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서정적 진실, 전집의 주관적 서사
──오세영 시전집 1권1)의 초기시와 중기시를 중심으로
김신영
1. 시의 서정적 진실
시인의 서정적 진실은 전집을 통하여 완벽하게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전집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서사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질곡을 그대로 내재된 형태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사의 질곡을 따라 전체사의 맥락을 짚을 수 있는 것이 전집의 형태이다. 전집의 경우 그의 시력을 따라 시집 여러 권을 한 권으로 묶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세월의 풍상을 거친 작품이 함께 실린다. 그러므로 전집의 무게는 시집 한 권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시인의 개인적인 질곡을 따라 사회상과 문화적인 면, 내면 심리의 변화를 통한 변화상과 시인의 전기적 증거들을 섭렵할 수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오세영은 시전집을 통하여 사랑과 허무와 서정적 진실에 대한 주관적인 서사를 실어놓았다. 특히 반어를 통한 수사법은 오세영 특유의 기법이다. 오세영은 반어를 통해 삶의 저변에 깔린 진실을 발견하고자 한다.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그곳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있으며 작은 것에 진실이 있다는 단순하지만 오묘한 진리를 드러낸다. 그것은 시의 본질이 설득이 아니라 감동에 있는 때문일 것이다.2) 오세영은 문학을 모순의 원리로 보고 있다. 서사양식이건, 서정양식이건, 극양식이건 간에 모든 문학작품의 구조가 갈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정시 역시 그 정서, 의미, 시상 등 제 가치가 서로 모순의 긴장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구조적 완성을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3) 이러한 모순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로 대별할 수 있는데 『햄릿』의 예를 들어 당대나 오늘에나 인간 삶이 주거하는 보편적 양식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20세기의 인간 삶과는 다른 그 시대의 특별한 이야기임을 주지한다. 그는 시의 진실이 바로 이러한 보편과 특수의 조화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서정적 진실이 나타는 것 또한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오세영 시인의 지론이다.
2. 모순의 흙을 고르며
오세영의 초기시에 나타난 삶은 순응하여 안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강렬한 반란의 외침이다. 채워진 것은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은 앙상하고 구도의 길은 멀 뿐만 아니라 뜨거워야 할 것들은 뜨겁지가 않다. 결핍이 가져오는 불만족은 시인에게 기원을 하는 신앙의 목적이 된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시인이 꿈꾸는 언어는 희망과 구원의 노래이다. 오세영이 읊어내는 희망과 구원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열정적인 사유라 하겠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나 어떤 난관이라도 헤쳐나가고자 하는 불굴의 정신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앙상한 눈들이 내린다.
헌 외투의 승려가 지나가고
식어버린 어휘들이 굴러다닌다.
현상의 미끄런 빙판 위로
여윈 발들이 달린다.
내벽엔 겨울 신앙이 못 박힌다.
로마인이 서너 명 해머를 들고
얼어붙은 시간을 깨고 있다.
사납게 외치면서 미래가
들창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갈릴리 내해에 잠드는 바람
갈릴리 내해에 눈은 내리고,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갈 앉고,
차고 매운 발자국들이 수런대면서
황폐한 의식 위로 몰려간다.
──「반란」 에서
오세영의 초기시는 청춘의 고뇌와 방황과 반항이 들어있어 그의 중기시와 후기시와는 크게 대별된다. 또한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시집이 1권이기 때문에 그 이후 12년 만에 제2시집을 출간하여 이후 다작을 쏟아내는 시기의 시들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다.4) 그의 젊은 날이었던 20대 후반 이후로 쓴 시들에 반항의 정신이 살아 번득인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전망은 밝지 않으며, 모든 것은 굶주림으로 지쳐있고 눈과 바람은 앙상하기만 하다. 결핍의 이미지들이 그의 시에 가득한 것은 젊은 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일으키고자 하는 반란을 의미한다. 핍진한 현재와 다가올 풍족한 미래를 위하여 매진하고 있었을 시인의 열정이 느껴지는 것이 이 시기의 시이다.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모순의 흙」 에서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오세영의 시를 시기적으로 대별해 볼 때 초기시는 『반란하는 빛』(1970, 현대시학사)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12년이 지난 후에 낸 시집인 제2시집부터 중기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중기시에 해당하는 시집들은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2, 문학사상사)를 비롯 제3시집인 『무명연시』(1986, 전예원)와 제4시집인 『불타는 물』(1988, 문학사상사), 제5시집 『사랑의 저쪽』(1990, 미학사), 제6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1, 시와시학사), 제7시집 『어리석은 헤겔』(1994, 고려원), 제8시집 『눈물에 어리는 하늘 그림자』(1994, 현대문학사), 제9시집 『아메리카 시편』(1997, 문학동네)에 이르기까지 다작을 쏟아내는 시기를 지정할 수 있는데 흙과 그릇에 대한 시들을 통하여 인간 삶을 투영한 시와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단상들을 쓴 시들이 많다. 이후의 시는 1999년 제10시집부터 2007년 제17시집까지를 후기시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특별히 이전부터 보여왔던 불교적인 색채가 더욱 강한, 깨달음의 시와 주제별로 자연을 노래한 시, 그리고 이제는 이순에 접어 들어가는 시인의 느낌들로 대별하여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5)
본래 흙은 정형된 어떤 형태가 아니지만 그릇은 정형된 형태를 갖고 있다. 그 형태로 인하여 그릇은 비로소 흙으로써의 본분을 다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인생이 아직 미완의 단계라 생각되는 무인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어떤 형태가 없는 흙의 상태라 할 것이다. 인식과 의식의 깨달음을 체득하고 난 후의 모습을 그릇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흙을 통하여 인생의 생사고락과 희로애락까지를 섭렵한 시편들이 바로 흙과 그릇에 관한 연작시들이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은 결국 죽어서 흙이 되고 만다. 그것은 인간이 한줌의 흙으로 빚어졌으며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우주적 진실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정형성을 갖춘 위대한 그릇이 되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깨어져 본분을 다하고 흙이 되어 죽어야 한다. 그것이 본래 그릇의 본질이며 또한 인간의 본질이 흙이기 때문이다. 본래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평범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진리를 명쾌한 비유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3. 기독교에서 불교로의 도정
처음 시인은 종교적인 부분에서 기독교적으로 경도되었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이후로는 그의 의식이 불교의 심연으로 깊이 다가가 이제는 불교적인 시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많은 시편들이 중기시와 후기시로 갈수록 불교적 세계에 심취하여 있으며 불교적인 깨달음들이 시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후기시에서는 불교의 경전에서 얻은 깨달음과 출가를 겪는 일상으로의 탈피와 이로 인한 단상과 고행을 통한 불교적 성찰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10월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과육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들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 익어갈 때,/ 겨울은 숲 속에서 꿈을 벗고 있습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의 가을./ 10월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 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가을·2」 에서
이 시에 나타나는 종교적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있다. 김현승 시인의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를 연상시키는 이 시는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가을의 햇빛을 통하여 신의 은총이 내리고 탐스런 능금이 되어 잘 여문 결실의 가을 기대하고 있는 시인은 그의 간절한 소망을 기도하는 시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라 할만큼 신자들의 소망을 기도하는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단순한 것 같은 느낌을 주며 이를 내포하여 표현하는 것이 많다. 특히 소망을 단순한 기도형식으로 표현한 성구들이 많아 지금도 그 형식의 답습이 계속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시는 더 진화하여 구도형식과 깊은 논리의 진리를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기독교의 시도 진화의 모습을 담아 깊고 오묘한 진리를 문학에 표현하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청년기에 기독교적인 신앙의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이 시는 말하여 주고 있다. 방황기에 무엇보다도 소망을 이루기를 원하였던 화자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소망을 나타내고 그 소망을 기원하며 청년기의 반란 같은 방황과 고뇌가 담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것이다.
아난다여 슬퍼 마라.
시새운 봄바람에 지는 꽃잎을,
만나고 마침내 헤어짐을,
아난다여, 슬퍼 마라.
설레는 물결 위에 잠기는 꽃잎도
한때는 별이고 바람인 것을,
눈동자에 가득히 빛나는 눈물도
한때는 별이고 바람인 것을.
──「아난다여」 에서
그러나 시인은 제3시집 『무명연시』에서부터 불교로 경도한 흔적이 역력하다. 불혹을 넘기면서 불교적인 세계에 심취하여 시를 통하여 형상화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아난다’는 석가모니의 사촌동생으로서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석가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경청하였으며, 후대에 석가의 경전을 집필할 때 많은 자료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아난다가 석가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것으로 대치된 시인의 이별의 슬픔이 드러난다. 모든 것은 마침내 헤어지는 것이며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임을 역설한 불교적인 시이다.
4. 사랑의 뒤안길에서
오세영은 낭만성이 두드러지는 시인이다. 그의 낭만성은 낭만을 표상함에 있어 반어나 역설을 주로 사용하는데 오세영의 시가 가진 가장 큰 특성이라 할 것이다. 사물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깨달음을 표상화한다. 이때에 그는 역설이나 반어의 기법을 사용하여 시의 효과를 높인다. 단순한 사물의 숨어있는 이면이 그러한 표현법으로 인하여 명약관화하게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누가 칼을 가는가.
한밤에 깨어
성냥을 켜본 자는 안다.
곽 속에 갇혀 싸늘하게 쏘아보는
눈빛,
배신은 차가운 불이다.
이글이글 타는 숯불이 아니라
파랗게 빛나는 인광
──「성냥」 에서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된 이 시는 ‘성냥’이라는 작은 물체를 ‘어둠 속에서 칼을 가는’것으로 인식한다. 성냥으로 뜨거운 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배신’을 일으켜 배신의 분노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파랗게 빛나는 인광燐光은 배신으로 인한 차가운 분노를 의미하는 날카로운 눈빛이다. 그렇게 숨어서 노리는 배신의 인광은 언제 큰불을 내면서 모든 것을 삼킬지 알 수 없다. 칼날처럼 섬뜩한 성냥의 무서운 힘이다. 인고의 세월을 와신상담하며 칼을 날카롭게 갈아서 복수로 갚아주고자 하는 냉담이다. 한 개비의 성냥이 칼을 갈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느껴진다.
추락보다는/ 차라리 파멸을 선택했다./ 비상의 절정에서 터지는 / 꽃불.// 지상은 축제로 무르익고/ 측등은 화려하게 걸려 있는데/ 그 늘어진 전깃줄 너머/ 무한으로 사라지는 빛 한줄기,/ 소멸은 죽음과 다르다.// 해후의 눈물로 글썽이는/ 이 지상의 축제여,/ 자유란 회귀를 거부하는 몸짓이다./ 부딛치는 술잔 위에서/ 빛나는 한줄기 저 찬란한/ 소멸.
──「꽃불」 에서
지상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불꽃놀이는 추락하면서 아름다운 빛을 내는 것이 아니다. 추락하기보다는 파멸함으로 날아올라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때 터지는 절정의 순간에 파멸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멸의 고통에서 오는 아픔으로 인하여 추악하게도 때늦게 추락을 선택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인생에서 파멸로 인한 아름다움을 역설한다. 절정의 순간에 파멸을 선택하여 가장 아름답게 산화하는 것이 진정한 소멸이며 아름다운 삶인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5. 칼날이 된 그릇에 대한 역설적 상상
특별히 오세영의 그릇 연작시는 경전의 진리를 역설로 드러낸 시편들이다. 그릇의 다양한 속성을 드러내어 인간이 가진 본성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그릇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군상은 너무 다양하다. 꽃병, 화로, 수레, 술병, 술잔, 대접, 밥그릇, 신발, 유리병, 바이올린, 옷, 잔칫상의 그릇, 칼집, 수신불명의 편지, 가족, 록소, 휴지통, 풍금, 원고지, 걸레, 아웅산 수지, 시멘트, 빵, 신념 등등 그릇으로 비유된 것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념이나 사랑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는 오세영의 「그릇론」은 다양성과 창조적 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 칼이 된다.
──「그릇·1」 에서
그릇으로 상징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본질적으로 모가 없고 둥근 모양을 갖고 있지만 깨어진다면 바로 칼날이 되는 그릇처럼 사람의 본성 또한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지만 깨지게 되면 사람도 칼날 같은 비수를 품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릇의 일반적인 속성과 깨어지고 난 후의 속성을 명쾌한 비유로 풀어내고 있는 시이다.
분노에 떠는 칼도
집에 들면 잠든다.
오욕과 굴종의 하루를
밖에 두고 문을 닫는 나의 귀가,
안식은 항상
닫힌 그릇 안에 있다.
몇 번이나 칼을 뺐던가.
내려치는 용기보다도 거두는 슬기,
하나님,
나는 오늘 아무 것도
베지 않았습니다.
분노에 떠는 육신을 추스려
잠을 청하는
한밤의 명목.
깨우지 마라, 여린 그릇은 때로
독을 뿜는다.
──「그릇·15-칼·3」 에서
칼집도 하나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칼이라는 물건을 담기 때문이다. 오세영 시인이 사용하는 그릇의 이미지가 유사의미로 확대되어 모든 사물을 담거나 넣는 의미가 있다면 그릇의 형태로 인식하는 그릇의 형식을 내세운다.
분노에 떠는 칼도 집에 들면 잠든다는 것은 그릇의 작용이 무엇을 담는 것뿐만 아니라 분노를 삭혀주고 식혀주는 작용이 있음을 의미한다. 액체로써 그릇에 담기는 많은 것들은 그릇에 담길 때에야 고정된 형태를 취하며 자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릇의 생긴 형태에 따라 사물의 모습도 진정이 되고 고정적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릇에 담기지 않는 것들은 안정이 아니라 반목과 독을 뿜어대는 분노를 분출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에도 적용이 되어 집에 들지 않는 불안으로 인해 삶이 유동적이 되고 분노의 칼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6. 서정적 진실과 주관적 서사
오세영의 시가 갖는 서정적 진실은 낭만성을 동반한다. 결코 대결하는 법이 없으며 스스로 자성하는 깨달음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의 시는 자성적 목소리를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사회를 정화하는 독특한 방법을 갖는다. 이러한 시를 접하는 독자들은 자성의 목소리가 큰 그의 시를 통해 자신도 자성하면서 정화작용을 갖는다. 깨달음의 서정적 진실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생애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며 오세영의 깨달음을 자신의 깨달음과 동일시하는 정화기능이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한 그의 주관적 서사는 다소 미약하다 해야 하겠 다. 필자는 오세영의 시전집을 통하여 서정적 진실과 주관적인 서사를 발견하려 하였다. 그래서 미약하게나마 전기적인 서사들을 살펴보았다. 개인사적인 전기적 사실은 그의 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서 오는 고뇌와 방황은 찾기가 힘들었다. 그의 시는 역사적 사실의 표현에 좀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그 시대에 대한 전기적 고찰과 작가적 이해에 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기에 오세영 시인을 우리는 서정성을 가진 낭만적인 시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오세영의 시에 서 우리는 사랑과 인생의 깨달음의 이치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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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 / 충북 중원에서 출생했으며 1994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이 있다.
출처 /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계간평 http://cafe.daum.net/k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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