달고 있는 괴담怪談에 불과할 것이다. 성실한 시

인이라면 하나 하나의 시행 속에 최선의 운율과 최선의 의미를 어떻게 효

과적으로 담아내느냐 하는 끝없는 고뇌로 시를 낳을 수밖에 없다.

                                       -「 시행(詩行)」『엄살의시학』pp.49~52

 

 

  로메다 님,

  아무리 자유시라 하더라도 시행을 아무렇게나 나눌 수 없습니다. 행을

나누어 배열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첫째, 운율의 형성----행 중심으로 운율이 형성됨

  둘째, 의미의 분할----행 중심으로 의미가 나누어짐

  셋째, 이미지의 분리----행 중심으로 이미지가 나누어짐

  넷째, 활자의 시각적 분할----행 중심으로 활자들이 인식됨

 

  그렇다면 행과 행의 분할, 곧 행의 경계를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앞

의 네 가지 중 가급적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이상적입니

다. 적어도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렇게 행을 나눔으로 해서 효율적인 운율이 형성된다든지, 그 행 속에 의미

나 혹은 이미지가 능률적으로 분할된다든지, 아니면, 활자의 시각적인 효

과를 노릴 수 있다든지 해야 합니다.

  만약,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분행分行이라면 그것은 누더

기에 지나지 않는 글을 만들게 되고 맙니다.

 

 

  로메다 님,

  한 개의 시어詩語를 골라 쓰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거늘 하물며 하나의

시행詩行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정진을 기대합니다.

 

 

 

 

[제35신]

가장 능률적인 시의 제목은 어떤 것인가

 

 

  로메다 님,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이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상품만 보더라도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니 사람의 이름을 짓는 데 성명 철학이 동원될 만도 합

니다.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달 것인가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인기 없는 소설책의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했더니 잘 팔리더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제목을 선택했다는 얘

기가 되겠습니다만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의 제목을 붙이는 일의 중요함

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시도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제목을 단다면 보다 많

은 독자들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얘기하려는 시의 능률

적인 제목이란 독자 반응과는 무관한,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제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시의 제목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이상의 역동적인 역할을 합니

다. 그 역동적 역할이 무엇인지 다음의 글을 읽노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글에서의 제목은 독자의 시선을 맨 처음 붙들어 글 속으로 안내하는 간

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개의 제목들은 독자로 하여금 글의 내용을 쉽

게 짐작할 수 있도록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다. 논리적인 내용의 글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학 작품인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다루고자 하는 주된 소재를 제목으로 삼거나 말하

고자 하는 주된 생각을 제목으로 설정하여 글의 내용을 넌지시 짐작하게도

한다. 그렇지만 문학 작품의 제목들은 대체로 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

출하지 않고 암시 혹은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특히 시詩인 경우 이

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에서의 제목은 점포의 간판처럼 선명한 것이 아니라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 드리워진 반투명의 장막과도 같다. 그것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빨리

풀어 주는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궁금증을 오히려 심화시키면서 흥

미로운 갈등을 맛보게 하는 미적 장치로 설정된다.

  시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글

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시의 제목이 시를 읽어보기도 전에 내용을 짐작할 수 있도록

붙여졌다면 그것처럼 싱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시에서의 제목은 내용을 설명하는 간판이어서는 곤란하다. 시의 제목은

시행(詩行)과 마찬가지로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의 제목도 시의 다른 요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

서 절대적인 부분으로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 그 제목이 아니면 그 작품의

그러한 구조는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이상적인 제목은 독자가 그 시의 마

지막 행을 읽을 때까지 독자의 의식 속에 계속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하면

서 탄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음에 왕유王維의「녹시鹿柴」라는 절구를 예로 보도록 하자.

 

 

     空山不見人                  맑은 산 속 사람은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두런두런 말소리만 들려 올 뿐

     返景入深林                  저녁볕은 깊은 숲에 스며들어

     復照靑苔上                  파란 이끼 위를 다시 비추고 있네

 

 

  거금 천이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자가 처음부터 이 작품에

제목을 달았는지 아니면 후세의 어떤 이가 그렇게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작품은 ‘鹿柴(녹시)’라는 그 제목으로 하여 의부진意不盡

의깊이를간직하게된다. ‘鹿柴’를 ‘녹채’라는고유명사[地名]로해석하려

는이도 있기는 하나 그렇게 되면 이 시의 맛은 반감이 되고 만다. ‘鹿柴’는

‘녹시, 곧 글자 그대로 ‘사슴 울타리’의 의미로 보아야 멋이 살아난다.

  도대체 이 시의 제목을 어찌해서 ‘사슴 울타리’로 붙였단 말인가. 겉으로

보기엔 깊은 숲 속의 맑고 조용한 저녁나절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

다. 사슴은커녕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웬 사슴 울타리란 말

인가. 제목이 시의 내용을 설명한다고 기대하는 이들은 아마 그렇게 생각

하면서 이 시를 읽을 것이다. 그러나 제목도 시의 한 행처럼 시의 내용을

형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깊은 산 숲 속에 햇볕이 든 작은 공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 빈터에 몇 이

랑의 조그만 채마밭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 무나 배추 등속의 채소를 심었

던 곳인가 보다. 그 채소밭가에 나뭇가지를 듬성듬성 엮어 만든 기울어진

울타리가 있다. 주인도 먹기 전에 사슴이 자주 찾아와 뜯어먹으니 이를 말

려 보자는 것이었으리라.

  저 밭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마 이 근처 산 속 어딘가에 움막이라도 치고

살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

는 지금 약초라도 캐면서 혼자 시를 읊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

‘鹿柴(녹시)’는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鹿柴(녹시)’라

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면 이 작품은 한갓 깊은 산 속의 자연을 노래한 작

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제목으로 인하여 자연을 노래

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은자隱者의 깨끗한 삶을 노래한 작품으로 크게 달라진

다. 제목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지 알 일이다.

 

- (중략) -

 

  그동안의 사정들을 살펴보건대 시에 제목을 붙이는 양상도 다양하다. 소

재를, 배경을, 주제를 혹은 작품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삼기도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경우도 있으리라. 그러나 생각이

깊은 시인들은 그냥 쉽게 제목을 달지 않는다. 그 제목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능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도록 설정한다.

  시에 제목을 붙이는 일은 상품에 꼬리표를 다는 일과는 다르다. 천편일

률적으로 그냥 적당히 할 일이 아니다. 시는 가장 정제된 문학 양식이지 않

는가.

                                        -「 시와제목」『엄살의시학』pp.40~43

 

 

  로메다 님,

  제목이 어떻게 작품 전체에 역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인지 아직 납득이

안 되나요? 그렇다면 김종삼의 다음 작품 하나를 더 보도록 할까요?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개비처럼

 

 

  로메다 님,

  이 작품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 크리스마스 카드, 진눈개비라는 세 개의

비유만을 나열해 놓고 있는 단순한 구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렇다는 것인지 본문에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비유들의

원관념(주지)이 무엇인지 본문의 글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는그원관념-‘ 북치는소년’을제목으로설정하고있습니다.‘ 북치는소

년’에게서 느낀 세 개의 이미지들을 병치해 놓고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에서의 제목은 작품의 뼈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시의 제목은 본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설정하는 것이 이상

적입니다. 제목도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여야 합니다. 만일 어떤 제

목이 그 작품의 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역할에 그친다면 그것은 없

어도 무방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가끔‘무제’라는 이름의 제목을 보기도 하는데 이것처럼 불성실·무책임

한 제목은 없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도 내가 하는 시의 얘기가 너무 무거웠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시

의 길이 도道를 찾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한 공력

도 쏟지 않고 좋은 시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지나친 욕심일 것입

니다. 건필을 바랍니다.

 

 

                                                             《우리詩》2월호에서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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