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보들레르, 그리고 '플라뇌르'로서의 예술가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The Balcony,
1868-69,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유사한 종류의 다른 그림처럼, 드가의 [콩코드 광장 Place de la Concorde](1875년, 도판 18)과 르누아르의 [클리시 광장 Place Clichy](1880년경, 도판 13)은 관람자를 그들이 묘사한 풍경과 특별한 물리적, 심리적 관계에 놓는다. 그들은 이 풍경을 플라뇌르(여유를 즐기는 일반 사람)의 시각으로 표현하고 관람자도 같은 시각으로 감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 회화들에는 '그림 속의 관람자' 가 있으며, 실제의 관람자가 상상을 통해 그림 속의 이런 인물이 '될 때' 작품이 완성된다. 이런 류의 그림들은 종종 그려진 장소를 매우 주의 깊게 표현함으로씨, 그림 속의 등장인물을 관람자와 동일한 위치에 놓는다. 마네의 작품을 보면 때로 그림 속의 인물이 그림으로부터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관람자와 일치하게된다. 이건 회화들은 명백히 여성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 안의 남성 관람자와 동일시하여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논제이다.
플라뇌르의 관점을 취하고자 하는 화가들의 열정은 시인 보들레르, 특히 그의 영향력 있는 에세이 <근대 생활의 화가>1863년)의 영향을 받았다. 복잡하고 진기한 이 작품에서 보들레르는 삽화가 기스의 작품(도판 20)을 회화에 대한 시각, 모더니티에 대한 경험, 플라뇌르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했다. 다른 많은 비평가처럼 보들레르도, 예숱이 '에콜 데 보자르'의 학생들에 의해 양산되거나 매넌 개최되는 공식적인 살롱전의 전시와 연관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작품들은 대개 교훈적이고 설명이 포함된 고대 역사의 한 장명이거나 장 오귀스트 도미니그 앵그르Jcan-Auguste-Domimique Ingres의 [호메로스 예찬 Apotheosis of Homer)(1827년, 도판 85, 133쪽 참조)같이 정통 아카데미 회화의 가장 우수한 장르로 여겨지는 우화적인 내용들이었다. 보들레르는 예술이 타당하려면, 모더니티나 '금세 사라지는 것, 고정되지 않은 것, 일시적인 것' 과 결부되어아 한다고 주장했다.
18. 드가의 [콩코드 광장],
1575년,캔버스에 유채, 79×118.cm, 에르미타주 미술관,상트페테르부르크.
드가는 그의 작품을 일상적이고 자발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비평가 조지무어에 따르면, 드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떤 예술도 내 작품만큼 자발적일 수는 없다. 내가 한것은 대가들을 연구하고 반영한 결과이다. 내가 전혀알지 못했던 영감과 자발성과 기질의 결과이다 "
보들레르는 근대적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더니티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모더니티의 관찰과 기록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여긴 특성, 이름하여 예술파가 플라뇌르라는 것을 보여주는 특성을 기스의 작품에서 추출해냈다. 보들체르가 기스론 플라뇌르라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무관심한 특성들이 밌으며, 피상적으로나마 근대적 경험의 충격을 다루는 노련함-모더니티의 특징인 속도, 흐름, 불가해성-이었다. 표면적인 의미고 보면, <근대 생활의 화가>는 마치 플라뇌르와 모더니티의 순간적인 인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결투를 찬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보들레르는 근대의 화가들이 '새로운 것 앞에서 시선을 정하고 황홀해 하는 어린 아이의 시각' 에 어떻게 사로잡혀 있는지와, 동시에 멋쟁이로서 얼마나 '무감각한 것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논하었디- 보들레르는 또한 기스의 작품에서 근대 생찰의 '빠른 움직임'과 일치하는 '빠른 행동'의 증거를 발견하였다. 경험의 순간적인 특성에 전율하는 보들레르의 강한 열의는, 카페의 가십과 소문 등을 통해 모네 같은 비교적 젊은 미술가들에게 전달되었다.
르누아르의 [클리시 광장]
1880년경. 캔버스에 유채,657542m,
피츠월리엄미술관, 케임브리지.
<근대 생찰의 화가>의 내용의 대부분은 이해되지 않는 한 집단을 이해하고자 하는 흥분감에 관한 것인 듯하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수필에 서 근대 화가들을 '별것도 아닌 것에 거만을 떨며 만족해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와 유사한 개념들괴 경험은 다시 회화에서 표현된다. 특히 드가는 플라뇌르의 경험과 우연한 만남에 관한,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으며 분명치 않은 점을 표현하려 한 듯하다. 그의 [콩로드 광장] 같은 작품에서 '그림 속의 관람자'는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우연히 마주치는 플라뇌르로서, 우아하게 차려입은 남자와 그의 자녀로 보이는 아이들을 만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의 부인은 없는데, 왜 없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드가는 또한 관람자가 어떻게 이 광경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비스듬한 시점을 사용해 예기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지나가는 사람의 등으로 날카롭게 잘려나간 왼쪽 가장자리는 관람자에게 예기치 않은 불편한 느낌을 준다.
출처 / http://cafe.daum.net/jsse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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