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보들레르 그리고 '플라뇌르'로서의 예술가
2. 플라뇌르와 모더니티의 위기
르누아르와는 달리 애정의 상실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미지는 은유적이다. 즉 그는 무언가-의미 있는 의사 소통의 부재, 심지어 사회생활에 대한 감각의 상실-를 강조하기 위해 근대 도시에서 사랑을 얻을 수 없음에 관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대한 반응은 위기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상황이 너무 빨리 움직인다거나 분석을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라는 장소가 가치와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시의 불명료성은 좀더 깊은 것-즉 공동체를 공동체로서 구성하고 정의하는 개인간의 유기적 통일감의 부재-의 전조이다. 이런 곳에서 개인은 서로 경쟁하고 적으로서 행동하도록 강요 받는다.
경험에 있어서 위기의 또 다른 징후는, 이치가 들어맞지 않는 세상에서는 관찰자들이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을 환상 속에서 상상한다는 점이다. '플라뇌리' 에 대한 설명으로 유명한 작가 빅토르 푸르넬Victor Fournel은 외형 분석을 할 것을 주장하면서 거리를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극장' 이라고 말한다.
"내가 원한다면 각 개인들은 어떤 복잡한 소설의 소재 거리를 나에게 제공한다‥‥‥‥ 나는 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이 극장을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
같은 방식으로,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의 [창가의 젊은 남자 Young Man at His Window](1876년, 도판 23) 에서 주인공은 어떤 광경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리라는 무대의 극장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심지어 그림 속의 창문은 무대의 아치 모양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의 의도는 주인공의 위치에 관람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가 지켜보고 있는 거리의 여성에 대해 (탐정) 소설을 꾸며내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이 그럼은 그들이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인물들 간의 교류의 가능성이 없다는것을 주장하는 듯하다.
<근대 생활의 화가>는 여러 방식으로 의미의 위기를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탐정 플라뇌르를 군중의 '요동침, 움직임, 즉흥성, 무한함' 속에서 (마치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듯) '안주하고자'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보들레르는 플라뇌르가 찾는 감각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모험심은 의미가 없다고 암시하며, 탐정으로서 플라뇌르의 신빙성도 깎아 내린다. 우선 그의 탐정 플라뇌르 화가를 <파리의 비밀 The Mysteries of Paris>(1844년)의 화가 외젠 쉬Euegene Sue의 로돌프 Rodolph의 방식으로 '변장의 왕자' 라고 지칭함으로써, 이 시인은 그의 영웅이 공상적 산물임을 암시한다.
포를 좇아서 그를 '군중속의 사람' 이라고 부른 것 역시 아이러니하다. 요점은 포의 소설이 그의 탐정이 군중을 분석하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상한 늙은이(소설의 '군중 속의 남자')를 밤새 쫓아다녔으나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는 남자의 얘기로 끝을 맺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소설은 이 인물의 존재가 '읽혀질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하며 끝난다. 독자에게 소설에서 결국 사건의 해곁이 날 것이라는 기대를 주지만, 이 이상한 결론은 그 어떤 것도 이해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출처 / 인터넷 검색 - 출처 / http://cafe.daum.net/jsse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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