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보들레르 그리고 플라뇌르로서의 예술가
4. 마네와 여성의 상징
여성을그린 마네의 작품들은 그 어느것보다도 그의 '철학적인' 면모를 드러내 준다. 많은 작품에서 그는 매우 유사한 방식을 사용히는데, 이는 남성 관람자를 그림을 감상하는 일반적인 관람자로 규정하여 그로 하여금 이런 역할에 불편하게 만들고 자신의 이런 태도를 '철학적' 으로 심사숙고하게 한다는 점이다.
관람자는 그가 바라보는 그럼 속의 여성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으로해서 자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간단한 장치의 힘은 마네의 [놀란 님프 Nymph Taken by Surprise](186l년, 도판 27)의 처음 그림과 마지막 그림을 대조함으로써 잘 이해할 수 있다.
.
처음 그림에는 우측 상단에 사튀로스가 있어서, 관람자는 이 대상을 향해 자세를 돌림으로써 그림 안의 이성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것에 대해 자의식을 느끼는것을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네의 마지막 그림에는 이 사튀로스가 없고, 따라서 관람자는 자신의 태도에 직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림 속의 여성이 뒤를 보는 방식은 분명히 그를 유일하게 그녀의 사생활을 침범한 자로 규정하게 만든다.
마네, [풀밭위의 점심]Le Déjeuner sur l'Herbe (The Picnic), 1863
이와 아주 비슷한 방식은,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이 개방적인 이미지로 비춰지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다시 모아 전시한 '낙선전 Salon des Refuses'에 출품된 [풀밭 위의 점심 Le Dejeuner sur l'herbe](Luncheon on the Grass)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거절당한 이유는 아마도 회화 속의 관람자를 바보처럼 느끼게 만드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그가 보아서는 안 될 광경에 마주친 것같이 만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여성은 어떤 수치심이나 놀라움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두 명의 남성 동반자들과 가까이 동등하게 앉아 있다. 그림 오륵쪽 남자의 보헤미안적인 행동과 의상은 이 사람들이 예술가와 모델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회화의 전반적인 힘은 진기한 비꼬기에 있다. 실제 남성 관람자가 그림 속 관람자의 심리를 이해한다면 그는 제시된 '실제' 모델을 보는 것이다. 이는 그가 더 이상 편안하게 작품 속 여성의 신체를 찬양하거나 안정된 느낌 속에서 예술을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작품은 관람자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듯이)누드화를 보는 것이 단순히 순수하고 무관심한 태도만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직면하기를 원하는 듯하다. 대신 모델을 '실제' 적인 것으로 만드는 이 회화의 독특한 방식은 누드를 보는 것은 남성이 실제 여성을 향해 취하는 많은 태도를 수반하지만, 그것은 그림 속의 여성은 일반적으로 뒤를 돌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위장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풀밭 위의 점심]은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같은 작품들이 제시하는 일방적이고 지배적이며 소비적인 남성의 시각을 거부한다.
에두아르 마네,[올랭피아]Olympia,
1863,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매춘부를 다룬 마네의 그림은 1865년 살롱전의 개회식 내내, 한 비평가가 이 작품은 "눈높이보다 높게 걸려 있어야 했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몇주 후, 다른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당신은 고양이를 데리고 있는 마네의 비너스가 계단 위에서 그녀의 창백한 나체를 과시하는 것을 보았다. 대중의 감시가 명예로운 자리로부터 그녀를 쫓아버렸다. 우리는 이 불쾌한 여인을 서투른 그림조차 전시되지않는 높이에서 다시 발견한다."
실제 여성에 대한 플라뇌르의 태도, 아마도 186O년대 파리에 인구 100만 명당 7만 5천명 가량의 등록된 매춘부와 그 수가 알려지지 않은 등록되지 않은 매춘부가 있었다- 이는 남성들의 수요가 상당히 많았음을 뜻한다-는 사실로 추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네는 그의 작품 [올랭피아 Olympia](1863년, 도판 23)에서 여성에 대한 플라뇌르의 태도를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누드화라기보다는 관람자를 그녀의 고객으로 바라보는 매춘부를 그린 것이다. 마내는 -[올랭피아]가 비꼬는 고전의 대작인 티치아노Titian의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1538넌)에서 관람자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관람자가 묘사된 장면으로부터 멀리 물러나거나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일격을 가한다.
이런 보편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들간의 차이점이다. 특히 마네는 티치아노가 제시하지 못한 어려움을 관람자에게 제시한다. 티치아노의 여성은 과시하는듯이 벌거벗었거나 나체인 것치럼 일부러 포즈를 취한 것이다. 그녀는 순종적이며, 비록 그녀가 성기를 손으로 예의바르게 가리고 있지만 얼굴 표정은 수줍어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람자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관람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이 시나리오에 반드시 그를 포함시킬 괼요는 없다. 반대로 마네의 여성은 벌거벗은 채 대담한 표정으로 관람자에게 도전하고 있는데, 한 놀란 비평가가 기술했듯이 '일종의 부끄럼 없는 긴장으고 고정된 손'이 그녀의 성기를 끈질기게 가리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한 효과는 다음과 같은 암시에 기인한다. 그럼 속의 관람자는 '올랭피아'의 성적 관심의 대상으로 거기에 있거나, 적어도 (만약 실제 관람자가 작품이 관람자에게 암시하는 심리를 띈다면) 우리는 능동적으로 이 장면과 행위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네는 이 점을 거의 붙가피하게 만든다. '올랭피아'는 커튼을 걷어 그녀의 신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는 수월하게 그녀의 관심을 끌기위해 이국풍의 꽃다밭을 그녀의 하녀에게 준다. 게다가 그녀는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성적으로 자극적이지 않고(그녀의 유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찬 팔찌에는 로켓이 있는데 이는 그녀가 우리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녀가 우리와 맺는 성적 관계는 단순히 돈 때문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림 속의 관람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접근이 명백히 일방적이라는 분명한 상황 앞에 놓여진다. 돈이 지불되면 올랭피아는 우리의 애무로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가 이 접근을 어렵게 한다.
첫째는 성과 돈이 서로 어떻게 추하게 관계를 맺는지를 마네는 가장 독특하고 잔인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춘에 대한 대부분의 회화와는 달리 이 작품은 매혹적인 것으로 가장해 그관계를 고귀하게 꾸미려하지 않는다.
둘째, 마네는 자신이 가진 기술로 인위성을 강조해 관람자를 불편하개 만든다.
이러한 교묘한 술책은 대부분의 마네의 회화에서 제시되고 있지만,그 효과는 여성을 그린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는 이 그림이 지니는 뚜렷한 인위성(인공적인 특성)이고, 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이 회화를 화가가 창조한 인공물로 인지하게 만든다. 일단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관람자는 화가가 그를 그려넣기 위한 과정으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결론을 향한 과정의 일부로서 관람자가 어떻게 회화 속으로 들어가는지를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예술가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회화 안의 관찰자로서 규정된 플라뇌르의 입장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즉 탐정 놀이하는 관람자르 지켜보는 사람으로서의 미술가의 명백한 존재는. 관람자가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을 극도로 주의하도록 만든다.
마네Edouard Manet.[카페 콘서트의 구석]
이와 비슷한 종류의 효과는 두 개의 매우 유사한 그림인 [카페 콘서트의 구석 Corner in a Cafe-Concert](1877~9년)과 [카페 콘서트 Cafe-Concert)(1878~80년경)에 나타난다. 하지만 이 두 그림은 그림 안의 관람자를 규정짓는 성격 면에서 다소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마네는 주제가 동일한 두 작품에서 관람자로 하여금 자의식을 불러 일으키도록 한다. 첫 번째 그림에는 초저녁 카페 콘서트(일종의 뮤직홀)의 광경이 제시된다. 목격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파란셔츠를 입은 노동자들이 퇴근하 는 길에 이런 곳을 들른다고 한다. 노동자와 함께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중절모를 쓴 부유한 남자인데, 그는 아마 장인이나 최사원일 것미다. 그리고 그 튀에는 매춘부가 보이는데 그녀는 나중의 그림에서 얼굴을 모두 드러낸다. 마네는 여기서 계급이 다른 사람은 잠재적인 성 파트너로서 계급이 달라 보이는 여성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마네Edouard Manet. [카페 콘서트]
매춘부에 관심을 가질법한 유일한 사람은 노동자이고, 반면 장인 혹은 회사원은 맥주 나르는 여성을 그냥 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여성은 손쉽게 생각되었고, '브라세리 아 팜므brasseries a femmes'로 알려진 곳에서 성적서비스를 제공했다. 사실 셔츠를 입은 남자는 맥주 나르는 여성의 남편이었다 - 예술가와 예술가의 모델 사이에서 발생하는 외설적인 루머 때문에 그는 그림의 모델을 하는 동안 그의 부인을 보호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부유한 사람은 노동자나 점원(그들은 퇴근길에 자주 들렀다)보다 나중에 카페 콘서트에 들어가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림 속의 관람자는 그림 속의 두 남자와는 다른 계급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초저녁에 무언가를 하고 들어온 두 번째 그림에 보이는 우아한 플라뇌르일 것이고, 분명히 무대 위의 여성을 보았을 것이다.
칫 번째 그림은 관람자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자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에서는 이러한 신분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아한 플라뇌르는 무대의 가수를 보고 있다(우리. 즉 관람자는 거울을 통해 가수를 보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갑자기 끼어든 택주를 나르는 여성에게 쏠린다. 그리고 아무 매춘부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그러나 관람자로서 우리가 관람의 단계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곧 명백해진다. 그림에 나타난 플라뇌르처럼 우리는 우리의 계급과 그들의 계급에 따라 여성을 본다. 그림은 이 점을 불가피하게 만들기 위해 말 그대로 높은 위치부터 낮은 위치까지 여성을 배열한다.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The Bar at the Folies-Bergère, 1882, The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이것은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A Bar at the Folies-Bergère](1882년)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회화에서 관람자는, 거울에 나타난 그의 모습(그림의 우측)이 술집에서 여성에게 접근하는 플라뇌르임을 말해주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당대의 용어로, 이런 여성들은 술을 따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객들의 성적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안부'로 알려졌다. '폴리 베르제르에서 술집 여성은 보수는 형편없었지만 만약 '기회' 를 잘만 이용한다면 돈을 적잖이 벌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관람자인 우리가 술집 여성에게 뭐라고 말할지가 모호한 채로 남는다.
그러나 그림은 우리의 접근에 대해 매우 비평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거울에 비치는 술집 여성은 도도하고 정중해 보이는 반면 정면으로 보이는 그녀는 수줍고 우울해 보이는데, 이 두 모습은 서로 이율배반적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공적인 얼굴과 그녀가 실제로 느끼는 내적 느낌이 다름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림은 성적 대상르로서의 여성을 찾는 잘 차려입은 남자들과 손님이 될 만한 남자들을 바라보는 이성들로 가득 차 있다. (모파상이 <벨 아미Bel Ami>에서 말한 것처럼. 한 방문자는 "무대 위의 장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뒤쪽의 관중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데, 이 관중들은 남자들과 매춘부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마네의 회화에서. 때춘부 옆쪽에서 펼쳐지는 쇼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좌측 상단에 그네를 타는 공연자의 두 발이 아이러니하게 놓여 있는 것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거울 안의 세상은 실제 상황이 어떤지를 보여주지 않고 대신 매춘부가 입은 피상적인 화려한 옷이나 점잔빼는 얼굴을 보여준다. 사실 거울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의 허위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고 있으며, 술집 여성에 대한 주관적이고 더 '실제적인' 결험과는 반대되는 것을 제공한다. 마네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그림 우측에 멀리 놓아둠으로씨 두 특성이 곁코 일치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일부러 그녀의 내적 느낌과 그녀의 공적 얼굴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이런 장치들은 결과적으로 관람자에게 그림 앞에서 그가 서있을 위치를 결정해야 하는 선택권을 부여한다. 오른쪽에 서 있으면 그는 잔인한 플라뇌르가 되는 것이고, 중앙에 서면 술집 여자와의 무언가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위치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위치도 그에게 안정된 관계를 주지 않는다. 왜냐하먼 그가 어디에 서 있든 회화는 어떤 명백한 의미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위치에서든 사람들과 사물들과 거울에 비친 모습들과 관계는 다르게 남아 있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발표후 <르 주르날 아뮈장 Le Journal Amusant>에 실린 캐리커처
한 풍자화가는 이 그림을 쉽게 이해하도록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이 일러스트레이션의 표제는 다음과 같다. '폴리 베르제르의 위안부(거울을 통해 그녀의 등이 보인다. 그녀는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 모습은 거울을 통해 보이지만, 화가가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 남자의 이미지는 그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생략된 것을 채워 넣어야만 한다).' 이러한 요인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마네의 그림 속 어디에 서 있어아 할지 모호하게 해준다.
출처 / 인터넷 검색 - 출처 / http://cafe.daum.net/jsseo43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상력 개발을 위한 유형학습 / 송수권 (0) | 2010.11.03 |
---|---|
시작법(詩作法) / 고영민 (0) | 2010.10.07 |
폴 스미스 / 기억과 경험 (0) | 2010.10.01 |
폴 스미스 / 철학적 플라뇌르 (0) | 2010.10.01 |
폴 스미스 / 플라뇌르와 모더니티의 위기 (0) | 2010.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