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인의 알기쉬운 시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7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시
[제18신]
시적 비유의 속성
로메다 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수사 곧 시적 장치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비유(比喩)’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신선한 비유를 구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유의 비중은 큽니다. 그렇다면 비유란 어떤 형식의 표현법인가 알아보도록 합시다.
이 강의의 서두에 이미지가 시의 싹이라고 단정하면서 대상 속에서 어떤 신선한 이미지를 찾아내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 기억하시지요?
시에서의 이미지는, 특히 유추적 이미지일 경우 비유의 형식으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우선 「시적 비유의 속성」에 관하여 논급한 내 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합시다.
시에서의 이미지를 시의 씨앗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 환기시키는 이미지는 대개 추상적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물과 함께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시적 이미지는 비유의 형태로 형성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비유는 이미지와 공존하는 시의 중요한 표현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는 곧 비유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시에서의 비유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흔히 비유를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소위 이미 잘 알려진 기지旣知의 것(補助觀念, 媒體, vehicle)으로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미지未知의 것(元觀念, 主旨, tenor)을 설명하는 방법쯤으로 생각한다. 철학이나 논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 특히 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유는 사물 인식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사물을 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수단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만약 전자가 비유의 본질이라면 적확성的確性이 최상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의 비유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다음의 두 비유를 예로 보도록 하자.
(가) 돼지처럼 뚱뚱한 철수
(나) 하마처럼 뚱뚱한 철수
철수의 뚱뚱함을 (가)에서는 돼지에 (나)에서는 하마에 비유하고 있다. (가)와 (나) 중 어느 쪽이 능률적인 비유인가는 금방 판별이 된다. 물론 (나)다.
설령 철수의 실제 뚱뚱함을 물리적으로 측정해 볼 경우 돼지에 더 가깝다 할지라도 사실에 근접한 (가)보다는 과장이 담긴 (나)가 보다 효율적이다.
비유는 사실을 사실대로 드러내기 위한 기법이라기보다는 사실을 사실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비유는 논리에 근거한 설명이 아니라 정서에 근거한 설득이다. 비유는 시적 표현 장치의 하나인 불림(과장지향성)에 근거하고 있다. 과장성이 없는 비유는 맥빠진 진술에 그치고 만다.
한편 능률적인 비유는 이질적인 대상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다) 장미처럼 예쁜 국화
(라) 곰처럼 미련한 개
(마) 장미처럼 예쁜 소녀
(바) 곰처럼 미련한 사내
(다)와 (라)는 능률적인 비유가 못 된다. (다)에서는 같은 식물 사이 (라)에서는 같은 동물 사이에서의 동질성을 따지고 있다. 동질적인 것들 가운데서의 동질성은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국화'도 원래 아름다운 식물이고 '개'도 원래 미련한 동물이니까
여기에는 과장성이 능률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비유보다는 오히려 비교의 기능이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마)에서는 식물과 인간, (바)에서는 동물과 인간이라는 이질적인 대상들 사이에서의 동질성을 말하고 있다. (마)와 (바)에서는 효율적인 비유가 이루어진다. '소녀'가 아무리 예쁘기로서니 '장미'와 같으며 '사람'이 아무리 미련키로서니 '곰'과 같겠는가. 여기에는 과장이 개입되어 있다. 과장이 곧 비유의 속성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비유는 은폐성을 지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은폐성은 특히 은유의 구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실현된다. 직유는 두 대상 즉 주지와 매체 사이의 동일성이 명시된 구조다. (나)에서의 '뚱뚱한'이나 (마)에서의 '예쁜' 그리고 (바)에서의 '미련한' 등이 동일성이나 유사성(이를 공유소共有素라 부르기로 하자)이다.
이처럼 직유에서는 두 대상을 연결하는 공유소가 명료하게 표출되는데 비해 은유는 공유소가 생략되어 있는 구조다.
(사) 내 마음은 호수다
'주지主旨=매체媒體'의 구조다. 공유소는 감추어져 있다. 주지와 매체가 폭력적으로 결합된다. 직유는 제시된 공유소에 의해 두 대상을 묶는 수동적 사고가 강요되는 형식이지만 은유는 두 대상 사이에 수많은 공유소를 추출해 내야만 하는 능동적 사고가 요구되는 형식이다. 독자는 (사)에서 다양한 공유소를 추출해 낼 수 있다. '넓다' '잔잔하다' '깊다' '맑다' '흔들린다' 등의 수많은 공유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직유는 단선적인 비유지만 은유는 입체적인 비유다. 은유는 숨기는 가운데 보다 많은 것을 말하는 역설적인 구조다. 보다 많은 공유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수록 능률적인 은유가 된다. 소위 시의 특성으로 지적되는 애매성(ambiguity)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바로 이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은유는 시적 장치인 불림(과장)과 숨김(은폐)의 두 가지 속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는 표현 양식이다.
―『엄살의 시학』pp.27~30
로메다 님,
시에서의 비유가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요?
이미지나 비유나 두 사물의 결합양식이란 면에서 동일합니다. 시에서의 능률적인 비유는 과장의 속성을 지닌다는 것과 이질적이 사물들 사이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정진을 빕니다.
[제19신]
은유 구사의 세 유형
로메다 님,
시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이 비유라는 것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비유는 하나의 사물(主旨, tenor)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물(媒體, vehicle)을 끌어들이는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물은 서로 공통적인 요소 곧 공유소共有素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이 호수는 거울처럼 맑다’라는 비유가 있다고 칩시다. 주지(T)인 ‘호수’는 ‘맑다’라는 공유소(S)에 의해 매체(V)인 ‘거울’과 연결됩니다.(공유소란 주지와 매체가 공통으로 지닌 동일성 내지는 유사성이라고 했지요?) 공유소가 크면 클수록 두 사물의 결합은 설득력이 강합니다. 직유는 앞의 예문에서처럼 공유소가 분명히 드러나 있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 공유소가 생략된 구조가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유소 없이 주지와 매체가 바로 결합합니다. 앞의 예문을 은유로 바꾸면 ‘이 호수는 거울이다’가 됩니다. 공유소 ‘맑다’가 생략되고 주지인 ‘호수’와 매체인 ‘거울’이 바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지와 매체가 결합하는 양식에 따라 은유의 구조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등가等價의 구조(T=V)
등가의 구조란 주지(T)와 매체(V)의 관계가 주어와 서술어로 연결된 구조입니다. 즉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라는 비유에서 보면 주지인 ‘내 마음’은 주어이고 매체인 ‘마른 나뭇가지’는 서술어입니다. 생략된 공유소는 유추에 의해 추측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딱딱함’ ‘황량함’ ‘메마름’ 등의 공유소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작품은 하나의 주지에 여러 개의 매체가 병치된, 많은 등가 은유들의 나열로 이루어진 특이한 작품입니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나의 본적」 전문
‘나의 본적’이라는 하나의 주지를 놓고 다양한 매체들이 은유의 구조로 엮어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둘째, 결속結束의 구조(T의 V, TV, 혹은 V의 T, VT)
주지와 매체, 혹은 매체와 주지의 결합이 수식어와 피수식어(관형어+체언)의 관계를 이룹니다.
가) T의 V인 경우-- ①명상의 호수, ②추억의 오솔길, ③별들의 잔치
주지가 매체의 수식어가 되어 있습니다.
①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깊은 명상,
②는 오솔길처럼 그윽한 추억,
③은 잔치 마당처럼 풍성한 밤하늘의 별들을 뜻합니다.
공유소가 생략된 상태에서 주지와 매체가 관형격조사 ‘의’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나) TV인 경우--①교통 지옥, ②입시 전쟁
이 경우는 관형격조사 ‘의’마저도 생략된 상태로 주지와 매체가 바로 결속되고 있는 경우입니다. 즉
①지옥처럼 견디기 괴로운 교통 사정,
②전쟁처럼 치열한 입시 경쟁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 V의 T인 경우--①한 오라기의 희망, ②한 톨의 양심, ③철의 재상宰相
이 경우는 가)와는 반대로 주지와 매체의 위치가 바뀌어 매체가 수식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즉
①한 오라기의 실처럼 가느다란 희망,
②한 톨의 알갱이처럼 작은 양심,
③쇠붙이처럼 굳고 냉철한 재상입니다.
라) VT인 경우--①무지개 사랑, ②놀부 사내
매체가 바로 주지에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①무지개처럼 환상적인 사랑,
②놀부처럼 인색한 사내의 뜻입니다.
셋째, 생략省略의 구조(T가 생략된 구조)
①밤하늘의 눈들이 지상을 지켜보고 있다. (T:별, V:눈)
②천사들의 합창 (T:어린이, V:천사)
이 구조는 주지조차도 생략되고 매체만으로 표현되는 경우입니다. ①에서의 ‘눈’의 주지는 ‘별’이고 ②에서의 ‘천사’의 주지는 '어린이'인데 주지는 생략되고 매체만 드러납니다. 겉으로 보기엔 상징의 구조와 비슷하나 주지가 명백히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상징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유代喩도 주지가 생략된 구조이므로 은유의 셋째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유는 흔히 환(換喩와 제유提喩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가) 환유
특징이나 속성으로 그 사물을 대신함
왕관→임금, 감투→벼슬아치, 별→장군, 백의→한민족, 왕눈→눈 큰 사람
나) 제유
a) 일부로 전체를 대신하는 경우
빵→식품 전체(밥, 빵, 떡, 과자, 과일…) [예문]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약주→술 전체(소주, 양주, 막걸리, 약주, 포도주…) [예문] 약주 잘 하시나요?
칼→무기 전체(창, 칼, 총, 활…) [예문]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붓→필기도구 전체(연필, 펜, 붓, 만년필…) [예문] 붓이 창보다 강하다.
b)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경우
돛→배 [예문] 두 개의 돛이 경주를 하고 있다.
입→사람 [예문] 입이 열이다. 손→사람 [예문] 손이 모자란다.
눈→사람 [예문] 여러 눈이 지키고 있다.
주지는 숨고 매체만 드러나는 것이 은유의 셋째 유형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대유에서의 주지와 매체의 관계는 공유소(동일성)가 아니라 주로 인접성隣接性에 근거하게 됩니다. 공유소와 인접성이 희박한 비유는 주지와 매체의 결합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비유는 역설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현대시에서는 의도적으로 낯선 사물들과의 결합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생산해 내고자 합니다. 이는 비동일성을 지향하려는 현대 은유의 역설적 구조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비유 가운데 특히 은유가 시에서 즐겨 사용된 것은 시의 중요한 표현 장치인 숨김(은폐지향성)과 불림(과장지향성)의 역설적 특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은유는 단순한 수사적 기능을 넘어서 두 사물을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즉 시에서의 은유는 매체에 의해 주지를 설명하려는 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이질적인 사물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학업에 여전히 정진하시지요?
건투를 빕니다.
[제20신]
‘나’란 무엇인가
로메다 님,
인간이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인간은 이방인처럼 서먹서먹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이 세상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이 존재의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존재의 외로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무딘 감각을 지닌 비정상적인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두렵게 생각지 말고 충분히 괴로워하십시오. 그러한 고뇌를 통해 로메다 님은 한 단계 높은 성숙한 영혼에 도달할 것입니다.
어쩌면 시를 생각하는 마음도 이러한 숙명적인 외로움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로메다 님,
우리의 존재가 실존주의자들이 회의한 것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는 시에 대한 담론은 잠시 접어두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로메다 님,
‘나’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겠지요?
‘나’는 물론 부모로부터 왔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생명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의 뿌리는 부모님 이전으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2분의 부모→4분의 조부모→8분의 증조부모→16분의 고조부모→……
이처럼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2배수로 불어나면서 조상의 갈래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됩니다.
오늘의 ‘나’를 이 땅에 오게 하기 위해 600년 전쯤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이 지상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계산해 볼까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20세대 전이 되니까, 2의 20승입니다. 2의 20승이면 100만 명이 넘은 숫자입니다.
‘나’의 혈관 속에는 600년 전 100만이 넘은 조상들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 100만 명 가운데 어느 한 분만 안 계셨더라도 오늘의 이러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의 끈은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조상, 아니 창조주에까지 닿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혈관 속 DNA는 과거 전 조상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 전 조상의 결집으로 응결된 하나의 집합체입니다.
결코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배우자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 둘씩을 낳는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그 아들과 딸들이 결혼하여 둘씩의 자녀를 갖게 되고, 다시 그 자손들이 그렇게 둘씩의 자손들을 계속 얻게 된다면, 600년 뒤 ‘나’의 피를 가진 후손들이 이 지상에 얼마나 존재하게 될까요?
100만 명이 넘습니다.
이 지상에 인류 역사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피를 지닌 후손들은 점점 불어나 언젠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미래 인류들의 조상입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자녀를 얼마만큼 생산하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을 좌우할 수 있는 막중한 존재입니다.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고요?
과거 전 인류들이 나에게 귀결되었고, 미래 전 인류들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나는 전 인류의 한 교차점―인류의 한중심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공간적으로 우리 생명체 곧 ‘나의 몸’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몸, 육신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물론 우리의 몸은 처음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오늘의 이러한 육신이 되도록 길러준 것은 삼라만상의 협동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섭취했던 모든 음식물이며, 내가 그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호흡했던 모든 공기며, 그동안 햇빛을 위시해서 내가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우주 공간 속에 존재한 모든 요소들의 총체적인 작용에 의해 이 몸뚱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메다 님,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한 생명체가 얼마나 다양한 우주적 요소들을 끌어 모으며 살아가는가 짐작이 갑니다. 뿌리로는 물을 비롯해서 땅속에 들어있는 많은 영양분들을 빨아들이고, 잎과 가지로는 필요한 햇빛과 공기들을 얼마나 열심히 모읍니까?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우주적 요소들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식탁 위에 놓인 한 개의 달걀, 한 마리의 물고기, 한 점의 육류肉類… 이러한 음식들 속에 서려 있는 우주적 요소들을 실로 아득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조그만 부엌에서 조리된 단순한 음식물에 의해 형성된 것 같지만, 사실은 전 우주적 요소들이 총 동원되어 빚어낸 신비로운 결정체입니다. 한 생명체의 몸뚱이는 전 우주의 축약․수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지칭하는 순 우리말 ‘몸’의 어원이 ‘모으다’ 아닙니까? 실로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생명관을 엿보게 하는 말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목숨이 끊긴 뒤, 사후死後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생명이 멈춘 뒤 우리의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육신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은 흩어지고 흩어져서 그것들이 왔었던 애초의 우주 공간 속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육신의 요소들로 이 우주는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죽음’을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도 이해가 되지요?
로메다 님,
우리의 ‘몸’ 역시 하나의 응결체며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전 우주적 요소들이 응집凝集되어 잠시 내 몸을 이루었다가, 다시 그 요소들이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져 가는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앞에서 ‘나’는 전 과거 조상들의 응결이며, 전 미래 인류의 출발점으로, 전 인류의 교차점이며, 중심점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니 나라는 생명체는 역사적(혈연적)으로도 공간적(육체적)으로도
이 세상의 축약이면서 한중심입니다.
‘나’는 축소된 우주― 소우주입니다. ‘나’는 이 우주 전체에 버금갈 만큼 소중합니다.
이러한 ‘나’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입니다.
로메다 님,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비하卑下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왜 아무개처럼 좋은 기억력을 못 가졌을까? 나는 왜 아무개처럼 얼굴이 예쁘지 않을까?
그러나 로메다 님,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개보다 기억력은 되질 지라고 상상력은 더 앞설 수 있고, 아무개보다 얼굴은 덜 예쁠지라도 종아리는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습니까?
내 생명체가 지닌 조건은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로메다 님,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지십시오. 당신은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이 세상의 주인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로메다 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이처럼 소중합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 소중합니다. 하나하나 그것들의 내력을 깊이 생각하면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의 내 얘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야가 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밝고도 아름다운 세상이 그대 앞에 펼쳐져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창조주가 마련한 그대의 정원이요. 당신은 그 정원의 주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월간『우리詩』9월호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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