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경험의 근원적 지평 / 정순복
미학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미적 경험’에는 상충되는 두 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지각자가 무관심적 태도로 작품을 관조할 때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는 논의와, 일상적이고 주관적인 관심으로 작품을 대할 때 그것이 진정한 미적 경험이라는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 작품을 예로 들어 전자의 칸트식 무관심의 패러다임 대신 후자의 듀이식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미적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김정희-세한도 김정희 <세한도(歲寒圖)>종이에 수목 23.7 x 109cm 1844 국보 180호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의 문제는 피타고라스 이래 서양 미학의 중심적 탐구 과제가 되어 왔기에 그 개념과 이론의 형태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그러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의 개념 수용 여부에 따라 그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의 양립적 형태로 탐구되어 왔다. 즉 경험의 미적인 성질을 우리의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격리시키느냐, 아니면 연관시키느냐에 따라 미적 경험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해석되고 수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적 경험을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격리시켜 그 자체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부정하느냐로 귀결되었던 이러한 양립의 역사는 그러한 자율성을 극단적으로 옹호했던 칸트 미학의 무관심성 개념이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음이 검증됨으로써 일상적 관심들과의 연관주의적 토대를 벗어나 무관심적이고도 자율적인 것으로 미적 경험을 수용코자 했던 경험이론들은 -- 미적 태도론 내지 관조론, 예술환영론, 예술형식론, 예술표현론 등 -- 논리적인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미적 경험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특정 대상에 대한 주관의 개념적 사유와 본능적 욕구로부터 초월된 어떤 무관심적인 경험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계와 조우하여 자신의 생명력을 확충해 나가면서 살맛 나는 일상(日常)을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유기체(organic creature)인 인간의 지극한 일상적 관심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의미 탐구의 생존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프래그머티즘 미학1)은 바로 이러한 연관주의적 관점에서 미적 경험의 본질 내지 그 근원적인 지평(primary perspective)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유익한 담론으로 자리한다.
1. 미적 경험의 발생론적 토대 ; 대상에 대한 일상적 관심이 만드는 질적 상황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이 세계는 엄청나게도 질적인(qualitative) 세계다. 즉 우리가 활동하고 고통을 겪고 즐기는 그 모든 일은 질적으로 제한받는 것이라는 사실이다.2) 말하자면 ‘여기에서(in here)’ 관조하는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바깥 거기(out there)’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객관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인간과 세계로 통칭되는,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오로지 끊임없이 상호 교류작용하는 질적인 상황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환영, 모방, 재현, 형식, 표현 및 상징으로 예술의 본질을 참칭한 미학이론들 속에서 예술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세계와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러한 일상적이고도 실제적인 관심의 모태가 되는 질적 상황은 애당초 무시되고 단절된 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products)으로 전제되어 왔다. 그리고 미적 경험이란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에만 귀속되는 것인 만큼 일상의 관심 밖에 자리하는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은 19세기부터 극도로 성장한 제국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인 힘과 자본주의적 힘이 함께 가세하여 현대사회의 생산과 소비의 틈을 만든 조건들로서 이것이 곧바로 일상적 경험과 미적 경험의 틈을 만들어 낸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틈이 정상적인 것처럼 받아들여 어떠한 유기체도 살지 않는 영역에 예술을 자리하게 하는 경험이론들을 그리고 미적인 것의 관조적인 특성만을 강조하면서 예술의 수집, 전시 및 소유 등을 통한 미적인 쾌감을 미적인 가치로 용인하는 경험이론을 양산해 왔다. 물론 예술비평의 영역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세한도(歲寒圖)〉로 명명된 추사 김정희의 회화작품은 그것을 대하는 지각자가 자신의 삶을 이루는 일상의 모든 관심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순수한 즐거움을 얻는 미적인 경험이 가능한 초월적이고도 자족적인 어떤 가치로 존재한다는 식이다. 즉 그것은 작품을 대하는 사람이 지닌 관습적이고도 일상적인 관심을, 이를테면 언제 어떤 사람이 어떤 의도로 어떤 소재와 재료를 가지고 어떤 기술로 제작(표현 혹은 창조)하여 어떤 용도로 활용했고 어떻게 읽혔으며 누구에 의해 수집 보관되었고 값어치는 얼마나 나가고 과연 소유할 만한가 등의 관심들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오직 무관심적인 태도로 그것을 관조하는 사람에게만 항상 필연적으로 순수한 즐거움을 부여해서 미적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한도〉에 대한 개념적인 사유와 본능적인 욕구를 초월한 무관심적 태도 내지 관조라는 마음가짐은 경험적으로 애초에 불가능한 허구의 것이기 때문이고 그 결과 이러한 무관심적 태도 내지 직관에 의해서 〈세한도〉의 고유한 가치로서의 형식 내지 표현적 성질이 자리하고 그것에 대한 지각만이 미적 경험이 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부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순수한 무관심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이 미적 경험이라는 주장도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부당하다. 왜냐하면 무관심적 태도를 지닌 결과로 주어지는 순수한 즐거움이란 것은 실용성 내지 유용성과 대립되는 아름다움과 결부되어 관념론과 형식론 등의 비연관주의적인 순수예술주의를 지지하는 담론들만에 의해 역사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한도〉에 대한 미적 경험의 문제는 이러한 칸트식 ‘무관심의 패러다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듀이식의 프래그머티즘적인 ‘관심의 패러다임’에 의하여 새롭게 풀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한도〉와 결부된 미적 경험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세한도〉에 대한 자신의 일상적이고도 관습적인 관심들을 털어버리거나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 관심들을 한데 모아 〈세한도〉라는 하나의 세계를 지극하게 대하고 아우르는 일상의 질적 상황의 문제에서부터 논의가 출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할 때 〈세한도〉와 결부되는 미적 경험의 근원적인 지평은 예술형식론자들이 주장하는 의미있는 형식(significant form)에 맞물리는 것도 아니고 예술표현론자들이 주장하는 직관적 표현에 맞물리는 것도 아니게 된다. 오히려 그것은 〈세한도〉라는 하나의 세계와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 유기체가 함께 참여하는 질적인 상황에서 유기체가 자신의 생명력을 확충시킬 수 있는 의미로 충만한 사건적 계기(eventual moment)를 그 상황을 통해 소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와 맞물리게 된다. 바꿔 말해 그것은 질적인 상황에서 지각자가 〈세한도〉에 온갖 관심을 기울여 자신과 세계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경계에서 공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본연적인 모습이라 할 의미심장한 사건성(eventuality)을 감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약 〈세한도〉를 지각하는 일상의 질적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과 추사로 표상되는 인간의 본성과 네 그루의 송백과 한 채의 초옥으로 표상되는 세계의 본성 및 인간과 세계의 본원적 관계에 대한 깨침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력(vital energy)을 확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그는 곧바로 미적 경험을 소유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세한도〉에 대해 자신이 지녔던 일상적인 온갖 관심의 제어와 통합의 과정을 통하여 추사가 살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을 감지하고 최면에 걸린 듯한 찬탄을 향유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바람직한 삶의 향방을 그가 비로소 가늠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미적 경험의 본성 내지 근원적인 지평과 맞물리는 의미 획득의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획득한 의미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질적으로 소유한 경험 내용을 개념으로 어떻게 표시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그것을 미적인 내용을 갖춘 경험인 것으로 표시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미적이라는 표현은 지적인 것과 대립되고 감각적인 것과 대립되는 아름다움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을 포괄하면서 오직 느슨하고 산만하고 비체계적인 것과 구별되는 자아충족성과 자아완결성을 갖춘, 처음과 끝을 지닌 하나의 경험(an experience)에 담지되는 미적인 환희로 통칭되는 성질들 일반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세계에 대해 지니는 일상적인 관심이 세계의 저항을 통해 보통 위축되고 제대로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느슨하게 끝나기 때문에 〈세한도〉와 관련되는 미적 경험은 일상적인 경험과는 격리된 것으로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한도〉를 통해 소유하게 되는 미적 경험은 어디까지나 일상적 생존 과정의 일부다. 왜냐하면 〈세한도〉를 통해 세계가 유기체인 인간의 모태이자 양육지임을 깨치고 그런 세계의 품에서 그 이전까지 기대하지 못했던 행복한 충만감이라 할 의미를 소유하게 된 미적 경험은 유기체의 일상적 생존 과정의 극적인 완성으로 자리하는 일상의 일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3) 그러므로 〈세한도〉를 통한 미적 경험은 일상에 잠재하는 의미있는 사건성이 실제로 해결되어야 하는 사건이 되는 문제상황에서 인간과 세계가 공유하는 생명 기운들(vital energies)의 연속성, 누적, 보존, 긴장 및 기대를 토대로 발전하고 마침내 의미화 과정으로 조직화(organization)된 미적인 리듬이 된다. 바꿔 말해 〈세한도〉와 지각자가 만나는 일상의 사건적 문제상황(eventual problematic situation)이 마침내 해결되어 의미로 충만한 생명력 확충의 계기가 유기체의 일상에 실현되는 미적 리듬을 소유하는 것이 비로소 〈세한도〉에 대한 미적 경험4)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미적 경험의 핵 ; 유기체성과 센스
인간과 세계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깨달음과 그 황홀한 화해의 장을 통한 이러한 삶다운 삶의 향유가 미적 경험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다고 할 때, 그 중심은 유기체성(vitality)과 센스5)가 된다. 예를 들어 〈빨래터〉라는 제목이 붙은 단원 김홍도의 회화작품에 상응하는 미적 경험은 그것을 대하는 지각자가 일시적으로 유쾌한 흥분에 탐닉하는 심적 수준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센스지각의 상황으로부터 진전하는 이른바 유기체적 사건의 의미화 과정과 관련된다. 바꿔 말해 미적 개성주의(aesthetic individualism)와 맞물려 발전된 순수 쾌의 탐닉으로 미적 경험을 처리코자 하는 담론들은 단원의 이 작품에 대한 지각자의 일상적 삶의 재생산적 실천과정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담론들은 근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그릇된 믿음 체계와 어우러져 미적 경험을 사적인 것으로 구획화하고 관념화해 이 작품을 만나 이루어진 문제상황의 유기적 토대(organic substratum)를 송두리째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형식론과 표현론으로 표상되는 이러한 담론들은 이 작품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세시풍속을 반영하는 기록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특정한 정서를 유발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미적 경험을 유발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처리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지각자와 이 작품이 한 데 어우러져 지각자의 일상을 질적으로 변이시키는 질적 상황을 통하여 일종의 훔쳐보기와 관련되는 성도착적 에로티시즘을 문제 삼으면서도 〈빨래터〉라는 과거의 생활현장에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지는 생동감과 익살스러움을 현재화하면서 유기체의 생명 기운을 올곧게 다잡고자 하는 유기체적 의미화 과정은 분명히 미적 경험으로 풀이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인간 유기체는 새나 동물 그 이상의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과는 유기적인 생명기능들(vital functions) 내지 생존욕구들(vital needs)이라 할 동일한 토대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그의 모든 센스와 움직임을 통합하는 생명기운의 조직화 내지 유기화가 살맛을 유발하는 미적 경험의 핵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유기체 스스로를 지키는 유기조직들(organs)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라 오랜 진화를 거쳐 동물조상들(animal forbears or ancestry)이 세계와 투쟁한 결과로 획득된 것들이기에6) 단원의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은 곧바로 이러한 유기체성을 핵으로 아우를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런 만큼 이러한 생물학적 유기체성은 단원 작품과의 만남을 미적인 것으로 만드는 토대로 자리하면서 지각자의 생명기능들을 확장시키고 세계에 대한 유기체적 적응의 경이로움을 창출시켜 자신의 생명력을 확충해 나가는 중심이 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모든 센스를 한꺼번에 세계에 참여시키는, 즉 자신의 전부(whole existence)를 세계에 내던지는, 이른바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세계와의 맞물림으로 단원의 회화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의 함의들(impli-cations)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단원의 이 회화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의 핵은 이러한 유기체성과 센스 지각이지 이러한 것을 배제한 무관심적 관조 내지 직관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단원의 이 작품을 통해 지각자가 일상의 본래적인 안정감과 조화의 느낌을 자신 속에 품는 미적인 경험을 조야한 감각(gross sensation)의 차원이나 색욕 혹은 거친 잔인성의 차원으로 격하하는 것은 육체에 대한 경멸을 당연시하고 센스에 대한 두려움을 극도로 조장하면서 관념과 감각의 분리를 정당화해 온 전통적인 미적 경험 이론들의 잘못임이 명백해진다. 결국 탈유기성의 확산을 지속적으로 강요함으로써 미적 경험을 정적이고도 기계적인 범주에 귀속시켜 특이하고도 고유한 사적인 영역에 가두어 놓은 경험의 해부학 내지 경험의 탈유기화를 조장한 이러한 경험이론들은 유기체성의 질적 승화를 통한 이 세계의 광휘의 실제화(actualization)가 미적 경험의 본질임을 부정해 버리는 잘못을 범해 왔다. 말하자면 미적 경험에서 이러한 유기체성 내지 직접적인 질성의 울림으로서의 센스 지각을 무시해 버린 전통적인 경험이론들은 단원의 이 작품을 지각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을 향유하게 되는 유기체의 직접적이고도 미적인 경험의 본래적인 특성을 제대로 다잡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 그러기에 원자론적이고도 개별론적인 자아중심적 경험개념을 비판하고 주관과 객관의 일련의 상호침투적이며 유기적인 통합을 경험으로 다잡는 이러한 육체적(somatic) 자연주의 경험 이론에 입각할 때 단원의 이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은 유기체성을 토대로 존재의 ‘공존성(co-existence)’과 ‘지평성(the perspectival)’을 성숙화의 동인(agent)으로 삼으면서 인간과 세계의 진정한 화해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것으로 가늠해 본다.
3. 미적 경험의 본질 ; 생명 기운의 조직화
〈도원〉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중섭의 회화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은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과 그것 사이에 질적으로 상호교류하는 생명 기운들의 변성작용을 통하여 지각자의 생명력을 확장시키는 의미-통로이며 유기체의 생명력 확충을 진작시키는 미적 황홀의 차원을, 즉 정신과 물질의 우주론적 융합으로서의 영성(靈性, the ethereal thing or ecstatic union) 획득의 차원을, 담지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중섭의 작품과 조우하는 질적 상황을 지배하는 생명 기운(vital energy)의 조직화(organization)7)로 정향되는 이러한 미적 경험은 이제 지각자가 의미로 충만한 사건(meaningful event)을 소유하게 되고 지각자의 생명력을 보존하고 확충하는 중요한 생명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유기체와 세계의 만남 과정을 구성하는 부분요소에 지나지 않는 이중섭의 작품제작의 심적인 동기나 작품의 시각적 정보만을 가지고 마치 그것들이 이 작품에 대한 미적인 경험 전체인 것으로 처리하는 미시적이고도 편향적인 경험 이론의 참칭성 내지 위장술이 그대로 방치되는 잘못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결국 부분으로 전체를 참칭하는 환원주의적 오류(reductionist fallacy)를 저지르는 이러한 경험이론들은 지각자가 이중섭의 이 회화작품을 만나 기계적인 반복에 의하여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단조로운 일상성을 극복하여 의미로 충만된 일상을 획득코자 하는 생명 기운의 질서화된 변이로서의 조직화를 배제하게 된다.
따라서 이중섭의 이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이 어떤 뜻에서든 생명 기운의 ‘끊임없는 조직화의 과정’이 되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하찮은 것들을 물리적으로 단순히 재산출한 것도 아니고 세계의 보편적인 특징(generic features)을 단순히 재산출한 것도 결코 아니라면, 그것은 센스지각의 장 속에 있는 잠재적 생명 기운을 실체화하는, 즉 의미를 창출하는, 작용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대양 조류의 움직임처럼 처음과 끝을 가지는 가운데 멈추면서 고갈된 생명 기운을 회복하고 결여를 다시 확충하는, 소위 리드미컬한 질서화(rhythmic ordering)를 통하여 〈도원〉에 대한 미적 경험은 의미로 충만해진다. 바꿔 말해 쉼(pauses)과 전향성(merging that carry forward)의 엄밀한 균형이 이루어지는 생명 기운의 이러한 조직화는 〈도원〉에 대한 첫인상 출현의 단계, 중단 단계, 완결로 지향하는 지각의 단계 및 이 3단계를 의미로 묶는 4단계를 거치면서 미적인 리듬으로 자리함으로써 비로소 지각자에게 의미의 지평을 드러내 보이고 지각자 스스로 이 작품에 투사하였던 다양한 기대 목적을 실현하여 세계와 합일하는 미적인 환희(aesthetic ecstasy)를 제시하게 된다. 물론 지각자의 지극한 관심의 결여로 인하여 제대로 조직화되지 않을 때의 경험은 생명 기운의 조직화가 국부적이고 파열된 형태로 출현하여, 즉 물리적 환경과 제도의 관성과 인습의 힘에 주눅든 상태로 자리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단순한 흥분을 야기하는 생명 활동이 활개를 치기 때문에 지각자의 일상은 이 작품과의 질적인 상황을 거치면서도 의미있는 사건으로 충만하지 못한 채 그냥 떠돌게 된다. 그러기에 드라마는 억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드라마로 전락하고 누드화가 색정의 충동질을 일삼는 포르노그라피로 전락하게 되듯 이중섭의 이 작품은 그저 불운했던 화가의 비참했던 한때의 울분을 토로한 정도의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지각자의 단조로운 일상성으로부터 내적인 통합과 완성이라 할 의미층을 소유하게 되는 올곧은 미적 경험은 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적 경험은 지각하는 유기체의 생명력을 부단히 확충하면서 기억 가능한 의미로 고양되고 의미로 충만된 경험이 되기 때문에, 즉 공적인 언어와 공통적인 문화적 구조를 토대로 공유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의 사적인 범위를 벗어난다. 또한 이중섭의 이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은 그저 지각자에게 중요한 것으로 강변될 수 있는 것이지, 실상 그것은 사라지기 쉽고 추론해서 파악하기조차 힘든 것에 불과하다고 염려할 수도 있다. 바꿔 말해 이중섭의 회화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이란 개념은 분석하기에도 그리고 다른 경험과의 구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수적인 그 고유의 안정된 본체(stable substance) 혹은 명료하게 정의 가능한 현상으로 정립되지 않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미적인 경험을 정의하고 적용하는 방식에서 부분적인 정당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적 경험이 근본적으로 정의에 불과하다거나 그것을 해명하려는 철학의 작업 속에서 그것의 중요성에 대한 부정이 타당하게 논증되고 있다는 지점까지 확장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미술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으로서의 유기체적 생명력 확충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미술작품에 내재한 순수형식 내지 직관적 표현에 상응하는 객관적 진리라 할 불변의 추상적 실체에 의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만족과 정서적 만족을 추구하는 유기체의 일상적인 탐구활동에 의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적인 경험과 관련되는 감각적 즐거움과 정서 획득의 문제는 유기체의 일상에서 결코 사소한 것으로 전락할 수 없다. 따라서 미술작품은 느슨하게 펼쳐지는 유기체적 일상을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전이시켜 우주 삼라만상과 공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지극히 근원적이고도 유익한 의미 지평을 마련해 주는 특정한 사람의 미적 경험의 소산인 동시에 다른 무수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적 경험을 끊임없이 촉발할 수 있는 동인(agent)으로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주1) 정순복,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미학과 분석미학의 이원일위적 특성(한국미학회, 《미학》 제34집, 2003 봄, pp.277-324) 참조. |
출처 / http://cafe.daum.net/jsse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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