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성과 비동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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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서울 산업대 강사 |
1. 들어가며 따지고 보면 동일성과 비동일성이라는 문제도 시간의 표정이 빚어내는 의식적 전유인데, 시간을 살아낸 우리는 동일성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비동일성으로 존재하는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의 인식적 조건을 불행한 의식이라고 지목하면서, 내가 나일 수 있는 나의 동일성은 내안의 타자적인 나와 외적 타자에 의해서 자기 동일성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동일성을 견지하는 ‘나’인가. 비동일적인 ‘나’인가. 진짜 문제는 시간이라는 함수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데, 인간은 시간 너머에서 작동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를 사유할 수 있는가.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시간이 인간의 동일성과 비동일성 사이를 역동화시킬 때, 인간은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시간 그 자체를 의식할 수 있는가. 모른다, 알 수 없다. 진리 앞에 우리는 ‘─ 인지도 모른다’로 존재한다. 하여 우리 모두는 절망에 이른다. 삶─ 시간─ 세계를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아포리아에 빠진다. 삶─ 시간─ 세계란 해독되기를 거부하는 의식의 바깥이다. 허나 인간들은 의식의 바깥에서 작동하는 그 모를 절대성을 의식의 안쪽으로 유혹하여 삶─ 시간─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규정짓는다. 앎에의 의지. 앎을 통해서 이 세계를 의식적으로 전유하기. 허나 그것 역시 부질없는 짓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완전은 불완전한 사태를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지만, 역으로 불완전한 인간은 저 완전이라고 명명되는 절대적 동일성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 없다. 따라서 작은 인식적 지혜를 통해서 이 세계의 비밀을 탐문하는 인간은 무지를 자인하거나 절망에 이른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넘어지기. 삶─ 시간─ 세계를 판타지로 덧씌우기. 분명 후기 구조의자들은 저 절대적 동일성의 세계를 가상으로 치부하면서 진리를 비존재이거나 무존재로 간주하기는 하지만, 어찌 삶─ 시간─ 세계를 유희적 주이상스로만 채울 수 있겠는가. 삶─ 시간─ 세계를 지워 소멸에 이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인간학적 사태 바깥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학적 사태란 저 지고한 종교─ 형이상학적 동일성과 특발적인 비동일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아련한 잔상이거나 동일성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허나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반복의 흔적이거나 반복의 기획 내에 놓여있는 시간의 다른 모습이다. 말하자면 차이는 반복적 동일성 내부에 기입된 의미적 행위인데, 그것은 가능적 사태의 현현이다. 하여 차이란 동일성을 논파시키는 역동적 행위이자, 시간의 흔적을 역사성으로 수렴시킨다. ─ 박찬일, 〈삼월 말(末)〉 전문 허나 반복은 모든 것이 소멸한, 하여 사라진 빈 지대 위에 꽃피는 무한반복인데, 그것은 삶─ 시간─ 세계 속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순환인가, 기적인가. 혹은 부활인가, 잔인함인가. 불모의 지대를 초록으로 물들이기 시작하는 ‘삼월 말(末)’의 시간과 공간을 응시하면서 박찬일은 이 세계의 어떤 모습을 예인 중인가. 엘리어트와 하느님 사이에서 이 세계가 있다. 엘리어트와 하느님 사이에 부활이 있고, 비통함도 있고, 그 비통함을 바라보는 시인도 있고 잔인함을 견디어낸 수많은 생명들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생명에의 현상은 차이인가, 반복인가. 아니면 반복이 기입된 차이 현상인가. 욕동하는 생에의 본능. 불모의 지대를 푸름으로 치환시키는 저 아름다운 생명. 허나 사라진다. 허나 사라져 소멸한다. 만약에 사라져 소멸하는 것이 없다면 생명은 그다지 신비롭지도 않고, 경이롭지도 않다. 소멸과 부활 사이에, 혹은 비통함과 기적 사이에 수많은 차이와 반복이 존재한다. 분명 박찬일은 동일성이 가하는 폭력적 행위를 반복과 차이 속에 기입하고 있다. 그것은 역으로 생명운동 전체를 지배하는 동일성의 광폭함에 관한 인간학적 고백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은 반복적 동일성에 기입된 흔적, 즉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과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내 사랑’이라는 의식적 지평 위에서 부활과 반복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 시간─ 세계가 동어반복적 사태의 연속적 현상임을 예증하는 동시에 반복을 이끌어가는 궁극적인 주체가 저 현상적 차이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박찬일의 〈삼월 말(末)〉은 동일율과 반복을 인간학적 사태로 치환시켜 차이를 차이 나는 반복 속에 응축시키고 있다. 기적과 비통 사이에 수많은 생명이 있고, 차이들이 존재한다. 차이란 그 자체로 잔인한 ‘삼월 말(末)’에 욕동하는 생명들의 찬란한 향연이다. ─ 강영은, 〈접시 위에 한 문장〉 전문 허나 먹고 먹히는 생─세계. 허나 차이 나는 생에의 형식이 벌이는 삶과 죽음의 변증법. 하여 저 처연한 생존본능이 만들어가는 암울한 생에의 초상을 응시하는 시인. 시인은 접시 위에 꿈틀거리는 산낙지의 형상을 통해서 의미적 읽기를 감행하는데, 그것은 삶의 흔적이거나 죽어가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기표적 문장으로 치환시키는 작용이다.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삶의 흔적. 꿈틀거리며 한 생을 다른 생으로 치환시켜가는 창조적 몽상. 시인은 삶과 죽음이 교묘하게 이접되는 순간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면서 생(혹은 죽음)을 하나의 문장으로 읽어 내려간다. 발화되는 의미, 기표에 응고된 삶─ 시간─ 세계.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물질과 생명의 자장 내부를 통과해가는 생에의 형식이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가. 알란 와츠가 《물질과 생명》에서 말한 것처럼, 삶이란 어쩌면 에너지를 에너지로 대체하는 흐름 속에 기입된 먹고 먹히는 관계를 아름다운 제의로 고양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강영은 시인은 그 모든 생─ 사태를 들여다보고 읽는다. 에너지의 흐름 내부를 응시하면서 생명이 전이되는 현상을 기표작용(문장, 낱말)으로 인식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 생을 지나는 길’ 전체를 시말화하면서 생에의 ‘완행 열차 한 량’을 피안으로 이접시키고 있다. 토막 난 몸체. 토막 나 흐느적거리는 삶의 잔해. 삶은 차이를 먹고 산다. 삶은 나와 다른 너(물질적 대상)를 ‘식도와 위장’ 속에서 흡수함으로써 지속된다. 어쩌면 강영은이 읽은 접시 위의 기표적 낱말과 문장은 차이를 유랑하는 생명의 비의인지도 모른다. 비록 수많은 차이들이 이 세계를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너, 나 그리고 우리는 생이 빚어내는 운명적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차안을 피안으로 이접시키는 차이 나는 생에의 형식. 수많은 간극을 만들어 차이를 차이 나게 만들 때, 이별이 비로소 시작되는데, 그것은 차이의 욕망이다. 하여 차이는 끝없이 자신의 모양을 변이시켜 ‘약속’을 어그러트리는데, 그것은 인간학적 아픔과 슬픔의 원인이 된다. 이별은 차이의 실현이다. 윤은경은 차이의 지점을 응시하면서 인간학적 이별이 가지는 의미의 층위를 생명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차이를 지워 합일을 이룩했던 ‘약속’이 깨어진 순간을 ‘기막힌 이별’이라 명명하면서 시인은 차이의 흔적들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고 있다. 모든 것을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적막천지 우주 저편’과 수많은 차이의 산물인 ‘풀꽃 한 송이’ 사이에서 혹은 ‘끝’과 ‘처음’ 사이에서 동일성이 깨어지는 차이의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 차이란 욕동하는 자아의 초상이다. 물론 윤은경의 시 〈이 봄엔〉이 사랑의 지대를 이별과 약속을 통해서 시말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랑의 지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차이와 반복이 만들어내는 동일시의 원리가 아닌가. 아니 동일성과 차이와 반복 사이에 사랑이 움트기도 하고 이별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시인은, 윤은경은 차이의 지대를 헤매면서 저 굳은 약속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저 거대한 우주 저편 속에서 응시하고 있다. 허나 아프다. 허나 아프고 쓰라리다. 차이란 고통의 지대이다. 하여 동일성을 깨트리는 차이는 ‘몹시도 아픈’ 이별인데, 시인은 차이를 르쌍띠망의 차원으로는 극화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차이의 극대점인 이별을 아름답고 숭고한 시말 속에 기입한 채, 이별의 순간을 유미적으로 승화시켜가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차이는 반복으로 종결되는데, 차이의 차이조차도 반복이 벌이는 운명성을 극복할 수 없다.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것도 결국엔 차이를 기입한 그 모든 생에의 형식이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반복은 차이를 지워 그 모든 인간학적 사태를 유사한 그 무엇으로 만들거나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 홍사성, 〈화신(花信)〉 전문 하여 생에의 형식 전체는 필연적으로 반복이 펼쳐내는 저 오묘한 자장 밖으로 탈주할 수 없게 된다. 생은 반복이 지배하게 있음에 틀림없다. 표 나는 차이를 차이 나게 기입하더라도 차이는 저 지고한 운명적 반복을 벗어날 수 없다. 시지푸스 신화처럼 생은 그 모든 차크라에 예속된 채, 삶─ 시간─ 세계를 동어반복적으로 순환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홍사성은 그러한 인간학적 운명성을 반복의 묘미 위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만 다를 뿐 같은 뜻’이라는 반복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성에 대한 인간학적 고백이다. 다시 말해서 홍사성 시인의 〈화신(花信)〉은 봄꽃의 전언 속에 새겨진 삶─ 시간─ 세계의 의미를 시간의 반복 위에 기술하면서 아름다운 소멸을 몽상하고 있다. 다른 것의 같은 것으로 치환. 차이를 동일한 것으로 만들기. 만약 반복의 기획이 그와 같다면, 우리는 왜 존재하며 왜 그러한 반복의 형식 속에서 생노병사의 순환을 되풀이 하는가. 도대체 우리는 왜 우리라는 형식을 무한반복적으로 되풀이 하다가 왜 소멸이라는 덫에 걸려 넘어지는가. 도대체 반복은 무엇을 겨냥하고 무엇을 기획하는가. 홍사성의 〈화신(花信)〉이 차이가 소멸하여 반복적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지점을 응시하게 될 때, 혹은 생의 비의를 알아챈 듯이 ‘쉬엄쉬엄 쉬면서 살아가’라고 권고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쩌면 생은 그 자체로 죽음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삶─ 시간─ 세계를 기획하는 반복의 마법은 죽음에 의한 죽음을 위한 죽음의 자장 밖을 탈주하지 못하는 생에의 운명적 형식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생은 생의 반복이 아니라 죽음에의 반복이다. 비록 ‘가슴에 맺힌/ 결석(結石)같은 건 다 버리라’고 언명하지만, 그가 응시한 삶의 모습은 삶의 화려한 제의가 아니라, 죽음 꽃 위에 핀 반복의 인간학적 운명을 꽃의 전언 속에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 강윤순, 〈목울대〉 전문 아니 우리는 삶─ 시간─ 세계가 펼쳐내는 근원을 모른다. 아니 우리는 삶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더더욱 모른다. 하여 두렵다. 하여 인간은 반복이 펼쳐내는 그 모를 비의에 유혹된 채 인간학적 삶─사태를 종결하게 되어 있다. 강윤순의 〈목울대〉는 비의의 지점을 응시하면서 삶─ 시간─ 세계가 펼쳐냈던 그 모든 사태를 숭고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 강윤순이 ‘각양각색의 부처를/ 제 목울대 속에 모시고 산다’고 삶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시말 전체를 반복이 펼쳐내는 죽음제의 쪽으로 인도해가고 있다. 허나 강윤순 시인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삶─ 시간─ 세계를 주유하는 우리는 무엇인가. 공자의 주유천하, 석가의 설산의 설법 그리고 예수의 하늘을 향한 울부짖음은 도대체 인간학적 반복 속에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비록 시인 강윤순이 죽음으로써 삶의 문양을 증명하는 목울대 안쪽에 기입된 ‘각양각색의 부처’를 읽어 내려가지만, 그가 시말 속에 숨겨놓은 진리의 문양은 반복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강윤순의 시 〈목울대〉는 차이를 기입하는 반복이나 반복적 차이를 절대의 지점에서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삶─ 시간─ 세계의 저 인간학적 사태란 것도 시간의 이 편이 아니라, 시간 너머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인가 주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의 시적 시선은 차이와 반복을 교묘하게 넘나들면서 차이를 반복으로 지우고 반복을 차이로 지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강윤순의 시말이 욕동하는 지점이 무의 지대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하여 무 앞에 인간학적 사태란 한낱 허무한 것이거나 절망의 지대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시인의 시말운동은 반복과 차이 전체를 차이와 반복 속에 묘파하면서 그 모든 사태를 반복이 지배하는 절대의 지점으로 이입시켜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오탁번, 〈어머니〉 전문 다시 말해서 시인은 삶─ 시간─ 세계가 펼쳐내는 모든 운명성을 ‘어머니’라는 절대적 기표 속에 응고시킨 채, 인간학적 반복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인가를 아주 예리하고 묘파하고 있다. 근원을 사유하기. 근원을 사유하면서 반복적 생에의 형식을 반추하기. 삶이란 그 자체로 반복이다. 삶이란 차이를 기입하건, 동일성을 기입하건 상관없이 반복의 오묘한 작용이다. 허나 삶─ 시간─ 세계의 반복은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그 주기를 완성시키지 못하는데, 오탁번은 생의 시작점이 아니라, 생이 종료한 무의 지대를 계보학적으로 잇대어 놓고, 삶─ 시간─ 세계를 매개시킨다. 반복은 고백이다. 반복은 어머니에게 고백하고 참회하면서 새로운 생에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생의 반복을 응시하는 동시에 무가 펼쳐냈던 반복 또한 응시하게 된다. 아니 오탁번의 시 〈어머니〉는 상징적인 어머니와 실재적인 어머니 사이를 교묘하게 질주하면서 하나의 종교가 된다. 하여 모든 반복은 가장 완결적인 어머니─ 상인데, 그것은 종교의 종교이자, 세계의 세계이다. 이를테면 시인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소멸시효가 적용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매개시켜 미래를 추동하는 절대성이다. 비록 오탁번의 시말들의 비등점이 자신의 현재적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조부와 아버지를 동시적으로 떠올리게 만들어 근원을 사유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삶─ 시간─ 세계를 관통하는 반복은 인간학으로 시작해서 인간학으로 종결된다. 하여 어머니는 생의 시작과 경과를 관장하면서 시인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형적 신화가 되풀이 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이다. 지젝이 실재계의 광폭함을 망각을 위하여 혹은 삶─ 시간─ 세계를 판타지로 덧씌워 주이상스적 유희로 실재계의 참모습을 기만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소멸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율이 아닌가. 우리는 절대의 절대적 권능에 무너져 내리는 그저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차이도 지워지고 반복도 반복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는 저 절대의 지점이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지대가 아닌가. 하여 우리는 절대나 동일성을 범주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언표가능한 모든 말들은 절대를 비껴가거나 언표된 말들의 모든 의미를 동일성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 유안진, 〈절대스승〉 전문 어쩌면 인간이 인식한 진리의 문양은 장님 문고리 만지기 식인지도 모른다. 아니 인간에게 현현된 종교학적 절대성이란 홍사성이 말한 것처럼 다름 속에 각인된 같음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리의 문양은 고차원일수록 단순하게 설명이 될 뿐만 아니라, 단순한 것 그 자체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하여 진리란 ‘빈손’이다. 하여 진리란 ‘자연’ 그 자체이다. 이를테면 동일성으로 표현되는 절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말할 수 있는 말의 한계 바깥이거나 모든 의표를 벗어나는 그 무엇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유안진 시인은 그러한 의미와 말의 한계 너머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인가를 사유 예인 중인데,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말의 절대값인지도 모른다. 허나 읽혀지지 않는다. 허나 읽혀 발화될 수 있는 말의 문법(시와 소설)으로 현현되지 않는다. 산은 산인데, ‘산 이상으로 드높아지고’, 바다는 늘 똑같은 바다인데, ‘바다 이상으로 드넓어져서’, 산과 바다 모두가 인식의 한계 바깥에 위치하게 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물자체로 존재하는 저 절대적 동일성을 언표할 수 없다. 허나 읽는다. 허나 읽고 표상하면서 시인 유안진은 저 절대적 동일성을 몽상하고 있다. ‘그래 인생이라는 것도 별것 아니지, 그래 삶─ 시간─ 세계란 그저 단순한 그 무엇에 지나지 않지. 한 평생 후회 없이 글밭에서 저 절대와 씨름 중이지.’ 시인의 시적 사유는 풍요로운 빈 지대 근방을 배회하면서 절대의 절대성을 예인 중인데, 그것은 삶─ 시간─ 세계 전체를 죽음의식으로 통과하는 인간학적인 제의이다. 비록 시인의 시말들이 말의 자장 내부에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과정 중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저 동일성이 지배하는 ‘궁극’이라고 하는 절대의 지점으로 모든 것을 귀속시켜 완벽한 무성(無性)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오묘한 것’과 ‘풍요로운 것’들을 빈 지대로 이끌어가 가장 완벽한 동일성을 실현하고 있다. 하여 시인이 언표한 절대점은 모든 종교적 교의를 한 지점으로 끌어 모아 단순성으로 동일화시켜 가고 있다. ─ 문현미, 〈감로(甘露)에 깃들다〉 전문 그런데 시인 문현미는 〈감로(甘露)에 깃들다〉에서 인간학적 사태 너머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인가를 발화된 문자 속에 응고시키고 있다. 한 방울의 물이 거대한 우주를 만들듯이, 시인은 고요와 적멸 같은 침묵 속에서 저 숭고한 물의 정신성을 하나의 문자로 발화시키고 있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이 아니라, 저 견고한 바위를 뚫고 조용히 그렇지만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솟아오르는 강인함을 응시하면서 상징의 지대에 이르고 있다. ‘작은 우주의 비밀’과 물방울이 만든 ‘천연 순도의 상징’ 사이를 오체투지로 주유하면서 둥글둥글한 정체대원의 세계를 몽상하고 있다. 하나의 우주란 그 자체로 둥근 것인데, 그것은 하나의 원형(Prototype)인 동시에 가장 근원적인 원형(Archtype)의 지대에 생성된 상징적 문자이다. 허나 동일성의 지대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허나 동일성이 양산해내는 문자의 지대는 의미를 숨기거나 의미 해독을 요구하는 ‘상형문자’이다. 우주를 여는 ‘첫 아침’의 싱그럽고 신비스러운 문자, 그 문자가 시인 문현미가 말하는 상형문자인데, 그것은 동일성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형식이자, 절대성의 기획이 총체적으로 노정되어 있다. 도상이면서 사물이고, 사물이면서 신의 창조적 의지가 담겨진 상형문자는 절대적 동일성과 현상세계를 매개시키는 그 무엇이다. 말하자면 상형문자는 최초의 말씀이자, 현묘한 설법인데, 그것은 이 세계의 세계성이 단순한 물상적 존재가 아니라, 절대성의 의지가 현현임을 증명하고 있다. 하여 문현미 시인의 〈감로(甘露)에 깃들다〉는 달콤한 한 방울의 물의 생성 과정을 응시하면서 저 절대성의 영역을 몽상하고 있다. 차안이면서 피안이고, 피안이면서 차안인 화엄적 화광동진의 세계를 순결한 시말 속에 응고시키고 있다. 하느님 ─ 김남조, 〈벌〉 전문 삶─ 시간─ 세계 너머에서 움터오는 그 무엇인가를 응시하기. 하여 인간학적 심연에 도사린 양심을 반추하기. 벌은 인간학적 양심이다. 벌은 삶─ 시간─ 세계 전체를 동일성의 지대로 이끌어간다. 벌은 인간학적 삶의 최종심급이다. 지금 시인 김남조는 인생의 의미와 그 인생이 어쩔 수 없이 만든 형벌을 복층구조로 응시하면서 자신에 주어졌던 삶─ 시간─ 세계 전체를 절대적 동일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비록 시인의 시말들은 지극히 개인사적 자장 내부에서 벌어지는 인간학적 반성의 지점에서 비등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의 시말성은 말 밖에서 작동하는 절대성과 상면하고 있다. 모든 것을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절대자(하느님) 앞에 시인은 기도 묵상하면서, 자신에게 속해 있었던 그 모든 것을 차근차근 점검하고 있다. 시인의 삶과 일상의 삶 사이를 동시적으로 떠올리면서 지난한 시적 삶의 지대를 절대성(혹은 동일성)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동일성은 두렵다. 동일성은 삶─ 시간─ 세계의 바깥에서 작동하는 시간 이전이거나 모든 시간이 종료 소멸한 최후의 시간이다. 하여 동일성을 표상하는 시간은 신적인 시간이거나 무시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의 안쪽을 차이와 반복 속에 향유하다가 문득 시간의 바깥을 사유하게 되는데, 이때 인간의 의식 속에 죄와 벌이라는 너무도 인간학적인 문양이 도드라지게 현시된다. 김남조의 〈벌〉은 삶의 지대를 신적 기획이 넘쳐나는 저 바깥의 지대로 잇대어 놓고 삶─ 시간─ 세계를 반추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의 시말들은 ‘벌’이라는 인간학적 한계의 바깥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인가를 성찰하면서 시인의 천형적 운명성 또한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 쓰기의 형벌과 삶이라는 형벌 사이에서 시인 김남조는 시적 삶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감행하는 동시에 시 쓰기의 어려움 또한 극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시인에게 시란 수인이다. 시인에게 시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인데, 그것은 시시포스적 형벌을 감내한 자에게만 현시되는 그 무엇이다. ‘한평생 사계절’ 내내 형벌적인 시적 삶을 살아왔음을 절대자에게 고백하면서 시인의 천형적 운명성 또한 겸허하게 그려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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