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가장 빛나던 시간들
강가람 (시인)
몇 개의 계곡과 컹컹 우는 짐승의 심장을 밟고 온 달
호수에 제 몸빛을 풀어 놓고 있다
무릎을 구부리고 출렁이는 물주름을 당겨 맡으면
활처럼 휘어진 곡선의 뒤편 골목길 하나 있을 것 같다
몽고반점처럼 찍힌 달의 옆구리엔
오래 전 아버지가 젖은 손으로 옮겨 놓은 집 한 채 있다
사이프러스 언덕과 시냇가 송사리 떼
숨바꼭질로 흩어진 골목길
아이들을 찾아 저녁을 불러 모으는 목소리
얘야 물에 썩는 것들은 모두 달로 옮겨야 한다
그 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달로 갔다
샤워를 하는 동안
밤을 함께 보낸 애인이 달로 간다는 편지를 남겼고
같은 음악을 들으며 파충류처럼 젖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이야기하던 친구도 달로 갔다.
달의 차디찬 입술에 빗장을 지른 시간의 검은 손가락
가족사진을 보듯 먼 발치에서 달을 보고 있는 아버지
못에 찔린 기억은 몸속을 떠다니다가
어느 날 문득 몇 방울의 눈물로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푸른빛이 혈류처럼 흐르는
저 달 속엔
수몰된 지명 담양군 용면 용호리
연대가 다른 지층의 마을이 있다.
- 졸시, 「 달속의집」
지난 가을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달리다
보니 호남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언니가 광주에 살고 있는지라 내친김
에 언니 얼굴이라도 볼까 하여 언니 집으로 방향을 잡고 2시간 만에 도착했
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언니와 나는 유년시절의 사진첩을 펼쳐보듯 어
릴 적 추억에 사로잡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다 문득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아름다운 마술 같은 세상,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생의 가장 빛나던
시간들, 다락방 쪽문으로 얼굴을 마주한 달과, 별과, 나무그림자가, 끝없이
말을 걸어오곤 하였다.
한 마리 새의 울음이 가슴을 열 듯 사람들은 문득 원초적인 유년의 안식
처에 가 다다를 때 처음으로 태어난 영혼인 듯 순순하고 때 묻지 않는 한 송
이 풀꽃 같은 자연인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풀꽃 같은 기억은 만지
면 손가락 사이로 금모래처럼 흘러내린다. 두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푸른
실루엣, 나는 마음이 추워질 때 정지용님의 시「향수」를 콧노래처럼 흥얼거
린다. 그러면 금세 따뜻한 온기가 감돌곤 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돌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 향수」전문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여러 번 이사를 해야 했
던 유년시절, 전남 담양군 용면 용호리 지금은 물속에 잠긴 집과, 학교, 빨
간 토끼 귀를 어루만지던 내 열 살의 손길이 정지된 곳 하룻밤 묵어가라는
언니의 손길을 뿌리치고 차를 달려 도착한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그곳은 물
속에서 잠겨 적막하였다. 달빛만 꿈결인 듯 출렁이고 있었다.
강가람 시인
* 2007년《문학과창작》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출처 -우리시 카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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