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5회] 대우의 시법 外

by 丹野 2011. 1. 1.

 

 

임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연재 5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시 창작

 

교실   

[제12신]

 

 

대우의 시법

 

 

 

 

 

로메다 님, 과제를 아주 썩 잘 하셨습니다.

네 계절에 대한 이미지를 붙잡아 병치구조의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했는데,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 냈군요.

 

따스한 양지녘에 돋은 제비꽃

 

삼복염천에 타는 자미화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과일

 

천지를 희게 덮은 백설

 

이른 봄에 피어나는 앙증스런 제비꽃, 한여름의 요염한 목백일홍, 그리고 가을의 풍성한 과일과 겨울의 눈을 지적하셨군요. 붙들어낸 이미지들이 특별히 경이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크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린다면 봄(제비꽃)과 여름(자미화)이 둘 다 꽃으로 겹치니까 어느 하나를 꽃이 아닌 다른 사물로 바꾸면 좀더 다양한 느낌이 들겠지요? 여름은 꽃보다는 잎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자미화’ 대신 ‘포플러’쯤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까요. 봄과 여름이 꽃이니까 이에 맞추어 가을과 겨울도 꽃으로 통일해 보는 것입니다. 가을은 ‘국화’가 쉽게 떠오르지요? 제3연을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국화’로 하면 어색한가요? 그렇다면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노랗게 피어나는 탐스런 국화’쯤으로 해 두지요. 그리고 겨울은 ‘눈’ 대신 ‘눈꽃’이나 ‘설화雪花’로 표기만 바꾸면 되겠군요. 이렇게 고치려는 것은 일관된 통일의 조화를 지향코자 해서입니다.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은 조화와 균형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율격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제1연과 제3연은 소위 7․5조라고 하는 율격의 틀에 맞는 구조입니다. 제2연은 5․5입니다만 읽기에 큰 불편이 없으므로 7․5조의 변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제4연의 율격구조는 7․2가 되어 읽기에 좀 어색하지요? 7․5조의 율격구조에 맞추려면 한 어절(음보)쯤 늘려야 합니다. ‘눈꽃’ 앞에 한 어절을 넣어 ‘삼동의 눈꽃’으로 하면 7․5조에 맞게 떨어집니다. 시의 운율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세계는 사물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을 위시해서 삼라만상의 자연물들이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에서의 병치구조는 가장 자연스런 세계 구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엔 시에서 즐겨 구사되고 있는 대우對偶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우는 ‘짝 이룸’입니다. 두 개의 사물이나 정황을 나란히 늘어놓는 기법인데 대구對句라고도 합니다.

 

가) 산은 높고

물은 맑다

 

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가)는 산의 높음과 물의 맑음이, 나)는 인생의 짧음과 예술의 긺이 나란한 대우의 관계로 놓여 있습니다. 특히 ‘짧’고 ‘긺’의 상반의 관계에 있는 나)와 같은 경우를 대조對照라 이르기도 합니다. 대우의 원리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다음의 글을 우선 읽어보도록 하지요.

 

삼라만상의 형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얼굴이나 식물의 잎을 보라. 얼마나 균형이 잘 잡힌 대칭을 이루고 있는가. 조류와 어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곤충과 같은 하찮은 미물들 역시 경이로운 대칭의 몸매를 지니고 있다. 생명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자나 분자의 구조도 그렇고 천체의 형상도 또한 그렇다. 가장 완전한 대칭의 구조는 구인데, 원자나 별들은 바로 그 균형의 이상적인 형상인 구형으로 되어 있다. 대개의 과일들 역시 구형을 지향하는데, 이는 가장 조화로운 상태를 추구하려는 생명의 자연스런 욕구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물건들 거의가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대칭의 구조를 지닌 것들이다. 모든 그릇이며 도구들이 다 그렇지 않던가. 그러니 시에 있어서도 그것이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려면 대우의 구조를 거부할 수 없으리라. 아니 대우는 만상의 존재 원리이기도 하다. 만상은 다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천지, 상하, 좌우, 주야, 남녀 등 다 짝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서로 같이 있음으로 서로를 함께 드러낸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존재 의미가 없다. 대우는 그러한 세계의 구조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우는 만상의 구조 원리를 단순히 답습하는 것으로 끝나는 기법만은 아니다. 시인은 대우의 구조를 통해서 창조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다. 대우 곧 짝을 짓게 하는 일은 세계를 정돈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잡다한 사상事象들이 혼재해 있는 부조리한 세계를 정리 정돈한다. 불필요한 것들은 삭제해 버리고 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선택하여 나란히 배열함으로 해서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엄살의 시학』 p.63-64

 

로메다 님,

인용한 글의 요지는 사물이 대칭의 구조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도 대우의 구조를 지녔을 때 우리의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대상들만 선택해서 나란히 늘어놓는 대우의 작업이야말로 시인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세계를 개편하는 창조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시의 절구絶句에서는 압운押韻과 함께 이 대우가 시를 엮는 중요한 기법으로 요구됩니다.

 

江碧鳥逾白 (강물이 퍼러니 물새는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 (산빛이 푸르니 봄꽃은 불붙듯 붉네)

今春看又過 (어느 덧 이 봄도 또한 지나가나니)

何日是歸年 (어느 제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

 

두보(杜甫,712~770)의 유명한 절구입니다. 앞의 두 행이 절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과 산의 자연, 새[鳥]와 꽃[花]의 사물, 그리고 퍼러다[碧]와 푸르다[靑], 흰 색[白]과 붉은 색[然=燃]의 색채적 대조가 놀랍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화사한 봄의 정경을 조화롭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뒤의 두 행에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운 심회를 읊습니다. 앞의 화사한 정경과는 사뭇 다릅니다. 흔히 말하는 한시의 전경前景[1,2행]과 후정後情[3,4행]의 정황이 또한 대조적으로 엮어지면서 서로를 두드러지게 드러내 보입니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따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도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宇宙(우주)는 죽음인가요

人生(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金(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黃金(황금)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天國(천국)의 꽃을 꺾던 幻想(환상)의 女王(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金(금)실과 幻想(환상)의 女王(여왕)이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의 속에서 情死(정사)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宇宙(우주)는 죽음인가요

人生(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한용운 「고적한 밤」 전문

 

전체가 빈틈없는 대우의 구조로 엮어진 작품입니다. 첫 두 행만 보더라고 각 행내行內에 대칭[하늘과 땅, 남과 나]을 이루고 있고, 다시 행간行間의 대칭[자연과 인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대칭의 구조가 작품 전편을 지배하며 전개됩니다. 이와 같은 대칭구조의 반복은 의미의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나는 이러한 의미율을 내재율의 한 유형으로 다룬 바도 있습니다. (졸저『현대시운율구조론』(태학사, 1999.) pp.92~114)

 

로메다 님,

시뿐만이 아니라 산문에서도 대우의 기법을 즐겨 씁니다. 좋은 산문치고 대우의 기법을 구사하지 않은 글은 없습니다. 훌륭한 문필가는 대우의 기법을 잘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메다 님,

대우의 기법을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말기 바랍니다. 정진을 기대합니다.

 

 

 

[제13신]

배경과 대상과 정황의 구조

 

로메다 님,

지난번에는 병치와 대우의 시법에 대해서 얘기했었지요? 오늘은 ‘배경과 대상과 정황’의 구조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물을 노래한 시는 대개 ‘어디에 무엇이 어찌한다(혹은 어떠하다)’의 구조를 지닙니다.

예를 들자면

 

가) ‘산에 나무가 푸르다’ 든지

나) ‘강물에 물고기가 논다’ 라는 구조입니다.

 

가)는 상태에 대한 서술인 ‘어떠하다’이고, 나)는 동작에 대한 진술인 ‘어찌한다’입니다.

모든 문장은 이러한 골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여기에 수식어가 붙기도 하고 혹은 자리바꿈을 하면서 변화로운 문장으로 발전합니다.

시적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인 박목월의 「산도화․1」을 볼까요? 두 개의 ‘배경과 대상과 정황’이 병치된 아주 단순한 구조의 작품입니다.

 

산은

九江山

보랏빛 石山

 

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박목월 「山桃花(산도화)․1」전문

 

박목월의 첫 시집 『山桃花(산도화)』(영웅출판사, 1954)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산도화'와 '사슴'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즉 산에는 산도화가 벙글고, 물에는 사슴이 발을 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배경+대상+동작'의 두 정황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의미 그 자체만으로 따지면 별로 신기할 것도, 감동적일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을 실제로 읽고 난 뒤의 정감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아주 흥겹고 신선하고 맑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작품의 어떤 요소들이 그러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지 다음의 글을 읽어가면서 따져보도록 합시다.

 

―(전략)―우선 이 작품은 조화로운 율격을 지니고 있어서 리드미컬하게 읽힌다. 각 연이 7․5조류의 율격에 담겨 있다.(필자는 7․5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6․5, 5․5 혹은 8․5 등의 율격 형태들을 '7․5조류'라고 명명한다.) 각 연은 3행씩으로 이루어졌는데 행의 음절수를 점점 불려 배치하고 있는 점층 구조로 되어 있다. 다만 제3연만이 정반대인 점강 구조인데, 이는 전에서 의도적인 파격을 즐겨 시도하는 절구絶句적 양식의 구현으로 생각된다. 간결한 점층적 배행의 반복에서 시각적인 리듬을 살리고도 있다. 한편 ᄉ과 ᄂ의 자음들이 많이 반복되는 압운적 장치를 통해서 청신감과 유연감을 느끼게도 한다.

 

의미 구조를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음의 도표처럼 정리된다.

 

1연(기) 배경------------산(구강산)-------------보라색(석산)

2연(승) 대상+정황-------산도화+피어남-----------홍색(산도화)

3연(전) 배경------------물(눈 녹은 물)----------백색(옥 같은 물)

4연(결) 대상+정황-------사슴+발을 씻음----------갈색(사슴)

 

'산'과 '물'의 대조적인 배경에 '식물(산도화)'과 '동물(사슴)'이라는 대립적인 대상의 배치도 조화롭다. 또한 각 연이 다채로운 색채적 이미지를 고루 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제1연에서 제2연에 이르는 진술은 점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산→구강산→석산→산도화→두어 송이→송이'로 대상의 범주를 점점 축소해 가면서 특정한 부분을 선명히 노출시킨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제3, 4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즉 '물(개울)→사슴→암사슴→발'로 점점 축소 제시되고 있다. 영상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근경에 이르는 클로즈업의 기법이다. 대상을 단도직입적으로 일시에 제시하지 않고 주변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은근히 접근하여 마침내 독자들의 시선을 요처에 집중시키는 기법이다.

 

한편 이 작품의 내포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배경으로 제시된 '九江山(구강산)'은 고유명사지만 '九江'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산을 감돌아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연상케 한다. 그러니 그 산은 맑은 강물이 감돌아 싸고 있는 속세로부터 멀리 격리된 자연처럼 느껴진다. 또한 그 산은 보통의 산이 아니라 보랏빛 돌로 이루어진 석산(石山)이다. 보통의 초목들은 범접도 할 수 없는 강직剛直 청정淸淨의 신성한 산이다. 그 산의 돌 틈에 산도화가 한 그루 초연하게 자라 몇 송이의 꽃을 이제 막 터뜨리고 있다. 봄철에 흔히 볼 수 있는 진달래나 철쭉 같은 그런 꽃이 아니라, 비범하게 붉은 산도화다. 산도화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도 한다. 그러고 보니 앞의 '九江'이나 '보랏빛 석산' 등도 다 은근히 비일상적인 세계―선경仙境 곧 이상적 공간을 암시하는 몫으로 설정된 것 같다.

 

사슴은 동물 가운데서 가장 선량하고 깨끗한 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슴 가운데서도 암사슴이니 얼마나 유순하고 정갈하겠는가? 그런데 그 암사슴의 발을 차고 맑은 얼음물에 씻기어 정화시키고 있다. 결벽을 지향하는 작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속인부재俗人不在의 정결한 자연만이 제시된 작품이다.

 

어느 시대이거나 시인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불만스럽기만 하다.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질시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 세태는 증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거부 정신이 이상향을 꿈꾸게 한다. 「山桃花․1」은 목월이 꿈꾸는 이상 세계다. 그것은 전통적인 선의 세계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적인 경향은 「청노루」「모란여정」등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두 개의 생명체 '산도화'와 '사슴'은 자연물이면서 한편으론 시적 자아가 전이轉移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산도화나 사슴처럼 초연․정결한 생명체로서 자연과 합일코자 하는 시인의 선망이 두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월은 자아의 사물화(산도화․사슴)로 세속적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시가 복잡해야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비록 단순할지라도 조화롭고 율동적인 구조를 통해서 격조 높은 시정을 아름답게 구축하지 못할 것도 없다.

―『牛耳詩』제155호(2001.5.)

 

로메다 님,

해설이 너무 장황해서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나요? 그러면 이렇게 기억하세요. ‘어디에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단순한 구조도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다고―.

다만 어떤 이채로운 사물과 배경을 어떻게 선택해서 배치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 역시 수많은 선택과 배치의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하는 수밖에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로메다 님,

청록파의 초기 시들을 즐겨 읽으십시오. 청록파 중에서도 목월의 초기시를 나는 권하고 싶습니다.

 

 

[제14신]

 

기승전결의 사단 구조

 

로메다 님,

세상의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의 중간이 그 일의 진행 과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시작, 중간, 끝의 3단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진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논문의 구조를 얘기할 때 서론 본론 결론 하는 것이 바로 이 3단 구조입니다. 그런데 글이란 것도 세상의 일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그 진행 과정에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래서 그 ‘중간’ 부분이 다시 2단계, 3단계 혹은 4단계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장편 소설이나 희곡의 전개 과정을 놓고, 발단(시작)→ 전개→ 갈등→ 위기→ 절정→ 종말(끝) 등으로 논하지 않습니까? 이 경우는 중간 부분을 4단계(전개, 갈등, 위기, 절정)로 다시 나눈 것이 됩니다.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나의 이미지만을 제시하는 단단(單段, 1단) 구조로부터, 시작과 끝만을 지닌 2단 구조 그리고 3, 4, 5단 등 다양한 구조를 지닙니다. 그런데 우리 시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고 있는 구조는 4단 구조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기의 4단계를 지닌 한시漢詩 절구絶句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구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 우리의 고대시가 「구지가龜旨歌」나 「황조가黃鳥歌」같은 노래들이 4단 구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나는 그 요인을 사계四季의 변화가 뚜렷한 온대의 기후풍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즉 4계의 변화에 오래 적응하다 보니 4단계의 전환 구조에 친숙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로메다 님,

이유야 어떻든, 홀수보다는 짝수가 그리고 3각형보다는 4각형이 안정감을 줍니다. 시에서의 4단 전개가 선호되는 것은 그것이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형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인가 싶습니다.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박목월의「윤사월閏四月」입니다. 외딴 산봉우리에(배경) 꾀꼬리가 울면(대상), 외딴 집(배경)의 눈먼 처녀가 엿듣는다(대상)는 내용입니다.

제1, 2연에서는 배경과 대상이 각각 분할되어 있는 데 반해 제3연에서는 전후 행에 배경과 대상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어디에 무엇이 어찌하면, 어디에 무엇이 어찌한다’의 배경과 대상이 두 개 병치되어 있는 4단 구조입니다.

지난번에 예로 보였던 박목월의 「산도화․1」도 배경과 대상이 두 번 병치되어 있는 4단 구조였습니다. 이처럼 4단계의 전개가 ‘짝을 이룬 대우’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4개의 대등한 정황을 늘어놓는 병치의 구조일 수도 있고, 단계의 앞뒤가 서로 이어지는 연쇄 구조일 수도 있고, 각 단계가 정도를 점점 고조시켜 가는 점층 구조일 수도 있고, 순서를 좇아 진행되는 순차順次 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육사의 「절정」,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등 4단 구조로 이루어진 좋은 작품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외형은 4연으로 되어 있지 않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의미 구조상 4단계로 볼 수 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습니다.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小室宅

 

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 너머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映山紅」전문

 

이 작품의 외형적 배열은 5연으로 되어 있지만 의미 전개는 4단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제3연까지 각 연의 제1행과 제2행이 배경과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는 달리 제4연과 제5연에서는 연 단위로 배경과 대상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의미 구조로 본다면 제4, 5연은 한 부분으로 묶일 수 있어서 전체 작품은 기승전결의 4단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연까지는 앞말의 꼬리를 이어받는 연쇄 구조인 것도 재미있습니다. 행 단위로 ᄉ, ᄂ, ᄌ 등이 빚어낸 압운적인 효과도 조화롭습니다. 한 여성의 애잔한 삶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입니다. 미당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유수한 수작의 하나로 평가할 만합니다.

 

로메다 님,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 감상은 첨부자료로 덧붙이겠습니다. 4단 전개가 시인들이 선호하는 보편적인 구조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시「영산홍」은『文學』(1966.11.)에 발표된 뒤, 시집『冬天』(1968.11.)에 수록되어 전한다.

미당이 1915년 생이니 지천명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쓴 작품이다. 전 5연으로 이루어진 2행시인데 7․5조의 율격에 담긴 아름다운 소품이다. 얼른 보기엔 별로 대단한 작품 같지 않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서정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 아니다.

 

제1연 시작부터 잘 풀리지 않는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의 정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작은 영산홍 꽃잎에 어떻게 산이 어린다는 것인가? 산 그림자가 영산홍 꽃잎에 드리운다는 표현인가?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별로 흡족하지가 못하다. 그러면 어떤 정황을 그렇게 그리고 있단 말인가.

영산홍의 한자 표기 ‘映山紅’의 ‘映’은 ‘비추다, 비치다, 덮어 가리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映山紅’이라는 말은 ‘산이 어른거리며 비치는 빨간(紅) 꽃’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이 구절이 이런 단순한 이미지만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

이 구절은 제2연으로 이어지면서 복합적인 의미망을 새로이 형성하게 된다. 우선 제2연을 살펴본 다음 그 복합적인 의미망을 따져보도록 하자.

 

제2연은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을 제시하고 있다. ‘슬픈’'으로 미루어 보아 그 소실댁은 아마도 님의 사랑을 이젠 제대로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으로 짐작된다. 간밤에 이제나저제나 혹 님이 찾아올까 잠 못 이루며 전전반측 기다리다 지샜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지금도 님 생각에 젖어 있다가 낮잠 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산자락’의 그 ‘산’은 님의 상징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제1연에서의 산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선다. 이 역시 님의 상징어로 본다면 영산홍은 여인 곧 소실댁이 된다. 영산홍처럼 아름답고 젊은 소실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제1연은 겉으로는 영산홍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님 생각에 젖어 있는 아름다운 한 여인을 거기에 포개어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의 은근한 감춤의 멋이 있다.

 

제3연에서는 대상을 바꾸어 툇마루에 놓인 요강을 등장시킨다. 원래 요강이 놓일 장소는 은밀한 방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요강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마루에 나와 있다.

그것도 원마루에 잇대어 달아낸 툇마루다. 툇마루는 잉여적 공간이다. 마치 본부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어 둘째 아내로 살고 있는 소실댁과 흡사한 처지다. 잉여적 공간에 방치된 요강은 다름 아닌 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소실댁을 상징한다. 여기서의 요강은 T. S.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제4연부터서는 이제까지 전개해 오던 소실댁 주변의 정경과는 달리 시선을 180도 돌려 엉뚱하게 바다를 끌어들이고 있다. 보름사리는 보름 무렵의 조수 곧 가장 충만한 만조(滿潮)를 이루는 시기다.

제5연은 소금 발이 쓰려 우는 갈매기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당황하게 된다. 도대체 갈매기 얘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 온 의미구조로 본다면 갈매기도 분명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 것 같다.

우선 갈매기가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소금 발이 쓰리다’는 것은 발이 소금기에 절여서 아프다는 뜻이리라. 왜 소금기에 절였을까. 바닷물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리라. 밀물을 타고 몰려오는 고기떼들을 잡아먹기 위해 정신없이 바다에 발을 담그다 보니 절었으리라. 그러니 여기서의 갈매기의 울음은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즐거운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갈매기의 정체가 떠오른다. 갈매기는 곧 님이 아니겠는가. 소실댁은 돌아본 척도 않고 외지에 나가 여성편력에 여념이 없는 님을 물고기 사냥에 빠져있는 갈매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 *

미당은 산문 「영산홍 이야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재미있다.

그는 이 작품을 쓸 무렵까지도 영산홍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소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한때 승지의 소실이었다. 그 집 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기에 그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영산홍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꽃은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山丹)이었던 것을 쉰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 아는 것이 때로는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변명한다.

사실 미당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빨간 산단꽃과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만일 그 꽃의 이름이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작품의 첫 연과 같은 구절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작품 「영산홍」은 아예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牛耳詩』제150호(2000.12.)

 

                                                                                      

                                                         -월간『우리詩』 7월호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