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시인의 시와 삶의 이야기
나의 시에 대하여 말한다
김기택
왜 시를 쓰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한 마디로 시 쓰는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시를 통해서 어떤 가치 있는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고, 특별한 아름다움을 창조할 생각도 없었으며, 우리 시의 발전을 위해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백석의 시구처럼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 나 하나 견디는 것도 내게는 벅찬 일이다. 늦은 나이에 처음 시 습작을 시작했을 때 나는 시가 무엇인지 거의 몰랐고,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시 쓰는 일이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시 안에서는 고통도 즐거웠고, 슬픔도 즐거웠고, 심지어 누구에게도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내 삶의 치욕조차도 즐거웠다. 시 안에는 삶을 압박하는 모든 것들을 이상한 기쁨으로 바꾸는 마술적인 장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시를 쓰면서 괴롭거나 답답했던 것은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그래서 영영 시 못 쓰는 불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될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은 시를 쓰는 순간 날아가 버리곤 했다.
물론 시가 삶의 조건을 바꾸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삶을 더 곤란하게 할 때가 많을지도 모른다. 또한 시를 쓴다고 해서 현실의 괴로움이나 불안 따위가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시를 쓴다고 해서 종교적인 구원 같은 것이 오는 것도 아니다. 시 쓰기의 즐거움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단순히 ‘짧은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시간적인 시간이며, 순간 속에 수십 년이 체험되는 것 같이 길고 짧음을 초월한 시간이며, 영원을 체험적으로 맛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면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힘을 갖고 있다. 시를 안 쓰는 긴 시간은 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이며, 시를 쓰는 짧은 시간은 그 희열을 순간적으로 체험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첫사랑의 시간처럼 처음 경험하는 숨 막히는 울렁임이며, 기억하고 반추할 때마다 새것처럼 재생되는 떨림이다.
이제 내 시 쓰기를 돌아보며, 시 쓰기가 나에게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습작기
시를 쓸 때 나는 시적 대상(사람이나 동식물)이 견뎌야 할 최악의 상황을 즐겨 상상한다. 시적 대상이 견디기 어려운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곤 한다. 시적 대상이 그 상황을 견디려고 발버둥질할 때 나는 더 잔인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 자신이 이상하게 공격적이 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이럴 때 나의 시적 에너지가 갑자기 활기를 띠고 분출하며, 강렬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사이코인가? 편집증인가? 연약한 대상을 시에 끌어들여 그걸 괴롭히면서 즐기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그런 증세가 있는지도 모른다.
시 쓰기를 시작한 스무 살 무렵, 나는 소심하고 겁 많고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작고 깡마른 외모를 지녔으며, 내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아무리 둘러봐도 기댈 만한 곳도 없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어서 공장에 다니며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독하게 폐쇄적인 성격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몸으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거리로 나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내겐 큰 고통이었고 치욕이었다. 나는 내 왜소한 외모 못지않게 우유부단함과 나약함, 소심함, 겁 많음을 증오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 자신에게 견디기 어려운 과제를 부여하곤 했다. 한겨울에 얼음이 어는 방에서 자거나 『살인의 철학』이라는 끔찍한 책을 읽는 등 정신적으로 나를 단련시켜보려 했다. 나에게 어떠한 상황이 주어지면 자학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여 스스로 나에게 그것을 견디는 고통을 부과하고는 내가 어떻게 견디는지 살펴보려고 했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시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그것도 눈치 볼 것도 없이 나 혼자서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능한 나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때마침 나의 내면에서는 나오고 싶어 안달하는 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시 쓰기는 특별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친근하고 매력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운하게도 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은 고약한 주인을 만난 탓에 내가 부여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야만 했다. 얼떨결에 고통을 겪는 내 시의 등장인물(동물)은 불구적이고 연약한 내 내면의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때에 시는 나 자신을 견디는 일이 되었고, 그것은 탈출구가 별로 보이지 않는 내 삶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첫 시는 내 속에 있는 말들을 배설하듯이 마구 꺼내는 것이었다. 내키는 대로 직설적이고 생경한 말로 하고 싶은 말을 힘차게 꺼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야할 방향도 모르고 방법도 모르고 대책 없이 열정과 에너지만 강한 치기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쓴 작품은 시라고 하기엔 너무나 꼴불견이었으나 적어도 배설의 쾌감은 있었다. 그 쾌감에 이끌려 나는 시를 쓰는 재미에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생각한 시는 내면에 있는 것을 정직하고 힘차게 뽑아내는 것이었다.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 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 「쥐」 전문
「쥐」는 등단 후에 쓴 시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습작기의 내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겁 많고 소심하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기 좋아하는 폐쇄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밝은 대낮에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내 모습이다. 강렬한 욕망과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 사이의 커다란 간극이 아마도 시의 에너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시 속에서 마음껏 소리를 질렀고, 시도 아닌 시는 그것을 다 받아주었다. 생각해 보면, 잘못 써도 시만 생각하면 숨 막히도록 즐거웠던 습작시절이 내게는 가장 즐거운 시 쓰기였던 것 같다.
2. 불구성의 유희 또는 허구적 상상력의 놀이
몇 년 전에 시낭송을 하고 독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의 등단작인 「꼽추」를 비롯해 몇 편을 낭송했다. 한 독자가 물었다. "왜 당신은 ‘꼽추’나 ‘다리 저는 사람’과 같은 불구자를 소재로 시를 쓰는가? 당신은 사지가 멀쩡하니까 불구자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불구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시에 등장한 불구자는 내 불구적인 내면의 상관물이며, 누구나 내면에는 이런 불구적인 모습이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썩 석연치는 않았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므로 정상인이 갖는 얼마간의 우월감이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 「꼽추」 전문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내면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불구, 거의 괴물에 가까운 형상이 아닐까? 주변에 심하든 약하든 우울증이나 여러 정신적인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울증이나 히스테리 같은 정신적인 장애들, 온갖 더럽고 엽기적인 상상을 하는 욕망들, 실현되지 않은 온갖 범죄의 리허설들이 마음껏 활개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두꺼운 시멘트로 자신의 내면을 굳게 덮어 이것을 은폐하고 그 위에서 관습적이고 타성적인 아름다움으로 시를 치장하고 있다. 진정한 시는 이 두꺼운 시멘트를 부수고 솟아올라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제 내면이 뽑혀 나오지 않는다면 내면의 정화와 내적 자유는 없으며, 치유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더럽고 흉하더라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내면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오려면 그것과 등가물인 불구적인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 '꼽추'는 그런 불구적인 이미지의 하나이다.
이 시에서 꼽추는 불구인 데다가 노인이며 걸인이다. 생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끝자락에 서 있는 처지다.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을 하지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 상상력이 연약한 노인에 대해 가학적이 되는 것을 느낀다. 사방팔방 출구가 막혀 도망갈 곳 없는 이 거지 노인을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구석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죽음 밖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 노인에게 마지막으로 극한의 치욕을 부여하였다. 치욕이 부글부글 끓어 터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것은 바로 내 내면적인 불구에게 부여하는 고통이었다. 단 한 순간도 편히 숨 쉴 수 없는 치욕적인 자아에 대한 단호한 시적 처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통이나 치욕 따위가 극점에 다다르면 큰 즐거움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시에는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놀라운 마술이 있다. 슬픈 즐거움, 괴로운 즐거움, 수치스러운 즐거움이라고밖엔 달리 이름 붙일 수 없는 이상한 마법이 있다. 투입되는 재료는 악취이고 비명이고 발버둥이고 더러움인데, 그것이 내면에서 숙성되면 어느 순간 즐거움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문학은 삶이 주는 여러 가지 병이나 상처 같은 재료를 가지고 환희로 만드는 연금술이며 놀이인 것 같다.
탈출구가 없을 때 꼽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불구의 몸속에서 꿈꾸는 일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극한상황에서 이 꿈이 철근처럼 딱딱한 등뼈를 ‘알’로 변형시키고, 알은 새로 태어나려는 연약한 힘으로 불구의 등뼈, 철근과 시멘트처럼 완강한 등뼈를 부수고 나오고야 만다. 등뼈를 알로 변형시킨 힘은 꽉 막힌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욕망이다. 이제는 죽어도 좋은 순수한 욕망이다. 이 순수한 욕망으로 꾸는 꿈이 시라는 놀이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삶을 억누르는 모든 폐쇄적이고 억압적 상황을 꼽추 노인 속에다 몰아넣고, 일생을 억눌려 온 등뼈가 최대치로 끓어올라 끝내는 폭탄처럼 터지도록 하였다. 그런데 불구의 치욕이 최대치가 되는 지점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체험이 온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에서 살려면 아무리 부조리한 것이라도 삶으로 그것을 감당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삶이 주어지더라도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 부조리가 삶을 장악하고, 때로는 삶이 감당하기 힘든 폭력을 행사하고 수치심을 유발한다. 이 현실이 부당하다고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현실은 더욱 삶을 바짝 조인다. 개인이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이 현실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조금씩 상황을 개선시킬 수는 있지만, 그 근본적인 조건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개인이 바꾸기에는 그것은 너무 크고 단단하고, 그것을 상대해야 하는 삶은 연약하다. 시는 꿈꾸기를 통해 숨통을 열어준다. 꿈은 허구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이 무력한 힘이 단단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물렁물렁하게 변화시켜 숨을 쉬게 한다. 인간에게는 놀이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놀이에서는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수치이든 그것은 단지 놀이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3. 몸속의 폭력과 상처
등단 초기에는 이상하게 동물시가 많이 씌어졌다. 나는 동물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동물을 길러보았거나 공부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 시기에 동물시를 썼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쏟아져 부지런히 받아 적었던 동물시들이 첫 시집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물시는 아마도 나 자신에 대한 관찰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외부와 환경의 폭력을 감당하는 몸들과 거기서 생긴 상처와 두려움이 육체화된 현장을 관찰할 때, 내 시는 「꼽추」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우 공격적이 되고 집요해진다. 구경거리나 음식물이 되는 동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가학적이 되기도 한다.
동물시들 속에 나오는 몇몇 동물들은 환경의 폭력을 견디느라 몸의 특정 기능이 지나치게 발달해 있다. 한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기능이 오늘의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폭력을 견딘 상처가 육체화된 것이며, 그 폭력과 역사는 아직도 육체 속에 살아남아 그 육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구경거리이거나 음식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몸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동식물을 막론하고 모든 살아 있는 생물체의 몸에는 그 몸을 있게 한 선조들의 몸과 그들의 생활과 그들이 살면서 겪었던 고통과 즐거움의 흔적이 있다. 모든 몸에는 현재의 살아 있는 몸뿐 아니라 그 몸이 나기 전까지 태어남과 죽음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진 모든 선조들의 몸이 집적되어 있다. 나의 몸은 수많은 선조들의 살아 있는 유적이다. 때때로 나는 나의 몸에서 그런 수많은 타자들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때 그들은 내 몸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 내 몸을 빌려 그동안 죽은 모든 선조들이 동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단수는 모든 선조들의 몸이 합쳐진 복수형 단수이다.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습관은 선조들의 역사의 결과이며, 나는 그 모든 이들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릴 때, 손톱으로 유리 긁는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 내 몸의 반응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난다. 내 의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내 몸속의 선조들이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해왔던 것을 몸이 자동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선조들이 명령하고 행동하는 것에 단지 몸이 수동적으로 따를 뿐이다. 보이지 않는 몸속에는 복수이자 단수이며 죽은 자이자 산 자이고 타자이자 나인 이 모든 선조들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몸에는 현재의 몸이 있기까지의 역사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내 몸은 그 몸들에게 가해진 모든 환경적인 위협과 그로 인한 상처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때때로 내 식욕과 성욕, 갑자기 생기는 공격본능, 두려움과 불안 등에서 그 상처들이 재생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 기록들이 생생하게 저장된 몸을 관찰하는 것이 즐겁다. 사람들이나 동물들, 식물들의 어떤 사소한 움직임이나 표정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는 재미있는 힌트들을 낚아채어 언어에 담는 순간이 좋다.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 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 「껌」 전문
우리는 껌을 즐겨 씹는다. 껌은 이빨로 씹지만, 이빨로 부수고 삼켜 섭취하는 음식과는 다르다. 껌은 '씹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껌을 씹을 때의 느낌은 고기를 씹을 때의 그것과 유사하다. 씹는 이빨에 저항하는 듯한 부드러운 탄력이 있다. 그 저항력과 탄력은 너무 생생해서 마치 이빨 밑에서 그것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 탄력과 저항력은 이빨에 감춰진 본능, 즉 씹음 속에 있는 쾌감을 자극한다. 이 자극은 이빨 속에 잠재되어 있는 '오래된 기억'을 깨우고 활동시킨다. 오래된 기억이란 산 동물을 잡아먹던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던 본능적인 기억이다. 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고 씹는 본능이다. 이빨에는 호랑이나 사자의 그것과 같은 본능이 감춰져 있으며, 이 욕망은 우리에게 충족되기를 요구한다. 껌 씹는 행위는 바로 그 기억력을 이용한 놀이이다.
껌을 씹으면 이빨에 각인된 욕망은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결코 충족되지는 않는다. 껌은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껌은 잡아먹힐 것처럼 이빨을 자극만 하고 끝까지 먹히지는 않으며, 이빨은 먹을 것처럼 열심히 씹지만 먹지는 않는다. 우리 몸에는 이빨의 본능과 껌의 본능이 모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살육의 본능과 함께 잡아먹힘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과 공포가 있다. 껌에 새겨진 이빨 자국은 바로 그러한 감정과 정서를 환기시킨다. 인간이 껌을 즐긴다는 것은 살육의 본능과 거기에 저항하려는 생명력이 우리의 몸에 얼마나 깊이 새겨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4. 묘사에 대하여
시에서 어떻게 묘사를 하는지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종종 질문을 받는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특별한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열심히 시를 썼을 뿐이지 특별히 묘사를 하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단 후에 평론가들이 '해부학적 상상력'이나 대상의 이면을 꿰뚫는 '투시적 상상력', '현미경적인 관찰' 등의 표현을 쓰면서 내 시의 묘사의 특성을 언급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것이 그런 묘사라는 것을 몰랐다. 묘사에 대해 공부한다거나 묘사를 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무책임하게도, 쓰다보니까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됐다고 대답해 놓고 보니 거기에는 은근히 내가 천재라고 으스대는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막기 위하여 부득이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시적 대상에 대해 최악의 상황을 설정하고 고통을 부여할 때, 그것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 잔인해지는 것을 느낄 때, 그래서 어떤 강렬한 공격적인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을 느낄 때, 나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을 실감나게 그리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더욱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시적 대상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관찰한다. 상상 속에서 동영상을 느리게 돌린다. 그래서 내가 글로 묘사한 것과 느린 그림을 통해 관찰한 것을 되풀이하여 비교해 본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당신이 묘사한 이미지가 동영상처럼 실감이 나는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느린 그림을 되풀이하여 돌린다.
나는 대상을 앞에 두고 스케치하듯 시를 쓴 적이 없다. 내가 시로 쓰는 대상은 모두 내 몸속에 저장된 것들이며, 그것들은 상상 속에서 등장하며,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내 상상력의 눈이다. 그러므로 묘사를 할 때 나는 내 몸의 눈이나 육체적인 감각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쥐를 그린다면, 나는 내 몸속에 저장되어 있는 쥐들을, 가능한 한 내가 경험한 많은 쥐들을, 떠올린다. 그때 그 쥐는 실제의 쥐와는 조금 다르다. 그 쥐는 내 몸속에 육화된 것들이다. 내 욕망과 경계선 없이 합쳐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과장되고 어떤 부분은 약화되어 있다. 즉 내 욕망만큼 변형되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것들이다. 내 시에 등장하는 쥐는 내 본능과 습관의 변형이며, 내 욕망과 정서가 변질된 것이며, 곧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들이다. 그 쥐는 외모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버릇까지도 나와 닮아 있다. 즉 그 쥐는 나와 너무 닮아서 나와 구분되지 않은 것이며, 쥐라고도 할 수 있고 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쥐와 나와 공통된 부분은 과장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약화되거나 제거되어 있을 것이다. 내 시에 표현된 쥐가 불구적이라면 그것은 곧 내 내면의 생김새가 불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시적 대상들을 학대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확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연히 그 쥐를 관찰하려면 내 몸에 달린 눈이나 코나 귀가 아니라 상상력에 달린 눈이나 코나 귀가 필요하다. 쥐를 묘사하더라도, 내 몸의 외부에 있는 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있는 쥐를 관찰하고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놈의 행동이나 습성을 잘 알 수 있다. 실제의 쥐는 너무나 빠르게 숨어버리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하기가 곤란하지만, 내 몸에 있는 몸은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으며, 카메라 앞의 배우처럼 연출자가 원하는 연기를 시킬 수 있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시킬 수도 있다. 그놈의 특성을 잘 아니까 어떻게 그려야 실감이 나는지도 저절로 알게 된다. 실감나게 그리려면 자연히 사소한 행동이나 표정까지 잡으려고 애쓰게 된다. 그래서 나는 별로 묘사를 한다고 느끼지 않는데, 독자가 읽으면 지나치게 세부적인 묘사를 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묘사를 통하여, 내 몸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나 정서는 나로부터 분리되고 객관화된다. 묘사되기 이전까지는 정체불명이지만, 묘사하고 나면 그 정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그 대상에 대해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놈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놈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리고 그만큼 나는 정체불명의 나 자신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선대표시
호랑이
길고 느린 하품과 게으른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눈
풀잎을 스치는 바람과 발자국을 빈틈없이 잡아내는 귀
코앞을 지나가는 먹이를 보고도 호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위장을 둘러싼 잠은 무거울수록 기분 좋게 출렁거린다
정글은 잠의 수면 아래 굴절되어 푸른 꿈이 되어 있다
근육과 발톱을 부드럽게 덮고 있는 털은
줄무늬 굵은 결을 따라 들판으로 넓게 뻗어 있다
푹신한 털 위에서 뒹굴며 노는 크고 작은 먹이들
넓은 잎사귀를 흔들며 넘실거리는 밀림
그러나 머지않아 텅 빈 위장은 졸린 눈에서 광채를 발산시키리라
다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하리라
느린 걸음은 잔잔한 털 속에 굵은 뼈의 움직임을 가린 채
한번에 모아야 할 힘의 짧은 위치를 가늠하리라
빠른 다리와 예민한 더듬이를 뻣뻣하고 둔하게 만들
힘은 오로지 한 순간만 필요하다
앙칼진 마지막 안간힘을 순한 먹이로 만드는 일은
무거운 몸을 한 줄 가벼운 곡선으로 만드는 동작으로 족하다
굶주린 눈초리와 발 빠른 먹이들의 뾰족한 귀가
바스락거리는 풀잎마다 팽팽하게 맞닿아 있는
무더운 한낮 평화롭고 조용한 정글
(『태아의 잠』, 문학과지성사)
얼굴
눈이 피곤하고 침침하여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덮은 얼굴은 어두웠고 곧 어둠이 손에 배자
손바닥 가득 해골이 만져졌다
낸 손은 신기한 것을 감지한 듯 그 뼈를 더듬었다
한꺼번에 만져버리면 무엇인가 놓쳐버릴 것 같아
아까워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나갔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그 물체를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한 폐허를
해골의 껍데기에 붙어서
생글거리고 눈물 흘리고 찡그리며 표정을 만들던 얼굴이여
마음처럼 얇디얇은 얼굴이여
자는 일 없이 생각하는 일 없이 슬퍼하는 일 없이
내 해골은 늘 너를 보고 있네
잠기 동안만 피다 지는 얼굴을
얼굴 뒤로 뻗어 있는
얼굴의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뻗어 있는 긴 시간을
선글라스만한 구멍 뚫린 커다란 눈으로 보고 있네
한참 뒤에 나는 해골을 더듬던 손을 풀었다
순식간에 햇빛은 살로 변하여 내 해골을 덮더니
곧 얼굴이 되었다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갑자기 뒤집어쓴 얼굴이 어색하여
나는 한동안 눈을 깜박거렸다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서둘러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지성사)
다리 저는 사람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사무원』, 창작과비평사)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 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문학과지성사)
가려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관을
도로 꺼내려고
소복 입은 여자가 달려든다
막 닫히고 있는 불구덩이 철문 앞에서
바로 울음이 나오지 않자
한껏 입 벌린 허공이 가슴을 치며 펄쩍펄쩍 뛴다
몸뚱어리보다 큰 울음덩어리가
터져 나오려다 말고 좁은 목구멍에 콱 걸려
울음소리의 목을 조이자
목 맨 사람의 팔다리처럼
온몸이 세차게 허공을 긁어대고 있다 가려움
긁어도 긁어도 긁히지 않는
겨드랑이 없는
손톱에서 피가 나지 않는 가려움
(『껌』, 창비)
자술연보
약력
1957년 안양에서 출생하여, 중앙대학교 영문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꼽추」, 「가뭄」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 『소』(2005), 『껌』(2009) 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이수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년간 기업체에서 직장 생활을 하였으며, 지금은 경희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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