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석굴암(아미타삼존석불)
팔공산 한티재를 넘어 군위방향으로 꼬불꼬불 내려가다 보면 제 2 석굴암이라 불리는 군위 삼존석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 자연석굴 그 안에 삼존불을 봉안 해 놓은 석굴신앙의 원형이다. 경주 석굴암보다 한 세기 먼저 조성되었지만 그것보다 더 늦게 발견된 탓에 제 2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곳은 자연석굴로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27년 이웃의 한밤마을에 사는 최씨라는 청년이 소나무에 밧줄을 걸고 절벽을 내려가다 덤불속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환희의 순간에 표현을 상상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발견 된 후에도 40년이란 세월이 더 지난 후에(1962년) 국보 109호로 지정이 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게 되었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3천만원의 시주로 앞의 계단을 만들고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경주 석굴암과 격을 나란히 하는 석굴사원이며 석굴암보다 한 세기 더 앞서 조성된 것이니 석굴 신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곳 이 높은 곳까지 삼존불을 모셨을까? 또한 어떻게 모셨을까? 도대체 어떤 소원이 있어 이 자리에 머물며 이토록 간절히 다듬어 놓았을까? 이 문이 열리기까지 천 년의 시간을 숨죽이며 흘러왔으니 오랜 세월 폐허 속에서 기다림이야 애절한 마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으랴 만은, 우리 중생들의 허허로움이 도를 넘자 우연을 가장하여 홀연히 나타난 것은 아닐까?
송림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는 아도화상이 이곳을 중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도화상은 이곳에서 수도증진 했다고 한다. 이렇듯 팔공산 비로봉 한 줄기가 내려 뻗어오는 곳 이곳에 면벽수행 하듯 천년을 그렇게 내려왔다. 불법을 전하여 극락정토를 이루리라는 아도화상의 간절함이 묻어 있으며, 태고 적 부처님이 이루어 냈던 부처님의 마음이 이러하다며 석굴암은 묵묵히 전하고 있다.
석굴 안에는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불이 주존불로 양 옆으로 왼쪽에는 자비로 현세의 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과 오른쪽에는 지혜의 문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대세지보살이 협시불로 있다. 이렇듯 거친 돌을 애써 다듬어 당시의 심정이 간절하고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주존불인 아미타불은 근엄하고 평온한 모습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으며, 오른편의 대세지보살은 보배병이 조각된 보관을 쓰고 있다. 또한 왼편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이 조각된 보관을 쓰고 서있다.
석굴은 원 지름이 4m로 웅장하고 장엄하다. 아미타불은 섬세하게 조각되어 통일신라 이전의 불상연구에 도움이 된다. 불상의 정형화된 모습이 경주석굴암 석가모니불이라면 한 세기 거슬러 올라 불상의 변형된 모습을 비교해 보는 맛도 있다. 또한 주위 석벽에 염화로 광배를 그려 놓았으니 처음 화려함이야 조성당시의 지극함을 엿볼 수 있으나, 지금이야 불공드리는 스님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해 놓아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천년을 숨 죽여 온 고요함에 헛기침 소리가 천둥소리로 들릴법하니 욕심도 참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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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짧게 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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