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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폴 스미스 / 기억과 경험

by 丹野 2010. 10. 1.

 

  

 

기억과 경험

     


    그림은 수많은 동기들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데, 특히 마네는 머떠한 단순한 해결책도 제공하지않고 위기를 규명하기를 원했다. 즉 그는 대중적인 공허한 경험과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 얻는 좀더 인간적이고 사적인 경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사실 마네의 일반적인 풍경화들에는 불어로 '방심absence(몽상과 비슷한 상태)' 이라고 불리는, 사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의 내면 세계에 침잠하는 상태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다.

    '칠학적' 인 것은 근대의 삶에서 겪는 경험으로 간주되었으며, 사실상 그것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마네는 이를 [발코니 Thc Balconly](1868~9년, 도판 17)에서 더 강조하고 있다. 이 장면을 뭔가 꿰뚫어 보려는 관람자 편에서의 노력은 난간에 의해 깨지고, 그 뒤에서는 모리조가 대중의 세계와 흘끔흘끔 보는 플라뇌르의 눈을 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색채는 우리의 호기심에 장벽을 치며 우리의 노력을 좌절시킨다.


    에드와르드 마네, [부채를 든 모리조]Berthe Morisot with a Fan.
    1872.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그러나 마네는 이러한 내적 성찰을 근대의 사회생활에서 겪는 공히함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아로의 회귀는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 생활의 화가>>에서 내면적 성찰과 실제 경험 사이의 상실된 느낌을 회복하는 기억의 힘에 관해 말한 보들레르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일 수 있다. 그는 심지어 기스의 열정적인 기법이 '부활을 믿는 사람,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기억, 만물에 대해 '나사로야, 일어나거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억들' 의 산물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종이 위에 다시 태어난다, 실물과 똑같고 실물보다 더 실물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또한 기스가 열정적으로 작업한 까닭은 그가 가진 '(기억의) 유령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비록 마네와 보들레르가 마음의 내적 삶(방심과 기억)을 모더니티의 실제 경험에 있어서 우수한 영역으로 다루지만, 그것은 여전히 모더니티로부터 잃어버린 것을 경험하기 인한 회복의 힘은 갖고 있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개념과 태도는 보들레르의 시, 특히 그의 연애시에 잘나타나 있다. 이런 시에서 사랑받는 대상은 종종 잃어버린 것이거나 기억의 산물로 제시된다. 보들레르는 사랑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소외된 개인들의 사회에서 의미있는 경험을 찾을수 없다는 것으로 상징화하기 때문에, 시인과 화가 둘 다에게 만족감을 주는 근대적 생활의 가능성에 대해 숙명적인 태도를 공유한다. 이런 감상적인숙명론 같은 것은 마네의 많은 작품에 드러나 있지만,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With a Fan)(1872넌, 도판 35)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모리조(Berthe Morisot) The Cradle
    1872,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마네가 그린 모리조


    마네가 그린 모리조
     
    출처 / 인터넷 검색 - 출처 / http://cafe.daum.net/jsseo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