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역설, 세계화 그리고 우리
강신주
1.
서점에서 책을 살 때 우리는 당당한 주인으로 행세한다. 반면 구입한 책을 돈으로 환불할 때면 우리는 거의 비굴한 노예처럼 돈을 내주는 직원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자본주의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화폐를 가지고 있는 자는 주인이고, 상품을 가지고 있는 자는 노예가 된다. 워낙 순식간에 교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흔하게 이런 교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런 자명한 진리를 눈 앞에 두고서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 화폐는 교환의 수단이다. 그러나 화폐는 교환 수단 이상의 그 무엇이다. 화폐가 나의 손을 떠난 순간 나는 일반성(generality)을 상실하고 이제 한갓 상품이라는 특수성(particularity)만을 소유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처럼 화폐를 가진 자는 그 화폐의 가치만큼 교환 가능한 모든 상품들을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되는 반면, 하나의 특수한 상품을 소유한 자는 그 상품의 가치만큼의 다른 상품들을 잠재적으로 소유할 가능성을 제한받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하에서 이 사람이 다른 상품을 소유하려면 반드시 화폐를 매개로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하의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화폐와 상품 사이의 비대칭성 속에서 산다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비밀을 잉여가치에서 찾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잉여가치도 또 하나의 비밀, 즉 화폐가 상품에 대해 지니는 존재론적 우월성을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입할 수 있는 일반성을 확보해야만 달성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산현장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이유나 생산기계를 개선하려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이유도 모두 화폐를 얻기 위한 것이다. 결국 잉여가치의 발생조건은 화폐가 상품에 대해 갖는 존재론적 우월성이라고 말해야된다.
2.
고전경제학자들은 통화주의(Monetarism)나 화폐를 숭배하는 중상주의(Mercantilism)를 조롱했다. 그렇지만 실재로 공황의 시기에 다시 말해 신용체계가 붕괴될 때 사람들이 잡으려고 달려드는 것은 항상 화폐이다. 고전경제학자들과 신-고전경제학자들 모두에게 있어 화폐는 단지 가치의 척도이거나 지불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생각하지 말고, 보았어야만 했다.” 화폐의 힘은 교환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교환 뒤에 마치 교환 수단인 것처럼 숨는데서 존립한다. 상품과 등가인 것처럼 현상해야 화폐는 용이하게 상품과 교환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화폐는 상품으로 교환되어야만 하지만,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환 속에서만 잉여가치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화폐는 교환되어야만 하고, 화폐의 소유자가 교환을 통해 화폐 대신 상품을 갖게 되면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교환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역설은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을 반영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본의 잉여가치의 운동은 이런 현란한 역설을 통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화폐는 더 많이 돌아온다는 전제하에서만 상품과 교환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자본의 잉여가치 운동하에서 상품은 항상 풍부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폐는 항상 상품의 가치를 초월한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마치 상품이 가치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런 오류가 바로 고전경제학자들의 오류라고 마르크스는 지적한 바 있다. 상품보다는 교환이 중요하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교환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환에서 화폐가 지니는 존재론적 우월성에 있다.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폐가 상품을 통해 자신을 증식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
3.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의 경향성 법칙”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하에서 이윤율은, 마치 자연계의 어떤 체계 안에서 엔트로피가 자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그 체계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처럼, 점차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잉여가치가 감소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아가 화폐가 상품에 대해 갖던 존재론적 우월성이 잠식되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국으로 가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외국무역이 이런 파국의 경향성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어떤 폐쇄된 체계 내에서의 자본주의 운동은 스스로 파국으로 나아가게 되지만 체계를 확장함으로써 이런 경향성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 무역에 투자된 화폐(=자본)는 높은 이윤율을 낳게 된다. 왜냐하면 우수한 생산설비들을 지닌 국가는 상품을 자신의 국가 내에서 그 상품이 지닐 수 있는 가치 이상으로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선진국의 노동력이 여기서 더 높은 비중의 노동으로 실현되는 한, 이윤율은 상승한다. 왜냐하면 높은 질로서 지불되지 않았던 노동이 높은 질로 팔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윤율, 잉여가치, 나아가 화폐의 존재론적 우월성은 폐쇄된 민족국가의 모델 안에서는 사유되어질 수 없고, 이윤율 하락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해외 무역의 원리는 마르크스 당시 영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정책 이래로 본질적으로 변한 적이 없다. 단지 옷을 달리 입고 화장을 진하게 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영국이 “자유주의” 무역을 옹호할 때 ?자본론?을 썼다. 따라서 그는 해외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윤율 하락 경향성의 법칙”을 강조해야만 한다.
4.
지금 우리는 일반 이윤율 하락의 경향과 이에 수반하는 정보/부의 독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이 차례 차례로 전 지구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세계사적 움직임은 세계적 규모에서의 자본주의 내의 위기로 사유되어야 한다. 현재의 경기 침체 혹은 일반 이윤율의 하락은 더 이상 민족 경제의 활성화(=케인즈주의)나 혁신적인 기술진보를 통해 극복되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스스로 지속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 그 해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이윤율의 저하의 경향을 막고, 그 심층에서는 잉여가치를 확보하고,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화폐가 지닌 존재론적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해법은 지금 제3세계를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폐쇄된 국민 경제 체계를 갖고 있는 국가들의 무장해제로 실현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팍스아메리카나의 진정한 모습이자, 우리의 현실주의자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떤 지식인은 당당하게 아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하고 어느 대학은 아예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자랑한다. 우리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떠올려야 한다.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일본어로 사유를 하던 그 시절, 그리고 그것이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던 과거 우리 지식인들의 슬픈 초상화를 우리는 벌써 잊었는가!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과거 영국이 정복자의 역할을 수행했던 곳마다 정복된 민중들 사이에는 민족의식과 주권에 대한 욕망이 번져만 갔고, 결국 그 힘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패퇴시켰다는 것을 기억하자. 영국을 대표로 하는 제국주의적 의도와는 반대로 1차 세계 대전이 제국을 달성하기는커녕 역설적이게도 많은 민족 국가들의 탄생시켰지 않았는가!
5.
얼마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화폐가 미국의 화폐보다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여실히 경험했다. 다시 말해 우리 원화는 달러에 비해 화폐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결국 화폐라는 신 앞에서 우리가 주체로 서느냐 아니면 노예로 서느냐의 결단만이 항상 우리에게 남겨져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육체에 기원하는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간다는 것이 창녀의 삶과 얼마나 다르냐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우리가 이런 상품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이다. 많은 현실주의자들은 우리 사회에는 보편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미래상이 있을 수 없다고, 혹은 역사는 이제 종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현실주의는 일종의 허무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결국 자본주의라는 야만적인 경제현실에 대한 긍정이나 기존 질서에 대한 음험한 보수주의적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문제와 씨름하기 이전에 먼저 주변의 현실주의적 허무주의와 싸워야 한다. 화폐의 전지전능, 혹은 무한한 교환 가능성에 맞서서 교환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고 키워내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 자본주의하에서 우리가 주체로 선다는 것은, 당분간은-아니면 오랜동안-, 우리 자신이 그리고 타자가 교환 불가능한 존재임을 선언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주체로의 선언 속에서 화폐를 응시하고 맞서는 일은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화폐의 신성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방법이 드러날 것이다. <終>
[출처] 자본에관하여(강신주) (길담서원) |작성자 contin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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