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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부-시적 계시 2

by 丹野 2010. 4. 29.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2부-시적 계시 2 

 

시적 계시


  우리는 종교와 시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 노력하며 또한 스스로의 고유한 모습을 실현하는 가능성을 성취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종교와 시는, 마차도가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이라고 부른, 그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그때 우리 자신인 그 '타자'가 나타난다.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하지만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이다. 반면 종교적 언어는, 정의 그대로,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이 상이성은 종교와 시 사이의 유사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한편에선 리듬과 이미지로, 또 다른 편에선 신의 현현(顯現)과 제식으로―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시란 일종의 종교의 혹이거나 또는 신성의 어둡고 희미한 예시인가? 종교란 교리로 굳어진 시인가? 앞글에서의 기술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82

  루돌프 오토는, 신성(神聖)이란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로 구성되는 선험적a prior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인 요소는 "어떠한 감각적인 지각에도 근거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필연적이고, 실체론적인 관념, 그리고 필연적이고 객관적 가치인 선(善)의 관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관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경험의 영역을 버리도록 강요하며, 모든 지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순수 이성에 속하며 정신 그 자체의 원천적인 성향을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를 데려간다."1)

고백하건대, 내 생각 속에 완벽이나 필연 혹은 선(善) 같은 그런 관념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이성의 원천적인 성향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와 유사한 관념들이 의식을 구성하는 갈망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관념들을 한 가지 윤리적 판단으로 구체화할 때마다, 그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절대적으로 그와 관계된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하게 된다. 개개의 윤리적 판단은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선, 그 윤리적 판단 자체가 의지하는 선험적 관념이라는 것마저도 부정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한편 만일 실제로 그런 관념들이 지각 이전의, 혹은 지각의 해석 이전의 영역을 구성한다면, 신성(神聖)의 범주가 정말 근원적인 요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신성은 초자연적인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神性)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추정을 부정하는 것 같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패배하고 죄를 짓는 신(神)인 켓살코아틀을 숭배한다. 그리스나 다른 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동시에 선과 필연의 관념들은 전지전능이라는 보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희생 제의에 대해 우리와 다른 해석을 한다.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신들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들이 세계를 움직이지만, 그 신들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피다.

이런 예를 더 제시할 필요는 없다. 오토 스스로 자신의 말의 한계를 이미 설정했다. "이성적인 표현은 신성(神性)의 본질을 고갈시키지 못한다…… 신성은 통합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합리적 술어는 어떤 면에서는 발판이 되지만, 신성이 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이다. 그것은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신화에서, 악마적인 것은 대지의 중심에서 움터 나온다. 그것은 숨겨진 것의 발현이다. 동시에, 모든 드러남은 시간이나 공간의 단절을 수반한다. 그 상처나 틈새로 우리는 존재의 '이면'을 엿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창조란 무의 심연에서 창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현기증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려 하고, 원초적인 공포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으려 할 때,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일종의 범주화를 시도하게 된다. 183

이런 작업에서 이원론과 더 나아가 소위 모든 이성적 분류의 원천이 연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경험의 몇몇 요소들은 시바 신의 파괴, 여호와의 진노, 켓살코아틀의 만취, 테스카틀리포카의 북면北面 등, 신의 어두운 혹은 난폭한 모습을 구성하는 속성으로 변한다. 다른 요소들은 신의 밝은 면을 표현하여 빛나는 얼굴이나 구원자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원론이 심화되어, 두 얼굴 혹은 두 모습을 지닌 신이라는 개념에서 빛의 왕자와 어둠의 왕자라는 독립된 신성神性으로 전이된다.

결국,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그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神聖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오토는 다음과 같이 비이성적 요소의 우선성과 원초성을 확립했다. "신령함의 관념들과 그와 연관된 감정들은 이성적 관념들처럼 완전히 순수한 관념과 감정들이다. 그것들엔 칸트가 '순수' 개념과 감정에 내재한다고 지적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적용된다." 즉, 관념과 감정이 비록 경험 속에 주어지며, 경험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지만, 경험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과 함께 오토는 "더 고양되거나 혹은 더 깊은 곳을 구성하는" 제3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영역이 바로 신성神性이나 성스러움 혹은 신성神聖이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은 이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신성神聖은 인간 속에 내재한 신격화 성향의 발현이다. 우리는, 선험적 관념의 유현遊絃한 내용이 성장함에 따라 자기 자신과 대상물을 의식하려는 일종의 '종교적 본능'의 출현을 목적하게 된다. 184

그 근원적인 성향이 표상하는 내용은 그것이 기초하는 선험성처럼 비이성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이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성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니르바나(열반)나 기독교 신비주의의 무는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개념으로, '타자성을 밝히는 진정한 상형문자'이다. "역설의 가장 강렬한 표현인" 이율 배반은 당연히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 공통된 신비주의 교리의 기본 요소를 형성한다. 

  오토의 정의는 노발리스의 금언을 상기시킨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종교가 탄생한다." 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에서는, 종교적 근본인 초월의 개념이 심각한 균열을 겪게 된다. 인간은 "신의 손끝에 매달린" 존재가 아니라, 신이야말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대상은 항상 내부에 있고, 모든 신비적 경험이 시작하는 텅 빔의 다른 얼굴, 즉 긍정적인 면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인간의 내부에서 신이 드러난다는 생각과,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현현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 성향 때문에 우리가 신을 보게 된다는 생각은, 동시에 신성을 오히려 인간 주체성에 종속시키면서 그 존립 기반을 흔드는 것이 되지 않을까? 185

  다른 한편,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을 다른 성향들, 그 중에서도 시적 성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노발리스의 말을 변형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도 조금도 어색하거나 문제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시가 탄생한다."

오토 자신도, "숭고함sublime의 개념은 신령함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된다."고 인정하고, 시적 감정과 음악적 감정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길, 단지 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고 했다. 이렇게 神聖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신성의 우선성은 역사적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 인간이 처음 출현한 그 순간, 그들이 무엇을 먼저 느끼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지금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오토가 주장하는 우선성은 다른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의 모든 경험에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한'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숭고함 속에는 언제나 측량할 길 없는 미지의 것이 출현할 때의 신적인 공포가 자아내는 두려움, 불편함, 마비, 숨막힘 등이 있다.

사랑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 속에는 에로틱한 힘이 강력히 개입되기도 하고, 사랑의 경험 속에 신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모든 사랑은 자아의 기저를 뒤흔드는 지진이며 계시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는 신에 몸을 맡긴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 창작의 순간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해석하고 분류할 때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신성함이 다른 모든 경험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추정하게 된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놀라는 존재이다. 인간이 놀랄 때, 시를 쓰고 사랑하고, 신을 찬양한다. 사랑에는 놀라움과 시와 신성과 대상에 대한 숭배가 들어 있다.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이런 경험들 중 그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런 경험들을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시인의 언어와 신비주의자들의 언어를 구별하는 특별한 색조는 그 말이 지향하는 대상에 달렸다.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은 특별한 정신의 빛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개개 경험의 진정한 독자성은 그것이 지향하는 대상에 좌우된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어려움이 끼여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 대상이란 것도 결국은 "우리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의 본능을 자극하고 일깨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외적 대상들을 신성화의 목록 속에 기록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저 희미한 내적 본능이다. 하지만 본능이란 것도 앞에서 본 바대로 순수하지 않다. 결론짓자면,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 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든 길이 끊어졌다. 선험적이라는 관념이나 범주를 포기하고 신성神聖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수밖에 없다. 188

  신성한 공포는 근본적인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은 일종의 자아의 왜소화를 가져온다. 인간은 자신을 거대함 속에서 길 잃은 미약한 존재로 느끼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작다는 감정은 비참함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바로 '먼지와 재'에 다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macher는 이 상태를 '의존의 감정'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특징적인 차이가 이 '의존'을 다른 의존들과 구분짓는다. 상위의 존재와 상황에 대한 의존은 상대적이며, 그러한 요인이 사라지자마자 의존도 사라진다. 신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고 지속적이어서 우리들의 탄생과 함께 태어나 죽음 뒤에 이르기까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의존은 "스스로에 의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정신의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무엇이다. 신성은 이렇게 추론에 의해 획득되어진다.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오토는 낭만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생각을 차용했지만, 그의 이성주의는 배격했다. 사실 슐라이어마허에겐 신성이나 신령함이 진정으로 모든 관념들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지의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결과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항상 현존하며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엇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오토는 이 근원적 감정을 '피조물의 상태'라 부른다. 이제 중력의 중심이 바뀐다. 진정으로 특징적인 것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말은, 우리들의 근원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유한성과 왜소함의 어두운 의식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얼굴과 대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이렇게 근원적 감정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요소이다.

슐라이어마허와는 반대로, 오토에게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이다.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많은 종교가나 신비주의자들의 글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즉, 부정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창조자의 등장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아기는 자기가 누구의 아들이라고 느끼지 않고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스스로 뿌리뽑혀서 어느 낯선 세계에 던져졌다는 느낌뿐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고아의 감정은 모성과 부성에 대한 인식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오토는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한 논리를 단지 역으로 또 한 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토는 의지의 감정에서 신의 개념을 추출했으며, 슐라이어마허는 신성함을 피조물의 근원적 상태로 여겼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해석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오토는 핵심을 포착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결정적인 상태인 '태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189

그리고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그리고 왈렁스Waelhens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에서 "근원적 상태의 느낌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을 정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말했다.2)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하이데거의 분석에 의하면, 고뇌와 두려움은 우리들의 근원적 조건에 이르는 문을 열고 닫는 서로 대립되고 대칭적인 두 개의 통로이다. 스스로의 공동空洞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하는 신성함의 경험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 조건인 우연성과 유한성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빛나는 계시는 잠시 후 인간 조건의 외부적인 요소인 창조주와 신성神性 등에 의거하여 인간 존재 조건을 해석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가려지게 된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은 고뇌 속에서 발견되는 무를 잘 가려낸다. 하지만 곧 죄인의 왜소함을 신 앞에 고백하면서 이 계시의 의미를 왜곡하고 만다.

우리의 비참함은 죄의 사함과 구원에 힘입어 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원히 구원되었다는 느낌으로 회복된 전망은 우리 존재의 가치를 재건하고 잠깐 동안 무를 극복하게 해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일어났던 것처럼, 고뇌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게 된다."3)

2) 왈렁스 Alphonse de Waelhens,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tin Heidegger』, Lovania, 1948. 9(원주)
3) 왈렁스 Waelhens, 앞의 책. (원주) 190

 

 

 


우리는 여기에 미겔 데 우나무노와 특히 케베도라는(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그의 시 「참회자의 눈물」과 「기독교인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또 다른 이름을 첨가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이제 결론내릴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며 그것을 알고 느낀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유한성이라는 형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 대안은, 조금만 움직여도 벗겨질 가면에 불과하다. 이 점은 원죄와 속죄라는 개념을 검토해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장엄한 것은 경외심을 유발하여" 숭배와 복종을 요구한다. "모든 도덕적 체계와 무관하게, 종교는 의식에 부여되는 내적인 의무이다…… "4)

원죄, 보상, 속죄 같은 개념들은 장엄한 것이 피조물에게 느끼게 하는 이 복종의 감정에서 싹터 나온다. 원죄 개념에서 구체적인 잘못이나 어떤 다른 도덕적 영향을 찾는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느끼기 전에 고아 의식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죄는 우리들의 잘못과 죄악보다 선행한다. 그것은 도덕보다 앞서는 것이다.

4)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91

"도덕적 영역 내에선 구원이나 보상 혹은 속죄 개념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토는 이어 말하길, "그것들은 신비주의 영역에서는 진실되고 필요한 것이지만, 윤리의 영역에서는 거짓이다." 속죄와 긴급한 구원의 필요성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근원적인 '결핍'에서 싹터 나온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神性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이것이 성사聖事, 특히 영성체領聖體 의식의 의미이다. 이는 또한 희생의 궁극 목표이기도 하다. 즉, 신을 달래는 것이며 이것은 헌신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타인들의 희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인 부족함으로 인해, "신성神聖에 접근할 자격이 없다." 희생을 통하여 신이 우리에게 존재의 가능성을 되돌려주는 구원과 우리를 정화하는 희생인 속죄는 이 근원적인 자격 미달의 감정에서 태어난다.

종교는 이렇게, '죄의식'과 '죽을 운명'이 같은 차원의 용어라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들은 죽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죄는 속죄를 요구하고, 죽음은 영원을 요구한다. 죄와 속죄, 죽음과 영원한 삶은, 특히 기독교에서, 상호 완성되는 하나의 짝을 형성한다. 하지만 동양의 종교들은, 우나무노를 그토록 잠 못 이루게 했으며 병적 성격으로까지 몰고간 문제인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192

   엄격한 의미에서, '결핍'과 '부족한 존재'가 원죄와 동의어가 된다고 추론할 만한 근거는 없다. "빚을 진 것 때문에 죄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도 낮아졌다고도 증명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 교리와 차이점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 세계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따라서 부족한 인간 존재를 원죄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완벽한 존재인 신 앞에서, 천사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결점이 많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존재로 상승하거나 무로 추락할 수 있는 힘에는 자유가 포함된다. 한편으로 우연은 자유를 생산하고, 다른 한편 자유는 우연 혹은 원초적 결함을 치료하고 순화시키는 가능성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가능성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굳이 가톨릭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생각이며, 스페인 희곡에서 크게 발전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서 살며, 이 세계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바로크 시대 멕시코의 수녀 시인 후아나 수녀가 유명한 편지에서 "부정적 호의"라고 표현했을 때도 포함해서, 은총이란 구원에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은총에 굴복한다.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는 진짜 부족하고, 작으며, 불충분하다. 이 사실은 은총이 자유를 대체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확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6) 가톨릭 사상은 개신교 사상보다 더 풍부하고, 자유로우며,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와 원죄 사이에 형성된 이 인과론적인 연결 고리를 완전히 해체시키지는 못한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기 전에 어떻게 자유가 악을 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존재보다는 무를 선택한 이 자유는 대체 어떤 자유란 말인가?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했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 속에 현존한다. 우리는 죽으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매순간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부터 죽음을 빼앗으면서, 종교는 우리에게 삶도 빼앗는다. 영원한 삶의 이름으로, 종교는 이 삶의 죽음을 확인한다.

5) 하이데거Ma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El ser y el tiempo』, traduccion de Jose Gaos, 2a ed.
6) 질송Etienne Gilson, 『중세 철학의 정신L、esprit de la philosophie meddieval!!e』, Paris, 1944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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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드라의그물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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