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11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제30신]
우리시의 압운에 관하여
로메다 님, 지난번에는 운율의 한 유형인 율격에 관하여 소개했습니다. 내 설명이 미급했던 것 같아서 다시 간략하게 덧붙입니다. 율격은 강약․고저․장단 등 ‘소리의 성질’이 빚어내는 율동 현상입니다. 언어의 특성에 따라 율격 형태가 결정됩니다. 강약의 어세를 중요시하는 영어로 쓰인 영시(英詩)는 강약률을 지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의 한 행이 '강약약 강약약 강약약…'의 어세를 지닐 경우 '강약약'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반복되면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고저를 중요시하는 한시(漢詩)인 경우는 고저율을 갖게 되고,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시는 장단율이 지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에서의 율격은 그러한 소리의 성질(강약,고저,장단)에 의해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소리의 양’의 반복으로 파악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우리 시의 율격 명칭을 붙이자면 ‘음량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의 율격형태를 4․4조라든지, 7․5조라든지 하는 말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낭독할 때의 시간적인 등장성(等長性)을 고려하여 2음보, 3음보, 4음보와 같은 음보의 개념으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압운(押韻)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압운은 같은 소리나 혹은 유사한 소리들의 반복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소리의 어울림입니다. 압운에 관한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압운은 율격과 함께 운율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장치 중의 하나다. 압운은 동일한 소리의 반복이 빚어낸 해조(諧調) 현상인데, 이는 한시의 절구(絶句)나 율시(律詩)라든지 서구의 sonnet와 같은 정형시에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다. 즉 이러한 정형시에서는 규정된 압운법이 있어서 그러한 압운법을 지키지 않는 글은 시가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압운은 정형시를 이루는 한 형식―지켜야만 되는 규칙인 것이다.
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어인 일로 푸른 산 속에 사는가 그대가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대답이 무슨 소용, 그저 웃고만 있으리)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떨어진 시냇물 아득히 흘러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속세와는 먼 특별한 이 세상을 어찌 모르시는가)
―이백(李白) 「山中問答(산중문답)」
① The year's at the spring, (일년 중에서도 봄철)
② And day's at the morn; (하루 중에서도 아침나절)
③ Morning's at seven; (아침 가운데서도 7시)
④ The hillside's dew-pearled; (언덕에는 진주 이슬)
⑤ The lark's on the wing; (하늘 나는 종달새)
⑥ The snail's on the thorn; (뿔 세운 달팽이)
⑦ God's in His Heaven-- (하느님도 평안하시고)
⑧ All's right with the world! (세상은 만사형통!)
―R. Browning 「Pippa's Song」
「산중문답」에서는 1, 2, 4행의 끝이 동일한 소리(‘ㄴ’)로 압운되어 있고.「Pippa's Song」에서는 ①행과 ⑤행, ②행과 ⑥행, ③행과 ⑦행 그리고 ④행과 ⑧행의 끝이 서로 호응하여 동일한 소리들을 매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즐거운 해조야말로 절제의 미학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시조(時調)와 같은 정형시에서도 압운의 규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시에서는 압운법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시가 운율의 취약성을 지니게 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들이 압운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만 한다면 우리의 현대시에서도 압운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실현시키지 못할 것도 없다.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여 볼까.
―김소월 「千里萬里(천리만리)」부분
일자리 잃고
집에서 지내네
아내는 안에서
한숨이 한이 없고
나는 난감하여
낯빛이 납빛이네
돈은 돌고 돈다는데
돈에 돌아야 도는 걸까
―채희문 「우울한 日誌(일지)․15」 부분
목화밭 청무우 시린 다복솔
옥양목 달에 젖은 부신 저고리
시오리 가리맛길 잠든 산마을
시루봉 머리 위에 걸린 달무리
―임보 「달밤」
소월의 작품에서는 ‘ㅁ’이 의도적으로 반복되면서 부드러운 율동감을 빚고 있다. 채희문의 작품에서는 행 단위로 동일한 음절들이 되풀이되면서 아이러니컬한 음조를 형성하고 있다. 졸시 「달밤」은 1, 2행과 3, 4행의 첫머리를 각각 동일한 소리로 배치했고 1, 3행과 2, 4행의 끝에 각각 동일한 소리를 달았다. 균제(均齊)의 구성미를 추구해 본 것인데 독자들에게 어떻게 가 닿는지 궁금하다.
압운되는 소리가 단순히 율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고, 반복되는 그 소리의 음색(音色)[음성상징]이 작품의 정조(情調)[시의 내용]와 잘 어울려 상승 작용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학계에서는 압운의 범주를 문제삼기도 한다. 우리 시에서의 압운의 한계 즉 되풀이되는 소리의 단위를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압운의 범주를 단음의 반복만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는 영시(英詩)나 한시(漢詩)의 압운법에 근거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은 영어나 중국어와는 달리 의미를 나타내는 실사(實辭) 뒤에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허사(虛辭)[조사, 어미 등]가 질서정연하게 부착되어 이루어진 교착어다. 그런데 어절의 끝에 부착된 허사 즉 조사나 어미는 대개 한 음절 이상의 것들이어서 압운의 범주를 단음만으로 한정할 경우 우리 시에서의 압운의 실현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구조가 다른 우리 시가 굳이 한시나 서구시의 압운법에 예속될 필요는 없다. 우리 시는 우리 언어 구조에 맞는 압운법을 설정하면 되는 것이다. 되풀이되는 소리의 단위가 단음을 넘어서서 음절이나 어절 단위가 되더라도 해조적 리듬감을 생산해 낸다면 압운의 범주로 다루지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되풀이되는 소리의 단위가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소리가 효율적인 해조를 만들어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의 압운(押韻)」『엄살의 시학』pp.77~80
로메다 님,
압운의 이론도 까다롭지요? 압운되는 위치에 따라 행내운(行內韻)과 행간운(行間韻)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행내운은 앞에 인용한 채희문의 「우울한 일지․15」에서처럼 동일한 행 속에서 같은 소리가 반복되는 구조이고, 행간운은 앞의 졸시 「달밤」에서처럼 행과 행들의 유사한 위치에 동일한 소리가 놓이면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다시 행의 앞에 놓인 행두운(行頭韻)과 행의 끝에 놓인 행말운(行末韻)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모밀꽃 보고
무얼 생각누
머언 산허리
멈춘 낙조(落照)에
목동(牧童)의 피리
머흘 머흘이
멍든 가슴을
만져만 주는
모색(暮色) 하늘은
물든 장미빛
―장호(章湖)「모밀꽃 보고」부분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젖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민영(閔暎)「용인 가는 길」
장호의 작품은 행두운을 의도적으로 실현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겠지요? 각 행의 첫 소리가 ‘ㅁ’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민영의 작품에서는 각 연의 행말에 유사한 소리가 오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제1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에’로 2행과 4행의 끝이 ‘ㅏ’로
제2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던’으로 2행과 4행의 끝이 ‘ㄹ’로
제3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ㄴ’으로 2행과 4행의 끝이 ‘ㅣ’로
제4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에’로 2행과 4행의 끝이 ‘ㅏ’로 압운되어 있습니다.
로메다 님,
작품 전체에 걸쳐 지나치게 의도적인 압운 설정을 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만 부분적으로 적절한 압운을 실현시킬 수 있다면 한결 부드러운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시에서 압운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 시의 압운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우리 시를 풍요롭게 하는 한 방법이 될 터이니까요.
시의 율격과 압운에 관해서 좀더 깊이 있는 이해를 원하신다면 졸저 『현대시 운율 구조론』(태학사,1999)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제31신]
내재율이란 무엇인가
로메다 님,
그 동안 준비해 온 수능시험은 잘 치렀는지 궁금하군요. 혹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못 거둔다 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작은 성취에 자만(自慢)한 사람은 큰 성취를 거두기 어렵고 작은 실패에 자성(自省)한 사람은 큰 성취를 거둘 수 있다.’라는 말씀으로 조언을 드리고 싶군요.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을 돈독히 지닌 사람의 앞길은 언젠가는 열리기 마련입니다.
로메다 님,
다시 우리가 해 오던 시의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울격과 압운, 시의 운율에 대한 얘기를 했었지요? 그 얘기들이 적잖이 딱딱하고 또한 재미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운율'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친김에 오늘도 운율의 세 번째 관문인 ‘내재율’에 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로메다 님,
리듬 곧 율동은 청각적인 현상만은 아닙니다. 시각적인 리듬도 있습니다.
밤하늘에 일정한 간격으로 명멸하는 탐조등의 불빛에서 리듬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 펼쳐지는 보리밭의 고랑과 이랑들이 반복되는 이어짐이라든지, 칠색의 무지개 빛깔이라든지, 색동저고리의 찬란한 무늬 등 이 세상에는 시각적인 리듬을 유발하는 현상들도 적지 않습니다.
활자로 인쇄된 시에서도 시각적인 리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활자들을 적절히 교체해서 배치한다든지 시행들을 들죽날죽 변화롭게 배열한다든지 혹은 활자 인쇄를 다양한 색채들을 이용하여 했을 경우 등을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시각적인 리듬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청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은 청각률이고, 시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은 시각률이 됩니다. 이밖에도 만일 촉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이 있다면 촉각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로메다 님, 그동안 시의 운율이라고 하면 율격과 압운 곧 청각률만 문제삼았습니다. 그런데 청각률이나 시각률 같은 감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만이 아니라 심리, 곧 내면에서도 느껴지는 율동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어의 의미라든지, 이미지라든지, 정서라든지 또는 문장의 구문구조라든지 이러한 것들에 의해 빚어지는 심리적인 리듬인데 이를 나는 내재율이라고 부릅니다.
『엄살의 시학』에 수록되어 있는 ‘내재율’에 관한 설명을 우선 읽어보도록 합시다.
내재율이라는 용어는 현대시의 운율을 논하는 자리에 자주 오르내리곤 한다. 밖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시 속에 담겨 있는 운율쯤으로 해석들을 하고 있다. 내재율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니까 구체적으로 그 운율의 형태를 지적해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재율이라는 용어는 어떤 구체적인 운율의 구조를 설명하는 자리에 사용된다기보다는 현대시의 운율을 설명하기 곤란할 때 그 회피의 수단으로 끌어다 쓰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되고 말았다.
내재율은 정말 구체적으로 지적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운율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내재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느껴질 것이고, 느껴진다면 그 전체를 다 털어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그 대략의 맥락을 붙잡아 내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나는 내재율의 상대 개념으로 외형률(外形律)을 상정한다. 외형률은 겉으로 드러난 운율이다. 곧 우리의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객관적인 리듬이다. 나는 이를 다시 청각률(聽覺律)과 시각률(視覺律)로 구분한다. 그동안 시의 대표적인 운율로 지적되어 온 율격(律格)과 압운(押韻)은 청각률의 범주에 든다.
한편 시를 활자 매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활자의 대소(大小) 배치, 행의 장단(長短) 배열, 다양한 색채 인쇄 등이 빚어 낸 시각적인 리듬의 구조도 예상이 된다.
이를 시각률이라 이르는데 이는 다시 형태율(形態律)과 색채율(色彩律)로 양분할 수 있다.
이처럼 청각이나 시각과 같은 감각에 의해 포착되는 외형률과는 달리 우리의 내면세계 곧 심리에 파문을 일으키는 운율 구조를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이를 내재율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니까 내재율은 의미, 이미지, 정서, 구문 구조 등이 만들어 내는 심리적인 리듬이다.
우리가 시를 읽어 가는 동안 어떤 특정한 의미가 계속 되풀이된다든지, 유사한 사물이나 정황들이 계속 열거된다든지, 대조적인 정서가 교체 반복된다든지 할 경우 우리의 심리는 율동감에 젖게 된다.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 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 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金顯承)의 「가을」이라는 작품이다. 작품 전체가 봄에 대한 진술과 가을에 대한 진술이 섞바뀌면서 대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조지훈(趙芝薰)의 「앵음설법(鶯吟說法)」(첨부자료 참고)은 서경과 서정의 교체 반복이고, 서정주(徐廷柱)의 「화사(花蛇)」(첨부자료 참고)는 뱀에 해한 화자의 애(愛)와 증(憎)의 상반된 정조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교체 반복이 율동감을 자아낸다.
이밖에도 연쇄(連鎖), 점층(漸層), 순환(循環), 순차(順次) 등의 구조들도 리듬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의미나 이미지 혹은 정서 등에 의해 빚어진 심리적 리듬을 의미율(意味律)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한편 구문 구조가 율동감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흔히 문장을 이루고 있는 성분들을 크게 주성분과 부속성분으로 구분한다. 뼈대를 이루고 있는 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은 주성분이고 수식이나 한정의 직분을 지닌 관형어나 부사어는 부속성분에 속한다. 비교적 주성분은 강하게 부속성분은 약하게 우리의 심리에 와 닿는다고 할 수 있다.
‘소년이 그림을 그린다’는 주성분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다.(주어+목적어+서술어)
‘작은 소년이 예쁜 그림을 열심히 그린다’는 부속성분과 주성분들이 어우러진 문장이다.(수식어+주어)+(수식어+목적어)+(수식어+서술어)
전자의 구조는 ‘강강강’의 단순 구조라면 후자는 ‘약강 약강 약강’의 변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즉 전자보다는 후자가 보다 리드미컬하다. 나는 이를 구문율(構文律)이라 부른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의 「승무(僧舞)」 앞 부분이다. 각 연의 구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연 관형어+관형어+관형어+주어 / 부사어+부사어+서술어
제2연 ( ? )+부사어+관형어+목적어/ 관형어+부사어+서술어
제3연 관형어+부사어+관형어+주어 / 부사어+부사어+서술어
각 연의 구문 구조가 유사하다. 즉 각 연의 제1행은 세 개의 부속성분 다음에 주성분이 오고, 제2행은 두 개의 부속성분 다음에 주성분이 온다. ‘약약약강 약약강’이 하나의 패턴이 되어 되풀이되고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예외는 제2연의 제1행에 수식어가 하나 부족한 것인데, 이는 ‘파르라니’라는 한 어절이 제1연의 ‘얇은 紗’나 제3연의 ‘두 볼에’ 등의 짧은 두 어절을 능가하는 4음절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목월의 「가볍게 열리는 문」(첨부자료 참고)은 행 단위로 동일한 구문 구조가 되풀이되는 구문율을 지니고 있다.
내재율은 의미율과 구문율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다. 그것은 숨어 있지만 붙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 고정된 틀로 굳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작품마다에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창조적인 운율이라고 할 수 있다.
―『엄살의 시학』pp.81~84
로메다 님,
내재율의 이론도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진가요? 내재율의 여러 경우를 들어 설명하자면 방대한 분량의 지면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을 그야말로 주마간산격으로 간략하게 변죽만 울리는 데 그쳤으니 설령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너무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내재율은, 시가 우리의 심리 곧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리듬인데 그것은 시어의 의미나 이미지나 정서― 이러한 것들의 구성에 의해 빚어진다는 것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작품 속에 효율적인 내재율을 실현시키는 문제는 차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합시다. 작품을 많이 쓰다가 보면 의도적으로 시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몸이 스스로 알아서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내재율을 실현시키기도 합니다.
시중에 떠도는 어떤 시 이론서들 가운데는 내재율을 불규칙적인 율격쯤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문운을 빕니다.
[첨부 자료]
벽에 기대 한나절 조을다 깨면 열어제친 窓(창)으로 흰구름 바라기가 무척 좋아라.
老首座(노수좌)는 오늘도 바위에 앉아 두 눈을 감은 채로 念珠(염주)만 센다.
스스로 寂滅(적멸)하는 宇宙(우주) 가운데 먼지 앉은 經(경)이야 펴기 싫어라.
篆煙(전연)이 어리는 골 아지랭이 피노니 떨기에 우짖는 소리.
이 골안 꾀꼬리 고운 사투린 梵唄(범패)소리처럼 琅琅(낭랑)하고나.
벽에 기대 한나절 조을다 깨면 지나가는 바람결에 속잎 피는 古木(고목)이 무척 좋아라.
― 조지훈 : 「鶯吟說法(앵음설법)」 전문
麝香(사향) 薄荷(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達辯(달변)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사향) 芳草(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石油(석유) 먹은듯… 石油(석유) 먹은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빛…
크레오파트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숨여라!
베암.
우리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숨여라! 베암.
―서정주 : 「花蛇(화사)」전문―
가볍게 열리는 문./
길고 가는 唐絲(당사)실./
어머니의 도돗한 앞섭./
자주깃 초록 호장저고리./
컴컴한 사랑방에 향나무문갑./
덜컹 열리는 백통자물쇠와/
숫총이 긴 숟갈./
아아/ 아버지의/ 굵고 부드러운 음성과/
어머니 은수저에 옥빛 새파랗게 아로새긴 갸름한 목숨壽(수).
― 박목월: 「가볍게 열리는 문」 전문 ―
[제32신]
적절한 시어(詩語)는 어떤 것인가
로메다 님,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 곧 시어가 따로 있는지 물어왔군요. 이 질문은 그림을 그리는 색채가 따로 있는가를 묻는 것과 흡사합니다. 로메다 님, 그림 그리는데 사용되는 색채가 따로 있습니까? 모든 색채는 그림 그리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색채이거나 그 색채를 필요로 할 경우 당연히 사용되는 것이지요.
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언어가 시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비록 평소에 잘 사용되지 않는 궁벽(窮僻)한 말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을 필요로 하는 시상(詩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화가들에게도 그들이 좋아하는 특별한 색채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초록색을 좋아하고, 또 어떤 이는 노란색을 선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시인의 경우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즐겨 사용하는 시어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시인은 정감 어린 섬세한 시어를 좋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시인은 활력 있는 웅장한 느낌의 시어를 편애하기도 합니다.
모든 소리가 음악을 만드는 훌륭한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시에서도 꺼리거나 선호하는 언어가 따로 없지 않습니다. 우선 다음의 글을 읽어볼까요?
균형과 조화를 지향했던 고전주의자들은 시에 구사된 말 곧 시어(詩語)를 일상어와는 달리 귀족적인 우아한 말[雅語]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성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시어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굳이 시어와 일상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근자에 와서 해체론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아어(雅語)보다는 오히려 속어(俗語)나 비어(卑語)들을 즐겨 쓰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시어와 비시어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시어와 비시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휘가 한 작품 속의 특정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 어휘가 A라는 작품 속에서는 능률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B라는 작품 속에서는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잘못 받아들여 오늘의 시어(詩語)는 제한이 없는 것이니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갖다 써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모든 언어는 시 속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인들이 보다 즐겨 사용하는 시어들이 따로 없는 바가 아니며, 또한 보다 능률적인 시어를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능률적인 시어란 어떤 특성을 가진 말들일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보다 다양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 말
C. B. Wheeler는 시적 언어의 특성을 한마디로 이중성(doubleness)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문은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므로 의미가 단순 명료할수록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는 복잡다단한 정서를 전달하는 글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한 울림을 담고 있는 것을 선호한다.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표현보다는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가 더 은근하다. ‘고요하다’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단순하지만 ‘호수’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호수’는 ‘고요함’뿐만 아니라, 넓음, 시원함, 맑음, 깊음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능률적인 시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딱딱한 말보다는 보다 부드러운 말
어떤 이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내용의 시를 쓰자면 오히려 부드러운 말보다는 딱딱한 말이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지도 모른다.
시인도 그릇된 세상을 비판하고 불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를 통해 행해질 때는 격정적인 선전문이나 자극적인 구호문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시의 힘은 직설적인 독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화에 있다. 시는 용맹스런 장수의 포효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의 손길과 같아야 한다. 그것이 보다 큰 감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산문과는 달라서 운율이라는 신비로운 가락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글이다. 그 운율 형성에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어는 역시 부드러운 쪽이라 하겠다.
셋째, 거친 말보다는 아름다운 말
시는 언어 예술이다. 즉 말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만일 어떤 시가 아름다운 요소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리라. 시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요즘 해체론자들 가운데는 왜 아름다운 시만 고집하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류(自己流)의 언술(言述)에 대한 명칭을 시(詩)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새로이 명명하라고 권하고 싶다.
넷째, 저속한 말보다는 우아한 말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말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정신이 담긴 글이다. 시정신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승화된 소망(세속적인 욕망의 정화) 곧 진(眞), 선(善), 미(美) 그리고 절조(節操)와 염결(廉潔)을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의 기능인만이 아니라 고고한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수도자(修道者)로 보고자 한다.
그러한 시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 시어가 어찌 정화된 우아한 말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상습적으로 저속한 시어들을 즐겨 구사한다면, 설령 언어를 부리는 재주가 인정된다 손치더라도 그는 아직 시인의 자질을 원만히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다섯째, 가급적 표준어를 어법에 맞게
토속적인 정서를 실감나게 드러내기 위해서 사투리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투리가 때에 따라서는 구수하고 정감 어린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에 표준어와 사투리를 아무 제한없이 혼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가능하면 표준어를 사용할 일이고 어법에 맞도록 쓸 일이다. 시에서는 비문법적인 표현도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그렇게 된 것이지 그것이 시의 능사는 아니다.
시의 이상적인 문장이란 산문과 마찬가지로 표준어를 어법에 맞도록 쓴 것이다. 표기도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적잖은 시인들이 표기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 예술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표기법이나 문법부터 착실히 습득해야 할 일이다.
여섯째, 외래어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을
소위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외래문화들이 거센 물결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시인들의 작품 속에도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범람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문화가 서로 섞이다 보면 외래어도 언젠가는 한자어들처럼 우리말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마치 우리의 순수성이 유린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개운치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의 얼과 문화를 잘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얼과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를 가장 사랑하고 지키는 이가 곧 시인들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한 시인의 탄생은 바로 그 민족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고 역사는 일러주고 있다. 세익스피어가 그렇고 괴테가 그렇다고 하지 않던가. 시인은 민족어의 연금술사이며 또한 수호자들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일곱째, 언어 외적인 매체들
시가 언어 예술의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경향이 꼴라쥬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림, 도형, 사진 등의 문자외적 매체를 시에 끌어들이는 경우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절실한 정황을 시각 매체의 도움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려냈다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면 어디까지나 언어 매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다른 장르의 명칭으로 불러야 하리라. 시는 언어 예술이므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미 시라고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시어(詩語)」『엄살의 시학』 pp.44~48
로메다 님,
모든 말은 시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에서 보다 능률적으로 작용하는 말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시는 압축된 말이며, 운문이며, 심미성을 지향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다 내포적이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우아한 말을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어의 일반적 경향을 지적하는 설명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마다, 아니 매 구절마다 그 시상(詩想)을 형상화하는 최선의 시어들이 있게 마련인데, 시인은 그것을 선별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메다 님,
어떤 시인은 한 개의 적절한 시어를 찾기 위해 몇 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한 작품을 놓고 평생을 퇴고하는 시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시어에 제한이 없다는 것은 시어의 폭이 넓다는 뜻이지 아무런 말이나 시에 끌어다 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우리詩』 1월호에서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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