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10회]
임보(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제27신]
감춤의 또 다른 시법―전이轉移에 관하여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사슴」전문
로메다 님, 널리 알려진 노천명의 「사슴」입니다.
긴 목과 화려한 뿔을 가진 외모와 함께 향수에 젖어 먼 곳을 바라보는 외로운 사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사슴에 관한 정보나 정서라기보다는 사실은 시인 자신에 관한 얘기입니다. 자신의 얘기를 사슴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지요. 자신이 지닌 과묵성, 고고성, 비극성 등을 사슴의 그것에 의탁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노천명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직설적인 자화상이 아니라 사슴의 형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려낸 자화상이지요. 이처럼 화자話者[시인]의 입장이 다른 사물이나 타자에게 옮겨서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감춤의 한 기법을 나는 전이轉移라고 부릅니다. 전이에 관한 다음의 「시의 은폐隱蔽 지향성․2」를 읽어보기 바랍니다.
상징과 더불어 전이轉移는 시에서 대표적인 감춤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전이의 사전적 의미는 ‘옮김’이다. 즉 어떤 상황의 공간적 이동을 뜻한다. 그러나 내가 시학詩學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의 의미는 다르다. 시인의 주체적 요소가 자신을 통해서 직접 표출되지 않고 사물이나 혹은 타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감춤의 한 표현 기법을 의미한다. 사물을 통해 표현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주체가 전이되는 경우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閏四月」전문
겉으로 보기에 이 작품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담담히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표현의 주된 대상은 깊은 산골에 사는 천한 산지기의 딸인 눈먼 처녀다. 불행의 극에 놓여 있는 한 인물을 화사한 봄을 배경으로 대조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다.
작자는 무슨 의도로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인가. 가만히 따져보면 표현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작자의 의도를 전혀 엿볼 수 없는 바도 아니다. 작자가 이 작품에 등장한 눈먼 처녀를 보다 비극적으로 그린 것은 바로 그 처녀에 대한 독자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처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허구적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설령 현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극적 변화를 일으킨 변질된 것이다. 말하자면 화자 자신의 ‘외롭고 불행한 인생’이 극적 인물인 눈먼 처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상된 것이다. 시인의 주체가 작품 속의 한 인물에 전이되어 감추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을 가지고도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고 모든 자유와 권리가 박탈된 식민치하에서의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얼마나 암담하게 느꼈겠는가. 우리는 그 눈먼 처녀에게서 불행하고 암담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화구畵具를 메고 산을 첩첩疊疊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峰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嶺우에 매점賣店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三冬내―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았다. 대폭大幅 캔바스 우에는 목화木花송이 같은 한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瀑布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눌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신이 나란히 노힌채 연애戀愛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박다博多 태생胎生 수수한 과부寡婦 흰얼골이사 회양淮陽 고성高城사람들 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賣店 바깥 주인主人된 화가畵家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松花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훨 청산靑山을 넘고.
―鄭芝溶 「호랑나비」
하나의 정사情死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름 없는 한 화가와 산장 매점의 주인이었던 한 과부가 한겨울 깊은 산 눈 속에서 사랑을 나누다 저 세상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의 변사체가 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진다는 얘기다.
신문기사로나 보도됨직한 하나의 사건이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신문에 보도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작자가 이 정사 사건에 대해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모든 문인들은 자연을 동경한다. 세속적인 욕망에 젖어 서로 헐뜯고 살아가는 소란하고 오염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조용하고 맑은 자연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 더욱이 그 자연이 청정한 눈으로 가득 덮인 깊은 산골이고 보면 이 얼마나 아늑하고 정결한 공간이겠는가. 그런 성지聖地에 때묻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곳을 바로 낙원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행복을 누리는 연인들은 그들의 그 지복至福한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 그들의 행복을 구원화久遠化한다.
정지용은 이 연인들의 죽음을 넘어선 구원한 사랑을 청산으로 날아가는 호랑나비 한 쌍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호랑나비」는 정지용의 청정무구한 자연회귀의 소망과 구원한 순애정신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한 화가는 곧 작자의 전이된 인물이다. 현실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작가의 욕망이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상징에서보다도 전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모습을 대상 속에 감추는 변장술이라고 할 수 있다.
―『엄살의 시학』pp.57~60
로메다 님,
사람이란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입니다. 어떤 욕망이 일어나도 체면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이를 억제하고 감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억제된 욕망이 꿈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된다고 프로이트는 설명합니다만, 시인의 경우는 상징과 전이의 기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징이나 전이 같은 감춤의 기법은 ‘숨어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데 화자가 자신의 몸을 숨기고 말하는 즐거움도 적지 않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독자들을 보면서 화자는 세상을 농락하는 쾌감을 맛볼 수도 있으니까요.
로메다 님, 가을빛이 짙어갑니다. 어제는 시를 좋아하는 몇 친구들과 함께 가을산을 보기 위해 화양동을 찾았습니다. 화양동은 충북 괴산에 자리한 아름다운 계곡입니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잡목들의 고운 단풍과 밑바닥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는 계곡의 맑은 물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자연처럼 아름다운 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들의 손에 의해 빚어진 시가 아무리 빼어나기로 한 떨기 꽃이나 단풍의 신묘한 빛깔에 이르기에는 얼마나 먼가를 새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시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가능한 한 자주 자연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 청정과 겸허와 조화를 배우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제28신]
역설의 시법
로메다 님,
그동안 감춤의 시적 장치인 은유와 상징 그리고 전이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불림의 시적 장치 중의 하나인 역설(逆說)에 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수한 우리말의 ‘불림’은 과장誇張 지향성을 의미합니다. 사실에 가깝도록 표현하고자 하는 산문과는 달리 시에서의 표현은 사실보다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에서는 과장된 표현이 적지 않습니다.
白髮三千丈 흰 머리털 삼천 발
緣愁似個長 시름 때문에 이처럼 자랐구나
不知明鏡裏 알 수 없구나, 거울 속 저 사람
何處得秋霜 어디서 그 가을 서리 얻었는가
―이백(李白) 「秋浦歌」일부
늙음을 한탄하는 이백의 시인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긴 백발을 두고 삼천 발이라고 표현했으니 실로 대단한 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두고도 알 수 없다고 말한 것 역시 과장입니다. 시에서는 이처럼 과장이 능사로 구사됩니다. 물론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이러한 직접적인 과장법 외에도 시에서 즐겨 구사되는 역설逆說 역시 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설은 논리적인 모순을 담고 있는 언술입니다. 그러나 시에서의 역설은 논리를 뛰어넘는 가운데 진실을 드러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설법입니다. 우선 시의 역설에 관한 다음의 글을 읽어보도록 하십시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지닌 진술이다.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함성‘이니 ’사랑의 증오‘니 ’군중 속의 고독‘이니 하는 등의 소위 모순어법(oxymoron)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런데 이 역설은 겉으로 보기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을 지닌 언술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물의 핵심을 짚어 의표를 찌르는 함축된 발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역설을 ‘모순되는 두 사실의 대응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달음을 계시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특히 시에서는 이 역설적 발언이 널리 원용되고 있다.
C. Brooks는 현대시의 구조를 아예 ‘역설(paradox)’로 파악기도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부분
이 시의 진술 내용을 요약하면 소쩍새 울음소리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소쩍새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나 이 언술의 모순적인 표층 구조와는 달리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실로 얼마나 많은 사물들의 총체적인 협조를 필요로 하는가. 빛과 공기와 물과 그리고 여러 가지 영양소들―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유기물들의 섭취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는 전 우주적 요소들의 결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생명체(국화)의 원숙한 성취(꽃)는 긴 세월(봄, 여름) 동안의 많은 고뇌(소쩍새 울음)와 시련(천둥)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심오한 자연의 이치가 짧은 몇 마디의 역설적 진술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이 시의 묘미다. 만일 이를 산문으로 설명코자 한다면 수 천 개의 단어를 동원해도 만족스럽게 표현키 어려울지 모른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부분
기름이 타서 재가 된다. 그런데 그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화자의 치열한 심리를 절실하게 표현하는 기능을 지닌다. 즉 끝없이 불타는 가슴을 처절히 극대화하고 있다. 기름이 재가 되고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타는 반복적 소진燒盡을 통해 생명의 완전 연소燃燒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애타는 가슴의 그 절박함을 이보다 어떻게 더 절실히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역설의 기능이다.
고도高度의 은유隱喩도 역설의 기능을 지닌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부분
주지(겨울)와 매체(강철로 된 무지개)가 주술主述 관계 곧 등가等價의 구조로 이루어진 은유다. 그런데 주지와 매체의 공유소동일성는 추출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주지와 매체가 동일성이나 어떤 유사성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적(폭력적)으로 결합시킨 고도의 비유다.
매체인 ‘강철로 된 무지개’ 역시 ‘강철의 무지개’와 같은 의미 구조를 지닌 것이니까 수식어와 피수식어어의 관계로 맺어진 결속의 은유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구는 이중으로 된 복합 은유 구조를 지닌 셈이다.
겨울이 무지개라든지, 그 무지개가 강철로 되었다는 진술이 다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두 개의 역설을 이중으로 얽어 짠 문장이다.
또한 ‘겨울’은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당대의 괴로운 시대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시대(겨울)는 화자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강철)이긴 하지만, 생각하면 인생이란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무지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체념으로 해석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山河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졸시 「병甁」 전문
내가 쓴 선시仙詩 중의 하나다.
차고 다닌 호리병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 속에는 누군가 들어앉아서 술을 빚어대고 있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정황이다.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의 시급한 과제는 의식주의 문제다. 그 가운데서도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다. 달팽이처럼 가벼운 집을 달고, 좋아하는 음식과 사랑을 데불고 유유자적 떠도는 삶을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스러운 삶인가.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것이 「병」이다. 선시仙詩는 실현시킬 수 없는 지상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우리들의 꿈의 기록이라면 그리고 그 꿈이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시가 당연히 역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역설逆說의 구조」『엄살의 시학』pp.65~68
로메다 님,
세계는 당초부터 모순에 차 있는 역설적 구조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주의 구조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유한하다고 할 수도 없고, 무한하다고 할 수도 없는 모순 구조입니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빛과 그늘, 삶과 죽음,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등 상반된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세상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진면목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가 역설의 어법에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언어 자체도 모순과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편리한 의사 전달의 도구이기는 합니다만 사물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지칭할 뿐 사물 자체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로메다 님,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나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과’라는 말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과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언어입니다. 로메다 님, ‘사과’라고 했을 때 어떤 영상이 머리속에 떠오릅니까? 달고 새큰한 맛을 지닌, 불그스레한 둥근 과일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과들은 다 다릅니다. 붉지 않은 사과도 있고 달지 않은 사과도 있습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하나의 사과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유일한 사과가 지닌 특성을 ‘사과’라는 일상적 언어는 드러내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시인들은 언어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발버둥칩니다. 그것이 은유며 역설 등의 화법을 낳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시는 언어이면서 언어이기를 거부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는 곧 시에서 구사하는 언어가 일상적인 관념어가 아니라 사물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개별어(사물어)를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에서의 역설은 일상적 관념어의 껍질을 깨뜨리는 반란의 한 유형입니다.
로메다 님, 이해를 돕기 위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더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나요?
이해하기 까다로우면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습니다. 비록 역설의 원리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를 구사할 수만 있으면 되니까요.
역설은 비꼬면서 들이미는 강력한 말입니다. 마치 나선형의 나사못이 돌면서 들어가 박히는 것처럼―.
정진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제29신]
시의 율동적 요소―율격에 관하여
로메다 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와 달을 위시해서 광활한 우주공간에 널려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체들이 한순간도 쉼이 없이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운행합니까?
봄․여름․가을․겨울, 4계의 반복은 지구의 공전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낮과 밤의 무궁한 교체 반복 현상 역시 지구의 자전이라는 운동 때문이 아닙니까? 일정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천체의 운행은 규칙적입니다. 춘하추동 그리고 주야의 규칙적인 반복은 리듬의 속성을 지닙니다.
리듬은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되는 변별적 인지현상이 만들어낸 감각입니다. 세계의 모든 운동들은 등장성을 이상으로 하는 율동(律動, rhythm)을 지향합니다. 생명체들의 생리적인 운동을 보십시오. 맥박의 고동과 호흡의 양상이 그렇고 보행步行의 동작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얘기한 ‘대우의 구조’가 사물의 가장 보편적인 공간적 존재 양상이라고 한다면, ‘율동(律動, rhythm)은 사물의 시간적인 존재 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간적인 거리의 측정을 잣대를 가지고 하는 것처럼 리듬은 시간적인 구조를 인식하는 척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 분, 시간 등 관념적인 단위를 설정하여 시간을 파악하지 않던가요?
아무튼 인간들은 리듬이라고 하는 율동적 구조에 길들어 있습니다. 태초로부터 되풀이되는 사계나 주야와 같은 천체의 율동적 환경 속에 살아오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인간들은 태어나기 전부터서 모체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자라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리듬이 우리의 몸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리듬은 세계 구조의 중요한 배경이면서 생명체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리듬은 우리에게 친근과 화평의 정서를 불러일으킵니다. 시의 언어가 리듬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시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아름다운 글이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의 리듬―율동적 요소를 운율韻律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운율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한 장치인 율격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시의 율격律格」을 읽어 보도록 하십시다.
시에서의 주도적인 음악적 요소는 운율韻律이다. 주지하다시피 운율은 압운押韻과 율격律格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압운은 동일한 소리가 되풀이되면서 만들어낸 해조諧調 현상이고, 율격은 동일한 소리의 성질이 되풀이되면서 빚어낸 율동 현상이다. 말하자면 소리의 고저高低나 장단長短 혹은 강약强弱 등의 성질이 율격 형성의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에서의 율격 구조는 어떤 것일까.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조윤제의 자수율론(1930)에서부터 비롯된다. 그 뒤 정병욱의 강약률론(1954)이 대두되고 나아가서는 고저율, 장단율까지를 우리 시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우리 시의 율격을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시의 율격은 음수音數에 의해 측정될 수밖에 없다는 이론으로 귀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시의 음수율은 정형시인 시조에서조차도 고정된 틀을 지닌 것이 아니어서 음수로 따지기보다는 낭독할 때 어우러지는 소리의 마디[音步]를 기준으로 율격을 논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시의 음보는 대개 어절 중심으로 분할이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 시의 음보가 단순히 음성적 요소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적 요소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말의 한 어절은 4음절이 가장 많다. 따라서 가장 자연스런 한 음보의 음량은 4음절이 된다. 그래서 2음절미만의 어절들이 겹쳐 이어지면 두 어절이 합하여 하나의 음보를 만들기도 하고, 5음절이상의 긴 어절인 경우는 어절의 중간을 분할하여 두 음보로 읽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따져볼 때 우리의 전통적인 시조나 가사문학은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것으로 판명된다. 그래서 4음보를 우리 시의 전통 율격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시에 전통적 율격이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한 일일까? 현대시가 형식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운율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일언이폐지하여, 운율은 시와 산문을 변별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같은 내용의 것이라면 운율에 실려 표현되는 작품이 보다 감동적이다. 자신의 작품이 보다 감동적으로 독자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 시인이라면 운율의 거부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시인이 형식의 자유를 빙자해서 안이하게 작품을 만들려 한다면 이는 게으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감동적인 작품들은 거의 운율과 무관하지 않다. 소월이나 미당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이러한 사실을 극명히 보여 주고 있다.
미당의 「부활復活」은 행의 구분이 없이 쓰인 산문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신중히 읽어보면 놀라운 율격적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음보/ 2음보/ 3음보/ 4음보/ 5음보/ 6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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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너를/ 찾아왔다/ 臾那.//
2) 너참/ 내앞에/ 많이/ 있구나//
3)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걸어가면//
4) 사방에서/ 네가/ 웃고 / 오는구나//
5) 새벽닭이/ 울때마닥/ 보고/ 싶었다…//
6) 내/ 부르는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7) 臾那/ 이것이/ 멫 萬時間/ 만이냐.//
8) 그날/ 꽃喪阜/ 山넘어서/ 간다음//
9) 내눈동자/ 속에는/ 빈하늘만/ 남드니,//
10) 매만저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드니//
11) 비만/ 자꾸오고…//
12) 燭불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 열고가면//
13) 江물은/ 또/ 멫천린지,//
14) 한번가선/ 소식없는/ 그어려운/ 住所에서//
15)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16) 鐘路/ 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저서,//
17)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애들.//
18)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애들.//
19) 그들의/ 눈망울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어//
20) 臾那!/ 臾那!/ 臾那!//
21) 너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구나.//
음보의 한계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개인에 따라 약간의 이견異見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위의 분석에서 보는 것처럼 4음보가 주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문시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감동적으로 읽혀지는 것은 이러한 율격구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현대시에 전통적인 4음보만을 구사하자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현대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율격을 창출해 낼 수도 있다. 소위 7․5조류의 3음보(4음보로 보는 견해도 있음)는 전통적인 율격이 아닌데도 1910년대 육당六堂으로부터 시도되어 안서岸曙와 소월素月 그리고 미당未堂에 이르는 별로 길지 않은 과정을 거쳐 우리의 성정에 맞는 새로운 율격 형태로 자리잡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시는 산문과는 달리 다양한 규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인 언술이다. 그러한 규제들이 시를 상급문학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는 아무런 규제도 없다. 시와 시 아닌 글의 경계가 무너져 가고 있다. 우리 시에서 시의 위상을 우선 율격의 회복에서부터라도 다시 찾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엄살의 시학』pp.73~76
자주 하는 얘기지만 자유시라고 해서 율격으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큰 잘못입니다. 자유시는 정형적인 율격의 틀로부터 벗어난 것이지 율격을 벗어난 것은 아니니까요. 말하자면 자유시는 동일한 작품 속에 다양한 율격 형태가 허용된 시일뿐입니다.
긴 생명을 가진 작품들 가운데 운율의 힘을 빌지 않는 시란 없습니다. 시와 운율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자유시와 운율의 관계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유시란 매 작품마다 그 내용에 가장 적절한 형식―곧 새로운 운율 구조를 만들어 가는 시라고―.
자유시를 마치 자유방임의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큰 착각입니다. 자유시는 정형시에서보다 더 시인의 책임과 노역을 필요로 합니다. 자유시는 정형시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매 작품마다 실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로메다 님,
운율의 이론이 까다로우면 그냥 이렇게 이해하십시오. 자연스럽게 읽힐 수 있도록 쓰면 된다고. 우리의 몸은 이미 운율을 감지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것은 이미 운율에 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詩』 12월호에서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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