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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계절을 향유하는 법 / 정유화

by 丹野 2010. 11. 19.

 

시와 산문 계간평



계절을 향유하는 법

 

 

 

                                                                                                                           정유화

 

 

시적 내용이 관념에 호소하는 경우는 주로 형이상학적 시 텍스트를 구성하게 되고, 감각에 호소하는 경우는 주로 형이하학적 시 텍스트를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분류는 시적 우열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 시 텍스트란 시적 수사법보다는 그 내용을 더 중시하는 것을 의미하고, 형이하학적 시 텍스트란 시적 내용보다는 그 수사법을 더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시적 형식과 내용 중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분류되는 양식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시 텍스트를 여러 독자들이 읽을 경우, 전자의 독법讀法으로 시 텍스트를 해석할 수도 있고 후자의 독법으로 시 텍스트를 해석할 수도 있다. 요컨대 독자들의 기질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질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시적 수사법에 의한 감각적 이미지를 관념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적 수사법에 의한 감각적 이미지는 인간의 오감을 작동시킨다. 감각에 호소하는 시 텍스트가 형이하학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오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다. 이러한 오감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시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은 묘사적 기법이다. 그런데 흔히 묘사적 기법을 단순한 장식적 수사로 보고 이것에 의해 표현된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진중한 의미는 사상한 채 순간적으로 감각만을 자극하고 사라지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묘사적 기법에 의한 감각적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오감만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오감은 이성, 즉 정신이나 관념으로부터 억압된 육체성의 세계를 여는 의미작용을 한다. 감각적 이미지가 오감을 작동시킬 때 우리의 육체는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의 질감을 통하여 전신적 기쁨을 향유하게 된다. 이 향유는 다름 아닌 카타르시스이다. 이러한 카타르시스 작용에 의해 이성에 억눌려 있던 감정을 발산하게 된다. 인간에게 육체와 마음의 병이 생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심리적으로 본다면 일상생활에서 적절하게 일어나야할 카타르시스 작용이 억제된 탓이 아닐까 한다. 다소 비약적이겠지만, 감각적 묘사를 의료콘텐츠로 잘 활용한다면 인간이 지닌 육체와 마음의 질병을 치유하는데도 유용하리라고 본다.

예의 시인들은 계절을 온몸으로 향유하기 위해 묘사적 기법으로 감각적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그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몸의 세계를 쇄신하는 전신적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시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먼저 봄을 온몸으로 향유하고 있는 시 텍스트를 만나보기로 한다. 


싱싱한 제철 햇빛이 나오는 계절이에요 쌉싸름한 봄바람과 함께 버무려 풋사랑 무침을 만들어 보세요 겨우내 잃었던 입맛이 바로 살아나죠 잎채소는 곱게 채 썰어 얼음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빼고요 냉이 달래 씀바귀 뿌리채소는 분량의 설렘을 넣고 조물조물 밑간을 해 두세요 (주의할 점; 모든 재료는 살살 다루세요 꽉꽉 주무르면 풋사랑이 짓무를 수 있으니까요) 동글동글한 그리움은 꼬치에 꿰어 살짝 구운 뒤 양념장을 쪼르륵 끼얹어 드셔도 맛있고요 질투가 심한 눈물조개는 석쇠에 굽기만 하면 되죠 방긋, 웃음을 터뜨릴 거예요 손질법이 조금 까다롭지만, 후식으로 살구나무 샐러드를 곁들여 보실래요? 아직 겨울이 묻어 있는 뿌리는 살살 털어내고요 줄기는 흐르는 새소리에 깨끗하게 씻으세요 연둣빛 조용한 접시가 좋겠어요 나무를 자연스럽게 세워 놓으시고요 그 위에 연분홍 살구꽃을 수북하게 얹으세요 이제, 새콤달콤한 벌 나비를 솔솔 뿌리면 완성! 자, 한 입 드실래요?


전문가의 조언 한 가지 ; 풋사랑 무침은 미리 무쳐 놓으면 안 돼요 햇빛이 불어서 흐물흐물해지거나 변색되기 쉬우니 상에 내기 직전에 버무리세요  

──「봄 레시피」 전문(유금옥, 『현대시』, 2009. 4)


제목인 ‘봄 레시피’를 해석하면 ‘봄 음식을 요리하는 법’, 혹은 ‘봄을 요리하는 법’ 등이 될 것이다. 봄과 관련된 음식을 요리하든 봄 자체를 요리하든 간에 ‘요리’라는 말이 환기하는 것은 바로 육체성이다. 관념적 세계인 정신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요리는 음식재료를 배합하여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다. 요리하는 과정은 인간의 오감, 즉 전신적 감각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음식재료를 보고 다듬고 조리하고 맛보고 냄새 맡는 과정 없이는 제대로 된 음식물을 요리해낼 수 없으니 말이다. 

제목에 걸맞게 이 텍스트에서의 주된 요리는 ‘풋사랑 무침’이다. 그런데 ‘풋사랑’은 음식의 재료가 아니기 때문에 음식처럼 ‘무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음식으로 무치고 있으니 모순이다. 앞에서 제목을 두 가지로 해석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봄 음식을 요리하는 것’은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요리한다는 의미이고, ‘봄을 요리하는 것’은 봄이라는 계절의 기호를 언어로 요리한다는 의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결국 ‘풋사랑 무침’이라는 것은 전자의 요리와 후자의 요리가 통합된 요리법을 의미한다. 곧 실질의 세계(물질)와 기호의 세계(언어)를 통합한 요리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풋사랑 무침’은 실질과 기호가 통합되어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돋우는 새로운 음식으로 창조되고 있다. ‘풋사랑 무침’의 기호적 재료는 싱싱한 봄 햇빛과 쌉싸름한 봄바람이고 실질적 재료는 잎채소와 조물조물 밑간을 한 냉이, 달래, 씀바귀 뿌리 등이다. 이 모든 재료는 살살 다루어야 한다. “꽉꽉 주무르면 풋사랑이 짓무를 수 있으니까”말이다. 이 언술에 의해 추상적이던 햇빛과 봄바람도 잎채소처럼 구체적인 음식재료로 전환하게 된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의 오감을 작동시키는 ‘풋사랑 무침’의 재료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양념장을 한 “동글동글한 그리움”과 석쇠에 구울 수 있는 “질투가 심한 눈물조개”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재료들은 시인의 마음에서 나온 음식재료들이다. 그 동안 이성적 세계에 의해 억압 받아오던 감정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음식재료들을 모두 넣고 무치면 비로소 ‘풋사랑 무침’의 음식이 탄생한다. 봄이라는 계절적 감각, 봄에 먹을 수 있는 봄나물, 시인의 마음에서 나온 감성 등이 어우러진 ‘풋사랑 무침’은 자연, 대지, 인간의 의미가 통합된 우주적 음식이다. 이 우주적 음식은 봄의 신선한 생기를 가득 담고 있다. 그래서 ‘풋사랑의 무침’을 한 입 먹으면 우리들의 몸은 신선한 생기로 쇄신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겨울과 대립하는 봄의 리듬을 타는 몸이 된다는 얘기이다. 이런 점에서 ‘풋사랑의 무침’은 인간적 삶의 리듬보다는 우주적 삶의 리듬을 타기 위한 요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풋사랑 무침’ 다음에 먹을 후식도 마련하고 있다. 그것은 살구나무 샐러드이다. 살구나무 샐러드 역시 겨울의 시간을 털고 봄의 리듬을 타게 해주는 음식이다. 살구나무의 뿌리에 묻어있는 ‘겨울을 살살 털어내고’라는 언술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구나무 샐러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줄기를 “흐르는 새소리에 깨끗하게 씻”어야 하고, 이어서 연둣빛 접시에 그것을 올려놓고 연분홍 살구꽃을 수북하게 얹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새콤달콤한 벌 나비를 솔솔 뿌리면 완성”이다. 이렇게 완성된 살구나무 샐러드는 화사한 봄풍경을 압축한 음식이다. 결국 ‘풋사랑 무침’으로 식욕을 만끽하고 ‘살구나무 샐러드’로 후식을 하고 나면, 우리들의 몸은 생기 충천하는 봄 그 자체가 되는 셈이다. 부연하면 온몸으로 봄을 향유하는 상승의 시간, 탈속의 시간이 되는 셈이다. 


알부민 링겔 한 병을 맞은 듯하다


이른 봄 나무의 심장과 혈관에서 채혈한

순도 100%의 청량한 맛

겨우내 매서운 눈보라 비바람 잘 견디어낸

고농축 엑기스


하동 지나 쌍계사 입구에서 맨 처음 채취한

고로쇠물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기도를 지나 목울대를 넘어 내 몸속

줄기세포마다 퍼지는 수액

알싸한 향기가 나며 마디마디 새움이 돋는 듯하다

움이 트고 잎이 자라

내 안에서 꽃이 필지도 몰라

노랑 빨강 온통 꽃 천지가 되겠지

물소리 새소리가 들릴 것 같아

오만 가지 생각의 가지들 다 쳐내야지


그래그래 예쁜 것들만 사랑스러운 것들만

가득했으면

가끔은 때 없이 흔들리는 바람결에

곁가지 속가지 흔들리기도 하겠지

──「봄맞이 행사」 전문(이섬, 『시와산문』, 2009년 봄호)


유금옥의 「봄 레시피」가 ‘음식요리’를 통해서 봄을 온몸으로 향유하고 있다면, 이섬의 「봄맞이 행사」는 ‘고로쇠물’을 통해서 봄을 온몸으로 향유하고 있다. 전자가 다양한 음식재료로써 봄을 향유하고 있다면, 후자는 단일한 소재의 ‘물’로써 봄을 향유하고 있다. 전자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후자는 단일한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이섬의 「봄맞이 행사」가 단일한 스펙트럼이기에 단조로울 수는 있으나 역설적으로 그만큼 단백·단아한 맛을 볼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텍스트는 봄맞이 행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 행사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쌍계사 입구에서 채취한 “고로쇠물 한 병”을 단숨에 마시는 일이다. 그런데 그 고로쇠물은 일상에서 마시는 물처럼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 물은 “봄 나무의 심장과 혈관에서 채혈한” 생명수이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생명의 피인 셈이다. 그래서 시인은 고로쇠나무를 인격체에 비유하여 “심장과 혈관”을 가진 것으로 언술하고 있다. 고로쇠나무는 죽음의 고통을 극복한 나무이다. “겨우내 매서운 눈보라 비바람 잘 견디어”내고 심장을 박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고로쇠나무는 일종의 통과제의를 거친 나무이다. 죽음의 겨울을 이기고 삶의 봄으로 귀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과제의를 거친 나무는 이전과 다른 신성한 나무이다. 생명수가 “순도 100%의 청량한 맛”을 낼 수 있는 것도 거기에 기인한다.

생명의 봄을 맞은 고로쇠나무는 자기 헌신적인 나무이다. 달리 표현하면 모성애를 지닌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주듯이 그 생명수를 아낌없이 인간에게 나누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고로쇠나무가 맞는 생명의 봄은 고스란히 인간의 몸으로 흘러든다. 곧 정신성의 원리가 아니라 육체성의 원리에 의해 그 생명수가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생명수를 인간이 섭취하면 인간 또한 그 이전의 모습과 달리 새로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그 생명수를 섭취하면 “알부민 링겔 한 병을 맞은 듯”이 오감이 작동되면서 나무로서의 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몸속/ 줄기세포마다 퍼지는 수액”을 통해 온몸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온몸의 감각이 전신적 기쁨으로 작용한다. “알싸한 향기가 나며 마디마디 새움이 돋는” 몸, 이 몸에는 미각, 후각, 촉각, 시각이 작동되고 있다. ‘노랑 빨강 온통 꽃 천지’인 몸에도 또한 시각이 작동되고 있으며, “물소리 새소리”를 들여놓은 몸에는 청각이 작동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고로쇠물’을 섭취하면서 불가시적인 봄을 육체성의 원리인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몸에는 봄의 리듬을 타고 있는 우주적 세계가 들어와 살게 된다. 시인이 우주화된 몸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똑똑똑, 두드리며 수박을 고른다

고인 물을 일깨우며 똑똑똑,

되돌아 나오는 소리로 내부의 붉음을 측정한다


검은 띠 문신 아래 깊숙이 숨겨둔

저수지, 거기에 갇힌 물길은


안으로 구부러진 벽을 더듬으며

둥글게 이어지는 트랙을 돌기만 했을 물길은


한 바퀴 두 바퀴 반복하여 다지는 힘으로

희고 뾰족하던 어린 씨앗을

조약돌처럼 모난 데 없이 까맣게 깎아내며


…반짝이다 비추다…날아오르다…

철썩이다…솟구치다 소용돌이치다…

푸른 물의 말들과는 닿지 못한 채


바람도 별빛도 노을도 들지 않는

밀폐된 길을 소리 없이 돈다


돌수록 단단하게 사각사각 부풀어 오르는

수문이 없는 저수지


검은 띠 문신도 더 부풀 수 없는 데 이르고

수목 한계선을 넘으며 무릎을 꺾는 나무들처럼

꿇은 무릎으로 기어서

달고 붉은 세계로 넘어갔을 물길은


똑똑똑, 바깥에서 두드리는 울림에

검은 씨앗이 이정표로 박혀있는

달고 붉은 길들을 낱낱이 일깨운다 똑똑똑,


똑똑똑, 수박을 고른다

아삭하게 측정되는 붉음의 반경으로

무르익은 단맛을 미리 엿듣는다

──「수박을 고르다」 전문(이순현, 『서시』, 2009년 봄호)


이 텍스트는 ‘봄맞이’의 텍스트와 달리 여름 수박에 대한 향유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묘사에 의해 오감의 일부 기관이 작동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수박의 단맛은 우리들에게 몸의 전신적 기쁨을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수박이 잘 익을수록, 수박의 생기가 가득찰수록 그 단맛은 배가가 될 것이다. ‘봄맞이’ 텍스트에서는 주로 사물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하여 몸의 전신적 기쁨을 향유하는 것이었지만, 이 텍스트에서는 그런 것보다는 “단맛을 미리 엿”보기 위한 그 예비적 과정을 상상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직접 먹음을 통한 묘사는 아니지만 단맛을 만들어가는 수박의 일생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시인은 단맛을 미리 엿보기 위해서 먼저 수박을 “똑똑똑 두드리”고 있다. 육체성을 통한 교감이다. 그 교감에 의해 수박이 내는 소리는 청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내부의 붉음”이 어떠한지를 시각적으로 떠올려볼 수 있게 해주는 상상작용을 한다. 그렇다면 청각과 시각을 작동시켜주는 그 소리의 진원지, 다시 말해서 그 소리를 내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수박 내부에 “고인 물”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붉음”은 “고인 물”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그러한 ‘고인 물을 일깨우면’서 수박의 일생이 다름 아니라 물을 다스려 왔던 과정 자체임을 상상하게 된다.

수박이 지닌 “검은 띠 문신”은 그 내부의 물길을 다스리기 위한 구형球形의 틀이다. 그래서 수박 내부는 “수문이 없는 저수지”가 된다. 그 저수지에 “갇힌 물길은” “바람도 별빛도 노을도 들지 않는 밀폐된 길을 소리 없이” 둥근 트랙처럼 돌면서 어린 하얀 씨앗을 조약돌처럼 매끄러운 검은 씨앗으로 키워가고 있다. 이러한 물의 쉼 없는 순환적 운동은 생명의 완성을 위한 고투苦鬪인 셈이다. “검은 띠 문신도 더 부풀 수 없는 데 이르고/ 수목 한계선을 넘으며 무릎을 꺾는 나무처럼/꿇은 무릎으로 기어서/ 달고 붉은 세계로 넘어갔을 물길”이라는 언술에서 그 고투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인간적인 삶으로 비유하면 일종의 통과제의에 해당한다. 흰 씨앗에서 검은 씨앗으로, 무미의 백색 세계에서 단맛의 붉은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고투의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박은 그 통과제의를 거치고서야 비로소 그 생을 완성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인은 수박 내부의 물길을 묘사적 기법인 감각적 이미지로 구성하여 단맛의 완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도 여러 감각을 작동시키면서 “달고 붉은 길들을” 가시적 현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벽을 더듬는’, ‘꿇은 무릎’ 등의 시각·촉각적 이미지, ‘철썩이다’, ‘사각사각’ 등의 시각·청각적 이미지, ‘달다’, ‘단맛’, ‘아삭하다’ 등의 미각적 이미지가 바로 그것들이다. 기실 시인이 미리 단맛을 엿본 이유는 과육이 되기까지의 생생한 그 과정을 육체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다. 주지하다시피 수박의 단맛은 물길의 헌신적인 노고에 의한 자기 결정체이다. 따라서 이를 먹는다는 것은 곧 ‘물길의 온 과정(여름)’을 육체적으로 흡수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시인들은 계절을 정신적(관념적)으로 향유하지 않고 육체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시인들은 이를 위해서 오감을 작동시키는 묘사적 기법인 감각적 이미지를 창조해내고 있다. 감각적 이미지는 자아와 사물과의 육체성의 교감을 가능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카타르시스 작용을 해주기도 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출처 / 시와 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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