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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15회] 시의 화법(화자와 청자) 外

by 丹野 2011. 1. 1.

 

 

【임보시인의 詩창작교실·15】

 

         당신도 좋은 詩를 쓸 수 있다

 

                                 임 보(시인·전 충북대 교수)

 

 

[제42신]

시의 화법(화자와 청자)

 

 

  로메다 님,

  오늘은 시의 화법話法- 곧 ‘말하는 방법’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상에서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시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를 전제로 해서

쓰여진 글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깊이 따지면 그 구조가 간단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시의 화법에 관해서는 서양 사람들이 상세하게 분석해 놓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성적이어서 사물을 잘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기를 좋

아합니다. 세상을 너무 이성적·논리적으로 사는 것은 인간미가 없어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기는 합니다만, 사물을 이해하거나 학문을 연구

하는 입장에서는 본받을 만도 합니다.

  다음의 글은 서양 학자들의 이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무릇 모든 발언은 들어줄 상대를 전제로 해서 발화發話된다. 독백조차도

자신이 청자로 설정된 담화라고 할 수 있다. 이스토프(A. Easthope)는 서

정 양식도 서사 양식이나 극 양식과 마찬가지로 담화(discourse)의 한 형

태라고 지적했다. 한편 바흐진(M.M. Bakhtin)은 모든 담화는 극이다. 시적

담화는 시인과 독자 그리고 작품 속의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삼중창이라고

말한다.

 

  흔히 작품 속의 화자를 ‘persona’라고 하는데 이는 작품의 화자가 작자

자신과 다름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말은 고전극의 배우

들이 쓰던 가면(mask)을 지칭하는 라틴어였는데, 연극의 등장인물을 가리

키는 말로 쓰이다가 다시 작품의 화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에서는 서정적 자아 혹은 시적 자아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아무튼 시와 같은 서정 양식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다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희곡처럼 극적인 구조를 설정하기도 한다.

  소월의「진달래꽃」의 화자는 소월 자신이 아니라 ‘이별을 앞둔 한 여성’

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여성이 님을 향해 내쏟는 간곡한 발언이 이 작품의

내용이다. 말하자면「진달래꽃」은 소월이 한 여성의 탈(persona)을 쓰고

간접적으로 발언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차트먼(S. Chatman)은 한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구조를 다음과 같

이 여섯 단계로 세분해 보이고 있다.

 

  ①실제작가 →  ②내포작가 →      ③화자 →    ④청자 →    ⑤내포독자 →      ⑥실제독자

  (real author) (implied author) (narrator) (narratee) (implied reader) (real reader)

 

  ①실제작가 --- 자연인, 총체적 작가

  ②내포작가 --- 그 작품을 의도한 작가, 작품 속에 투영된 작가

  ③화자 --- 작품 속에 등장한 목소리의 주인

  ④청자 --- 작품 속에서 목소리를 수용하는 인물

  ⑤내포독자 ---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독자(읽기를 기대하는 독자)

  ⑥실제독자 --- 실제로 작품을 읽는 독자

 

  다음의 작품을 예로 삼아 따져보도록 하자.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오날 처음 만나든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드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쏘내기 되야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 서정주, 「 춘향유문春香遺文」전문

 

 

  작자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 곧 이 작품의 주지는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는 영원한 사랑을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

는 . 저승까지 이어지는 구원한 것으로 노래하고자 했으리라. 그래서 이

지상에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가는 한 여인을 화자로 선택했다.

욱이 그 여인을 고전 속의 인물 춘향으로 설정하여 극적인 효과를 노린 셈

이다.

  이 작품은 자연인 서정주(①실제시인) 중에서도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자 하는 서정주(②내포시인)가 춘향(③화자)으로 하여금 도련님(④청자)께

보낸 유서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작가가 은근히 읽어 주기를 기대한 대

상은 어린이나 노인들이기보다는 청춘남녀(⑤내포독자)들일지 모른다. 그러

나 이 작품은 실제로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나(⑥실제독자) 읽을 수 있다.

  그러니 담화로서의 의사소통의 회로는 이중적인 구조를 지닌 것이 된다.

  즉 A(②내포작가 ↔ ⑤내포독자)와 B(③화자 ↔ ④청자)의 두 회로인데,

작자가 의도한 중요한 것은 B보다는 A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A는 숨고 B만 드러난다. B는 A의 매개 역할을 하는 수단에 불과한 셈이다.

 

  그러나 모든 서정양식이 이처럼 복잡한 극적 구조를 지닌 것은 아니다.

  야콥슨(R. Jakobson)은 ‘화자(addresser)---화제(message)---청자

(addressee)’의 세 단계 구조로 파악한다. 그리고

  ①화자 지향(1인칭 ‘나’중심)의 작품은 서정성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②청자 지향(2인칭 ‘너’중심)의 작품은 계몽성이 짙은 특성을 보이며,

  ③화제 지향(탈인칭 ‘그, 그것’중심)의 작품은 정보 전달에 적합한 양식

    으로 사실성이 강한 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화자와 청자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시의 구조를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화자 중심 구조

  특정 화자만 설정되어 있는 경우다. 김영랑의「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화

자인 <나>가 등장하지만 청자는 구체적으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김종해의

「항해일지④」역시 특정 청자는 없지만 화자를 <나(선원)>로 등장시키고 있

는 화자 중심 구조다.

 

  둘째, 청자 중심 구조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특정 화자만 설정되어 있는 구조다. 신동엽의「껍

데기는 가라」나 김수영의「가다오 나가다오」는 ‘껍데기’와 ‘미국인 소련인’을

청자로 설정하고 있지만 화자에 대한 정보는 드러나지 않는다.

 

  셋째, 극적 구조

  특정 화자와 특정 청자가 모두 설정된 경우다. 앞에서 예로든 서정주의

「춘향 유문」이나 소월의「진달래꽃」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넷째, 객관적 서술 구조

  화자와 청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화제 중심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박목월

의「산도화·1」나「불국사」와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데생을 하듯 사

물을 그리는 즉물시들이 좋은 예가 된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훌륭한 소재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택된 소재를 효율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화법話法을 설정할 것

인가가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화자話者와 청자聽者」『엄살의시학』p.69~72

 

 

  로메다 님,

  화법의 이론도 간단치가 않지요? 복잡한 이론에 대한 이해를 강요키 위

해 소개한 것은 아닙니다. 부담이 되면 이론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자연스

럽게 쓰십시오. 화법의 구조가 복잡해야만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

다. 가까운 사람에게 들려주는 정담처럼 애정이 담긴 말로 그냥 쓰십시오.

  즐거운 설 지내시기 바랍니다.

  앞글에서 예로 거론한 몇 작품들을 참고 자료로 보여드립니다.

 

 

  [참고 자료]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 김영랑, 「 모란이피기까지는」부분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정작 나는 갑판 위에서 작살을 날리지 못했다.

  날마다 작살의 날을 시퍼렇게 갈고 또 갈았지만

  나는 작살을 쓸 수 없었다.

  - (중략) -

  한 장의 방한복으로 추위를 가린 젊은 수부의 항로는 어디로 열려있나.

  상어가 출몰하는 흉흉한 바다,

  그물을 물어뜯고 배를 뒤엎어 놓는 저 놈의 상어

                                       - 김종해, 「 항해일지4」부분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중략)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 껍데기는가라」부분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 김수영, 「 가다오나가다오」부분

 

 

  흰달빛/ 자하문紫霞門//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大雄殿/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범영루泛影樓/ 뜬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자하문紫霞門// 바람소리/ 물소리

                                         - 박목월, 「 불국사」전문

 

 

 

 

[제43신]

‘시의 눈’에 관해서

 

 

  로메다 님,

  ‘시의눈’- 곧 ‘시안詩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 시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지詩誌도 요즘 나오고 있습니다만 일찍이 동양의 시관詩觀에

서는 이 말을 자주 거론해 왔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다음의 글을 읽

어가면서 이해해 보도록 하십시다.

 

 

  ‘시안詩眼’이면 ‘시를 보는 눈’이란 말인가, 아니면 ‘시의 눈’이란 말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그 ‘눈’은 시를 식별하는 관찰자의 것이 된다. 시인이거

나 독자거나 간에 좋은 시를 판별해 낼 수 있는 능력, 즉 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眼目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그

‘눈’은 작품이 지닌 것이 된다. 절구絶句의 작시법에서는 오언五言인 경우는

셋째, 칠언七言인 경우는 다섯째 글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는 절구에

서 그 위치에 오는 글자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동양적 시

관詩觀에서 시안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도대체 ‘시의 눈’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시에 무슨 눈이 있다는 것

인가.

  눈이란 곧 생명체의 요처라고 할 수 있으니 시안이란 시의 요처를 이르

는 뜻으로 짐작된다. 청淸의 오대수吳大受는『시벌詩筏』에서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시의 명수가 시구를 다듬으면, 벽에 그린 용 그림에 마지막 눈동자를 찍

자 그 용이 비늘을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처럼 살아난다. 경이로운 한

구절이 시 전체를 기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묘처妙處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 전체를 생동

감 있게 살려내는 경이로운 한 구절이 시안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바둑

의 눈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한다.

 

  “시에 눈이 있는 것은 바둑에 눈이 있는 것과 같다. 시상이 영롱하게 드

러나는 것은 시안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소위 눈이란 시나 바둑이

영롱하게 되는 곳 그것을 이르는 말이다.”

 

  바둑에 눈이 있다는 말은 한 수 한 수마다 최선의 요처가 있다는 것이리

라. 한 수 잘못으로 대마大馬를 죽이기도 하고, 한 수를 잘 놓음으로 해서

기세를 얻어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게도 한다. 바둑의 명인名人들은 바로

그러한 요처를 찾아내는 눈을 지닌 사람들이다. 명국名局은 그러한 요처들

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진행되는 긴장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처들

가운데서도 국면 전체를 탱탱하게 거머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석要石이

놓인 자리를 ‘기안碁眼’이라고 할 만하다.

 

 

  시를 구성하고 있는 시어들도 하나하나가 다 최선의 것들로 선택된 것이

어야 한다. 만일 한 편의 시가 최적의 시어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구조물이

라면 그 작품에서 시어들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옥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자재들 가운데서도 대들보가 가장 소중한

것처럼 작품이라는 하나의 구조물 속에서도 핵심이 되는 부분이 없을 수

없다. 아니 그러한 부분이 없다면 그 작품은 긴장감이 없는 느슨한 구조가

되고 말 것이다. 소설에 클라이맥스가 설정되는 것처럼 시에서도 작품을 이

루고 있는 제요소들이 어느 한 곳으로 응집되는 긴장된 구조를 지녀야 한

다는 것이리라.

 

  청의 유희재劉熙載는『예개藝槪』에서 시안을 상대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안에는 시집 전체의 눈[眼]도 있고 시 한편의 눈도 있고 몇 구에서의

눈도 있고 한 구의 눈도 있다. 또한 몇 구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한 구

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한두 자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다”

 

  유劉의 지론은 범주의 설정에 따라 상대적으로 시안은 달라진다는 것이

다. 작품 전체의 시안이 있고 또 각 부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요처인 시안

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수도인 서울이 요지

要地지만, 어느 한 지방만 놓고 본다면 그 지방의 행정도시가 요지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시안은 시의 한 행 안에서, 혹은 한 연 안에서, 혹은 작품

전체에서 각기 달리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 작품

은 부분은 부분대로 전체는 전체대로 어느 한 요처에 탄력적으로 모아지는

유기적 구조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견해다.

  시안의 이론은 시어詩語의 연찬硏鑽이라는 수사학적 입장을 넘어서서 시의

역학적 구조론構造論을 지향하는, 더 나아가서는 시심詩心의 응집 곧 시정신

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는 시관詩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목월朴木月의「청노루」를 예로 삼아 시안을 살펴보도록 하자.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작품의 전개는 원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대상에 접근해 가는 방식

을 취하고 있다. 이 시는 두 개의 점강點降구조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제1연이 ‘먼 산 → 청운사 → 기와집’등으로 점점 하강 이동하

는 것이 그렇고,

  둘째는 제1, 2, 3, 4연의 전개에서 ‘먼 산 → 자하산 → 열두 구비(능선)

→ 청노루 → 눈’등으로 대상의 범위를 점점 좁혀 가는 것이 또한 그렇다.

  첫째 구조가 배경 역할을 하고 있다면 둘째 구조는 전체 작품의 중요한

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정황을 카메라 동영상으로 표현한다면 어떻

게 할 것인가. 먼 산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대상인 한 마리의 노루에 서서히

접근해 간 다음 드디어 노루의 눈동자를 클로즈업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눈동자로부터 새롭게 펼쳐지는 구름과 창공의 무한 공간을 제시하게 될지

모른다.

  제4연에서 제5연으로의 이동은 순간적 확산이다. 제1연에서부터 제4연에

이르기까지 점점 축소 응결되어 가던 시상詩想이 제5연에서 갑자기 확산

소멸하고 만다. 노루의 ‘눈’은 이 지상의 만상萬象을 삼키는 블랙홀이며, 무

한한 우주 공간으로 열리는 하나의 신비로운 문이다. 그야말로 묘처 중의

묘처다. 이를 일러 시안이라 할만하다.

  이 짧은 시가 단순한 서경시에 그치지 않고 한 생명체의 우주적 조응照應

을 담고 있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작품의 시안인

‘눈’의 역동적인 작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시안詩眼」『엄살의시학』pp.125~8

 

 

  로메다 님,

  작품에는 핵심이 되는 부분의 설정이 필요합니다. 이야기의 전개에서도

흥미가 고조에 달하는 절정의 부분이 있듯이 시에서도 독자의 관심을 집중

시키는 요처가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시에서의 감동은 그 요처인 시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설정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효율적인 시안 설정의 방법은 무엇인가? 동일한 작품을 놓고

구성과 표현을 여러 가지로 달리 하면서 스스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습니

다. 모든 작품은 제각기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제44신]

시품詩品

 

 

  로메다 님,

  인품人品이라고 하면 사람의 성품 곧 사람됨을 이르는 말이 아닙니까? 말

하자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지닌 사람다움의 성품입니다. 사람이

기는 하지만 사람답지 못한 불량배들은 인품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

다. 한편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인품이 높다느니 혹은 낮다느니 하고 따지기

도 합니다. 이럴 경우 인품은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덕성의 정도를 나타

내는 말로도 보입니다.

 

  시품詩品이면 시가 지닌 품격品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품과 마찬가지

로 이 역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글과는 달리 시가

갖추어야 할 시다움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의 질質의

고하高下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품을 논하는 일은 시적 특성과 시의 품질을 거론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부닥치게 됩니다. 동양적 시관詩觀에서는 시인과 시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는 그 사람됨과 같다.’(詩類其爲人)

 

  ‘그 사람을 벗어나서 그 시가 없고 그 시를 벗어나서 그 사람이 없다.’

(人外無詩詩外無人)’

 

 

  ‘시의 등급은 같지 아니하니, 사람이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되면 바로 그

경지의 사람에 걸맞는 시가 생산됨을 보게 된다.’(詩之等級不同人到那一

等地位方看得那一等地位人詩出)

 

  시와 그 시를 빚은 사람과 동일시하려는 것이 앞의 두 사람의 지론입니

다. 문체와 사람을 하나로 보려는 서구인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글 속

에는 작자의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게 마련이니 당연한 얘기라고 할 수 있

습니다. 그러므로 인품의 고하에 따라서 시의 질도 달라진다는 것이 세 번

째 글의 요지입니다.

 

  ‘시품은 인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품은 정성스럽고 순박하고 충성스러

운 것을 으뜸으로 삼고, 초연히 자연에 들어 풀 베고 밭 갈며 사는 자를 그

다음으로 친다.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며 세속의 부귀를 좇는 자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詩品出于人品超然高擧誅茅力耕者次之送往勞來

從俗富貴者無譏焉)

 

 

  유劉의 글은 인품의 등급을 세 부류로 나누어 논하고 있습니다. 정성스럽

고 충박한 것을 으뜸으로 삼고 자연에 은거함을 다음으로 칩니다. 이러한

견해는 유교의 이념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속적 명리를

좇아 부화뇌동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은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는 부류로 경

원시하고 있습니다. 시품은 인품에서 나온 것이라 했으니 앞의 세 등급은

곧 시품에도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품의 품品은 격格이나 체體혹은 풍격風格, 풍모風貌등과도 서로 어울려

사용되어 오고 있는데, 일찍이 유협 은『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시품을

여덟 가지[八體](A)로 나누어 논의했고, 당의 왕창령王昌齡은『시격詩格』에서

다섯 종류(B), 교연皎然은『시식詩式』에서 19글자(C)로써 문장의 특징을 구

분하였습니다. 이를 발전시켜 사공도司空圖는『시품詩品』에서 24풍격(D)으

로 구분하여 사언시四言詩로 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의 고하를 따지는 것

이라기보다는 작품 속에 담겨있는 시정신의 특색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품에 관해서는 그 뒤에도 많은 시인들에 의해 논의되어 왔지만 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객관성을 지닌 분류로 보기는 곤란합니다.

천태만상인 사람의 성품도 그 우열을 객관적으로 따질 수 없는 것과 같습

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청정淸淨한 삶을 높이 평가해 온 동양적 시관詩觀에

서는 시의‘청신淸新’을 소중히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의 두 작품들을 보면서 시품을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라빛 석산石山//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 박목월, 「 산도화山桃花」전문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설어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서정주, 「 문둥이」전문

 

 

  「산도화山桃花」가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단순합니다. 보랏빛 돌산에 이제

막 벙그는 두어 송이 산도화와 차고 맑은 개울에 암사슴이 발을 담그고 있

는 정경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제된 운율과 함께 산과 물의

조화, 식물과 동물의 조화 그리고 각 연의 색채 이미지의 다양한 배치가 놀

랍습니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이 작품 속에 서려 있는 시정

신입니다. 잡초 같은 것은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신성한 석산石山에 어쩌

면 장차 천도天桃라도 매달 한 그루 산도화의 제시도 그렇거니와, 눈 녹아

흐르는 차고 맑은 개울에 청결 유순한 짐승인 사슴의 탁족濯足은 차원 높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 표출해 내려는 것은

청정무구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동경하고 있는 선경仙境과 같은

청정무구한 이 세계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속된 일상적 자아와 혼탁한 지

상적 세계에 대한 비판정신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둥이」역시 훌륭한 작품입니다. 한을 극복하려는 격렬한 몸부림이 뼈

아프게 담겨 있습니다. 화려한 수사와 야성적인 격정이 읽는 이의 심금을

사로잡습니다. 짧은 시행 속에 인간 원죄의 고뇌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했

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귀기鬼氣서린 시의 천재성이 엿보입니다.

 

  앞의 두 작품은 그야말로 상반된 시풍을 지니고 있습니다. 침잠/격정, 청

정/욕망, 관조/번민 등의 상극을 보입니다. 의도하는 바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부당하지만, 시를 온유돈후溫柔敦厚로 보

는 전통적인 동양의 시관에서는 전자의 시품을 위에 놓습니다.

  시인을 단순한 기능인技能人으로 생각지 않고 구도인求道人으로 보려는 입

장에서는 격조 높은 시는 고결한 정신세계에 도달한 시인에 의해 생산된다

고 믿습니다. 치열한 욕구와 자기현시의 욕망은 생명의 본성이지만 이를

어떻게 초극하느냐를 인간다움의 덕성으로 보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담담한 가운데 억지로 꾸미려 하지 않는 졸박拙朴을 옛 사람들

은 높이 사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사원에 예속되어 있지 않는 수도

사들인 셈입니다.

 

로메다 님,

시품은 곧 인품, 시인의 품격입니다.

 

 

  [참고 자료]

  (A)[8체] : 典雅, 遠奧, 精約, 顯附, 繁縟, 壯麗, 新奇,

  (B)[5격] : 高格, 古雅, 閑逸, 幽深, 神仙

  (C)[19식] : 高, 逸, 貞, 忠, 節, 志, 氣, 情, 思, 德, 誠, 閑, 達, 悲, 怨, 意, 力,

                   靜, 遠

  (D)[24풍격 : 雄渾沖澹沈着高古典雅洗鍊勁健綺麗自然豪放

                    含蓄精神縝密疎野淸奇委曲實境悲慨形容超詣飄逸

                    曠達流動

 

 

 

 

                               - 《우리詩》5월호에서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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