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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을 위한 몇 가지 전제
엄경희(문학비평가)
1. 시정신을 문제삼는 이유
'우리 시대의 시정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단일한 하나의 물음이 아니라 매우 근본적인 여러 가지 질문을 촉발시키는 물음이다. 왜 이 시대에 시정신을 묻는가? 이 물음은 이 시대의 시정신이 부재한다는 의구심과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정신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토대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끄는 막강한 힘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의 실체를 결코 긍정할 수만은 없다는 회의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 시대의 시정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단순히 답을 도출하기 위한 물음이라기 보다 허약한 시정신의 토대를 점검하고자 하는 성찰적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담론은 무성하지만 철학이 부재하는 시대, 다양성이라는 패러다임이 은폐하고 있는 극심한 혼란과 분열의 시대, 무제한의 정보 속에서 깊이를 상실한 시대, 담론의 생성과 소멸이 유행을 타는 시대, 기발한 조합이 미덕인 시대, 통속 비극만이 존재하는 희극의 시대, 물질에 의해 정신이 완패한 시대. 이 모두는 우리 시대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이면서 동시에 문제성이다.
우리 시대의 시정신을 문제삼는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시대의 시정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당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과 노력에 의해 '형성'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명확한 답의 제시라기보다 우리 시대의 시정신을 만들어가기 위한 기본적 전제를 탐색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질 것이다.
2. 자본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담론의 생산
명상을 위한 수많은 책과 음악과 수행법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정신이 그만큼 지쳐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늘 불행하다고 말하고 피곤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체제와 구조이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공장 안에 존재해 있다. 이 공장은 상상을 초월한 물질의 천국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불행한가? 이윤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의 체제는 절대 공짜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천국의 주민이 되기 위해 우리 모두는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열심히 노동한 우리는 왜 여전히 빈곤한가? 아침부터 밤까지 노동을 해도 내가 원하는 천국은 왜 여전히 멀리 있는가? 이 거대한 공장의 주인은 당신도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유혹하며 채찍을 휘두른다. 열심히 더 열심히! 그러나 천국은 결국 자본주의 것일 뿐이다.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언제나 우리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권력을 살찌워야 한다는 부당한 묵계를 알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구조는 전체이고, 전체를 벗어나는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 구조에 맞는 인간형으로 자신을 개조하고 적응하는 길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이념을 믿고 따라가야 할 것이다. 행복의 신기루를 끊임없이 꿈꾸는 우리들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자본주의적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텔레비전을 포함한 대중 매체는 욕망을 유포하는 선교자 역할을 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증폭시키는 데 주력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욕망을 소비한다. 얼마나 충실한 노예의 삶인가!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욕망 구조가 우리의 사유를 둔화시키고 때로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우리를 가둔 거대한 감옥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불행이 이 체제 때문이라면 우리 시대의 시정신은 이 감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정신의 토대를 마련하는 가운데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지닌 미학의 원리는 늘 현실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마련된다. 첨단의 현대성을 동반하든 아니면 전통 서정으로의 회귀든 시적 미학은 그것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를 시대에 근거해서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가 지닌 가장 큰 문제가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자생적 담론의 생산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그리고 보다 진실한 문학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올바른 중심 찾기
'해체주의'가 우리 문화를 휩쓸고 가면서 '중심'이라는 말은 이제 부조리한 권력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어버렸다. 탈정치, 탈남성, 탈이데올로기 등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탈'이라는 말에는 그간 우리를 억압했던 지배력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담겨있다.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 구조를 벗어나 억압되었던 것들의 자유와 권한을 되돌려주려 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평등과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차별이 아닌 차이의 세계, 다양성이 조화를 이룬 사회는 우리가 열망하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지속해서 강조되어 왔던 해체주의는 가족과 정치, 이념, 성, 예술의 형식 등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의 의식을 개방해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체는 과정일 뿐 목표는 아니다.
해체가 진행되는 가운데 나는 과연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차이'일 뿐인가, 중심 없는 지향이 가능할 수 있는가, 과거의 가치론을 우리는 철저히 점검하였는가, 인간이 의존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가 등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차이에 대한 강조가 저급한 문화 양식이나 비천한 사유의 틀을 공격할 수 없게 한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해체가 지향했던 평등 구조가 아니라 무분별함과 가치의 혼란일 것이다. 고귀한 정신이나 삶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폄하하는 풍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끝끝내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가치는 자기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보수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3의 이데올로기, 혹은 올바른 중심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방향성이 없는 역사의 진행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이런 종류의 자유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체주의가 조롱하고 공격했던 기존의 부조리한 권력들은 아직도 그 힘을 상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해체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더욱 과감하게 감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체가 올바른 중심을 생성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할 필요가 있다. 해체의 진정한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완전한 세계를 이룩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성적 시각은 우리의 시정신을 문제삼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4. 자기 긍정의 회복
시대가 궁핍할수록, 그 모순이 극심할수록 반성과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우리의 문학사에서 비판과 성찰의 격렬한 목소리가 결코 약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큰 결실을 만들어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과론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 문학사를 둘러보면 비판과 반성의 끝없는 도정이라 할 수 있다.
비평만이 아니라 창작시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는 두드러지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가 놓여있다. 식민지와 6·25, 산업화와 군부독재로 얼룩진 우리 근대사의 황폐한 토대 속에서 지금껏 이룩한 문화 예술의 성과는 눈물겨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끊임없는 비판과 반성이 새로운 토대를 닦기 위한 근본적 동력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자기 부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역사 현실 인식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고 있는 문학적 담론은 불가피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이며, 나아가서는 양심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의 되풀이 속에서 우리는 자기 긍정과 긍지를 회복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문학에 대한 자긍심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왜 우리는 끊임없이 반성문을 써야 하는가. 반성의 반복이 우리를 위축시키고 문제적 시인의 활달한 상상력을 저지시켰던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우리시에서 극렬한 유미주의나 활기찬 유머, 호모루덴스적 자유분망함, 호방한 어조 등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혹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 비판과 반성은 진지한 것이고 진실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경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기 긍정을 할 수 없었던 부정의 역사 속에서 굴절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문학사는 당연한 것일지라도 이제 그 당연함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비판과 반성을 넘어서 긍지와 자부심이 넘치는 역사의 도정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의 미래 과제이다.
5. 낭만적 영혼의 부활
셔블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며 노래방을 나온 처용이 비틀거린다. 주황색 포장마차 천막을 들치고 들어가는 처용. 넥타이를 벗어 던지는 처용.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처용. 서류봉투를 구겨버리는 처용. 꼼장어로 술을 마시던 남자. 처용에게 소주잔을 권한다.
형씨, 엿 같은 세상 우리 마셔 버리자구요. 백열등처럼 흔들리는 처용, 술잔을 받는다. 소주잔에 동해바다가 잠시 출렁거린다. 천수백년전의 서라벌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요. 여자들은 아무 남자나 끌어안고 남자들은 드러자 자리 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달빛아래 너울너울 춤을 추지요. 처용이 중얼거린다.
술잔을 권하던 남자의 눈빛이 번쩍인다. 천막을 들치고 나와 구토를 하는 처용. 등을 두드려 주는 술 권하는 남자, 길바닥에 쓰러진 처용의 호주머니를 뒤진다. 잽싸게 지갑을 훔쳐 승냥이처럼 달아난다. 현금과 신용카드를 꺼내고 처용의 주민등록증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처용의 얼굴이 쓰레기 통 속에서 일그러진다.
어둠은 검은 망토를 걸치고 전신주에 걸터앉아 있다. 어둠의 눈동자가 번쩍인다.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든 처용. 달빛 아래 너울너울 날개를 퍼덕여 춤을 추던 남자, 커다란 날개로 서라벌을 덮던 그를 기억하는 별빛, 역 앞 포장마차 근처에 버려진 외투처럼 잠이 든 처용, 그의 야윈 등. 본대 내해다마난 아자날 엇디하릿고…… 처용의 고단한 잠을 덮는, 안개비처럼 내리는 천년전의 달빛,
[처용,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다] 전문({현대시학} 2003년 2월호)
위에 인용한 시는 2003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옥숙의 신작시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시의 수준과 진정성을 따지고자 인용한 것은 아니다. 이 시는 아내의 간통 앞에서 춤추고 노래함으써 역신을 물리친 처용 신화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 처용의 모습은 과거의 신비스러운 인물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김옥숙이 포착하고 있는 현대판 처용은 다름 아닌 일상인의 초상을 대변한다. '엿 같은 세상'에서 노래방과 포장마차를 전전하다 길거리에서 쓰러져 잠이 든 처용은 이 도시의 밤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천함과 왜소함이 우리의 삶의 양태를 반영해 주는 적나라한 진실일지라도 나는 그것을 벗어날 것을 절감한다.
90년대 이후 일상에 대한 발견과 복귀, 그것의 가치에 대한 옹호는 추상적 거대담론을 벗어나 구체적 생활 공간으로 우리의 관심을 옮기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상성과 일상적 존재에 대한 미시적 탐구가 그것 이상의 세계를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2000년대의 많은 시가 김옥숙의 [처용,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다]와 같은 시각에 묶여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빈천함과 왜소함에 집중되어 있는 상상력은 그 자체로 왜소함에 묶일 가능성을 내포한다.
[처용,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다]가 갈구하는 것이 '달빛 아래 너울너울 날개를 퍼덕여 춤을 추던' 갈망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도시적 상상력이 지닌 협소한 공간 의식, 인간에 대한 좌절 의식, 불안과 초조의 분열증, 우울하고 자폐적인 서정, 조잡하고 연약한 심리 등을 박차고 나갈 낭만적이고도 디오니소스적인 시정신의 부활은 불가능한 것인가.
시대의 우울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시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시는 본질적으로 낭만적 정신의 소산이다. 꿈꿔야 할 이유가 없다면 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위축된 낭만성을 가로지르는 크고 위대한 인간 정신의 불멸성을 입증할 수 있을 때 시의 위의를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비인간화에 대한 대응일 수 있을 것이다.
6. 집요한 탐구 정신의 필요
하나의 사유가 삶과 연계되어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밀고 나가는 집요한 탐구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식민주의, 몸담론, 동양학의 부활, 마술적 상상력으로서 환상, 타자이론 등 우리에게도 매우 유용한 사유의 지평이 활성화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비평과 창작이 함께 이러한 담론에 대해 반응하면서 수많은 문학 잡지에서 특집을 기획했던 테마들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외국의 다양한 이론과 국내 연구자들의 저서가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명원은 외국 이론의 수입에 대해 "어떠한 문학이론이든 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도출될 때 이론의 적절성을 검증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의 수용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인 도입은 상당한 문제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파문}, 새움, 2003년, 255쪽)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던 90년대의 부박한 풍토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편 현시점에서 해체주의나 페미니즘, 생태주의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은 어떠한가? 이미 진부한 테마라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모든 담론들이 아직 어느 하나 우리 안에서 체계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식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러한 사유의 지평이 답보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페미니즘시나 생태시에서 보여지는 도식화되어 있는 상상력, 비슷비슷한 비평적 틀의 반복 등이 이러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문화의 전반적 풍토가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 현란한 것에 치우치는 면이 강한데, 문학도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이슈화함으로써 다양한 변화를 촉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유행으로 끝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성숙시켜 가는 과정이 우리에겐 너무 짧다.
소중한 사유의 지평이 자생력을 키우기도 전에 사멸해버린다면 그것은 지적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우리의 철학적 인문학적 기반이 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전통의 지층이 허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담론의 생산과 새로운 삶의 지평을 위해서는 지금의 토대부터 철저히 점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생각의 나무, 2003년)라는 책에서 한국의 자생이론 스무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 책을 거론하는 것은 외국 이론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검들을 눈여겨보면서 진정으로 우리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유 체계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 출처 : 시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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