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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세계를 향해 던지는 연애편지로서의 시들 / 김백겸

by 丹野 2010. 5. 6.

 

 

 

세계를 향해 던지는 연애편지로서의 시들

 

 

  

                                                                                                                                              김백겸

 

 


  * 좋은 시란 무엇인가. 주제가 훌륭한 시, 상상력과 비유가 뛰어난 시, 가슴을 울리는 정서의 진폭이 큰 시 등 여러 시야가 있겠지만 결국은 시간에 살아남는 시가 아닐까. 시를 해석하는 주체인 사람도 시간 안에 죽는다. 준거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역사상 위대한 정신(문화적으로 살아있는)의 거울에 내 시를 비추어보는 일이다. 내 시가 백년 후에도 읽혀질까. 시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 첨단과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외국서 들을 보면 주제의 장이 바뀔 때마다 유명시인들의 짧은 시들이 인용된다. 시의 암시로서 주제의 방향을 드러내는데 독자는 시의 상상력에 고무된 채 본격적인 주제에 임하게 된다. 이미 암시를 받았으므로 저자의 어려운 주제도 그리 낯설지가 않다. 과거에는 국가의 흥망을 위한 전쟁이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왕들은 日官 을 불러 점을 쳤다. 그 점의 암시 때문에 고난과 역경을 감당하며 대업을 마친다. 점? 당연히 시의 형태로 제시된다. 점이 틀려도 시 속에 있는 다른 암시가 운명을 정당화한다. 프로젝트를 수행한 주체는 실패해도 신의 숭고한 뜻에 따른 영웅이 된다. 그렇게 해서 영웅의 정신과 시의 정신(사실은 신의 정신)은 불멸을 획득한다. 시간이자 거품인 인간이 계속 태어나 도도한 문화의 강을 이루는 한.


  * 시인은 사막이 표상하는 금욕과 은자의 생활을 통해 “신의 얼굴”을 보고 싶은 욕망을 형상화 한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인들이 ‘영원으로 가는 배’로 부른 건축물이며 태양신 “라”의 지혜가 들어간 타임머신이다. 시인은 ‘피라미드’의 이미지를 통해 초월을 통해 신에 이르고 싶은 열망을 노래한다. 일상의 속악한 사물에서 聖의 속성을 발견한 시인의 눈은 예언이나 찬양으로 흐르지 않는다. 비밀은 일상의 수면아래 잠겨 있으며 시인은 그 비밀을 은밀한 인식아래 감춘다.


  * 기호가 상징으로 읽혀야 시의 다의적 의미가 성립한다. f(x)라는 함수를 보면 수의 관계가 이세상의 모든 기초라고 주장하는 피타고라스 학파를 연상하게 한다.  현상계를 설명하는 연기론의 수학적 해석 같다. x,y,z 축의 삼차원공간에 시간 축을 추가해서 사차원이 되는 인식이 우리의 보통인식이다(인간의 경험인식이라고 해야 하겠다. 실제의 물리 우주는 매우 다르다. 초끈 이론에 의하면  수학의 11차원이 동원된다).  물리적 계산으로는 정지하고 있는 물체도 시간 축을 따라 운동 한다(상상하기 어렵지만 광속으로 운동한다고 한다. 물체의 위치에너지가 광속의 운동에너지로 변할 때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우리의 경험인식을 넘어선 곳까지 미쳐야 이세계의 깊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 사유대신 감각위주로 쓴 시들을 보면 일단 독자가 편하다. 안마를 받을 때의 쾌감과 비슷한 느낌이 사유의 몸을 자극하는 것 같다. 독자는 작자의 안마에 정신을 맡기고 즐거운 느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사유시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똑같은 밥상에 물린 사람이 다른 별식을 찾는 것과 같다)  아침의 고요와 저녁노을의 정열을 감각적으로 그려내지만 노련한 바둑고수처럼 작가의 계산은 모두 뒤로 숨어있는 시. 시는 사랑에 들떠 할 말이 많은 여자의 말씀과 심장 속의 말씀을 드러내고자 하는 남자의 침묵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 시의 암시는 인간의 생의 의지이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아침과 밤이 같고 인간들이 사용하는 가마솥이나 땅 속의 철광석이나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는 생에 유리한 상황을 선으로 인식하고 찬양한다. 쇠란 인간이 자연을 경작하는 도구의 상징이다. 쇠의 총과 칼이 정복에 나서고 쇠가 고층건물과 다리를 세운다. 시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식세계에 대비되는 인간정신의 총과 칼이다.


  * 시는 시인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연애편지이다. 사랑을 주제로 노래할 때 시인의 무의식은 현실의 연인너머에 있는 대타자를 부르게 된다. 그래서 ”시적 본질은 사랑의 본질과 닮아있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나(에고)를 죽임으로서 타자와 나는 “사랑의 밖이며 안”인 차별의 세계를 극복하고 행복(유토피아)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데 시인은 현실(현상계)에 갇혀 대타자(초월계)를 향한 문을 열거나 닫는 존재이다.


  * 시인들이 아니마를 보는 작업은 흥미롭다. 시인들의 아니마가 어떤 타입이냐가 시인들의 정서적 안경을 결정한다. 원시적 여성상, 낭만적 여성상, 영적 여성상, 지혜 여성상(칼 융의 분류)이 있으나 주된 심리에너지의 발현일 뿐 네 타입은 한 에너지의 다른 표현이다. '心魂이란 자아를 초월하는 정신의 자율성이며 신성한 힘(Numinose)이며 강렬함과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다‘(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참조))


  * 나무를 시의 은유로 보자. 인생의 여름이란 20대 후반에서 40까지 가을은 50대 중반까지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무성한 잎과 가지와 열매를 위한 시간이므로 욕망과 수확을 위해 바쁜 시간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 눈은 아프고 발이 피곤해진다.  벤치에 앉아 무심한 구름과 바람을 바라보는 현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詩라는 복마전을 통과해야 하는 자의 삶은 고통스럽다. 그러면서도 시인들이 고투하면서 쓴 시의 암시가 만들어내는 풍경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일은 즐겁다. 그 안에 ‘내가 걸어온 길’들과 ‘걷고 있는 길’과 ‘걸어가야 할 길’들이 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R.프로스트)'라는 길을 걷는자의 회한과 함께.

 

 

출처 /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