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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폴 스미스 / 인상주의란 무엇인가

by 丹野 2010. 10. 1.

 

 폴 스미스 / 인상주의란 무엇인가

 

1. 인상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unrise)(1873년, 도판 2)

1874년 4월 를로드 모네는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unrise)(1873년, 도판 2)를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동조합이라는 그룹이 개최한 전시회에 선보였다. 이 전시회는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최초의 인상주의 진시회이다. 모네의 작품과 이 낯선 제목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주의라는 이름과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예를 각인시켜 주었다. 비평가이자 인상주의자들의 친구이기도 한 테오도르 뒤레 Theodore Duret 는 I878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인상주의자라는 용어가 ‥‥‥일련의 화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제일 먼저 선보인 클로드 모네의 독특한 그림 때문이다. 모네는 가장 뛰어난 인상주의 화가이다. " 뒤레는 이에 대한 이유도 제시한다.

클로드 모네는 그의 선배들이 간과했거나 붓으로 표현될 수 없다고 여겼던, 빠르게 지나가는 인상을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회화는 더 이상고정되고 불변하는 풍경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화가의 눈앞에서 일시적으로 형성되어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도 포괄하고 있다‥‥‥모네는 관 찰한 장면을 탁월한 감각으로 생동감있게 그림으로 전달했다. 그의 캔버스는 진정한 인상을 전달해준다.

 



뒤레는 화가글 인상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는 요건은 일시적인 대기의 효과 atmospheric effccts를 추구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뒤레는 화가 자신의 '인상'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상주의에 대한 뒤레의 정의와, 그러한 정의로부터 기인한 모네가 전형적인 인상주의자라는 생각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인상이란 빛과 대기의 일시적인 효과를 단순히 기록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상주의자들은 뒤레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는 미술가집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상주의자들이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라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답 중 하나는 그들이 1860년과 1862년 사이에 비공식적인 스튜디오인 '아카데미 쉬스Academie Sussie' 에서 처음으로 만났거나, 또는 1862년과 1864년 사이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의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작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화가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모네, 피사로, 아카데미 쉬스에서 만난 세잔, 오귀스트 르누아르Aug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Iey, 그리고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모네를 만난 프레데릭 바지유 Frederic Bazille 등은 보수적이고 고답적인 미술교육에 반대해서 결탁하게 되었으며, 외젠 부댕Eugene Boudin과 바르톨트 용킨트Barthold Jonekind 같은 풍경화가의 영향을 받아 탁트인 곳에 나가 새롭고 대담한 스케치풍으로 자연을 그려나갔다.








알렉산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도판 3)

이들은 에콜 데 보자르나-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의 전통적인 교육에 불만을 느꼈는데, 이러한 곳에서는 라파엘로Raphael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이나 전통적인 방식의 '정확한 드로잉과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소재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품의 예로는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1863년, 도판 3)과 글레르의 [미네르바와 그레이스 Minerva and the Graces](1866년, 도판 51,88쪽)가 있다. 그들의 불만은 에콜의 미적기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런 기준들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에 의해 에콜이 좌우된다는 사실과 미술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준을 따라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에콜은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가 관리했지만, 아카데미 데 보자르는 '프랑스 학사원 Institut de France' 이 관리했다.

에콜의 교수들은 아카데미의 회원 중에서 선출되었으며, 이 조직은 미술가들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거나 공식적인 후원을 기대할 수 있는 정부 후원의 전시회나 매년 열리는 살롱전Salon에 상을 주는 심사위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1863년 살롱전에서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이 금상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 그러나 그 당시 많은 젊은 미술가들은 에콜과, 에콜에 의해 예술의 발전이 저해되는 것에 반대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언급했던 인상주의자들은 1860년대에 열린 살롱전에서 작품이 받아들여진 사람들이었다. 모네와 르누아르, 피사로는 그런 성공을 즐기기까지 했다.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고진주의가 살롱전을 완전히 지배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샅롱전은 전제군주 나폴레옹 3세의 정치선전활동에 의해 '자유화' 되었으며, 풍경화와 풍속화는 역사나 신화를 다룬 그림만큼 제도적 특권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전시회도 가졌고 비평가와 대중에 의해 비중있는 주목도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화가들은 1874년과 1886년 사이에 열린 여덟 번의 인상파전에 작품을 출품한 55명의 화가들 중 핵심 인물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이 그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명명할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들이 모든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것은 아니었다. 르누아르가 1874년과 1877년 사이에, 그리고 1882년에 전시회를 가진 반면, 모네는 1879년 이후에는 1886년에만 전시회를 가졌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작업방식에 있어서 작가마다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인상주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한다. 즉 주제에 있어서 근대생활의 모습을 선택하는지 아니면 풍경이나 도시의 대기적 효과를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혹은 '외광파plein-air'(그들은 소재가 되는 야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렸다)의 작업 경향에 따라서, 또는'스케치'하는 방식이나 성별 등에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상주의는 메리 캐사트Mary Cassatt나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같은 여성 화가들이나, 장 프랑수아 라파엘리Jean-Framsois Ramaelli나 노르베르 괴네트Norbert Goeneutte같은 '잊혀진' 미술가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받기를 바라던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역시 인상주의 화풍을 다루었으며, 마네의 작품에서도 인상주의와 연관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2. 전통적인 해석

[인상, 해돋이]는 최초의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다른 작품들처첨 비평가와 일반 대중들에게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 작품을 지금 당장 평가하는 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상주의 작품들이 방대하게 복제되어 주변에 널려 있어서, 지금 우리 눈에는 인상주의가 매우 친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평범하게 된 것은 재현의 친숙함 때문만이 아니라, 인상주의에 대한 해석 때문이기도 하다. 광범위하게 보면, 인상주의에 대한 해석은 비교적 최근까지 두 가지 방식을 취해왔다.

첫 번째 방식-형식주의적이며 모더니즘적인 관점-에 의하면, 인상주의는 넓게는 '평면성'이나 '표면'에 관심을 두거나, 또는 그냥 칠해진 물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표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물감'의 성질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식-전기傳記적 관점-에 의하면, 인상주의는 반동적인 예술기관과 보수적인 언론 및 대중에 맞서서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흥미롭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네의 회화는 예술가로서의 용기와 그의 '천재성', 그리고 정체를 넘어선 진보의 승리를 증명하기 때문에 흥미롭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에는 한계가 많다. 우선 모더니즘은 흐림을 표현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인상주의에 대한 전기적 해석은 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림 뒤에 있는 화가의 개성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두 관점 모두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서술함으로써, 회화와 회화의 폭넓은 역사 사이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특히 예술의 가치를 예술을 창조해낸 엉웅적 개인에게 두는 것은, 인상주의를 좀더 넓은 세계에서 규정하려는 어떠한 시도나 정치적 의미에 대한 해석을 방해한다.

이런 한계점 때문에 최근의 미술사가들은 다른 관점들을 매우 열성적으로 찾아왔다. 인상주의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점들-수정주의적 역사관-은 사회사적, 페미니즘적, 정신분석학적, 그기 필자가 임의로 명명한 인류학적 관점이라는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사회사적 해석은 대개 일화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때로 이것은 통칭적으로 마르크시즘적Marxist시각'으로 불린다. 대체로 사회사적 미슬사의 일차적인 관점은 작품에 표현된 사회적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작품의 내용을 분싫하는 데 관심을 둔다. 또한 가끔은 마치 회화의 내용에 어떤 가치나 신념이 상징화되어 있는것처럼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인상, 해돋이]는 르아브르Le Havre선착장의 일상생활사에 대해 말해주기나, 혹은 그럼 속에 나타난 붐비는 항구 위로 비치는 일출의 이미지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년)에서 패배한 후 다시 회생하는 프랑스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끌게된다.

인상주의에 대한 사회사적 해석의 이론적 관점에서는, 인상주의 회화가 그 당시 반연했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중산층의 백인, 남성위주의-에서 출발했거나, 그 이데올로기에 시녀 노릇을 했다거니-, 혹은 이에 대항했다는 것에까지 범위를 넓히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인상, 해돋이]가 예술적 가치에 대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관념에 도전을 했는지 알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관념이란, 회화의 가치는 영원한(고전적인) 미와 훌륭한 도덕적 질서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에 있다는 아카데미 측의 주장 등을 일컫는다.


[님프와 사티로스]Nymphs & Satyr,(도판 4)
1873, oil on canvas, Sterling & Francine Clark Art Institute, Williamstown

아카데미 이론에서 미는 거의 언제나 윤리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미가 원래 신성하기 때문에그렇다고 몇몇 이론가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월리엄 아돌프 부그로Willidm Ado1phe Bougereau의 [님프와 사티로스Nymphs and Satyr)(1873년, 도판4)나 카바넬의 [비너스] 같은 아카데미 회화와 비교할 때는 매우 생소해질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모네의 회화가 그의 출신인 신흥 부르주아에 의해 공고해진 이데올로기에 연관된 미적 특성에 대한 또 다른 신념을 표현했는지를 알고 싶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네의 작품이 각 개인은 자신의 소재와 미의 기준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신념을 표현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본질적 핵심인 개인주의적 경향과 회화를 연관시키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의 사회사적 관점의 미술사학자들은 많은 인상주의 회화들이 어떻게 특정 사회의 실체적, 심리적 관점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관람자로 하여금 이런 관점으로 회화를 감상하게 함으로써 모더니티의 개념을 어떻게 명백히 하려 했는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논의되는 대상은 '플라뇌르'라고 알려진, 도시에 거주하는 남성 관찰자이다. 그러나 플라뇌르는 이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뜻이다. 무엇보다도 쥘 재닌Jules Janin이 묘사하듯, 플라뇌르는 '전적으로 파리적인Parisian 열정을 위한, 매우 파리적인 단어' 였다. 다음으로, 플라뇌르는 실제 인물만큼이나 허구적인 창조물로서 실제와 허구의 두 존재를 모두 포함한다. 플라뇌르는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1zac부터 에밀 졸라Emile Zola에 이르기까지 문학에도 자주 등장했다.

세 번째로, 플라뇌리f1anoerie는 겉치레(꾸밈, 꾸민 태도)로서, 이는 '관찰'이라는 평범한 일을 중대한 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모네의 초기 작품들은 가끔 관람자를 플라뇌르로서 끌어들이지만, 드가와 르누아르의 작품들은 빈번하게 관람자를 이런 특징을 지닌 인물이 되도록 자극한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인상주의 회화를 이해하는(혹은 '그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이 플라뇌르의 심리에 대해 알고 유추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도 있다. 이것은 인상주의 회화들이 요구하는 관람자의 종류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제기한다. 인상주의 회화가 남성을 위해 제작되었다는 설은 최근 많은 비평적 관점, 특히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플라뇌르 flaneur의 의미

'빈등거리며 놀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일하다' '산책하다'라는 뜻의 동사 flaner에서 파생된 명사 플라뇌르flaneur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플라뇌리 flaneurie는 그 행동 자체를 가리키는 명사이다. 이 단어는 콩스탕탱 기스Constantain Guys에 대해 서술한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유명한 에세이 <<근대 생활의 화가 The Painter df Morden Life>>에 등장하는데, 근대화와 도시의 출현으로 도시 문화의 위력과 환영 속에서 목적 없이 배회하는 군중을 지칭한다. 이러한 플라뇌르는 시선의 대상에 함몰되는 자, 시선의 대상에 거리를 유지하려 하나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 혹은 시선의 대상에 매혹당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자로 유형화될 수가 있다. 미술에서는콩스탕탱 기스가 그려냈던 풍경처럼 빠른 데생과 정확한 관찰의 풍경을 의미하며, 인상주의와 통합되는 특징을 지닌다.

페미니즘 미술사는 때로는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회화와 예술가의 의도를 엄격히 재해석할 것을 요구하지만, 상당한 부분에서는 사회적, 정신분식학적 미술사를 다루고 있다. 인상주의에 대한 페미니즘 미슬사의 관점은 성에 대한 관념이 남성과 여성의 그럼에 어떤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상, 해돋이]는 이런 종류의 해석에는 적합한 예가 못 된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미술사는 며성과 남성에게 허용된 사회적 공간에는 차이가 있었고 그들은 서로를 다르게 인식했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에 의해 그려진 대상이 어떻게 다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많은 회화들을 보면, 성에 대한 관념이 남싱과 여성 인상주의자들이 그리고자 했던 대상의 범위에 영항을 미쳤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남성은 금기를 깨지 않고도 비교적 어느 곳(카페나 사창가 같은 곳도)이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드가와 르누아르 등 남성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을 보변 그들이 드나들며 그림의 소재로 택했던 장소가 상당히 다앙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훌륭한 여성이 지녀야 할 태도가 무밋인지를 규정했던 당시의 관습은 중산층 여성 인상주의자들의 활동반경에 많은 제약을 가했다. 모기조와 캐사트가 그들의 소재를 주로 가정에서 찾았던 것은, 그곳이 그들에게 유일하면서도 적합한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인상주의 회화는 남성이 감성들끼리, 혹은 남성이 여성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의 발달에 힘입어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인상주의자들의 작품 중 대다수가 활동적이고 남싱적인 시각을 포함하고 있거나 이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런 시각은 또한 수동적이고 여성적인 수용자보다 우세한 힘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디-고 주장한다. 반대로, 여성 인상주의자들의 많은 회화는 보는 시각과 보여지는 시각에서 좀더 복잡한 태도를 나타낸다. 때로 어떤 여성 인상주의자들은 고정관념에 순응하여 남성들의 '자연스런' 관심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보여주는 반면, 다른 여성 인상주의자들은 그러한 규칙을 깨고 남성과는 다른 방식에서 '보는 시각과 보여지는 시각'을 보여 주는데,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에서는 예술가의 억압된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증거로서, 그들의 이미지나 기법을 통해 회화의 명백한(혹은 눈에 띄는) 내용 아래 잠재해 있는(혹은 숨겨진) 내용을 끄집어내려 노력해 왔다. [인상, 해돋이]가 이런 것을 요구한 것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꿈을 분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회화를 분석하는 것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이끌어 내었다. 예를 들어, 세잔의 초기 작품은 에로틱한 이미지와 그 자신이 명명한 '성마른' 기교로 인해 너무나 쉽게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으로 해석되었다.

여러 급진적인 시도가 그랬던 것처럼, 인상주의에 대한 어제의 수정주의적 역사는 오늘의 정설이 되어버리며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옳은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항상그렇지는 않지만, 인상주의 회화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수정하려는 비교적 최근의시도 중 몇몇은 인상주의 작픔들을 당대 사회생활의 소외, 속도, 흐름의 단순한 반영이나, 또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나 이데올로기의 예 정도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필자가 인상주의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법이라 부르는 이유는, 마치 낯선 문화의 산물인 것처럼 회화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통상 인류학자들은 대리자가 되는 화가가 어떤 믿음과 결심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나중에는 어떤 시각적 산물을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인상주의에 대한 최근의 멎몇 해석들은 예술가가 그들이 받은 인상이나 감각에 형태를 부여하려 했다는 관점으로 인상주의 회화의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한 방식을 취한다. 이런 종류의 접근이 지적하고 있는 모순은, (비록 감각이 개인적이고 자발적이며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감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특정한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개념에 따라서 자신의 감각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을 인상주의자들이 기정 사실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인상, 해돋이]는 자발적인 표현을 위한 모네의 탐구에 관한 것이지만, 자발적인 표현이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적으로 명백하고 단호한 사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인상주의와 인상


피사로의 [서리]Gelee Blanche (Hoarfrost),(도판 5)
1873, Musée d'Orsay, Paris

인상이라는 개녑이 인상주의의 실현에 상당히 핵심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을 가까이 인상주의자라고 불렀으며, '인상주의'라고 알려 졌거나 인상주의로 광고된 전시회에 참여하기를 좋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다수가 자신의 예술이 인상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874년 전시회를 살펴보면, 보수적인 비평가 루이 르루아Louis Leroy는 피사로의 [서리 Hoarfrost.Thc Old Road to Eooery,Pontoisc](1873년, 도판 5)나 모네의 [카퓌신 가街 Boulevard des Capucines](1873~4년, 도판 6)와 [인상, 해돋이] 같은 그림이 인상을 표현했다는 생각에 냉소를 퍼부었다. 그의 비읏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인상이란 마음에 만들어진 처음의 인상적인 장면이거나 현장에서 바로 만들어지는 대강의 스케치라는 생각이 강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비평가들에게 인상이란 전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세부적으로 다듬어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었으며, 인상주의자들 또한 동시대 비평가들에게서 조급하고 공들이지 않은 그림을 사람들 앞에 선보인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네는 '르아브르의 실제 풍경을 그림으로 재현할 수는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회화에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부분적으로는 이 제목으로 그의 회화가 세부 묘사가 부족하다거나 마무리가 덜 되었다는 비난을 모면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가퓌신 街]Boulevard des Capucines,(도판 6)
1873, oil on canvas,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Kansas

그러나 인상이라는 용어에는 좀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며, 이는모네가 이 단어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마네의 전기 작가 앙토냉 프루스트Antonin Proust에 따르면, 마네는 1850년대 후반부터 그가그런 것을 설명할 때 자주 이 단어를 썼다고 한다. 아마 더욱 중요한것은 카미유 코로Camillc Corot가 인상을 그리는 것은 하나의 통합된 빛 아래에서 소재의 외형에 정직하고 충실하게 따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서 '첫인상' 이라는표현을 썼다는사실일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의 친구였던 쥘 카스타냐리Jules Castanary도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1863년 용킨트의 작품을 칭찬하기 위해 유력 잡지 <<예술 L'Artste.>>에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용킨트를 좋아한다‥‥‥‥ 나는그가 천재이며 극도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인상에 놓여 있다."







용킨트가 그린 두 개의 비교적 근대적인 작품인 1864년의 [센 강과 노트르담 The Seinz amd Notre-Dame]과 [노트르담 풍경 View of Notre-Dame)(도판 7과 8)을 보면 카스타나리가 의미한 것에 좀더 주목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용킨트는 모네가 나중에 그랬던 것처럼 하루 동안에 빛과 대기가 소재의 외형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기록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인상을 그리는 경우 미술가는 특정 순간 대기의 효과가 어떻게 미술가 자신에게 특정 인상을 만들어내는지를 기록하려 했던 것 같다. 확실히, 소설가 에밀 졸라의 비평은 인상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런 해석을 명백히 해준다.

예를들어, 1868년 용킨트를 평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한번에 풍경을 본다‥‥‥‥그리고 자연의 진실을 간직하고 자신이 느낀 감정을 전달하면서 그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를 전달한다. ‥‥‥ 모든 것이 독창적이고, 훌륭한 솜씨이고, 인상이다. " 유사하게 많은 인상주의자들은 그들의 인상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처럼 말했다. 어떤 인상주의자도 그들의 예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모네 또한 포착하려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 '나만의 인상'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인상주의에 대한 이런 개념의 근저에는 실증주의 철학이 깔려 있으며, 특히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와 영향력이 막강했던 <<불어 사전 Dictionaire de la langue francaise>>(1866년)의 편집장인 에밀 리트르Emile Littre, 그리고 미술이론가이자 <<지성 De l'intelligence >>(1870년)의 저자인 이플리트 텐HippolyteTaine이 있었다. 실증주의자들은 인상이 두 가지 측면에서 주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인상은 이를 경험한개인의 의식에 따른 것이므로 세상사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될 수 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상주의가 이를 지닌 개인에게 유일한 형태를 취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원래부터 다르게 태어났으며 자신이 보았던 것에 대하여 사적인 기억과 연상,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텐에게 똑같이 중요했던 것은, 인상은 지각의 '근본적인 사실' 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의미했던 것은 완전히 형성된 지각이 아니라, 지식과 경험이 개입되지 않은 감각에 대해 세상이 주는 순수한 충격이었다. 텐의 관점에서 보면, 인상은 상황과 사건, 현상의 세계에 대해 완벽한 형태로 형성된 것이 아니 었으며 그보다는 어느 정도는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요약하면, 인상주의자들이 인상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에 관해 언급할 때, 그것은 그들이 자연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효과나, 혹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자아와 외부의 세상이 접촉하는 장소를 나타내는 경험을그리는 데 관심이 있었음을 의미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인상을 그린다고 주장할 때 자연이 자신들의 감각에 던진 강한 충격 혹은 사심 없이 보았을 때 나타나는, 사물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는 모습을 기록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4. 감각


인상주의자들은 그들이 보고 그린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상이라는 단어 외에 다른 단어도 사용했는데, 그것은 바로 '감각sensation' 이다. 인상주의자들이나 비평가들은 두 단어를 거의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했다. 프랑스어로 '감각은 동사'sentir(느끼다)'와 어원이 같아서 지각만큼 많은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70년 세잔은 '나는 매우 강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최근의 작품들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작품이 지닌 독특함은 바로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감각을 표현한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세잔이 감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그가 매우 존경하는 소설가이자 미슬비평가인 스탕달Stendhal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 좀더 확실하게 뒤레는 인상주의자들이 '개인의 감감에 그들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달시키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1874년 카스타냐리 또한 감각이라는 용어로 인상주의를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풍평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풍경에 의해 형성된 감각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인상주의자이다. " 세잔은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EmiIe Bernard 에게 "자연을그린다는 것은 객관적인 세상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지닌 감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가장 솔직하게 다루었다.


르누아르의 [라 그르누예르 La Grenouillere](도판 9)


모네의 [라 그르누예르 La Grenouillere]

인상주의자들은 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 할께 작업하더라도, 아주 상반된 표현으로 자신만의 인상과 감각-또는 자연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을 나타내려 하였다. 따라서 같은 풍경을 그린 르누아르와 모네의 [라 그르누예르 La Grenouillere)(1863년)는 둘 다 확실한 인상주의에 속하지만 느낌은 매우 다르다.


앙투안 와토의 [키테라 섬의 순례 Pilgrimage to Cythera](1717년,도판 10)

르누아르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의 [키테라 섬의 순례 Pilgrimage to Cythera](1717년,도판 10)처럼 남녀의 미울림을 미화한다는 점에서 18세기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 모네가 라그느누예르에서 그린 그림은 이와는 다르다. 피사로와 세잔도 1870년대에 같은 장소에서 나란히 그림을 그렸는데, 피사로는 아들 뤼시앵Lucien에게 1835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이 중요한데, 그것은 자신만의 특별한 감각이다!" 와토에 대한 르누아르의 관심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상주의자들이서로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니게 된 것은 그 전에 받은 교육이나 연습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전의 회화들 역시 미술가의 시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인상주의자들이 저마다의 특유한 회화를 창조해낸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핵심이 된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1887년경, 도판 11)

엑상프로방스Aix-en-Provance 근처의 고향 풍경을 그린 세잔의 작품들은 확실히 소재에 대해 매우 사적이고 독특한 표현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에는 그가 받은 전통적인 교육에 의하여 촉진된, 예전에 프로방스 지역에 있었던 고전 문화에 대한 친근함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생트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1887년경, 도판 11, (La Momtagne Sainte-Victoire)로도 알려짐, 1886~8년으로 추정되기도 함)의 연작에서 볼수 있는 전경의 나무들과 원경의 언덕을 묘사한 선들은 세잔이 존경했던 17세기 화가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도판12)의 고전적인 풍경들에서 볼 수 있는 질서와 균형을 연상시킨다.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의 [포시옹 장례식의 풍경](도판12)

다시 말하면, 세잔은 그의 '타고난 감각'이나 혹은 미술가의 인종과 출생 지역에 따라 자연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는 신념(이것은 텐으로부터 나온 것이 분명하다)을 작품에 표현하었다. 어쨌든 세잔의 그림에는고항에 대한 감정이 녹아 있다. 1832년 세잔이 말한 것처럼, 엑스Aixois의 풍경을 보면서 그는 "프로방스의 질 좋은 토양, 젊은 시절들‥‥‥ 의 기억, 지평선들, 풍경들,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인상을 매혹적인 선, 풍경, 지평선들로 인해 생동하는 감각'을 경험했다.

용킨트 (Jongkind, Johan Barthold) [1819.6.3~1891.2.9]

네덜란드의 화가.
프랑스의 풍경화가 E.이자베에게 발견되어, 1846년부터 파리에서 그에게 사사하였다. 노르망디에서 그린 그의 많은 유화 ·수채화 ·데생 등에는 변해가는 자연의 순간적인 분위기가 잘 포착되어 있으며, J.로이스달 등 네덜란드 풍경화의 전통을 잇는 동시에 C.모네보다 훨씬 이전에 인상파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작품은 절제되고 밝고 차분하여 알코올중독에 걸린 방탕한 그의 생활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부인의 노력으로 한때 알코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생탕드레해안으로 이사한 뒤 다시 악습에 빠져, 그르노블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주요작품에 《네덜란드, 풍차 옆의 보트들》 등이 있다.

5. 인상주의자의 시각과 스케치풍

인상주의 그림들을 넓게 보았을 때 유사한 점이라면, 어느 정도의 스케치풍sketchiness이나 색채 조각patchiness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평가들이 말했던 불완전한 상태나 성급하게 작업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는 아니다. 또한 대부분의 인상주의자들이 노년에 접어들어 먼 거리에서 풍경을 그릴 때 시각적인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그들의 시각에 어떤 결함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모네는 [님프와 사티로스]를 그린 화가 '부그로처럼' 정확하고 확실한 초점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는 이유로 안경을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모네의 [왕비의 정원 The Garden of the Princess](1867년, 도판 13)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케치풍은 인상주의의 시초부터 의도적으로도 존재해 왔다.


[왕비의 정원The Garden of the Princess],(도판 13)
Musée du Louvre, 1867, oil on canvas, Allen Memorial Art Museum, Oberlin, Ohio

모네가 이러한 작품에서 일관된 표현을 찾으려 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앞에 펼쳐진 풍경의 빠른 움직임을 전달하기 위해 스케치풍을 선택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특히 이기법은 움직임을 묘사하거나 정원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인물을 묘사할때에도 더없이 좋다. 또한 이 기법은 한눈에 포착하기 어려운 다양한 움직임이 있는 풍경의 느낌을 나타내는 데에도 싱공적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모네가 단지 그림을 빨리 그리는 것만으로 스케치풍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아마도 초기의 몇몇 작품들은 빠르게 그려졌을 테지만, 이렇게 멋진 결과를 얻기까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처음에 칠한 물감의 층 위에 다시 주의 깊게 재작업을 하는 노력이 들어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이 '순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치밀한 계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모네가 후기에 때로는 빠르게 작업한 것은 사실이다. 소설가 기 드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1885년 에트르타Etretat 에서 모네가 매우 짧은 찰나에 일어나는 빛의 변화를 포착하려고 다른 장소로 옮기기전, 그 잠깐 동안에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경우 모네는 매우 빨리 그림을 그렸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서툰 스케치로 그린 깃이 아니라 의도대로 표현하기 위하여 평생 동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 모네는 그가 오로지 탁 트인 공간에서만 작업한다는 대중들의 믿음을 따르면서도 작업실에서 자신의 캔버스에 -l860년대조차도- 수많은 재작업을 감행했다. 실내에서 재작업한 이유 중 하나는, 외부에서 작업한 회화 안의 형상들을 그것이 최종적으로 감상되어지는 실내의 빛에 적합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세잔의 [레베느망을 읽고 있는 세잔의 아버지루이 오귀스트 세잔의 초상](도판 14)

모네는 풍경에서 받은 첫인상을 포착하는 데 뛰어났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초기 단계에서는 재빨리 작업을 했다. 1901년에 그는 '스케치'를 인상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유일하게 적합한 것이라고 함축적으로 정의했다. 그는 런던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는 그 자리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단번에 끝낼 수있는 곳이 아니오. 두 번 다시 같은 효과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인상이라 할 수 있는 스케치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같은 의미로 그는 1883년에 만난 미국 화가 릴라 캐벗 페기Lilla Cabot Perry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재를 실제로 처음 보았을 때가 가장 진실되며 가장 편견이 배제된 때입니다‥‥‥‥따라서 그림 그리는 초기에 좀 거칠더라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부분을 그려놓아야 전체적인 색조를 처음부터 결정할 수 있습니다. "
모네가 의미했던 바는 [루앙대성당, 햇빛의 효과, 일몰 Rouen Cathedral, Sunlisht Effect, End of Day](1832년, 도판 1)에서 잘 드러난다. 캔버스 위에서 빠르게 작업이 이루어진 듯하고, 나중에 재수정한 흔적은 비교적 거의 없다. 그래서 캔버스 위의 밖은 여백이 좀더 '손질된' 다른 '루앙대성당' 작품들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피사로 역시 '첫인상'을 가장 진실되고 최고의 것으로 언급했다. 그도 모네처럼, 사물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규정하는 상투적인 개념이나 편견들이 그의 개인적인 인상을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상을 그리는 것과 색채를 조각으로 그리는 것(색을 작은 조각으로 부분부분 칠하는 것 : 역자주)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인상(그리고 감각)이 지식에 의해 형성되고 영항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인상이 정확히 색채 조각의 형태로 나타나야함을 의미한다. 페리에 의하면, 모네는 그녀에게 대상이나 사건들을 그리지 말고 색채 조각을 그리라고 하였다. 그는 '당신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밖에 나갈때, 당신 앞에 어떤 대상들-나무, 집, 들판, 어떤 것이든-이 있는지 잊으려고 노력하시오. 단지 이것들이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란색의 작은 사각형, 분홍색의 원, 노란색의 선 등 당신에게 보여지는 그대로, 풍경에서 자신만의 순수한 인상을 받을 때까지 정확한 색채와 형태를 그리시오'라고 충고하였다.

모네가 색채 조각으로 풍경을 보는것이 풍경에서 받은 인상과 일치한다고 했던 이유는 다음의 페리의 말을 보면 좀더 잘 알 수 있다.
"모네는 장님으로 태어났다가 갑자기 눈을뜨게 되어 예전에 그 사물이 어떠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당시 모네가 러스킨Ruskin을 읽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러스킨이 <<드로잉의 요소 The Elements of Drrawing >>(1857년)에서 화가에게 말했던 다음의 충고를 그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화의 모든 기교적 힘은 순수한 눈 innocence of the eye' 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재발견에 있다. 즉 장님이 갑자기 시력을 갖게 되었을 때처럼, 그 사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의식적인 상태로 그 사물을 단지 순수하게 색채의 납작한 멀룩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잔은 '나는 본다. 색의 얼룩으로'라고 말하면서, 화가란 '지금 막 태어난 사람처럼 사물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진술들은 러스킨의 영향이지만, 인상주의자들의 시각을 형성한 또 다른 이론적 출처는 텐이 감각에 대하여 서술한 <<지성>>에서도 찾을수 있다. 텐은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갖게 되어 보는것같이, 경험이나 지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그런 순수한 감각으로 색채 조각의 형태를 취할 것을 제안하었다. 따라서 감각이란 형태가 없는 것으로서 지적이거나 문화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은 -지각하는 사람의 마음에만 있는 색채의 조각 그 이상은 아닌-순수한 시각적인 라고 여겨졌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문학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1886년 졸라는 마네의 '기질'이 그로 하여금 소재를 '색의 얼룩'으로 보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진실되지 못하다는 비난으로부터 그를 옹호했다. 색채 조각으로 보는 관점은 그 당시에도 감각과 같은 것에 비중을 실어준 듯하다. 이런 생각들은 <<레베느망 L'Evenement>> 신문에 <<나의 살롱 My salon>>이라는 제목의 세잔에게 바치는 글에 연재되었다. 그직후, tp잔은 한 때 같은 학교에 다녔던 비평가들의 생각에 동정이라도하듯이 그 신문을 읽고 있는 부친(도판 14)의 모습을 그렸다. 이 초상화는 다소 딱딱하긴 하지만 대상을 확실히 색채의 조각으로 그려서, 모델로 하여금 감각을 그린다는 것은 바로 '색의 얼룩' 을 그린다는 것을 의미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각에 대한 이런 이론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물을 사물로 볼 뿐이지, 색채의 조각으로 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시각적 자극과 일반 지식을 결부시켜왔기 때문에, 이런 고정관념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상주의자들이 그림을 그릴 때마다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은 시각이 개념이나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보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과학이나 미학적 사고가 실제로 본 것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Terrace at Sainte-Adresse](1867년,도판 15)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 중 [5백나한사의 사자이정자](도판16) 뿐만 아니라 인상주의자들은 특히 일본 판화와 같은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전통을 사용하기도 했다. 초창기에 이 예가 될 수 있는것은 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Terrace at Sainte-Adresse](1867년,도판 15)이다. 그는 이것을 '깃발이 있는 중국풍의 그림'이라고 불렀다(인상주의자들은 일본의 것들을 '중국' 의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모네가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보이는데, 높은 시점과 수평적 처리, 그리고 오른쪽에 너무 치우쳐서 표현된 수평으로 그려진 정원의 울타리 같은 공간적으로 이상하고 모호한 표현 방식이 그것이다. 이는 가쓰시카 호쿠사이 Katsushika Hokusai의 [후지산 36경The Thirty-Six Views of Moorit Fuji] 연작 중 하나인 [5백 나한사羅漢寺의 사자이 정자 The Sazai Pavilion of the Temple of Five Hundred Rakan)([The Sazaido of the Gohyaku Rakan-Ji Temple], 1827~33년,도판 16)에서 차용한 것이다. 모네가 이러한 장치들을 인상과 감각을 전달하는 도구로 생각한 까닭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인들이 일본 문화를 '원시적' 인 것으로 보았고 일본 판화가 순수한 시각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본 판화를 차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상주의자들은 순수하게 되는 시각에 관련된 것보다는감각을 묘사하는 기법을 배워야 했다. 베르나르에게 "눈앞에 보이는모든 것을 잊은 채 눈에 보이는 사물의 이미지를 그려야 한다'라고 충고한 세잔도 그의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푸생의 회화를 참조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상주의자들이 보고 느낀 대로 순수하게 순간적으로 그렸다고 주장하지만, 이와 모순되게도 그 이전의 미술과 일본 그림들 그리고 과학적이고 미학적인 이론을 학습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효과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자들은 그들이 본 대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였으며, 표현의 기본적 수단으로서 인상과 감각을 기록하려고 했다. 따라서 인상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jsse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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