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3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제6신]
무엇을 쓸 것인가
로메다 님,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어서 시를 써 보고 싶은데 막상 시 쓰는 방법은 일러주지 않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좋은 집을 지으려면 먼저 튼튼한 기소를 다지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그 동안의 이야기들은 글을 쓰기 위한 기소 작업이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선 시라는 글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그리고 처음부터 좋은 글을 쓰겠다고 너무 욕심부리지도 맙시다.
나는 전에 시를 ‘영롱한 언어의 사리’라고 신비로운 정의를 내린 바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좋은 시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우선은 좋은 시에 대한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쉽게 생각하십시다.
간략히 말하면, 시는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짧게 기록한 글일 뿐입니다. ‘어떤 것’이란 바로 학교 작문시간에 ‘소재’라고 일컫는 것들입니다. 바로 그 소재 ―‘글 쓸 거리’부터 생각해 봅시다.
시의 소재는 제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다 소재가 됩니다.
산과 강, 나무와 동물 그리고 하찮은 곤충들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물을 바라다보는 우리 자신도,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들도, 다 글의 좋은 소재들이 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논의의 편의상 소재를 양분해 본다면 우리의 몸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객체적 소재’,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정황들을 ‘주체적 소재’ 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객체적 소재들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다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다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화가들이 모든 사물을 다 그리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그립니다. 그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嗜好와 무관하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아름답거나 이채異彩로운 사물’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시의 소재도 그림의 경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선택된 시의 소재가 만일 아름답다거나 혹은 이채롭다거나 하는 어떤 특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독자들의 환심을 살 수가 없습니다. 시라는 글도 하나의 발언發言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를 전제로 해서 쓰인 글이 아닙니까?
로메다 님,
우리가 매일 친구들과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도 만일 재미가 없으면 상대방이 귀를 돌리고 맙니다. 하물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쓰인 시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에 지나지 않다면 누가 관심을 갖고 그 시를 읽으려 하겠습니까?
나는 앞에서 아름답거나 이채로운 것이라고 했는데,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쓰라는 충고를 드리고 싶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로메다 님,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기한 소재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런 소재를 찾아 낯선 먼 이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의 길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라면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필요로 한 그러한 방법을 나는 별로 권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로메다 님,
이채로운 대상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상에서 이채로운 생각이나 느낌을 얻는 일입니다. 아무리 이채로운 대상을 만났더라도 그 대상 속에서 얻은 생각이나 느낌이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와는 달리 비록 평범한 사물을 대했을 경우라도 평소와는 달리 이채로운 생각이나 느낌이 떠오르는 체험을 했다면 이것이 소중한 글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소재 자체가 아니라, 소재로부터 얻어낸 이채로운― 다시 말해 감동적인 생각과 느낌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부터 얻어낸 생각이나 느낌― 이것을 서양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용어로 부르고, 동양에서는 ‘시상詩想’이라는 말로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기발한 시상을 ‘영감靈感’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감이라는 말은 어딘가 좀 신비로운 느낌이 없지 않으므로 요즈음 즐겨 쓰고 있는 이미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어떤 대상(사물)을 접했을 때 그 ‘대상이 우리의 심리(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체험 내용’이라고 심리학에서는 정의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지요.
누가 이제 막 떠오르는 등근 보름달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들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본 바 있던 ① 둥근 쟁반, ② 환하게 웃는 아가의 얼굴, ③ 이제 막 구워낸 따끈한 호떡 등이 떠올랐다면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시의 싹이 됩니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 중 ①과 ②는 보통 사람들도 흔히 떠올리는 범상한 이미지들입니다.
그런데 ③은 좀 색다른 느낌이 들지요? 이런 색다른 이미지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개의 이미지만으로 한 작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모니카
불고
싶다
―황순원 「빌딩」전문
잇몸
드러내고
웃는다
―황순원 「옥수수」전문
소설가 황순원 씨는 『골동품』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는데 그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앞의 두 인용 작품처럼 한 개의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단시短詩들입니다. 빌딩에 달려있는 수많은 창문들을 보자 하모니카 구멍이 생각났고, 잘 익은 옥수수를 보자 웃을 때 드러난 이빨들이 떠올랐겠지요.
네, 시는 이렇게 별로 대단한 글이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가 예로 들었던 ‘보름달’을 ‘막 구워낸 따끈한 호떡’ 쯤으로 써 놓고 시라 불러도 크게 흠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시에 자신이 좀 생기지요?
그러면 이제 직접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할까요? 다음의 소재들에서 이채로운 이미지들을 붙잡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산> <항아리> <안경>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제7신]
유추와 연상 그리고 창조적 이미지
로메다 님,
며칠 여행을 다녀오느라 답장이 늦어졌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숙제를 잘 하셨군요. 이미지를 찾아내는 솜씨가 아주 놀랍습니다.
<우산>에서 ‘외다리 박쥐’의 이미지를 찾았군요. 펼쳐진 우산은 박쥐의 날개처럼 보이지요. 하나의 손잡이를 ‘외다리’로 느낀 것도 그럴 듯합니다.
<항아리>에서는 ‘만삭의 곰’, 둥글게 부풀어 있는 항아리의 몸뚱이가 마치 임신부처럼 느껴지던가요? 그것도 사람이 아닌 곰으로 말입니다.
<안경>으로부터는 ‘코에 걸린 자전거’라는 재미있는 이미지를 끌어냈군요. 네, 안경의 두 테가 마치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생각되기도 하지요.
로메다 님이 끌어낸 이미지들은 이채롭습니다.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는 개성적인 이미지들입니다. 이제 시적인 이미지들을 잡아내는데 자신을 가질 만하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한 이미지들은 어떤 대상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 다른 사물들이었습니다. 기다란 허리띠를 보자 뱀이 떠올랐다면, 두 사물이 지닌 유사한 특징은 ‘기다란’입니다. 이처럼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시론에서는 유추적類推的 이미지라고 부릅니다.
이런 유추적 이미지와는 달리 연상적聯想的 이미지가 있습니다. 꽃을 보자 벌이 생각나고, 벌을 생각하자 꿀이 떠올랐다면 이것이 곧 연상적 이미지입니다. 연상적 이미지는 두 사물의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시를 읽다보면 ‘바다’를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끌어들이고, ‘숲’을 말하면서 지저귀는 ‘새’를 등장시키기도 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오늘의 현대시는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 동일성이나 인접성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추적 이미지나 연상적 이미지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낯선 이미지를 상상적想像的 이미지 혹은 창조적 이미지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현대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인의 하나입니다.
다음은 내 시론집 『엄살의 시학』(2000, 태학사)에 수록된 「시의 씨앗」이란 글입니다.
번거로움을 덜어드리고자 직접 인용합니다. 이미 설명한 앞부분보다 뒷부분의 창조적 이미지에 유념해 읽어주기 바랍니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려면 우선 시가 될 수 있는 근거 곧 씨앗이 있어야 한다. 시의 씨앗을 동양에서는 시상詩想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고 서양에서는 이미지라는 용어로 즐겨 사용해 오고 있다. 시상 가운데 특출한 시상을 특히 영감靈感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인위적인 한계를 넘어선, 자연 발생적으로 주어진 천혜의 신비한 정신적 체험인 것처럼 여기고들 있다. 이러한 동양적인 견해와는 달리 서양인의 이미지 관觀은 보다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략)―
주지하다시피 이미지는 대체로 유추類推와 연상聯想에 의해 형성된다. 달을 보자 머릿속에 둥근 쟁반이 떠올랐다면 이는 유추이고 꽃을 보자 벌이 생각났다면 이는 연상이다. 유추는 두 사물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하고 연상은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유추적 이미지는 동일성이 클수록, 그리고 연상적 이미지는 인접성이 클수록 독자의 공감을 능률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이나 인접성에 근거한 친근한 이미지들과는 달리, 아주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을 끌어내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독자를 낯설게 만드는 개성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상상적 이미지라고 일컫는데 이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개비처럼
―김종삼 「북 치는 소년」전문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 '크리스마스 카드' 그리고 '진눈개비' 등 세 개의 단순한 이미지들의 병치로 구성된 작품이다. '북 치는 소년'에게서 앞의 세 이미지들을 동일성이나 인접성에 근거하여 설명하기란 곤란하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과거의 누구에게서도 제기되지 않았던, 비로소 김종삼에 의해 처음으로 들춰진 낯선 것들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지만 우선 신선하고 신기하게 와 닿는다. 뿐만 아니라 유추적 이미지와 연상적 이미지는 동일성과 인접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대상과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의미망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적 이미지인 경우는 대상과 이미지가 동일성이나 인접성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두 관계는 무한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독자들은 자기들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인이 제시한 이미지에 끝없는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다. 소위 수용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창조적 독서가 능률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된다. 현대시에서 상상적 이미지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상상적 이미지는 대상이 시인에게 스스로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대상 속에 파고들어 발굴해 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광부가 하나의 광맥을 찾기 위해서 수백 미터의 지하를 뚫고 들어가듯이, 창조적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예지와 인내와 노역을 동반하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은 사물과의 피나는 투쟁이며, 세계를 처단하는 폭력이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독재다. 시인이 그러한 고뇌를 감수하면서도 시의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이 독재적인 창조를 통해 맛보는 환희로 보상받기 때문이리라.
시의 눈부신 씨앗―영감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찾는 자의 몫이다.
―『엄살의 시학』pp. 24~26
로메다 님,
창조적 이미지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지요? 네, 그러면 잠시 보류해 둡시다. 골치 아프면 밀쳐 두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깊은 생각입니다. 전에 거론한 바 있는 구양수의 삼다三多 중 다상량多商量의 중요성입니다.
한 사물을 두고 계속해서 깊이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깨달음의 어떤 경지에 이르게도 됩니다.
유학儒學에서는 이를 격물格物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늘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생각을 얻게 된다는 의미쯤으로 이해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진가요? 그럼 이것도 그만 접어둡시다. 그것 아니라도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건 아니니까요. 잘 지내세요. 장마 뒤의 불볕더위가 괴롭습니다.
[제8신]
가치 있는 삶
로메다 님,
오늘은 좀 덜 골치 아픈 얘기를 해 볼까요?
시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말하자면 인생론적인 담론 말입니다.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어 새로운 학생들을 맞게 될 때면 ‘너희들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가끔 물어봅니다. 좀 막연함이 없지 않지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옵니다. ‘출세’라든가. ‘돈’이라든가. ‘행복’이라든가… 예상했던 답변들입니다.
소위 출세를 해서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좋겠지요.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면서 사는 즐거움도 대단하겠지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근심걱정 없이 정겹게 살아가는 행복한 삶도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그러나 로메다 님,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 시대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역대의 왕후장상들이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억만 금을 쥐고 세상을 흔들던 백만장자들이 이 지상에 남겨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생을 투자했지만 그들의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로메다 님,
당신의 삶의 목표는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합니다만 그렇다고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빈둥대며 살아간다면 이는 소중한 한 생애를 낭비하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출세나 돈, 행복 등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제시한다면 이런 생각에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군요.
출세, 돈, 행복― 물론 소중하지만 그것들 자체는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삶의 목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에서 출세를 해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든지, 돈을 어떻게 벌어 그 돈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겠다든지, 어떤 가치 있는 삶을 통해서 행복을 어떻게 성취하겠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출세해서 돈 많이 벌어 멋진 배우자를 얻어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럽게 살겠다는 그러한 행복의 추구가 삶의 목표여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삶의 의미를 ‘행복’에 두지 않고 ‘가치’에 둡니다. 때로는 세상이 평가하는 출세에 남보다 뒤늦고, 경제적인 궁핍을 겪으며 세속적인 행복을 덜 누리며 살아갈지라도,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는 그런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러한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봅니다.
로메다 님,
가치 있는 삶을 자기만의 삶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 좀 막연한가요? 그렇다면 ‘창조적이 삶’이란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군요. 좋은 축사와 충분한 사료가 제공되는 가축의 삶은 근심 걱정은 없을지 몰라도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창조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적 삶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그러한 특권을 만일 포기한다면 그것은 동물들의 삶이나 다름이 없는 암흑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적 삶이란 모방과 답습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내는 발명가, 새로운 이론을 창안해 내는 학자, 새로운 상품을 생산해 내는 실업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해 내는 예술가들입니다.
그러나 창조적 삶이란 이런 특수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 주부가 된장찌개를 끓인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는 자기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대로가 아닌 색다른 재료들을 첨가해서 더 맛있는 된장국을 만들어 냈다면 이것이 바로 창조적 삶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그의 아이에게 기성복을 사다 그냥 입히지 않고 천을 떠다 자기 나름대로 남다른 의상을 만들어 입혔다면 이것이 바로 창조적 삶입니다. 남의 흉내만 내면서 남의 뒤만 열심히 따라가는 모방과 답습의 삶은 자기의 삶이 아니라 꼭두각시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삶은 살지 않아도 무방한 무가치한 허비적인 삶일 뿐입니다.
로메다 님,
당신이 글을 써 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 역시 아름다운 창조적 삶입니다. 그런데 로메다 님, 당신의 ‘글쓰기’가 창조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쓴 글 속에 ‘새로운 것’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만일 남들이 이미 생각하고 느낀 것을 다시 쓴 것이라면 그 글은 모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길은 창조 곧 새로움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로메다 님,
당신의 생애가 과거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지 못했고, 또 앞으로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러한 삶의 문턱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월간『우리詩』 5월호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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