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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이란 무엇인가
김기택 (시인)
시는 일상적인 언어의 말하기와는 달리 ‘창작’이라고 말한다. 창작이란 이전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왜 일상적인 언어는 창작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시는 창작이라고 하는가. 시를 쓰면 이전에 없던 무엇이 새로 있게 되는 것인가? 즉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로 바뀌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가 일상적인 어법, 산문적인 문장과 다르기는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거기에 창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행갈이나 연 구분, 리듬이나 비유, 상징, 반어, 역설 등을 사용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나 문장이 생기는 것인가?
요즘 텔레비전에서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방영한다. 거기 보면 어느 유명한 식당의 요리라든가 또는 어느 지방의 특별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음식들이 소개되기도 하고, 어느 음식이 맛이 있는지 경쟁하기도 한다. 공중파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청자는 시각과 청각으로만 그 음식을 대하면서 상상할 수 있을 뿐, 그것을 먹어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청자들에게 일일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음식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 출연자가 대표로 맛을 본다. 맛을 봤으면 시청자들에게 그 맛이 어떤지 말로 설명을 한다. 그 설명이란 것이 고작 ‘담백하다’, ‘깔끔하다’, ‘쫄깃쫄깃하다’, ‘고소하다’ 이런 정도인데,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출연자가 직접 먹어본 맛의 경험 그대로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즉 맛에 대한 감각 체험을 시청자가 비슷하게라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출연자가 하는 말은 ’직접 먹어봐야 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시청자는 출연자의 그 빈약한 말보다는 영상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데 훨씬 유리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의 맛을 체험적으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수천 년간 말을 써왔고, 단어나 표현법이 계속 생겨서 말이 계속 발전을 해왔는데도 말이다. 맛 뿐만 아니라, 소리는 어떤가? 처음 듣는 새 소리,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노래나 연주, 말로 그 느낌이나 감동을 실제 체험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을까? 냄새, 향기는 어떻고, 몰래 좋아하던 애인의 손을 처음 만졌을 때의 촉감은 또 어떤가? 또 감정이나 정서는 어떤가? 내가 이성에게 반해서 온몸이 그 사람에게 강력하게 끌리는 것을 느낄 때, 그 생생한 느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체험한 그대로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이 그 체험의 실감과 질감을 그대로 나타내줄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 그 느낌을 ’슬픔‘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실제의 느낌과 얼마나 가까울까? 어렸을 때의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떠오르는, 다시 체험하고 싶은 추억들은 또 어떤가? 이것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우리 몸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듯 생생하게 표현해 줄 마땅한 단어나 문장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
우리 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실체가 느껴지는 생명체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생 내내 나와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체를 체험한 그대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내면에서 꺼내어 언어에 옮기고자 하는 순간, 그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은 개념으로 변하고 만다.
짜다, 달다, 아름답다, 곱다, 사랑, 슬픔, 괴로움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개념은 의미를 압축시켜 놓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즉 우리가 체험한 것에서 몸의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빼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것은 몸의 생생한 체험을 머리가 처리할 수 있는 의미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슬프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이 체험한 그대로 느끼는 대신에 머리로 이해하고 만다. 그때 그 의미는 머리로 처리하는 정보라는 점에서 교통 상황이나 뉴스 같은 정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현대는 정보의 시대이고 개념화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여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게 된다. 정보는 곧 권력이며,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물이 되어 세계를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감이나 감정, 정서 등으로 체험한 살아있는 느낌,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도 없지만, 분명히 실체가 느껴지는 그 생명체(이것을 편의상 ‘이름 없는 생명체’라고 부르자)는 언어에 담는 순간 죽어버리게 된다. 체험이 개념으로 바뀌는 순간 의미라는 뼈다귀는 남고 체온과 떨림과 호흡이 있는 피와 살은 거의 다 제거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관습은 대부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거나 정보를 전달할 때 대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화한다. 그래서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우리가 체험한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 언어에서 주로 개념만 남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제거되고 나면, 그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 아마도 그 대부분은 언어를 통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에 기억으로 무의식으로 축적될 것이다. 저장되었다가 어느 순간 잠깐씩 단편적으로 환기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슬픔, 분노, 괴로움 등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숙변처럼 몸에 쌓여 무의식의 정신 작용으로 몸에 잠재하면서 왜곡된 형태로 행동이나 말이나 꿈에 나타나고 종종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심한 경우, 눈에 드러나는 정신 장애를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나 보이지 않는 이 생명체를 몸 밖으로 꺼내고 싶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 작용과 같이 그것들을 연민이나 공포를 통해 배설시키기고 싶을 것이다. 몸에서 꺼내는 방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그것을 말에 실어 내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감이나 감정, 정서와 같이 그 살아있는 체험은 개념화된 언어에 잘 담겨지지 않는다. 언어에 담는 순간, 살과 피와 체온인 체험, 감정, 정서 따위는 새어버리고 뼈다귀인 개념만 언어의 그물에 걸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 언어에 담겨지지 않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어떻게 산 채로 언어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환의 「깃발」의 첫 행,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자. 여기서 “이것”은 깃발을 지시하는 대명사다. 즉 “깃발”이 “아우성”이라는 말이다. 왜 깃발이 아우성일까? 깃발은 긴 막대기 위에 매단 사각형의 천 조각인데 왜 이 시각적인 사물이 청각적 이미지인 아우성이 되었을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깃대에 매달린 깃발을 상상해 보자. 깃발은 사각형의 천조각이다. 그 천조각은 얇고 가벼워서 바람이 세차게 불면 쉽게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깃발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천조각의 두 모서리는 깃대에 단단하게 메어있다. 바람의 힘에 의해 날아가려는 힘과 날아가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는 힘 사이에서 그 연약한 깃발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물론 펄럭이는 것이지만, 그 펄럭임을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떨기도 하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뒤틀리기도 하고 천조각의 물질성 때문에 물결무늬가 생기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몸짓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난폭한 힘과 깃대의 고집불통의 힘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천조각의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애타게 호소하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떨기도 하고 대단히 절박하게 용을 쓰고 있는 “아우성”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소리가 없다. 마치 벙어리의 몸부림처럼 그 아우성은 소리 대신 온몸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속에서는 울음 같은 격렬한 외침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소리는 나오지 않는 이 답답한 상황이 깃발의 격렬한 뒤틀림을 더욱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치환이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깃발의 몸짓이 무엇인가는 비교적 쉽게 환기된다. 현실의 제약을 뚫고 광대한 세계와 우주를 향해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억누르는 현실의 여러 가지 고집 붙통의 여건들 사이에서 유치환의 내면에 있는 깃발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미친 듯이 허공을 향해 격렬하게 떨고 뒤틀며 움직이는 깃발의 몸짓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시의 후반부에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그런 내면의 모습을 ‘깃발’이라는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깃발이 환기하는 ‘체험’과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의미하는 바를 비교해 보라. 시인이 그것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만 표현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몸속에 있는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개념적인 언어가 된다. 슬픔, 애달픔, 마음 따위와 같은 개념만 남고 시인의 몸속에 있는 생명체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개념’ 대신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제시한 것이다.
깃발의 격렬한 떨림과 뒤틀림, 날아갈듯 날개처럼 넓고 가볍지만 하늘을 앞에 두고 날아가지 못하게 두 모서리가 단단하게 묶여있는 모습, 그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는 연약한 천조각의 몸짓, 그러나 아우성을 들리지 않고 벙어리처럼 온몸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시인의 몸속에 있는 살아있는 감정이나 정서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 깃발이 독자에게 주어지는 순간, 독자는 깃발의 움직임 속에서 시인이 갖고 있었음직한 마음을 즉각적으로 환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개념적인 언어에 담아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개념 대신에 사물을 빌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깃발의 저 움직임과 유사한 마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깃발’은 바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에 해당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찾는 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 경험과 관련 있는 외부 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감각 경험과 유사한 사물을 통해서 감정이나 정서를 일시에 환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 언어 관습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버리고 그 개념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 상관물이란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와 등가를 이루는 사물을 제시하고 그 사물을 통해 감정이나 정서가 환기되도록 고안된 일종의 폭발장치 같은 것이다.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에 뇌관을 만들어 놓고 그 뇌관을 건드려 그것들과 등가를 이루는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는 순간 그 폭발물이 폭발하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표현된 시적 언어는 두 가지 면에서 일상 언어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첫째는 몸속의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머리로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은 개념의 뼈다귀만 남은 언어에 살과 피와 체온이 있는 살아있는 몸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소리 없고 만질 수 없는 감정이나 정서를 마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변형시키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아는 것으로 끝나지만, 체험은 몸이 떨리거나 호흡이 가빠지거나 오싹해지거나 후련해지거나 흥분되는 것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로 객관적 상관물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통해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시는 단지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도록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만 제시하는 것이고, 독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 속에서, 자기 몸의 감정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체험은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된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깨워 만들어낸 체험이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한 것이 된다. 시인의 창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독자의 몸속에서 독자의 경험과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재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상관물은 시라는 장르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상 언어의 관습으로는 생명체를 언어에 담아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의 관습을 고의적으로 비틀어 사용한다. 앞에서 인용한 유치환의 시 구절은, 시인 내면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깃발로, 깃발이라는 시각적인 사물을 청각적인 아우성으로, 그 아우성은 소리가 없다는 모순 어법으로, 세 번이나 뒤튼 문장을 사용했다. 살아있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언어를 이렇게 뒤튼 것이다. 그래서 박이문은 시를 “언어를 통해서 언어에서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이라고 했으며,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지 않는 언어”는 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시는, 일상 언어 문법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전달하려는 특별한 언어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상 언어 관습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죽이기 때문에, 그것을 산 채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언어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창작이라고 할 때, 시가 만드는 것은 일상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 형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 관습이기 때문에 많이 경험해온 소재나 이야기라도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고 경험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시를 창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없는 언어 관습, 처음 보는 언어 형식을 만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형식을 답습한다면 거기에 ‘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라는 새로운 언어 관습은 앞에서 언급한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특성 외에 몇 가지 슬픈 운명을 더 타고났다. 그 하나는 일상 언어와는 달리 완성된 형태의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만들어 불완전하게 끝낸다는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라 반제품으로 독자에게 내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시인이 제시한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들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나 감정, 정서, 경험 등을 깨워 환기하여, 시가 설치해 놓은 ‘체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시는 독자가 참여하여 어떤 환기 작용을 통해서 체험을 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된 독자가 아니면, 이 환기 장치는 무용지물이 된다. 일상 언어 관습에만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외국어 같은 모국어이다. 따라서 시는 그것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시적 언어에 훈련된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폐쇄적인 말하기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생계에 지장을 받거나 생활에 그다지 불편을 얻는 일이 없으므로 안 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시라는 말하기의 관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다수가 쓰지 않는, 마치 사멸되어 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처럼 슬픈 소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시가 가지고 있는 슬픈 운명은 창작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상 언어처럼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쓰면 그것은 더 이상 창작이 아닌, 모방이나 복제가 된다.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어 사용하는 말하기이다. 그리고 한 번 사용된 말은 다시 만들어서 쓸 수 없다.
많은 시가 창작되어 읽히면 더 소통이 풍요로워야 하는데, 시인은 고의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말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유치환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은 단 한 번만 창작될 수 있으며, 같은 문장은 물론 비슷한 문장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의사소통이 주요 목적인 말의 특성상 이러한 소통 방법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말을 쓴다면 대단히 생산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다. 시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실제로 시 읽기의 괴로운 경험을 상기해 보라)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쓰지 않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는 대단히 이상하고 특별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난해성과 소수만이 소통하는 폐쇄성과 기존에 있는 말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 말을 만들어 쓰는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3천년 이상 시를 쓰고 즐겨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the Poetics)은 기원전 330년 전에 씌어졌다. 시학에는 이미 호머(Homer, 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s)'와 '오디세이(Odysseia)'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기원전 800년 전에 씌어진 것이다. 중국의 공자가 엮은 ‘詩經’에는 305편의 작품이 있는데, 가장 늦은 것이 기원전 600년의 작품이고,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1115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가 3000년 이상 생명력을 유지해온 것은 그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특별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 즐거움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시는 사라져도 벌써 옛날에 사라졌을 것이다.
언어에 담겨지지 않은 이름 없는 생명체를 산 채로 언어의 그물로 잡을 때, 우리는 그 생명체를 밖으로 꺼내낼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이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는 씻겨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언가가 충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삽날이 목에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 이윤학, 「이미지」 전문
농촌에서 삽을 들고 밭일을 하다가 뱀이 나타나면 일어날 법한 장면이다. 이 시는 삽날에 목이 잘린 뱀이 도망하는 사건을 객관적상관물로 제시하였다. 이 시는 독자에게 목이 잘린 뱀이 되어 그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1연은 그런 상황의 제시이다. 이 시의 백미는 2연이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는 것은 뱀이 머리가 없어 세상이 캄캄한데, 몸속의 살아있는 본능은 강렬하게 움직이는 상황의 묘사이다. 세차게 물이 나오는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세차를 하다가 놓친 상황을 상상해 보자. 호스에서 분출하는 물의 압력은 큰데, 물이 나아갈 방향을 굳게 잡아줄 손이 없으면 호스는 요동친다.
몸에서 삶의 본능은 세차게 밀고 올라오는데 세상은 캄캄하고 가야할 방향이 없는 뱀의 모습이 ‘목이 잘린 뱀’과 ‘호스’라는 확장은유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묘사는 머리가 없는 몸이 살아서 어딘가로 간다는,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체험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그 고통이 근원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삶의 어느 국면에서 몸과 마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고통을 경험했을 때의 화자의 심리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마음으로 크게 의지하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의 죽음이나 이별을 경험했다거나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큰 사고가 났다거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병의 진단을 받았거나 등등 자신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는 좌절을 겪었을 때의 심리상태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겪는 고통을 일상 언어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해도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시는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꺼내는 과정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 즐거움은 이미지를 통해 부정적인 정서의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경험이다.
끝으로 객관적상관물이 보여 주는 다른 효과는 그것이 시작 과정에서 분출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데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읽어 본 이윤학의 시는 감정을 격정적으로 드러내기가 쉬운 시이다. 그러나 목이 잘린 뱀의 비유는 그런 감정의 분출을 적절하게 차단하고 있다. 시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려면 감정이 한껏 분출되어야 하는데 왜 그것을 억제해야 할까? 감정은 시 쓰기에 있어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시작 과정에서는 감정이 마음껏 분출되어야 시작 과정의 체험도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타서 없어지는 것이다. 즉 감정은 시작 과정에서는 극적인 체험을 하도록 마음껏 분출되지만 정작 시에서는 모두 연소되어 없어지게 되는데, 객관적 상관물이 바로 그런 역할을 돕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가 겪었음직한 극도의 절망감은 목 잘린 뱀의 체험으로만 제시되어 있다. 그 외의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객관적 상관물은 폭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가 감춰진 감정이나 정서를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환기했을 때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뇌관을 장치하는 것이다. 그때 시의 겉모양은 모양은 차갑고 단단하고 표면이 매끄럽고 광채가 나는 유선형의 쇳덩어리뿐이다. 어디에도 물기가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강력한 폭발물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뇌관을 건드린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감정이 노출된다는 것은 정작 폭발해야 할 폭발물이 겉으로 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경우에 결국 속이 텅 비게 되므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한 시에서는 독자가 시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오직 폭발 작용만 일어난다. 그 폭발은 독자의 몸과 마음 속에 있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시인은 오로지 뇌관만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시는 시인이 독자의 시 읽기에 계속 참견을 한다. ‘나는 이렇게 슬프니까, 너도 같이 슬퍼해 줘.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너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거야. 당연히 내가 우는 목소리만큼 너도 고통스러워야지.“ 라고 독자에게 감정을 구걸하거나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독자의 몸속에 있는 감정이나 경험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인 자신의 감정, 정서, 체험을 독자가 수용하고 거기서 체험을 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 경우 자발적이고 강력한 폭발 작용은 없고, 억지 체험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해 정도에서 그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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