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인의 詩창작교실·16
당신도 좋은 詩를 쓸 수 있다
임 보(시인·전 충북대 교수)
[제45신]
시인의 네 유형
로메다 님,
굳이 세상 사람들을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본다면, 문제아問題兒, 유명인
有名人, 현인賢人 그리고 보통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인
들의 경우도 문제 시인, 유명 시인, 훌륭한 시인, 보통 시인 등으로 구분하
여 따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문제 시인
문제를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입니다. 이도 행동으
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와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시인이 백주 대로에서 스트리킹을 했다면 이는 전자
에 해당됩니다. 대개의 문제 시인들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물론 김관식이나 천상병 같은 낭만적인 문제 시인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반면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이상李箱이라든지 김수
영, 그리고 실험적인 작품을 쓴 80년대의 몇 시인들에게서 그 전형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둘째, 유명 시인
이는 세상에 많이 알려진 시인입니다. 문제를 일으켜 유명해지기도 하고
처세를 잘 해서 유명해지기도 합니다. 잡지사나 출판사를 열심히 찾아다니
며 작품도 많이 발표하고 상도 많이 탑니다. 신문에 글도 자주 쓰고 방송에
얼굴도 많이 내밉니다. 출판사와 궁합이 잘 맞으면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
어 광고판에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평론가들을 동원하
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언급하게도 만들고, 교과서에 작품을 실어
학생들에게 낯을 익히는 데 진력합니다. 무슨 단체의 위원으로 성명서도
자주 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불사합니다. 때
를 잘 만나면 국가기관의 장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이
되어 거들먹거리며 지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유명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
다. 그런 시인들은 다음의 셋째 항목의 범주에 넣기로 하겠습니다.
셋째, 훌륭한 시인
‘훌륭한 시인’이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인품 또한 훌륭히 갖춘 시인을
뜻합니다. 훌륭한 시인 가운데는 세상에 이미 알려져 유명한 경우도 있고
아직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시인 본인이 생존해 있는 당대는 대체
로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훌륭한 시인일수
록 매명賣名에 연연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사람과 작품이 공
히 맑고 아름답습니다. 뜻은 높고 거동은 늘 겸허해서 난초와 같은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군자적 풍모를 지닌 선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보통 시인
넷째는 첫째나 둘째의 경우가 아닌 무명 시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부류
는 다시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욕심은 있지만 능력이 미치
지 못해 무명으로 주저앉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능력은 있지만 욕심을 줄
여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경우입니다. 후자는 장차 훌륭한 시인으로 인
정을 받아 유명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장차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인데 세상이 그를 알아보
지 못해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
릅니다. 이들이야말로 공자의 저 ‘ 人不知而不慍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의 경지에 이른 군자들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니 보통의 무명 시인들을 놓고 흙 속의 돌멩이 보듯 깔볼 일이 아닙
니다. 그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을 온통 청맹과니로 만든 무서운 ‘보석’이
담겨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로메다 님,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
인입니다. 그들은 괴로운 이들에겐 위로를 주고, 어려운 이들에겐 꿈을 심
어 줍니다. 교만한 이들에겐 겸손을 가르치고, 간악한 이들에겐 사랑을 일
깨우기도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변화시
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보
다는 오히려 교란시키는 쪽에 가까운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은 남에 앞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들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서는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불량배들입니다.
로메다 님,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을 마치 ‘훌륭한 시
인’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목이 없는 매스컴들이
이들의 농간에 넘어가 연일 이들의 이름만 떠들어대고 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사이 세상을 지배하는 큰 힘을 지닌 것은 언론 매
체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정치 단체나 법전보다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거대한 재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한 무명인을 대
스타로 세상에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힘을 잘 이용만 하면
‘무명 시인’도 일조에 ‘유명 시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아니 어떤 시인이 바람직한 시인인가?
나는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승화된 정신 세계의 소유자들이라
고 생각합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난, 적어도 떨쳐버리고자 하는 의지
를 지닌 이들이어야 합니다.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지조志操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기상을 우리의 전통적인 시인들은 지니고 있었습니
다. 그들이 곧 ‘조선정신’의 뼈대가 된 선비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바람직
한 시인 정신을 선비 정신에서 찾고자 합니다.
오늘과 같은 혼탁한 시대에 시인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이
그러하니 시인 역시 부화뇌동해서 아무런 잡설이나 지껄여대면 그만일까
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세상일수록 시인은 매서운 시정신을 지녀
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보통의 시인’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싶습니다.
“그대들은 흙 속에 묻혀 있는 잡석일 수도 혹은 보석일 수도 있다. 자신
이 어느 편에 속하는가의 판정은 독자의 몫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가 결
정할 일이다. 자신의 시정신은 무엇인가? 자신이 만들어낸 한 구절의 시가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맑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대들 스스로가 자문
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로메다 님,
나는 얼마 전에 오대산 계곡에 들어가 눈 속에 묻힌 월정사를 보고 왔습
니다. 경내의 한 귀퉁이에 ‘윤장대’라는 작은 집이 있는데 나는 내리는 눈
을 맞으며 그 집 앞에서 한동안 정신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단청
때문이었습니다. 오색 찬란한 한 채의 다락집이 꽃보다 더 황홀하게 눈 속
에 피어 있었습니다.
누가 이 깊은 산중에 저토록 고운 집을 만들었단 말인가? 그것을 만든 이
의 무구한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는
이 별로 없는 이 깊은 산골에 눈부시게 피어 있는 한 채의 작은 집,
로메다 님,
시는 어쩌면 그런 무욕의 마음에서 피워낸 한 송이 꽃일지도 모릅니다.
건필을 빕니다.
[제46신]
해체시解體詩
로메다 님,
대학에 들어와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첫 강의도 들었겠군요. 대학 생
활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좋은 친구와 스승을 만나는 일입
니다. 그들이 로메다 님의 한평생을 통해 훌륭한 후원자가 될 수도 있기 때
문입니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훌륭한 교수님들과 친분을 쌓아가
기 바랍니다.
오늘은 해체시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거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온건한 경향이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낡은 것보다는 새
로운 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경향이 공존합니다. 전자를 보수파
후자를 개혁 내지는 혁신파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이 두 상반된 대립들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변증법의 이론이
기도 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평시조에 대한 사설시조, 시조에 대한
신체시, 신체시에 대한 자유시 등의 대립들을 통해 현대시로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이상李箱에 의해 소위 과격한 모더니즘
의 혁신적인 실험시가 나타납니다. 이상李箱의 이러한 실험적인 시풍詩風은
한때 잠잠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기승을 부리며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른
바 해체시解體詩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는 이 해체적 경향은 이제 포스트모던
이즘이라는 새로운 서구적 풍조의 그늘 밑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시도된 해체적 경향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
니다.
첫째,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
시를 산문화한다든지, 시에 희곡이나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시 속에 회화나 도형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둘째, 표현 매체의 개방
시는 언어 예술이지만 표현 매체를 언어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림, 사
진, 도형, 기호 등을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셋째, 기존의 규범 문법에 구속되지 않음
사회적인 약속인 기존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비문非文이나 논리적 타당성
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넷째, 시적 주체의 소멸
독특한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긴 개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
고, 타인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끌어다 자신의 글처럼 쓴다든지
[pastiche], 광고나 기사記事, 사진 같은 것들을 오려 붙인다든지[collage]
하는 행위입니다.
다섯째, 탈이념脫理念현상
어떤 주의主義나 사상思想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나아가서
는 도덕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여섯째, 예술의 저속화[kitsch] 현상
일상의 저속한 것들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든지, 속어나 욕설 등의 비어卑語
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으로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
으로도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체시의 특징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존의 것들 곧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체 사상이 80년대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시 인기를 얻고 있었
던 프랑스의 사상가 데리다(J. Derrida)의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데리다
의 해체 이론은 기존의 것을 왜 바꾸어 놓아야 하는가 하는 그 이유를 논리
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불확정성不確定性’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그는 현존(現存·presence)의 특성을 ‘differance(差延)’라는 새로
운 말을 만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differance는 differ(差別)와 defer(延
期)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전자는 현존의 공간적 특성을 지적한 말이고 후
자는 현존의 시간적 특성을 지적한 말입니다. 즉 어떤 사물의 공간적 존재
양태는 다양합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바라다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서 천태만상의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물의 양태를
하나로 확정지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물의 시간적 존재 양태는 끊
임없이 변해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해 갑니다. 이것이다 하고 붙드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
거 속의 낡은 모습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현존의 상태는 과거와 미
래의 틈 사이에 관념적으로만 존재할 뿐, 끝없이 연기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불확정성의
이론입니다.
그런데 서구의 합리주의는 사물을 우열의 관계로 잘못 확정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감성, 남성>여성, 백인>유색인, 기독교>다른 종
교 등으로 앞의 것을 우월한 것으로 확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열의 관계는 바른손과 왼손의 관계처럼 기회가 많
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
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리를 뒤바꾸어 후자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
다.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해체는 결
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고 합니다. 데리다의 이론은 얼핏 보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 해체이론은 몇 가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현존의 차연적(differance) 특성 때문에 확정지을 수 없다는 전제
에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물의 영구불변한 진상을 확정지
을 수 없다는 것은 수긍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론이 차연적
상황에 대한 진술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물의
일면만을 담고 있는 정물화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고, 한 인물의 생애를 다
루고 있는 전기문도 가치가 있는 기록입니다.
둘째, 기존의 모든 것들이 잘못된 구조라고 확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습
니다. 물론 잘못된 전통이나 편파적인 관습 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
나 어느 한 사회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수천 년 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
를 거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들은 비교적 최선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들보다는 바
람직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무척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
운 것은 기존의 것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개혁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개악과 파괴로 규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체시가 시도하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통적인 시의 인습을 무너뜨리는 바람직한
혁신들인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뒤집어 놓겠다는 데리다적인 단순한 거부
의 발상인가를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詩로 불리어지려면 언어를 떠나서는 안 되고 또한 예술의 반열에 놓이려
면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메다 님,
새로운 시에 대한 도전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
지나‘아름다운 언어의 구조물’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곤란합니다. 건
필을 기대합니다.
[제47신]
시의 네 가지 범주
로메다 님,
어느 분야의 문화 활동이든 항상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探
究·모색摸索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곧 발전의 양상입니다.
시의 경우도 새로운 영역의 확장을 위한 탐구와 새로운 방법에 대한 모
색이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그러한 새로운
탐색에 대해 늘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성시하고 있는
시의 ‘정통성正統性’이나 ‘정체성正體性’에 혼란을 야기하거나 혹은 오염시
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통성이나 정체성이란 것이 고
정불변한 것일 수는 없으므로, 시를 지키려고 하는 보수적인 폐쇄성은 시
의 발전을 저해하는 위험을 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나는
반보수주의적 입장에 섭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 어떠한 방법으로 시도되든지 아무런 규
제 없이 너그럽게 다 허용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회
의적입니다. 우선 시라는 언어 예술 장르 자체를 파괴하려는 위험스런 모
험은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나는 시가 독자들을 계발하는 도덕적 요
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계몽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시가 필요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효용론자입니다. 따라서 시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고 거북하게 한다면 그런 시는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시의 탐색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범주 안에서 시도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첫째, 언어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서는 곤란합니다.
언어가 지닌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언어 이외의 다른 매체를 시에 끌어들
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기호, 도형, 그림, 사진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
니다. 마지못해 부분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주매체는
언어여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가 언어 이외의 다른 매
체에 기울게 되면 장르 자체에 대한 부정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심미성審美性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시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든지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
오한 철학적 내용이나 도덕적 주장이나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비평 등도
훌륭한 시적 소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시가 되려
면 논설이나 비평문과는 달리 심미적인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되었을 경우
에만 가능합니다. 시의 계몽성은 심미성 다음에 따른 부차적인 것에 지나
지 않습니다. 심미성은 시를 예술이게 하는 핵심적인 요건 중의 하나입니다.
셋째, 효용성效用性을 지닌 작품이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작품은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가 닿아 정서적 순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할지라도 적어도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든지,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한다든지 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읽고 난 뒤에 불쾌
감이나 답답하고 골치 아픈 느낌을 준 작품이 있다면 이는 예술작품이라기
보다는 공해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시인은 무
분별한 테러리스트거나 혐오감의 생산자여서는 곤란합니다. 도대체 그에
게 세상을 괴롭혀도 된다는 권리를 누가 허락했단 말입니까.
넷째, 새로운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가 재미있는 장타령이나 단순한 언어놀이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시인
은 언어 조립공組立工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신선
한 정신세계에 바탕을 둔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는 시인을 구도자求道者의 대열에 놓습니다. 시는 구도자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온 고귀한 노래입니다. 오늘의 시단 풍토를 놓고 어떤 시인은 ‘시는
많아도 시인은 없고/ 시인은 많아도 시는 없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시인다운 인격체의 빈곤과 격조 높은 작품의 부재不在를 안타까워하는 것으
로 생각됩니다.
로메다 님,
새로운 시의 모색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
나 새롭게 시도된 그 글들이 시의 위의威儀를 잃지 않으려면 앞에 지적한 4
가지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시는 보통의 글과는 다른,
격조를 지닌 글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우리詩》6월호에서
출처 /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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