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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사랑의 험난한 길, 히스테리와 강박증을 넘어서 / 이성복

by 丹野 2010. 11. 11.

 

 

사랑의 험난한 길, 히스테리와 강박증을 넘어서

 

-이성복과 라캉-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 이성복, 「앞날」, ?그 여름의 끝?

 

1. 진정한 사랑을 찾아 해매는 시인

 

1980년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라는 시집 한 권으로 우리에게 젊은 시인이 한 명 찾아옵니다. 그가 바로 이성복(李晟馥, 1952년 출생) 시인입니다. 서정시의 전통이 강했던 우리 문단의 분위기에 비추어 28살 젊은 시인의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언어 사용법은 당혹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가족을 ‘정든 유곽’에 비유하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시인의 몸부림은 가족 이데올로기에 뿌리깊이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이 시집에 들어 있는 「그해 가을」이란 시를 한 번 넘겨볼까요.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매장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를 아시나요.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 ?변신Die Verschollene?의 주인공이지요. 카프카의 소설은 가족을 전적으로 부양했던 그레고르가 어느 날 흉측한 벌레로 변하는 걸로 시작됩니다. 벌레로 변하면서 그레고르는 점점 가족 성원으로부터 배제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가족들은 벌레, 즉 그레고르의 시신을 버리고 즐겁게 소풍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지금 카프카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는 겁니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가족 질서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상징합니다. 가족 질서를 벗어나자마자 그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무관심과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 가족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종의 질서를 전제하고 있던 냉혹한 사회 조직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이 질서는 가부장적 가족 질서겠지요. 카프카를 탐독했던 28살의 젊은 시인은 자신의 우상을 따라 가족 질서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를 되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족 질서의 상징적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는 부정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에는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라고 절규가 등장했던 겁니다.

 

시인이 가족 질서의 억압성을 자각하도록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카프카의 도움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시인은 카프카를 읽어낼 수도 없었을 겁니다. 가족 질서에 순종적이었던 사람이 그 질서를 부정하게 되는 것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때일 겁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부모가 정한 귀가 시간을 점점 어기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볼까요. 가족이 아버지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인 억압 구조로 기능한다면, 사랑의 관계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수평적인 긴장 구조로 작동합니다. 수평적인 구조에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우리는 수직적 구조를 성찰할 수 있는 거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때에만, 우리에게는 기존 관계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수 있는 법입니다.

 

가부장적 가족 구조는 수직적인 억압 구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의 자리에는 ‘독재자’나 ‘신’과 같은 일체의 초월적인 지배자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결국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표면적으로 가족 질서에 대한 젊은 시인의 사적인 절규로서도 읽힐 수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모든 억압 구조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억압 구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것은 수직적 구조를 벗어나 수평적 구조를 획득하는 방법과 관련된 물음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가족 질서가 수직적 구조를 상징한다면, 수평적 구조는 사랑이란 관계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을 마무리하면서 젊은 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떠맡아야할 과제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소리에 맞추어 녹는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시집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특히 “한 번만 보고 싶음”, “만지고 싶음”, “살 부비고 싶음”, 그리고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은 사랑을 열망하는 시인의 속내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마침내 시인은 1986년에 ?남해금산?을, 그리고 1990년에 ?그 여름의 끝?이란 시집을 출간합니다. 특히 ?그 여름의 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집을 통해 이성복 시인은 사랑이란 수평적 관계가 가진 함축하는 난점과 가능성을 치열하게 숙고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분명 기쁨의 관계입니다. 물론 이 기쁨 때문에 번뇌와 슬픔도 찾아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당신을 통해서 기쁨을 얻을 때,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진 겁니다. 당연히 나는 당신과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그건 기쁨을 계속 유지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도 나와의 만남을 통해 기쁨을 향유할 수 있을까요? 「앞날」이란 시에서 시인은 직감합니다. 분명 자신은 당신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 있지만, 당신은 그다지 기쁨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사랑의 관계가 함축할 수 있는 가장 큰 딜레마에 시인은 빠져 있는 겁니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을 보내야만합니다. 그렇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입니다. 당신을 보낸다면 나는 기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시인은 노래했던 겁니다.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급한 대답보다는 조금 더 인간의 마음, 욕망, 그리고 사랑을 숙고하도록 하지요. 너무 심각한 주제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정신분석학이 있습니다. 라캉은 사랑을 성찰할 때 우리가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줄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2. 우리는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정신분석학의 근본 전제를 아시나요? 정신분석학은 인간을 위대한 존재라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숙아’로 태어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성격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초식동물을 생각해보세요. 새끼가 태어날 때 초식동물은 한두 시간 안에 걸어서 태어난 곳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출산의 피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와 같은 육식동물들이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인간의 갓난아이는 어떤가요? 바로 걸을 수도, 혼자서 먹을 수도 없습니다. 최소 몇 년 동안 부모의 보살핌이 없다면, 갓난아이는 생존하기도 힘들 겁니다. 어쩌면 갓난아이가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 다시 말해 사랑받으려는 충동도 이로부터 기원할지도 모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년 시절의 이런 충동이 성숙한 인간에게도 집요하게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사랑받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지속적인 사랑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것, 다른 말로 바꾸면 부모가 금지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가령 아이가 자신의 성기를 만지면서 쾌락을 느낍니다. 부모가 금지하면, 아이는 성기와 관련된 자기성애적인 쾌락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 경우 자기성애적인 쾌락을 가져다주었던 아이의 성기는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마침내 아이는 욕망의 주체로 태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는 금지를 수용하지만 동시에 금지된 것을 욕망하면서 탄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라캉은 “법과 억압된 욕망이 동일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것이다.”(?에크리(Écrits)?)라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따라서 욕망 주체는 분열된 주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라캉이 욕망의 주체를 $라고 표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분열’을 뜻하는 사선(⁄)을 ‘주체’를 뜻하는 S(subject; sujet)에 덧붙인 것이지요. 반면 라캉은 금지된 욕망 대상을 ‘대상a(object a; objet a)’라고 표기합니다.

 

환상은 가장 일반적 형식, 즉 공식 $◇a로 정의된다. 이 공식은 내가 이 목적을 위해 대수학에서 수용했던 것이다. 여기서 ◇는 “~을 욕망한다”라고 읽어야 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도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 공식은 절대적인 비-상호성(non-reciprocity)에 기초한 동일성을 나타내는데, 이 관계는 동시에 주체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에크리(Écrits)?

 

욕망 주체, 혹은 간단히 주체는 ‘대상a’를 욕망합니다. ‘대상a’는 ‘잃어버린 쾌락’이자, 주체가 집요하게 회복하려는 상실된 쾌락의 잉여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어느 아이가 꿀을 먹고서 쾌락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는 “꿀을 먹지말라”고 명령을 합니다. 금지를 아이가 받아들였다면, 금지된 꿀은 ‘대상a’가, 아이는 욕망하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된다면, 어른인 그가 욕망하는 음식은 대부분 금지된 꿀, 즉 ‘대상a’의 아우라를 가진 것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대상a’가 유년 시절에만 만들어진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청년이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쾌감과 만족을 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보지요. 불행히도 양가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로 두 사람은 만나는 것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두 사람에게 상대방은 ‘대상a’로 남아서 미래 그들의 사랑을 지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새로 만난 이성이 과거 금지된 애인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면, 두 사람은 모두 쉽게 새로운 그, 혹은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 쉬울 테니까 말입니다.

 

때로는 ‘대상a’가 주체를 욕망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금지된 꿀이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혹은 금지된 사랑이 자신을 욕망하는 것처럼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캉은 $◇a라는 공식에서 ◇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을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겁니다. 어쨌든 라캉에게 있어 주체에게 ‘대상a’는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지요. 그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어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 타자의 욕망 대상, 즉 ‘대상a’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겁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타자를 알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겁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인 겁니다. 과연 나의 욕망을 지배하는 ‘대상a’는 무엇일까요?

 

3. 히스테리와 강박증 사이에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게는 정신에 있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그나마 존재했지만, 라캉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정신병(psychosis; psychose), 신경증(neurosis; néurose), 그리고 도착증(perversion; perversion)이란 세 임상구조 중 하나에는 반드시 속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신병, 신경증, 그리고 도착증은 수직적 가족질서에 속할 수밖에 없는 유년 시절의 삶 때문에 우리 내면에 구조화된 것입니다. 세 임상구조 중 빈도수로 보면, 정신병과 도착증은 매우 적은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과 도착증은 진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라고 일컬어집니다. 다수가 따르면 정상이고, 소수가 따르면 비정상이라는 것이고 일상적인 통념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대부분 사람은 신경증에 지배를 받고 있지만, 그것을 정상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라캉에 따르면 신경증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대부분의 남자를 지배하는 강박증(obsessional neurosis; néurose obsessionnelle), 그리고 대부분의 여자를 지배하는 히스테리(hysteria; hystérie)가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강박증에 걸린 사람, 다시 말해 대부분 남성들의 정신구조를 들여다보도록 하지요.

 

남자는 상대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과 관계하지 못하고 단지 상대에게 각인된 ‘대상a’에 대해서만 관계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 원인을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타자인 성적 상대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이는 환상과 다르지 않다.-?세미나(Seminar)ⅩⅩ?

 

라캉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a라는 주체 탄생의 공식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남성은 상대방에게서 금지된 욕망 대상, 즉 ‘대상a’만을 찾습니다. 물론 과거 쾌락의 흔적으로서 ‘대상a’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방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상대방 여성에게 투사된 ‘대상a’만을 그녀에게서 추구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에게 있어 여성은 그녀만의 고유한 욕망을 가진 주체로 여겨질 수가 없지요. 그래서 라캉은 말했던 겁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 원인을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타자인 성적 상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성 대부분이 속해 있는 히스테리라는 임상구조는 어떨까요? 히스테리에 대한 라캉의 언급은 매우 난해하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라캉을 직접 인용하기 보다는 그의 정신분석학을 임상적으로 평이하게 소개했던 핑크(Bruce Fink)의 이야기를 통해 히스테리에 접근해보도록 하지요.

 

강박증자는 성관계에 연루되더라도 상대를 ‘대상a’의 우연적인 ‘용기’나 ‘매체’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상대는 대체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것일 뿐이다. (…) 이에 반해 히스테리 환자는 성적 상대인 타자를 강조한다. 그녀는 타자의 욕망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그 욕망 대상이 된다. 환상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타자의 대상으로 위치시키고,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애인이나 배우자인) 타자는 욕망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다.-?라캉 정신분석학에 대한 임상적 접근세미나(A Clinical Introduction to Lacanian Psychoanalysis)?

성관계를 맺을 때 강박증자, 즉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대상a’의 우연적인 용기나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핑크는 지적합니다. 당연히 그에게 있어 여성은 “대체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핑크의 지적은 강박증에 대한 라캉의 논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핑크는 히스테리는 강박증과는 반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강박증자에게 중요한 것이 자신의 욕망이었다면, 히스테리 환자에게서 중요한 것은 반대로 타자의 욕망입니다. 히스테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 여성은 상대방 남성이 욕망하는 대상, 즉 ‘대상a’가 되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상대방 남성의 욕망 대상이 되려는 노력 자체는 여성의 실존에서 갈등의 요인으로 기능하게 될 겁니다. 히스테리가 신경증에 속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지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아는 남동생이나 오빠에 비해 부모로부터 부족하게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여아는 부모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부모가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려고 집요하게 노력할 겁니다. 어머니의 일을 도와준다든가, 아니면 집안 정리를 하면서 말이지요. 마구 어질러 놓는 남동생이나 오빠에 비해 여아가 부모에게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부모의 욕망을 읽고 그것에 자신을 맞추었니까, 그런 착시 효과가 생기는 겁니다. 여아의 조숙성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숙이라기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전략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유년 시절의 모습이 성장한 여성에게서 히스테리로 반복되는 겁니다. 이제 이성복 시인의 「내일」이란 시가 분명하게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시인은 자신의 기쁨과 타자의 기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이 타자에게 기쁨을 주지 못할까 노심초사하지만, 동시에 시인은 자신의 기쁨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 히스테리를 넘어서겠다는 시인의 의지라면, 타자의 기쁨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강박증을 극복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히스테리와 강박증 사이에 미묘한 균형을 잡을 때에만 가능한 겁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완전히 맞추려고 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의 욕망에만 매몰되지 않아야만 합니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동시에 긍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사랑이란 위태로운 감정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법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랑이란 위태로운 줄타기에 숙달되지 않는다면, 남성은 강박증 쪽으로, 그리고 여성은 히스테리 쪽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노력해야만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와 타자 사이에서 아찔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평지를 걷듯이 사랑의 줄타기가 편해질 때가 올 겁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마침내 남성이라면 강박증을, 그리고 여성이라면 히스테리를 극복했을 겁니다. 마침내 이성복 시인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우리는 내면을 지배하는 수직적 가족질서로부터 벗어나서, 사랑이란 수평적 관계를 구축하게 된 셈이지요. -끝-

 

[출처] 이성복과 라캉 (길담서원) |작성자 conting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