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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자유, 혹은 인문학의 정신 / 강신주

by 丹野 2010. 11. 11.

 

 

 

자유, 혹은 인문학의 정신

 

 

 

강신주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

 

그것을 일방적인 구호나 쇼맨쉽으로 오해하는 짐승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중에서-

 

 

 

 

 

1.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라는 철학자를 알고 있습니까?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란 프랑스 현대철학자가 말했던 적이 있지요. “모든 철학자는 두 가지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을.” 그만큼 스피노자는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그의 생각은 ?윤리학(Ethica)?이라고 불리는 난해한 책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코나투스(Conatus)’라는 개념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윤리학은 ‘코나투스의 윤리학’이라고 정이될 수도 있겠지요. 코나투스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유한자이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코나투스를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와의 연결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타자와 연결할 때 우리의 코나투스는 증진되거나 아니면 약화될 수 있습니다. 만일 코나투스가 증진된다면, 우리는 ‘기쁨’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반면 약화된다면, 우리는 ‘슬픔’의 감정에 빠지게 되지요. 문제는 타자와 마주치기 전에 우리가 그 만남이 기쁨을 가져올지 아니면 슬픔을 가여올지 미리 결정할 수 없다는 데 있지요. 어쨌든 왜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코나투스의 윤리학’을 제안하는지 분명해집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기쁨을 지향하고 슬픔을 피해야만 합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윤리학은 기쁨의 윤리학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기쁨의 윤리학 이면에는 어떤 비극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마주쳐서 나와 연결된 타자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거나 아니면 슬픔을 주게 됩니다. 문제는 기쁨을 주는 경우, 다시 말해 타자와의 연결이 나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이럴 때 그 타자도 과연 그만의 코나투스가 증진되어 기쁨으로 충만하고 있을까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기쁨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타자도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에 충만하리라는 것을 전혀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나만 기쁘고 그는 슬플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와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코나투스는 계속 증진되지만 그의 코나투스는 계속 위축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2.

 

나의 기쁨은 커지면 커질수록 타자의 슬픔이 심화될 수도 있다는 것, 이것만큼 우리 삶의 비극성이 드러나는 경우도 없겠지요. 나는 더욱 기뻐지지만 타자의 슬픔이 계속 심화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기쁨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슬픔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타자가 슬픔으로 시들어 자신의 삶을 유지할 힘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싸늘한 주검을 눈 앞에 두고 나는 나의 기쁨을 위해 타자를 착취하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 이성복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

 

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

 

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

 

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앞날」?그 여름의 끝(1990)?

 

 

 

시인은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음”을 한숨 섞인 목소리로 토로합니다. 타자를 놓을 수 없음은 그 타자가 나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반대로 타자를 잡을 수가 없음은 그 타자가 나로 인해 슬픔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기쁨이 타자의 슬픔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타자의 삶에 폭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에 대해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초조하고 불편한 상태에 끈덕지게 버티고 서 있을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나의 기쁨을 위해서 타자를 슬픔에 빠뜨려서도 안 되고, 또 그 반대로 타자의 기쁨을 위해서 나 자신의 슬픔을 견뎌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제안한 기쁨의 윤리학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을 지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쁨의 윤리학은 기쁨의 정치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3.

 

우리는 마침내 기쁨의 정치학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자유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해집니다. 나의 기쁨을 타자가 억압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타자의 기쁨을 내가 억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랑을 예로 들어볼까요.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보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은 외적인 강요나 의무감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사랑은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그와 함께 했을 때 생기는 기쁨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불행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는 그 사람이 억지로라도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유나 기쁨에서가 아니라 강요와 슬픔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여러분에게 진정한 기쁨이 찾아오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다른 데 있을 것입니다. 분명 여러분도 그 사람이 자유와 기쁨으로부터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만 합니다. 또 내 안에서 누군가의 자유를 제거하려는 욕망이 꿈틀거릴 때, 우리는 그 욕망을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지배당해서도 안 되고 누구도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의 정신입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타자와 연결하여 기쁨을 향유할 수도 있고, 아니면 타자와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슬픔을 피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기쁨과 자유, 이것이야말로 철학, 문학, 역사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의 궁극적인 꿈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나 시인들은 모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여 기쁨을 박탈하려는 시도에 대해 단호하게 저항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자유와 기쁨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 자유와 기쁨에 대한 교활한 억압이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민족 혹은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기쁨을 희생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주장이나, 아니면 문명의 발전은 경쟁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시끄러운 소음을 내고 있습니다. 자! 이제 시인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억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며, 억압될 수 없는 인간의 자유, 기쁨, 그리고 사랑을 시로써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철학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합리적 논리로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그것이 은폐하려고 했던 자유와 기쁨의 정치학을 전개하게 될 것입니다. 인문학, 그것은 기쁨을 지향하는 자유인의 힘, 혹은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려는 우리 삶의 힘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끝>

 

 

[출처]

 

 

 

 

인문학의 정신(강신주) (길담서원) |작성자 conting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