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고드름이 녹아내렸던 열무밭 / 박정원

by 丹野 2010. 5. 10.

 

 

       고드름이 녹아내렸던 열무밭

 

                                               박정원 (시인)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들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와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이 가리키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 소리

 

  결국엔 물이었다

  한 바가지 들이켜지 않겠는가

                            - 졸시, 「 고드름」전문

 

 

  암울했던 내 마음의 처마 끝에 날카로운 고드름이 맺힌 적이 있다. 한줄

인생의 일부분을 면도칼로 잘라 들어내고 싶은 시간들, 에워싼 눈빛들을

뒤로 하고 투신하고 싶었던 처절함, 배신감, 그것들로 인하여 시골로 유배

아닌 유배(?)를 가야만 했다. 어느덧 6년 전의 일이다. 북한산 조그마한 암

자의 처음 뵙는 스님께서 나를 보자마자 대뜸 복수하지 마세요, 라고 말씀

하신 겨울 끝 무렵이었다.

  시골 근무처 뒤란 처마에 고드름이 수없이 맺혔다. 하나 따와 사무실로

가져오자마자 내 손바닥 안에서 녹기 시작했다. 고드름도 눈물을 흘리는

구나. 내가 곧 고드름인 것 같아 서러운 눈물이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물, 지구의 지표면을 70% 덮고

있는 물, 눈을 보호하고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나오는 눈물도 결국엔 물이

아니던가.

  첫 연을 써내려갈 때는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마지막 연까지 단숨에 써

내려갔다. ‘결국엔 물이었다’라고 마쳤을 땐 속이 후련해졌다. 흐르는 물

처럼, 기체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처럼 사라질 生, 내 안의 고드름

은 그때부터 맺히지 않는다. 영원히 맺히지 않을 것이다.

 

 

떡잎 갓 벗어난 아기열무들 사이로

서릿발 들어선다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그 어린것들에게 몸을 낮춘다

여린 이파리를 들추자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열무 

 

누가 놓고 갔는지 천국영아원 골목엔

아기 혼자 포대기에 안긴 채 울고

열무씨앗처럼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연락처도 없이 사라진 아기엄마는

철도 모르고 열무씨를 묻었던

내 속 같았을까

 

돌아가는 모퉁이엔 온통 대못만 박혔으리

다시 그 젖은 사랑을 그리워할 저녁

꽁보리밥에 여린 열무를 썩썩 비벼먹으며

고추장 같은 한숨을 떨어뜨릴까

 

너무 늦게 심은 열무밭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 졸시, 「 열무밭에서」전문

 

 

  유배지 근무처 여분의 땅에 그해 10월 초 열무를 심었다. 햇빛도 서서히

기우는 시기였기 때문에 잘 자랄 리 만무했다. 비닐을 사다가 덮어 주고 퇴

비를 듬뿍 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느다랗게 웃자라기만 했지 도대체가

통통한 열무로 크진 못하였다. 괜한 짓을 하였구나, 이 어린 것들이 얼마나

나를 원망할까, 후회막급이었다. 나락에 떨어진 내 마음 같아 한없는 서러

움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여린 열무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다.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부

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영락없이 몇 해 전에 위문을 간 영아원 풍경이었

다.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라고 써내려 갈 때의 어미

심정이 가만히 열무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 마음 같을 거란 생각을 했다.

  비극은 시의 출발이다. 대상이 자신과의 연결고리가 강하게 맺혀 있을수

록 깊은 슬픔이 찾아온다. 슬픔은 일반적으로 허탈감, 실망감이나 좌절감

을 동반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말로 할 수 없는, 소리를 내는 ‘우는’ 행동

을 부른다. 한참을 울고 나면 후회와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 서정抒情의 중심에는 끝내 배제하지 못한 ‘자아’(自我, ego)가 강하게

자리 잡는다. 시에서 자아를 반드시 내쫓아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객관주

의의 오만이거나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아라는 존재는 주정적, 인생

적이라는 특징을 웅변해 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

다. 그것들에 사물을 다듬고 만지는 상상력의 섬세한 에너지나, 추구하고

지향하는 어떤 예리한 강도强度가 피력된다면 금상첨화 아닐까.

  한때 날카로운 칼이었던 고드름의 녹은 물을 따뜻하게 데워, 다시 한 번

춥고 목말라하는 여린 열무 같은 이들에게, 한 대접씩 권하고 싶은 요즈음

이다.

 

 

 

   박정원 시인

* 대전고, 방송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1998년《시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꽃은 피다』『고드름』등 5권.

*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한국시문학문인회 회원. <함시> 동인.

jarpar@hanmail.net

 

출처 / 우리시회 카페 - 감사합니다.

 

 

 

 

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