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8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제21신]
생명 시학 서설
로메다 님,
지난번에 ‘나’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장황하게 말씀드렸지요?
‘나’는 전 과거적(혈연적) 요소와 전 공간적(우주적) 요소가 결집된 ‘소우주’라고 말했습니다.
내 생명관에 공감하신다니 반갑습니다.
나는, ‘삶’― 곧 ‘생명 작용’을 ‘객체의 주체화’, 혹은 ‘세계의 자아화’ 현상이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는 다음의 내 글「생명시학生命詩學 서설序說」을 읽어보면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인용한 글의 내용 가운데는 지난번에 이미 얘기한 바와 중복되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면 중복되는 부분은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합니다.
생명 작용, 즉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자아확대自我擴大의 움직임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객체客體의 주체화主體化 활동, 곧 생명체 속에 세계성을 끌어 모아 축적해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금방 수긍이 갈 것이다. 가장 원초적 본능은 식욕食慾과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이다.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체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생명체 내부로 끌어들이는 행위다. 먹는다는 것은 객체의 주체화 작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동작이다. 호흡呼吸도 주체화 작용의 하나다.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처럼 동물들도 태양의 햇볕과 우주 공간의 여러 요소들을 체내로 끌어들여 자아화自我化한다. 이처럼 생명체는 세계가 지닌 요소들을 그의 몸속에 집약시킨다. 곧 세계성의 축적을 꾀한다.
우리의 몸은 전 우주적 요소들의 총화에 의해 형성된 신비로운 존재다.
생명 작용의 정지―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체의 몸, 곧 육신의 확산을 의미한다. 몸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이 이제는 몸을 떠나 그것들이 왔었던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져 되돌아가는 환원을 뜻한다. 흩어지는 몸은 우주 속에 스미고 스며 장차 우주를 가득 채운다.
그러므로 한 생명체의 몸은 우주 공간의 모든 요소들이 집약되었다 흩어지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 곧 양성兩性의 결합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종족 번식의 이 방식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 역시 세계성 확장에 그 의미가 있다. 양성의 결합은 두 세계의 통합을 의미한다. 자식은 부모의 두 세계성을 통합하여 공유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조상들의 세계성을 통합하여 내포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우리는 두 부모의 세계성뿐만 아니라 네 조부모, 여덟 고조부모들의 세계성을 아울러 통합 공유하고 있다.
600년 전 그러니까 20세대 전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나 하나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는가? 2의 20승, 곧 100만 명이 넘는다. 이들 중 어느 한 분만 없었어도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명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통합 속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생명의 역사, 생명의 끈은 몇 백 년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주에까지 이른다. 따라서 한 생명 속에는 과거 전 조상의 세계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전 과거 조상들의 집약체며 수렴점이다.
또한 미래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두 자녀를 갖게 되고, 그 자녀들이 또한 두 자녀씩을 갖게 된다면 600년 후에 내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의 수효가 100만 명이 넘게 된다. 인류의 미래가 얼마쯤 지속될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된다. 말하자면 미래 인류들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진다.
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인가. 나는 전 과거 인류의 집합이면서 전미래 인류의 출발점에 있다. 나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생명체가 지닌 모든 감각 기관들(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은 주체화의 대상인 객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먹이와 이성을 찾는데 필요한 탐색용 레이더들이다. 생명체의 모든 활동 역시 주체화, 곧 자기 확대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도 이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 활동은 타인들에 대한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이요, 경제 활동은 물질들에 대한 소유욕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도 자아 확대를 위한 객체들의 탐색 작업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도 자아를 내세來世에로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에 뿌리하고 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언술言述 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아 확대를 위한 욕망의 표현이다. 문학은 자아 확대, 곧 대상 성취의 욕망이 기술적으로 표현된 언술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 간단히 말하면 문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서경書經의 저 유명한 <詩言志>의 '지志'도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소망'의 의미로 파악된다.
그런데 문제의 관건은 '기술적'이라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시, 소설, 희곡 등의 장르를 갈라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면 시가 되게 하는 기술적인 요인들, 곧 시적 장치란 어떤 것인가?
나는 시적 장치의 특성을 우선 '감춤'과 '불림'과 '꾸밈'이라고 지적해 본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은폐 지향성'과 '과장 지향성' 그리고 '심미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등의 기법으로 나타나고, 중자는 비유比喩, 의인擬人, 역설逆說 등의 수사에서 드러나며, 후자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대구對句나 대조對照 그리고 운율韻律 장치로 표현된다.
나는 이 세 가지 시적 장치의 특성을 포괄하여 '엄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망하는 내용의 품질과 엄살을 부리는 격조에 따라 시의 품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격이 있는 시가 어려운 것은 소망에 대한 단순한 기술적 언술이라는 한계를 넘어 구도자적 정신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픔을 꽃으로 피우나』(우이동 시인들, 제14집, 1993.)
로메다 님,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아화(주체화)의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아니, 지상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자아화의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단하게 굳어 있는 한 덩이의 돌을 보십시오. 그 돌의 입자들이 얼마나 힘 있게 서로 달라붙어 끌어안고 있습니까? 조수를 움직이는 달의 인력引力이 얼마나 대단한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상이 지니고 있는 자아화의 의지는 무생물보다는 생물에게서 더 강하게 느낄 수 있고, 생명체 중에서도 식물보다는 동물에게서 더 강렬하게 드러나며, 동물 가운데서도 인간들에게서 가장 적극적으로 실현됩니다.
자아화의 욕망 의지가 없는 인간 활동은 없습니다. 강도强盜나 정복征服처럼 그 욕망이 양성적으로 드러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음성적으로 감추어져 실현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숨어서 베푸는 자선慈善이나 보시布施도, 성현聖賢들의 자비로운 종교적인 활동까지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 보면 세상을 자기의 품에 안겠다는 실로 놀라운 자아화의 욕망에서 발현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쓴 글들도 다 그런 욕망의 소산입니다.
로메다 님,
백로를 넘어서자 날씨가 한결 시원해졌습니다. 머지않아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풍요의 계절이 오겠군요. 이 계절과 함께 풍성한 수확 거두시길 기대합니다.
[제22신]
시정신에 관하여
로메다 님,
나는 지난번에 모든 사물은 자아화自我化의 의지를 지녔다고 주장하면서 사물 가운데서도 생명체가, 생명체 가운데서도 인간이 가장 적극적으로 자아화의 의지를 실현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아화의 욕망에 근거한다고 했지요?
문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언어'라는 정의도 기억하시지요? 그 ‘기술적’이라고 하는 것이 문학의 장르를 갈라놓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야기의 형식’이면 ‘소설’이 되고 ‘대화의 형식’이면 ‘희곡’이 되는 식이지요. 그렇다면 시의 ‘기술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나는 이를 시적 장치라고 명명하면서 '감춤(은폐지향성)'과 '불림(과장지향성)'과 '꾸밈(심미지향성)' 이 세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이 시적 장치를 우리의 고유어인 ‘엄살’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는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은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소망’ 곧 ‘자아화의 욕망’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자아화의 욕망은 객체의 주체화 곧 대상 성취의 욕망이라고 했지요? 식욕이라든지 이성에 대한 욕망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공통적으로 지닌 본능적 욕망입니다. 한편 인간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물욕物慾이라든지,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출세욕(명예욕)과 같은 세속적 욕망을 갖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참 미묘한 존재여서 이러한 본능적 욕망이나 세속적 욕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지향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를 초월적 욕망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진․선․미에 가치를 부여하고 친 자연親自然, 절조節操, 염결廉潔을 소중히 여기는 등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욕망입니다. 이 초월적 욕망은 물론 범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승화된 욕망입니다.
로메다 님,
시 속에 담겨 있는 욕망들 역시 이 세 가지 유형(본능 ․ 세속 ․ 초월)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소위 가작佳作이라는 평판을 얻은 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욕망은 거의 ‘초월적 욕망’에 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본능적․세속적인 욕망을 초월하고자 하는 상급의 정신 영역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기공인技工人이기에 앞서 상급의 정신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수도자적 수련을 거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로메다 님,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초월적 욕망― 나는 이것을 ‘시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초월적 욕망을 말하면서 진․선․미와 친 자연, 절조, 염결 등을 거론했는데 이러한 정신은 일찍이 우리의 선조들이 높이 샀던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들입니다. 나는 이 선비정신을 시정신과 동궤의 것으로 잡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바람직한 우리시의 시정신을 선비정신으로 삼고자 합니다. 지난번 [제13신]에서 우리가 감상한 바 있던 박목월의 「산도화․1」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산은/ 九江山/ 보랏빛 石山//
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그때 나는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시대이거나 시인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불만스럽기만 하다.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질시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 세태는 증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거부 정신이 이상향을 꿈꾸게 한다. 「山桃花․1」은 목월이 꿈꾸는 이상 세계다. 그것은 전통적인 선仙의 세계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적인 경향은「청노루」「모란여정」등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두 개의 생명체 '산도화'와 '사슴'은 자연물이면서 한편으론 시적 자아가 전이轉移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산도화나 사슴처럼 초연․정결한 생명체로서 자연과 합일코자 하는 시인의 선망이 두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월은 자아의 사물화(산도화․사슴)로 세속적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로메다 님,
「산도화․1」에 담겨 있는 시정신 곧 초월적 욕망은 청정무구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능적이고 세속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기에는 고고한 선비의 기상이 서려 있습니다.
로메다 님, 이제 ‘바람직한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시도해 볼까요?
좋은 시는 ‘시정신(선비정신)이 시적 장치(엄살스럽게)를 통해 표현된 짧은 글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참고로 ‘시정신’에 관해 내가 쓴 다른 글이 있어 첨부해 보냅니다.
추석이 가까워 왔군요. 즐거운 한가위 지내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시정신에 관하여
시정신이란 말이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시정신인가를 따져 물으면 그 대답이 석연치만은 않다.
시정신이란 작게는 개별적인 시 작품들 속에 내재해 있는 정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크게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문학의 정신적 특성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편의상 전자를 협의의 시정신 그리고 후자를 광의의 시정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모여 한 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시정신이 그 시대의 시정신을 형성하게 되며, 시공을 초월해서 시인들이 지닌 보편적인 시정신이 시문학의 특성을 드러내는 광의의 시정신이 된다.
따라서 협의의 시정신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면 광의의 시정신은 보편적이며 종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시에서의 정신 같은 것을 아예 무시하려고도 한다. 즉 예술은 기술이 문제니까, 언어 예술인 시도 언어를 잘 다룰 수 있는 기교적인 것만 중요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나무를 잘 다루는 목수처럼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만 있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러나 목수가 만든 가구 속에도 정신이 들어 있다. 속된 정신이든 고매한 정신이든 정신적인 요소가 배어 있게 마련이다. 보통의 목수가 만든 가구와 인간 문화재급의 장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것은 분명 풍격風格이 다르다. 기술의 수준에서 오는 차이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인품과 정신력이 크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의미를 지닌 언어 구조물인 시가 작자의 정신적 세계와 무관하다는 생각은 납득할 수 없는 견해다. 하찮은 잡문 속에도 글쓴이의 넋이 서려 있거늘 하물며 언어 예술의 정수라고 하는 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무릇 모든 발언은 발화자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고자 언어를 구사한다.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목적의식을 욕망의 실현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시라는 형식의 언술도 분명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시는 시인의 욕망 실현의 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를 통해 실현코자 하는 시인들의 욕망은 보통 사람들이 언술을 통해 실현코자 하는 욕망과는 같지 않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흉금을 울려온 좋은 시들을 살펴보건대 그 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맑고 깨끗한 승화된 욕망이다. 나는 이를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이 시정신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절조節操를 중요시하는 선비정신과 상통한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나는 앞에서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개인의 시정신들이 모여 광의의 시정신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귀납적인 논리와는 달리 반대로 연역적인 논리도 가능하다. 즉 한 시대가 요구하는 시정신이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어서 그러한 시정신을 바탕으로 한 개별적인 작품들을 생산해 내게도 할 수 있다. 귀납적인 논리는 결과를 중요시하고, 연역적인 논리는 원인을 중요시한 사고다. 전자는 시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라면 후자는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다.
오늘의 한국시단을 나는 부정적으로 진단한다. 시에서 감동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시가 읽는 이에게 흥겨움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답답함과 괴로움을 안겨준다. 시가 욕설인가 하면 말장난이요, 잡배들의 장타령처럼 난삽한가 하면 술 취한 자의 주정처럼 거친 푸념 같기도 하다. 시가 이처럼 퇴락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그 원인을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무분별한 모방 행위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하자면 고매한 시정신의 상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시에는 청렬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흔치 않다.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닌 시인들이 많지 않다.
오늘날 실추된 시의 위의威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급선무다. 양질의 상품 생산을 독려하는 운동이 있는 것처럼 오늘의 시단에 청렬한 시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떤 이는 ‘자유’를 핑계 삼아 청렬한 시정신으로 우리시의 정체성을 수립하자는 데 선뜻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시가 어디로 가든 오불관언 방관 방치한다면 이는 태만을 넘어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는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이 어찌 우리의 소중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않게 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수행자여야 한다.
―『우이시』제181호(2003. 6.)
[제23신]
시와 반시半詩와 비시非詩
로메다 님,
어떻게 추석은 잘 지내셨나요? 책에 매달려 지내느라고 둥근 달을 쳐다볼 겨를도 없었을지 모르겠군요. 어느 분이 내게 보내준 아름다운 달의 카드가 있어서 다시 보내니 잠시 그림 속의 달이나마 바라다보면서 마음의 평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코스모스 위로 돋아난 만월 풍경)
어떻습니까?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잎들 위로 서서히 돋아나는 달의 모습이 얼마나 평온합니까? 좋은 시는 만월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교에서는 그 법을 일러 천의 강을 비추는 달[月印千江]에 비유하기도 합니다만 좋은 시 역시 만인의 가슴에 드리우는 만월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달은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세상을 밝히는 밤의 등불입니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초연하게 천공에 떠서 묵묵히 그의 길을 갑니다. 시도 세상을 좌우할 만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보다 부드럽고 맑게 교화하는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달이 그 기능을 충분히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밝음’이요, 다른 하나는 그 ‘둥긂’입니다. 아무리 달이 밝더라도 만월이 채 못 된 반달이면 세상을 충분히 밝힐 수 없습니다. 한편, 아무리 만월일지라도 구름이 가려 그 밝음이 흐리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달의 밝음은 그 내용이고, 달의 둥긂은 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지난번에 시의 내용과 형식에 관해 얘기한 것 기억하시지요?
시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을 ‘시정신’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시의 형식에 해당하는 것을 ‘시적 장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를 상기하면서 다음의 글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전략) ― 앞의 글에서 나는 시를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했다. ‘소망’은 시의 내용이 되고 시적 장치인 ‘엄살스럽게’는 시의 형식이 된다. 그런데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소망의 질(質)이다. 말하자면 일상적 언술에서의 소망과 시적 언술에서의 소망의 질을 달리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소망―시인이 구현코자 하는 것은 일상인들의 세속적인 욕망과는 격을 달리한다. 승화된 욕망이라고 할까. 어쩌면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에의 소망에 가까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소망이 ‘구도자적 정신세계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보았다. 시를 만들어 내는 그런 승화된 욕망을 나는 ‘시정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러니까 그 시정신은 시인 정신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적인 평가를 받아 온 양질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는 시정신은 건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진위眞僞와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하는 비판 정신이며,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 정신이며, 탐미적眈美的인 창조 정신으로 수렴된다. 말하자면 진眞, 선善, 미美를 추구하는 고결한 정신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러한 정신의 전범을 우리의 옛 선비들에게서 본다. 시정신은 곧 선비 정신이라 이르고 싶다. 거기에는 또한 염결廉潔과 지조志操가 따른다. 시인을 언어를 부리는 단순한 기능인만으로 보지 않고 구도자적 반열에 올려놓고자 하는 소이가 또한 여기에 있다.
시를 지향한 글들의 유형을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우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 세속적 욕망이 일상적(비시적) 진술 형태로 표현된 글
(나) 세속적 욕망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
(다) 시정신(승화된 욕망)이 일상적 진술 형태로 표현된 글
(라)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
(가)의 경우는 내용과 형식 공히 시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글이므로 시라고 할 수 없다. (나)는 형식만 시적 조건을 갖춘 경우이고 (다)는 내용만 시적 조건을 갖춘 경우가 된다. 나는 이와 같은 글들을 반시半詩라고 칭한다. (라)의 경우가 내용과 형식 모두 시적 조건을 갖춘 것으로 바람직한 온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 시단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량의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비시非詩나 반시半詩가 아닌 온전한 시작품들이 얼마나 생산되고 있는 지는 모를 일이다.
―「시정신 그리고 비시와 반시」『엄살의 시학』pp.152~154
로메다 님,
밝고 둥근 달이 온전한 만월인 것처럼 온전한 시란 내용과 형식이 다 갖춰진 즉 승화된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입니다.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한쪽만 갖춰진 시는 밝지 못한 달이거나 찌그러진 반달과 같습니다. 그래서 절반의 시 반시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용도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글은 밝음도 형태도 잃어버린 그믐달과 같아서 시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메다 님, 처음부터 온전한 시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터득하여 개선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시정신은 우리가 쌓아 가는 인품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고도의 시정신에 도달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메다 님,
고도의 시정신에 이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말에 실망하셨나요? 그러나 너무 조급히 서두르지 말고 마음을 좀 느긋하게 가지십시오. 당신이 얻고자 하는 시는 긴 생명을 가진 글이 아닙니까? 응분의 공력도 드리지 않고 좋은 작품만 쉽게 얻고자 한다면 이는 과도한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100년쯤 버틸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쯤은 공을 들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로메다 님, 너무 낙망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예기치 않은 행운이 다가와 우리의 인생을 전복시키듯이 시의 행운도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찾아와 우리의 창문을 두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문운을 빕니다.
- 월간 『우리詩』10월호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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