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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꽃에게 길을 묻다 / 박강순

by 丹野 2010. 12. 5.

 

 

꽃에게 길을 묻다

─선암사 홍매

 

 

 

                                                    박강순

 

 

 

 

 

매화의 아름다움이 어디 있나뇨?

세인이 말하기를 매화는 늙어야 한다 합니다.

그 늙은 등걸이 용의 몸뚱어리 뒤틀려 올라간 곳에 성긴 가지가 군데군데 뻗고

그 위에 띄엄띄엄 몇 개씩 꽃이 피는데 품위가 있다고 합니다.

매화는 어느 꽃보다 유덕한 그 암향이 좋다고 합니다

백화가 없는 빙설리에서 홀로 소리쳐 피는 꽃이 매화밖에 어디 있느냐 합니다.

──김용준, 「매화」, 『근원수필』에서

 

 

 

 

집 바로 뒤에 산이 있다. 산이 가까이에 있으니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운동화만 갈아신으면 가볍게 산에 오를 수 있다. 나무를 보면 정말 계절을 느낄 수가 있다. 매섭게 추워도 봄이 오는 가지는 물기를 머금어 색깔이 촉촉해지고, 아무리 더워도 가을을 맞는 나무는 잎사귀에 물이 빠져서 그 색깔이 부서진다. 아무 생각 없이 숲 속을 걸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차올라 처음에는 무겁던 발이 나도 모르게 가벼워진다. 더군다나 숲 속에는 계절에 따라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이 피어난다. 하늘을 우러르며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행복하지만, 가만히 숲 속을 들여다 보면서 걸어가면 작은 꽃이 나를 보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여운 잎사귀를 가진 풀잎이 나를 보고 손짓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길 모퉁이에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는 녀석을 만나면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기도 하다.

 

유월 중순경에 산에 오르면 친구처럼 반드시 들러서 안부를 묻는 나만 알고 있다고 여겼던 ‘노루발’ 군락지가 있다. 노루발은 꽃이 마치 노루발처럼 생겼다고 이름이 붙여진 아주 귀여운 야생화다. 잎은 타원형으로 도톰하여 제법 기품있게 생겼고 그 위로 꽃대를 뻗어 작고 하얀 꽃잎이 피어난다. 군락을 이루어서 한꺼번에 피어나면 보기에 좋아 꽃 필 때쯤이면 맞추어서 몇 년째 그 언저리를 찾아가 만나곤 하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필 때를 맞추어 그 모퉁이를 찾아갔는데 있어야 할 곳에 노루발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욕심 사납게 떠갔는지 움퍽 삽으로 파진 자리가 완연하고 하얀 꽃은 자취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 언저리에 남아있는 노루발에게 섭섭한 마음을 전하고 마음속의 보물을 잃은 듯 서운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 왔다.

 

사람들은 꽃이 사람을 위해서 피어난다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그것을 가까이에 두고 보기를 좋아한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기아나’라는 나라에 탁상분지라는 희한한 지형이 있다. 이 탁상분지는 1500미터 정도 높이의 탁자처럼 생긴 지형으로 그 안에 직경 1킬로 정도의 우물 같은 웅덩이가 수십 개 있는 미스테리한 지형이다. 그 우물 같은 지형의 형성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그 다큐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다가 더 흥미 있는 화면을 발견했다. 그 탁상분지는 물이 부족하여 건조한 데서 잘 사는 식물로 생태를 이루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난’ 종류의 꽃이 자란다는 것이다. 화면에서 보여주는 꽃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꽃은 세상에 몇 개 피어나지도 않는 희귀종이라고 하였다. 그 높은 위치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다니,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피어난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늘 꽃이 누군가를 위해 피어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꽃이 그 자신을 위해서 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사람들은 왜 꽃이 사람을 위해서 피어난다고 생각을 할까?

 

 

 

 

■선암사 홍매

 

순천에 있는 선암사는 참 아름다운 절집이다. 우선 입구를 걸어들어 가는 계곡에는 사시사철 졸졸 물소리가 정겹고, 그 정겨운 계곡 위에는 나라 안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승선교라는 구름다리가 있어 언제 보아도 우아하고 정갈한 모습이 이름처럼 하늘을 오르는 듯 빼어나다. 승선교를 건너가면 강천루가 기다리고 있고 나무들이 키재기를 하고 있는 숲길은 그윽하고 장엄하다. 언제든 선암사 가는 길은 편안 하면서 경건하다. 모든 절 안에 건물들은 맡은 자리에 제대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고, 거기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해우소’ 건물은 한번쯤 다리를 떨면서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암사를 한번 더 찾게 만드는 것은 절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된 나무들이다.

 

이른 봄에는 노란 산수유가 흐드러지고 여름에는 만나기도 힘든 백모란이 후원에 가득하다. 가을에는 은행나무가 뚝뚝 떨어져 기와 담장 위에 노란 잎들이 두껍게 쌓이고 겨울에는 장군봉에서 내려온 하얀 눈이 울창한 편백나무 숲을 덮어버린다. 봄에도 눈이 부시고 여름에는 서늘하며 가을에는 색깔이 넘쳐나고 겨울에는 더 신기한 향기가 가득 차는 곳이 선암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암사가 매력적인 것은 늙어서 아름다운 매화나무를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을 지나 원통전 뒤로 가면 늠늠하고 잘 생긴 매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수명이 600년쯤 된 이 나무는 매화나무 치고는 키가 크고 가지가 옆으로 넓게 펼쳐져 있어서 한눈에 보아도 기품이 있다. 나무가 한 자리에서 600년을 지낸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아직도 그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욕심 많은 사람들의 손을 안타고 나무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끊임없이 하고 있겠는가! 늙은 매화나무는 우리가 흔히 보는 청매처럼 꽃을 많이 달지 않는다. 띄엄띄엄 노령의 나무가 힘들게 피워낸 꽃은 그윽한 향기가 일품이고 꽃 또한 맑아 옛 어른들이 어째서 그렇게 매화를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근원 선생님이 “나는 구름같이 핀 매화 앞에 단정히 앉아 행여나 풍겨오는 암향을 다칠세라 호흡도 가다듬어 쉬면서 격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에 힘을 씁니다.”라고 쓰신 것처럼 이 나무 앞에 서면 호흡도 가다듬고 쉬어야 할 것 같다.

 

원통전 뒤에 이 매화나무를 지나치면 무우전 담을 끼고 홍매가 줄지어 서 있다. 고색창연한 담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오래된 홍매나무는 꽃을 피지 않아도 그림이다. 흰 매화는 아무래도 많이 있지만 오래된 홍매는 쉽게 만나기가 어렵다. 희고 깨끗한 매화도 아름답지만 이즈음에는 이상하게 회색 겨울에 점을 찍는 듯한 붉은 홍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홍매는 조금 더디게 피는 모양이다. 분명히 원통전 매화나무에는 꽃이 피었는데 무우전의 홍매는 만들어 붙인 것 같은 단단한 꽃봉오리를 가지에 달고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것 아닌가.

 

그 해에는 이상하게도 선암사 홍매가 활짝 핀 모습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부산에서 순천 선암사까지는 3시간정도 걸린다. 다음주 토요일이면 꽃이 피겠지, 한번 더 오면 꽃을 보겠지……. 하지만 그 다음주에 가 봤어도 봉오리는 아직 반도 벌어지지 않았다. 한번 더 하고 그 다음주에 선암사를 다시 찾았다. 꽃이 피기는 피었다. 활짝 피지는 않았지만 그냥 봉오리 몇 개가 터졌다고나 할까, 참으로 야속했다.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겠구나.

 

그 때 분명히 알았다. 꽃은 나를 위해 피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이 혼자 착각하고 사람이 혼자 섭섭해하고 사람이 혼자 슬퍼한다는 것을……. 활짝 핀 홍매를 볼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그와의 인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암사 홍매는 내 마음속에서 활짝 피고 있다는 것을.

 

 

꽃을 찾아 다니면서 꽃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만남이라는 귀한 인연의 법을 배우고 기다림이라는 소중한 마음가짐을 배우고, 오래 두고 만나기 위해서는 멀리 두어야 하는 것도 배운다. 진정 매화처럼 향기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추운 겨울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게도 꽃을 대하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귀한 인연을 만나려면 한없이 기다리고 공을 들여야 하고, 만났으면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대하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자리에서 그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이다. 세상 어디에도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내가 발견했다 해도 이미 그 스스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꽃이나 사람이나 오랜 세월을 두고 조심스럽게 만나는 것이 진정으로 향기나는 아름다운 관계임을 알 것 같다.

 

지극히 작은 풀꽃이나 값비싼 난처럼 귀한 꽃이나 어느 것 하나 생명으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디서 피거나 어떻게 피거나, 붉은색이거나 하얀색이거나, 크거나 작거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것을 바라보면 한결같이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사람이 그러하듯……. 그래서 나라 안 어디를 가든, 어떤 꽃을 만나든 그 순간 나를 위해서 피어나준 것처럼 반갑고 고맙다. 꽃이 결코 나를 위해서 피지 않은 것은 알지만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간다.

 

 

선암사 홍매는 내게는 수줍어

벼르고 별러서 찾아갔건만

홍매는 피지 않고

청매만 피었네

그래도 내게는 아름다운 일

매화 향기, 검은 기와지붕 위에 머물러

장군봉 너머까지 마중 온

봄빛과 인사하네

 

꽃이 나를 위해 피는 것도 아니고

나 또한 꽃을 기다리진 않지만

우연히 마주쳐

한시절 활짝 핀 꽃이파리와 입맞추기를

짧은 봄빛과

가기 싫은 겨울이

선암사 울안에서 함께 사네

──졸시 「선암사 홍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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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순 /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순한 진리』외 3권이 있고 제6회 서울시인상을 수상했다.

 

 

 

 

출처 /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계간평 http://cafe.daum.net/k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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