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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시 텍스트를 건축하는 세 가지 시적 코드 / 장유화

by 丹野 2010. 12. 5.

 

 

 

시 텍스트를 건축하는 세 가지 시적 코드

──김신영론

 

 

 

정유화

 

 

 

1.

김신영 시인이 즐겨 사용하는 시적 코드는 세 가지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코드를 변환해 가며 다양한 시 텍스트를 산출해 가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세 가지 시적 코드를 살펴보면, 그것은 먼저 대지와 관련되는 식물적 상상력이다. 다른 하나는 구원의 세계를 욕망하는 기독교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동일성identity 추구의 상상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 가지 시적 코드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코드는 상호 소통·융합하면서 시적 긴장과 시적 의미의 다채로움을 빚어내는 토대가 되고 있다.

김신영 시인이 코드화하고 있는 식물적 상상력은 매우 독특하다. 흔히 대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식물적 상상력을 코드화할 경우, 그것은 주로 ‘생명’을 창조하는 대지모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이와 달리 그가 식물적 상상력을 코드화한 ‘생명’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그래서 독자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대지에 뿌리박은 식물들의 ‘생명’ 이미지를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을 통해서 탐색해 보도록 하자.

 

척박한 땅을 밀어올리며 영양을 섭취하였다/ 엽록소 없는 구차한 기생으로 나의 생존을 이루어간다/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류의 일종으로 살아가는/ 내 치졸하고 왕성한 분해 능력을 그대 혹시 보았는가/ 낙엽과 땅과 그대의 생살,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나무를 무너뜨리고 땅을 갉아먹고/ 그대를 불태우는, 그대가 모르는 나의 뒷면/ 비가 오나 해가 비치나 사람들 모르게 / 세상을 변절시키는 것이 내 생이라면/ 그대 내게서 멀리 떠나 내가 없는 곳에 살라/ 내 화려한 망사나 필수 비타민보다 질긴 생존 능력을,/ 그리고 나의 균사, 뻗어나가 숲을 침식시키는 부당함을/ 강력하게 논하여다오/ 나의 자실체 공간을 배회하지 못하도록,/ 나를 겨울 같은 눈 속에 가두어다오/ 아니아니 저 건조한 사하라 사막에,/ 티벳의 고원에 나를 두어/ 사방에 뻗어가는 나의 썩음증/ 나의 물질 분해 끝이 나도록/ 거듭되는 순환의 고리 끊어다오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전문

 

 

시인은 망사버섯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적 이미지로 치환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치환된 망사버섯의 생명적 원리를 긍정하지 않고 매몰차게 부정하고 있다. 망사버섯에 대한 부정의식을 나타내는 언술을 보면, ‘엽록소도 없이 구차한 기생’을 한다는 것, ‘동물도 식물도 아닌 군류의 일종’으로 산다는 것, ‘치졸하고 왕성한 분해능력’만 지녔다는 것, ‘나무나 땅을 무너뜨리거나 갉아 먹으며’ 살고 있다는 것 등이다. 물론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존재로서의 망사버섯은 결국 “사람들 모르게/ 세상을 변절시키는 것”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가 망사버섯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망사버섯이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기생’하며 산다는 것, 자기 정체성도 없이 ‘균류’로 산다는 것, 타자의 삶을 갉아 먹거나 무너뜨리며 산다는 것 때문이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망사버섯은 모든 생명체들을 ‘썩음’으로 만드는 부패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사버섯은 화려함을 치장하며 “질긴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생명의 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겨울 같은 눈 속에 가두어” 달라고 하거나 “저 건조한 사하라 사막에” 놓아 달라고 호소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망사버섯의 생명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의 비는 유기물 형성하고/ 산소를 부르고 나의 생명을 부르고 그만 또 너의 호흡을 부른다”라는 언술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우주 순환의 원리를 순수하게 수납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거역할 수 없는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두고 스스로 “이율배반”이라고 자백한다. 그러면서 “나의 정원, 화려한 망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시인은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 방식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를 시인 자신의 삶으로 치환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시인 자신의 생존 방식에 대한 부정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타자화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부정을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지닌 주체적 삶의 원리를 찾고자 할 뿐이다.

따라서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면, 대지에 대한 식물적 상상력도 변모하게 된다. 즉 생명을 부정하는 의식에서 생명을 긍정하고 창조하는 대지모신의 존재로 돌아오게 된다.

 

퉁퉁한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머리에 수건을 얹어/ 모자를 쓰고/ 쑥밭에 앉아/ 쑥을 뜯으시며/ 쑥떡을 해먹고/ 쑥밥을 해먹고/ 쑥을 말려 약을 해먹던/ 쑥덕쑥덕 모여살던/ 쑥대밭이 없다/ 달콤 쌉싸름한 어머니/ 저 푸른 초원 위에 삼천리마다/ 넘쳐나던 어머니가 없다/ 오호 여기 쑥 한 뿌리 심어야 하겠다/ 뿌리에서 뿌리로 이어지는/ 어머니의 인생을 심어야 하겠다/ 머지않아 이 언덕/ 쑥대밭이 될 것이다

 

──「쑥대밭」 전문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과 달리 이 텍스트는 생명에 대한 부정의식이 전혀 없다. 오히려 생명의 터전이었던 ‘쑥대밭’이 자본주의의 산물인 골프장에 의해 밀려난 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골프장 안의 ‘푸른 초원’도 생명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공간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의 공간이다. 따라서 ‘삼천리 금수강산’에 자생적으로 번식하던 ‘쑥대밭’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을 상품화하고 획일화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욕망을 위한 하나의 종속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공간이 억압되고 훼손될 때, 인간과 자연은 유기체적인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시인은 쑥과 인간이 유기체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생명을 나누고 가꾸는 상생의 미학을 욕망한다. 쑥을 떡으로도 해먹고 약으로도 사용하지만, 그 쑥을 관장하던 어머니를 다시 그 대지에 심겠다는 의지적 욕망이 이를 예증해 준다. 주지하다시피 대지는 대지모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 텍스트에서 ‘어머니’는 대지모신으로 현현한 존재이다. 그 어머니에 의해 대지는 다산의 풍요를 창조해낼 수 있다. “뿌리에서 뿌리로 이어지는” 무궁한 생명체를 잉태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은 자연의 생명을 억압하고 종속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해체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로 상징되는 여성의 세계, 여성의 자궁이다. 시인이 여성으로서 이렇게 자기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을 세울 때 생명의 존재는 환한 빛을 발하게 된다.

 

 

 

2.

김신영 시인이 건축해 내는 시적 세계는 독자를 향하여 요란을 떨거나 설득을 강요하거나 과잉된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그의 시적 세계는 내면 지향적이다. 그래서 그는 시적 대상과 무언의 대화를 통하여 자아와 대상과의 존재적 합일을 내밀하면서도 강렬하게 욕망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구원의 세계를 욕망하는 기독교적 상상력이 여기에 해당하는 코드이다. 예의 이 코드는 대지적 삶을 구원하는 대지모신인 ‘어머니’의 코드를 변환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지적 삶을 천상적 삶으로, 어머니의 코드를 하나님의 코드로 변환한 것이다. 그는 이 코드 변환을 통해서 유한자로서의 삶을 초월해 무한자인 ‘신神’의 세계로 입문하려는 고행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꺼이/ 신神에게로 가까이 가고 싶다/ 친구여,/ …(중략)… / 첨벙이며 흔들리며 살찐 하늘 가 보고 싶다/ 여기 황폐한 문지방이며 무너진 흙담을/ 일으키어 내 출렁이는 바닷가 별들과/ 유성이 되어도 좋은 밤을 맞고 싶다/ 눈비 쏟아지는 겨울에서/ 비바람 부대끼는 여름에도/ 미씨개꽃 씨알 뼈에도 귀대고/ 나는 섬에서 솟아나는 온기溫氣를 느끼고 싶다/ 신神이 오는 바닷가에 드리운 내 얼굴/ 그 섬에서 나의 불가사의를 씻고/ 내가 피워올리는 향기로운 촛불로/ 밝혀진 궁전에서, 비어있는/ 가슴 가슴을 채우고 싶다/ 그렇게 기꺼이 신神에게로 / 가까이 가고 싶다

 

──「가벼운 섬·1」에서

 

 

이 텍스트 전체는 간절한 소망의 시적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 텍스트를 열고 닫는 어조가 “신神에게로 가까이 가고 싶다”라면, 이 어조로 휩싸인 내부공간에는 “하늘 가 보고 싶다”, “좋은 밤을 맞고 싶다”, “온기溫氣를 느끼고 싶다”, “가슴을 채우고 싶다” 등의 하위 단위의 소망적 언술이 배치되어 있다. 이 정도로 시인은 ‘신神’적 존재인 ‘하나님’의 세계로 입문하려는 간절한 욕망을 품고 있다.

현재 시인은 바다의 섬에 외로이 갇혀있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그 섬은 “황폐한 문지방”과 “무너진 흙담”으로 된 공간이기에 인간의 거처로써 기능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부정의 부정이 긍정을 만들듯이, 시인이 존재하는 지상(섬)이 행복한 공간이 아니기에 역설적으로 행복한 공간인 천상의 세계로 지향하게 만든다. 그래서 시인은 그 외로운 섬에서 하늘, 별, 유성 등을 보면서 신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신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고행 의식(통과의례)을 치러야 한다. 그가 ‘눈비 오는 겨울’과 ‘비바람 부는 여름’ 등, 고된 시련의 시간을 겪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을 거친 연후에 피우는 “향기로운 촛불”은 신과의 간접적인 대화를 상징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행위는 논리를 초월한 행위이다. 그가 “불가사의를 씻고”라고 한 언술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쨌든 신과의 대화는 구원의 희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 구원은 자기 고행과 믿음이 확실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씨로 돌아가/ 언젠가 오늘이 되기까지 / 나의 나됨을 지우고 / 너의 기억조차 모래 속에 묻어 버리고/ 사막의 비바람을 기다릴 수 있다/ 시간 속에 나를 묻고/ 한차례 폭우가 몰고 올 환희의 그 날을

 

──「사막의 꽃」에서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나됨을 지”워야 한다. 이는 자기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너의 기억조차 모래 속에 묻어”야 한다. 여기서 ‘너’는 유한자인 인간으로서 고통 받았던 존재이다. 이렇게 나와 너를 지우고 묻는 것은 일종의 재생을 위한 상징적인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기다리는 재생의 상징적인 행위인 것이다. 시인은 그 재생을 위해 “사막의 비바람”을 기다리는 고행의 시간을 감내한다. 물론 그 재생은 신의 재림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 텍스트에서는 바로 ‘폭우’가 상징적인 신의 재림이다. 결국 폭우에 의해 ‘나’는 영원한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신을 통한 구원의 세계를 욕망하고 있다. 그 구원의 세계를 달리 표현하면 아마도 존재전환의 삶이 아닐까 한다.

 

 

 

3.

김신영의 시를 건축하는 또 다른 하나의 시적 코드는 동일성 추구의 상상력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화 사회, 인터넷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시간과 자본의 예속을 벗어날 수가 없다. 시간이 곧 자본으로 환원되는 현실에서, 인간은 그 시간에 종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시간을 주체적으로 운용해 갈 수 있는 능력을 차츰 상실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시간이 주체가 되어 인간의 삶을 조정해 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시간과 자본의 타자성이 되어 자기 소외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동일성 상실이다. 동일성을 상실하게 되면, 내면의 ‘나’와 외면의 ‘나’가 대립·갈등하고, 마찬가지로 나와 타자(세계)가 대립·갈등한다. 시인의 삶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동일성 추구를 위해 시 텍스트를 산출해 나간다.

 

우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강물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세월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두 번 다시 그 세월에/ 그 강물에 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머리를 짓누릅니다./ 언제 우리가 만나서 즐겁게 웃었던 밤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고/ 다시 눈내리는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어도/ 다시 우리는 강물에 함께 발 담그는 세월을 낚지 못합니다./ 갈 수 없어 미안합니다./ 보고 싶어 꽃잎을 띄우며 잎차를 마시지만/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잉태를 기다리는/ 뜻모를 날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좋은 밤이 오면/ 언젠가 다시 같은 강물에/ 발 담그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전문

 

이 텍스트에서 ‘우리’는 시간의 타자성이 되어 “강물에 함께 발 담그는 세월을 낚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는 분리되고 만다. 그 분리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예의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이다. 하지만 시인은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는 시간을 맞지만 시간의 타자성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잉태를 기다리는/ 뜻모를 날개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가 아직 시간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좋은 밤이 오면” 함께 ‘발 담글 날’이 있을 거라고 기약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그 기약의 시간이 미래 추정의 부사 “언젠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현실적으로 자기 동일성 추구가 어려워지자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산물인 인터넷을 사용하여 자기 소외와 상실을 극복해 나간다. 일종의 아이러니다.

 

멀고 먼 지구 반대편/ 이역만리 떨어져 있다 해도/ 화면 앞에 앉으면 지척이 되는/ 메신저 네트워크/ 강변은 사람들 그림자 넉넉하고/ 낭만의 곡조가 흐르고/ 행복에 박자를 맞추어 답장을 하고/ 다시 돌아온 메시지의 감격시대/ …(중략)… / 소식 못 들어 애닳던 우리들의 편지가/ 구절구절 행복으로 다가오는 연서이다.

 

──「메신저 네트워크」에서

 

메신저 네트워크는 시공간을 초월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利器이다. 시인은 이를 통하여 시간의 타자성을 극복하고 있다. ‘나’는 이역만리 떨어져 사는 ‘어머니’와 화면을 매개로 하여 마치 마주 보고 얘기하듯이 서로의 안부(답장)를 주고받는다. 그 소통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기에 더욱 실감이 난다. 시인은 이를 두고 “메시지의 감격시대”라고 언술한다. 이렇게 해서 ‘나’와 ‘어머니’는 단절되어 생긴 외로움과 그리움을 해소하고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다. “행복으로 다가오는 연서”의 동일성으로서 말이다.

지금까지 탐색해온 바와 같이, 김신영 시인의 시세계는 대지적 세계, 천상적 세계, 그리고 일상적 세계라는 세 축의 코드가 중심이 되고 있다. 그 코드가 산출하는 의미는 생명의식, 신과의 합일, 동일성 추구 등이다. 이것이 바로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시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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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등이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출처 /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계간평 http://cafe.daum.net/k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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